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학봉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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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평조신(平調信)에게 답하는 편지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상관과 부관 및 대마도주에게 다시 답하려던 편지

어제 여러분의 회답을 받고서 두 전(殿)의 곡절에 대해 모두 알게 되어 의혹스럽던 마음이 풀렸으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보내 주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고는 의혹스러움이 더욱 심해지는바, 말하지 않고자 한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 분 족하께서는 다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이른바 “외국에 사신으로 나간 자만이 홀로 국사를 알 뿐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 사신이 귀국의 도성에 체류한 것이 5개월입니다. 귀국의 서울에 있는 중으로서 상관(上官)만큼 고금을 통하고 국사를 아는 자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귀국의 사정에 대해서는 감히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하였으나, 두 전의 존망(存亡)과 같은 것은 이해에 상관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사신이 어찌 능히 누가 말했는지를 기억해 내겠습니까.

무릇 휘원(輝元)이 대내전(大內殿)을 대신하고 융경(隆景)이 소이전(小二殿)을 대신했다는 것은 삼가 들어서 알겠습니다. 그러나 족하께서는 말하기를, “휘원과 융경이 두 전과 같은 성씨(姓氏)인데, 휘원은 모리(毛利)가 식읍(食邑)이고 융경은 소조천(小早川)에 옮겨 가서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렇게 호칭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곧이듣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대내전의 성씨는 다대량(多大良)이고, 소이전의 성씨는 원씨(源氏)로, 두 집안이 대대로 원수간이어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분명하게 아는 바입니다. 지금 모리의 성씨는 사신이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조천은 실상 휘원의 동성 숙부(同姓叔父)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원씨인 소이와 같은 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첫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대내전과 소이전은 여러 전 중에서 성대한 자였습니다. 산양(山陽)과 서해(西海) 지역을 차지하여 대대로 전해온 지 이미 오래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듣고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과연 그대로 있다면 귀국의 아이들조차도 모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글을 아는 귀국의 서울에 있는 중들과 관내인 남도(藍島)와 적관(赤關)의 사람들이겠습니까. 비록 휘원은 모리가 식읍이고 융경은 소조천으로 옮겨 산다고 하더라도, 어찌 두 전의 드러난 명칭을 버리고 현읍(縣邑)의 하찮은 이름을 칭하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지난해에 사신이 일기도(一歧島)를 통과할 적에 두 전의 사자(使者)에게 적관으로 와서 서계와 예물을 받도록 청하자, 세 분 족하께서 허락하였습니다. 그때 사신이 배를 조금만 더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찌 능히 면대해서 전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 세 분 족하께서는 관백이 행차를 재촉한다는 것을 핑계로 총총히 지나갔습니다. 사신도 처음에는 그런가 하여 한결같이 족하의 지휘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관백 전하는 한창 동정(東征)하는 중이어서 우리 행차를 재촉했을 리가 없었는데도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제가 보낸 편지에 “그 지방을 통과할 때 한 사람의 사신도 달려오지 않았다.”고 이른 것은, 감히 세 분 족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처음에는 두 전이 와서 받아 가는 것을 허락해 놓고, 적관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잠시도 머물지 않았으니, 두 전이 비록 사람을 보내어서 문안하고자 했더라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지금 도주(島主)가 먼저 나왔을 때 두 전도 이미 사신이 환국하는 시기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지나가는 경계에 편지를 남겨 두어서 사신에게 전해 줄 수가 없었겠습니까. 도주에게는 편지를 부치면서 사신에게는 한 글자 문안하는 글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섣달 21일에 비후(備後) 지방의 경계를 통과할 적에 관선(官船)이 지나가는데, 배 모양이 하도 훌륭하기에 물어 보니, 모리전이 왜경(倭京)에 조회하러 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귀국의 서울에 있는 절에 머물러 있을 때 소조천(小早川) 융경(隆景)이 우리를 찾아와서는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 음악을 들려 주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또 액자를 써 주기를 청하여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 절의 중에게 물어 보니, 바로 도독시종(都督侍從)으로서 풍주(豐州)와 축주(筑州) 두 주를 지키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모리와 소조천이 과연 두 전을 위하여 서계와 예물을 받았다면, 어찌 서로 만났는데도 문안 인사를 하지 않고, 서로 보았는데도 사례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왜국 풍속이 비록 중국 글자를 알지 못하나, 본도 및 계빈(堺濱) 같은 곳에는 역시 한자(漢字)를 해독하여 서계를 통하는 자가 있는데, 두 전의 지역에만 유독 한자를 아는 자가 없단 말입니까? 만약에 과연 없다면 이번의 서계는 누가 쓴 것입니까? 아아, 이웃 나라의 서계와 예물을 받는 것은 막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신(印信)도 없고 도서(圖書)도 없으며, 천리 밖에서 글씨 쓰는 사람을 빌려 써서 보내면서 남에게 믿게 하고자 하니, 되겠습니까? 이것이 다섯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의심스러운 점은 비록 세 분 족하의 처지(處地)에서 생각하더라도 능히 의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당초 예조에서 서계를 만들 때에 역관(譯官)이 이미 세 분 족하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 전의 존망을 족하가 알고 있었다면 그 때에는 비록 미처 말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신에게는 일러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 분 족하께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관백에게 여쭈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이 사신이 세 분 족하께서 말하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하지 않으면서 일에 임해서 신중히 한 것에 대해 더욱더 탄복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관백 전하께서 일을 처리한 것이 이와 같이 광명정대한데, 어찌 유독 두 전의 일에 대해서만 허한 것을 실이라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겠습니까. 세 분 족하께서 대강에 대해서는 사실을 토로하면서 감히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은, 장차 관백에게 명을 여쭈어서 잘 처리하기 위해서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지금 사신이 서계를 받아 가는 것은 대개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하여 처분을 받고자 하는 것이지, 어찌 두 전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 여겨서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말이 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였는데, 사신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세 분 족하께서는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으로써 허물을 삼지 말고, 한결같이 관백 전하의 훌륭한 뜻으로써 마음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피차간에 의심하고 막히는 폐단이 없어서 귀국의 신의가 이웃 나라에 더욱더 드러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세 분 족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주D-001]처지(處地) : 두주(頭註)에, “처지(處地)는 아마도 처지(處之)인 듯하다.” 하였다.
[주D-002]대개 : 원문은 ‘가(可)’인데, 소주에, “초본에는 ‘개(蓋)’로 되어 있다.” 하였다. 번역은 초본을 따랐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상관(上官)과 부관(副官) 및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편지

성일은 상관과 부관 및 대마도주 세 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두 나라가 강화(講和)해서 한집안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귀국의 여러 전(殿)에게도 수교하는 것을 허락하여 통신사가 왕래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오직 큰 바다가 사이에 있어서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던 탓에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접대한 뒤에는 비록 수백 년이라도 계속하여 일찍이 폐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세 분 족하께서도 일찍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번에 사신이 올 적에 우리 전하께서는 이웃 나라와 수교하는 우의를 생각하여 여러 전에게도 은전을 내려 경극전(京極殿), 세천전(細川殿) 등 여섯 전에게도 모두 예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국에 도착하여 보니, 위에서 말한 여러 전들은 생존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관백 전하께서는 신의를 중하게 여겨서 우리나라에서 알지 못한 것을 조롱하지 않고 이내 능히 적당하게 조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물을 남겨 두어서 여섯 전의 직을 대신할 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는 그 곡절을 국서 안에다 갖추어 기재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왕명을 풀밭에다 팽개치게 되는 사태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처리의 명백함은 실로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아, 관백 전하의 성대한 뜻이 이미 이와 같은데 사신이 어찌 감히 오늘날에 다 말하지 않아서 의혹스러운 단서를 남기겠습니까. 세 분 족하께서는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대저 주방(周防)의 대내전(大內殿)과 서해(西海)의 소이전(小二殿)은 우리나라에 교빙(交聘)을 통해서 가장 친하고 또 오래 된 전(殿)입니다. 지난 여름에 사신이 지나갈 적에도 우리 임금께서 하사하는 물품을 전했습니다. 비록 그러나, 사신이 귀국에 체류한 지가 1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듣고 본 것이 없겠습니까.

도성에 있을 때 여러 중이 모두 말하기를, “두 전은 멸망된 지가 이미 오래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적관(赤關)에 도착하니, 절의 중과 마을의 늙은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내전(大內殿) 의륭(義隆)은 40년 전에 모리전(毛利殿)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 자손도 모두 멸망당했다. 지금 주방(周防), 장문(長門), 석견(石見) 등 일곱 주(州)를 주관하는 자는 모두 모리전의 손자인 황원(晃元)이다. 소이전은 관백에게 죄를 지은 탓에 그가 죽은 지도 여러 해가 되었고, 그 땅을 대신 지키는 자는 소조천(小早川) 융경(隆景)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달 6일에 남도(藍島)에 도착하니 남도의 왜인이 하는 말도 적관에서 들었던 말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대저 도성에 있는 중은 모두 글을 알고 고금(古今)을 아는 자들이니, 그들의 말은 반드시 망녕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적관은 바로 대내전의 관내이고, 남도 역시 소이전의 지역이니, 이런 사실을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로써 본다면 두 전이 멸망되었음은 또한 경극전(京極殿)이나 세천전(細川殿) 등 여섯 전과 같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신이 예물을 그들에게 전할 때 세 분 족하께서 바른말을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에서였습니까? 아아, 세 분 족하의 마음을 보통 사람이 어찌 능히 헤아리겠습니까.

저 경극전 등 여러 전이 사망한 것을 세 분 족하께서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국의 명령권이 관백에게 있으니, 관백에게 품의하기 전에 세 분 족하께서 어찌 감히 나라 안의 사정을 딴 나라에 누설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와 같았던 연고로 당초 예조에서 서계(書契)를 짓고 사신이 예물을 전할 적에 세 분 족하께서는 끝내 감히 사실을 토로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치와 형세가 반드시 그러한 것이니, 어찌 세 분 족하께서 이웃 나라를 속이려는 뜻이 있어서 그와 같이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신도 족하께서 말하지 않은 것을 용서하고 일에 임해서 신중히 했음을 더욱 높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관백 전하께서 큰 신의를 밝게 보이어 이미 여러 전의 생존과 사망을 명백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전이 사망한 것에 대해서 세 분 족하께서는 무엇이 곤란하기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일에 말하지 않은 것은 관백의 명이 없었기 때문이거니와, 오늘날에 말할 수 있음은 관백의 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후에 말하고 말하지 않음이 비록 다르나 모두 그때 그때의 사정에 합당한 것이니, 또한 어찌 의리에 해롭겠습니까.

아아, 사신은 이미 두 전이 사망했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두 전의 얼굴을 직접 본다 하더라도 오히려 살아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경계를 지나는 동안에 소위 두 전이라는 자는 일찍이 한 사람의 하인도 경계에서 마중하도록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계빈(堺濱)에 사람을 보내기는 하였으나, 두 전의 편지라는 것이 이내 한 사람의 손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두 전은 한 지방을 통솔하는데 어찌 편지를 쓸 만한 사람이 없어서 계빈에서 글씨 쓸 사람을 빌렸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는 없는 일입니다. 족하께서는 이런데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의리를 해치고 신의를 잃어서 이웃 나라를 속이게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또 우리 조정에서 귀국과 우호를 통하는 데 있어서 어찌 옛 주인과 새 주인에게 차별이 있겠습니까. 무릇 흥폐와 존망은 나라와 집안에 있어서 예사로 있는 일입니다. 지금 모리전(毛利殿)과 소조천(小早川)이 이미 두 전의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만약 두 전을 대신해서 우리나라와의 우호를 계속하고자 한다면, 사실대로 다 말하고서 우리 조정의 명령을 받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름어름 속여서 패망한 자의 명호를 빌린단 말입니까?

생각건대, 세 분 족하께서는 모두 관백 전하의 마음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는 분들이니, 반드시 사신의 말을 그르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신 역시 우리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서 통신하는 것이 직분인데, 어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짓 편지를 받아서 우리 전하를 속이겠습니까. 이것은 사리에 지극히 분명하고도 분명한 것이니, 세 분 족하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답하려던 편지

편지를 보고 족하의 뜻을 자세히 알게 되었는바 많은 위안이 됩니다. 사신이 한 해가 넘도록 해외에 있었으나 여행중에 곤란한 점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를 사모하는 어진 도주(島主)의 정성과 잘 보호해 주는 새 태수(太守)의 부지런함 덕분이었으니 몹시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도주께 병이 있어서 한 번도 면대하지 못하였으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새 태수가 족하의 뜻을 받들어서 예에 따라서 부지런히 접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심지어 행차를 전송하지 못하는 것을 섭섭하게 여겨서 특송선(特送船)을 뽑아 보내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호하기까지 하였으니, 족하의 사대하는 공경함을 더욱 알겠는바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다만 편지 안에서 누누이 말한 일은, 우리 조정에서 조처가 있을 것이니 사신으로서는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족하가 긴 편지를 보내어 사신을 책망한 것은 매우 중하니, 어찌 감히 한마디 말로써 깨우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특송선(特送船)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수령들이 숙배(肅拜)하는 것을 폐지한 것은, 근년부터 한 것이 아니며, 또한 까닭 없이 줄여서 처음대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세견선(歲遣船)의 정액(定額)은 모두 선왕조의 약조 안에 들어 있는바, 귀도(貴島)엔들 어찌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겠습니까. 대관(代官)에 이르러서는 비록 태수를 대리해서 법을 시행한다고는 하나, 이것은 대마도 안에서 임시로 설치한 관원이니, 우리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닙니다. 도주가 이미 도서(圖書)를 받았는데 대관이 또 받고자 한다면, 이것은 한 섬에 주인이 둘인 것이니, 어찌 옳겠습니까. 또 경오년에 있었던 변고는 바로 섬사람이 스스로 허물을 저질러서 우리 조정의 단교(斷交)를 당한 것이니, 족하가 이른바 악한 짓을 한 나머지 재앙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비록 세월이 오래 흘렀고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옛 법을 가볍게 허물어서 이미 폐지했던 규례를 다시 회복하겠습니까. 우리 조정이 귀도에 대하여 어찌 박하게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공이 있으면 관직을 상으로 주어 와서 조회하는 것을 허가하고, 죄가 있으면 그 관직을 빼앗아서 서로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지나간 일에서 명백히 징험됩니다.

섬 안에 만약 예전대로 관직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 족하는 어찌하여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고 공을 세워서 우리 조정의 지시를 받도록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족하께서 아무리 사신이 우리 조정에 전달하기를 바랄지라도 될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편지 안에는 또 족하께서 청해서는 안 되는 것과 사신이 감히 보고하지 못할 내용이 있는바, “대명(大明)을 침범할 때 남쪽 변경의 길을 취하겠다.”는 한 가지 일이 그것입니다.

대저 남쪽 변경이란 우리나라 지방이고, 대명은 우리 조정이 섬기는 나라입니다. 우리 지방을 경유하여 우리가 섬기는 나라를 침범하도록 한다면, 이것은 이웃 나라의 손을 빌려서 상국을 직접 침범하는 일이 됩니다. 가령 과연 족하가 말한 바와 같이 지름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조정에서 길을 열어 앞장서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법에는 부산(釜山) 한 길을 제외하고 다른 길로 들어오는 왜인은 모두 적왜(賊倭)로 논죄하여 처단하고 있습니다. 만약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변경 관리가 반드시 군법을 시행하는데, 이것은 귀도에서도 분명하게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족하가 이렇게 운운하면서 청을 한 것은, 어찌 이미 통신사를 서로 통해서 의리에 있어서 한집안같이 되었으니 비록 서울을 범해서 행군하더라도 금단하는 바가 없으리라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귀국은 우리나라의 우방이요, 대명은 우리나라의 군부(君父)입니다. 지금 만약 귀국에게 편리한 길로 행군하도록 허락한다면, 이것은 우방이 있는 줄만을 알고 군부가 있는 줄은 모르는 것으로,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고, 덕에 있어서는 의리를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 짓은 필부도 부끄러워하는 법인데, 하물며 당당한 예의의 나라에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다시 한마디 말로 비유할 만한 것이 있으니, 족하께서는 시험 삼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귀도입니다. 족하께서는 동쪽으로 귀국을 섬기고 북쪽으로 우리 조정에 복종하니, 하늘을 겁내고 대국을 섬기는 정성이 매우 지극합니다. 그런데 족하에게 길을 빌려서 두 나라를 침범하려는 자가 있다면 족하께서는 허락하시겠습니까? 명분으로는 대국을 섬긴다고 하면서 몰래 적에게 길을 터 준다면, 이는 몹시도 반복무상하여 신의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귀국에서도 길을 빌린다는 말을 낼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족하께서 감히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또 족하의 말에, “귀국의 지금 같은 형세가 이후 500년 뒤에 이르러서도 어찌 감히 이와 같겠는가. 형세에 따라서 이웃 나라와 교제하기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두 나라가 화친함에 있어서는 단지 신의(信義) 두 글자가 있을 뿐이고, 강약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신의를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강약만을 비교한다면, 이것은 실로 시정배의 사귐이지 어찌 큰 나라의 의리이겠습니까. 지금 관백이 건국한 초기에 가장 먼저 이웃 나라와 수교하는 의리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포로로 잡아 갔던 우리나라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도적의 머리를 베어 바쳐서, 그 예가 지극히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서 그 뜻에 답한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시세를 살피거나 강약을 비교해서 향배를 정한 것이 아니었으니, 족하가 시세를 살핀다고 한 말은 이에 실언한 것입니다.
사신은 다만 통신하는 것이 직책이니, 어찌 감히 이런 따위의 말을 우리 조정에 전달하겠습니까. 족하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D-001]세견선(歲遣船) : 대마도주에게 우리나라를 내왕하도록 허락한 무역선(貿易船)을 말한다. 세종 초에 왜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삼포(三浦)를 열어 무역을 허가하고, 거기에 왜관(倭館)을 두어 머물게 하였다. 그 뒤에 왜인들의 내왕이 잦아지자 세종 25년(1443)에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였으며,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특송선 2, 3척을 허락하였다. 세견선에는 대, 중, 소의 세 종류가 있으며, 일본과 문제가 있을 때마다 배의 숫자를 증감하였다.
[주D-002]도서(圖書) : 왜인에게 발급한 동인(銅印)으로, 왜인들이 항구에 들어오면 변장(邊將)은 서계(書契), 노인(路引)과 함께 이를 자세히 검사하고, 입국한 정원수를 조사해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주D-003]경오년에 있었던 변고 :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亂)을 말한다. 세종조 때 대마도의 요청에 의하여 부산포(釜山浦), 내이포(乃而浦), 염포(鹽浦)의 세 포구에 60명에 한하여 일본인들을 거주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서 우리나라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중종이 대마도주에게 그들을 철수시키도록 통고하자 일본인들이 대마도주의 후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가 대패하여 세 포구의 일본인들이 모두 쫓겨났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부관(副官) 평조신(平調信)에게 주려던 편지 신묘년(1591, 선조 24)

어제 족하의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쇄환(刷還)하는 일로써 서해도(西海道)로 간 줄을 알았는바,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우리나라 지방이 귀국의 평호(平戶) 여러 섬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해변의 백성들이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다가 포로된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비록 가끔 쇄환한 적이 있었지만 천 명 중에 한두 명에 불과했으니, 또한 탄식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관백이 집정(執政)한 뒤로부터는 이내 억세고 사나운 자를 소탕하여 사방을 평정한 다음, 이웃 나라와 우호 맺기를 급선무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섬에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백성들을 일시에 돌려보냈으며, 개나 쥐처럼 나쁜 짓을 하던 자들 역시 본국의 저잣거리에서 처형하였으니, 의리가 매우 드러났고 신의도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 가상하게 여기시고 100년 만에 길을 터서 예물을 가진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두 나라가 서로 친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삼면 해변이 잠을 편히 자게 되었는바, 억만년토록 한없는 복을 열었으니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사신이 본국에 있을 때에 포로로 잡혀 갔던 백성들의 말을 들으니, 지난해에 포로를 색출하는 것을 급하게 하였던 탓에 누락된 자가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여기 와서 또 길거리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포로로 잡혀 갔던 백성들의 말과 대략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족하에게 여러 번 말하면서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족하께서는 사신의 말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곧바로 관백 전하에게 아뢰고 여러 섬에 통첩하여 다시 포로들을 색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남만(南蠻)에서 돌려보낸 자 1명을 먼저 사신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맏아들을 서해도에 보내어서 독촉함으로써 반드시 대마도에서 우리들에게 넘겨 주게 하였는바, 족하께서 몹시 애를 쓰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찌 섬 안에 있는 누락된 자들만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이겠습니까. 남만으로 팔려 갔던 자들도 차례차례 돌아오게 될 것이니, 매우 성대하고도 성대합니다.

족하께서는 지난해 겨울에도 나그네의 괴로움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두 번이나 바다를 건너가 몸소 조사하고 수색하여 많은 도적을 처단하고 많은 포로를 돌려보냈으니, 이는 실로 이전에는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는 족하의 공을 훌륭하게 여기시고 2품의 높은 벼슬로써 표창하기까지 하셨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은전이었습니다. 족하께서도 역시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번에 족하께서는 또 회사(回謝)하는 명을 받고 사신과 함께 가면서 쇄환하는 일에 이와 같이 힘을 쏟으니, 사신이 복명하는 날에 사유를 갖추어서 계달한다면 우리 전하께서 족하에 대해 가상하게 여기고 기뻐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말은 실천하는 것이 귀한 것이고, 일은 마침이 있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한갓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시작이 있는데 마침이 없어서도 또한 안 됩니다.

족하께서 이미 여러 도(道)를 수색한다고 말했고, 또 대마도에서 교부(交付)하겠다고 말하였는데, 사신이 이 말을 들은 지도 벌써 4개월이나 되었습니다. 날짜를 헤아려 보면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사람이라도 오지 못했을 리가 없을 터인데, 하물며 이들 여러 섬은 아주 가까운 곳이 아닙니까. 저의 추측으로는 이미 대마도에 모두 도착하여서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되는바,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다만 여러 섬에 있는 신하들이 명령을 잘 받들지 않아서 날짜가 지체된다면, 사신은 필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말이 과연 실천된 것이겠으며, 일이 과연 마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문(信文)이란 자에 이르러서는, 사신이 직접 보았는데, 선위사가 이미 즉시 보내지 않았고, 지금은 또 서해도로 데리고 갔으니, 이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사신이 이 점에 대해 비록 의심하지 않고자 하나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위사는 바로 사신을 접반(接伴)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접반이라고 이름했으니 비록 딴 섬에 있는 자일지라도 쇄환함이 의리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문 등 두 사람은 현재 선위사의 집 하인으로 있으니, 어찌 아까워해서 돌려보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당초 사신이 올 때에 선위사가 이미 관백의 명을 받들고 일기도(一歧島)에서 우리를 맞이했으니, 이번에도 국경까지 호송하는 것이 바로 그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계빈(堺濱)에서 먼저 출발하면서 알리지도 않고 간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핑계 댈 말이 있으리니, 이는 필시 쇄환하는 일이 급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만약 색출한 포로들을 데리고 대마도로 뒤쫓아온다면, 선위사의 직책을 잘못한 것이 아니겠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귀국의 사체에 있어서 온당치 못할 것입니다.

족하께서는 우리나라에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선위사가 다른 나라 사신을 접대하면서 어찌 갈 때와 올 때에 달리 대한 적이 있었으며, 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예절에 태만히 한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 사신이 상관과 부관과 동행하고 있으니 선위사가 있고 없고는 비록 상관이 없다 하겠으나, 두 나라가 교제하는 즈음에 있어서 사체가 이와 같아서는 결코 마땅치 않을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이르기를, “너는 그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일 역시 이와 같은데, 족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아, 사신이 만 리 먼 길에 나그네가 된 지가 벌써 1년이 지났으니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하루가 급합니다. 그러나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처럼 자애로우시어 우리 백성들이 이국에 포로로 잡혀가 종이 된 것을 생각하시고는, 마치 자신의 몸이 몹시 아픈 것처럼 여기시었습니다. 이에 사신들이 하직하던 날 하교하시기를, “포로로 잡혀간 백성으로서 아직 쇄환되지 않은 백성이 있으면 그대들이 접반하는 사람에게 말하든지, 혹 일본의 유사(有司)에게 공문을 보내어 의리에 의거해서 잘 주선하여 전부 다 찾아 내어 쇄환하게 하라. 그리고 비록 남만에 들어간 자라도 쇄환할 형편이 되거든, 이들도 아울러 쇄환하도록 도모하라.” 하셨습니다.

임금의 말씀이 정녕하게 귀에 가득 남아 있는데, 사신이 어찌 감히 오래 체류하는 것을 꺼려서 우리나라 사람이 이르기를 기다리지 않은 채 오직 바다를 건너가는 것만을 급하게 여기겠습니까. 대마도에 도착한 다음에 비록 체류하는 괴로움이 있더라도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오지 않으면 결단코 왕명을 팽개치고 지레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족하는 이 뜻을 살펴서 말을 실천하기를 힘쓰고 일에 끝마침이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족하의 명망과 사업이 이웃 나라에 드러날 것이니, 이웃 나라에서 족하를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족하께서는 도모하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주D-001]도(道) : 소주에, “초본에는 도(島)로 되어 있다. 아래도 같다.” 하였다.
[주D-002]공자(孔子)께서 …… 하셨습니다 : 노(魯) 나라 문공(文公) 때부터 종묘에 매달 초하루를 고하는 예식을 폐지하였는데, 희생으로 양(羊)을 바치는 의식만은 그대로 존속되어 왔다. 자공(子貢)이 양을 바치는 의식을 없애 버리려고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였는데, 이는 양을 바치는 절차라도 남아 있으면 그런 예가 있다는 것을 알겠지만, 양을 바치는 것마저 철폐하면 그 예는 아주 잊어버리게 됨을 이른 것이다. 《論語八佾》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선위사(宣慰使) 평행장(平行長)에게 답하려던 편지

성일 등은 말씀드립니다.
서계에 대한 일은 족하께서 잘 주선해 주신 데 힘입어서 고쳐 쓰게 되었으니, 어찌 사신에게 있어서만 다행이겠습니까. 실로 귀국에 있어서도 영광입니다. 그러니 이웃 나라의 사람치고 그 누가 바다 바깥에도 인물이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매우 다행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다만 서계 안에서 말한 한 대목의 말뜻이 의리에 비추어서 크게 타당치 못한 점이 있으나, 사신이 이미 백 리 밖에 나와 있으므로 재차 번거롭게 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잠자코 싸 가지고 가기는 합니다. 그러나 족하의 직책이 선위사이니, 사신의 심정을 통하도록 하여 두 나라 사이에 막힘이 없게 하는 것은 바로 족하의 책임입니다. 사신이 어찌 한 번 말하지 아니하여서 뒷날 불화의 씨앗을 남기겠습니까. 이에 감히 번거롭게 군다는 꾸지람을 무릅쓰고 사사로이 하집사(下執事)에게 말하는 바이니, 족하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옛적에 초왕(楚王)이 제(齊) 나라 환공(桓公)에게 이르기를, “당신은 북해 가에 있고 나는 남해 가에 있어서 암내난 말과 소가 서로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이는 두 나라 사이에 길이 아득하게 먼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 나라와 초 나라는 비록 거리가 멀기는 하였지만 글이 같고 제도도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이 막힘 없이 왕래하여 전쟁을 할 때나 평화스러울 때나 함께 종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는 큰 바다가 사이에 있어서 구역이 저절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는 실로 하늘이 분간한 바이고 땅이 쪼개어 놓은 바로서, 진실로 풍속과 교화가 능히 통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뱃길을 통해서 형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강역을 지키면서 가끔 통신사나 보낼 뿐 길한 일에 경하하고 흉한 일에 조문하는 일조차도 능히 서로 통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이 어찌 천험(天險)이 앞을 가로막아서 인력(人力)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평상시에도 교제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군사를 연합하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서계 안에 이르기를, “한 번 뛰어 대명국으로 뛰어들어가고자 하는데, 그 때에 귀국이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뜻을 생각하여 우리나라와 한패가 된다면 더욱 우호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아, 이것이 실로 관백 전하의 뜻입니까, 아니면 글을 지은 자가 우연히 큰소리를 쳐서 우리나라를 시험해 보려는 것입니까?

아아, 남에게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면 상대방이 장차 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능히 응하지 못하면 요구한 자가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 피차간에 서로 요구하고 원망한다면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나고 겉으로 틈이 생기는데, 이렇게 하고서도 우호관계를 능히 온전하게 한 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두 여자가 국경에서 뽕나무를 놓고 서로 다투다가 오히려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전쟁을 일으켰으니, 두 나라가 서로 요구하다 보면 어찌 걱정될 만한 기틀이 없겠습니까.

우리 조정이 귀국과는 사세가 서로 가까이할 수 없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하물며 대명국은 바로 우리 조정의 부모 같은 나라로, 우리 전하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공경과 대국을 섬기는 정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북쪽으로 신경(神京)을 바라봄에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 듯하여 조공하는 사신의 행차가 서로 잇달고 있는바, 이는 실로 온 천하가 다 들어서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귀국이 지금은 대명과는 화친관계가 끊어졌으나, 수십 년 전에는 일찍이 대명국에 들어간 사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명 나라와 한집안 같은 사이인 줄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아아,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는 천지간의 떳떳한 의리로서, 이른바 민이(民彝)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이것이 없으면 의관은 차려 입었더라도 금수나 마찬가지이고, 나라로서 이것이 없으면 중국이라도 오랑캐 나라와 같은 법입니다. 대명과 우리 조정은 대의(大義)가 이미 정해져서 하늘과 땅이 위치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두 마음을 품는다면, 이것은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해치고 자식과 아우가 아비와 형을 치는 것이니, 인간의 도리에 어떠하겠습니까.

귀국에서 대명을 침범하려는 계획에 대해서는 각자 국사를 도모하는 신하가 있으니 진실로 사신이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의리에 있어서는 사신이 밝게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계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도 잠자코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간다면, 이것이 어찌 사신의 의리이겠습니까.
송(宋) 나라의 화원(華元)은 초(楚) 나라 장수인 자반(子反)의 침상에 올라가 그 실정을 다 말하여서, 능히 적장(敵將)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두 나라의 우호를 이룩하였습니다. 지금 이 사신이 말하는 바는 천지간의 떳떳한 의리로서, 오랑캐나 중국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루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귀국에서 이 말을 들으면 어찌 깜짝 놀라고 마음에 감동되어서, ‘우리나라와 한패가 되라.[黨國]’고 한 말을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우호는 지금까지 200년이나 되었습니다. 가령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와 결탁하여 귀국을 해치려고 할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그 나라와 한패가 되어서 서로 돕는다면, 귀국에서는 우리 조정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조정이 귀국과 우호를 맺은 이래로 대대로 이웃 나라와 사귀는 신의를 두터이 해서 일찍이 화살 한 개도 귀국 변경에 대고 쏜 적이 없습니다.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에 이와 같았으니, 대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이웃 나라와 한패가 되어서 대국을 침범할 수 없음이 또한 분명하지 않습니까.
대저 두 나라 사이에 오가는 국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망을 해소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고, 혐의를 맺고 틈이 벌어지는 단서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법 아닌 말과 의리를 해치는 담론을 어찌 문자로 기록하여 이웃 나라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헤아려 보건대, 이것은 글을 지은 자가 살피지 못한 것이지, 아마도 관백 전하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아아, 족하께서는 국사를 도모하는 어진 신하인데, 일찍이 이에 대해서 생각이 미친 적이 있었습니까? 사신의 이 말은 우리 조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실로 귀국에 충심을 바치는 뜻입니다. 만약 족하께서 이 뜻을 관백 전하에게 알려 준다면, 이 또한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케 하며, 이웃 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영원토록 온전하게 하는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D-001]두 여자가 …… 일으켰으니 :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 “처음에 초(楚) 나라의 변경 고을에 사는 비량씨(卑梁氏) 집안의 처녀와 오(吳) 나라의 변경 고을에 사는 여자가 뽕나무를 두고 서로 다투었는데, 두 여자의 집에서 노하여 서로 싸웠다. 이에 두 고을의 수령이 듣고서는 노하여 서로 공격하여 초 나라에서 오 나라의 변방 고을을 멸망시켰다. 이에 다시 오왕이 노하여서 드디어 초 나라를 공격해 두 도(都)를 빼앗은 다음 돌아갔다.” 하였다.
[주D-002]깜짝 놀라고 : 원문은 ‘확연(矍然)’인데, 소주에, “초본에는 ‘구연(瞿然)’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다시 현소에게 답하는 편지

한 번 뛰어 바로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서 400여 주를 우리 조정 풍속대로 바꾸고 제도(帝都)에서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할 계획이 나의 가슴속에 있다. 귀국이 먼저 입조(入朝)한다면 원대한 생각이 있고 가까운 걱정은 없을 것이다. 바다 복판에 있는 먼 나라 작은 섬들로서 뒤에 오는 무리는 허용할 수가 없다. 내가 대명국에 들어가는 날에는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을 바라보면서 더욱 이웃 나라와의 맹약을 닦을 것이다.

○ 이 말은 ‘장차 상국(上國)에 들어가서 천하를 평정하고 억만년 정화를 열 작정인데, 이 때에 만약 귀국이 먼저 와서 나에게 입조한다면 가까운 걱정이 없을 것이요, 만약 뒤에 오는 나라가 있을 것 같으면 허용치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뜻이 이와 같으므로 그 다음에 잇달아서 ‘내가 대명국에 들어가는 날에는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을 바라보면서’라고 말하였는바, 이것은 대개 먼저 와서 입조하라는 뜻을 되풀이하여 약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대명국에 조회한다는 뜻입니까.

성일은 말씀드립니다.
어제 회답을 주시면서 나의 말을 탓하지 않고 깊이 옳게 여기는 뜻이 있었는바, 지극히 감사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존사(尊師)께서는 끝까지 ‘입조(入朝)’라는 말의 ‘조(朝)’를 대명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제 편지에서 논한 것도 또한 서계를 지은 자의 본뜻을 잘못 해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점에 대해서 외람스럽게도 위와 같은 해석을 더했으니, 대사께서는 번거롭게 말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지 말고 다시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대개 제가 풀이한 ‘조(朝)’ 자의 뜻이 비록 전날의 견해와 조금 같지 않은 점이 있으나, 이는 모두 대명에 조회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존사께서는 무슨 견해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우리나라와 귀국은 구역이 저절로 나누어져서 창파 만리에 뱃길이 겨우 통할 뿐이니, 두 나라가 비록 정벌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어찌 서로 간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각자 자신들의 강토를 지키면서 대대로 이웃 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두터이 하여 억만년토록 화평한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사신이 온 것도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전하께서 실로 귀국의 신의를 가상하게 여겨서 온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귀국의 답서를 보니 감사하다는 내용은 없고 글 뜻이 장황하기가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조정에서 당초에 생각했던 것이겠습니까.

사신은 다만 피차간의 명을 전할 뿐이요, 그 사명(辭命)에 언급된 것은 사신이 간여할 바가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교제하는 사이에는 정의(情誼)가 막히기 쉬우니, 만약 사신이 없을 것 같으면 피차간의 뜻을 어찌 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외국에 사신으로 간 자가 전권을 가지고 교섭하는 일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국서를 받들고 오가는 것을 가지고 잘하는 것이라고 할 뿐이라면, 공자(孔子)께서 어찌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자는 《시경(詩經)》 삼백 편을 외어야 한다.”고 했겠습니까.

존사께서 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제가 접대를 주관하였는데, 당초에 우리나라에서는 바다를 건너서 통신사를 보내기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존사께서 부관(副官)과 도선주(都船主)와 더불어서 오랜 시일을 체류하는 괴로움도 꺼리지 않고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합해 일에 임해서 잘 조처하여 능히 관백의 명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전하께서 가상하게 여겨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끝내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존사께서 재량껏 교섭한 재주는 옛사람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았으므로 붓 가는 대로 언급한 것이지, 감히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서계의 말은 실로 놀랄 만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만약 이 서계를 보신다면 어찌 마음속에 유감이 없으시겠습니까. 사신 된 자가 만약 이 서계를 잠자코 받아 간다면, 우리나라에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대사의 비웃음을 어찌 면하겠습니까.

옛적에 송(宋) 나라가 요(遼) 나라와 강토를 다투었는데, 부필(富弼)이 요 나라의 임금에게 고하기를, “북조(北朝)에서 땅 얻는 것을 영예로 여긴다면 남조(南朝)에서는 반드시 땅 잃는 것을 치욕으로 여길 것입니다. 형제의 나라로서 어찌 한쪽은 영예롭고 한쪽은 치욕스러운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하니, 요나라의 임금이 깨닫고는 곧바로 부필의 말에 따랐습니다.

오늘날 일이 비록 이것과는 다르나, 한쪽은 영광스럽고 한쪽은 치욕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100년 동안 막혔던 끝에 사신을 보냈으니, 이것은 귀국의 입장에서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귀국에서는 도리어 위협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어찌 우리 조정의 치욕이 아니겠습니까. 한쪽은 영예롭고 한쪽은 치욕스럽다는 부필의 말이 오늘날에는 더욱 남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다만 예의(禮義)에 있지 강약(强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나라 안팎에 이름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예의를 버려 두고 무엇으로써 하겠습니까. 사신이 관백(關白)의 편지를 보고는 유감이 없지 아니하므로 감히 이렇게 말하는 바이니, 이 또한 옛적에 사신이 이웃 나라에 좋은 계책을 말해 주던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존사께서는 지난해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나랏일에 진력하던 마음을 생각하고 오늘날 사신의 간절한 마음을 살피시어, 선위사와 대마도주와 함께 의논하고 다시 관백 전하에게 아룀으로써 두 나라의 우호를 보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주D-001]한 번 …… 것이다 : 이것은 일본의 국서 가운데에 있는 말이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황 상사(黃上使)에게 보내는 편지

성일은 돈수하며 말합니다.
사신이 불행하여 뜻밖의 변고를 만나 바다를 건넌 지 3개월 만에 왜도(倭都)에 들어왔고, 왜도에 들어온 지 5개월 만에 왕명을 겨우 전했습니다. 왕명을 전한 지 4일 만에 왜도를 떠났고 왜도를 떠난 지 반달 만에 답서(答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답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답서의 말이 또 공손하지 않아서 종이 가득 늘어놓은 말은 으르고 협박한 말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각하(閣下)’니, ‘방물(方物)’이니, ‘입조(入朝)’니 하는 따위의 말을 쓰기까지 하여 대국을 능멸한 것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100년 만에 통신사(通信使)로 갔다가 얽매여서 곤욕을 당한 것이 거의 1년이었고, 끝내는 나라를 모욕하는 글을 받들고 돌아가 임금에게 보고하게 되었으니, 사신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오랑캐들은 무지하여 따질 것이 못 된다고 하더라도, 또한 굽고 곧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은 있는데, 사신은 어찌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받아 가지고 간단 말입니까.

사신이 이미 ‘각하(閣下)’ 등 여섯 글자를 가지고 저들과 다투었으며, 저들도 또한 급히 아뢰어서 고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이왕 고치기를 청했으니 거만하고 무례한 말도 아울러 고치도록 했더라면 또한 흔쾌하지 않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제가 여러 날 동안을 계속해서 다투면서 그칠 줄을 모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명공(明公)과 서장관(書狀官)은 사단이 생길까 염려하여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입조(入朝)’라는 두 글자는 한 번만 보아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문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공과 서장관도 처음에는 분하게 여기면서 말을 함께 해서 고치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다가 근거도 없는 현소(玄蘇)의 말을 한 번 듣고는 덮어두고 쟁변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어떤 소견에서 그런 것입니까?

이 답서가 비록 현소의 손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근거 없이 속이는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물며 그 자가 이미 왜도에서 나온 다음에 그 답서가 뒤에 이르렀으니, 현소와 같이 글이 짧은 자가 어찌 능히 알아보겠습니까. 비록 알아보았다 하더라도 우리와 동족이 아니니 어찌 사실대로 고하겠습니까. 사신의 소견은 명약관화한데, 저의 소견을 믿지 않고 왜인의 눈을 믿으니, 이것은 무슨 사리입니까. 만약 두 글자를 고치지 않으면 이것은 우리 조정이 왜놈의 속국이 되어 온 나라의 관원들이 죄다 그들의 배신(陪臣)이 될 것이니, 또한 원통하지 않습니까.

송(宋) 나라 고종(高宗)은 금(金) 나라를 섬겼는데도 금 나라에서 보낸 국서에 ‘강남에 조유한다.[詔諭江南]’라는 문구가 있자, 호담암(胡澹庵)은 눈물을 뿌리면서 분개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속국이 된 조정에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당당한 대국으로서 오랑캐와 이웃 나라가 되었으니, 송 나라와 요(遼) 나라의 관계처럼 형제국(兄弟國)이라 해도 이미 욕된 것인데, 사신 된 자가 도리어 ‘입조(入朝)’라는 욕을 달갑게 여기고 따지지도 않는단 말입니까.

명공의 말에, “나의 소견에도 의심이 없지는 않지만 현소의 편지가 또 이와 같으니, 우선은 그의 말을 믿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소의 말을 가지고 증거로 삼아 뒷날에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사신은 비록 현소의 말을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 조정의 사대부들이 믿어 주겠습니까. 그리고 사대부 중에서 혹 믿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성상께서 믿으시겠습니까. 사신이 만약 그 말이 욕된 것인 줄 알면서도 현소의 말을 빌려서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여서 남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서장관이 또 말하기를, “서계 안에 비록 거만하고 공손치 못한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돌아가서 보고한 후에 조정에서 나름대로 처치가 있을 것이니, 사신이 알 바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옛글에 이르기를, “대부(大夫)가 사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선 뒤에는 사직을 편케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일이면 재량껏 처리해도 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이런 말은 죽음으로써 다투더라도 제 마음대로 처리한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신의 이해만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벌벌 떨면서 머리를 숙인 채 치욕을 참아 가며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는, 이에 말하기를, “돌아가서 보고한 다음에는 조정에서 나름대로 처치가 있을 것이다.”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경감(耿弇)은 일개 무부(武夫)인데도 오히려 임금에게 적(賊)을 남겨 주는 것은 수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평소에 하고많은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자부함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털끝만한 작은 이해에 임해서는 놀라고 겁내어서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일마다 나라를 욕되게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다가 끝내는 치욕스런 서계를 싣고 가서 임금에게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어찌 일개 무부의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팔을 걷어붙이며 몹시 분통스러워서 차라리 노중련(魯仲連) 같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지언정 치욕을 참으면서 구차스럽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유독 이것만이 아닙니다. 명공과 서장관이 저의 말을 곧이듣지 않기에 제가 분개를 참지 못하여 현소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타이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백방으로 방해하면서 막고자 한 것은, 어찌 변(變)을 격동시키게 될까 염려해서 그렇게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분연히 편지를 써 보내자 현소도 오히려 그 말이 사리에 있어서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비단 역관을 만나서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보낸 답서에도 저의 말이 옳다는 것을 극언하였습니다.

당초 ‘각하(閣下)’ 등의 몇 글자를 고치도록 요청할 적에 명공께서 능히 고집을 버리는 도량을 넓혀서 못난 사람의 말이나마 버리지 않았더라면, 서계 안의 거만하고 모욕스러운 말을 고치도록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획의 크고 작은 것 따위이겠습니까. 설사 저들이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더라도 사신으로서는 스스로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이니, 다른 것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아아, 지나간 잘못은 바로잡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현소가 이미 저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니, 세 사람이 마음을 합쳐서 되풀이하여 타이른다면 어찌 고칠 길이 없겠습니까.

명공께서는 이미 “대명국에 조회한다는 말입니다.”라는 현소의 말을 옳다고 하면서, 답서 가운데의 공손치 못한 말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으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소가 비록 저의 말을 옳다고 하면서도 단지 ‘대명국을 가리킴.[指大明]’이라는 세 글자로써 편지 끝에 범범하게 언급했을 뿐이니, 또한 한탄스럽지 않습니까.

대저 일행의 일은 모든 권한이 명공에게 있고, 서장관마저 또 따라서 부화뇌동하니, 저와 같이 어리석은 자가 또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자라고 하더라도 천 번 생각하는 중에 어찌 한 번의 실수가 없겠습니까. 뒷날에 혹 후회가 있더라도 오늘날에 소홀히 여겨서 말하지 않았다고는 이르지 마십시오. 황공해서 이만 줄입니다.

[주D-001]왜인의 눈 : 원문은 ‘인안(人眼)’인데, 소주에, “초본에는 ‘인언(人言)’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02]경감(耿弇)은 …… 하였습니다 : 경감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이다. 경감이 장보(張步)와 싸우고 있을 때 광무제가 경감이 있는 곳으로 구원하러 온다고 하였다. 이때 경감의 군사가 적보다 약하였으므로 진준(陳俊)이 경감에게 이르기를, “적병들의 기세가 몹시 왕성하니 군사들을 쉬게 하고서 황제께서 구원하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러자 경감은 “황제께서 오신다고 하니 신하로서는 소를 잡고 술을 걸러서 백관들을 맞이하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도리어 적들을 황제에게 남겨 주려고 한단 말인가?” 하고는, 출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後漢書卷19 耿弇列傳》
[주D-003]몹시 분통스러워 : 원문은 ‘통심(痛甚)’인데, 소주에 “초본에는 ‘통심(痛心)’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04]노중련(魯仲連)같이 …… 죽을지언정 : 노중련은 제(齊) 나라의 장수로, 무도한 진(秦)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조(趙)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 나라가 조 나라를 공격해 와 정세가 위급하였다. 그때 위(衛) 나라에서 조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살인만을 일삼는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만약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그 일을 중지시켰다. 《史記卷83 魯仲連列傳》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현소(玄蘇)에게 답하는 편지

성일은 현소 족하에게 말합니다. 어저께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아 보니, ‘각하(閣下)’와 ‘방물(方物)’ 네 글자를 고치도록 특별히 허락하여 곧바로 부관(副官)으로 하여금 관백 전하(關白殿下)에게 달려가 아뢰도록 하였다 하니, 머지않아 고쳐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되는바 참으로 감사하고 또 기다려집니다.

다만 ‘귀국이 먼저 입조한다면[貴國先驅入朝]’이라고 운운한 몇 글자에 대해, 존사(尊師)께서는 그것이 명(明) 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핑계 대면서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상사와 서장관은 존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겨 감히 두 번 다시 청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이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소견을 가진 자로서는 끝내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대개 이 글을 지은 자의 뜻은 비록 쉽사리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말을 꾸며서 일을 단정한 것이 저절로 일단의 기축(機軸)을 이루었는바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앞에서는 말하기를, “한 번 뛰어 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서 400여 주를 우리 풍속으로 바꾸고, 억만년토록 제도(帝都)에서 정화(政化)를 시행하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귀국이 대명을 빼앗아서 일본의 정화를 시행하겠다고 이른 것입니다. 다음에는 “귀국이 먼저 입조한다면 원대한 생각이 있고 가까운 걱정은 없을 것이다.” 운운하였으니, 이것은 귀국이 우리나라에서 오늘날에 사신을 보낸 것을 가지고 원대한 생각이 있다고 이른 것입니다. 존사께서는 과연 이 ‘입조(入朝)’라고 한 곳의 조(朝)를 대명에 조회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또 그 다음에 “먼 지방에서 뒤늦게 오는 자는 허용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귀국이 먼저 입조하는 자는 허용하고 후일에 오는 자는 처벌하겠다는 말입니다. 또,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에는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을 바라보면서 이웃 나라와의 맹약을 더욱 닦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귀국이 모든 나라로 하여금 군사를 있는 대로 다 거느리고서 정벌하는 데 따라오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서계(書契) 가운데에 우리나라를 위협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데도 ‘입조(入朝)’라고 한 곳의 ‘조(朝)’가 우리나라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나라 조정은 예의를 중하게 여겨서 귀국과 우호를 통한 지 200년이 되었으나, 일찍이 털끝만큼도 무례한 말을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통신사를 보낸 것도 귀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실로 귀국의 신의를 가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귀국에서 포로로 잡아간 우리나라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우리나라를 침범한 무리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옛날처럼 수교하기를 청했으니, 어찌 큰 신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이를 몹시 가상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사신을 보내셨으니, 이는 실로 두 나라 사이에 전에 없던 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귀국의 서계(書契) 안에는 그런 일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뜻은 생략해 버리고, 도리어 나라의 위세를 장황하게 늘어놓아 병력을 자랑코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심지어는 ‘먼저 와서 입조한다’는 내용으로 글을 지었으니, 이것이 어찌 예로써 이웃 나라와 사귀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이웃 나라 사신으로서 귀국에 오랜 시일을 머물러 있으면서 공업(功業)을 성취한 것을 직접 보니, 실로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서계를 보니, 위로는 대명국을 엿보고 옆으로는 이웃 나라를 위협하여, 업신여기고 위협하는 말이 바로 적진에 임해서 적을 꾸짖는 격문 같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로써 서로 사귀는 글이라 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이것이 어찌 모두 관백 전하의 뜻이겠습니까. 아마도 글을 짓는 자가 우연히도 살피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말을 낼 적에 그 말이 착하면 천 리 밖에서도 호응하고, 그 말이 착하지 못하면 천 리 밖에서도 어긴다.” 하였으며, 《논어(論語)》에는 이르기를, “외교 문서를 지을 적에는 비침(裨諶)이 기초(起草)하고 세숙(世叔)은 토론(討論)하며, 행인(行人)인 자우(子羽)는 수식(修飾)하고 동리(東里)의 자산(子産)은 윤색(潤色)하였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가 이르기를, “정(鄭) 나라에서 사명(辭命)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이 네 사람의 솜씨를 거쳐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후와 응대함에 있어서 실패하는 일이 적었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사명이 나라에 관계됨이 또한 중하지 않습니까. 이는 실로 귀국의 글을 짓는 자가 마땅히 유념할 바입니다.

한 폭에 열 줄이 되도록 자잘하게 글씨를 써서 글을 만드는 것은 제왕의 훌륭한 의절입니다. 천자가 제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하는데, 하물며 대등한 나라끼리 교제하는 데이겠습니까. 지금 서계의 자획(字畫)도 법식과 크게 다르니, 이 또한 두 나라가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존사께서는 사신이 충고하는 뜻을 관백 전하에게 잘 아뢰어 서계를 고쳐 지어서 사신에게 주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두 나라의 우호가 더욱 두터워져서 관백 전하가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미덕이 원근에 더욱 드러날 것이니, 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조선만의 다행이 아니라 실로 귀국의 다행일 것입니다. 존사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허 서장관에게 보내는 편지

10월 28일에 평의지(平義智)의 하인이 와서 고하기를, “내일 아침에 관백(關白)이 천궁(天宮)에 나갈 것이니 사신께서는 구경을 하십시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국의 광경을 참으로 구경하고 싶지만 왕명을 아직 전달하지 못했으니 사신된 도리에 출입하기가 어렵다.”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평의지가 몸소 와서 청하자, 족하는 그의 간절한 요청에 선뜻 승낙해 버렸습니다. 잠시 후에 평의지가 또 나에게 왔는데, 나는 어제와 같은 말로 사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막 가고 난 뒤 역관(譯官) 윤사수(尹嗣壽)가 와서 말하기를, “서장관이 지금 도중(都中)으로 들어갔습니다.” 하기에, 내가 매우 놀랐습니다마는, 족하는 이미 나를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여겨 서로 의논하지도 않은 채 의심치 않고 갔으니, 내가 비록 충고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역관을 보고는 그 옳지 못함에 대해 극력 말했으니, 족하도 들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족하의 행차가 막 나서려는 참에 관백이 행차를 정지했다는 기별이 잇달아 왔습니다. 내가 다행으로 여긴 바는 행대(行臺)가 욕보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 것이지, 사(私)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 이틀이 지났으나 족하의 뜻은 오히려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풀어지지 않아 군교(軍校)를 앞세우고 대리(臺吏)를 수종으로 삼아서,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행차를 재촉하여 호기롭게 문 앞을 지나갔습니다. 내가 그때 마침 객관의 기둥 앞에 앉아 있다가 족하의 행차가 성대한 것을 바라보고는 참으로 마음에 부끄러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족하는 섭섭한 표정으로 객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에 내가 물어 보니, 관백의 행차가 그날도 정지했다고 하였습니다. 족하가 갈 적에는 유독 나 한 사람이 탄식했지만, 족하가 돌아올 적에는 일행 사람들이 또한 족하를 위해 부끄러워했으니, 이 어찌 사람마다 수오(羞惡)하는 마음을 다 함께 타고나서가 아니겠습니까.

그 뒤에는 연일 눈이 왔으므로, 내 생각에 족하도 이미 후회하여 반드시 잘못을 거듭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족하가 간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고집이 심해져서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고야 말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나는 성품이 고루하고 어리석어서 아는 바가 없으니, 고명하신 족하가 하는 바를 진실로 짐작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비(是非)를 아는 마음은 타고난 성품이니, 어찌 천 가지 생각에 한 가지나마 옳은 것이 없겠습니까. 이에 친구간이라도 자주 충고하면 사이가 벌어진다고 한 옛사람의 경계를 어기면서 다시금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겠으니, 족하는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아, 사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온 지가 지금 7개월이 지났는데, 뜻밖의 변고를 만나서 국서가 아직 함 속에 있으니, 이것은 실로 엄청난 치욕입니다. 그러니 사신의 당황스럽고 답답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오직 이러하기 때문에 관백이 비록 유람하도록 허락했으나, 대덕사(大德寺) 한 구역 밖으로는 일찍이 잠깐도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왕명을 중하게 여겨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연히 유람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는데, 하물며 그 사람에게 왕명을 전하지도 못하고서 먼저 그 사람의 행차 광경을 보는 것이겠습니까. 과연 그렇게 한다면 이것은 왕명을 가볍게 여기고 관백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족하가 어찌 왕명을 가볍게 여기고 관백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겠습니까. 관백의 위엄을 겁내어서 이리저리 잘 조처할 계획을 한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개 이웃 나라 사신이 여기에 왔으나 제때에 접견해 주지 않자, 왜국의 중이 이에 불측한 말을 만들어 내어서 공갈하며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에 일행들이 황급해하면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오랑캐들이 비록 예의는 모르지만 이해를 아는 데에는 밝습니다. 그러니 일개 통신사가 저들 나라에 무슨 상관이 있다고 감히 구류시킬 계책을 하여 100년 만의 우호관계를 깨뜨리겠습니까. 그런 일은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하인들이 의혹하는 것이야 참으로 당연하지만, 족하가 또한 겁내어서 이런 거조를 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왜국 중이 말하기를, “이번에 관광하도록 청한 것은 비록 평의지가 했으나, 실은 관백의 뜻입니다. 관백의 뜻은 다만 자랑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니, 만약 순종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날이 언제가 될 줄을 알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족하는 평소에 왜인들의 마음에 순종해서 기쁘게 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국 중의 말이 또 그 점을 콕 찔렀습니다. 그러므로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여 마치 칼날이 목에 닿은 듯이 여겨 왕명의 중함과 체모의 존귀함은 아득하게 무슨 일인지조차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구경을 가려고 하다가 그만두었고, 이튿날에는 중도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꼭 가고야 말기로 작정하여, 황급하게 그들의 명령에 따르기를 마치 풍증(風症)을 앓아서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사체입니까.

《주역(周易)》 여괘(旅卦)의 초육(初六) 효사(爻辭)에, “나그네가 자질구레한 일을 행하면 그로 인하여 재앙을 취하게 된다.” 하였는데, 그 전(傳)에 이를 해석하기를, “뜻이 비루한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곤란에 처하면 비루하고 자질구레해져서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데, 바로 그 때문에 모욕을 불러 오고 재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족하의 뜻이 높은 것입니까, 낮은 것입니까? 그리고 족하가 관광하는 것이 영광입니까, 굴욕입니까? 경사입니까, 재앙입니까?

아아, 족하의 한 몸은 비록 가벼우나 바로 한 나라의 행대(行臺)입니다. 일행을 규찰하여 바로잡는 책임이 전적으로 족하에게 있으니, 그 임무가 또한 중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단속하여 행동을 반드시 예법대로 해도 오히려 실수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예의도 지키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간하는 말을 거부하고 자기의 소견만 주장함이 이와 같으니, 자사(子思)가 이른바, “기탄하는 바가 없다.”는 말에 불행하게도 가깝지 않습니까. 설령 관백에게 진실로 불측한 계획이 있다면, 족하가 관광했다고 해서 능히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그런 계획이 없다면, 비록 관광하지 않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평의지가 와서 청할 때에 말하기를, “왕명을 아직 전하지 않았으니 두 사신에게는 감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서장관께서 와서 관광하였으면 합니다.” 하였습니다. 아아, 저들도 또한 왕명을 전달하는 일의 중요함과 사신은 굽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족하가 만약 이런 내용으로 대답했더라면 저들이 비단 자기들의 뜻을 거스른다고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대국의 예의에 감복하여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원망하고 노여워함이 있었겠습니까.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당초에 관백이 우리에게 유람하는 것을 허락할 때에 사신인 우리는 왕명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에는 사양했는데 이번에는 그들의 청을 따라 주었으니, 그때와 이번 일이 너무나도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백이 환도(還都)할 적에 우리의 하인들이 관광하고자 하니, 왜인들이 왕명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금하지 않았습니까. 전일에는 금해 놓고 후일에는 초청하니, 전후로 엎치락뒤치락함이 또한 심합니다. 사신된 자가 능히 자중하지 못하고 오직 그들의 말대로만 따라 주어서 바로 코 꿰인 소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앞으로 갔다가 뒤로 물러났다가 하는 것과 같이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또 통탄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관광하는 굴욕이 족하 한 몸에만 관계된다면 그만입니다만, 족하의 굴욕은 사신의 굴욕이니, 족하 때문에 사신이 모두 굴욕을 당하는 것은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굴욕이 사신의 한 몸에만 관계된다면 그만입니다만, 사신의 굴욕은 곧 우리 조정의 굴욕이니, 사신 때문에 국가가 앉은 채로 굴욕을 당하는 것은 또한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강개해서 반드시 족하의 생각을 돌려 만분의 일이나마 국가의 체모를 부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족하는 남과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세 차례나 가기로 작정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난들 또한 어찌 능히 족하를 위하여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뜻이 합치면 붕우이고, 합하지 않으면 서로 간에 상관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자 자기가 들은 바를 높이고, 자기가 아는 바를 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시 무엇을 상관하겠습니까. 족하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일본의 상관(上官)과 부관(副官) 및 도선주(都船主)에게 보내려던 편지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온 지 지금 몇 달째입니까. 대마도에서 넉 달, 계빈(堺濱)에서 한 달을 지냈으며, 도성에 들어와서 또 두 달이나 되었습니다.
손에 국서(國書)를 담은 함을 받들고서 왕명을 전할 기약도 없이 빈 암자에 묵으면서 온갖 신고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원망하거나 탓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은, 참으로 관백 전하(關白殿下)께서 관동(關東)에 출정(出征)을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귀국의 안위(安危)가 판가름나는 기틀이니, 일개 사신이 비록 오랫동안 체류하는 걱정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겨를에 돌아보겠습니까. 행차한 쪽을 바라보면서 오직 개선하기만을 고대했더니, 천도(天道)가 순응하여 원흉(元兇)이 머리를 바쳐서, 한 달 안에 강역(疆域)이 맑아지게 되었습니다.

출정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개선가(凱旋歌)가 길에 울려 퍼짐에 이웃 나라의 사신도 장한 일을 눈으로 보았으니,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이 귀국 사람들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이미 우리의 왕명을 전달할 날이 있게 된 것을 기뻐하고 또 존안을 뵈올 때가 가까웠음을 다행으로 여겨 머리를 맞대고 서로 하례하면서 일제히 목욕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관백 전하가 개선가를 울리면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멀리서 온 사신을 생각하여 근신(近臣)을 보내어서 특별히 위문해 주시니, 융숭한 대접과 겸손한 아름다움은 실로 세상에 없었던 바입니다. 만릿길을 떠나온 외로운 사신은 보답할 길이 없으니, 감사하고 두려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관백 전하가 험난한 산천을 돌아다닌 뒤라서 태체(台體)가 많이 피로할 터이므로 사신도 또한 수일 안으로는 접견하기가 어려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길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현재 새 궁전을 짓고 있는데, 역사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그 공사가 끝난 다음이라야 사신을 접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신으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귀국에는 전각(殿閣)의 제도가 갖추어져 있는바, 깊은 궁이나 넓은 전 어디에서고 사신을 접견하더라도 모두 마땅합니다. 한 사신을 접견함에 있어서 어찌 새 궁전이 완성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전해 들은 말을 사신이 비록 믿지는 않으나 목을 빼고서 기다린 지 열흘이나 되었는데도 접견한다는 기별이 전혀 없으니, 마음에 황송하고 의혹스러워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그러나, 사신이 감히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을 괴롭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만, 왕명을 지체시키는 것이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닙니다. 관백 전하께서 관동으로 출정하였을 때에는 형편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만, 국도(國都)에 돌아온 뒤에도 국서를 아직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며칠 전부터는 당황스럽고 답답하여 침식(寢食)을 모두 폐하고 있습니다. 세 분께서는 여러 날 동안을 우리와 함께 주선하였으니, 우리들의 사정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무릇 여염집의 필부가 편지 한 장을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고향 친구에게 전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인은 주인의 편지를 받아서 제때에 전하고 제때에 복명하고자 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우리 전하께서 관백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100년 만에 길을 터서 사신을 보내어 보빙(報聘)하였으니, 그 예가 지극히 중한 것입니다. 사신이 삼가 국서를 받들고 멀리 큰 바다를 건너오면서는 생사를 도외시하고 오직 통신하여 우호를 맺는 것만을 급하게 여겼으니, 사신의 몸이야 비록 하찮더라도 그 책임은 막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번 바다를 건너서 들어온 이후로는 피차간에 아득하여 여름을 넘기고 가을이 되어도 아직 왕명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임금의 밤낮없이 걱정하는 마음과 멀리 온 사신의 절박한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옛날에는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에 있어 반드시 그 나라의 사신을 공경히 대하여 감히 홀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사신을 공경히 대하는 것이 그 나라를 공경히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 나라의 사신이 국내에 들어왔는데도 접대하는 예절이 태만하여 시일만 질질 끌면서 제때에 접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웃 나라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중국에서 외국 사신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조현(朝見)하는 기일이 있고, 연향(宴享)하는 날짜가 있으며, 객관(客館)에 머무르게 하는 것도 또한 한도가 있어서 일찍이 멀리서 온 사신을 체류시켜서 곤란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하물며 이웃 나라 사이이겠습니까.

대저 우리나라에서 귀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은 세 분 족하께서 직접 본 바입니다. 영접하는 데에 있어서 부지런함과 접대하는 데에 있어서 융숭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도성에 들어온 후에는 숙배하는 데에 기일이 있고 연향하는 데에 절차가 있으며, 주봉(晝奉)하고 영접하고 전송하는 데에 있어서도 모두 일정한 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즉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어찌 일찍이 만홀하게 대하고 무례하게 굴면서 까닭 없이 지체시킨 적이 있었습니까.

어떤 자는 세 분 족하께서 한 해가 넘도록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러 있었던 일을 구실로 삼는데, 이것은 너무도 생각이 모자란 것입니다. 국론(國論)이 확정되지 않아 사명(使命)을 완수하기가 어려웠던 데다가 잇달아서 포로로 잡아간 우리나라 백성들을 쇄환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그에 따라서 또 통신사(通信使)와 함께 가게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아무리 속히 돌아가고자 하더라도 돌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세 분 족하께서 체류한 것은 국서를 전달한 후에 체류해 있었으니 그 마음은 오히려 편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왕명을 전하지 못한 채 체류하고 있으니, 신하 된 자의 마음이 어찌 감히 편안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들이 밤낮으로 방황하면서, 감히 가만히 앉아서 명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철이 닥쳐온 다음에 수백 명의 목숨을 한 조각 배에 부치게 된다면, 풍파에 표류될 걱정과 찬 서리에 얼 염려가 실로 마음에 절박합니다. 이것이 비록 사정(私情)에 속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귀국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어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온전하게 구제해 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 분 족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고충을 잘 살펴 관백 전하에게 잘 아뢰어서, 우리들이 제때에 명을 전하고 제때에 환국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이웃 나라와 잘 사귀는 귀국의 신의가 원근에 더욱 드러나 사방의 사람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는 아름답게 여겨 바다를 건너와 예를 바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사신들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실로 귀국에도 다행일 것입니다. 세 분 족하께서는 그렇게 되도록 하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주D-001]이에 …… 답답하여 : 원문은 ‘내시회황울억(內是回惶鬱抑)’인데, 두주(頭註)에 “시(是) 자는 아마도 시(始) 자일 듯하다.” 하였다.
[주D-002]주봉(晝奉) : 외국의 사신에게 점심 때에 술을 주는 것을 말한다. 주봉배(晝奉盃), 또는 주봉배(晝捧盃)라고도 한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허 서장관에게 보내는 편지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서 말합니다. 사신이 관백(關白)을 만나 보는 한 절차에 관하여 족하와 더불어 면대해서 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찮고 말이 무게가 없는 탓에 족하로 하여금 나의 말을 듣고서 뜻을 돌리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며칠 전부터는 나의 못남을 달갑게 여기고 하는 대로 따르기만 일삼으면서, 대군자(大君子)가 주선하는 것이 일마다 예법에 맞아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훌륭한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어 나 스스로 중지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또다시 나의 본버릇을 내어 비웃음과 꾸짖음을 무릅쓰고 붓을 휘둘러서 할 말을 다하는 바입니다. 족하께서는 나의 망녕됨을 용서하고, 꼴 베는 사람의 말이나마 채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저 일본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 조정의 여국(與國)입니다. 그리고 관백이란 무슨 관직입니까? 소위 천황(天皇)의 대신(大臣)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을 맡아 다스리는 자는 소위 천황이지 관백이 아닙니다. 관백이란 자는 임금을 돕는 자일 뿐 국왕은 아닙니다. 오직 그가 한 나라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는 그 실정을 모르고 국왕이라고 하면서 우리 임금과 대등한 예로써 대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임금의 존엄을 낮추어서 아래로 이웃 나라의 신하와 대등하게 한 것이니 또한 치욕스럽지 않겠습니까.

전부터 일본의 여러 전(殿)에서 보내는 서신에 우리 임금을 황제폐하(皇帝陛下)라고 이른 것은 그들도 소위 천황이 우리 임금과 대등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높인 것으로, 관백은 감히 우리 임금과 대등한 위치에 놓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열성(列聖)들께서도 명호(名號)를 바르게 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황제라는 칭호를 거절하지 않은 것은, 대개 그것을 거절하면 저들의 소위 천황과 대등하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관백과 대등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해에 논의하는 신하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칭호를 사양해서 받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본다면 어찌 심한 실책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다행스럽게도 사신이 직접 이 나라에 와서 관백이 국왕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전례는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예법에 의거하여 따져서 상견하는 예를 바로잡아야만 했습니다. 하물며 이전에 왔던 사신들이 모두 영외(楹外)에서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했으니, 관백도 감히 스스로를 높이지 못하고 사신을 우대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아, 관백은 이미 국왕이 아니고 전례가 또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어찌 뜰에서 절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나라를 욕되게 하는 죄를 저지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풍신수길(豐臣秀吉)은 명칭은 비록 관백이지만 실상은 한 나라의 임금이다. 사신이 어떻게 그가 왕이 아닌 줄을 알아서 뜰에서 절하는 예를 폐하고자 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관백이 감히 왕이라 일컫지 못하는 것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말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사신이 오면서 풍신수길을 가리켜서 관백이라고 하면 왜인들이 모두 알아듣고 응답했으나 국왕이라고 하면 응답할 바를 몰랐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백이라 이르고 왕이라고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산인(山人) 종장(宗長)의 말이고, ‘상군(相君)이 문교를 이역 땅에 폈다’는 것은 주지(住持) 태수(兌叜)의 서문(序文)이다. 그리고 ‘증일품대상국태령(贈一品大相國台靈)’이란 것은 전 관백의 위패(位牌)가 아니고 무엇이며, ‘대정대신신장(大政大臣信長)’이란 것은 전 관백의 명호(名號)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으로써 본다면 풍신수길은 국왕이 아닌 것이 역시 분명하다. 일본 사람들이 왕이라고 하지 않는데 다른 나라의 사신이 왕이라고 하면서 전례에 없는 예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리인가?” 하였습니다.

족하의 말에 이르기를, “우리 국서(國書)에 어휘(御諱)를 바로 쓰고 풍신수길을 국왕이라 일컬었으니, 이것은 우리 전하께서 대등한 예로 그를 대우한 것이다. 그러니 신하인 우리가 어찌 감히 그를 대등한 예로 대하여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폐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럴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국서에 어휘를 쓰고 풍신수길을 국왕이라 일컬은 것은 대개 그들의 실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당초에 관백이 국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국서에 의당 관백이라고 썼지 어찌 국왕이라고 칭했겠습니까. 또 어찌 어휘를 써서 스스로를 낮추었겠습니까. 당초에 잘 알지 못하여서 이런 지나친 예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비록 국서를 고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사신이 그를 만나 보는 예는 전례대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찌 뜰 아래에서 절을 하겠습니까.

아아, 이전에 온 사신들은 관백을 정말 임금인 줄 알고서도 오히려 영외(楹外)에서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도리어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행하고자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그러니 족하가 뜰에서 뵙고자 하는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우리 임금을 높이는 것이 아니며, 내가 영외에서 절하는 예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임금을 높이는 것이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당당한 대국의 사신으로서 이웃 나라 신하를 뜰에서 뵙는다면 이것은 우리 임금을 관백과 대등하게 하는 것이니,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당에 올라가서 절을 하면 이것은 우리 임금을 왜국의 천황과 대등하게 하여 관백이 서로 대등하게 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 임금을 높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족하의 말에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 때에 사신이 영외에서 절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여 사목(事目)에다 기록하기까지 하였는데, 어찌 어길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이번의 의주(儀註)에도 뜰 아래에서 절한다는 것으로 적혀 있는데, 어찌 어길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틀림없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선왕조 때에 관백을 왕으로 잘못 안 것이 또한 오늘날에 수길이 관백이 된 것을 알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에 사신 된 자가 이미 그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때에 맞게 적절히 일을 처리하고서 복명(復命)하는 날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는 것이 바로 대부(大夫)가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가서 형편에 따라 변통하는 의리입니다. 그런데 어찌 일정한 규정만을 굳게 지켜서 변통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또 이번 사목 안에 처음에는 그 조목을 게재했다가 예관(禮官)이 곧바로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삭제해 버렸으니, 이것은 조정에서도 당에 올라가서 절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확정된 규정으로 삼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닙니까.

족하의 말에 이르기를, “이번에 비록 당에 올라가서 절한다 하더라도 어찌 우리 국서에 쓰인 어휘(御諱)를 고칠 수 있겠으며, 국왕이란 두 글자를 고칠 수 있겠는가. 만약 고칠 수 없다면 사신이 당에 올라가서 절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렇지가 않습니다.

국서는 비록 고칠 수가 없더라도 관백이 우리나라 사신을 높여서 뜰에서 절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 조정을 높여서 상국(上國)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사신이 당에 올라가서 절하는 것은 실상 자기 몸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족하의 말에 이르기를, “만약 그렇게 청하였다가 저들이 그대로 들어준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에 ‘우리나라 사신도 이미 귀국 뜰에서 절하였는데 귀국 사신은 어찌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할 경우에는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저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사람의 임금이 없는 것이 천지의 떳떳한 법입니다. 일본의 소위 천황이 이미 국왕으로 되어 있으니, 관백은 아무리 존귀하더라도 남의 신하일 뿐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소위 천황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나, 소위 천황은 국사에 간여하지 않기 때문에 국서를 소위 천황에게 보내지 않고 관백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 간의 분수는 하늘과 땅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이 소위 천황을 뵐 적에는 뜰에서 뵙는 것이 예이지만 관백을 뜰에서 뵙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오직 이러한 것이므로 사신으로서 예를 행하는 것이 저들과 우리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왜국 사신을 뜰에서 절하게 해 낮추고, 우리 사신을 영외에서 절하게 해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관백이 만약 뜰에서 절하여 뵙는 예를 받는다면 이것은 천황으로 자처하는 것이니, 관백이 천황을 높이 떠받든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이런 뜻을 가지고 간절하게 타이른다면 저들이 비록 무지하더라도 반드시 깨달아서 굴복할 것인데, 어찌 우리의 청을 듣지 않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나의 소견이 이와 같으므로, 어제 잔치 자리에 마침 현소(玄蘇)와 서로 마주하게 되었기에, 내가 묻기를, “귀국의 여러 전(殿)이 관백을 뵐 때 뜰 아래에서 절을 합니까, 당 위에서 절을 합니까?” 했더니, 현소가 대답하기를 “관백은 여러 전과 똑같이 천황의 신하인데, 어찌 뜰 아래에서 절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다시 묻기를, “전부터 우리나라 사신도 영외에서 절을 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였더니, 현소가 답하기를, “사신의 물음이 참으로 옳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접대하는 전고(典故)가 있으니, 관백이 오면 마땅히 자기가 정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오늘 또 어떤 중이 와서 말하기를, “일본의 풍속에는 관직이 없는 자는 뜰에서 절하고, 관직이 있는 자는 모두 당 위에서 절합니다. 그러므로 전일에 유구(琉球)의 사신이 왔을 적에도 당 위에서 절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날 저녁에 도선주(都船主)를 보고서 유구의 사신이 당에 올라가서 절하여 예를 행한 사실에 대해 물어 보니, 도선주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저 유구나 남만(南蠻)은 예물이 아무리 후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국은 예물이 비록 변변치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매우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이번에 사신을 대우하는 것이 반드시 두 나라보다 위일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일본의 여러 신하가 관백을 볼 때 본디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가 없습니다. 유구 같은 작은 나라의 사신도 또한 이미 당에 올라가서 절하였으니, 반드시 우리들에게만 뜰에서 절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직 염려되는 바는 현소 등이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뜰 아래에서 절을 했으니, 왜국 조정에서도 그에 비기어서 하려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슬쩍 귀띔해서 그렇게 하는 길을 막아 저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실로 사신으로서의 좋은 계책입니다. 그런데 족하는 도리어 잘못이라고 하니 그것은 또한 무슨 소견입니까.

아아, 풍신수길이 가령 진짜 왜왕이라고 하더라도 의관을 차려 입은 몸을 굽히고 오랑캐의 뜰 아래에서 절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큰 치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웃 나라 신하에게 머리를 조아려 소위 천황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긴다면, 나라를 욕되게 함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사직을 편케 하고 국사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제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의 이 한 가지 일이 비록 사직을 편케 하는 중한 일과 비할 수는 없어도 위로는 우리 임금을 높이고 아래로는 사명(使命)을 중하게 하는 것으로, 한 가지 일에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국가의 체모에 관계됨이 또한 큰바 어찌 다만 국가에만 이로울 뿐이겠습니까.

그리고 군자는 처음을 잘 도모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처음을 조심하지 않고서 그 뒤를 잘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행차가 100년 만에 있는 일이니, 이것도 하나의 시초입니다. 당 위에서 절하고 뜰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모두 오늘날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시초에 조심하지 않아서 후일에 오는 사신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뜰에서 절하는 굴욕이 아무개가 사신으로 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아, 대궐에서 하직하던 날 성상의 하교를 듣지 않았습니까. 그때 성상께서 왕의 위엄이 멀리 전파되고 국가의 체모가 존중되게 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비록 제 한 몸을 죽여서 나라에 바치더라도 오히려 꺼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한 가지 일에 무슨 꺼릴 바가 있어서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나의 말에 굽히게 됨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또 자신이 주장한 일이 아닌 것을 염려하지도 말아서, 제 고집을 버리는 도량을 넓히고, 남의 의견에 따르는 아름다움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치욕을 외국에서 씻고 국가의 체모를 구정(九鼎)보다 무겁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으며, 쾌하지 않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허 서장관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젊었을 때에도 세속의 사정을 잘 몰랐거니와 늙어서는 더욱 심합니다. 일찍이 ‘체모(體貌)’라는 두 글자 때문에 고명(高明)에게 배척을 당하고는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어서 나의 어리석은 분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조정에서 내가 변변치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나에게 사신을 보좌하는 직책을 맡겼으니, 부사(副使)의 직책을 둔 것이 어찌 괜히 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조금이라도 형적을 남기려고 하면 문득 의심과 의혹을 낳게 되는데, 사신의 일을 보기를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사람의 살찌거나 여윈 것을 보듯 한다면, 나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는 좋겠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것입니까.

아아, 체모라는 두 글자를 고명은 이미 듣기조차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키는 바는 이 두 글자이고, 사신의 일에 있어서도 이 두 글자보다 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지키는 바를 버리고 구차하게 찬동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고명은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나의 마음을 살펴주면 좋겠습니다.

대개 나라는 저절로 중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중해지게 하는 것이 있으며, 또한 저절로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가벼워지게 하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한 번 중해지고 한 번 가벼워짐은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수(毛遂)가 초(楚) 나라의 임금을 꾸짖자 조(趙) 나라가 구정(九鼎)이나 대려(大呂)보다도 중하여졌고, 이절(李梲)이 무릎걸음을 하자 송(宋) 나라가 기러기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분명한 일입니다.

아아, 두 나라가 우호를 맺는데 사신이 중간에 끼어 있으니 그 책임이 또한 중하지 않습니까. 원망을 해소시키고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그 임무이고,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그 책임입니다. 말 한마디 하는 동안에 적의 향배가 달렸고, 행동 한 번 하는 사이에 자신의 영욕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찌 조심하지 않아서야 되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들이 왕명을 받들고 오랑캐의 뜰에 왔으니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장차 체모를 높여 스스로를 중하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오랑캐 마음을 기쁘게 하기만을 힘써서 굴욕을 받겠습니까. 나로써 본다면 근일 우리가 한 바는 그 체모를 잃은 것이 심하였고 굴욕을 받은 것도 심하였습니다. 국분사(國分寺)에서 겪은 굴욕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말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곧바로 저들이 하인을 죽여서 사죄하였고, 또 걸어 들어와 뵈어 경의를 표하였으니, 그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계책은 마땅히 지난 일을 징계 삼아서 뒷일을 경계하고, 시초만 보고도 결과를 짐작하여, 몸가짐과 일처리에 있어서 한결같이 예법대로 하고 구차스럽게 하지 않았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국분사에서 굴욕을 당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또 서산사(西山寺)의 초대에 가서는 오래도록 술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들과 함께 환담하기를 마치 전날의 일을 사과하면서 왜놈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입니까.

왜놈들이 그들의 교자(轎子)를 타라고 하더라도 제도가 편리하지 못하면 타지 않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혹 관을 벗거나 허리를 굽혀서 몸을 들이밀었으니 보기에 해괴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떻다 하겠습니까. 외국에 들어가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니 주인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예법으로써 절제하여야지 어찌 자주 굴욕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구봉(龜峯)에서 순풍을 기다리던 때 날마다 세운(世雲)을 시켜서 평의지(平義智)에게 출발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의지 등은 배 위에 걸터앉고 세운은 뱃바닥에서 머리를 들고 우러러보아 지척 사이에서도 서로 마주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바, 우리나라 사람을 종처럼 여긴 것이 심하였습니다. 일기도(一歧島)를 건너갈 때에 미쳐서는 평의지 등이 모두 제 집에 들어가 버리고, 출발할 뜻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에 세운이 선주(船主)가 타고 가는 말 뒤를 걸어서 따라가면서 출발하기를 청했는바, 세운이 굴욕을 당한 것이 어찌 사신이 굴욕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기도가 비록 멀다고는 하나 바로 눈앞에 있고, 또 앞길을 인도하는 격왜(格倭)가 있으니, 사신이 스스로 배를 출발시켜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반드시 평의지에게 명을 여쭙는단 말입니까. 하물며 사신의 배가 출발할 것 같으면 저들은 뒤따라오기에 바쁠 것인데, 어찌하여 허락하기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스스로 중하게 할 줄은 모르고 다만 왜놈들의 마음을 거스르고 왜놈들이 노여워할까만을 염려하니, 이것이 무슨 사체입니까.

일기주(一歧州)에 가서는 선위사(宣慰使)와 왜국 왕의 사자가 모두 여기에 모였으니, 그들이 보는 것이 관계되는 바는 대마도(對馬島) 한 섬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건넌 그 이튿날 아무리 서로 만나 보는 것이 급하다 하더라도 주인이 마땅히 손님을 청할 일이지, 손님이 먼저 청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나와 족하는 모두 제삿날을 당했는바, 이날은 군자가 죽을 때까지 초상당한 날처럼 여기는 날입니다. 오랑캐의 사신과 서로 만나 보는 것이 뭐가 급하다고 반드시 이날 만나 본단 말입니까.
내가 따르지 않자 끝내는 협박하여 말하기를, “왜국 사신을 만나 보는 것은 공적인 일이고, 제삿날을 지키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아아, 공과 사의 경하고 중함을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혹 공적인 일이 경하고 사사로운 일이 중한 경우도 있는 법인데, 예절(禮節)과 식색(食色)의 비유를 유독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런 곡절은 명확하기가 흑과 백처럼 분명한데, 나의 말에 굽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 반드시 자기 뜻대로 시행하고 남의 정리(情理)를 빼앗고자 하여 곧바로 세운(世雲)을 시켜서 왜사에게 서로 만날 기일을 청했지만 왜사가 서로 만나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족하도 반드시 후회하고 실망했을 것입니다.

또 쌀을 실을 때의 일과 같은 것은 형편없기가 극심한 일입니다. 왜사(倭使)가 제 나라 임금의 명을 받아서 사신에게 바치는 것이니, 비록 의리에 있어서는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는 하겠으나, 짐 싣는 배가 이미 두 척이나 있으니 나누어서 싣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신이 친히 받았으니, 이것은 또한 몹시 체모를 잃은 것이 아닙니까. 내가 충고한 뜻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반드시 물리치고 따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인 배와 사신 배가 쌀가마니 옆에서 뒤섞여 있었으니, 굴욕스러움이 심하였습니다. 비록 왜놈에게는 부끄럽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나라에서 받들어 온 절월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아아, 이것이 무슨 사체입니까.

두 나라 사신이 서로 만날 경우, 상견례(相見禮)를 거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선위사로 온 자가 일기도에 있을 때에는 적관(赤關)에서 거행하자고 약속하고, 적관에 도착해서는 몸이 아프다고 핑계 대었습니다. 처음에 한 차례 하인을 보내어 문안한 뒤로는 아득하게 소식도 없은 지가 지금 벌써 4, 5일이나 되었습니다. 저들은 비록 미련해서 예절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어찌 사신으로 온 우리가 예법에 의거해서 타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일기도에서는 제삿날인데도 만나 보기를 청하더니 이날에 와서는 머리를 수그리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만 하니, 어찌하여 처음에는 날카롭다가 끝에는 물러진단 말입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서해(西海)의 소이전(小二殿)과 주방(周防)의 대내전(大內殿)은 모두 사신이 지나가는 곳이고, 우리 조정의 은택이 미치는 곳입니다. 직로(直路)가 아니어서 비록 사신이 직접 왕명을 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서 우리 임금의 명을 전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그전에 왔던 사신들도 빨리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여러 날을 머물러 있으면서 왕명을 전한 다음에 떠난 것은 또한 무슨 뜻이었겠습니까. 하물며 이미 소이전에게 적관에서 왕명을 받도록 통지해 놓고서도 왜인의 말만 곧이듣고 한나절도 머물러 기다리지 않고 떠났으니, 너무나도 신의를 잃고 왕명을 등한히 한 것입니다.

내가 누차 한 말이 비록 채용할 만한 것은 못 된다 하더라도, 또한 나무꾼에게라도 묻는다는 옛말에 의거하여 어리석은 말이나마 다하도록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신의 배가 이미 출발했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입니까.

아아, 이번 사행은 100년 만에 나온 일이어서 먼 지역 사람이 쳐다볼 뿐만 아니라 후일의 모범도 또한 오늘날 하기에 달려 있으니, 모든 행동을 어찌 가볍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나라가 가벼워지고 무거워지는 것과 백성들이 편안해지고 위태로워지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일행과 더불어 익히 강구하고 깊이 생각해서 조정에서 파견한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잘난 체함이 너무 지나쳐서 자기의 소견을 버리고 남의 말을 따르는 아름다움이 없으니, 이른바 “간하는 말에 토라져서 자기 소견만 주장한다.”는 것에 불행히도 가깝지 않습니까.

혹자는 나에게 힐난하기를, “자네 말이 지나치다. 체모를 잃는 일은 아무리 삼척동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한 줄을 아는데, 하물며 당대의 똑똑하고 현명한 이로서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대개 금수에게는 의관(衣冠)을 차려 입으라고 책망할 수 없고, 오랑캐에게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라고 요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까닭에 정삭(正朔)을 일찍이 내리지 않았고, 교화(敎化)도 일찍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소에게 굴레나 씌우고 말에게 고삐나 매어서는, 제 타고난 성질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채 더불어 교계(較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상사와 서장관이 한 바가 어찌 오랑캐를 대우하는 체모가 아니겠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자네가 이른바 체모를 잃었다는 것이 바로 체모를 얻은 것이다. 군자가 하는 바를 어찌 예사 사람이 알 바이겠는가. 자네는 어찌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대현이 하는 바를 억지로 흠잡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자네 말도 그럴 듯하다. 그러나 나의 의혹은 여기에서 더욱 심해진다. 중국에서 오랑캐를 대우하던 것은 참으로 그와 같았다. 그러나 시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각각 그 방법이 있어서 기러기발에 아교칠을 하고 비파를 타는 것같이 해서는 아니 된다. 일본 같은 나라는 비록 오랑캐라고는 하나 군신과 상하의 분별이 있고 손님과 주인 간에 접대하는 예법이 있다. 또 성질이 영리해서 남의 의사를 잘 아니, 금수와 같이 대우해서는 안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 조정에서 이웃 나라로 대우하여 관소(館所)에서 접대하는 예가 북쪽 오랑캐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통신사(通信使)를 보내어 교린하는 도를 두터이 하고, 사신을 가려 뽑아서 전대(專對)하는 임무를 책임지웠다. 이것은 고려조에서 이미 시행한 바이고, 본조에서도 폐지하지 아니한 것이다. 나라 체모의 경중이 사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가 사신으로 가게 되자 왜인들이 감복해서 침략하는 것을 금하고 포로로 잡아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나흥유(羅興儒)가 사명을 받들고 가서는 한갓 교섭하는 요령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제 몸도 잡혀 갇힘을 면치 못했으니, 사신의 한 몸이 또한 중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사신으로 간 자는 반드시 그 체모를 중하게 하고 행동을 예법대로 해서 오랑캐들이 감히 만홀히 여기는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흉금을 털어놓고 성의를 보여 정의(情誼)가 서로 통하게 해서 오랑캐들로 하여금 사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바야흐로 사신된 책임을 다하여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을 능사로 여길 뿐이라면 예로부터 사신으로 갈 만한 인재를 어찌하여 귀하게 여겼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의 소견이 옳은 점이 있다. 붕우 간에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선을 하도록 책하는 것이니, 그대가 말해 주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서장관에게 있어서는 다른 산의 돌과 같으니, 그대는 기다려 보라.” 하였습니다.

이미 그 사람에게 대답해 주고, 또 그 말을 기록하여 체모에 대한 말을 되풀이하니, 족하는 반복해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만약에 합당치 못한 점이 있거든 회답해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아무개는 절하고 올립니다.

[주D-001]진(秦) 나라 …… 한다면 : 소가 닭을 보듯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말이다. 선진(先秦) 시대 때 진 나라는 서북쪽에 있고 월 나라는 동남쪽에 있어서 서로 간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주D-002]모수(毛遂)가 …… 중하여졌고 : 구정은 우(禹) 임금이 만든 아홉 개의 큰 솥이고, 대려는 중국의 큰 종으로, 모두 아주 중(重)한 것을 뜻한다. 전국 시대 때 조 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모수를 데리고 초왕(楚王)과 교섭하러 갔는데, 초왕에게 합종(合縱)의 이해(利害)를 말하였으나 한나절이 다 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모수가 칼을 빼들고 뛰어 올라가 초왕을 위협해서 드디어 합종에 대한 약속을 받아 내었다. 그러자 평원군이 말하기를, “조 나라를 구정이나 대려보다도 중하게 만들었다.” 하였다. 《史記卷76 平原君虞卿列傳》
[주D-003]이절(李梲)이 …… 가벼워졌습니다 : 이절은 송(宋) 나라 사람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의 위세에 겁내어서 몹시 굽실거렸다.
[주D-004]예절(禮節)과 …… 비유 :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경중을 잘 참작해서 처리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예절과 식색(食色)의 가볍고 중함을 말하여 “담을 넘어 남의 처녀를 겁탈이라도 하겠는가? 형의 팔을 비틀고 음식을 빼앗아 먹겠는가?” 하였다. 《孟子告子下》
[주D-005]소에게 …… 매어서는 : 원문은 ‘우기마미(牛羈馬縻)’인데, 소주에, “초본에는 ‘우미마기(牛縻馬羈)’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06]나흥유(羅興儒) : 고려 말기의 사람으로, 우왕(禑王) 때 자청하여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왜구(倭寇)를 금단해 주기를 요청하였다가 일본에 구속되었다. 그 뒤에 고려 사람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중 양유(良柔)의 노력으로 풀려나 양유가 고려에 사신으로 올 때 함께 돌아왔다.
[주D-007]다른 산의 돌 :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결점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다른 산의 돌로도 숫돌을 삼을 수 있네.[他山之石可以爲錯]” 하였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허 서장관(許書狀官) 성(筬) 에게 답하는 편지

성일은 여쭙니다. 족하(足下)가 변변치 못한 나를 버리지 않고 순순하게 타일러서 고집스럽고 아둔한 나의 소견을 돌려 나라의 체모를 온전케 하려고 생각하니,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나의 소견으로 생각하건대, 족하가 나라의 체모를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나라의 체모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족하의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이리도 심합니까.

대개 이 섬이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대대로 우리나라의 은덕을 받아서 우리의 동쪽 울타리가 되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이고, 땅으로 말한다면 부용국(附庸國)입니다. 우리 조정에 명맥을 의존하고서 살아가는바, 만약 관시(關市)를 철폐하고 조공(朝貢)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이것은 어린아이의 목을 비틀고 젖줄을 끊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조종조 이래로 오랑캐를 무마하는 도리를 깊이 알아서 한편으로는 용이나 뱀으로 여기고, 한편으로는 외방의 신하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위엄으로써 두렵게 하고 은덕으로써 회유하여, 일찍이 한 번도 어름어름하여 저들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섬에서도 또한 우리 조정의 은혜와 신의가 중함을 알아 우러러 신뢰하기를 두텁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번국(藩國)의 도리를 받들어서 신(臣)이라 칭하면서 속국(屬國)의 법도를 정성껏 지키면서, 토산물을 바치고 북궐(北闕)에 이마를 조아렸는바, 그 위엄에 두려워하고 덕에 감복한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이번에 사신이 나올 때에는 평의지(平義智)가 직접 행차를 호위하였고, 관소(館所)에서 접대하는 것도 전보다 더함이 있었습니다. 왕명을 전달하는 날에는 뜰 복판에서 절하고 조아려서 공경하게 받들기를 의식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견(相見)할 때에도 앞에 와서 두 번 절하여 감히 도주(島主)의 예로 자처하지 않았으니, 공손하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들의 실수는 그들의 환심을 얻고자 해서 지나치게 겸양하여 낮춘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문득 교만한 마음을 내어 며칠 뒤에는 이미 처음에 우리를 대하던 태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있었던 동산(東山)의 모임에서 평의지가 말을 타고 바로 장막 앞까지 왔었는데,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손님과 주인 사이이기 때문에 곤란한 바가 있었으므로 감히 낯빛과 언사에 나타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뒤 국분사(國分寺)에서 한 짓에 이르러서는 놀랍기가 그지없습니다. 대국의 사신이 저의 상관(上官)과 당(堂) 안에 앉아 있었으니, 평의지라는 자는 다른 문으로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척인 곳에서 감히 거만스레 가마를 타고 와서는 뜰을 지나서 당에 올라와 사신을 흘겨보기를 마치 제 신하나 종을 대하듯 하였습니다. 비록 오랑캐라서 무례한 탓에 그런 것이라고는 하지만 군신 상하의 분수와 의리가 있는 법인데, 의지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신된 자가 만약 그 자리에 눌러앉아서 함께 예를 올리고 또 같이 팔을 잡고 술잔을 주고받아 즐긴다면, 이것은 모욕을 받는 것을 달갑게 여겨 신하와 종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저들도 또한 사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을 보고는 반드시 예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서 조금도 기탄하는 뜻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말류(末流)의 폐단이 장차 어느 지경엔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 몸이 비록 하찮으나 대국의 사신입니다. 누구인들 ‘몸은 가벼이 할 수 있어도 나라는 가벼이 할 수 없고 몸은 욕되게 할 수 있어도 왕명은 욕되게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몸과 나라는 두 가지로 볼 수가 없는 법입니다. 제 몸을 가벼이 하면 나라도 가볍게 되고 제 몸을 욕되게 하면 왕명도 욕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신 된 자가 어찌 감히 제 몸을 가볍게 하고 욕되게 하여 나라를 가볍게 하고 왕명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내가 간절하게 상사(上使)에게 고하고 함께 나가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말해도 상사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서만 나오는 것이 비록 온당치 못한 듯하였지만 그때를 당해서는 상사는 가볍고 나라의 체모는 중하였던바, 구차스럽게 함께 하여 왕명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는 어찌 달리 행동하여 왕명을 높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객관으로 돌아온 뒤에 족하와 차군(車君 차천로(車天輅)를 가리킴)도 또한 서로 잇달아 나왔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의 체모를 중하게 여겨서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족하의 소견도 나와 더불어 대략 같다고 여겼습니다. 어찌 지나치게 깊이 생각한 나머지 도리어 의혹이 생겼을 줄을 헤아리기나 하였겠습니까.

족하가 이른바,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는 보통의 법도를 가지고 해서는 안 되고 조용하게 조치하여 나라의 체모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럴 듯합니다. 그날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가 보통의 법도 이외에 다시 무슨 도리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조용하게 조치하여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도 또한 무슨 도리가 있었습니까. 족하가 품고 있는 생각을 내가 한번 헤아려 보겠습니다.

이른바 보통의 법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써 다스린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조용하게 조치한다는 것은 함께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천천히 타일러 그의 마음을 부끄럽게 한다는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무릇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써 다스리는 것은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대우하는 방법입니다. 왕명을 받든 신하는 한 나라의 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삼가지 않아서 하찮은 오랑캐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면, 나라를 욕되게 함이 심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써 다스린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사신의 도리이겠습니까. 다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더불어 무릎을 맞대고 자리에 앉아서 안부를 묻고 술잔을 나눈다면, 이것은 모욕당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뒤에 비록 조용하게 타이른다고 한들 어찌 능히 그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날 내가 가령 분노하여 면전에서 심히 꾸짖고 그 몸을 구타했다면, 과연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를 잘못하여 격분해서 변고를 일으킨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나는 병을 핑계 대고 물러나와서 내 한 몸만을 깨끗이 하여 객관으로 돌아온 데 불과합니다. 이것은 실상 금수와는 상대하지 아니하여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써 다스린 것으로, 무슨 지나친 거조가 있었습니까. 만약 그들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렵다 하여 그대로 구차스럽게 순종한다면, 이것은 아녀자들이나 할 짓이지 어찌 대장부의 의기이겠으며, 또 어찌 대국 사신의 체모이겠습니까.

세운(世雲)에게 곤장을 친 일에 있어서는 그 연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에 오자, 방언(方言)이 서로 달라서 바로 벙어리나 귀머거리와 같으니, 그들을 타이르는 책임은 세운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저번의 변고는 뜻밖에 일어난 것이니, 비록 역관이 있었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의지가 우리들이 퇴장하는 것을 괴이쩍게 여겨서 물었으니, 세운으로서는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엄한 말로 타이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입을 다물고 혀를 묶은 듯하면서 기를 펴지 못하고 이에 병이 나서 객관으로 돌아간 것이라고만 말하였으니, 그 죄가 또한 크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의 생각으로는, 북경(北京)에 갔을 때에 중국 사람이 만약 잘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잘 타이르지 못한 것을 죄로 삼아서 우리 역관을 곤장 치는 것이 전례입니다. 상국(上國)에 들어가서도 오히려 역관을 곤장 치는데, 번신의 나라에 와서 유독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한단 말입니까.

죄를 다스린 후에 도선주(都船主)가 비로소 사람을 시켜 와서 사과하기를, “부관이 나이가 젊어 예를 몰라 이런 잘못이 있었습니다. 도주(島主)가 듣고 놀라서 실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왕이 만약 이 일을 들으면 우리들도 또한 죄를 받을 것입니다. 제가 직접 나아가서 사과하겠으니 사신께서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통신사를 폐지한 지가 100여 년이나 되었다. 일본의 새 왕이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면서 여러 해 동안 사신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두 나라의 우호를 닦도록 한 것이니 그 예가 지극히 중하다.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각각 체모를 잘 차려야지 서로 경홀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국경에 들어오던 처음에 부관의 능멸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새 왕의 뜻이겠으며, 또한 우리 전하께서 귀국에 바라는 바이겠는가. 하물며 본도는 우리나라를 신하로서 섬기고 있어서 번신과 다름이 없고, 부관은 또 도주의 아들이다. 그런데 무례함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비록 나이가 젊어 예를 모른 탓이라고는 하나 동평관에 있을 때의 일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우리나라의 선위사들은 객사(客使)와 서로 만나면 반드시 대문 밖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의관을 바르게 한 다음에 들어와서 예를 행하여 종시토록 태만하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객사가 직접 본 것이다. 어찌 일찍이 거만하고 업신여겨서 무례함이 이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는가. 그때에 만약 선위사 등이 부관이 있는 관소의 문을 열어젖힌 다음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탄 채 그대로 뜰을 지나서 당에 올라갔다면 부관의 마음이 편했겠는가.” 하였습니다.

왜인 평조련(平調連)은 바로 우리나라에 따라왔던 자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절하면서 공손하게 말하기를, “부사의 말씀이 지당하고 지당합니다. 우리 소인들도 또한 실례한 줄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관의 사자가 몰래 역관에게 알리기를, “부관이 어제 사신이 퇴장하는 것을 보고 이미 잘못을 깨달았으며, 또 도선주가 준절하게 책망하였습니다. 부관이 밤새도록 자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어제 한 일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합니다. 그런데 족하는 이에 세운을 곤장 친 것을 너무 심하다고 하니 또한 그르지 않습니까.

저녁에 들으니, 왜놈들이 포구(浦口)에서 사람을 참수했다고 하기에 마음에 놀라웠습니다. 이에 같은 배의 격왜(格倭)에게 물었더니, “국분사(國分寺)에서 가마를 타고 당에 올라간 것은 당초 부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문간에 들어갈 때 가마를 멈추라고 하였는데도 가마를 멘 사람이 따르지 않아서 실례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부관이 크게 노하여 곧 참수하고자 하였는데, 그자가 도망하여 나타나지 않았던 까닭에 이제야 비로소 잡아서 처형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한 왜인은 또 말하기를, “사신으로 하여금 실례한 죄가 가마를 멘 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여 사신 배의 격왜를 입회시켜서 죽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내가 차군(車君)에게 이르기를, “사람을 죽인 변고가 오로지 우리들이 먼저 퇴장해 나온 데에서 연유하였으니 또한 참혹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날 사신이 제 몸을 욕되게 하고 왕명을 욕되게 했던 것이 극도에 달했었는데, 부관이 이미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또 아랫사람에게 죄를 돌려서 죽였으니, 이제야 나라의 체모가 조금은 높아지고 나라의 치욕도 또한 조금은 씻게 되었다.” 하고는, 서로 더불어서 한편으로는 불쌍하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족하는 한갓 사람을 죽인 것만 놀랍게 여기고 나라의 체모가 중한 것은 생각지 않아서, 이렇게까지 심하게 스스로 후회하고 책망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족하는 또 말하기를, “옛사람이 오랑캐들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은덕과 신의로써 회유할 뿐이었다. 어찌 일찍이 체모라는 글자를 말한 적이 있었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이고서 비파를 타는 격입니다.

선왕(先王)이 오랑캐를 대우하는 데에 있어서 비록 ‘은덕과 신의로써 회유한다.’고는 하였지만, 가장 엄하게 하고 또 조심하여 한 것은 체모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춘추(春秋)》에는 중국을 안으로 여기고 오랑캐를 밖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랑캐의 나라가 비록 크다고 해도 반드시 ‘인(人)’이라고 칭하였으며, 진(秦) 나라나 초(楚) 나라가 비록 참칭(僭稱)했으나 반드시 ‘자(子)’라고 칭하여서 여러 열국(列國)들이 다 모일 때에는 반드시 여러 열국들의 아래에 서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체모를 높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漢) 나라의 고제(高帝)와 문제(文帝)가 금과 비단으로 흉노를 받들자 가의(賈誼)는 “머리와 발이 거꾸로 되었다.” 하였고, 한 나라 선제(宣帝)가 흉노의 위계를 여러 제후의 위에 올려 놓으니 양웅(揚雄)은 “존비(尊卑)의 차례를 문란시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체모를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까.

지금에 와서 본다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고 도왜(島倭)는 실상 오랑캐와 같습니다. 대국의 사신으로서 하찮은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그들에게 능멸과 무례를 당하고서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도리어 중한 체모를 하찮고 사소한 것으로 여기니, 이것은 또한 《춘추》의 뜻과 다르지 않겠으며, 또한 한 나라 유신(儒臣)의 소견과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내가 이른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이고서 비파를 타는 격’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상사가 거취(去就)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들과 더불어 즐겁게 수작한 것이 어찌 괜히 그런 것이겠습니까. 상사의 뜻은 필시 ‘오랑캐들과는 족히 따질 것이 없으며, 작은 예는 족히 다툴 것이 없다. 만약 그들과 더불어 자잘하게 다투고 따진다면 어찌 얻는 것은 적고 해되는 것은 크지 않겠는가.’라고 여긴 것입니다. 상사의 뜻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종시토록 포용해서 낯빛을 조금도 변치 않았던 것인바, 그 도량의 굉대함은 실상 소견이 얕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각자 소견이 있는 법이니, 어찌 무조건 찬동하여 구차스럽게 합치하겠습니까.

옛날 공도보(孔道輔)가 요(遼)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요 나라의 영인(伶人)이 문선왕(文宣王)에 관한 내용으로 연극을 하자 공도보가 벌떡 일어나 나와서 연회가 중간에 파하고 말았습니다. 대개 요 나라는 일개 오랑캐이고 영인은 또 오랑캐의 일개 배우인바, 우연히 한 연극은 한바탕의 우스개에 부칠 만도 합니다. 그런데도 공도보가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나와 버려 오랑캐와 더불어서 서로 따진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들이 개돼지의 소굴에 들어와서 개돼지와 섞여 있어 형세가 고단한바, 그 위태로움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의지가 가마를 타고서 곧바로 당에 오른 것은, 요 나라의 영인이 문선왕에 관한 연극을 한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사신을 모욕하는 것은 실상 나라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신 된 자가 어찌 미리 스스로 두려워하여 모욕을 달갑게 받으면서 그들과 더불어 따지면서 다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가 또 말하기를, “의관(衣冠)이 비록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나, 원숭이에게 입히면 반드시 날뛰면서 찢어 버리는 법이다.” 하였는데, 참으로 적절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내가 의리를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사신의 체모를 보존코자 함이요, 원숭이에게 의관을 입히고자 함은 아닙니다. 내가 타이른 것도 단지 예가 아님을 말했을 뿐이고, 저들에게 힐책을 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비록 무지하나 또한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반드시 사람을 처형하고 말았습니다만, 저들의 참혹한 짓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며, 나라에 무슨 손상이 있기에 족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족하가 또 말하기를, “새 왕이 나와서 나라를 빼앗고도 부족하여 또다시 도주(島主)도 바꿔쳤다. 그런 다음에 오히려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포로를 바치면서 사신을 보내 주기를 요청했으니, 이것은 실로 두 나라가 편안해지느냐 위태롭게 되느냐 하는 중대한 기틀이다. 우리들이 직접 왕명을 받들어서 부절(符節)을 잡고 온 것이 어찌 단지 체모 한 가지만을 위해서 온 것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족하가 실언한 것입니다. 군자는 한마디 말로 지혜로운 사람도 되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도 되는 법입니다. 족하와 같은 지혜를 가지고서도 마침내 지혜롭지 못한 데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또한 애석하지 않습니까.

일본의 새 왕이 제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빼앗고 도주를 바꾸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와 무슨 상관이기에 두 나라가 편안하게 되기도 하고 위태롭게 되기도 하는 기틀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가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면서 포로를 바치고 사신을 보내 주기를 요청한 것은, 그 뜻이 예의의 나라를 흠모하고 자기 나라에 과시하려는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신으로서 왕명을 받들어 국경을 나와 지금 이미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조심해서 예의를 지키고 일마다 규범을 따라 흔들리지 않고 굽히지 않으면서 태산처럼 의연하게 대처하여, 나라 체모를 구정(九鼎)보다도 무겁게 하고 임금의 위엄을 끝없이 펼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했더라면 왜인들이 반드시 “대국의 예의를 우리들이 진실로 들었거니와 지금 보니 과연 그러하다.” 하면서, 반드시 서로 더불어 눈을 닦고 쳐다보며 스스로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서 끝까지 감히 경홀하게 대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 그들의 경계에 들어오자마자 스스로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고 한결같이 왜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았습니다. 저들이 비록 무식하나 매우 영리한데, 어찌 우리들의 염치없는 행동을 모르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국분사에서 당한 모욕은 우리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은, 한 가지는 말을 좋게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체모를 존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말하는 데 있어서는 왜인들을 범같이 두려워하여 벌벌 떨면서 행여 그들의 노여움을 살까 겁내는 탓에 더듬거리다가 말할 차례가 되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체모에 있어서는 능히 자중하지 못하고 출입을 경솔하게 하여 비록 굴욕을 당해도 또한 수치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와 같이 성질이 급하고 속이 좁은 자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말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떼지어 일어나서 공격하여 한 마디도 입을 떼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사신의 체모입니까. 이러고도 감히 큰 소리로, “우리들이 왕명을 받들고 행하는 것이 체모 따위와 비교해 볼 때 그 경중과 대소가 어떠한가.” 하니, 족하의 이른바, 경중과 대소라는 것이 또한 어긋난 것이 아닙니까.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나라에 도가 있으면 도로써 몸을 따르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몸으로써 도를 따르는 법이다. 도로써 남을 따른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하였고, 정자(程子)도 또한 “자신의 몸을 굽히고서도 도를 행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의리가 어떤 것인가는 따져 보지 않고 한결같이 왜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으니, 도로써 남을 따르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굴욕을 달갑게 여기면서 그 도를 펴고자 하는 것은 몸을 굽혀서 도를 행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이 무릎은 한 번 굽히면 다시 펼 수가 없고, 왕명은 한 번 욕되게 하면 다시는 씻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절(節)을 잡아 흔들리지 않아서 비록 죽더라도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우리들이 조정을 하직하던 날 임금의 말씀이 정녕하였는데, 그 말씀이 귀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말씀하시기를,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여 조금이라도 만홀히 하는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체모를 높이고, 임금의 위엄을 멀리 전파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있다.” 하였으니, 참으로 거룩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이것은 신하로서 마땅히 조심조심하여 종시토록 깊이 생각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찮은 오랑캐가 함부로 무례하게 구는데도 마음 편하게 받아들여 능히 스스로 바루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왜왕의 궁정에 들어간 뒤에 일이 이보다 크고 모욕이 이보다 심할 경우, 겁부터 내면서 어찌할 줄 몰라 몸을 욕되게 하고 나라를 욕되게 할 것임은 앉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장차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보고하고 우리 삼한 땅의 사대부들을 보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마음 아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족하가 또 말하기를,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위의(威儀)를 높게 하며, 도량(度量)을 너그럽게 하고, 은신(恩信)을 넓혀서 외국 사람으로 하여금 엄연하게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지게 하는 것이 실로 체모를 높이는 큰일이다. 만약 공연스레 의심을 내어 평지에 풍파를 일으켜서 안색에 노기를 띠고 언사를 거칠게 하여 사람마다 힐책하고 말마다 겨룬다면 악한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족하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서 말한 한 대목은 자신을 찬양한 말이고, 뒤에서 말한 한 대목은 나를 꾸짖은 말입니다. 사모(紗帽)와 은대(銀帶), 붉은 옷과 옥으로 된 절(節)이 이국에 빛났으니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위의를 높게 했다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의리 없는 음식을 받아먹고 개돼지 같은 자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비록 도량이 너그럽고 은신을 넓혔다고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관과 위의를 이와 같이 존중하게 했고 도량과 은신을 이와 같이 넓혔건만 가는 곳마다 모욕만 받고 능히 왜인들에게 바라만 보아도 두렵게 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포(大浦)에 도착하던 날 평의지가 만나 보기를 청하였는데, 상사가 관소(館所)에 들어가자, 평의지가 또 말하기를, “지금은 날이 벌써 저물었으니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서 관소에 가서 만나려고 하자 평의지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하인이 멀리 5리 밖에 있다고 속였는바, 그가 서로 만나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나기를 청한 곳에 이르러서는 또 평복(平服)을 입은 채 들어오려고 하였는바, 우리를 가볍게 여긴 것이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때 내가 부득불 성을 내면서 족하와 다투었던 것은 실로 체모를 높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아무 일도 없는데 공연스레 의심을 내어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 것입니까.

도선주(都船主)가 또 단오날에 와서 뵙기를 청하였으므로 우리들이 또한 허락하였습니다. 이미 함께 서로 약속했으니 큰 사고가 없으면 어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식후에는 도주의 집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도주만 높게 여기고 사신은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도리어 예에 맞지 않는 음식을 보내니, 내가 받으려고 한들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신이 답하는 연회를 열었던 날 평의지가 세운(世雲)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이것이 만약 소주(燒酒)라면 내가 매우 싫어하는 것이니, 좋은 우리 술로 바꾸었으면 한다.” 하였는바, 손님을 공경하지 않음이 심했는데, 내가 허락하고자 한들 허락할 수 있었겠습니까. 손님과 주인 사이에 왕래하는 편지는 만홀히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현소(玄蘇)는 조각 종이에다 쓰면서 글씨도 휘갈겨 썼으며, 재단도 하지 않고 봉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으려 한들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동산(東山)의 모임에서 사신이 장막(帳幕)을 설치하였으니 실로 우리가 주인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파하고 나올 때에 평의지가 이내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보다 먼저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따르고자 한들 따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평의지가 문안차 보내는 자가 매일 아침마다 반드시 창 두 자루와 칼 두 자루를 앞세우고서 바로 내 앞에까지 왔습니다. 이에 내가 역관을 시켜서 타일렀더니, 그 후부터는 감히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들의 무례함을 그대로 놔 두려고 한들 놔 둘 수 있었겠습니까.

국분사(國分寺)에서 당한 변으로 말한다면, 족하와 같은 큰 도량으로도 능히 참아 내지 못했는데, 하물며 나같이 성질 급하고 속 좁은 자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일찍이 얼굴에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거나 언사를 거칠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예법에 의거하여 온순한 말로 조용하게 타일렀을 뿐, 어찌 일찍이 족하가 말한 바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또 선위사(宣慰使)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실로 소소한 곡절이 아닙니다. 저들이 이미 소식이 왔다고 우리를 속였고, 또 박다(博多)에 벌써 도착했다고 우리를 속였으며, 또 역풍(逆風)이 불어서 못 온다고 우리를 속였습니다. 이에 지금 이미 한 달이나 머물러 있는데도 아직껏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다가, 끝내는 선위사도 없이 출발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들이 조종하는 대로 내맡겨 두어 앉은 채로 기만을 당하면서도 감히 한 마디도 따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사체입니까. 어제 내가 한 차례 타이르고자 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큰 소리로 꺾어 버리니 나의 답답한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대저 족하의 편지에서 온 종이 가득 누누이 한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고명(高明)의 병근(病根)이 어디에 있는가를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뜻인 ‘포사(怖死)’ 두 글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옛사람은 의리에 있어서 당연히 말해야 하면 비록 죽임을 당하더라도 반드시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처럼 순순하게 타이르는 일이겠습니까.

또 족하는 정 문충(鄭文忠)과 신 고령(申高靈)의 일을 인용하여 미담(美談)이라고 하면서 은연중에 자신을 이들 두 현인같이 여기니, 족하가 자신을 높게 여기는 것이 높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 고령은 어려운 때를 만나서 욕본 것이 많았으나, 오히려 도주(島主)로 하여금 그의 풍모만 바라보고도 말에서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 오천(鄭烏川 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킴)으로 말하면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이 오랑캐와 중국에 소문이 나서 아무리 어리석은 왜놈들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존경하고 사모할 줄을 알아서 날마다 거르지 않고 견여(肩輿)로 모셔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미 저들로 하여금 우리의 풍모를 바라보고 말에서 내리게 하지 못했고, 또 능히 견여로 모셔 가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평의지가 견여를 타고 들어오는 능욕을 당하였으니, 또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내가 안색과 말투를 순하게 하지 못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앞질러 퇴장한 것이 비록 경솔한 것 같으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족하는 나를 허물하지 말기 바랍니다.

《논어(論語)》에 이르기를,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도모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찌 도가 같은데도 함께 도모하지 못하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줄을 요량이나 했겠습니까. 참으로 우리의 도가 외롭고도 궁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D-001]기러기발을 …… 격 :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다. 기러기발은 비파나 거문고의 줄을 떠받치는 것으로, 소리에 맞춰서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데, 이를 아교로 붙여서 고정시켜 놓고서 음악을 연주하면 가락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다.
[주D-002]공도보(孔道輔)가 …… 말았습니다 : 공도보는 송(宋) 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45대손이다. 인종(仁宗) 때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갔는데, 거란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배우로 하여금 공자에 관한 놀이를 하게 하니, 공도보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거란측에서 다시 자리로 나오게 하여 사과하기를 요구하자, 공도보는 화를 벌컥 내면서, “중국과 북조(北朝)가 통호(通好)하는 데 있어서는 예의로 서로 접하는 법인데, 지금 배우의 무리가 선성(先聖)을 모욕하는데도 금지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은 북조에서 잘못한 것이다. 내가 어찌 사과하겠는가.” 하니, 거란의 군신들이 아무 말도 못하였다. 《宋史卷297 孔道輔列傳》
[주D-003]정 문충(鄭文忠) : 문충공 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킨다. 우왕(禑王) 때 왜구(倭寇)들의 침입이 심하였으므로 나흥유(羅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하게 하였는데, 도리어 일본측에 구수(拘囚)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정몽주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권신(權臣)들이 정몽주를 천거하여 구주(九州) 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서 교린(交隣)의 이해를 개진하여 사명(使命)을 다하고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의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주D-004]신 고령(申高靈) : 고령 신씨(高靈申氏)인 신숙주(申叔舟)를 가리킨다. 세종 24년(1442)에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갔다 와서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등을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交聘)에 많은 도움이 되게 하였다.

학봉집(鶴峯集) 제5권 서(書)-일본의 상관(上官) 현소(玄蘇)에게 답하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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