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학봉전집

참고 : 글들을 편리하게 볼수 있도록 제목을 클릭하여 열고 닫히며, 닫지 않고도 다른 제목을 클릭하면 열립니다. 하단부의 설명도 필독

학봉집 부록 제4권 : [서(書)] ●일본국(日本國) 도국흥(陶國興)이 화산(花山)의 사인(士人) 조상관(趙相觀)에게 준 편지

영종(英宗) 계미년(1763, 영조 39)에 통신사로 갔을 때 받은 편지이다. ○ 도국흥은 일본의 태학사(太學士)이다.

이른 봄에 서찰을 받고는 몇 차례나 절하면서 읽어 보았습니다. 학봉 김 선생의 자손들이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마땅하다고 하겠는바,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일찍이 국사(國史)를 읽어 보건대, 오직 ‘천정(天正) 18년(1590, 선조 23)에 조선국의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성(許筬) 등 세 대부(大夫)가 들어와서 조빙하였다.’고만 씌어 있을 뿐, 그에 대한 사적(事蹟)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그때는 바로 명(明) 나라 만력(萬歷) 경인년입니다. 지금 김씨들을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찾은 결과 비록(祕錄) 하나를 찾아 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천정 18년에 조선국의 세 통신사인 황윤길, 김성일, 허성 등이 7월 22일에 우리의 국도(國都)에 왔다. 이때 주공(主公)께서는 관동(關東)의 북조씨(北條氏) 정권을 토벌하고 있었으므로, 통신사가 경사(京師)에 5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다. 주공께서 세 사신을 취락정(聚樂亭)에서 만나 보고서 국서(國書)를 받고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백은(白銀) 400냥을 하사하였다.
조선 국왕이 보낸 국서가 주공의 뜻에 맞지 않았으므로 주공이 답서를 써 주지 않았다. 그러자 황윤길과 허성 등은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얼마 있다가 가마를 출발시켜 천주(泉州)의 계포(堺浦)에 도착해 배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김성일은 ‘다른 나라에 왕명을 받들고서 사신으로 나왔다가 답서를 받들지 않고 귀국하는 것은 왕명을 풀밭에다 내던지는 것이다.’ 하고는, 혼자 경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답서를 써 주기를 거듭 청하여 마지않았다. 이에 주공께서 그 뜻을 애처롭게 여겨 답서를 써 주었으나, 답서의 말투가 몹시 교만스럽고 경박하였으므로, 김성일이 이를 따지면서 답서를 받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러 차례 다시 고쳐 바로잡은 다음에야 가지고 갔다.
김성일은 사신의 행차가 지나가는 각 주군(州郡)의 제후들이 선물로 주는 것도 고사하여 한 가지 물품도 받지 않았다. 이에 주군 사람들이 김성일이 신의(信義)가 있는 데에 몹시 감격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김 선생은 전대(專對)하는 재주가 있어서 이역 땅에 이름을 떨쳤는바,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할 만합니다.
김성일의 문적(文迹)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일본에 몇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으니 풍아(風雅)의 모임이 없었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형세상 시를 짓는 일에는 미칠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김성일의 재주와 덕이 문자에 발휘된 것을 얻어 볼 수가 없으니, 한스러울 뿐입니다.
이른 봄에 당상(堂廂)에서 잠시 동안 만나 뵈었으나 얼굴을 알지 못하여 방문할 길이 없었으며, 제술군(製述君)을 의탁해서 서신을 보내었는데, 도리어 전해지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다시 서찰을 써서 제술군에게 부치니,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화산(花山) 조공(趙公)의 안하(案下)에 올립니다. 석병(石屛) 도국흥은 절하고 올립니다.

학봉집 부록 제4권 : [기(記)] ●석문정사(石門精舍) 중수기(重修記)

안동 고을에서 서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이른바 석문정사라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학봉 김 선생께서 평소에 도를 강론하던 곳이다.
천등산(天燈山) 한 자락이 솟았다 낮았다 꾸불대며 수십 리를 내려와서 낙동강 강가에 이르러 우뚝하니 솟아나 청성산(靑城山)이 되었는데, 푸른 절벽과 기이한 바위가 마치 모자를 엎어 놓은 것 같고 홀(笏)을 세워 놓은 것과 같아, 괴이한 형상을 어떻게 말할 수조차 없다. 그 높이를 헤아려 보면 정사(精舍)는 전체 높이의 3분의 2쯤 되는 곳에 자리해 있다. 그런데 낙동강 물이 동남쪽에서 흘러와 북쪽을 향해 흐르면서 곧장 이 산 아래에 이르렀다가 또다시 서쪽으로 꺾여서 산 바깥쪽을 돈다. 멀리 강변과 산봉우리는 기이하고도 교묘하며, 맑은 못과 긴 여울은 맑고도 깨끗하여, 마치 산은 머리를 틀어올린 것 같고 물은 쇠거울을 펼쳐 놓은 듯하다. 이에 그 맑은 기운과 뛰어난 전망은 동남쪽 지방 전체를 둘러보아도 아마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선생께서 나주 목사(羅州牧使)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온 뒤에 도가 행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고요히 수양할 뜻을 품어 그윽하면서도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았다. 그러다가 이 언덕을 보고는 맑으면서도 드넓고 외지면서도 뛰어난 풍치를 좋아하였다. 이에 즉시 조금 평평한 곳을 다져서 정관(亭館) 하나를 지었는데, 서쪽 두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그 뒷쪽으로 한 칸을 넓혀서 장경각(藏經閣)을 만들고, 동쪽으로 네 칸은 서늘한 마루방으로 만들고, 그 서쪽에 있는 일곱 칸은 승료(僧寮)로 만들어, 방과 마루가 있고 부엌과 창고가 있게 하였다.
그 서쪽 가에는 두 개의 돌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돌이 커서 마치 문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를 석문(石門)이라 하였으며, 송(宋) 나라 만경(曼卿) 석연년(石延年)이 석실(石室)에다 복숭아나무를 심은 고사를 모방하여 서쪽 섬돌 아래에 홍도나무와 벽도나무를 심었다. 또 벽오동 한 그루가 동쪽 계단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
선생께서는 날마다 그 가운데 고요히 앉아 있어서 깊이 잠겨 사색하는 공부가 더욱 정밀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년의 난리를 만나 자신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면서 온 마음을 다 바치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정사는 이미 세월이 오래된 데다 또 자리잡은 곳이 높아서 비바람이 많이 들이친 탓에 기둥과 서까래가 쉽게 썩어 무너졌다. 이에 중간에 여러 차례 수리하기는 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무너져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선생의 5대손인 김성월(金聖鉞) 등이 함께 의논한 다음 중수하여 예전 규모대로 새롭게 지었다. 한 달 남짓 공사를 벌여 완공하자, 집이 우뚝 솟아 모습이 새롭게 변하여 강산에 빛을 더하게 되었는바, 선대의 사업을 잘 이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할 만하다.
김성월은 본디 예서(隷書)를 잘 썼으므로 ‘석문(石門)’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절벽에다 새겼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까마득한 후생(後生)으로서 지식이 얕고 말이 늘어지는바, 어찌 감히 그 사이에다 이름을 끼워 넣어 아름다운 것을 더럽힌다는 기롱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에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돌아보건대 나는 못난 몸으로 선생의 빛나는 도덕을 흠앙해 왔으며, 개인적으로 마음속으로 아는 것이 있다. 그러니 참람되고 외람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한마디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선생께서는 강건하고 방정한 기질을 품부받았고 영민하고 특별한 자질이 빼어났으며, 어렸을 적부터 지혜와 용기가 비범하였고 세속에서 벗어난 지취(志趣)가 있었다고 한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도를 들은 것이 몹시 빨랐으므로 정심한 의리를 알아 그 쓰임을 다하였으며, 자신을 이루어서 남을 이루어 주었다. 그리고 집안에 있으면서 행실을 함에 있어서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나아가고 물러남과 평탄함과 험함에 이르러서는 오직 의리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과 같은 사람은 어찌 《맹자》에서 말한, “부귀(富貴)를 가지고서도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을 가지고서도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威武)를 가지고서도 지조를 굽히게 하지 못한다.”는 것과 《논어》에서 말한, “제후국의 명을 부탁할 만하며, 6척의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며, 대절(大節)에 임해서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연기와 노을이 낀 이 한 구역은 실로 선생께서 말년에 학문을 닦던 곳이다. 대체로 선생의 뜻은 장차 고요한 세계에서 한가로이 오가면서 학문 공부에 전념하여, 위로는 선사(先師)를 이어받고 아래로는 후학들을 틔워 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난 시대가 좋지 못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어찌 후학들의 천만년토록 다하지 않을 한이 아니겠는가.
지금 선생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 137년이 되었는데, 정사가 새롭게 지어져서 강산이 옛 모습과 같은바, 높이 솟은 성산(星山)을 우러러봄에 절벽처럼 우뚝 선 기상이 희미하게 보이고, 맑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니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은 지취(志趣)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더구나 이곳은 선생께서 오가시며 소요하던 지역이라서 초목들조차도 오히려 남은 광채를 입었고, 집을 짓고 한가로이 거처하시던 곳이라서 솔바람 소리가 마치 선생의 기침 소리와 같다. 그러니 선생의 풍모를 듣고서 흠모하던 자들이 이곳 마루에 오르면 어찌 단지 물이 깊고 산이 높은 경치와 마루에 올라서 보는 아름다움만을 즐길 뿐이겠는가. 반드시 마음이 융합되고 정신이 부합되어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흥기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사가 지어지느냐 무너지느냐가 후학들에게 관계 있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옛날에 주 부자(朱夫子)가 무이산(武夷山) 속에 정사를 새로 짓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자들을 기다렸는데, 지금까지도 만정(幔亭)의 대은병(大隱屛)의 명성이 천하에 자자하다. 그러니 땅이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이 나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다. 후대 사람들이 이곳에서 놀고 쉬고 하면서 선생의 도를 미루어 밝혀 이 학문을 전함을 더욱더 넓혀 간다면, 선생께서 그 당시에 학문 공부를 하던 뜻이 이로 인하여 이 세상에 다시 밝아져 성산(星山)의 석문정사가 해동의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 칭해지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선생이 지은 연어헌(鳶魚軒)이 정사의 아래에 있다. 대개 권 선생이 이미 이곳의 주인으로 있다가 선생께 이 산의 반쪽을 나누어 주기로 약속한 것이라고 한다.
도유 작악(屠維作噩) 청명절(淸明節)에 후학 안릉(安陵) 이재(李栽)는 삼가 기문을 쓴다.

[주D-001]만정(幔亭)의 대은병(大隱屛) : 만정은 무이산(武夷山)을 가리킨다. 무이산에 만정봉(幔亭峯)이 있으며, 만정봉에 대은병이란 곳이 있다.
[주D-002]도유 작악(屠維作噩) : 도유는 천간(天干) 중에 기(己) 자가 들어간 해이고, 작악은 지지(地支) 중에 유(酉)가 들어간 해로, 기유년을 말하는데, 기유년은 영조 5년(1729)이다.

학봉집 부록 제4권 : [시(詩)] ●입지(立之) 최립(崔岦)의 시에 차운하다. 병서(幷序) [박이장(朴而章)]

주상께서 황급하게 도성을 떠난 뒤에 임금이 계신 곳의 소식이 아득하였다. 그러던 차에 학봉께서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 갑자기 내려오자, 온 도의 사민들이 모두들 기뻐 뛰면서 흥기하였다. 나 역시도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막부(幕府)에 참가하여 여유 이노(汝唯李魯)와 덕응 박성(德凝朴惺)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천령(天嶺)과 산양(山陽) 사이에서 따라다녔다. 공은 강개한 마음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항상 이르기를, “우리들은 죽으면 죽었지, 이 두 손을 오랑캐들에게 묶일 수는 없다.” 하였는데, 이 말이 항상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고 공에게 《해사록》을 구하자, 한 권은 서울에 놔 두었다가 잃어버려서 한 권만 부쳐 보내 왔다. 이에 나는 무료한 가운데에 때때로 펼쳐 보았다. 얼마 뒤에는 또 공이 급하게 고하는 일 때문에 나를 호남에 보내었는데, 내가 대방(帶方)에 이르렀을 적에 노친께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총총히 귀성(歸省)하였다. 그런데 공 역시 역질에 걸려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내가 호남에 갔을 적에 《해사록》과 다른 서책들을 산음(山陰)의 수령으로 있었던 김중심(金仲深)에게 맡겨 두었는데, 공이 돌아가신 뒤에 김중심에게 가서 찾으니, 맡겨 둔 책자들을 진주성에서 왜적들과 싸울 적에 모두 잃어 버렸으며, 오직 《해사록》 한 책만 어느 시골집에 떨어져 있는 것을 우연히 얻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몹시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에 공의 아들이 소문을 듣고서 사람을 보내어 책을 찾기에, 내가 감히 사사로이 갖고 있을 수가 없어서 드디어 돌려주었는데, 그 뒤 평소에 이 일이 마음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근자에 초록(抄錄)한 시와 서간, 서문(序文) 몇 편을 얻어보니 완연하기가 마치 공의 심흉과 면목을 접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의 일을 추념하노라니 나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눈물을 떨구게 한다. 이에 붓을 적셔서 그 사실을 기록한다.

진중했던 지극한 말 아직 귓전 맴도는데 / 珍重至言猶在耳
지난 일들 생각하니 그 뜻이 어떠하리 / 追思往事意如何
선생의 충의 끝내 민멸되기 어렵나니 / 先生忠義終難泯
난리 뒤에 해사록 한 책이 남아 있네 / 一部兵餘有海槎

학봉집 부록 제4권 : [시(詩)] ●《해사록(海槎錄)》에 제한 시 [최립(崔岦)]

학봉집 부록 제4권 : [시(詩)]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갈 적에 증정해 준 시 [김윤안(金允安)]

옛사람은 명 받들고 국문을 나설 적에 / 古人將命出國門
삶과 죽음 이미 다 치지도외하였는데 / 已置生死度外耳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불 들고 입직할 때 / 今人持被入直日
여종 보고 집안일을 세세하게 말하누나 / 言語刺刺顧婢子
내가 이들 두 사람의 기상을 살펴보니 / 吾觀二人之氣象
서로 간에 다르기가 하늘과 땅 차이네 / 迥然不侔如天地
선생께선 오늘날의 정포은 그 분으로 / 先生當世鄭圃隱
일찌감치 사방에다 활 쏘는 뜻 품었다네 / 早有男兒四方志
지난날에 일찍이 중국 땅에 사신 갈 때 / 昔年曾觀周禮樂
사신이 탄 수레가 몇천 리나 길 갔었나 / 星駕迢迢幾千里
금년에는 명 받들고 일본 땅에 사신 가니 / 今年奉使日出地
바다 파도 망망하여 하늘까지 닿으리라 / 海波茫茫接天起
선생께선 속에 든 게 다른 것은 하나 없고 / 先生滿腹無他物
오로지 시서와 충의만을 품고 있네 / 只有詩書與忠義
사신답고 사신다워 참으로 사신이니 / 使乎使乎眞使乎
조정에선 적임자를 뽑았다고 하겠구나 / 朝廷可謂得人矣
임금의 명령이면 물불 속도 가나니 / 君命已能赴湯火
만리의 파도쯤은 한 잔의 물이로다 / 萬里滄溟一杯水
아침나절 대궐 떠나 저녁에 남쪽 가니 / 朝辭北闕暮南關
지나는 길에 꽃들 아름답게 흔들리네 / 歷路煙花搖斐亹
돛대 처음 올리자 다섯 냥엔 바람 불고 / 椰帆初掛五兩風
바다색은 허공에 떠 멀리까지 흐릿하네 / 海色浮空迷遠邇
더운 바람 비를 뿌려 판옥이 울리고 / 炎風吹雨板屋鳴
한밤중엔 바다 파도 뱃전을 때리누나 / 夜聞驚濤打船尾
구름 연기 잔뜩 낀 속 고국은 아득하고 / 雲煙杳杳故國遙
북극성은 밝고 밝아 손으로도 가리키리 / 北辰昭昭猶可指
충과 신을 가지고서 오랑캐들 품어 주고 / 應將忠信懷鴂舌
다시금 왕언 펴서 오랑캐들 교화하리 / 更敷王言化雕齒
하늘가에 해 저물어 바다와 산 푸르르고 / 天涯日暮海山碧
서불 사당 그 앞에는 풀들 비단 같으리라 / 徐市祠前草如綺
선생께선 어느 곳서 한 잔 술을 부으려나 / 先生何處酹一杯
박제상의 충혼은 응당 아니 죽었으리 / 堤上忠魂應不死
이번 길에 의외의 걱정이야 없겠지만 / 此行雖無意外憂
이국 땅의 다른 풍토 모름지기 조심하소 / 須愼殊方風氣異
서생이 대장부가 떠나는 길 전별하매 / 書生欲別丈夫行
동풍 속 한 웃음에 무한한 뜻이로다 / 一笑東風無限意
돌아오면 석문정사 앞길에서 절 올리며 / 歸來儻拜石門路
금낭 속을 뒤지면서 좋은 시구 찾아보리 / 探得錦囊好文字

《동리일기(東籬日記)》에 이르기를, “학봉 선생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적에 상향(桑鄕)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내가 못난 시를 지어서 바쳤다. 그러자 선생이 손을 들어 읍하면서 이르기를, ‘조정의 사대부들이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가 수백 편이나, 어느 한 사람도 박제상의 일에 대하여 언급한 사람이 없는데, 그대의 시에서만 이를 언급했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정포은(鄭圃隱) : 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이다. 정몽주는 명 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우왕(禑王) 1년에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倭寇)의 침입을 금지시켜 줄 것을 교섭하였는데, 그때 사신다운 풍채가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매우 존경하였다고 한다.
[주D-002]사방에다 활 쏘는 뜻 : 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고대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內則》
[주D-003]다섯 냥 : 뱃사람들이 바람의 세기나 방향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배의 돛대 끝에다가 새 깃털을 매단 것을 말한다.
[주D-004]서불(徐市) 사당 : 서불은 진(秦) 나라의 방사(方士) 서복(徐福)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에게 동해의 삼신산(三神山)으로 가서 불로초(不老草)를 캐 오라고 하면서 동남 동녀(童男童女) 3천 명을 데리고 가게 하였는데, 서복이 일본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면서 돌아오지 않아 일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화가산현(和歌山縣)에 서복의 무덤이라는 것이 있고, 그의 사당이라는 것도 있다. 《史記卷6 秦始皇本紀》
[주D-005]박제상(朴堤上)의 충혼 : 신라 때 박제상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신라 왕의 동생인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켜 신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억류되어 있다가 피살당한 일을 말한다.
[주D-006]금낭(錦囊) :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로, 주로 시고(詩稿)나 중요한 문서를 넣는 주머니이다.
[주D-007]상향(桑鄕) : 선향(先鄕)으로, 여기서는 안동(安東)을 가리킨다.

학봉집 부록 제4권 : [상소(上疏)] ●경상우도 유생들이 공을 머물러 있게 해 주기를 청원하는 상소 [진사(進士) 정유명(鄭惟明) 등]

삼가 생각건대, 섬 오랑캐들이 쳐들어온 환란은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과 같은 성인인데도 이런 변을 만났단 말입니까. 그리고 창생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어진 하늘로서 이런 화를 내린단 말입니까. 이에 12위(位)를 모신 종묘가 피란하였으며, 수천 리의 산하(山河)가 부끄러운 빛을 띠었습니다. 도성은 왜놈들의 소굴이 되었고, 주상께서 피란하는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노라니, 이제는 뿌릴 만한 눈물조차 없습니다.
신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서생으로서 비록 하늘을 떠받칠 만한 힘은 없으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타고난 천성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이에 구구한 저희들의 마음은 단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쳐서 온 조정이 맑아지고, 행궁(行宮)이 아무 탈 없고, 옥체가 만안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초야에 묻혀 있는 미천한 신들이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시 옛 도성에서 슬기롭고 맑으신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만을 밤낮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다른 것은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수복(收復)하는 공이 만분의 일이나마 희망이 있게 되었는데, 거의 이루어져 가는 즈음에 장애가 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쓰는 방도는 애당초 이곳이나 저곳이나 다를 것이 없으나, 좌도냐 우도냐에는 완급(緩急)이 없지 않습니다. 신들은 이에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감히 성상께 아뢰는 바입니다.
아, 왜적들이 처음에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오자 여러 성들이 풍문만 듣고서도 무너져, 마침내 왜적들이 멋대로 들어와 꽉 차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듯이 하여 열흘 만에 조령(鳥嶺)을 넘었으며, 영남의 60개 고을이 모두 흉악한 왜적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군졸과 백성들만의 죄이겠습니까.
진을 지키던 장수들은 겁을 내고 몸을 움츠리고 있기를 사졸들보다 먼저 앞장 서서 하였고, 고을의 수령들은 먼저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숨어 있어서 백성들을 떠나 흩어지게 하여, 국가의 위급함과 임금께서 파천(播遷)함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병사(兵使)는 용감히 싸울 마음이 없어서 왜적과 칼날 한번 겨뤄 보지도 못하였으며, 도체찰사(都體察使)는 근왕(勤王)한다고 하고 가서는 멀리 경기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본도 안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없고 군대에는 절제하는 사람이 없어서, 남아 있는 즉묵성(卽墨城)마저도 손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리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이 위로 애통해하는 교서를 받들고 군부(君父)의 욕됨을 씻기를 기약하여,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다짐하였습니다. 그때 본도의 주군(州郡)은 산에 의지해 있는 일대의 5, 6개 고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며, 사민(士民)들은 병화에 겁을 먹고는 오직 깊은 곳으로 들어가 숨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읍과 마을은 쓸쓸하고 지휘를 하는 사람은 없어서 함락당한 땅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김성일이 말 한 필만을 타고 밤낮으로 달려와 처음 함안(咸安)에 이르렀을 때에는 한두 사람의 군관만 데리고 왔을 뿐으로, 화살도 없는 빈 활만 들고 있는 한 늙은 신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군현(郡縣)을 들락날락하면서 사방으로 사민을 불러모은 다음, 임금의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지 같은 하늘을 이고 함께 살 수 없다는 내용으로 울면서 깨우쳤습니다. 그리하여 사민들로 하여금 자제(子弟)를 불러 데려오게 하고, 숨어 있는 자들을 불러모으게 하여, 몇 달 만에 의로운 명성이 점차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백성들을 효유하는 글을 한 통 지었는데, 첫머리에서 군신(君臣)의 분의가 천지의 떳떳한 법이란 것과 숨어서 구차하게 살면서 임금을 잊어버리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님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또 풀로 만든 옷을 입고 몸에 문신을 새기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를 수 없다는 것과 조종(祖宗)들께서 편히 길러 주신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였으며, 마음속에는 신포서(申包胥)의 통곡을 간직하고 있고, 장순(張巡)과 같은 열렬한 의분을 바란다는 내용으로 말하였습니다.
이것저것 말한 내용들이 모두 자신은 제쳐 놓고 나라만 위하는 말들이었으며, 나랏일에 마음과 힘을 다 바쳐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國運)을 만회하는 공을 이루기를 기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충성과 울분의 마음이 너무도 격렬하여 사람들의 심장 속까지 파고들었는바, 아무리 돼지나 물고기와 같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속의 정성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혈기가 있는 자라면 어찌 차마 구차하게 살아가는 데 마음 편해서 흥기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각 고을에서 식견이 있는 자들을 뽑아 유사(有司)로 삼고는 의병들을 불러모으는 책임을 떠맡겼으며, 혹 부지런히 힘쓰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이끌어 주고 달래었습니다. 그리하여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지게 하여 반드시 함께 부르는 소리에 일제히 호응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선악(善惡)을 기록하는 문서를 비치하여, 간난과 위험을 꺼리지 않고 국사(國事)에 부지런히 일한 자는 그 사실을 기록해 찬양하고, 사사로운 정에 끌려 나라를 잊고서 의병으로 나가는 것을 저해하는 자는 그 사실을 기록해 위엄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잘못을 징계하고 감격하여 분발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로부터 태만하던 수령들은 그 의로움을 경외하였으며 숨어 있던 백성들은 그 신의에 감복하여, 의기에 떨쳐일어나는 거조가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많은 경우는 수천 명이고 적은 경우도 8, 900명은 되었습니다. 이에 멀고 가까운 데서 메아리치듯이 호응하여 성세(聲勢)를 서로 도왔으므로, 왜적의 목을 베어 바치는 글이 날마다 끊이지 않고 올라왔습니다.
이보다 앞서 또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는 포의(布衣)의 선비로서 우뚝하게 일어났으며,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좌랑(佐郞) 김면(金沔)도 앞장 서서 의병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는데, 모든 일이 엉성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김성일이 와서 친히 진영을 순찰하였으므로 사기는 백 배나 충천하였습니다. 또 병졸은 많으나 통솔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면과 손인갑(孫仁甲)으로 좌우 대장을 삼았습니다. 이에 각 고을의 의병도 절로 통솔하는 데가 있게 되어, 여러 차례 크게 이긴 공을 아뢰었으며, 점점 수복하는 형세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시행한 일의 성과를 따져 보면 옛사람보다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일은 그 어느 것이나 의병이 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의병들로 하여금 종시토록 그만큼 성취하게 한 것은 김성일의 공입니다.
지금 듣건대, 김성일이 좌도 감사로 옮겨졌다고 하니, 전하께서는 사람을 잘 쓰신 것이라고 하겠으며, 좌도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지나친 생각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수복하는 공이 거의 이루어지는 데 장애되는 점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며, 사람을 쓰는 방도에 좌도와 우도냐에 완급이 없지 않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몇 고을 군사와 백성들이 김성일을 인자한 어미처럼 보고 김성일을 장성(長城)같이 믿어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적들을 말끔히 소탕하고, 한번 살아남아서 태평 성대를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곳에서 빼앗아 저곳에다 주는 일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충신(忠臣)들은 실망하고 의사(義士)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이에 전일에 겨우 뭉친 민심이 중도에서 무너지고 흩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되찾았던 곳까지 아울러 잃게 되었는바, 이는 마치 도목수가 수고하여 큰 집을 다 지어갈 즈음에 갑자기 내팽개치고 다른 곳으로 가 앞서 이루었던 공이 모두 허사가 되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애달프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김성일을 옮겨 제수하신 것이 어찌 우도는 이미 회복할 만한 기미가 있으며 좌도는 한창 위급한 지역이라 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일에는 급한 것과 늦출 것이 있으며, 시행함에는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이 있습니다. 급한 것과 늦출 것으로 말씀드리면 좌도보다 더 급한 곳이 없을 듯하며,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으로 말씀드리면, 우도에 있는 자를 좌도로 옮기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임이 틀림 없습니다.
생각건대, 저희들이 살고 있는 우도는 영남 좌도와 호남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왜적들이 밤낮으로 호남을 노리면서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초유사가 사민의 마음을 얻어 싸우면서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앞으로 만약 김성일이 없어서 관방(關防)이 엄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오직 우도의 몇 고을만이 함락되어 왜적의 땅이 될 뿐만 아니라, 호남의 50개 고을도 입술이 없어서 이가 시린 걱정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 국가에서 조금이나마 믿고 의지할 곳은 전라도 한 도 뿐입니다. 전라도 한 도를 보전하지 못하면 전하의 나랏일도 끝나고 말 것입니다. 아, 김성일이 떠나고 머무는 것이 어찌 영남 우도 의병의 성패에만 관계되겠습니까.
그리고 영남 좌도의 여러 고을은 왜적의 무리가 꽉 차 있어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탕진되었으므로, 비록 지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싸울 만한 바탕이 없습니다. 병사(兵使) 박진(朴晉)이나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 같은 사람은 명령을 받들고 남쪽으로 와서 이미 낙동강을 건넜으나, 한쪽 구석에 있으면서 한 가지 일도 시행한 바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설령 김성일이 동쪽으로 돌아가더라도 수족을 펴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하물며 이 우도의 몇 고을은 실로 한 도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서, 군량이 여기에서 나오고 장수나 군사들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김성일 같은 어진이가 또 와서 주장하고 있으므로 이미 군사와 백성들의 희망이 달려 있는 곳이 되었는바, 회복할 근본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김성일로 하여금 열흘이나 한 달만 떠나는 것을 늦추어서 군사들의 위엄을 기른 다음 날카로운 기운을 드날리면서 동으로 향하게 한다면, 낙동강 왼쪽을 회복하는 날도 손꼽아서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김성일이 우도에 있으면 이미 잃어버린 낙동강 왼쪽 지역도 거의 수복할 수 있을 것이나, 좌도에 있으면 겨우 보전되어 있는 낙동강 오른쪽 고을도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신들이 이른바 어렵고 쉽고,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의 차례라는 것입니다.
신들은 평소 아무 일이 없을 적에도 당세의 잘잘못에 대하여 마음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나라가 위급한 날에 어찌 저희들이 살고 있는 몇 고을만을 대단하게 여겨서 우도에서 잘한 사람을 좌도로 넘겨 주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이미 좌도의 모든 명사(名士)들에게 글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니 바람 소리를 듣고 메아리치듯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들의 뜻 역시 좌도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땅이라고 여겨 버려 두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사기(事機)는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찾기가 어려운 법이며, 대중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는 뭉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신들은 기회를 포착하는 데 급급하여 구순(寇恂)을 빌려 달라고 할 겨를도 없이 지레 초유사가 가는 길을 막고 미리 강을 건너지 못하게 붙들었습니다.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할 것이나, 그 마음은 실로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어 흔쾌히 여망(輿望)을 따르소서. 그리하여 김성일이 거의 이루어 놓은 업적을 중도에서 폐하는 일이 없게 하며, 한쪽 지방에서 불러모은 무리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주D-001]즉묵성(卽墨城) : 전국 시대 때 제(齊) 나라의 성으로, 나라를 회복시키는 근거지가 된 곳을 가리킨다. 연(燕) 나라의 침입을 받아 제 나라가 거의 멸망할 즈음에 전단(田單)이 이곳에서 소에다가 무기를 장착하고 화려한 옷을 입힌 다음 꼬리에 불을 붙여서 연 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史記卷82 田單列傳》
[주D-002]신포서(申包胥)의 통곡 : 간절한 충정(衷情)을 말한다. 춘추 시대 때 초(楚) 나라의 대부(大夫)인 신포서(申包胥)가 오(吳) 나라의 군사들이 초 나라의 수도인 영(郢)에 침입하자,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런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 탓에 발에 못이 박히자 입고 있던 옷을 찢어서 발을 싸맨 뒤 진 나라에 도착해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조정의 담에 기대어서 통곡하였다. 이에 진 나라의 애공(哀公)이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주므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국난을 평정하였다. 《淮南子修務訓》
[주D-003]장순(張巡)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으로,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祿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군대를 일으켜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그곳의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卷187下忠義列傳》
[주D-004]구순(寇恂)을 빌려 달라고 : 어진 수령을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구순이 영천 태수(潁川太守)가 되었을 적에 치적을 세우고 이임(離任)되었는데, 그 뒤에 광무제(光武帝)가 남정(南征)을 할 때 구순이 광무제를 따라가 영천에 이르렀다. 그러자 영천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서 광무제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다시금 구군(寇君)을 우리에게 1년 동안만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後漢書卷16 寇恂列傳》

학봉집 부록 제4권 : [교서(敎書)] ●경상좌도 관찰사(慶尙左道觀察使)에 제수하는 교서(敎書)

왕은 말하노라. 내가 부족한 몸으로 임금 자리에 오른 지가 26년이 되었도다. 그런데 위에서는 비록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아래에서는 혜택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도다. 이에 사졸(士卒)들은 평소에 싸움하는 법을 배양하지 못하였고, 문무(文武)의 신하들은 그럭저럭 보낸다는 탄식이 있었도다.
근래에 일본의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시역(弑逆)을 행한 나머지의 악함이 여물대로 여물어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간사한 꾀를 품었도다. 그리하여 몇 년 동안 틈을 엿보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우리의 변방 성들을 함락시키고, 우리의 장수와 군사들을 도륙하였도다. 하늘까지 넘실대는 화를 멋대로 부리면서 대나무를 쪼개는 듯한 형세를 이루어, 조령(鳥嶺)을 넘기를 마치 탄탄대로를 가듯 하였으며, 한강(漢江)을 건너기를 마치 개울물을 건너듯이 하였도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염을 유린하고 궁궐을 불태워서 200년 동안 내려온 예악과 문물의 지역을 하루아침에 오랑캐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으니, 말이 이에 미침에 간담이 땅에 떨어지는도다.
아아, 이적(夷狄)들의 변고와 전쟁의 화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이처럼 참혹한 경우는 없었으며, 성패(成敗)가 빠르게 변하고 역순(逆順)이 거꾸로 되는 것 역시 이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도다. 내가 이미 덕정(德政)을 펴서 이 나라를 지켜 내지 못하였으며, 또 사직(社稷)을 지켜서 천명을 기다리지도 못하였도다. 그리고는 황급한 가운데 허둥지둥 이곳 변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바, 천지간에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도다.
다만 생각건대, 영남 지방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서, 예의와 문명의 가르침이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울연히 각도 가운데 으뜸이었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산(釜山)과 동래(東萊)가 병화를 입은 뒤로 열군(列郡)의 사민(士民)들이 소문만 듣고도 와해되고, 흉적들이 이르기도 전에 촌락이 먼저 텅 비어서, 일찍이 한 사람도 무기를 들고 왜적들에게 대항하는 자가 없단 말인가. 저 꿈틀대며 살아가는 백성들이야 비록 임금의 적에 대한 적개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부모와 처자식의 원수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심한 경우에는 왜적들에게 항복해 그들의 심복이 되어서는, 종시토록 향도(嚮導)하면서 온 힘을 다 쏟아 왜적들의 형세가 날로 치성해지게 하고 있도다. 그리고 감히 왜적들에게 대항하지는 못하고 한번 관군(官軍)의 행렬을 만나기만 하면 멀리서 바라보다가 도망쳐, 오로지 숲속으로 들어가 꼭꼭 숨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고 있도다. 또 이미 관청 창고를 도둑질하고는 불태워서 자취를 없애, 수백 리 안이 모두 반란을 일으키는 백성들이 되었도다. 이에 이륜(彝倫)이 씻은 듯이 없어졌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일찍이 듣건대, 성을 쌓는 역사를 일으켰을 적에 백성들이 모두 부역을 하면서도 굳건한 뜻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르렀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도다.
생각건대, 경은 강직하고 방정함이 사대부 중에 소문났으며, 충신(忠信)스럽고 독경(篤敬)함이 섬 오랑캐를 감동시켰도다. 경은 이미 본도 사람인 데다 또 특별한 공적을 세웠으니, 지금 더러운 왜놈들을 섬멸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함에 있어서 경을 버려 두고 누구에게 책임을 맡기겠는가. 이에 경을 경상좌도 감사에 제수하니, 경은 가서 공경히 일할지어다.
당초에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을 적에는 비록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고 있고, 군사들이 기운을 떨치고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있도다. 그러니 의병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다시 수복하는 공훈을 세울 때가 바로 지금이도다.
아아, 평소에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과감하게 간하는 선비가 없으면, 난리에 임하여서 절개를 다하여 의리에 죽는 신하가 없는 법이도다. 나는 경이 착한 말을 올린 데에서 이미 그것이 충성스럽고 붉은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는바, 경이 오늘날에 공을 세울 것을 바라는 마음도 보통보다 만배는 더 되는도다.
품계가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는 경이 임의대로 처단하고, 죄가 사형죄에 이를 경우에는 나에게 품신(稟申)한 다음에 처결할지어다. 싸움에 임하여 군율을 쓸 경우에는 역시 이에 구애받지 말지어다.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기 바라노라.

학봉집 부록 제4권 : [상향문(常享文)] ●경림서원의 상향문 [유범휴(柳範休)]

학봉집 부록 제4권 : [상향문(常享文)] ●임천서원의 상향문(常享文) [김륵(金玏)]

학봉집 부록 제4권 : [봉안문(奉安文)] ●경림서원(慶林書院)의 봉안문 [이야순(李野淳)]

융성하고 창성한 시대 만나매 / 際應隆昌
우리 대동 문운이 일어났도다 / 大東文運
산악같이 쌓은 실력 우뚝하였고 / 山岳定力
연원을 이어받은 흐름이었네 / 淵源眞流
아, 우리 문순공 그 분께서는 / 粵我文純
유가를 이끌어 간 종사였었네 / 大振儒鐸
그 당시에 영걸들 많이 나와서 / 于時英傑
구름처럼 그 문하로 몰려들었네 / 其來如雲
선생께선 문순공께 인정받아서 / 先生見知
도 들은 게 몹시도 빨랐었다네 / 楣甚蚤
문순공이 하시었던 말씀 있으니 / 文純有語
행실 높고 학문 정밀하다고 했네 / 行高學精
다시 또 제명하신 글이 있으니 / 又有題銘
예로부터 전수해 온 심법 적었네 / 古來心法
은밀하게 도의 정맥 부탁하면서 / 密付正脈
김사순의 병명(屛銘)이라 이름하였네 / 曰金某屛
공자의 삼천 제자 그 가운데서 / 三千之曾
증자 혼자 일이관지(一以貫之) 말씀 들었네 / 獨聞一貫
장려하고 추켜 줌이 저 같았으니 / 獎詡如彼
그 누가 그 사이를 갈라 놓으랴 / 夫孰間然
아, 우리 학봉 선생 그 분께서는 / 猗歟先生
백대의 사표가 될 만한 분이니 / 百世師表
진실로 높이 제사 받들어 모셔 / 允合崇享
사문을 빛내는 게 합당한 거네 / 丕顯斯文
하물며 이곳 우리 진주 지역은 / 矧爾晉陽
자취만 남아 있는 곳이 아니네 / 不啻遺躅
집서 때에 백성들을 초유하여서 / 執徐招諭
영남 우도 보장이 되게 하였네 / 保障江淮
의병들을 격동하고 권장하여서 / 激厲義徒
흉악한 왜적들을 저지시켰네 / 沮遏兇寇
계책을 시행하고 운용한 것이 / 施措運用
귀신처럼 밝은 데서 모두 나왔네 / 咸出神明
불쌍한 백성들을 진휼할 적엔 / 以至賑民
젖 물리는 어미같이 인자하였네 / 如慈乳哺
어쩌리요 나라 운수 꽉 막히어서 / 奈係邦戹
하늘이 끝내 아니 돌봐 주었네 / 終難天忱
이백 년이 흘러온 지금까지도 / 二百年來
오랫동안 선생 덕을 생각하였네 / 久猶懷德
선생의 그 은덕을 그리는 것은 / 厥維懷德
사대부만 그리는 게 아니었다네 / 匪直冠紳
이곳 진주 아흔아홉 개의 방리에 / 九十九坊
꿈틀대며 살아가는 우리 백성은 / 凡蠢動者
종들이나 기생 같은 천인조차도 / 皁隷紅女
또한 오직 선생을 그리워했네 / 亦惟先生
그러니 실로 사당 아니 세우면 / 苟無揭虔
우리 같은 선비들의 부끄럼이리 / 吾黨之恥
강물은 마르지 아니 하나니 / 長波不渴
선생의 혼령은 양양하여라 / 魂兮洋洋
고로들이 온 정성을 다 기울여서 / 故老血心
이미 서원 세우기 시작하였네 / 已勤經始
기둥 들보 올리면서 노래 불러서 / 樑欐且頌
공사가 거의 다 완공되었네 / 工役幾完
한 삼태기 흙을 끝내 못 채웠기에 / 山簣終虧
경모함에 남아 있는 한이 있었네 / 羹牆餘恨
시기에는 늦고 빠름 있는 법이라 / 時有早晚
후세 사람 책임으로 떠넘기었네 / 付貽來人
이에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 迺惕輿衷
지난날에 했던 일에 감동하였네 / 迺感舊甲
선조들의 품었던 뜻 추념하여서 / 迺追先志
옛터에다 위패를 모시었다네 / 迺傍故墟
어진 덕을 본받는단 광채는 있고 / 有光象賢
새로이 창설한단 혐의는 없네 / 無嫌創設
날아갈 듯 우뚝한 건 사당집이고 / 翼翼其廟
정숙하고 엄숙한 건 사당 뜰이네 / 肅肅其庭
향불 연기 처음으로 피어 오르니 / 其香始升
영웅의 풍채 눈앞에 뵈는 듯하네 / 英風若覩
옥봉은 축하하는 말을 바치고 / 玉峯獻賀
청천은 다시금 새로워졌네 / 菁川重新
두터운 그 은택과 깊은 어짊을 / 厚澤深仁
어찌 감히 다 갚았다 말을 하리오 / 敢曰有報
이 우주에 길이길이 머물러 있어 / 可留宇宙
영원토록 이 후세에 드리우리라 / 垂之無窮
신령께서 이리로 내려오시어 / 神其格思
저희들의 충심을 살펴보소서 / 鑑我中悃
그리하여 우리들을 가르치시어 / 惠我學的
어리석게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 毋我蒙愚

[주D-001]공자(孔子)의 …… 들었네 : 여러 제자 가운데 가장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논어(論語)》 이인(里仁)에 공자가 증삼(曾參)에게, “삼아, 우리 도는 한 가지 이치가 만 가지 일을 꿰고 있다.” 하였는데, 공자의 여러 제자 가운데서 증자만이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므로 증자에게만 말해 준 것이라 한다.
[주D-002]집서(執徐) : 간지(干支)에 진(辰)이 들어간 해로, 여기서는 임진년을 가리킨다.
[주D-003]한 삼태기 …… 채웠기에 : 아주 높은 산을 쌓음에 있어서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해서 공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로, 여기서는 김성일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학봉집 부록 제4권 : [봉안문(奉安文)] ●임천서원(臨川書院)의 봉안문 [정경세(鄭經世)]

학봉집 부록 제4권 : [봉안문(奉安文)] ●임천향사(臨川鄕社)의 봉안문(奉安文) [황여일(黃汝一)]

별과 산의 기운을 타고나시어 / 星嶽間氣
규장처럼 아름다운 명망 있었네 / 珪璋令望
품부받은 자질 이미 밝은 데다가 / 稟旣精明
뜻 역시도 곧은 데다 어질었다네 / 志亦貞諒
시경 예경 부친께 가르침 받고 / 詩承嚴訓
학문 공부 종사께 수업하였네 / 學受宗師
충과 효는 마음속에 자리잡았고 / 忠孝宅心
선과 악은 기미까지 밝게 살폈네 / 善惡察幾
듣고서 행한 것이 이에 있음에 / 聞行在斯
쌓은 실력 남들보다 출중하였네 / 定力出類
조정에 서서 모습 엄숙히 하자 / 立朝垂紳
참으로 그 모습이 군자다웠네 / 允矣君子
그 재주는 임금 물음 답할 만했고 / 才優備問
정색하자 아첨꾼들 멀리하였네 / 色正遠佞
황하 물결 버텨 내는 지주였었고 / 撐流砥柱
쇳물이 뛰어나온 금경이었네 / 躍冶金鏡
험함 편함 안 가리고 곧장 나갔고 / 矢直夷險
안과 밖이 얼음처럼 맑았었다네 / 冰淸表裏
나주 고을 백성들은 덕 칭송했고 / 湖民頌德
섬오랑캐는 그 의리에 복종하였네 / 島夷服義
올린 상소 약석 같은 말들이었고 / 藥石封章
붉은 마음 해와 달이 비추었다네 / 星日丹衷
말 깊어서 임금의 뜻 거스른 탓에 / 言深觸忌
경상 병사 직책을 맡게 되었네 / 職左當衝
양구(陽九)의 액운 든 해 만나게 되어 / 陽爻遭六
왜적의 화 하늘까지 넘실거렸네 / 賊禍滔天
의병들을 규합하여 창도를 하니 / 糾義一倡
영남 우도 지방 다시 회복되었네 / 江淮復全
용사가 갑작스레 꺾이었으니 / 龍蛇遽催
학을 타고 그 어디로 떠나갔는가 / 鶴馭何往
창생들은 그 누구를 바라다보며 / 蒼生誰望
사림들은 그 누구를 의지할 건가 / 士林安倣
공께서는 은하수를 헤집어 보고 / 或抉雲漢
기미성을 타고 하늘 오르신 건가 / 或騎箕尾
영령께선 비록 하늘 계시지마는 / 靈雖在天
이 땅에서 찾아보니 모두 물이네 / 求地皆水
충성으로 광국 공훈 참여되었고 / 以忠光國
어질어서 향사에 배향되었네 / 以賢食鄕
그런 데다 하물며 이 언덕이야 / 矧伊某丘
공께서 오가시던 곳이었다네 / 公所翱翔
우리들은 천한 데다 어리석은데 / 吾儕末蒙
다행히도 어진이에 의탁하였네 / 幸托里仁
북두성을 바라봄에 더욱 간절코 / 斗瞻彌切
담장 보매 추모하는 마음 더하네 / 牆慕益親
예법 따라 사당에다 제사 올리며 / 式遵祭社
공경스레 이 희생을 갖추었다네 / 謹具斯牲
사우가 번듯하게 지어졌으니 / 有宇斯奐
이곳으로 오시어서 편히 계시리 / 有來斯寧
기산이라 우뚝하여 높기도 하고 / 岐山崇崇
낙수라 넘실대며 흘러가나니 / 洛水洋洋
천년이고 만년이고 영원한 세월 / 萬歲千秋
경건한 마음으로 향불 피우리 / 一瓣心香

[주D-001]쇳물이 뛰어나온 : 자신을 능력이 있다고 믿어 쓰이기를 구하는 데 급급하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훌륭한 야금사(冶金師)가 쇳물을 부을 때 쇳물이 뛰어나오면서 ‘나는 반드시 막야검(莫邪劍)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 훌륭한 야금사는 그 쇠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였다.
[주D-002]약석(藥石) : 병을 치료하는 데 쓰는 약과 침으로, 잘못을 바로잡게 해 주는 좋은 말을 뜻한다.
[주D-003]양구(陽九) : 술수가(術數家)에서 쓰는 말로, 모두 재난(災難)과 액운(厄運)을 만난 것을 말한다. 양구는 하늘의 재앙으로, 3천 3백 년마다 소양구(小陽九)가 되고, 9천 9백 년마다 대양구(大陽九)가 된다고 한다.
[주D-004]용사(龍蛇) : 걸출한 인물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1년에, “깊은 산과 큰 연못에는 실로 용사가 생겨난다.” 하였다.
[주D-005]학을 타고 : 죽었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학을 타고 신선 세계를 유람한다고 여겼다.
[주D-006]광국(光國) 공훈 : 광국은 선조(宣祖)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훈명(勳名)인데, 김성일이 여기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참여되었다.

학봉집 부록 제4권 : [제문(祭文)] ●제문(祭文) [조카 김용(金涌)]

강직하고 정대한 기운에다가 / 剛大之氣
맑고도 순수한 자질이었네 / 淸純之質
재주는 하늘에서 타고났고 / 才惟天授
덕은 바로 마음속에서 얻었다네 / 德是心得
일찌감치 가정에서 가르침 받아 / 早承庭訓
뜻은 바깥 시끄러움 사절하였고 / 志絶外紛
퇴계 선생 문하에서 종유했기에 / 從遊退陶
배운 학문 연원이 있게 되었네 / 學有淵源
지향하여 나아감이 바른 데다가 / 趨向旣正
실천하여 나아감도 독실하였네 / 踐履又實
임금 계신 대궐에서 대책 올리니 / 對策龍墀
나라의 기둥 같은 신하 되었네 / 作楨王國
한원에서 아름다운 이름 날렸고 / 蜚英翰苑
대각에선 기강을 진작시켰네 / 振綱臺閣
들어가 임금 앞에서 직언을 하니 / 入犯天顔
간사한 무리들의 혼 달아났고 / 姦黨褫魄
나아가서 어사 되어 안찰을 하자 / 出持霜斧
탐오한 자 모두가 벌벌 떨었네 / 貪夫股慄
아, 바른 도를 행하였으니 / 嗟哉直道
용납되지 않은 것이 뭐 억울하리 / 不容何病
백 리에 맑은 바람 불게 되었고 / 百里淸風
삼 년 동안 은혜로운 정사 펼쳤네 / 三年惠政
불쌍한 사람들은 봉양받았고 / 鰥寡有養
강포한 자들 모두 꼼짝 못 했네 / 豪猾無橫
원망 해소시키는 건 공평하였고 / 解寃以公
옥사 심리하면서는 밝게 하였네 / 折獄惟明
알겠구나 군자는 / 乃知君子
어느 경우 처하여도 맘 편안함을 / 隨遇而安
영욕이나 진퇴나 어느 경우도 / 榮辱進退
한결같은 마음 마치 단약 같았네 / 一心如丹
예로부터 어려웁게 여기었나니 / 古難其選
전대하는 말 잘하는 사람 얻는 걸 / 專對之辭
숙부께선 명 나라에 조회 가서는 / 叔父朝天
난새나 봉새 같은 풍채였었네 / 鸞翔鳳儀
우리 임금 품고 있던 지극한 정성 / 吾王至誠
명백하게 중국에다 진달하여서 / 誕敷明白
백 년 동안 내려온 더러운 치욕 / 百年垢辱
지금에야 깨끗하게 씻게 되었네 / 從今始雪
어렵고도 복잡한 일 안 당한다면 / 不遇盤根
날카로운 재주 어찌 구별하리오 / 利器何別
숙부께선 바다 건너 사신 가면서 / 叔父入海
용 깃발에 옥으로 된 부절 들었네 / 龍旗玉節
충성심과 의로운 맘 굳게 지키니 / 仗忠與義
오랑캐들 공경하며 감복하였네 / 獰心敬服
오랑캐 땅에서도 행할 수 있단 / 蠻貊可行
성인의 가르침은 안 틀린 거네 / 聖訓不忒
저들은 그 어떠한 사람이기에 / 彼何人斯
겁먹고서 황당한 말 늘어놓았나 / 恇怯謬悠
명 욕되게 하고서도 수치 모른 채 / 辱命無恥
살아날 길 찾으려는 꾀만 내었네 / 偷生是謀
숫양에서 젖 나오면 나올지언정 / 羝羊可乳
어찌 감히 절개 변할 수가 있으랴 / 其敢有渝
마침내 온전하게 절개 보존해 / 竟全其節
문충공이 외롭지 않게 되었네 / 文忠不孤
슬프다 뭇사람들 지껄여대나 / 吁嗟衆咻
내가 품은 속마음을 그 누가 알리 / 孰知余情
높은 관작 내려 총애 보이었으나 / 寵以高秩
공에게는 영광스런 일 아니었네 / 匪公之榮
반년 동안 성균관을 맡게 되어선 / 半歲國學
선비들이 본받을 바가 있었네 / 士有標的
몇 달 동안 경연에서 임금 모시매 / 數月經筵
임금에겐 병 치료할 약석 있었네 / 君有藥石
조야에서 서로들 경하하였고 / 朝野相慶
조정의 기강 몹시 엄숙해졌네 / 王綱載肅
그러나 어쩌리오 열흘 추운데 / 如何十寒
하루 햇볕 그 무슨 소용 있으랴 / 無賴一曝
아침에는 은대에서 모시었다가 / 朝侍銀臺
저녁에는 바닷가를 지키게 됐네 / 暮戍海關
나랏일에 혼자서만 어질었으니 / 獨賢王事
어렵고 험한 것을 어찌 꺼리랴 / 寧憚險艱
아,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痛哉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서 / 國運不幸
섬오랑캐 갑자기 쳐들어왔네 / 島夷猝發
우리들이 태평에 물든 틈을 타 / 乘我狃安
전갈 같은 독을 맘껏 내뿜었다네 / 肆其蠆毒
여러 진의 장수들이 도망쳐 숨어 / 列將鼠竄
장성이 토붕와해되고 말았네 / 長城瓦裂
임금께서 변방으로 파천을 하고 / 鑾輿塞外
대궐은 무너져서 폐허되었네 / 鳳闕丘墟
팔도에는 사내들 하나도 없고 / 八道無男
만백성들 모두 다 어육되었네 / 萬姓其魚
아아, 우리 숙부 그 분께서는 / 猗歟叔父
충성심은 천성에서 나온 거였네 / 忠出其性
앞장 서서 왜적들을 막아섰나니 / 挺身當賊
강풍 불자 꼿꼿한 풀 알게 되었네 / 疾風知勁
하늘의 꾸지람은 되레 엄하니 / 天譴反嚴
충성스런 신하를 누가 알리오 / 誠臣誰識
얼마 뒤에 용서하는 명이 내리어 / 俄蒙宥命
하늘 해가 마음속을 비추었다네 / 日照衷曲
마음속에 맹세하고 일어나서는 / 誓心而起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었다네 / 傳檄列邑
충의로운 계책 이미 다 서 있었고 / 忠謀旣立
열사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네 / 烈士爭集
굳세고도 날래었던 곽재우(郭再祐) 장군 / 桓桓郭將
붓 던지고 갑옷을 몸에 걸쳤고 / 投筆荷甲
용감하고 씩씩했던 김면(金沔) 장군은 / 仡仡金公
자기 재산 다 털어서 의병 모았네 / 傾財募兵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우려 했고 / 人樂赴死
물러나서 살 생각을 하지 않았네 / 孰思退生
의로운 깃발 한번 내휘두르자 / 義旗一揮
흉적들이 사방에서 꺾이어졌네 / 兇鋒四挫
영명한 소문이 널리 퍼지매 / 英聲遠馳
행재소에선 감격스런 눈물 흘렸네 / 行在感泣
나라 지킬 간성처럼 의지하면서 / 倚爲干城
경상 감사 직임을 떠맡기었네 / 委任方伯
숙부께선 제수 명령 받으신 뒤에 / 叔父受命
더욱더 조심스런 마음 가졌네 / 益自兢惕
각 고을 수령들을 책려하면서 / 策勵守宰
사민들을 불러모아 위무하였네 / 招撫士民
그때그때 임기응변 계책을 써서 / 臨機應變
상황 따라 대처함이 귀신 같았네 / 所在如神
우두령을 넘는 왜적 길을 끊으매 / 截彼牛頭
거창이 이로 인해 진압되었네 / 居昌之鎭
성채를 세우고 깃발 세운 뒤 / 豎柵列幟
그 자리서 적진을 쓸어 버렸네 / 坐鏖賊陣
우뚝하니 높다란 진주의 성은 / 額額晉城
영남과 호남 지방 보장이었네 / 湖嶺保障
병기를 날카롭게 수리한 뒤에 / 修以利兵
이름난 장수 시켜 지키게 하여 / 守以名將
강포했던 저 왜적들로 하여금 / 能使强寇
백 번 싸워 백 번 다 도망케 했네 / 百戰百鈍
처음에는 함락될까 의심했다가 / 始疑鯨呑
마침내는 달아나는 꼴을 보았네 / 終見星遁
숙부께서 세웠던 여러 계책을 / 凡諸義略
그 어찌 하나하나 다 기록하리 / 曷可殫錄
배반했던 자들은 귀순하였고 / 反側歸順
겁을 먹고 있던 자들 뜻을 세웠네 / 頑懦有立
신하의 직분 거의 모두 다하여 / 庶盡臣職
왕업을 회복할 수 있었건마는 / 恢復漢業
그 어찌 알았으랴 군영 위에서 / 那知蜀營
갑작스레 장수 별이 떨어질 줄을 / 遽驚星隕
푸르른 저 하늘은 아득만 하니 / 彼蒼茫茫
왜 그랬나 따져 물을 길이 없구나 / 無從詰問
오랑캐들 기뻐하며 술을 따르고 / 夷人酌酒
해로운 기운 더욱 성하여졌네 / 害氣彌盛
차마 도륙 당하는 걸 그대로 보며 / 忍見屠戮
그 누구도 구원해 줄 생각 안 하네 / 誰知急病
영령께선 죽지 아니하였을 거니 / 英靈不死
눈 감으려 해도 눈을 감지 못하리 / 暝目無地
지리산 기슭에 몸 묻히는 것이 / 葬我衡山
숙부님의 평소 품은 뜻이었으니 / 乃其素志
고향의 선산으로 모셔 오는 건 / 歸之鄕隴
죄가 실로 조카에게 있는 것이네 / 罪在猶子
아,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痛哉
옛날에 우리 집안 조상들께선 / 昔我先祖
덕 쌓아서 집안을 일으키었네 / 積德家庭
제부님들 다섯 형제 분들을 보고 / 諸父五人
사람들은 다섯 개의 별에 비했네 / 人比五星
삼형제가 한꺼번에 과거 급제해 / 搴蓮折桂
나란히 아름다운 이름 날렸네 / 幷美聯馨
잔약한 후손들이 죄를 얻어서 / 孱孫獲戾
화환이 잇달아서 계속되었네 / 禍患相繼
통곡한들 그 무슨 소용 있으며 / 痛哭何歸
부여잡고 가슴 쳐도 미칠 길 없네 / 攀擗無逮
그런 중에 믿을 바가 있었던 것은 / 猶有所恃
숙부께서 살아 당에 계신 거였네 / 叔父在堂
축원하길 우뚝 솟은 저 남산처럼 / 祝以南山
오래오래 사시라고 하였건마는 / 眉壽無疆
어찌하여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 / 胡然今日
나에게 긴 상심을 짓게 하는가 / 使我永傷
나 자신을 돌아봄에 우매하여서 / 顧我顓蒙
남들에 비해 볼 때 훨씬 못났네 / 於人無狀
그런데도 충신과 효제에 대해 / 忠信孝悌
면려하고 장려함을 받았었다네 / 幾承勉獎
한 가지 재행을 보기만 하면 / 見一才行
반드시 착하다고 추켜 주었고 / 必加推美
하나라도 못된 일을 듣기만 하면 / 聞一不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책했네 / 必先責己
조카인 내가 과거 급제하여서 / 姪冒科第
사국에서 직책을 맡고 있을 때 / 待罪史局
공께서는 승문원을 맡고 있었네 / 公掌絲綸
둘이 함께 대궐 안에 들어갔을 때 / 同入禁闥
틈을 타 곁에서 모실 적에는 / 乘間侍側
날 깨우쳐 주는 말 지극하였네 / 誨我切至
받들어 모시면서 주선을 하매 / 奉以周旋
그 말소리 항상 귀에 아른거렸네 / 言尙在耳
조카인 내가 객지 머물러 있다 / 姪臥旅舍
역질에 걸려 병석 누워 있을 때 / 遘癘疫疾
숙부께서 의원을 불러온 뒤에 / 公迎良醫
종시토록 약 달여서 치료하시매 / 終始治藥
지극한 그 정성에 하늘 감동해 / 至誠所感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네 / 回命旣絶
그 은혜는 날 낳아 준 것과 같은데 / 恩同生我
보답을 하려 해도 할 길이 없네 / 欲報罔極
부월을 손에 잡고 가던 즈음엔 / 仗鉞之秋
말 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달렸지 / 駟馬東首
영남 서쪽 나눠 맡아 다스리면서 / 治分陜西
낙동강 오른쪽 향하여 갔지 / 旋向江右
이별에 임하여서 내게 말하길 / 臨別謂我
너는 헛된 죽음하지 말라 하셨네 / 爾毋徒死
두 번을 절하고서 그 말 받들고 / 再拜而受
남몰래 나의 기운 북돋았다네 / 竊自增氣
지난해 봄엔 편지 한 통을 써서 / 去春一書
나와 내 동생에게 보내 주셨지 / 貽我及弟
그 편지에 말하기를 난 병들어서 / 曰余憂瘁
앞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 將不久世
우리 집안 일으켜서 세울 희망이 / 門戶之望
너희에게 달려 있다 말씀하셨지 / 汝等是屬
그 무슨 뜻으로 이 말 하셨나 / 何意斯言
이게 바로 영결하는 말이 되었네 / 乃是永訣
부끄럽네 불초한 나는 못나서 / 愧我不肖
이처럼 온갖 재앙 만나게 되어 / 逢此百罹
한 해 넘게 군대에 종사하면서 / 從軍歲餘
변방까지 임금 수레 호위하느라 / 扈駕天涯
염습할 땐 관 곁에 있지 못했고 / 殮未憑棺
장사 때는 여차에 있지 못했네 / 喪未居次
천리 먼 길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 歸來千里
어느 사이 장사한 뒤 일 년 지났네 / 倏經一祀
무덤 위의 묵은 풀은 황량해졌고 / 宿草已荒
따스했던 숙부 얼굴 뵈올 길 없네 / 溫顔莫承
내 마음의 애통스런 심정 말하면 / 余懷之痛
태산이 무너져 내린 것 같네 / 泰山之崩
통곡해도 이내 슬픔 다할 수 없고 / 哭不盡哀
말을 해도 이내 심정 다할 수 없네 / 言不盡情
막걸리로 간략하게 전을 올리니 / 酸醪薄奠
저의 작은 정성을 살펴 주소서 / 鑑在微誠
아,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 嗚呼痛哉

[주D-001]숫양에서 젖 나오면 :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리킨다.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가서는 선우(單于)의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자, 선우가 소무를 북해(北海)로 옮긴 다음 양을 치게 하면서, “숫양에게서 젖이 나오면 돌아가게 해 주겠다.” 하였다. 《漢書卷54 蘇建傳》
[주D-002]문충공(文忠公) :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鄭夢周)의 시호이다.
[주D-003]혼자서만 어질었으니 : 혼자서만 고생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북산(北山)에,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케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不均我從事獨賢]” 하였다.

학봉집 부록 제4권 : [제문(祭文)] ●제문(祭文) [문인 정전(鄭佺)]

아, 선생께서 돌아가셨으니 나라는 누구에게 의지하고, 사림은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 백성들의 윤리는 누구를 힘입어서 부식되고, 세상의 도는 어디를 의지해서 중하게 되겠는가.
선생께서는 강직하고 꿋꿋하며 바르고 큰 기운을 품부받았고, 만 길이나 되는 절벽과 같은 뜻을 가다듬었다. 이에 조정에서 얼굴빛을 바르게 하면 모든 관원들이 두려워 떨었고, 외국에 가서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면 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면서 경복하였다. 미친 듯한 왜적들이 함부로 기세를 부리고 경상도 지방에 이들을 막을 만한 보장(保障)이 없는 지경에 미쳐서는, 명을 받들고 눈물을 뿌렸으며 부월(斧鉞)을 잡고 길에 올랐다. 충성스럽고 의로운 간담은 곧장 해와 별로 하여금 밝게 비추게 하고 풀과 나무로 하여금 색을 변하게 하였다. 그러니 하늘이 정기(精氣)를 내려서 선생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선생께서 이렇게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느 것인들 평소에 학문한 가운데에서 미루어 간 바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선생께서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도산(陶山)의 문밖에서 눈을 맞으면서 서 있었다. 그리하여 주경(主敬)으로써 그 근본을 세우고, 정의(精義)로써 그 쓰임을 이루었으며, 아는 것이 밝아서 행하는 것이 준엄하였고, 덕이 갖추어져서 재주가 온전하였다. 그러므로 아주 어렵고 위태로운 날을 당해서도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음성과 기색이 동요되지 않았던 것이며, 운용이 신속하여 사람들이 호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아 장성(將星)이 갑자기 떨어져 충신(忠臣)과 지사(志士)들로 하여금 옷깃 가득 눈물이 배게 만들었으니, 아, 애통하고 애통하다.
나 정전(鄭佺)은 어리석고 용렬한 몸으로 오랫동안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비록 썩은 나무와 같은 자질이라서 끝내 아로새기지는 못하였지만, 인도하면서 이끌어 준 그 은혜는 살갗 속에 스며들고 뼛속에 새겨졌다.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쳐 종묘사직이 다시 안정되어 선생께서 숲 속에서 각건(角巾)을 쓰고 지내면서 편안하게 말년을 보내었다면, 다시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내려주시는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끝나 버렸으니, 이 내 생에 어디에서 곁에서 모시고 지내면서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아, 애통하고 애통하다.
경상도 남쪽 끝이 왜적들로 인해 길이 막혀 있었던 탓에 병들었을 적에는 곁에서 간호하지 못하였고, 돌아가셨을 적에는 염습하지 못하였다. 이에 평소에 맺었던 정(情)과 의(義)를 다 소홀히 하게 되었다.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와 하관할 날이 이미 임박하였는바, 상여를 따르는 깃발을 바라봄에 오장이 모두 찢어진다. 이에 슬픔을 참으면서 정성을 바쳐 공경히 한 잔 술로 전을 올린다.

[주D-001]눈을 …… 있었다 :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갔다는 말이다. 《송사(宋史)》 권428 양시열전(楊時列傳)에, “양시가 어느 날 정이(程頤)를 방문하였는데, 정이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이에 양시가 곁에 시립한 채 가지 않고 있었다. 정이가 명상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문밖에 눈이 한 자가 쌓였다.” 하였다.

학봉집 부록 제4권 : [제문(祭文)] ●제문(祭文) [문인 권위(權暐)]

생각건대 존귀하신 영령께서는 / 伏以尊靈
빼어난 기운을 타고나시어 / 得氣之秀
천부적인 자질이 아름다웠네 / 稟天之精
곧고도 바른 데다 강직하였고 / 正直剛方
맑고도 밝은 데다 순수하였네 / 淸明純粹
집안에서 시와 예를 모두 배웠고 / 鯉庭詩禮
도산에서 학문 연원 이어받았네 / 陶山的源
나아가 벼슬을 함에 있어선 / 出爲世需
속마음 충성되고 의로웠었네 / 忠肝義膽
대각의 벼슬 자리 역임하면서 / 歷敭臺閣
논의함에 위풍 기개 당당하였네 / 論議風稜
강직하고 꼿꼿한 신하 있어서 / 骨鯁有臣
잘못 바로잡는 것을 임무 삼았네 / 繩糾爲任
충성을 다하다가 내쳐졌으니 / 以忠獲忌
자신에게 그 어찌 부끄러우리 / 在己何慚
남쪽 고을 나주에선 사랑 남겼고 / 愛遺南州
오랑캐 땅 일본에선 신의 보였네 / 信孚東貊
사신 뗏목 타고 갔다 돌아온 뒤엔 / 浮槎一返
사신다운 사신이라 말들을 했네 / 人稱使乎
관작 올려 그 노고에 보답한 거는 / 增秩酬勞
임금께서 돌봐 주신 데서 나왔네 / 出自聖眷
옥당에서 상소 올려 아뢰면서는 / 玉堂疏奏
송 나라의 유신 뒤를 이을 만했네 / 足繼宋儒
나라 운명 점점 더 쇠약해져서 / 國運告衰
사나운 왜적들이 쳐들어왔네 / 長鯨震蕩
열군들이 잇달아서 모두 무너져 / 列郡奔潰
형세 마치 모래 쓸려 가듯 하였네 / 勢若捲沙
몹시도 어려운 시절 만나서 / 遭時孔艱
흐느끼며 강개한 마음 가졌네 / 歔欷慷慨
위태로운 때 당하여 명을 받으니 / 臨危受命
우뚝한 모습 마치 산과 같았네 / 屹然如山
의로운 깃발 한번 크게 흔들자 / 義旗一揮
그 소리 들은 자들 호응하였네 / 聞者響報
김면(金沔)이나 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장들이 / 曰沔曰祐
모두들 다 공에게로 달려나왔네 / 咸來奔趨
기미에 맞추어서 절제를 하니 / 節制機宜
군대의 책략에 잘 들어맞았네 / 動合軍筭
등뼈를 끊고 목을 움켜잡으니 / 截脊扼吭
진주성이 이로 인해 보존되었네 / 晉陽以存
나라를 중흥시킬 공을 이룸이 / 中興之功
이로부터 비롯되기 시작하였네 / 此焉伊始
임금께서 표창하는 글 내리면서 / 褒書下降
옥패에다 금도장을 내려주었네 / 玉佩金章
손에 침을 뱉으면서 맹서를 하니 / 唾手誓天
충성스런 울분 절로 솟구치었네 / 忠憤自激
그런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나 / 云胡遘疾
하늘의 뜻 알기가 정말 어렵네 / 天意難諶
백성들은 놀라서 울부짖었고 / 士女驚呼
영웅들은 두 눈에 눈물 떨궜네 / 英雄隕淚
몸은 죽어 기미성을 타고 오르고 / 身騎箕尾
기운 남아 산하의 기운 되었네 / 氣作山河
공이 보낸 한평생을 되돌아보니 / 較其始終
청천 백일 그와 같이 맑고 밝구나 / 靑天白日
이를 두고 안 죽었다 말하는 거니 / 是謂不死
또한 어찌 마음 깊이 슬퍼하리오 / 又何深悲
나 권위는 재주 못난 소생으로서 / 暐也小生
일찍이 스승으로 모시었다네 / 曾叨函丈
그 은혜는 뼛속 깊이 남아 있거니 / 恩猶在骨
이 몸 가루 된다 해도 어찌 잊으리 / 糜粉何忘
그런데도 남들보다 늦게 곡했고 / 哭未先人
장지에도 따라가지 못하였구나 / 葬不臨穴
맘 부끄러 무덤 앞에 엎드리나니 / 慚負伏地
양쪽 뺨에 두 줄기 눈물 흐르네 / 涕泗交頤
영령께서 사라지지 않으셨다면 / 英靈不亡
어서 어서 강림하길 바라옵니다 / 庶一降止

이전 1 [2] 다음

● 분류별 보기 : 좌측에 나열된 분류명을 클릭하시면 해당분류 목록내용으로 보여지고, 맨위의 전체를 클릭하면 전체목록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 좌측 카테고리의 숫자는 각 문집별 목록의 갯수이며, 우측 글 목록앞의 일련번호는 임의 번호입니다.(입력시 문집순서에 따라 임의 생성된 숫자)
● 검색방법 : 카테고리의 전체를 선택하고, 검색칸에 특정단어를 입력 후 검색을 클릭하면 전집 중에서 해당되는 단어가 있는 글을 모두 찾아냄...

● 장기간에 걸쳐서 학봉전집 게시판을 만든 이유는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수 있게하고, 우측 하단의 검색부분 단어검색을 통해 수많은 페이지 내에서
해당목록들과 내용들을 쉽게 찾을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글 보기 방식을 각각의 목록을 열기만 해도 볼수 있도록 단순화 시켰습니다.●

[퍼가기는 허용하지만, 게시판 링크는 트래픽 문제로 엄격히 금지합니다. kim25.net] 자료 작성자 : 학봉선생 16대 金在洙 010-9860-5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