국역 학봉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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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속집 2권 소(疏) ●황해도를 순무(巡撫)할 때 올린 상소 계미년(1583, 선조 16)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그 방도가 한 가지가 아니나, 그 근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에는 그에 대한 정사가 한 가지가 아니나, 그 요체는 해가 되는 것을 없애는 데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말을 기르는 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말을 기르는 자가 해가 되는 것을 없애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잘 비유한 것입니다. 말을 기르면서 해가 되는 것을 없애지 아니하면 말이 어떻게 번식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면서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없애지 아니하면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편안할 경우에는 그 나라는 항상 부흥하고,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나라는 항상 망하는 법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이 외람스럽게도 용렬한 몸으로 여러 차례 중한 명을 받아 지금 두 도에서 군민(軍民)들을 순무(巡撫)하고 있는데, 재주와 식견이 천박하고 용렬하여 위로는 성상의 은택을 제대로 선양하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아랫사람들의 실상을 제대로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심지어 하찮은 방비책을 세우는 한 가지 일도 아직 다 살펴보지 못하였습니다. - 원문 빠짐 - 우선 어리석은 신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글로 적어서 진달하고자 합니다.

본도 내에는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물건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어서 보기에 참담하고 마음이 아파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군민들이 편안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군민들의 괴로움이 이와 같으니, 뒷날에 흙덩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부서지는 것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아, 한 백성이 제 살 곳을 잃더라도 오히려 왕정(王政)의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한 도가 살 곳을 잃은데서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한 도가 살 곳을 잃었다는 것도 오히려 차마 말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한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신이 한 도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해로운 일에 대해 대충 진달하겠습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해가 되는 것을 없애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는 방도를 강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첫 번째는 일족(一族)을 침해하여 추징하는 폐단입니다.
아아, 일족에게 추징하는 폐단이 현재의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되었는데, 팔도(八道)가 모두 마찬가지로 본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포흠(逋欠)을 하고 도망치면 그 역(役)이 구족(九族)에게까지 미치고, 구족이 내지 못하면 인보(隣保)에게까지 미치며, 인보들이 내지 못하면 마침내 일족은 죽고 마을은 빈 터만 남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전지(田地)에는 풀과 쑥대만이 자라고 있는데도 그에 대한 부세(賦稅)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군적(軍籍)은 빈 장부가 되어 있는데도 방수(防守)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한 집에서 장정 열 사람의 세금을 내고, 한 사람이 군사 열 사람의 군역을 담당하고 있으니, 군민들이 어찌 포흠하고 유망(流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항상 가엾게 여기고 있으며 묘당(廟堂)에서도 항상 방책을 강구하고는 있습니다만, 끝내 이렇다 할 방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고 있는데, 줄곧 이렇게 하다가는 몇 년도 채 안 되어 현재 남아 있는 백성들조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이 도에 오면서부터 군민들 가운데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자들이 곳곳마다 뜰에 가득 찼는데, 일족이라는 이유로 추징당한 자가 열에 아홉이나 되었으며, 추징을 당한 일족 가운데에는 일족이 아니면서 이웃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추징을 당한 자가 또 절반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울부짖으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비록 간절하였으나, 그들을 구제할 만한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에 단지 한숨과 탄식 속에 밥상을 대해 밥 먹는 것조차 잊을 뿐이니, 다시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신이 한 도내에 유망하는 자들의 숫자를 알아 보고자 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큰 고을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작은 고을도 8, 90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한 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유망하는 자가 몇백 명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한 고을 안에서 8, 90명이 유망하는 것은 적은 숫자가 아닌데, 사람마다 각각 구족(九族)이 있으니 침해를 당한 자들 역시 몇백 명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신이 처음에는, 각 고을마다 반드시 일족에 대한 장부를 비치해 두고 번갈아 가면서 역을 대신 서게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령들이 백성들의 고통은 돌보아 주지 않은 채 이런 일을 전적으로 간사한 아전이나 일족의 우두머리 손에 내맡겨 두고 있습니다. 이에 일족의 멀고 가까움이나 번(番)을 설 차례가 되었는지의 여부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 뇌물이 많으면 가까운 친족을 면제해 주고 번을 설 차례가 된 자의 번을 넘겨 주며,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먼 친족에게도 먼저 추징하고 번을 설 차례가 아닌 자에게 군역을 부과합니다.

그러므로 도망친 집 대신에 다른 사람을 번을 세울 때에는 구족들이 앞다투어 담당 아전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아전은 가만히 앉아서 구족들의 뇌물을 받는데, 그중에서 가장 가난하거나 병든 자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이와 같이 하고 다음번에도 이와 같이 하여 부자는 파산하고 가난한 자는 곧바로 도망칩니다. 잇달아 포흠을 내고 유망하여 열 집에 아홉 집이 텅 비게 된 것은, 비단 세금이 많고 병역이 무거워서일 뿐만이 아니라, 참으로 일족에게 추징하는 것이 고르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수령들이 만약 도망친 집의 일족을 먼저 적어 둔 다음 멀고 가까운 것을 구별하고 번을 설 차례를 참작하여 돌아가면서 역을 대신 서게 하고 균등하게 나누어 징수해서 간사한 아전들로 하여금 손을 쓸 수 없게 한다면, 일족에게 추징하는 폐해가 어찌 이처럼 극도에까지야 이르겠습니까.

신이 또 도망친 집들이 도망친 날짜를 살펴보았더니, 가까운 경우는 4, 5년이나 7, 8년이 되었고, 오래 된 경우는 10여 년이나 수십 년이 되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6, 7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군안(軍案)에 편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일족에게 추징하는 폐단을 없애려면 도망친 지 3년이 지난 자는 모두 군안(軍案)에서 삭제하는 것을 허락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군민들의 애통하고 절박한 해독을 잘 알기 때문에 이런 단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비록 일족에게 추징하는 해독이 심하기는 하지만 일족에게 추징하는 것 또한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만약 3년이 넘은 자를 모두 다 삭제하도록 허락할 경우에는 빠진 인원을 보충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누가 3년 동안 거짓으로 도망하여 군역을 면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다가는 군액(軍額)이 텅 비어 장차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도망친 집의 역을 면제하는 것은 7년으로 한계를 정해서 7년 이상이 된 자는 모두 역을 면제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면 일족에게 추징하는 폐해가 열에 다섯은 제거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또 각 고을로 하여금 도망친 집의 일족을 장부에 적어 한 건은 감영(監營)에 비치하고 한 건은 본 고을에 비치해 두었다가 대신 번을 세울 때 이 장부를 살펴서 번갈아 가면서 번을 세워 편중되게 역을 부과하거나 거듭하여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합니다. 그리고 감사는 법대로 하지 않는 자를 조사해서 정사를 잘하고 잘못한 것을 평가하는 근거로 삼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족이 반드시 그 혜택을 받아 오늘날과 같이 파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도망친 군사가 60세가 넘었을 경우에는 용모나 나이를 직접 살펴보지 않았더라도 우선 병역을 면제하면, 일족에게 추징하는 폐단을 또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군호(軍戶)가 도망치는 폐단에 이르러서는, 채수(債帥)들이 탐학질을 하는 것이 첫 번째 원인이고, 부역이 너무 무거운 것이 두 번째 원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더더욱 유의하여 강구해서 해독을 없애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노제(老除)의 차례가 된 자나 불치병으로 인해 폐인이 된 자에 대해 군역을 면제해 주지 않는 폐단입니다.
무릇 백성들은 성년(成年)이 되면 군역에 종사하다가 60세가 되면 군역을 면제받는 것이 국법입니다. 그런데 말세에 와서는 인심이 간교해져서 호적(戶籍)과 병적(兵籍)에 대부분 사람들이 나이를 늘려 기재하고는 나이가 차지 않았는데도 군역을 면제받는 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근래에는 조정에서 새로 법을 만들어 군안(軍案)을 따르지 않고 반드시 45년 간의 실역(實役)을 마쳤다는 공문(公文)을 상고한 뒤에야 바야흐로 군역을 면제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으니, 군정(軍政)을 중하게 여기고 거짓으로 속이는 것을 막는 방법이 치밀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법을 세우면 그에 따른 폐단이 생겨나게 마련인데, 그 폐해가 이루 다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니, 신이 그에 대해 진달드리겠습니다.

무릇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인구가 번성하지 못하고, 군액(軍額)은 많은데 백성들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법에는 비록 성인이 되어야 군역에 종사한다고 되어 있지만,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군역에 종사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겨우 젖을 떼면서부터 이미 척적(尺籍)에 편성되어 있는 탓에 병역을 정할 때에는 본 나이로 할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5, 6세를 늘려 적어 장정으로 만듭니다. 이는 비단 사람들이 마음이 간교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관리들의 죄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혹 의지할 곳이 없어서 품팔이를 해 먹고 살거나 중이 되어 병역을 도피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성인이 된 뒤에도 군역에 종사하지 않는 자가 많으며, 병역을 정할 즈음에 거짓으로 나이를 늘린 자도 역시 많을 것입니다.

지금 거짓으로 속이는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여 반드시 실역을 마쳤다는 공문을 상고하고 있는데, 이른바 공문이란 것은 처음에 군역을 정한 차첩(差帖)을 말합니다. 관청의 공문서는 아주 긴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햇수가 오래 되면 산실되고 상고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종이쪽 한 장으로 된 공문이겠습니까.

불에 탔거나 찢어졌거나 잃어버렸거나 해서 군사들 가운데 공문을 가지고 있는 자가 열에 네다섯도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보다 앞서 군역을 면제하면서는 실역을 마친 공문을 상고하지 않고 군안(軍案)과 용모(容貌)만 보고서 하였으니, 군사들이 공문을 보관하고 있지 않은 것이 역시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법을 새로 만들어 군안이나 용모를 보고서 면제하지 않고 반드시 공문에 따라서만 면제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백성들을 심하게 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의 체모이겠습니까.

국법이 이와 같으므로 관리들이 눈으로 늙은 것을 보고는 자못 측은한 마음이 들더라도 공문이 없을 경우에는 세초(歲抄)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간사한 아전은 또 그에 따라서 그 사이에 농간을 부려 인정(人情)이나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공문이 있는지의 여부도 묻지 않고 모두 군역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먼 변방 땅에 사는 백성들은 아무리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더라도 자기가 사는 주현(州縣)에 이를 스스로 진달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감사가 있는 곳에 와서 스스로 하소연할 수가 있겠습니까. 허옇게 센 머리털에 등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눈물을 훔치고 울음을 삼키면서 군역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가 그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를 정도입니다.

신이 본도의 경계에 도착한 처음에 도내에 공문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폐단을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공문이 없어서 군역을 면제받지 못한 자가 관청의 문 앞으로 모여들어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면서 직접 살펴보았더니, 나이를 거짓으로 늘린 자 이외에도 64, 5세나 67, 8세, 70여 세 된 자가 많을 경우에는 1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적어도 5, 60명을 밑돌지 않았는데, 그 나머지 머리가 반백인 자는 이 숫자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신은 거짓으로 속이면서 대신 소장을 바치는 폐단이 있는가 의심스러워 갑작스럽게 그들의 사조(四祖)를 물어 보니, 한 명도 틀리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 보게 하였는데, 그 결과 역시 거짓으로 속인 자가 없었습니다.

아아,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우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중요한 일입니다. 공자(孔子)는 이르기를, “늙은이를 편안하게 하라.” 하였고,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나의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여 남의 늙은이까지 늙은이로 대접한다.” 하였으며, 《대학(大學)》에는 이르기를,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우함에 백성들이 효(孝)에 흥기한다.” 하였으며, 삼왕(三王)의 경우는 늙은이를 봉양하는 정사가 있었고, 《예기(禮記)》 왕제(王制)에는 50세가 된 사람은 부역에 나가지 않는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러니 늙은이를 우대하는 어진 마음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는 정사가 국법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담당자가 일을 그르쳐서, 이런 일체의 법을 시행해 백성들을 상처 입은 자처럼 불쌍하게 여기는 전하의 어진 마음으로 하여금 중간에서 가로막혀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불행함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무릇 호적에 거짓으로 쓴 나이를 그대로 믿어 면제해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유독 용모를 살펴보고서 면제해 줄 수는 없단 말입니까. 호적상으로 나이가 많은데도 용모가 쇠하지 않은 자는 참으로 나이를 거짓으로 속인 자입니다만, 호적상으로도 나이가 많고 용모 역시 쇠한 자는 실제로 늙은 자가 아니겠습니까. 믿어야 할 용모는 믿지 않고 반드시 이미 잃어버린 공문만 가지고서 면제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어떤 자는 이르기를, “용모가 비록 쇠했다고 하더라도 실역이 기한에 차지 않았으면 장정 때 한가롭게 논 자이다. 그러니 어찌 실역에 종사한 햇수를 기한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합니다. 아, 이것이 실로 법을 만든 자의 본뜻이라면 이 법을 만든 자는 매우 어질지 못한 자입니다. 무릇 백성들 가운데에는 빌어먹거나 중이 되거나 유적(儒籍)에 끼어들어가 3, 40세가 되어 군역에 충원된 자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실역에 종사한 햇수를 기한으로 삼을 경우, 비록 나이가 7, 80세가 되어서도 군역을 면제받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왕자(王者)가 백성들을 대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이 철저하게 따지고 법령을 치밀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늙은이를 늙은이로 우대하는 어짊을 더욱 미루어 나가 공문이 있는 자는 공문을 따르고, 공문이 없는 자는 용모를 따라 모두 군역을 면제하도록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천지처럼 드넓은 은덕이 온 나라 안에 두루 퍼져서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섬기는 마음이 여기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어찌 노쇠하여 힘이 없는 사람을 군역에 종사하게 한 다음에야 나라의 방위가 튼튼해져서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불치병이 들어 폐인이 된 자의 군역을 면제해 주는 법은 법조문 안에 들어 있어서 참으로 이를 변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수령들이 이 법을 봉행하지 않아 불치병이 든 폐인들로 하여금 군대의 대오를 따라다니다가 구렁에 굴러 떨어지고 들판에서 울부짖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서도 그들을 위해 마음을 쓰지 않고 있으니, 아아, 그 역시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한 번 어사(御史)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억울함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고자, 봉사, 벙어리, 바보, 다리가 없는 자, 팔이 없는 자, 중풍이 든 자, 악질(惡疾)이 든 자, 전신을 가누지 못하는 자, 팔다리의 뼈가 부러진 자 등이 등에 업히거나 말등에 태워져서 뜨락으로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신이 처음에 그들을 보고서는 마음이 상하여 밥을 먹어도 오랫동안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많은 곳을 순시하면서 돌아다님에 미쳐서는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였으니, 마음은 비록 상심되었으나 또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저 수령들 역시 어찌 사람의 마음이 없겠습니까. 생각건대 그들도 필시 늘 보는 데에 익숙해져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 조처를 취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늙은 사람의 군역을 면제하는 일은 수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병든 자의 군역을 면제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는 본디 정해진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담당 아전을 곤장치고 수령들을 독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일이 감사에게 보고하고서 군역을 면제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감사 역시 측은한 마음을 내어 보고하는 바에 따라서 즉시 직접 살펴보았으니, 장차 그들을 종류별로 모아 계문(啓聞)할 것입니다. 다만 사람의 눈과 귀는 한계가 있고 질병은 무궁하므로 신과 같이 어둡고 용렬한 자가 대충대충 지나치면서 눈으로 본 것은 십분의 일에 불과할 것이니, 어찌 능히 두루 알아서 샅샅이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병든 자의 군역을 면제하는 법을 신명(伸明)하여 팔도의 감사와 병사(兵使)에게 교서를 내려 수령들을 엄하게 신칙해서 그들 모두의 군역을 면제시키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쓰러져 넘어진 전하의 동포들이 백성들을 상처입은 자처럼 여기는 전하의 어진 은덕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이 유방(留防)하거나 부방(赴防)하는 데 따른 폐단입니다.
이 도의 군사는, 수군의 경우는 각 진(鎭)과 포(浦)에서 유방하는 데 군역을 하는 것이 균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군의 경우는 한 해는 상번(上番)하고 한 해는 부방(赴防)하는데, 군역을 하는 것이 역시 균일하지 않습니다. 신이 그에 대해 하나하나 진달드려 보겠습니다.

이른바 부방이라고 하는 것은 평안도의 수상(水上)과 수하(水下)에 나아가 겨울철에 방수(防戍)하는 군졸이 그들입니다. 압록강 가는 토병(土兵)들이 얼마 없어서 얼음이 얼어 강 양쪽이 합해지면 방수하는 것이 더욱 급합니다. 그러므로 매년 늦가을이면 정위(定衛)와 별위(別衛), 갑병(甲兵)과 기병(騎兵)을 뽑아 보내는데, 이들을 2운(運)으로 나누어 한 운은 10월 1일부터 방소(防所)에 도착해서 12월 16일에 번(番)에서 풀려나고, 한 운은 12월 16일에 방소에 도착해서 다음해 2월 그믐에 번에서 풀려나, 앞 운과 뒤 운이 모두 각각 75일 동안 번을 섭니다.

이른바 수상이란 것은 위원(渭原), 벽동(碧潼), 이산(理山), 강계(江界) 등지의 지역에 있는 진보(鎭堡)가 그것이고, 이른바 수하란 것은 삭주(朔州), 의주(義州) 이하의 지역에 있는 진보가 그것입니다. 수상의 지역은 본도에서의 거리가 먼 곳은 25일 일정이고 가까운 곳은 20일 일정이며, 수하의 지역은 먼 곳은 15일 일정이고 가까운 곳은 13일 일정입니다. 이 지역은 산은 높고 물은 험하여 평상시에도 사람이나 말이 다니기가 어려운데, 엄동설한에는 눈과 얼음으로 길이 막히고 매서운 추위에 살갗이 갈라져 터지니, 먼 변방 지역을 오가는 그들의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이 구사일생으로 겨우 방소(防所)에 도착하면 변장(邊將)과 토병(土兵)들이 번군(番軍)들을 손가락질하면서 기화(奇貨)로 여겨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토병의 경우에는 변장에게 청탁해서 그의 집으로 나누어 배속받고서는 으레 땔나무 값으로 목면 3필을 받습니다. 그리고 식량 값, 말에게 먹이는 꼴 값, 반찬 값으로 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목면 5, 6필을 마련하지 않으면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변장의 경우에는 그들이 방소에 도착하는 날이면 으레 목면 1필, 쌀 한 말, 소금 석 되, 종이 한 묶음, 약간의 소 힘줄ㆍ아교ㆍ깃털ㆍ실 등을 받으며, 군장(軍裝)에 탈이 있으면 으레 1필을 받으며, 혹시라도 방수할 기일에 도달하지 못하면 2일마다 목면 1필을 받으며, 그 나머지 산역(山役)을 빠지거나 순찰을 빼먹으면 일에 따라서 그에 대한 죗값을 받는데 이런 따위가 부지기수입니다. 군졸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목면 6필을 바치면 방소에서 빠져나와 주인으로 정한 집에 편히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간 기마(騎馬)와 복마(卜馬)는 싸움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변장들이 이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사사로이 행차할 때 짐을 실어 나르는 데 이것을 이용하며, 사신(使臣)을 접대하면서 짐을 싣는 데 이것을 이용합니다. 이에 날마다 길을 오가느라 편하게 쉴 겨를이 없는 탓에 끝내는 뼛골만 앙상하게 되어 쓰러져 죽고 마니,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자가 많습니다.

방소로 가는 길이 먼 것이 이미 저와 같이 고생스러운데 침해하여 징수하는 폐해가 또 이와 같으므로, 정군(正軍)이 된 자가 첩호(貼戶)에게 거두어들이는 것 역시 끝이 없어서 한 번 번을 서는 값이 적어도 7, 8필을 밑돌지 않고, 많을 경우에는 10여 필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에 한 차례 부방하고 나면 정군에 딸린 첩호들은 모두 집이 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부방하는 가운데에서도 갑사(甲士)의 경우는 네 집의 첩호가 있으며 또 동거솔(同居率)이 있는 데다가 녹봉이 있어서 군역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자는 정위(定衛)와 별위(別衛)입니다. 이들은 대개 한 차례 부방하고 한 차례 상번(上番)하는 것은 갑사들과 차이가 없으나, 정위와 별위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첩호가 없이 단지 동거솔 2인만 주며, 동거솔이 없을 경우에는 호별(戶別) 2인을 지급해 주는데, 이른바 동거솔이란 것은 바로 아들이나 사위, 동생, 조카 등입니다. 아들, 사위, 동생, 조카들은 비록 그 명목은 동거솔이나 한 사람의 몸이나 마찬가지니, 어찌 능히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값을 내라고 책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는 단신(單身)으로 입역(立役)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한 도 가운데 갑사는 집안이 망하는 자가 적은 데 비해 정위와 별위의 경우는 모두 생업을 잃고 맙니다.

이들은 똑같이 취재(取才)한 군사인데도 그 고통스러움과 편안함이 고르지 않은 것이 이처럼 현격하게 다른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신이 그 이유를 두루 물어 보았더니, ‘당초에 정위와 별위는 단지 상번만 하고 부방은 하지 않았으므로 첩호가 없더라도 오히려 지탱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상번을 하는 이외에 또 부방을 하고 있는데도 보졸(保卒)을 주는 것은 예전과 같으므로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병정(兵政)이 몹시 공평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병(騎兵)의 경우에는 비록 첩호가 있기는 하지만 상번하고 부방하는 고통이 방수하는 군졸에 비하여 몇 배는 되는데, 해마다 마가(馬價)로 반 필을 내야 하니 그 군역이 무거운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기병으로 호(戶)를 이룬 자들은 얼마 안 되는데도 유망하는 자가 가장 많은 것이니, 이들에 대해서는 깊이 마음을 써야 합니다.

신이 삼가 그것을 구제하는 방도를 생각해 보았으나, 백 번을 생각해 보아도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대개 숙위(宿衛)는 폐해서는 안 되고, 부방(赴防)도 폐해서는 안 되며, 마가(馬價)도 폐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폐해서는 안 되니, 장차 그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앉아서 보면서도 어찌하면 구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릇 방수(防守)하는 데 따른 고통과 가는 길이 먼 것은 아주 옛날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성대하였던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백성들이 원망하면서 유망하는 걱정이 없이 군사의 위엄이 장하고 방비가 견고하였습니다. 그것은 비단 깊고도 두터운 임금의 어짊과 은택이 백성들의 마음에 흡족해서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정에는 기강이 있어서 상벌이 마땅하였으므로 수령과 변장들이 백성들을 어루만져 구휼해 주는 방도를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면서 백성들의 일에 대해 걱정하고 변경의 방비에 대해 마음을 써서, 간절한 내용의 교서와 외침을 방비하는 데 대한 경계를 한밤중에도 일찍이 소홀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강이 서지 않고 상벌이 밝지 않은 탓에 대궐에서 내리는 명령이 조정에서 행해지지 않고, 조정에서 내리는 명령이 사방에서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머리가 팔다리를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팔다리가 뼈마디를 통제하지 못하여, 정신과 기맥이 어느 한 곳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수령과 변장들이 위에서 내리는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지 않고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군호(軍戶)들을 보살펴 주어 세금을 면제해 주는 법이 법전에 실려 있는데도 수령들 가운데 이를 봉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에 자신은 변방 지역에 나아가서 무기를 손에 들고 방수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데도 처자식들은 집에 있으면서 과중하게 부과하는 부역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번에서 풀려나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옛집에 돌아와 보면 집안은 썰렁하고 처자식들은 굶주리고 있어서 장차 겨울을 날 계책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또 그에 따라서 빨리 내라고 독촉하면서 꿩과 노루를 잡으러 사냥 나가라느니, 쾌포(快脯)와 편포(片脯)를 뜨라느니, 사슴 꼬리와 사슴 혓바닥을 바치라느니, 호랑이 가죽과 사슴 가죽을 바치라느니, 군기(軍器)를 수리하라느니, 방물(方物)을 무역하라느니, 일족의 번가(番價)를 내라느니 하면서 육지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군호(軍戶)에게 책임지워서 내게 합니다. 이에 몽둥이를 들고 그물을 지고 오래도록 사냥을 나가는데, 혹시라도 사냥을 빠질 경우에는 으레 포목을 징수합니다. 본도는 목화(木花)가 생산되지 않아 한 자짜리 베가 귀하기가 금싸라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울 상인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는 말에다가 포목을 싣고 내려와 그 틈을 타고 값을 올려받아 반 필의 포목 값을 반드시 쌀 20여 말이나 받고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군호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부방(赴防)하는 날에 미쳐서는 변장들이 용이 움켜잡고 호랑이가 낚아채듯이 멋대로 괴롭히며 뜯어 먹기를 앞서 진달드린 바와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군호들이 몰락해서 도망쳐 떠돌아다녀 단지 빈 장부만 남아 있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조정에 기강이 서서 상하가 모두 법을 봉행하여 수령들이 가렴주구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고 변장들이 멋대로 괴롭히는 짓을 하지 않게 한다면, 오늘날의 군호들이 반드시 살 곳을 잃고 도망쳐 떠도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제(齊) 나라의 정사가 중간에 쇠해졌는데, 위왕(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팽형(烹刑)에 처하라는 명령을 한 번 거행하자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그리고 당(唐) 나라의 황실이 쇠해져 채수(債帥)의 풍조를 금하지 못하자, 나라가 이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벌이 분명하냐 분명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기강이 서거나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한(漢) 나라의 신하 최식(崔寔)이 말하기를, “덕교(德敎)라는 것은 평안할 때 다스리는 쌀밥과 고기반찬이고, 형벌(刑罰)이란 것은 어지러울 때 다스리는 약(藥)과 침(針)입니다. 현재 말은 재갈이 벗겨지고 마부는 고삐를 놓쳐서 말은 날뛰고 있고 황로(皇路)는 험난하니,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고 끌채를 매어서 제압하여야지, 어느 겨를에 방울을 울리고 음악을 울리겠습니까.”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오늘날의 상황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현재 백성들을 기르고 사람들을 거느리는 자들이 비록 발호하여 제압하기 어려운 걱정은 없으나, 국법을 무시하여 거리끼는 바가 없어서 늦추고 당기면서 조종하기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한(漢) 나라 때보다도 더 심합니다. 예로부터 쇠미해진 말세에는 쇠퇴하고 게을러져 정치와 형벌에 법도가 없게 된 다음에 사람들이 국법을 우롱하며, 사람들이 국법을 우롱하게 되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흙덩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부서져서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최식의 말이 저와 같았던 것이니, 덕교를 뒤로 하고 형벌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을 위한 계책은 역시 먼저 상벌을 분명하게 하여 기강을 세우고, 기강을 세워서 인심을 맑게 하여 사람마다 모두 국법이 두렵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선왕(先王)들이 행하였던 백성들을 보호하는 어진 정사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에는 성상의 어진 마음과 어진 소문이 아무리 사방에 퍼져 나간다고 하더라도 수령들이 가렴주구하는 것은 예전과 같고, 변장들이 탐학스럽게 구는 것이 예전과 같을 것이니,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수군(水軍)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4정(丁)이 1호(戶)가 되는데, 1년에 4개월 안에 번갈아 가면서 서로 교대하면 1년에 한 차례 번을 서게 됩니다. 그런 데다가 방소(防所)마저 멀지 않아서 멀 경우라도 3, 4일 일정이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역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헐해서 고생하고 있는 양남(兩南)의 수군들과는 참으로 같지 않습니다.

다만 역을 하는 것이 고르지 않아 달마다 물선(物膳)을 진상하라느니, 잡초를 베라느니, 궁궐을 조성하라느니, 재목감을 벌채하라느니, 전선(戰船)을 만들라느니, 해도(海島)에서 말몰이를 하라느니, 목장에서 말의 꼴을 베라느니, 산대(山臺)를 만드는 데 부역하라느니, 개성(開城)에 가서 방회(螃灰)하라느니, 와서(瓦署)에 가서 토목공사를 하라느니, 군기시(軍器寺)의 탄군(炭軍)이 되라느니, 장성(長城)의 가포(價布)를 내라느니 하는 등의 요역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수군들에게 떠맡기고 있으니, 수군들의 고통이 여기에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첨사(僉使)와 만호(萬戶) 등은 침해하여 긁어들이면서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이른바 번가(番價)라는 것은 방수하는 자를 사사로이 놓아 주고 그 값을 징수하는 것인데, 한 달 동안 풀어 주는 값이 2필에 지나지 않는데도 반드시 그 배를 거두며, 진무(鎭撫) 등은 또 각가(脚價)를 내도록 책임지웁니다. 가난하고 잔약한 수군들이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곡식도 오히려 갑자기 마련하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5, 6필이나 되는 포를 어디에서 마련해 내겠습니까. 이에 부득이 전지를 전당 잡히고 소를 팔아서 그 역에 응합니다. 금년에도 이와 같이 하고 내년에도 또 이와 같이 하여 전지나 재물 등 팔 만한 것을 다 팔아치운 다음에는 온 집안을 데리고 멀리 줄행랑을 쳐서 마침내는 구렁에 굴러 떨어져 죽고 맙니다.

육물(六物)이라고 하는 것은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에서 쓰는 여러 가지 물품을 말하는데, 관가에서 마련하기가 어려우므로 수군들로 하여금 이를 마련해 내게 하고는 변장들이 이를 인하여 폐단을 만들어 냅니다. 가령 한 번(番)이 100호(戶)이면 한 호가 4정(丁)이니 총 수가 400명인데, 매 1인당 반 필의 포를 거두니 총 숫자가 200필입니다. 이를 세 번을 통틀어서 계산하면 사람 숫자는 1200명이니 그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포목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들의 심장 살점을 가져다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살찌우는 자본으로 삼고, 정작 필요한 물품들은 방치해 둔 채 따지지조차 않고 있습니다.

격기가[役只價]라고 하는 것은, 변장들을 지공(支供)하는 것을 수군들에게 마련하도록 책임지워 1인당 포목 1필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으로 정해진 이외에 아문(衙門)의 족속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술과 음식의 비용을 모두 수군들에게서 거두어들입니다.

헐역가(歇役價)라고 하는 것은, 염조군(鹽租軍), 후망군(候望軍), 능로군(能櫓軍), 대량군(代糧軍)의 경우는 여러 군역 가운데 가장 헐한 역이므로 반드시 목면 1, 2필을 바친 다음에야 이 역에 차임됩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앞다투어 포목을 바치고 헐한 역에 차임되기를 도모하고, 가난한 자들은 바칠 만한 물품이 없어서 오래도록 고된 역에 차임되니, 고되고 헐함이 고르지 않아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연례조(年例租)라고 하는 것은, 변장들에게 줄 요미(料米)를 준비하는 군사를 말합니다. 이는 달마다 4명씩 인원을 정하여 한 달에 내기로 정한 것이 처음에는 조(租) 2곡(斛)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으레 백미로 15두를 받으며, 심한 경우에는 20여 두를 받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이 갖가지로 침해하여 징수하는 길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수군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여 서로 잇달아서 유망(流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변장들이 긁어들이는 폐단을 제거하지 않고, 방비하는 이외의 여러 가지 역을 줄이지 않는다면, 수군들은 영원히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무비(武備)를 해이하게 하는 폐단입니다.
본도는 남쪽으로는 해구(海寇)들이 오가는 양호(兩湖) 지방과 길이 통해 있고, 북쪽으로는 수적(水賊)들이 쳐들어오는 통로인 요동(遼東)과 발해(渤海) 지역에 접해 있습니다. 이에 방수(防戍)의 중함이 다른 도에 비해서는 조금은 헐하나, 수로(水路)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탓에 왜노(倭奴)들이 불시에 출몰합니다. 이는 전대의 역사에서 상고해 보더라도 이들이 쳐들어오는 변란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선 당장 걱정이 없다고 해서 방비책을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6진(鎭)과 7포(浦)가 바둑돌처럼 해변에 펼쳐져 있고 유방(留防)하는 육군과 수군 역시 적지 않으니, 전부터 방비책을 엄하게 세웠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백 년 동안이나 태평을 누린 탓에 마침내는 이 도는 방비를 엉성하게 해도 되는 지역이라고 여기고 병사들을 모두 뽑아 사부군(斜付軍)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유방하고 있는 군사는 약하고 파리한 군사 수십 명만이 겨우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변장들은 오래도록 연로의 행차에 나가 있어서 군영(軍營)에 머물러 있는 때가 없습니다. 이에 조그마한 외로운 성이 장수도 없고 군사도 없이 멀리 외따로 떨어진 바닷가에 덩그러니 홀로 있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에 해적선 한두 척이 빠른 속도로 쳐들어온다면 속수무책이어서 가만히 앉은 채로 함락당하고 말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이미 걱정할 것이 없는 지역으로 치부하고 있으므로 감사나 변장들 역시 방비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있는 탓에 무기는 병정놀이에나 쓰는 것과 같고 사졸들은 활시위를 당기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며, 장리(將吏)들은 대부분이 채수(債帥)들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이른바 무기가 날카롭지 않으면 그 병졸들을 적에게 바치게 되고, 군사들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그 장수를 적에게 바치게 되고, 장수가 병법을 모르면 그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게 된다는 격입니다.

신이 연해(沿海)를 순시하면서 변경의 일에 대해 두루 물어 보았더니, 중국인인지 왜인인지 구별이 안 되는 도적들이 바다를 오가면서 날마다 약탈을 일삼고 있는데, 풍천(豐川)의 초도(椒島), 장연(長淵)의 백령도(白翎島)ㆍ대청도(大靑島)ㆍ소청도(小靑島), 해주(海州)의 연평도(延平島) 등지가 도적들의 소굴이 되어, 어선(漁船)이나 상선(商船)이 그들에게 약탈당하였으며, 이들을 수색하는 배 역시 공격당해 부서졌습니다. 이와 같은 변고가 한 해 사이에 한두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변장들은 이런 사실을 숨기기만 한 채 보고하지 않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으면서 이들을 섬멸할 계책을 세우지 않고 있으니, 더욱더 통분스럽습니다.

이른바 수적(水賊)이라는 것은 공격을 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진 자들이 아니고, 단지 약한 활과 무딘 화살에다가 돌멩이나 나무 몽둥이를 무기로 삼고 있는 군사들입니다. 그러니 변장으로 있는 자가 망보기를 삼가서 하고 병선(兵船)을 정제해 두고서 그들이 여러 섬에 와서 정박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사방에서 엄습하면, 포획하기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마음대로 오가도록 내버려 둔 채 금지하지 않고 있으니, 해적들이 여러 섬에 들락날락하면서 목장에서 기르는 말을 사냥하고 배를 만들 재목을 벌채하기를 일삼는 것은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신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긴요하지 않은 곳에 배속시킨 자들은 줄이고 줄일 수 있는 요역은 줄여서, 그들로 하여금 방수(防守)에 전념하도록 하여 전처럼 진영을 비워 두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예를 훈련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감사가 신명(申明)하여 거행해 군사가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하거나 무기가 날카롭지 않을 경우에는 중한 자는 파출(罷黜)하고 가벼운 자는 곤장을 치고 유시하되, 한결같이 군령(軍令)대로 종사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군사들이 어찌 훈련을 하지 않는 자가 있겠으며, 무기가 어찌 날카롭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 다음에야 수적들을 체포할 수 있고 섬오랑캐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하는 것처럼 하면서 뒷날에 적을 꺾는 성과를 바란다면, 신은 아마도 맹자가 이른 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한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다섯 번째는 여외(旅外)의 군사를 헛되이 늘리는 폐단입니다.
무릇 군사는 정예롭게 하기를 힘쓰고 많게 하기를 힘쓰지 않는 것이 옛날의 좋은 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안에는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있고 밖에는 진을 지키는 병사가 있습니다. 조종조 이래로 제위(諸衛)의 번(番)을 서고 쉬는 것과 관방(關防)의 긴급함과 헐함을 적당히 헤아려서 정원 수를 이미 정하였는데, 소홀한 걱정이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계축년(1553, 명종 8)에 군적(軍籍)을 작성할 때 수령들이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머슴을 살거나 빌어먹는 자들까지 모두 끌어모아 여정(餘丁)의 숫자를 작성해 병조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시에 병조 판서로 있던 자가 뒷날의 걱정은 생각하지 않고 이들을 묶어서 척적(尺籍)에 편입시키고는 여외(旅外)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군적의 작성을 마치기도 전에 이들이 모두 다 유망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각 고을이 골수에까지 병이 들어 일족(一族)과 절린(切隣)에게 징발하는 폐단이 이로부터 더욱더 심해졌습니다. 이것은 명분은 비록 군사의 숫자를 늘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원 수를 감소시킨 것으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그에 따른 병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거하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신이 이 도에 온 이래로 군사의 정원 수를 알고자 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현재 있는 자와 유망한 자와 충정(充定)하지 못한 군사의 숫자를 열거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갑술년(1574, 선조 7)에 충정하지 못한 자가 - 원문 빠짐 - 여 명이나 되었으며, 유망한 자는 - 원문 빠짐 - 여 명이나 되었으며, 현재 있는 자라고 하는 것도 역시 대부분 근거지가 없어 조석간도 보존하기 어려운 자들이었습니다. 호구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잔폐되는데도 군사의 정원 수는 예전에 비해서 더욱 늘어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이겠습니까.

갑술년 이후로는 또 여외를 실액(實額)으로 삼아, 지금은 비록 여외라는 명칭은 없어졌지만 여외의 숫자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이들의 숫자를 줄여서 단지 원액(元額)만을 남겨 두고, 현재 남아 있는 여외의 군사를 실액에 충정한다면, 방비하는 데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고 군민들을 침해하여 해독을 끼치는 폐단은 하루 아침에 제거될 것입니다.

신이 전에 북도(北道)에서 순무(巡撫)하였을 적에도 역시 이 폐단에 대해 진달드렸는데, 조정에서 채록(採錄)하지 않았으니, 지금 또다시 진달드리는 것이 몹시 번독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도가 도탄에 빠진 해독을 목격하고는 진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꼴을 베는 사람에게도 물어 보는 어짊을 드리워서 이를 해사(該司)에 내려 상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신만의 다행이 아니라 바로 한 도의 다행이 될 것이며, 한 도만의 다행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공부(貢賦)를 상정(詳定)하여 부역을 면제하지 않는 데 따른 폐단입니다.
우리나라의 법은 토질에 따라서 공물을 내게 하지 않고 있는데, 그에 따른 폐단이 생긴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공안(貢案)을 바꾸기를 청하고 있으니, 신이 덧붙여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이곳에 와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정사에 대해 들었는데, 이른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부역을 면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대개 공부(貢賦)가 비록 많기는 하지만 반드시 정해진 숫자가 있으며, 전결(田結)은 비록 많고 적음이 같지 않으나 역시 각자 정해진 숫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각 고을에서 먼저 공부가 얼마인지 전결이 얼마인지를 헤아린 다음, 바치는 물품의 귀천과 값의 경중 및 전결을 나누어 준 숫자를 잘 헤아려서 귀천과 경중의 비율에 따라서 차등을 두어 영구히 역(役)을 정하여 다시는 고치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백성들이 미리 진공(進貢)할 물품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곳의 토산(土産)이면 시기에 맞추어 채집하거나 잡고, 먼 데서 생산되는 것이면 미리 사들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는 창졸간에 마련하기 어려운 걱정이 없을 것이고, 관가에서는 뒤늦게 내는 데 따른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니, 공사(公私)간에 양쪽 다 편할 것이며, 일 역시 간단할 것입니다.

신이 배천군(白川郡)에 도착해서 그곳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을 즐기고 있는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그곳의 부로(父老)들이 말하기를, “5, 6년 전에 수령으로 온 분이 부역을 면제하는 법을 시행하였으므로, 그때부터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할 수 있었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다른 고을에 물어 보았더니, 해주(海州)나 재령(載寧) 등의 고을에서도 역시 이 법을 시행하고 있었으며, 다른 도에서도 시행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실로 공물을 거두는 법에 있어서 지극히 편하고 지극히 간단한 방법입니다.

옛날에 송(宋) 나라의 주자(朱子)가 숭안(崇安)에서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자, 송 나라 조정에서 그 법을 미루어 시행해 천하 만세가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지금 만약 이 법을 국내에서 모두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받는 은택이 반드시 클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시험 삼아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일곱 번째는 - 이하 원문 빠짐 -

[주D-001]포흠(逋欠) : 관가의 물품이나 곡식 등을 축내거나, 세금이나 환곡(還穀) 등을 내지 않거나 병역을 피하여 도망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2]채수(債帥) : 뇌물을 바치고 장수가 된 사람을 기롱하여 이르는 말이다.
[주D-003]노제(老除) : 늙어서 병역이 면제되는 것을 말한다.
[주D-004]척적(尺籍) : 민호(民戶)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군정(軍丁)의 숫자를 알맞게 배정하여 만든 호적이나 군적을 말한다.
[주D-005]세초(歲抄) : 해마다 6월과 12월에 군적을 정리하여 군역을 면제하거나 결원을 보충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6]인정(人情) : 관청에 구실을 바칠 때 아전들에게 수수료 조로 주기 위하여 덧붙여 내는 것을 말한다.
[주D-007]첩호(貼戶) : 첩군호(貼軍戶)로, 정군(正軍)에게 딸려 있는 호구(戶口)를 말한다.
[주D-008]동거솔(同居率) : 정군(正軍)이 되는 호수(戶首)와 한 호를 이루며 함께 사는 장정을 말한다.
[주D-009]호별(戶別) : 호수와 함께 살지는 아니하고 하나의 세대를 따로 이루고 사는 장정을 말한다.
[주D-010]보졸(保卒) : 이 부분의 소주에, “초본에는 ‘보솔(保率)’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11]쾌포(快脯)와 편포(片脯) : 쾌포는 고기를 얇게 저며서 꼬챙이에 꿰어 말린 포이고, 편포는 칼로 짓이겨서 얇게 펴서 말린 포이다.
[주D-012]옛날에 …… 다스려졌습니다 : 제(齊) 나라의 아대부(阿大夫)가 탐학스런 짓을 하면서도 위왕(威王)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쳐 정사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게 하자, 위왕이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임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명예를 구하였다는 이유로 아대부를 팽형(烹刑)에 처하였다. 그러자 뭇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제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주D-013]산대(山臺) : 산대놀음을 하기 위하여 길가나 산기슭에 임시로 만들어 놓는 무대(舞臺)를 말한다. 산대놀음은 나례(儺禮)를 모방하여 궁중에서 행하던 가면극(假面劇)으로, 특히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이를 상연하였다.
[주D-014]방회(螃灰) : 방회(傍灰)의 잘못인 듯하다. 방회(傍灰)는 빈 틈 사이에 회(灰)를 채워 넣어 튼튼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5]각가(脚價) : 각부(脚夫), 곧 걸어다니면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에게 심부름 값으로 주는 것을 말한다.
[주D-016]마침내 : 이 부분이 원문에는 ‘졸(卒)’로 되어 있는데, 소주에, “초본에는 ‘솔(率)’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17]격기가[役只價] :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기 위한 값으로 내는 것을 말한다.
[주D-018]열거하게 : 이 부분이 원문에는 ‘개(開)’로 되어 있는데, 그 두주(頭註)에, “‘개(開)’는 아마도 ‘열(閱)’일 듯하다.” 하였다. 번역은 두주에 의거하여 하였다.

학봉속집 2권 소(疏) ●노릉(魯陵)을 복위(復位)시키고, 사육신(死六臣)을 복작(復爵)시키며, 종친(宗親)을 서용(敍用)하기를 청한 상소(上疏)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신(臣) 김성일(金誠一)은 참으로 황공하게도 머리를 조아려서 두 번 절하고 주상 전하께 삼가 말씀 올립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땅이 편안함을 잃어, 나라가 망하는 요사함과 급박하게 닥치는 재앙이 한꺼번에 겹쳐 나타났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는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여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야(朝野)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마디 말을 올리거나 한 가지 일에 대해 진달한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초야에 있는 사람이 기휘(忌諱)하지 않고 올린 말이 있었으나, 전하께서는 문득 잘난 체하는 기색을 드러내면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 엄하게 꾸짖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거짓으로 구언한다는 이름을 빌려서 간언(諫言)을 막는 실제를 보인 것입니다.

신은 형편없는 자질을 가진 몸으로 사국(史局)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매번 임금의 거조를 기록할 적마다 붓을 잡고서 개탄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신에게 지금 부족하나마 한 가지 견해가 있는바, 만 번 죽는 형벌도 피하지 않고 전하께 아뢰고자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낮은 직위에 있으면서 중대한 말을 하여 직위에 벗어난 짓을 한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만대의 대의(大義)에 관계되고 국가의 흥망(興亡)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어찌 한갓 언론의 책임을 맡은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말고삐를 잡는 천한 마부나 악기나 다루는 눈먼 소경도 모두 풍자하여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은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중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할 말을 하고서 형벌을 받아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할 말을 하지 않아서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혁명(革命)을 일으켜 전 임금을 내치는 거조를 어찌 성인(聖人)이 하고자 하는 바이겠습니까. 이는 실로 부득이하여 한때의 권도(權道)를 행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마음씀과 일을 행함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하여 하늘의 뜻에 호응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순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하로서 임금을 치고서도 은(殷) 나라의 탕왕(湯王)과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은 임금 자리를 잃지 않았으며, 임금을 폐위시켜 내쫓고서도 은 나라의 이윤(伊尹)과 한(漢) 나라의 곽광(霍光)은 충신 됨을 잃지 않았는바, 만대가 흐른 뒤에도 누가 감히 그 사이에 의심을 두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뛰어난 무략(武略)으로 어지러움을 바로잡는 자질을 가진 분으로서, 노산군(魯山君)이 어린 나이로 임금 자리에 있을 때 권신(權臣)들이 서로 알력을 부려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성조(聖祖)께서 무력으로 평정한 공이 아니었다면 백 년을 지켜 온 조종들의 왕업이 장차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노산군은 임금 자리를 맡아 지켜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또 천명이 돌아갈 바가 있음에 순응하여, 하루 아침에 왕위를 선양해 공손하게 물려주는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조께서 아무리 필부(匹夫)의 뜻을 따라 자장(子臧)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였던들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임금 자리가 이미 정해진 다음에도 노산군은 오히려 상왕(上王)이라는 호칭을 누려 양궁(兩宮) 사이에 정의(情意)가 막히지 않고 통하였으니,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서로 임금 자리를 주고받은 것에 비해 보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당시의 신하들이 성조의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고, 또 때에 맞게 권도를 쓰는 도리에 어두웠던 탓에, 앞다투어 음모를 꾸며 큰 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화란의 근본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직을 안정시킬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폐위시켜 추방시키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성조의 본마음이겠습니까. 탕왕과 무왕의 마음으로써 이윤과 곽광의 일을 행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가 다시 안정되었으며, 천명이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는바, 그 공은 조종들에게 빛나고 그 사업은 후손들에게 드리워졌습니다. 성조의 큰 공렬이 이에 이르러서 더욱 빛나니, 말할 만한 부끄러운 덕이 뭐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노산군의 왕위는 그 당시에 있어서는 오히려 폐위시킬 만하였으나, 후세에 있어서는 역시 복위시키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큰 화란이 겨우 평정된 탓에 뭇사람들의 의심이 풀리지 않아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이 몹시도 급하였는바, 그 당시에 참으로 크게 권한을 행사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지 않았다면,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폐위시킬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째서 복위시키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노산군이 비록 나이가 어렸던 탓에 짊어진 짐을 감당하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종묘사직에 죄를 지은 임금과 비교해 볼 적에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선양하는 거조가 있었던 것이며, 계속해서 또 상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높였던 것으로, 성조께서 종시토록 잘 보전해 주고자 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신하들이 비록 화란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자취가 있기는 하나, 이것이 어찌 나이 어린 노산군이 참여해 들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종묘사직을 위한 큰 계책이 급하고, 또 신료들이 요청한 바를 위하여 마침내 노산군으로 하여금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게 하고 말았는바, 성조께서는 참으로 마음속으로 측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미 제사를 받들 후사(後嗣)가 없고 또 반장(返葬)을 하지도 못하여 1백여 년 동안이나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강가를 떠도는 혼령이 되었으니,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국가의 의리에 있어서 어찌 몹시도 상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제왕(帝王)의 도리는 상(常)도 있고 변(變)도 있는 법으로, 상이란 것은 천하의 대경(大經)이고, 변이란 것은 천하의 대권(大權)입니다. 대권이 아니면 한때의 민명(民命)이 서지 못하고 대경이 아니면 만대의 대의(大義)가 밝아지지 않는 법이니,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말하는 자들이 한갓 형적(形跡)만을 가지고 의심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조종들의 마음과 제왕의 효를 아는 것이겠습니까.

성조께서는 한때의 대권을 행사하였으니, 전하께서 만대의 대의를 거행한다면, 성조의 마음이 바로 전하의 마음인 것입니다. 왕위를 폐위시킨 것이 이미 사사로운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었는데, 왕위를 복위시키는 것이 어찌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은혜와 의리가 나란히 행해지고 대경과 대권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므로, 성인께서 하신 바가 천리(天理)의 공정함과 인심(人心)의 바름이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건문제(建文帝)가 실정(失政)을 하자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대의(大義)로써 멸친(滅親)하였는데, 화란을 평정한 날에는 오히려 천자를 장사 지내는 예로써 장사 지내고 다시는 폄출(貶黜)하는 글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홍치(弘治) 연간에 이르러서 소인(蘇人) 양순길(楊循吉)이 건문제에게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였는데, 효종 황제(孝宗皇帝)가 양순길을 죄주지 않고 예부(禮部)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신하들이 용렬하고 무식한 탓에 그 의논을 마침내 기각하였습니다. 이에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지금까지도 한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경태제(景泰帝)에 이르러서는 영종 황제(英宗皇帝)에게 죄를 지었는바, 영종 황제가 북쪽을 순수(巡狩)할 적에는 오로지 황제의 자리만을 탐내어 어가(御駕)를 모시고 올 뜻이 없었고, 어가가 돌아오게 되어서는 남쪽에다가 유폐시킨 다음 이미 세워 놓았던 세자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니 천순(天順) 연간에 이르러서 영종이 황제 자리에 다시 오르던 날 그의 죄를 성토하면서 폐위시킨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헌종 황제(憲宗皇帝)는 경태제가 사직에 공이 있다고 하여 곧바로 작위를 회복시켰으며, 또 휘호(徽號)를 올려 높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에는 이론이 없었으며 후세에는 그 효성을 칭송하여, 끝내 아버지가 폐위시킨 것을 자식이 복위시킨 것임을 의심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참으로 영종 황제가 폐위시킨 것은 경태제의 죄를 성토해서이고, 헌종 황제가 복위시킨 것은 경태제의 공을 녹공(錄功)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공과 죄가 서로 가리지 않고, 은혜와 의리가 각각 마땅함을 얻었으니, 또 어찌 피차간에 말할 만한 혐의스러운 점이 있겠습니까.

지금 노산군에게는 비록 경태제와 같은 공은 없지만, 또한 경태제와 같은 죄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조께서 노산군을 폐위시켜 추방시키는 거조를 한 것은 단지 종사의 큰 계책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이지, 실로 노산군의 죄를 성토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성조께서 이미 노산군을 죄주려는 마음이 없었으니, 오늘날에 복위시키는 거조는 참으로 그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멸망당한 나라를 부흥시켜 주고 끊어진 집안을 이어 주는 것은 제왕의 인(仁)이다. 더구나 국가는 노산군에 대해서 친한 이를 친하게 대우하여야 하는 큰 의리가 있는데, 차마 제사를 받들 후손이 끊어졌는데도 돌보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산군의 왕위는 비록 복위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사는 결단코 세워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노산군의 왕위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노산군의 후사를 이어 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노산군에 대해서 아무리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그래도 한 해를 넘겨서 왕위에 있었던 임금입니다. 왕위는 잃었으나 상왕의 칭호는 아직도 천자(天子)의 창고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그 뒤를 이어서 제사를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무릇 노산군과 세조의 관계는 후릉(厚陵)과 태종(太宗)의 관계와 같습니다. 태종께서는 상도(常道)를 만났던 탓에 후릉의 제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 것이고, 세조께서는 변도(變道)를 만났던 탓에 노산군의 왕위가 저절로 하늘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한갓 노산군만의 불행이겠습니까. 아마 성조께 있어서도 불행한 바일 것입니다. 이제 만약 성조께서 불행으로 여기는 마음을 미루어서 노산군의 왕위를 복위시켜 후릉에게 제사 지낸 것처럼 제사 지낸다면, 조종들께서 만난 바가 비록 상도와 변도의 다름이 있었지만, 조처한 것은 전하의 효성에 힘입어서 끝내 하나로 귀일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노산군의 외로운 분묘가 아직도 영월(寧越) 땅에 있는데,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향화(香火)를 피워 제사 지내지 않은 탓에, 황량한 무덤이 깊은 산속에 버려져 있어서 인근 사람들이 손으로 가리키고 길 가는 사람들이 눈물을 떨군다고 합니다. 그 누가 임금의 한 몸이 살아서는 존귀한 임금의 몸이었다가 죽어서는 해골을 의탁할 곳조차 없어서 산구렁에 버려진 채 뭇사람들과 같은 언덕에 묻히게 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국가에서 인후함으로 왕업을 열어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앞뒤로 공적을 이은 덕분에 여러 대토록 승평을 누리면서 넓고도 큰 은택이 금수들에게까지 두루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노산군 한 사람에 대해서만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어짊을 미루어 가지 않아, 원망이 황천에 맺혀 있는데도 끝내 그것을 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마음이 기뻐하지 않는 것 가운데 큰 것이고, 온 나라 신민들이 다 함께 원통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당시에 부득이하였던 권도를 체득하시고, 오늘날에 그만둘 수 없는 의리를 살피소서. 그리하여 아래로는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전례(典禮)의 상도(常道)을 참작하여 정하고, 위로는 종묘에 고하여 추후에 복위시키는 의식을 거행하소서. 그리고 곧바로 영월 고을을 맡고 있는 수령에게 명하여서 남아 있는 분묘를 찾아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고, 수호(守戶)를 두어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하며, 세시(歲時) 때 올리는 제사를 한결같이 후릉의 규례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어짊이 유명(幽明) 사이에 감통(感通)되고, 만대의 대의(大義) 역시 이로써 수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야 성조께서 종사를 위하였던 지극히 공정한 마음이 후세에 더욱 드러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열성들의 혼령들 역시 아득한 가운데에서 서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바르게 되고, 종사의 복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두터워질 것이니, 국가가 억만년토록 번성할 아름다움이 반드시 이번 거조에 기초할 것입니다. 참으로 혹시라도 선왕(先王)께서 하신 일이라고 핑계 대고서 오직 거부하거나 숨기기만 일삼는다면, 신은 아마도 성조의 마음을 천하에 드러낼 수가 없고, 전하께서도 역시 후손다운 후손이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노산군의 왕위가 복위되고 나면 그 당시 사육신(死六臣)의 관작 역시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사육신은 성조의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고 감히 난역(亂逆)을 도모하였으니,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걸(桀)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 임금이 옳지 않아서 짖은 것이 아니라, 주인이 아니어서 짖은 것입니다. 그러니 깊이 죄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업 수통(創業垂統)한 임금은 혁명을 일으키는 즈음에 불충한 자들에 대한 주벌을 엄하게 하고, 충절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상을 중하게 주었습니다.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정공(丁公)을 죽이고, 송(宋) 나라 태조(太祖)가 한통(韓通)을 표창한 것과 같은 것은, 천하 후세를 위해 염려한 것이 또한 원대하지 않습니까.

황명(皇明)에 이르러서는, 영락(永樂) 초에 방효유(方孝孺), 연자녕(練子寧),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 등의 무리는 모두 태종 황제(太宗皇帝)에 대해 명령을 거역하고 건문제(建文帝)에게 절개를 바쳐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인종 황제(仁宗皇帝)는 즉위한 처음에 가장 먼저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면서 그들의 자손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효종(孝宗) 홍치(弘治) 연간에는 급사중(給事中) 오세충(吳世忠)이 또 은전을 미루어서 충의를 장려하기를 청하였는데, 그의 소장(疏章)이 한 번 올려지자 천하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아아, 군부(君父)의 원수에 대해서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함께 분노하는 바이며, 사람마다 반드시 주벌해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들 몇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인종 황제는 태종 황제의 아들이면서 그들의 충의를 칭찬하고, 오세충은 신하로서 그들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처음 황제 자리에 올라서 조서를 내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고, 후세에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군신간의 큰 의리는 바로 천지의 경위(經緯)로서 하루라도 민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아, 한 나라와 송 나라 및 황명에서 한 일은 다른 세상의 먼 일이니, 신이 본조(本朝)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증명해 보겠습니다. 고려(高麗)의 국운이 궁해져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참 임금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만은 왕씨(王氏)에게 마음을 두어 갖은 방법을 다 써서 가로막고 방해하였습니다. 만약 정몽주의 계책이 성사되었더라면 조종들께서 어떤 경우에 처하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니 정몽주는 바로 나라의 원수인바, 의당 용서해 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몽주가 죽자 태조께서는 오히려 그를 위해 애통해하였고, 태종 대왕께서는 즉시 추숭하는 은전을 내렸습니다.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는 또 문묘(文廟)에 종사하는 전례를 거행하고 자손들을 녹용(錄用)하였는바, 아주 융숭하게 권장하면서 마음속으로 조금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삼강 오륜(三綱五倫)의 도로 하여금 동방의 일월이 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게 하여,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이 구천에서 생기가 돌고, 높고도 우뚝한 절개가 백대에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나라와 송 나라의 여러 임금들이 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성종 대왕께서는 사육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들의 충성을 애처로이 여겨 그들의 당파 가운데 쫓겨나 귀양 갔던 사람들은 모두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성조(聖祖)께서 무력으로 평정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신(逆臣)의 무리들을 가벼이 석방해서는 안 될 것 같았으며, 선왕(先王)께서 하신 일을 가벼이 고치는 것도 역시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성종께서는 그 일을 시행하면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으니, 성종의 원대한 계책과 심원한 생각을 어찌 일반 사람이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노인들에게 듣건대, 그 당시에 경악(經幄)의 신하들 가운데 ‘그들은 충신이고 우리들은 역적이다.’ 하면서 사육신을 칭찬한 자가 있었는데, 성종께서는 명언(名言)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 뒤로부터는 사람들이 비로소 사육신의 충성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여 기휘(忌諱)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에 처사(處士) 남효온(南孝溫)이 드디어 사육신의 전기(傳記)를 지어서 행적을 드러내었는데, 그들의 전기를 보는 자들은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모두들 눈물을 흘렸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끝내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전기가 인륜에 관계되는 바가 큽니다.

아아, 하나의 전기가 지어지는 것이 경중(輕重)이 되기에 부족한 것 같은데도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하여 흥기시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전이(轉移)의 기틀을 잡고 교화(敎化)의 근원을 맡고 있는 자가 만약 숭상하는 바를 분명하게 잘 드러내 보여 천하 사람들을 격려한다면, 그것을 보고 듣고 감화되는 묘함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태종과 성종께서 이미 정몽주에 대해서 시행하고 사육신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대하였으니, 열성(列聖)들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먼저 힘써야 할 바를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사육신의 이름이 아직도 죄적(罪籍) 가운데 들어 있어서 신원(伸冤)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육신의 작위(爵位)가 왕부(王府)에 새겨져 있는데도 관작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의 일대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섬기는 바에 대해서 충성을 바쳐 뜻과 소원을 이미 이루었으니, 포숭(褒崇)하고 신설(伸雪)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이 사육신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국가를 위하여 원대한 생각을 하는 자는 단연코 한때의 속된 견해를 따라서 만대의 큰 의리를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그 당시에 죄를 받은 자 가운데 금성대군(錦城大君)과 같은 자는 그 역시 용서해 주는 은전을 받았는데도 작위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고, 적몰(籍沒)당한 재산을 아직도 다 돌려받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 또한 매우 원통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역대의 절개를 장려한 은전을 살펴보고 조종들께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본받아, 특별히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소서. 자손들 가운데 누락된 자들 역시 의당 녹용(錄用)하고, 적몰한 재산 가운데 되돌려주지 않은 것은 모두 추가로 되돌려주소서. 그렇게 한다면 군신간의 대의가 천지 사이에 크게 밝아질 것이니, 지금 이후로 우리 동방의 억만년토록 절개에 죽고 의리에 죽는 선비들은 터럭 하나도 모두 전하께서 권장하여 기른 것이 될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일이 이미 이와 같은데, 또다시 길게 탄식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종친(宗親)들을 폐고(廢錮)시키는 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대종은 나라의 큰 줄기이다.[大宗維翰]”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종자는 나라의 성이다.[宗子維城]” 하였습니다. 종성(宗姓)들이 국가에 대해서 무슨 해 되는 바가 있어서 금법(禁法)으로 묶어 두기를 한결같이 이와 같이 엄하게 한단 말입니까.

옛날의 밝은 임금은 반드시 동성(同姓)의 사람을 세워서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는 도리를 도타이 하였으며, 반드시 이성(異姓)의 사람을 세워서 어진이를 어질게 대하는 도리를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친한 이와 소원한 이를 나란히 등용하여 이쪽과 저쪽을 서로 잡아 묶었으니, 그 깊은 계책과 원대한 염려가 어찌 그렇게 한 까닭이 없겠습니까.

대개 공성(公姓)의 친족은 한 기운에서 나뉘어져 여러 갈래가 된 것으로 골육으로 맺어진 은혜가 있고, 기쁨과 슬픔을 왕실과 함께하여 어려울 때 떠나가는 의리가 없습니다. 이에 조정에 들어와서 왕실을 보위하면 손과 같고 발과 같으며, 외방으로 나가 외적의 침입을 막으면 병풍이 되고 울타리가 되니, 강함은 족히 왕실을 보호하고 은혜는 족히 어린 임금을 부탁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종족을 임용하여 흥성한 자만 보았을 뿐, 종족을 소원하게 대하고서도 망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전대의 일을 역력히 거론할 필요도 없이 주(周) 나라, 진(秦) 나라, 한(漢) 나라, 위(魏) 나라의 일만을 가지고 그 득실에 대해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주 나라는 관작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천위(天位)를 같이하였습니다. 안으로는 공(公), 경(卿), 대부(大夫)의 관작이 있었고, 밖으로는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나라가 있어서, 별이 늘어서서 북극성을 향해 조아리는 것처럼 원근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희성(姬姓)의 친족이 열에 여덟을 차지하고 있었는바, 전적으로 위임하고 성대히 봉건(封建)함이 이때보다 더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왕실을 핍박하는 걱정은 대대로 없었으며, 울타리가 되고 보필하는 이로움만 대대로 있었습니다. 이에 깊은 뿌리가 단단하게 얽히었고 잡아 묶은 것이 공고하여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맞물려 있었는바,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폐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동주(東周)가 쇠약해져서는 왕의 위엄을 떨치지 못했는데도 오히려 천하의 임금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방백(方伯)과 연수(連帥)로 있는 자들 역시 주(周) 나라를 높이는 것이 의리라는 것을 모두 알아, 혹 왕실을 보위하는 부지런함을 드러내었고, 혹 추대하는 정성을 바쳤습니다. 이에 비록 솥을 묻는 참람한 자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간웅(奸雄)이 군침을 삼키면서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감히 군사를 일으켜 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겠습니까. 참으로 종성(宗姓)들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고 천하 사람들이 함께 토벌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던 것입니다.

광포하였던 진(秦) 나라는 한갓 나라가 미약한 것을 징계할 줄만 알았지, 고립되는 것이 걱정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는바, 객경(客卿)을 중용하고 종신(宗臣)을 멀리했습니다. 이에 봉건제도가 한번 무너지자 나라의 근본 뿌리가 저절로 뽑혀, 마을의 왼쪽에 사는 군졸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일어나 한 번 소리치자, 견고하였던 함곡관(函谷關)이 다시는 침입을 막는 울타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만약 친왕(親王)과 자제(子弟)들이 연(燕)과 제(齊) 지방에 나누어 있고, 종실(宗室)과 대신(大臣)이 중외에서 굳게 맺어져 있었다면, 진 나라가 아무리 무도하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까지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漢) 나라 고조(高祖)는 진 나라가 망한 것을 거울로 삼아 동성(同姓)의 친족들을 많이 봉하였는바, 비록 잘못을 시정하려고 하다가 지나치게 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 의논하는 자들이 이미 종족이 반석처럼 튼튼하다고 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 여씨(呂氏)들의 화란을 꺾고서 대저(代邸)를 세우는 일을 이루었으니, 유씨(劉氏)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킨 공은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제(武帝)는 칠국(七國)의 변란에 징계되어 종친들의 힘을 약하게 하였는바, 제후로 있는 종친들에게 조세(租稅)만 받아 먹고 살게 하고, 정사에는 일절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쇠약하였던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때에 이르러서는 친족들이 더욱 소원해져 형세가 마치 부민(富民)과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망(王莽)이 내외(內外)가 잔약해졌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황제 자리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당시에 참으로 남양종실(南陽宗室)의 어짊이 아니었더라면 한 나라 황실의 제사가 거의 끊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조위(曹魏) 때의 일에 이르러서는 본디 말할 만한 것이 못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위 나라가 망한 까닭을 따져 보면 실로 종친들을 스스로 버린 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성(異姓)의 신하들은 모두 수천 리의 땅을 차지한 채 군무(軍務)를 주관하는 임무를 겸하고 있었는바, 혹 몇 사람이 여러 나라를 나란히 차지하기도 하고, 혹 형제가 나라를 나란히 점거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실의 자제들은 텅 빈 지역의 왕으로 있으면서 부리지도 못할 백성들의 임금 노릇이나 하고 있었던 탓에, 일찍이 한 사람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그들과 서로 견제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위 나라의 종실 신하 가운데 조식(曹植)이나 조경(曹冏)과 같은 자들이 이미 그에 대해 애통해하는 말을 하였지만 끝내 그것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러 마리의 말이 한 구유에서 먹는 화(禍)를 그 누구와 더불어서 막겠습니까.

아아, 전대의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후대의 분명한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몇 대의 일을 하나하나 거론하였으니 그에 대한 득실이 그 안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지금 어느 것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본받아야 할 것이 주 나라와 한 나라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 어느 것을 삼가야 하겠습니까? 삼가야 할 것이 진 나라와 위 나라의 일에 있지 않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성조께서 왕업을 여신 이후에 거룩한 임금이 대대로 나와서는 종친들과 화목하게 지낸 요(堯) 임금의 어짊을 본받고, 종족들을 융성케 한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교화를 미루어 나가, 집안을 바르게 해 나라를 바르게 하고, 친한 이부터 먼저 하여 소원한 자에게 미쳐 나갔습니다. 이에 많은 어질고 훌륭한 사람들이 뭇 관직에 나란히 있으면서 서로 더불어 국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왕실을 보위하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의 성대함과 나라의 성처럼 견고함이 천고에 뛰어남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중엽 이후로 종실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염려함을 면치 못해 마침내 일절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였는바, 《선원록(璿源錄)》에 들어 있는 종친들에 대해서는 친소(親疎)도 묻지 않고 현우(賢愚)도 구별하지 않은 채 모두 금고시켜, 그들로 하여금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직책에는 한계가 있어서 끌어안고 있는 것은 헛된 명호(名號)일 뿐이며, 몸은 귀척(貴戚)의 신분이면서도 쳐다보고 있는 것은 반록(班祿)일 뿐입니다.

국가에서는 종실 신하들을 적국 사람들처럼 대해 방금(防禁)이 엄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고 있고, 종실의 신하들은 나랏일을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정(情)과 의(義)가 미덥지 못하고 은혜와 믿음이 흡족하지 않게 되어, 골육간에 서로 단단하게 맺어지는 튼튼함은 없고, 근본 뿌리를 뽑아 내는 걱정만 있습니다.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날로 외로워지는데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종실들은 아래에서 날로 낮아져 가는데도 돌볼 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국가의 체모입니까.

지금 말하는 자들은 혹 종성(宗姓)의 친족들은 지위가 높고 세력이 큰데 만약 또다시 그들에게 권한까지 빌려 준다면 반드시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도 생각이 짧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천하 국가를 차지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 흥망과 치란에 있어서 모두 말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난망(亂亡)을 당한 자들은 그 원인이 과연 모두 종성들에게서 말미암았습니까? 그리고 외신(外臣)에게 전적으로 내맡긴 자들은 반드시 흥하고 또한 다스려졌습니까?

무릇 권한이 있는 바에는 비록 소원한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형세가 중해지는 법이고, 세력이 제거된 바에는 아무리 친한 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만약 종신(宗臣)의 세력이 크다고 해서 반드시 외신에게 권한을 빌려 주어야 한다고 한다면, 유독 제(齊) 나라를 차지한 자가 전씨(田氏)이지 여씨(呂氏)가 아니고, 진(晉) 나라를 쪼개어 차지한 자가 조씨(趙氏)와 위씨(魏氏)이지 희성(姬姓)이 아니었다는 것은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좋을 때는 그 직위를 독차지하고 어려울 때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은 이성(異姓)의 신하들이고, 보존됨에 그 영광을 함께하고 망함에 그 화를 함께하는 자는 공족(公族)의 신하들인 법입니다. 그러니 지금 공족을 소원히 대하고 이성을 친하게 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아, 국가의 성쇠(盛衰)는 일정하지 않은 법이고, 천하의 사변(事變)은 무궁한 법입니다. 지금의 경우를 보면, 국가의 형세가 당당하고 위복(威福)의 권한이 옮겨지지 않아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각자 자신들의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종족의 신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어서, 있고 없고에 따라 달라질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만일 이성의 신하 가운데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 예(羿)나 한착(寒浞)과 같은 간사한 자가 있어, 위복의 권한을 농락하면서 조정에 걸터앉아 있다가 종친이 단약(單弱)하다는 것을 알고는 왕위를 찬탈할 흉모를 꾀해, 사문(私門)에서 당파를 결성하고 조정에서 임금을 고립시킬 경우, 그때 가서는 나라를 성(城)과 같이 막아 주는 종친과 어려움에 먼저 달려나가는 형제가 있다 하더라도, 손에는 주허후(朱虛侯)의 칼이 없으니 그 누가 여씨(呂氏)를 제압한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짐을 떨어뜨리고 난 다음에는 백(伯)을 청하여 도와 달라고 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밝은 자는 일이 드러나기 전에 도모하는 법이고, 지혜로운 자는 일어나기 전에 기미를 밝게 살피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형세로써 뒷날의 환난을 살펴본다면, 드러나지 않았고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말하기를, “쌓아 놓은 섶 아래에 불씨를 놓아 두고서도 불이 타오르지 않자 안전하다고 여긴다.”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오늘날의 형세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난망이 항상 외척(外戚)에게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혹 외척의 권한을 억제시키고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던 경우가 있었는데, 조위(曹魏)의 저령(著令)과 명(明) 나라의 가법(家法)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척리(戚里)들을 중용하여 조정에 포진시키고 있어서 나라를 그르친 간인(奸人)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는데도 오히려 막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독 동성(同姓)의 종친에 대해서만은 미처 금하지 못할 듯이 금고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걱정해야 할 바는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걱정하지 않을 바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는 꼴입니다.

아아, 국가의 법이 이미 이와 같으므로 종친된 자들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자중하는 뜻이 없이 달가운 마음으로 자포자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의 부형들은 자제들을 가르칠 줄 모르고 자제들은 부형을 섬길 줄을 몰라서 예법을 팽개친 채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는바, 그들이 평생토록 하는 일이라곤 닭싸움이나 개 달리기 같은 놀이가 아니면 기방 출입과 사냥 등의 오락입니다.

귀로는 육예(六藝)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하고 눈으로는 반 줄의 글조차 보지 않아, 무지하고 몽매하며 불량스럽고 무뢰합니다. 이에 법망에 걸려들어서 패가망신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혹 선을 행하기를 동평(東平)과 같이 하고, 학문을 좋아하기를 북해(北海)와 같이 하는 자가 있더라도 재주를 쓸 곳이 없고 덕을 베풀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 봄가을로 조현(朝見)하는 반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일생을 마치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 또한 몹시 애통한 일입니다.

아아, 밖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한 것은 선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안으로 종학(宗學)을 설립한 것은 공족(公族)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학교 정사는 자못 개혁한 것이 있어서 인재양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학에 대해서는 유독 폐기한 채 거행하지 않고 있으며, 비록 종실의 신하들이 청하는 바가 있어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동성들을 도리어 소원한 관계인 외신(外臣)들만도 못하게 보아서 그들의 재주와 어짊을 길러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진(秦)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법을 폐기하여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종학에서의 가르침을 폐하여 공족들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으니, 국가의 정사가 형편없는 것이 불행하게도 진 나라와 서로 비슷합니다.

신은, 융성하였던 삼대(三代) 시대 때에는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준수한 종자(宗子)들을 모두 함께 태학(太學)에 입학시켜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가르쳤다고 들었지, 학교를 둘로 나누어서 가르쳤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후세의 학교에 관한 법은 이미 성왕(聖王)들의 제도를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것마저 폐한 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폐고(廢錮)시키는 법이 이미 그들의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꺾었는데, 종학을 폐하여서 또다시 그들을 이끌어 양성하는 방도를 잃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종족들이 근후(謹厚)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역시 틀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역대의 득실을 거울 삼고 조종조의 좋은 규정을 본받아서 폐고시키는 법을 없애고 등용하는 법을 회복시키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현부(賢否)를 가려서 재주에 따라 임용하여 혹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려 놓거나 감사(監司)의 직임을 떠맡겨서, 그들로 하여금 백료(百僚)들 사이에 섞여 있고 중외(中外)에 포진해 있게 하소서. 그리고 녹봉을 많이 주어서 은혜를 융성하게 하고 직임을 맡기어서 능력을 다하게 하여, 안으로는 골육의 은혜를 다하고 밖으로는 군신간의 의리를 밝힘으로써,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면서 복심(腹心)처럼 내맡기소서. 가지와 잎이 무성하면 근본은 저절로 튼튼해지는 법으로, 형제들간에 각궁(角弓)의 원망이 없고 국세(國勢)는 백족(百足)의 지탱이 있을 것이니, 그 이해와 득실은 명약관화하여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 또 종학에 관한 법을 밝혀서 경학과 행실을 구비한 사람을 가려 뽑아 사표(師表)로 삼고, 종실 가운데 근후하고 노성한 사람을 뽑아서 종학에 관한 정사를 주관하게 해, 효제(孝悌)의 의리를 신장시키고 수기치인의 도를 가르치게 하소서. 그리고 위로는 왕자로부터 아래로 종실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친소를 따지지 말고 오직 학행의 높고 낮음만을 보아 등용시키거나 버리소서. 그렇게 한다면 종실 사람들이 모두 부지런히 학문에 힘쓸 것이니, 누가 감히 자포자기한 채 흥기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조종조 때에는 종친들이 모두 문무과(文武科)에 응시하여 거자(擧子)들과 차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친소를 똑같이 보고 피차를 차이가 없게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시험을 설치하여 인재를 뽑는 것은 본디 삼대 시대의 법이 아니라, 쇠미해진 시대에 행한 것으로, 이는 단지 요행을 바라는 풍조나 불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종실의 자제들로 하여금 종이에다가 붓이나 희롱하면서 유사(有司)들 앞에서 득실을 겨루게 한다면, 믿음직하고 덕이 도타운 공성(公姓)으로서 부박한 사습(士習)만을 다투게 될 것이니, 그에 따른 말류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종친들이 입사(入仕)하는 것은 별도로 한 길을 만들어서 오직 덕(德)만 보고 선발하도록 하고 과거 시험을 치르지 말도록 하며, 문학의 재주가 있는 사람은 동반직(東班職)에 서용(敍用)하고, 무예의 재주가 있는 사람은 서반직(西班職)에 서용하도록 하여, 재주와 덕을 헤아려서 각자 그 재주에 맞게 직책을 제수하여야 할 듯합니다. 또 대대로 경대부(卿大夫)를 세습하는 법을 엄하게 해서, 주(周) 나라의 윤씨(尹氏), 무씨(武氏), 잉숙씨(仍叔氏)와 같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비록 귀척의 반열에 있더라도 권세와 지위를 대대로 누리지 못하게 해야 할 듯합니다. 그럴 경우 지나치게 염려하여 막거나 화란이 싹트는 계제가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지금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일은 바로 현재 꺼리고 있는 일들로, 신하로서는 말하기가 어려운 일들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일에 천하의 공적인 큰 의리가 있으면 임금이 신하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할 수 없는 법이고, 신하 역시 임금에게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노산군의 직위는 당시의 큰 권도(權道)에 있어서는 폐위시켜야 하고, 만대의 큰 의리에 있어서는 복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은 역모를 도모한 죄를 가지고 논하면 삭직하여야 하고, 절개에 죽은 마음을 가지고 따져 본다면 권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성 친족들의 일에 이르러서는, 한때의 지나친 염려를 위해서는 금고시켜야 하고, 역대의 득실을 가지고 살펴보면 등용시켜야 합니다. 당시의 큰 권도를 쓴 것을 가지고 기휘하여야 한다고 한다면 탕무(湯武)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왕명을 거역한 죄를 가지고 주벌해야 한다고 한다면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개를 아는 것이 아니며, 한때의 견해를 가지고 본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말한 바는 천지의 상경(常經)이요 고금의 통의(通義)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황명(皇明)에서는 인종(仁宗), 헌종(憲宗)이 건문제(建文帝)의 신하들을 용서하고 경태제(景泰帝)의 황위(皇位)를 복위시켜 주었으며, 본조(本朝)에서는 태종과 성종께서 정몽주의 절개를 표창하고 사육신의 당파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종친들을 서용하는 법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또 성조(聖祖)들께서 이미 시행한 것입니다. 역대의 사실에서 상고해 보면 이미 저와 같고, 당대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또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시행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현재 여러 대 동안 권간(權奸)이 용사한 뒤라서 삼강이 밝혀지지 않고 절의가 하나도 없어서, 인심이 날로 더러워지고 있으며 사기(士氣)가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에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만 있고 절개에 죽고 의리에 죽는 풍조가 없어, 조금이라도 이해에 관계가 있으면 문득 지키는 바를 잃고 있습니다.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국가의 복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데다가 종친들이 외롭고 단약하여 사직을 보위하는 사람이 없는 탓에 칡덩굴이 뿌리를 보호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가 오늘날의 일을 본다면 어찌 한심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동한(東漢)은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빠르게 흥성하였고, 서진(西晉)은 명검(名檢)을 천하게 여겨서 갑작스럽게 망하였습니다. 한때에 숭상하는 바가 그 시초는 아주 미약하나, 그 성과가 흥망 성쇠에 드러나는 것은 아주 원대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 번 시행하는 수고를 아까워해 만대토록 무궁한 염려를 하지 않으십니까.

신은 직책은 미미하고 말은 천하여 참으로 성상께서 들으시고 믿기에 부족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견마(犬馬)와 같은 하찮은 충성은 참으로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사(時事)를 눈으로 목격하고는 비분한 마음이 가슴을 메워, 감히 베를 짜는 과부의 걱정을 가지고 삼가 미나리와 햇볕을 바치는 정성을 본받았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은 가슴이 북받쳐오름을 금치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주D-001]임금을 …… 않았는바 : 이윤은 탕왕(湯王)을 도와 은(殷) 나라를 건국하였는데, 탕왕이 죽고 태갑(太甲)이 왕위에 올라 정사를 돌보지 않자 그를 3년 동안 내쫓았다가 다시 모셔와 왕위에 앉혔으며, 곽광은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주D-002]자장(子臧)의 절개 : 온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는데도 임금 자리에 오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장은 조(曹) 나라의 공자(公子)로, 조 나라의 선공(宣公)이 죽은 뒤 조 나라 사람들이 선공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자가 의롭지 못하다 하여 자장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자장은 이를 사양하고 나라를 떠나 이미 임금이 된 자가 그대로 임금 자리에 있게 하였다. 《春秋左氏傳襄公 14年》
[주D-003]건문제(建文帝) : 명(明) 나라의 2대 황제인 혜제(惠帝)를 가리킨다. 혜제는 3대 황제인 성조(成祖)에 의해 폐위되었다.
[주D-004]경태제(景泰帝)에 …… 바꾸었습니다 : 경태제는 경제(景帝)를 가리킨다. 영종(英宗)이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었는데, 정통(正統) 14년(1449)에 와랄(瓦剌)의 귀족(貴族)인 먀선(乜先)이 군사를 거느리고 명 나라를 침입하였다. 그러자 영종이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에 황태후가 영종의 동생으로 하여금 국사를 다스리게 하니, 이가 바로 경제로, 영종을 상황(上皇)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으며, 병들어 죽기 직전에도 영종의 태자가 즉위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았다. 영종은 그 뒤에 오랑캐의 군영에 1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돌아와서 남궁(南宮)에 유폐되어 있었으며, 경제(景帝)가 병이 들자 신하들에 의해 다시 황제 자리에 복위되었다. 《明史卷10, 11, 12》
[주D-005]후릉(厚陵) : 정종(定宗)의 능호(陵號)로, 정종은 태종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上王)으로 있었다.
[주D-006]한(漢) 나라 …… 죽이고 : 정공(丁公)은 초(楚) 나라의 장수였는데,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싸우던 중에 팽성(彭城)의 서쪽에서 정공에게 추격을 당하였다. 이에 유방이 정공에게 도망치게 해 주기를 청하자, 정공이 유방을 죽이지 않고 돌아갔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정공이 유방을 찾아가자, 유방은 정공을 참수하여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않은 죄를 다스렸다. 《史記卷100 季布列傳》
[주D-007]송(宋) 나라 …… 것 : 한통(韓通)은 오대(五代) 시대 주(周) 나라의 장군이다. 주 나라 공제(恭帝) 때 송 나라 태조가 진교(陳橋)에서 여러 군사들의 추대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한통은 전각(殿閣)에 있다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도중에 군교(軍校) 왕언승(王彦昇)을 만나 죽임을 당하였다. 태조는 황제가 된 뒤 왕언승이 함부로 죽인 죄를 꾸짖고 한통의 절의를 표창하여 관작을 추증하였다. 《宋史卷484 韓通列傳》
[주D-008]솥을 묻는 참람한 자 : 왕위를 빼앗기를 도모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우(禹) 임금이 구정(九鼎)을 주조하였는데, 삼대(三代) 시대 이후로 이를 국보로 여겼다. 주(周) 나라 정왕(定王) 때 초왕(楚王)이 육혼(陸渾)의 오랑캐들을 정벌하고서 주 나라의 강역 안에서 관병(觀兵)을 하자, 정왕이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이때 초왕이 그 사신에게 솥의 대소와 경중을 물었는데, 이는 주 나라를 쳐서 천자 자리를 빼앗을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春秋左氏傳宣公 3年》
[주D-009]마을의 왼쪽에 사는 군졸 : 진(秦) 나라 때에는 빈천한 자들이 마을의 왼쪽에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진 나라의 학정에 항거하여 맨 처음 군사를 일으킨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신분이 낮은 군졸이었다.
[주D-010]여러 …… 일 : 한(漢) 나라의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외척(外戚)이었던 여씨(呂氏)들을 죽이고 여씨들이 세웠던 소제(少帝)를 폐위시킨 다음, 대왕(代王)으로 있었던 유방(劉邦)의 아들 유항(劉恒)을 맞이해 와 즉위시킨 것을 말한다.
[주D-011]칠국(七國)의 변란 : 한 나라 경제(景帝) 3년에 번왕(藩王)으로 있던 오왕(吳王) 비(濞)가 일으킨 변란을 말한다. 경제가 번왕들의 세력을 줄이는 계책을 취하자, 오왕 비는 자신의 세력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여 제남(濟南), 초(楚), 월(越) 등 7국의 번왕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이에 경제는 군사를 파견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史記卷11 孝景本紀》
[주D-012]남양종실(南陽宗室) : 동한(東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가리킨다. 유수는 남양인(南陽人)으로, 처음에 용릉(舂陵)에서 기병(起兵)하여 왕망(王莽)을 멸망시키고 동한을 세웠다.
[주D-013]여러 …… 화(禍) : 이성(異姓)의 신하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 화를 말한다. 위(魏) 나라의 조조(曹操)가, 일찍이 말 세 마리가 한 구유에서 꼴을 먹는 꿈을 꾸고는 그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이르기를, “사마의(司馬懿)는 남의 신하 노릇 할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나라를 찬탈할 것이다.” 하였는데, 말 세 마리는 사마의(司馬懿),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를 가리킨다. 《晉書卷1 宣帝紀》
[주D-014]왕망(王莽)이나 …… 한착(寒浞) : 모두 나라를 찬탈한 자들이다. 왕망은 한(漢) 나라를 찬탈하고서 신(新) 나라를 세웠고, 동탁은 후한(後漢) 말기에 헌제(獻帝)를 세우고는 전횡을 일삼다가 여포(呂布)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예(羿)는 유궁(有窮)의 임금으로 활을 잘 쏘았는데, 하(夏) 나라가 쇠약해지자 하후(夏后)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가 뒤에 한착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한착은 예(羿)의 상(相)으로 있다가 예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며, 뒤에 소강(小康)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주D-015]주허후(朱虛侯) : 한 나라 유장(劉章)의 봉호(封號)이다. 한 나라 초기에 여후(呂后)가 죽자 주발(周勃), 진평(陳平) 등과 함께 여씨(呂氏)를 주벌하였다. 《漢書卷38 高五王傳》
[주D-016]짐을 …… 있겠습니까 : 나라가 이미 망한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청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네 짐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백을 청하여 도와 달라고 하리라.[載輸爾載將伯助予]” 하였다.
[주D-017]육예(六藝) : 선비로서 배워야 할 여섯 가지 일로, 예(禮), 악(樂), 사(射), 어(御), 서(書), 수(數)를 가리킨다.
[주D-018]동평(東平) :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진 한 나라 유창(劉蒼)을 가리키는데, 유창은 시문에 뛰어났다.
[주D-019]북해(北海) : 중국의 종실(宗室) 가운데 북해와 관련된 사람으로는 한(漢) 나라의 유흥(劉興)과 당 나라의 이옹(李邕)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지 못하였다. 여기서는 종실은 아니지만 학문을 좋아하기로 이름 높았던 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을 가리키는 듯하다. 공융은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북해 상(北海相)을 지냈는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일으켰으며, 선비들을 좋아하여 그의 집안에는 선비들이 그득하였다고 한다. 《後漢書卷70 孔融列傳》
[주D-020]각궁(角弓)의 원망 : 각궁은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임금이 종친들을 잘 대해 주지 않아 종친들이 원망하는 내용의 시이다.
[주D-021]백족(百足)의 지탱 : 세력이 웅장하여 비록 한때 약해졌다 하더라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족은 노래기의 별칭으로,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경(曹冏)의 《육대론(六代論)》에, “옛말에 이르기를, ‘백족의 벌레는 죽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지탱하고 있는 것이 많아서이다.” 하였다.
[주D-022]베를 …… 걱정 : 나랏일을 걱정하여 집안일을 잊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어떤 과부가 자신이 짜는 베를 걱정하지 않고 종주(宗周)가 망하는 것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昭公 24年》
[주D-023]미나리와 …… 정성 : 작은 정성이나 하찮은 물품을 바친다는 뜻이다. 미나리나 햇볕은 모두 흔한 것인데, 어떤 사람이 귀한 것인 줄 알고 임금에게 바쳤다가 그 뒤에 흔한 것인 줄 알고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列子楊朱》

학봉속집 2권 교문(敎文) ●영상(領相) 노수신(盧守愼)이 사직한 데 대해 윤허하지 않는 교문

왕은 이르노라. 신하들이 조정에서 서로 공경하면서 협력하는 것을 바야흐로 원신(元臣)이 도와주는 데에 의지하고 있는데,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구해서 어찌하여 이 어려운 시기에 나를 버리고 떠나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말로 유시하는 바이다.

경은 천부적인 자질이 순수하고 학문과 지식이 깊었는바, 4대의 조정을 들락날락하면서 충효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켰고, 한 절개를 종시토록 지켜 험난함에 처해서도 마음이 변치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공보(公輔)의 재목감이라고 칭하였고, 선비들은 전당(鱣堂)의 기대를 잔뜩 걸었다. 이에 내가 임금 자리에 올라 국사(國事)를 논의하던 처음에 내맡기는 정성을 더욱 도타이 하였는바, 드디어 치도(治道)를 논하는 자리에 올려서 나라를 다스리는 직임을 맡기었다.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올림에 상(商) 나라의 단비가 임금의 마음을 틔워 주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고, 조정에 출입하면서 임금에게 고함에 주(周) 나라 신하가 외모를 화순하게 한 것을 깊이 체득하였다. 선(善)을 좋아함이 천하에 넉넉하여 울연히 호랑이나 표범이 산에 있는 것과 같았고, 남은 은택이 온 나라에 입혀져 우뚝하기가 태산(泰山)이나 교악(喬岳)이 억누르는 것과 같았다.

지난번에 내가 병을 걱정한 날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하는 경의 정성을 살펴 알고는, 특별히 시약(侍藥)하는 반열에서 체차(遞差)하여 어버이를 위해 의원(醫員)을 찾아가는 효성에 전념하게 하였다. 임금과 부모는 차이가 없는 것이기에 이미 효성을 옮겨서 충성을 하였으며, 기쁨과 슬픔을 나라와 함께하니 어찌 집안일을 돌보느라 나랏일을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경의 병이 전과 같이 회복되는 경사가 있기를 기다려서 옛 신하 가운데에서 인재를 구하는 나의 마음을 위로하기 바란다. 어찌 날씨로 인한 작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물러나기를 이처럼 급히 한단 말인가.

탕약(湯藥)을 살피느라 걱정하고 수고하였는바, 생각건대 마음이 놀라서 병이 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심신을 편안히 기르면 머지않아 병이 낫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대의 한 몸은 관계된 바가 아주 중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그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조정의 기강이 무너졌으니 경은 마땅히 진작시켜 엄숙하게 하기를 생각하여야 하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우니 경은 의당 어루만져서 편안하게 하기를 도모해야 한다. 백성들의 폐막(弊瘼)을 어떠한 정사를 펼치면 제거할 수 있겠으며, 하늘의 재앙을 어떤 도를 펴면 늦출 수가 있겠는가.

머리가 외로이 혼자 있음에 오로지 수족(手足)에 의지하는 바이며, 끝없이 넓은 연못을 건넘에 배의 노가 없으면 어떻게 건널 수 있겠는가. 주석(柱石)의 신하에게 믿고 맡긴 것을 생각하여 억지로나마 유편(兪扁)에게 나아가 병을 치료하라.

아아, 재상 자리에 유신(儒臣)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노공(盧公)이 이로 말미암아 다시 등용되었고, 왕실이 많은 어려움을 감당할 수가 없어 소공(召公)이 이 때문에 오랫동안 자리에 있었다. 사직한 바는 의당 윤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잘 알기 바란다.

[주D-001]4대의 조정 : 노수신은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선조(宣祖)의 네 조정에서 벼슬하였다.
[주D-002]전당(鱣堂)의 기대 : 공경(公卿)의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진(楊震)이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서도 여러 차례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가 전어(鱣魚) 세 마리를 물고 날아와 강당(講堂)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형상을 하였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전어는 대부들이 입는 옷의 무늬이고, 세 마리는 삼태(三台)의 조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양진이 과연 태위(太尉)에 올랐다. 《後漢書卷54 楊震列傳》
[주D-003]상(商) 나라의 단비 : 부열(傅說)을 가리킨다. 상 나라의 무정(武丁)이 부열을 재상으로 삼으면서 명하기를, “만약 큰 가뭄이 들게 되면 너를 사용하여 단비로 삼을 것이다.[若歲大旱用汝作霖雨]” 하였다. 《書經說命上》
[주D-004]유편(兪扁) : 황제(黃帝) 때의 의원인 유부(兪跗)와 주(周) 나라 때의 의원인 편작(扁鵲)으로, 모두 뛰어난 명의(名醫)이다.
[주D-005]소공(召公) :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의 재상으로, 주공(周公)과 더불어서 나라를 반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덕정(德政)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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