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1501∼1570(연산군7-선조4)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나, 후실이었지만 자모(慈母)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우13)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경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28 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 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임명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 를 두터이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뒤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 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 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책06: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 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

죽은지 4년 만에 고향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 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으며,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지만, 그가 《주자대전》을 미독(味讀)하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에 의하여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자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고, 또한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 夙興夜寐箴註〉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하였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하였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하여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하여 그것을 가지고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하여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하여 군주의 이목을 가리게 하지 않을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하여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 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이96)의 저작이며, 제2도에서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임은(程林隱)의 작품이다. 제3도에서 제사는 주자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에서 본문은 주자의 《대학경 大學經》 일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에서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에서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임은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자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임은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자의 말이고 도는 왕노재(王魯齋)의 작품이며, 제10도에서 잠은 진남당(陳南塘)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제3·5·10 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만이 이황의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유학사상의 정수들의 집약은 이황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왔고, 도쿠가와(德川家康)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만 한 풍모가 있다.”고 하였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 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하여,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하였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운월당(金雲月堂)·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자중·구 경서(具景瑞)·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강이(李剛而) 등등을 위시한 260여인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유학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 하고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하여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 하여 존신(尊信)하였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하여 속학(俗學)이 되어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고,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하여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하였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 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라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 日鮮史話》에 의하면, 여코이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메이지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하여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 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

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400주기기념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학술지 《퇴계학보》는 1990년 3월 현재로 64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서독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서독·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하여서 주제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특히, 1989년 10월 국제퇴계학회와 중국인민대학이 공동주최한 제11차국제학술대회가 북경에서, 그리고 1990년 8월 제12차국제학술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바 있다.


조식(曺植) 1501-1572(연산군7-선조5)

1. 유년시절

1501 년(연산군 7)경상도 삼가현 토골〔兎洞〕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열중하였으나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중국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수시로 펴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1527년(중종 22)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531년 생계가 어려워 어머니를 모시고 살림이 넉넉한 처가를 찾아가 김해의 탄동(炭洞)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제자교육에 힘썼다.

2. 학문연마와 강학활동

1539년 38세에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하였다.

1549년(명종 4)에는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뒤 1552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李滉)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그뒤 1556년 단성현감, 1560년 조지서사지 등으로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같이,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이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51년 오건(吳健), 1556년 하항(河沆), 1563년 김우옹(金宇#옹19), 1565년 최영경(崔永慶), 그 이듬해 정구(鄭逑)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다.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德川洞)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더욱 힘썼다.

1567년 5월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하여 두번씩이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왕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 낙향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3. 학문적 견해

그는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경의(敬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다. 그는 특히 실천궁행을 가장 강조하였는데,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不義)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할 때마다 몸에 긴요한 것이 있으면 이를 기술, 편찬하였다. 이것이 《학기유편 學記類編》인데, 그는 이 《학기유편》을 통하여 도(道)의 체통(體統)을 말하고 학문하는 방법과 논심(論心)의 요경 및 수신(修身)의 방법과 치국의 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삼재태극도(三才太極圖)·성위태극도(誠爲太極圖)·천인일리도(天人一理圖) 등 10여종의 도해(圖解)를 붙여 난해(難解)한 이학(理學)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초심자(初心者)에게 《심경 心經》·《서명 西銘》·《태극도설 太極圖說》 등 심성(心性)에 관한 문장을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을 반대하고, 《소학》·《대학》·《논어》와 같은 실천적인 경전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교수방법도 자해자득(自解自得)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이황과의 관계

한편, 그는 경상좌도의 거유(巨儒)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대유학자로 쌍벽을 이루었다. 두 거유는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서신으로 서로 안부를 물어 우의를 돈독히 하였지만, 학문적으로는 약간의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의 학자들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는 자가 많았다.

특히, 정구·김우옹·정탁(鄭琢)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격인 정인홍(鄭仁弘)만은 이황에게 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거유의 견해차이를 들어 상당한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물론, 자기의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뒤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황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황과 이언적의 출향(黜享)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두 학자의 문하생들 사이에는 한때 상당히 서먹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진다.

이와같이, 두 계열의 문하생들이 친밀한 관계로 지내다가 때로는 소원해진 사이가 되기는 하였으나, 후기에 오면 경상도의 두 학자를 서로 추장(推奬)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5. 문인풍과 학풍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들을 살펴보면 정구·곽재우(郭再祐)·정인홍·김우옹·이제신(李濟臣)·김효원(金孝元)·오건·강익(姜翼)·문익성(文益成)·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곽일(郭$율01)·하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한국유학사에서 크게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들은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가 벼슬길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상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文風)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라 하겠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문인으로 몸소 앞장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즉, 그들은 국가의 위란 앞에 학자의 몸으로 수수방관하지 않고 직접 몸을 던진 참여정신이 투철한 자들이었다. 이러한 정신과 모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6. 사후의 상황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영의정이 더하여졌다.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파한잡기 破閑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연산군10-명종6)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 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이씨 (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 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 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 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기59)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로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정렴(鄭염) 1505-1549(연산군11-명종4)

 조선시대 중종 때의 유의(儒醫).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순붕(順鵬)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천문·지리·의서·복서(卜筮)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았는데, 1544년 왕의 병환에 약을 짓기 위하여 내의원제조들의 추천을 받아 입진(入診)하기도 하였다.

포천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가 일상경험한 처방을 모아 편찬한 것이라는 《정북창방 鄭北窓方》이 있었으나 유실되었다.

이 책은 양예수(楊禮壽)가 지은 《의림촬요 醫林撮要》에 인용되어 있다.


이탁(李鐸) 1509(중종 4)∼1576(선조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선명(善鳴), 호는 약봉(藥峰). 현감 맹희(孟禧)의 손자이며, 군수 창형(昌亨)의 아들이다.

1531년(중종 26)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544년 정언을 거쳐 지평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이조정랑을 거쳐 사인(舍人)·집의가 되어 1548년 권신 이기(李#기59)를 탄핵하였으며,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교리·전한을 역임하였다.

1550년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2년 동부승지·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5년 도승지·이조와 공조의 참의·부제학을 역임하고, 1558년 용양위호군(龍#양45衛護軍)·한성부우윤을 거쳐 1559년에는 임꺽정(林巨正)의 무리들이 들끓자 황해도관찰사로 나가 치안유지에 노력하였다.

1564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공조·호조·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67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8년(선조 1)우찬성을 거쳐 1571년 우의정, 1572년 영의정에 올라 병으로 사직하고 행판중추부사로 죽었다.

덕이 많고 지극히 청렴한 학자·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정숙(定肅)이다.


노수신(盧守愼)1515(중종 10)∼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 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기59)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에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하여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대학장구 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 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 학문이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하였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 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때와 같이 하였는데, 그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담24祭)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허엽(許曄) 1517∼1580(중종12-선조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군자감부봉사 한(瀚)의 아들이며, 봉(#봉20)·균(筠)의 아버지이다.

진사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으로 서용되고, 이듬해 대사성에 이르렀다.

1562 년 지제교를 겸하였을 때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이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서용되었으나 과격한 언론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 나식(羅湜)에게 《소학》·《근사록》 등을 배웠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동·서인(東西人)의 대립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당시 사류의 지도급 인물이 되었다. 벼슬을 30년간이나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였다.

《율곡집》에 보면 이론이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文義)에 잘 통달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이황(李滉)은 학문 토론에 접하여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박순(朴淳)과는 동문이었으나 당파가 서로 달라 사이가 벌어졌고, 말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 警民編》을 보충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 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초당집》·《전언왕행록 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중종12-선조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주부인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명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고,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546 년(명종 1)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완상하였으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서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가사(歌辭)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 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 南征歌〉가 있으며,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 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그가 지은 〈미인별곡〉과 허강(許#강18)이 지은 〈서호별곡 西湖別曲〉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지함(李之함) 1517-1578(중종12-선조11)

 조선 중기의 학자·기인(奇人), 《토정비결 土亭#비58訣》의 저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573년(선조 6)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고, 재직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게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년의 신수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심하여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 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1713년(숙종 39)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안명세(安名世) 1518(중종 13)∼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부호군 담(#첨15)의 아들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545 년(인종 1) 이기(李#기59)·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으며, 사관(史官)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고, 이듬해에는 승정원주서에 올랐다.

그러나 1548 년(명종 3)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 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받았다.


휴정(休靜) 1520∼1694(중종15-선조37)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3 세 되던 해 사월 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하였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傳燈》·《염송 拈頌》·《화엄경》·《원각경 圓覺經》·《능엄경 楞嚴經》·《유마경 維摩經》·《반야경》·《법화경》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1589 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은 문도 1,500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다가,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 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박순(朴淳) 1523(중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우윤(右尹) 우(祐)의 아들이며, 목사 상(祥)의 조카이다.

1553 년(명종 8)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홍문관수찬·교리·의정부사인(舍人) 등을 거쳐, 1561년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제정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홍문관직제학·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뒤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박통하고, 특히 《주역》에 연구가 깊었고,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에 더욱 능하여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하였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대승(奇大升)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 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관로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였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 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 있어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 1책, 《왕복서 往復書》 3책, 《이기왕복서》 1책, 《주자문록 朱子文錄》 4책 등이 포함된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최영경(崔永慶) 1529-1590(중종24-선조2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서울출생.

전라도관찰사 중홍(重洪)의 증손으로, 교하현감 훈(壎)의 손자이고, 병조좌랑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손준(孫濬)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였으며, 여러 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다. 학행으로 1572년(선조 5)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수령·도사·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안민학(安敏學)이 자주 찾아와 정철(鄭澈)을 칭찬하고 만나볼 것을 권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575 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의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였다. 마침 나라에서 사축(司畜)에 제수하고 그를 부르자, 잠시 나가 취임하였다가 곧 그만두었다. 정구(鄭逑)·김우옹(金宇#옹19)·오건(吳健)·하항(河沆)·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1576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스승 조식을 배향하였으며, 이듬해 외아들 홍렴(弘濂)이 죽는 불행을 겪었다.

1581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이 상소에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1585년 《소학》·사서(四書)의 언해를 위한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0년 정여립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유령의 인물 삼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獄死)하였다.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伸寃)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1611년(광해군 3) 산청의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효원(金孝元)1532(중종 27)∼1590(선조 23).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현감 홍우(弘遇)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73 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74년 다시 지평을 맡았다. 명종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은 뒤에 척신계(戚臣系)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1572년 오건(吳健)이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하였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여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결국 이조전랑이 되었다.

1575 년 심의겸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하였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훈신(勳臣)·척신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개혁을 둘러싸고 선조 즉위 직후부터 전배(前輩)와 후배(後輩)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척신정권 때 정계에 진출하여 심의겸의 도움을 받은 사림이 전배이고, 소윤의 몰락 이후 심의겸과 무관하게 정계에 진출한 부류가 후배로, 이들 후배 사림은 심의겸의 척신적 처지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이조전랑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점차 심화되어,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전배는 대부분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는 동인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동부의 건천동(乾川洞)에 있다고 해서,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부제학 이이(李珥) 등이 분규의 완화를 조정하고자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건의하여,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들이 그를 축출한 것이라 반발하여 다시 부령부사로 옮기게 하였으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 하여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은 실패하였고, 선조는 당쟁의 완화를 위한 조처로 이조전랑의 추천·교대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사간의 물망에 올랐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내직에 복귀하지 못하였고, 당쟁이 더욱 심해지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 나갔다.

그뒤 10여년간 한직(閑職)에 머물며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성암집》이 있다.

 

 최경회(崔慶會) 1532∼1593(중종27-선조26)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출신. 충(#충01)의 후손으로, 천부(天符)의 아들이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영해군수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전라남도 화순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경운(慶雲)·경장(慶長)과 함께 고을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는 고경명(高敬命)이 이미 전사한 뒤여서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 금산·무주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승첩(제1차진주전투)을 보다 쉽게 하였다. 이 공로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 년 6월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화순현읍지에 그의 〈투강시 投江詩〉가 실려 있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논개(? ∼1593)  (∼선조26)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함으로써 문자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윤리에 젖어 있던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는 마땅히 정부가 표창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하여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자료의 제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난 다음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비록 진주지역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建祠賜額)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순국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었으며,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경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의기사는 그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절차만이 《교방가요 敎坊歌謠》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출신이며, 양반가문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중종28-선조25)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았다.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仁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과 의논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 000여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하였다.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종사관에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양대박(楊大樸),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양희적(楊希迪)을 각각 임명하는 한편,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梁山璹)·곽현(郭玄)으로 하여금 서해를 경유하여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을 개시하였다.

의병군이 태인에 이르렀을 때,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금구(金溝)·임피(臨陂)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하였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楊大樹)에게 전마(戰馬)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하여 인후에게 수백명을 인솔하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하여,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하였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이곳에서 종후·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27 일 은진에 도달하여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황간·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당초의 북상계획을 변경, 7월 1일 연산(連山)으로 회군하였다.

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荊江)을 건너 합세하여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한 뒤, 9일 진산을 경유하여 금산에 도착,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하였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10 일 곽영과 합세하여 왜적과 대회전을 시도하기로 하고 800여명의 정예로 선제공격을 하였는데, 왜적은 먼저 약한 관군을 일제히 공격하자,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하였으며,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그는 후퇴하여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 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하였다.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체를 수렴하여 금산 산중에 매장하였으며, 10월 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고, 그뒤 장성의 오동촌(梧桐村)에 이장하였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白仁傑)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 그를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뒤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글씨·그림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유집(遺集), 무등산기행문인 《서석록 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 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윤두수(尹斗壽) 1533(중종 28)∼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군자감정 변(# 변03)의 아들이며, 근수(根壽)의 형이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예문관검열·홍문관정자·저작을 역임하였다.

1563 년 이조정랑에 재임중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朴素立)·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으나, 그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상계(上啓)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뒤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근수와 함께 파직되었으며,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하여 재령군수 최립(崔#입01)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하였다 하여 옷 한벌을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좌윤·오위부총관·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지방을 침범하여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수사·수령의 기강쇄신,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으며,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591년 5월 석강(夕講)에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답서를 명나라에 구주(具奏)하여 그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하여,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合啓)로 정철(鄭澈)에게 당부(黨附)하였다 하여 파면되고, 이미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뒤 그의 견해가 올바른 것임을 안 선조는 그의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재기용되어,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평양 행재소(行在所)에 임진강의 패보(敗報)가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이 있자 그는 이를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해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그 이듬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하였다.

159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에 봉하여졌다. 그는 평소 온화하고 화평하였으나, 큰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극복에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오음유고》·《기자지 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송익필(宋翼弼) 1534-1599(중종29-선조3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판관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갈고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 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성06)·정홍명(鄭弘溟)·강찬(姜燦)·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崔#입01)·이순신(李純臣)·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하였고, 문장은 좌구명 (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고,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심의겸(沈義謙) 1535-1587(중종30-선조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 연원(連源)이고, 아버지는 강(綱)이며, 홍(泓)에게 입양되었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요직에 임명되었다.

1563년 사림들이 이량(李樑)으로부터 화를 입게 되자 외숙인 그를 탄핵하며 권세와 간계를 배척하는 등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힘썼으나 도리어 왕의 외척으로 일을 꾸민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564년 지평·검상·사인을 거쳐 이듬해 사간·부응교 등을 역임하고, 1566년 집의·군기시정·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9 년(선조 2) 좌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1572년 이조참의 등을 지내는 동안 척신출신이지만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계통의 신진세력으로서 김효원(金孝元)이 등장하여 김계휘(金繼輝)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천거되자,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 권신이던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기거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했다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1574 년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발탁되고 1575년 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銓郎)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西人), 신진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東人)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즉,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산다 하여 그 무리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당시 정승 노수신(盧守愼)과 이이(李珥)가 사림간의 분규가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올린 상소에 의해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전라감사를 거쳐,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뒤 한때 낙향하여 은퇴하였으나, 1580년 예조참판으로 함경감사를 역임하였다. 이때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그를 질투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상소로 무사하여 전주부윤이 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일을 꾸며 동인과 합세하여 공박함으로써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피봉되었다. 인물됨은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정인홍(鄭仁弘) 1535-1623(중종30-인조1)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정치가.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菴). 합천(陜川)출신.

건(健)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옹19)·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지평을 거쳐 1581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하였으며, 의병활동을 통하여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602 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며,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던 성혼(成渾) 등 서인을 탄핵하였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도하였으며,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그는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하였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되어 소북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상소를 하여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같은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궤02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 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하였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일찍이 그를 평하여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 ”라고 하였다.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대인관계를 맺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저서로는 《내암집》이 있다.

 

성혼(成渾) 1535-1598(중종30-선조31)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서울 순화방(順和坊:지금의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초시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 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 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 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하였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일찍이 이황을 사숙하였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다가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필20)하면서 불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편의시무9조 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유호(留扈)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을 건의한 이정암(李廷#암26)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그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하였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견(嚴譴)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는 《우계집》 6 권 6책과 《주문지결 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 爲學之方》 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 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무11)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정철(鄭澈) 1536-1593(중종31-선조26)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의 아들이다.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도중에 죽고 아버지는 유배당하였는데, 그도 관북(關北)·정평(定平)·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그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같은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 이어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이르러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가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인 1575년(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왔다. 이어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고 파직,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진주와 강계로 이배되었다.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하다가 58세로 죽었다.
 
작품으로는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 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 短歌雜篇〉 32수, 〈성은가 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 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 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 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하고,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으나,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또,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가 있으며,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이이 (李珥) 1536∼1584(중종31-선조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출생하던 날 밤 어머니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어와 서렸다고 하여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산실(産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6세 때에 어머니가 죽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이이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 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안견(安堅/?~?)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대표적 화가.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
세종연간(1419∼1450)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때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에 도화원(圖畵院)의 종6품 벼슬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遞兒職)인 정4품 호군으로 승진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의 화원으로서 한품(限品)인 종6품의 제한을 깨고 승진한 최초의 예가 된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 保閑齋集》에 의하면 그는 본성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하였다고 하며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고화(古畵)들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는 토대로 삼았다.
안견의 화풍은 지금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전칭작품(傳稱作品)인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을 보면 안견이 북송(北宋) 때의 대표적 화원이었던 곽희(郭熙)의 화풍을 토대로 하고 그밖에 여러가지 다른 화풍의 요소를 수용하여 자기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비단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신숙주의 《보한재집》에 있는 화기(畵記)나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산수화에 가장 특출하였지만 그밖에도 초상(肖像)·화훼(花卉)·매죽(梅竹)·노안(蘆#안21)·누각(樓閣)·말〔馬〕·의장도(儀仗圖)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안견이 남긴 작품은 기록들에 상당수가 보이나 그 중에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42년(세종 24)에 제작된 〈비해당 25세진〉, 1443년의 〈이사마산수도 李司馬山水圖〉, 1445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보한재집》에 기록되어 있는 〈팔경도 八景圖〉 등 30점, 1446년과 1447년에 제작된 〈팔준도 八駿圖〉, 1447년 이전에 그려진 〈임강완월도 臨江翫月圖〉, 1447년에 제작된 〈몽유도원도〉, 1448년(세조 10)에 그려진 〈대소가의장도 大小駕儀杖圖〉, 그리고 1464년에 중국사신을 위하여 그린 〈묵죽도 墨竹圖〉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모두 없어져서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오직 〈몽유도원도〉만이 유존하고 있으며, 이밖에 〈사시팔경도〉 등이 그의 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그림들은 경물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도상의 특색을 비롯하여 공간개념과 필법 등에서 한국적인 특징을 짙게 띠고 있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까지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회화사에서는 안견과 그를 추종한 많은 화가들을 합쳐서 안견파라고 지칭하는데 이들의 영향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수묵산수화 발전에도 적지않은 기여를 하였다.
 
 
 
 
권율 (權慄) 1537∼1599(중종32-선조32)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며,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하였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하였다.
즉,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하여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였으나,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여 후사를 계획하였다.
한편, 남원에서 1천여명의 의군을 모집하여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에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管內)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잠시 주저하였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기병 1천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많은 왜병을 베었다.
그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하여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하여 행주산성을 택하였다. 조경에게 명하여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하였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그는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그는 행군중에 휘하병 가운데 4천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지금의 始興)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1천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미만이었다.
그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하여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한다는 결의를 제장(諸將)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침입에서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본진장령(本陣將領)들까지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하였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백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하였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하여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빈01)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어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휴전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하였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하였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중종33-선조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출신. 아버지는 진(璡)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 《서경》·《역학계몽 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 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하였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邊將)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貂#구A4〕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民寃)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抗倭戰)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옹19)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 家禮》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 杜氏通典》·《구씨의절 丘氏儀節》·《향교예집 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 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사34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중종34-광해군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함15)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역임하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윤현(尹晛)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다음해 대사헌에 승진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해에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을 시켜 김공량(金公諒:仁嬪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信誠君)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하여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 경전으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하게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는 한편, 이와 관련하여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白惟成)·유공진(柳拱辰)·이춘영(李春英)·황혁(黃赫)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으나 양사로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백의(白衣)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595년에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될 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홍여순(洪汝諄) 등과 대북파가 되어 그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하여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고, 이이(李珥)·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원균(元均 1540∼159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고려 태조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병부령 극유(克猷)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데 공이 컸으므로, 부령부사로 특진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웠으며, 1592년(선조 25)에는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해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양국간의 전쟁준비 격차로 말미암아 개전초부터 일방적인 패주의 연속이었으며, 거진(巨鎭)의 명관들은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하여 성읍이 모두 텅 빈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군사는 수사 박홍(朴泓)이하 전장병이 도주하여 싸워보지도 못하고 완전 궤멸되었으며, 우수영 관할하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고군분투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하여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하여 불화가 발생하였는데,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하였으므로 1594년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병사로 재직중에도 여러 차례 수군작전에 관한 계획을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여러 번 수사로 재기용할 것을 검토하던 중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1월에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인 것을 모르고,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삼도수군을 이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1604년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1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찬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 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
그러나 후일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각광을 받은 것과는 달리 대표적인 겁장이로 기록되어오기도 하였다.
 
 
김우옹(金宇#옹19) 1540-1603(중종35-선조36)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처의 외할아버지인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관직에 나아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평소에 몸이 약한 관계로 선조로부터 내의원을 통한 약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573년 부수찬으로서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이념과 위정자의 정치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 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식03),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의 실현을 보았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의 〈학제칠조 學制七條〉를 손수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도 청하였다.
또한,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생활중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 〈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 〈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 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징02)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우성전(禹性傳) 1542(중종 37)∼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
현령 언겸(彦謙)의 아들이며, 대사헌 허엽(許曄)의 사위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1년(명종 16) 진사가 되고, 1564년 보우(普雨)를 주살할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예문관봉교·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고 1576년 수원현감으로 나가서는 명망이 높았으나, 그뒤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사헌부장령·사옹원정을 거쳐 1583년에 응교가 되고 뒤에 여러 번 의정부사인을 역임하였다.
동서분당 때 동인으로 분류되었고, 그뒤 이발(李潑)과 틈이 생겨 그는 남산에 살아서 남인,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아서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동서분당 때나 남북의 파쟁에 말려 미움도 사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 서인 정철(鄭澈)의 사건에 연좌되어 북인에게 배척되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군호(軍號)를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해염(海鹽)과 식량을 조달하여 난민을 구제하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하여 전공을 세우고 강화도를 장악하여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다.
병선을 이끌어 적로를 차단하였으며,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그 공으로 봉상시정에서 대사성으로 서용되었다.
그뒤 계속 활약, 용산의 왜적을 쳐서 양곡을 확보하여 관군과 의군의 자량을 삼게 하였다.
그뒤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우도 의령까지 쫓아갔으나 과로로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갑록 癸甲錄》·《역설 易說》·《이기설 理氣說》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중종37-선조40)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 임란시의 군무총괄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李$빈01)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학문과 저술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이리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호(韓濩) 1543~1605)(중종38∼선조38)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 군수 대기(大基)의 5대손으로, 정랑 세관(世寬)의 손자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현령(#흡02谷縣令)과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의 묘갈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부80)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공(工)과 힘(筆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는다 하여도 동기창(董其昌)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경지는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김정희(金正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변03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인23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였다. 그로부터 비롯되어 사자관체(寫字官體)라는 서체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양대박(梁大樸) 1544-1592(중종39-선조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청계도인(靑溪道人).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관(學官)으로서 아들 경우(敬遇)와 가동(家#동06) 50명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해 6월 고경명(高敬命)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학(幼學)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같은달 7일 정군(整軍)하고, 8일 출사(出師)하자 그는 전주로 가서 의병 2, 000명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1786년(정조 10)10월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병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1796년 9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兵曹判書)로 개증(改贈)되었다.
저서로는 《청계집 靑溪集》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조헌(趙憲) 1544∼1592 (중종39-선조25)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출생. 응지(應祉)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으며,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령(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자청하여 보은현감으로 나가는 동안,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으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므로,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 600여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하여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우세한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금산전투라 일컬어 숭모하게 되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유정(惟政) 1544-1610(중종39-광해군2)
 
7세를 전후하여 할아버지에게 《사략 史略》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자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20세 연장인 박순(朴淳)과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당시의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장자》·《문자 文子》·《열자 列子》와 시를 배웠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휴정의 곁에서 도를 닦다가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그뒤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는데,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입어 강릉부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이듬해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던 중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천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제1차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① 천자와 결혼할 것, ② 조선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 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 왕자 1명을 일본에 보내어 영주하게 할 것, ⑤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또한, 제2차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회담(1594년 12월 23일)·제4차회담(1597년 3월 18일)에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5조약의 모순성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 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첫째, 모든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으로 적을 격퇴하여야 한다. 둘째, 교린하여 적을 돌려보낸 뒤 백성을 안위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하여야 하며, 전쟁에 필요한 군수무기를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1595년에는 장편의 을미상소를 올렸는데,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민력을 기르기 위하여 목민관을 가려뽑아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일시적인 강화로 국가백년의 대계를 망각하지 말고 국세회복에 만반의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본위로 등용하여 천한 사람일지라도 나라에 쓸모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면 적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 국가기강을 쇄신하며 문란한 기풍을 뿌리뽑고 민력을 북돋아 군정(軍政)확립의 본을 보일 것, 소(農牛)를 매호하여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여 산성마다 군량·마초·방어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일반백성과 동일한 처우를 하여 국가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 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 奮忠#서33難錄》 1권 등이 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이발(李潑) 1544∼1589(중종 39∼선조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 제학 중호(仲虎)의 아들이다.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생원이 되고, 1573년 알성문과에 장원,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1579년 응교, 1581년 전한, 1583년 부제학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홍가신(洪可臣)·허당(許#당48)·박의(朴宜)·윤기신(尹起莘)·김영일(金榮一)·김우옹(金宇#옹19)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士論)을 주도,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을 학립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렸다.
또,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待罪)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그가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이순신 (李舜臣) 1545∼1598(인종1-선조31)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변(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거(#거21)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후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장졸을 이끌고 동래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다음에 다시 있을 대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양(漆川洋)에서 전멸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원균의 패배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기용하게 되었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은 고작 12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사기가 꺽인 조선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하였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그는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군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켰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수만가를 이루게 되었다.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를 이루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지 않은 줄로 알고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최가 되어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대와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 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렸다.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인종1-인조1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아버지는 종7품인 계공랑(啓功郎)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다.
허균(許筠)의 《성수시화 惺#수04詩話》에서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던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으므로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를 폐하려고 그에게 소(疏)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그 절의를 칭송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
그는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하였는데, 자기 집 뒤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 하고 그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하였다. 그 화답한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그
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뒤에 아들 일민(逸民)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촌은집》 3권과 《상례초 喪禮抄》가 전한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명종1-선조22)
 
15세 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따라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는 아전들이 군수보다도 더 어려워하였다 한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2) 식년문과 을과에 두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편에 반부(反附)하여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朴淳)·성혼을 비판,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으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이와의 문제로 서인의 미움이 집중되었고, 선조의 눈밖에 나서 동인의 역천(力薦)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인 사이에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고, 특히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하여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하였을 때에는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에 응하여 대동계를 동원,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모사(謀士)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1589년 이들이 포함되는 동정이 퍼져 기밀이 누설되자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다.
한편, 그는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사건을 조사,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인사는 거의 제거되었으니, 비명에 숙청된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 0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런데 그의 모반사건에 관하여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누어져 있다. 조작설의 이유로는 네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째,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 桐巢漫錄》 같은 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기축옥사는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 동인 사이에 구전되어오는 설을 직서하였다고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김장생(金長生)이 엮은 〈송강행록 松江行錄〉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노비출신으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하였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 등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첫째, 그가 남긴 문자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고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王#촉14)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인의 통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가 성지화자(聖之和者)라고 칭찬한 유하혜(柳下惠)의 말을 인용한 하사비군이라는 말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신채호(申采浩)가 일찍이 지적한대로,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그는 전부터 있었던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하여 전읍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낭설을 퍼뜨리고 그것을 믿게 하였다 한다. 왕조의 운수가 다하여 천명이 타성에게 내려 새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임을 믿는 것이 도참신앙이고, 이것을 고의로 조작하였다는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또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왕조의 운수가 다하였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자세에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성은 있으나, 역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허준(許浚) 1546∼1615(명종1-광해군7)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김포출신. 할아버지 곤(琨)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 아버지 윤(윤)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는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인 1574년(선조 7)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봉직하면서 내의·태의·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글穴鍼灸圖經》을 하사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高陽生)의 원저인 《찬도맥결 글圖글訣》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 글圖方論글訣集成》 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楊禮壽)·이공석(李公글)·남응명(南應命) 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上體)가 평복함으로써 호피(虎皮)일영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痘瘡)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堂上)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때에 정원(政院)·사헌부·사간원에서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가자를 받는 것은 지나친 상사라 하여 여러 차례 그 가자를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으며, 그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글), 태의 양예수·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다시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의 일은 중단되었다.
그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內藏方書)500권을 내어 고증하게 하였는데, 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의 일에 전심하여 10여년 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25권 25책이다.
《동의보감》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 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어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었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써 해석, 출판하였다.
1601년 세조 때에 편찬한 《구급방 救急方》을 《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任元글)의 《창진집 瘡疹集》을 《두창집요 痘瘡集要》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으며, 1608년에는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 胎産要錄》을 《언해태산집요 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 《신찬벽온방 新글글글方》 1권과 《벽역신방 글疫神方》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 《신찬벽온방》은 그 전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양도에서 온역(글疫)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 簡易글글方》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며, 후자인 《벽역신방》은 그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發疹性)의 열병인 당독역(唐毒疫)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태의·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서임하였고, 1604년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熟馬)한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 정월에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陽平君正一品輔國崇祿大夫)를 가자받았다.
그런데 종래 우리나라의 계급으로는 의업은 중서급(中庶級)에 속하였는데, 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동반(東班)의 부군(府君)과 보국(輔國)의 지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계청에 할수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그 다음해 2월에 죽을 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왔다. 선조가 죽은 뒤 종래의 예에 따라 주치의 수의에게 책임을 물어 형식적으로 대죄(待罪)를 하게 되었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사면되었다.
1613년 11월에 70세를 일기로 죽게 되자, 호성(扈聖)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 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명종2-인조12)
 
15세에 동학(東學: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하여 1564년(명종 1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유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자·저작 겸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그 이듬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아 왕자사부 하락(河洛)으로부터 승정원이 탄핵을 받은 바 있었는데,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 박근원과 영의정 박순의 불화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화를 면하려 하였으나, 그는 다른 승지와는 달리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하여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그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그는 양곡 1만여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입번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안주지방에는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는데, 그가 권장하여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이원익에 의하여 계발된 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하였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하였으나 평양이 위태롭게 되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때 겨우 3, 000여명으로 평양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함으로써 군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평양이 실함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으며,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에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 가 경략(經略)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하였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지만,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았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하여 정도(正道)를 지켜온 인물들이 모두 내몰림을 당하자 이를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때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 홍여순(洪汝諄)·임국로(任國老)를 두둔하면서 조정대신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하였고, 또 선조가 세자에게 양위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1600년에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하여 실시하여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하였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가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鄭造)·윤인(尹#요13) 등에 의하여 대비폐위론이 나오자, 그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문을 초하여,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서울로 환도하여 훈련도감제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쇠하여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으며, 그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궤02杖)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허성(許筬) 1548∼1612(명종3-광해군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 엽(曄)의 아들이며, 봉(#봉20)·균(筠)의 형이고,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다.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0년 전적(典籍)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정언·헌납·이조좌랑·응교·사인·집의를 거쳐,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이듬해 대사성·대사간·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을 지내고 전라도안찰사로 나갔다가 예조와 병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그뒤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607년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 세인들이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 칭하게 되었다. 선조대에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악록집 岳麓集》이 있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명종3-인조9)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의 직을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고, 1596년에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에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에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고, 집의의 직을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여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고,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을 뿐더러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목05)·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그리고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었지만, 예학(禮學)분야는 송익필로부터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출신이었던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사련(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성06)·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을 뿐더러 1만8천여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임제(林悌)  1549-1587(명종4-선조2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晉)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찼다.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그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 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이나,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 지기(知己)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수성지 愁城誌》·《화사 花史》·《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는데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시조 3수와 《임백호집》 4권이 있다.
 
 
황진(黃進) 1550∼1593(명종5-선조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희(喜)의 5대손이며, 증좌의정 윤공(允恭)의 아들이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그뒤 거산도찰방에 서임되고 안원권관을 역임하였다. 이어 다시 선전관이 되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일행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를 거쳐, 동복현감에 임명되자 장차 있을 왜란에 대비하여 무예의 단련에 열중하였다.
특히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황윤길의 예상과 뜻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에 대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光)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용인에 이르렀으나 왜군에게 패전하여 남하하던 중, 진안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으며, 훈련원판관으로 이치전투(梨峙戰鬪)에 참가, 왜적을 격퇴하였다. 이 공으로 익산군수로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였다.
이어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진(陣)을 안성에 옮긴 다음 군대를 훈련시키고 대오를 정비하여 죽산성에 있는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적장 후쿠시마(福島正則)가 안산성을 탈취하고자 죽산부성(竹山府城)을 나와 안성에 진군하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이들과 맞서 죽산성을 점령한 뒤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대파시켰다.
그뒤 6월 적의 대군이 진주를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굳게 지키며 9일간이나 용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유영경(柳永慶)1550(명종 5)∼1608(광해군 즉위년).
 
조선 중기의 상신(相臣).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참봉 의(儀)의 아들이며, 예조참판 영길(永吉)의 동생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고, 1593년에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왜적을 맞아 60여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행재소(行在所)에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1594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가족을 먼저 피란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에 서용되었다. 당론이 일어날 때에는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하여 있었는데,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하였다.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갈리자, 그는 유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어 영수가 되었다.
이때 그는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는데, 대북파의 기자헌(奇自獻)·정인홍(鄭仁弘) 등과 심한 마찰을 빚었고 뒤이어 세자문제로 더욱 분란을 일으켰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하여진 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윤승훈(尹承勳)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1606년 선조 즉위 40주년 행사를 앞당겨 하례(賀禮)하고 증광시(增廣試)까지 실시하여 즉위 때와 같이 경축하게 하는 등 왕의 총애를 굳히려 하였다. 오랫동안 집권하여 그의 권력이 증대되고, 그에게 뇌물공여도 횡행하였다.
그뒤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 불화하여 그는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하였으며,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는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하였는데, 그는 그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대북 이이첨(李爾瞻)·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곽재우(郭再祐) 1552∼1617(명종7-광해군9)
 
.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출신.
황해도관찰사 월(越)의 아들이고,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金宇#옹19)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뒤,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고,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남쪽 창암진(滄巖津:솥바위나루)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양45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양45衛上護軍)에 승진하였다.
그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년(광해군 4)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수십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시민(金時敏) 1554∼1592(명종9∼-선조25)
 
1554(명종 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출신.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성민을 안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요청을 받고 정병 1천여명을 이끌고 이에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하여 염초(焰硝)5백여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병(柄)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였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적과의 싸움에 대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 800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 며칠 뒤에 진몰(陣歿)하였다.
죽은 뒤 성중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하였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이 추증되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명종11-광해군10)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영향을 받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1571년(선조 4)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에 진사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하여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질씩을 하사받고 옥당에 들어갔으며, 1583년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에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친국에 참여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하여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하였기 때문에 그의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대사간 이발(李潑)이 파당을 만들려 함을 공박하였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그 이듬해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담화를 계속하여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동안 그는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으며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남도지방에 사신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황응양(黃應暘)을 조사차 보냈는데,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의 파견을 보았다. 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사유(史儒)의 3천병력이 파견되어왔으나 패전하자 그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그는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에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하여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시켰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에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같은 사신인 경략(經略)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여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그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진하여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는 성혼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에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해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뒤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바 있어 성균관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져 권당(捲堂: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그의 주장으로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으며, 곧이어 북인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일가의 멸문지환,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북인파당의 흉계가 속출하였고,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하여 북인파당의 원망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에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와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에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이어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해 8월에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그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李宗#적07)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에 등용하게 하는 은전이 있었으며,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완전에 가까운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 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 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귀(李貴) 1557-1633(명종12-인조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세조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손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廷華)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에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하여 두 유현(儒賢)의 처지가 위태롭게 되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글을 올려 논변하여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에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 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하고 물러나와 의병을 모집하여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청죄(請罪)하고 방어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듬해에는 숙천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대책을 진언하자, 왕이 후하게 상사(賞賜)하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명나라 군중에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16년(광해군 8)에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로부터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나본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에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유15)·신경진(申景#진26)·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해 3월에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김류·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신경진·최명길·이흥립(李興立)·심명세(沈命世)·구굉(具宏)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여 국력강화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해에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일신의 안위를 잊고 나라를 위하여 공헌한 바가 컸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3권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몽인(柳夢寅)1 559(명종 14)∼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설화문학가.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사간 충관(忠寬)의 손자, 진사 탱(#탱02)의 아들로, 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 태어났다.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하였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났기에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왜란중 그는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그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왕은 그를 불러 남원부사로 삼았다.
그뒤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리하여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하였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생활을 하였다. 그해 7월 현령 유응형(柳應#형07)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하여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 아들 약(#약04)과 함께 사형되었다. 서인들은 중북파(中北派)라 불렀으며 끝내 그를 반대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그는 이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하여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는데,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이이첨(李爾瞻)1560(명종 1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 좌찬성 극돈(克墩)의 후손이며, 우선(友善)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3년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으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 거상(居喪)을 극진히 함으로써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승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1608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이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소북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鄭仁弘)과 짜고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해 2월에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일약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권세를 장악한 그는 정인홍과 함께 자기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 진(臨海君#진17)과 유영경을 사사하게 하는 등 소북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 태경(晋陵君泰慶) 등을 죽이고, 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 그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하게 하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하게 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이듬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당하였다. 아들 원엽(元燁)·홍엽(弘燁)·대엽(大燁)삼형제도 처형되었다.
 
 
강홍립(姜弘立) 1560-1627(명종15-인조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군신(君臣), 호는 내촌(耐村). 참판 신(紳)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검열(檢閱) 등을 거쳐, 1605년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이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서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역임한 뒤 1618년에는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졌다.
이때 후금(後金)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는 등 세력이 확장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여왔다. 조선 조정은 이때 새로 일어나는 후금을 의식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출병을 결정하였다.
강홍립은 오도원수(五道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관전(寬甸)방면에서 합류하여 동가강(#동01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하였다.
이들 조·명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여 앞뒤에서 적을 협격하기로 하였으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한 뒤 강홍립은 적진에 통하여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이는 출정전에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투항한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그는 김경서 등 10여명과 계속 억류당하다가 1627년(인조 5)정묘호란 때에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죽은뒤에 복관되었다.
 
 
이덕형(李德馨) 1561∼1613(명종16-광해군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지중추부사 민성(敏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하였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하사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조사(詔使)로 온 왕경민(王敬民)이 그를 만나려 하였으나 사사로이 면대함은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이 출중함을 칭찬하는 글귀를 전하였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이듬해 서총대(瑞#총18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그와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하였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그는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하였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는데, 전란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해에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였으며, 대마도정벌을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본인의 사양과 그를 시기하는 자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하였다.
그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명종18-선조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봉20)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이수광(李수光)  1563-1628(명종18-인조6)
 
아버지는 병조판서였던 희검(希儉)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85년(선조 18)23세에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27세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 35세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는데, 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또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中極殿)과 건극전(建極殿)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그는 진위사(陳慰使)로서 두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 서울에서 안남(安南: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유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39세에 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그 이듬해 《주역언해》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를 교정하였다.
1605년 43세에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겨울 다시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609년(광해군 1)돌아왔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세번째 명나라을 다녀왔다.
이때에 유구(琉球)사신과 섬라(暹羅:타이)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정국이 혼란하여지자 1616년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57세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이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을 받았다.
1628년 7월 66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일만으로 보아도 관료로서의 구실을 충분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활동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웠던 정국에 살면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면모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로서의 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될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 내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수광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반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후반에 있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로 정점을 이루는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金長生)·정구(鄭逑) 등에 의하여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와같이, 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때는, 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곧 한백겸(韓百謙)의 《기전유제설 箕田遺制說》에서 보여준 실증적 고증에 의하여 고대의 전제(田制)에 있어서 주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 등 양명학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이때의 이수광의 사상적 성격을 분석하여 보면, 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당시 주자학의 기본문제인 태극·이기·사단·칠정 등 성리학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心性)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적 문제를 학문적 중추문제로 삼고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이나 논변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수광은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기본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하여준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심학(心學)·과욕(寡慾)·초학(初學)·격언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젖혀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조진무실차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다.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학(學)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 학문은 입지(立志)와 지향하는 바(所向)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학문적 개방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 학문은 습(習)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熟)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學習論)을 엿볼 수 있다.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요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 즉 성숙인 것이다.
이수광의 이러한 사상적 성격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수광은 한 선구적 위치와 구실을 감당하고 있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수광은 66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지봉집》 31권, 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 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응서(金應瑞) 1564(명종 19)∼1624(인조 2).
 
임진왜란 때 무장. 본관은 김해. 초명은 응서(應瑞), 자는 성보(聖甫). 용강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 1588년(선조 21)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고, 다음해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으며,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 하자, 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고 불복하여 강등되었으며,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정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와 북로방어사(北路防禦使)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성해진 건주위(建州衛)의 후금 정벌을 위해 명나라의 원병 요청이 있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였다.
이듬해 심하(深河)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하자 강홍립과 함께 적진에 통하여 출병의 부득이함을 말하고 잔여병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였다.
포로가 된 뒤 비밀리에 적정을 탐지한 기록을 고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탄로나서 처형되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향리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이정구(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문장가문에서 출생, 가학을 통하여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여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 南山詩〉를 차운함에 놀라운 표현이 있었고, 14세 때에는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1593년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대학강어 大學講語》로 간행되었다.
한편,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접대에 정부를 대표하여 활약이 컸다.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가고, 다음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 〈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그뒤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장(章)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아, 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성실히 전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 표일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미적인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였으며, 장유도 그의 재기(才氣)를 격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집권층의 순정문학(醇正文學)을 대변하면서 변무주를 계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온 것들이다.
그의 문학은 한편으로 선린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공용성을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지만, 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처리한다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이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송유진(宋儒眞) ?∼1594(∼선조27).
 
조선 중기의 민란지도자. 본관은 홍산(鴻山). 서울출신.
임진왜란중의 혼란과 1593년(선조 26)의 대기근으로 굶주리는 백성 및 병졸을 모아 천안·직산 등지를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계룡산일대에까지 세력을 폈으며 무리는 2, 000여명에 달하였다.
당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보고 이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칭하며, 오원종(吳元宗)·홍근(洪瑾) 등과 함께 아산·평택의 병기를 약탈하여 1594년 정월보름날 서울에 진군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이해 정월 직산에서 충청병사 변양준(邊良俊)에 의하여 체포되어 왕의 친국을 받고 사형당하였다.
 
 
이몽학(李夢鶴) ?∼1596(∼선조29)
 
 임진왜란 때의 반란자. 본관은 전주(全州).
왕족의 서얼출신으로 서울에 살았으나,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도·전라도 사이를 전전하였다.
임진왜란중에 장교(將校)가 되었다가, 국사가 어지러움을 보고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 등과 함께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의병을 가장하여 조련을 실시하였으며,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 반란군규합에 열중하였다.
한현은 어사 이시발(李時發)휘하에서 호서(湖西)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시발의 명을 받았으나,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없음을 알아채고 이몽학과 함께 거사할 것을 꾀하였다.
김경창(金慶昌)·이구(李龜)·장후재(張後載), 사노(私奴) 팽종(彭從), 승려 능운(凌雲) 등과 함께 승속군(僧俗軍)600∼700명을 거느리고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모였다.
1596년(선조 29)7월 일당이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하고, 이어 임천군(林川郡)·정산(定山)·청양(靑陽)·대흥(大興)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洪州城)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목사 홍가신(洪可臣),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의 선방(善防)과 반란군 가운데 이탈하여 관군과 내응하는 자가 속출, 반란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그의 부하 김경창·임억명(林億命)·태근(太斤)3인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남사고(南師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도사(道士). 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격암(格庵).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한,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비58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 南師古#비58訣》과 《남격암십승지론 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 鄭鑑錄》에 전한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 각종 재난을 예언하였다. 후자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 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편저에 《선택기요 選擇紀要》가 있다.
 
 
 
 
 
유희분(柳希奮)  1564-1623(명종19-인조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백(亨佰), 호는 화남(華南).
아버지는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자신(自新)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남행(南行)으로 진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익찬으로 세자를 호종하였다.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고, 1599년 수찬 재임 때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였다가 민몽룡(閔夢龍)의 논척으로 파직당하였다.
1601년 세자시강원문학에 등용되었고, 이듬해 응교 겸 교서관교리로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실록의 재간에 참여하였다. 정언·이조좌랑·사서·직강 등을 거쳐 1603년 사옹원정(司饔院正), 다음해 응교·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전한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사성,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를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의 처남으로 일문이 요직에 나아갔다. 예조참판 때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일파를 탄핵하여 숙청한 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에 가담하여 정권을 좌우하며, 대사간·도승지 및 이조·병조·형조의 참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시인 권필(權#필25)을 무고하여 유배당하게 하였고, 앞서 임해군(臨海君)·영창대군(永昌大君)·능창대군(綾昌大君) 등을 무고하여 몰아 죽이는 데 가담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책봉되어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판서로서 이이첨·박승종(朴承宗) 등과 삼자동맹을 맺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 폐모론을 일으켰다.
이해 11월 다시 반대파를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관료·유생들을 모두 투옥, 유배당하게 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참형을 당하였다.
이이첨·정인홍 등과 대북을 영도할 때는 외척세력을 대표하여 정권을 농단하였고, 한때는 이이첨·한찬남(韓纘男) 등과 권력을 다투어 서로 반목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조반정 후 이이첨·정인홍과는 한 등급 낮추어 치죄되었다.
 
 
 
이정구(李廷龜) 1564-1635(명종19-인조13)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문장가문에서 출생, 가학을 통하여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여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 南山詩〉를 차운함에 놀라운 표현이 있었고, 14세 때에는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1593년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대학강어 大學講語》로 간행되었다.
한편,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접대에 정부를 대표하여 활약이 컸다.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가고, 다음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 〈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그뒤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장(章)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아, 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성실히 전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 표일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미적인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였으며, 장유도 그의 재기(才氣)를 격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집권층의 순정문학(醇正文學)을 대변하면서 변무주를 계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온 것들이다.
그의 문학은 한편으로 선린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공용성을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지만, 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처리한다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이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남언경(南彦經)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양명학자(陽明學者). 본관은 의령.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
개국공신 재(在)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영흥부사 치욱(致#욱01)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헌릉참봉이 되고, 1566년(명종 21) 조식(曺植)·이항(李恒) 등과 함께 발탁되어 지평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양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그대로 머물 것을 진정하여 허락을 받았다.
1575년 지평을 거쳐 장령이 되고 이어서 집의를 거쳐 전주부윤이 되었으나,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사헌부의 탄핵 받고 파직되었다.
1592년에 다시 여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이듬해 공조참의가 되어 이요(李瑤)와 함께 이황(李滉)을 비판하다가 양명학을 숭상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 양근(楊根)의 영천동(靈川洞)에 물러나 한거하다 67세로 죽었다.
《퇴계전서》에 이황이 1556년(명종 11) 이후 그에게 보낸 답서(答書) 9통이 있고, 별지 〈정재기 靜齋記〉에는 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우주의 본질과 현상작용을 모두 기(氣)로써 설명, 기의 영원성을 주장하면서 그 선천성과 후천성을 구별하면서도 그 저변에 일기(一氣)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理)란 기(氣)의 동정취산(動靜聚散)에 따른 법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는 기를 초월할 수도 없고 초월적 실재성(實在性)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여, 기는 유한하고 이는 무한하다는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고 스승 서경덕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또한 “맑고 유일(唯一)하며 밝은 본체는 위·아래, 하늘·땅과 함께 흐른다.”고 한 주장은 곧 “양지(良知)의 묘용(妙容)이 발생할 때 인심(人心)·하늘·땅이 모두 일체임을 알 것이다.”고 한 왕양명(王陽明)의 설과 일치하며, 서경덕의 기불멸설(氣不滅說)과도 상통한다.
인간의 심성(心性)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황은 이(理), 즉 본연의 성(性)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라 하여 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데 반하여, 그는 우주는 기이며 마음도 기이므로 도덕적으로 선과 악이 함께 있음을 주장하였다.
진백사(陳白沙)와 왕양명의 《전습록 傳習錄》을 탐독, 그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최초의 양명학자가 되었으며, 후에 이를 전승한 정제두(鄭齊斗)는 “선과 악을 논하지 않고서 고요할 때는 모두 이가 되고, 움직일 때는 모두 기가 된다고 한다면 기를 어찌 동(動)과 정(靜)으로써 한정할 것이며 움직일 때는 인욕(人欲), 고요할 때는 천리(天理)라고 할 것인가.”라 하여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반박하고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시켰다.
문하에는 이요와 같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양근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되었다.
 
 
 
남이공(南以恭)1565(명종 20)∼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초명은 이경(以敬),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蓑). 호(琥)의 아들이며, 참판 이신(以信)의 아우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1593년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암행어사를 거쳐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이조좌랑·정랑을 거쳤다.
1598년 이발(李潑)·정인홍(鄭仁弘) 등과 북인(北人)의 우두머리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왜와 화의를 주장하였다 하여 탄핵, 파직시켰다.
뒤에 북인이 집권하자 북인은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는데,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소북을 영도하였으나 다시 남당(南黨:淸小北)과 유당(柳黨:濁小北)으로 나뉘었다. 선조 말년에 소북과 대북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치열한 싸움 끝에 대북이 지지하던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유영경과 함께 파직당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09년(광해군 1)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 1613년 호조참판·도승지·예조참판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이 되었다.
1615년 이원익과 더불어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평산(平山)·해주(海州)·송화(松禾)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621년 풀려나와 전감군접반사(田監軍接伴使)에 이어 체찰사 이경전(李慶全)의 부사(副使)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파직당하였다.
1624년 관향사(管餉使)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대사간·대사헌·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27년 가도(#가15島)에 주둔한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의 접반사가 되었는데, 이때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깨닫고 주전(鑄錢)을 건의하였다.
1637년 절친한 사이인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였다.
1639년 다시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왕제(王弟)와 대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1640년 죽음과 함께 복직되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담론을 좋아하였다.
저서로는 《설사집》이 있다.
 
 
 
기자헌(奇自獻)1567(명종 17)∼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행주. 초명은 자정(自靖),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증조부는 응교(應敎) 준(遵),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대항(大恒), 아버지는 응세(應世)이다.
1582년(선조 15)성균관에 입학,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檢閱)이 되었다.
1592년 예문관봉교겸설서(藝文館奉敎兼說書), 병조·이조좌랑을 거쳐, 정언·집의·성균관직강·홍문관부교리·보덕(輔德)·사간·사인(舍人)·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가 되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관찰사, 이듬해에 부제학·대사헌이 되었으며, 1601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을 신원하게 하고, 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1602년 왕세자(王世子:광해군)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서 《맹자》를 강의했으며, 병조·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이 되어 사임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선조가 세자를 폐하고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06년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柳永慶) 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 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던 정온(鄭蘊)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하여 감형케 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 불가함을 간하다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길주(吉州)로 이배되었으며, 강릉에 방귀(放歸)되어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金#유15)·이귀(李貴) 등이 모의에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으며,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되었다가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하여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고, 그 일족도 몰살당했다.
1627년 이원익(李元翼)·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선조0-선조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광주출신.
아버지는 붕섭(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계종(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명 가운데 호남출신 5백여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함에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하였다가,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수신(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조47特命)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 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허균(許筠) 1569-1618(선조2-광해군10)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엽(曄)이며,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며, 봉(#봉20)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 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 이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하였다.
1609년(광해군 1)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 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 豪民論〉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볼 때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문집에 실린 〈관론 官論〉·〈정론 政論〉·〈병론 兵論〉·〈유재론 遺才論〉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 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허균은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부41藁》는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 鶴山樵談》이 《성소부부고》 가운데 실려 있는 〈성수시화 惺#수04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 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 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 古詩選》·《당시선 唐詩選》·《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사체성당 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한년참기 旱年讖記〉 등이 있다.
 
 
권필(權#필25) 1569-1612(선조2-광해군4)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벽(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아,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 觀禁獨酌〉을 지었다. 젊었을 때에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다. 광해군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 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 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군 위양리에 있고, 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석주집 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 周生傳〉이 현전한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선조3-효종3)
 
   조선 인조·효종 때의 상신(相臣).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출생.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중에 보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좌랑·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복명,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협01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하여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숙특(淑慝: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으며, 이정구(李廷龜)·김유(金#유34)·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사34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교39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류(金유) 1571-1648(선조4-인조26)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지방에서 활약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여 놀아났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598년에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으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하였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愼景#진26)·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반정의 주류들간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우찬성을 거쳐 1624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가도에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써 회유하여 존경을 받는 등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장만(張晩)밑에서 부체찰사로서 먼저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환도 후 장만·김자점(金自點) 등과 청천강 남쪽의 안주(安州)를 중심으로 하는 도체찰사 중심의 적극적인 방어체제 구축을 주장하였다. 그해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듬해에는 유효립사건(柳孝立事件)을 처리했으며 진휼상사(賑恤上使)로서 기민구제에 노력하였다.
한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령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총융사 이서(李曙), 찬획사(贊劃使) 이경직(李景稷)을 대동하여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그 도형(圖形)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62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원군(定遠君)의 추숭문제에서 반대의 주장을 펴,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33년 다시 좌의정으로 올라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령권까지 겸하였으며, 뒤에 우의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시 정원군 추숭문제가 제기되자 역시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여 인조의 노여움을 사 1634년 다시 면직되었다.
1635년 전국에 교서를 내려 ‘화친을 끊고 방어를 갖출 것’을 선언하였다. 이해 다시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관계악화 방지에 대비하였다.
그뒤 영의정이 되어 국정권도 아울러 장악하였다.
한편, 도체찰사로서 전국 각도의 속오군(束伍軍) 2만을 정선하여 사전에 대비할 것을 청하고 종래 구상해왔던 안주 중심의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안주가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하여 평양·황주·평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곳의 산성에 주된 병력을 배치하였다.
1636년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아군의 편제된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미리 알고 도성을 직접 공격해오자 강도로 인조를 피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론이 엇갈린 가운데 적은 이미 서울 교외에까지 진출하여 인조를 비롯한 군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의 뜻에 좇아 삼전도에서 성하의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을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왕세자의 환국을 주장하는 한편, 영춘추관사로서 실록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등에 의하여 탄핵을 받자 병을 칭하고 사직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복위되었다. 이해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세제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의 빈인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학문은 서인계열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계열을 이었으며, 특히 송익필(宋翼弼)을 사사했다. 반정에 성공한 뒤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 등과 더불어 노서를 주도하였으나 될 수 있는 한 서인과 남인을 같이 쓰려고 노력하였다. 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하였으며 시·율도 역시 정련청건(精鍊淸健)하고 글이 또한 기묘하여, 공경(公卿)의 비문도 많이 썼다.
저서로는 《북저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매창(梅窓)  1573-1610(선조6-광해군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잡01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부41稿》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김집(金集) 1574-1656(선조7-효종7)
 
1574(선조 7)∼1656(효종 7).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대건(大乾)의 딸이다. 여덟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
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장학을 좋아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 그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한편,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 등과 상례를 논하고, 또 아버지가 찬한 《의례문해 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등, 활발한 학술활동을 폈다.
그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태학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안팎으로 그 덕망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 때는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의 특청을 임금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늘 초야에 묻혀 도(道)를 즐기고,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위로 이이(李珥)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 이황(李滉)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 疑禮問解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육(金堉)  1580-1658(선조13-효종9)
 
1605년(선조 38)에 사마회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해 10월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온 후 예조참의·우부승지·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하여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구황촬요 救荒撮要》와 《벽온방 #벽20瘟方》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후 형조참의 겸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대사간·병조참의·한성부우윤·도승지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병조참판·이조참판 겸 비변사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형조판서 겸 선혜청제조·우참찬·대사헌·예조판서·도총부도총관·개성부유수 등의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1643년과 1645년)나 더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 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 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인하여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맡았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물러앉아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 《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하여 뒷날 성취되었다.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 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 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 潛谷續稿》가 전하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청풍세고 淸風世稿》·《조천일기 朝天日記》·《기묘록 己卯錄》·《잠곡필담 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 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되는 것이며, 《구황촬요》·《벽온방》·《종덕신편》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 그의 위민적(爲民的)생애의 편모를 보이는 저술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와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몸소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니, 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들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사업에 크게 기여하는 바 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양주 금촌리에 있다.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고,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독향(獨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최명길(崔鳴吉) 1586-1647(선조19-인조25)
 
아버지는 영흥부사 기남(起南)이며,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국내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간 복상(服喪)한 뒤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함으로써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이로 인하여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 많은 지탄을 받았으며,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부44)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의 의논이 높아진 바,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또한 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1635년초 이조판서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하여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싸워 지키거나 병화를 완화하는 어느 쪽도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면서 강력하게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에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는데,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 정월에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진행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 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아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임경업(林慶業) 등의 명나라와의 내통과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고, 1645년에야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는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 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괄(李适) 1587-1624(선조20-인조2)
 
 조선 중기의 무신·반란자.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 병조참판 육(陸)의 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고 1623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유15)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여 불화하게 되어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의 벼슬을 받게 되어 불만이 많았다.
1623년(인조 1) 포도대장을 지낸 뒤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영변에 출진하여 군사훈련에 힘쓰는 한편 그 지방의 성책(城柵)을 보수하여 진의 방비를 엄히 하였는데, 이는 당시 후금과의 국제관계가 긴박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해 윤10월 반정에 참가한 공신들의 공훈을 책정할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의 첫째가 되었다.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전(#전29)·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어 그의 군중(軍中)에 머물고 있던 아들 전을 붙잡아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서 선전관과 의금부도사 등이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속한 행군으로 한때 서울을 점령, 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 대패, 피신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무과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장유(張維)  1587-1638(선조20-인조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아버지는 판서 운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수봉,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되자 불가함을 주장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 “고 하였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선조20-현종12)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김자점(金自點) 1588-1651(선조21-효종2)
 
1. 정계활동과 관력
 
음보로 출사하여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유15)·신경진(申景#진26)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들어옴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아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반정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하여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게 되자, 그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두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인의 인사들을 죽이는 일을 주장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고, 순검사(巡檢事)·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절도정배(絶島定配)당하였다.
 
2. 권력기반 구축
 
그 이후 공신세력의 권력추구와 패전에 대하여 극심한 공격을 가하는 일반사류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부분의 공신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사류들은 인조에 의하여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하여 인조의 의구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듯하며,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무리들과 결탁하여 청나라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3. 반(反)사림사회 행동 및 평가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시45)·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하여 1650년(효종 1)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에서는 즉시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익12)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헌07) 등도 각자의 직에서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행위 등 당시 사림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하여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심지원(沈之源) 1593(선조 26)∼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아버지는 감찰 설(#설03)이다.
1620년(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족조(族祖)인 종도(宗道) 가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웠으나 대북의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에 등용된 뒤 저작·겸설서(兼說書)·정언·부교리·교리·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1630년(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六鎭)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집의·교리·부수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趙翼)·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윤계가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뒤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초에는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652년(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사돈이 됨으로써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인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하였으며, 11월에는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으며,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상례의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좇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金弘郁)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하였다든가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하였다든가, 혹은 양역(良役)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저서로는 《만사고 晩沙稿》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임경업(林慶業)  1594-1646(선조27-인조24)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고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秋防:새로이 무과에 합격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부과하였던 일정기간의 赴防)을 위하여 나갔다가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를 구비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승서되었다.
그뒤 첨지중추부사로서 인조반정공신인 김류(金#유15)의 막하에서 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출정을 자원하여 정충신(鄭忠信)의 휘하로 들어가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羽林衛將)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로 임명되었고,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인22)이 좌영장(左營將)에 임명하고 청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로 향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주화파에 의하여 강화가 성립된 뒤여서 싸움 한번 하지도 못하고 군졸을 이끌고 낙안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체찰부(體察府)의 별장이 되었다.
1629년 용양위부호군(龍#양45衛副護軍)으로 체찰부별장을 겸하고, 이듬해에는 평양중군에 임명되었다.
1631년 검산산성(劒山山城)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이후 퇴락한 용골(龍骨)·운암(雲暗)·능한(凌漢)산성 등을 수축하였으며, 정주목사에 승서되었다. 그의 이와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정에서는 청천강 북쪽인 서북로의 군사력은 정묘호란 이후 큰 타격을 입어 한때 청북포기의 의논이 일어났다.
즉, 그 방어선을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안주중심의 방어를 펴는 동시에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여 수도권 방어에 전념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천강 북쪽의 백성들은 맹렬한 반대를 하였는데, 이와같은 청북인의 반대운동을 임경업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2월 기복(起復: 상중에 벼슬에 나아감.)하여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임명되고 곧 안변부사를 겸하였다.
이때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웅거하면서 이를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해 4월 명나라의 반장(叛將)인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우가장(牛家莊) 앞바다를 경유하여 구련성(九連城)으로 들어가 후금군과 통하려고 하였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尹進卿)과 함께 이 사실을 명나라 대도독 주문욱(朱文郁)에게 연락하여 이를 협격, 섬멸하였으나 명나라 장군간의 싸움으로 이들 반장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 공로로 명나라 왕으로부터 금화(金花)와 많은 상을 받았고, 명나라의 총병(摠兵)벼슬을 받아 이때부터 임총병으로 명나라에도 크게 알려졌다.
그뒤 아버지의 탈상을 위하여 고향에 왔다가 1634년 부호군에 복직되고, 곧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의주진병마첨절제사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근거지인 백마산성을 방어하기에는 인적·물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백금(白金:은을 말함.) 1, 000냥과 비단 100필을 받아 중국상인과 무역을 하여 이(利)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민(流民)을 모아 12곳에 둔전을 개설하여 안집해 살도록 하였다. 이 공로로 1635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역거래는 지나치게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이에 당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강력하게 그의 복직을 주장하여, 1636년 다시 가선대부로 자급을 내린 채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松#골16山)·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태세를 강화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골·봉황의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서울로 진격하였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듬해 정월에 주화론자인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시켰다.
그뒤 청나라 태종은 조카인 요퇴(要#퇴14)로 하여금 300기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는 이 요퇴군을 맞아 압록강에서 쳐 무찌르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 남녀 120여명과 말 60여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나라는 명나라를 칠 전초전으로서 눈의 가시였던 가도(#가15島)에 주둔한 명군을 치기 위하여 1637년 2월 조선에 병력동원을 청해왔다.
이때 그는 수군장(水軍將)에 발탁되었으나 철저한 친명배금파(親明排金派)였으므로 선봉에 서는 것을 주저하였으며 명나라의 도독 심세괴(沈世魁)에게 내통, 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게 하였다.
한편, 피폐한 의주의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시 상인들을 심양에 보내 물화교역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이것이 청인에게 발각되어 인조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의 철산으로 유배되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의 동원을 요청해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것이 조약에 명시된 사항이라 하여 질책이 대단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임경업의 죄를 용서하고 마침내 조방장(助防將)으로 기용하여 그로 하여금 명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구련성으로 나아가 진격하는척하면서 군사동원과 군량조달의 어려움을 들어 심양으로 나아가 이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숙마(熟馬) 한필을 하사받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하였다가 9월 평안병사·수군절제사 겸 안주목사로 승서되었다.
1639년말부터 청나라는 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錦州衛:지금의 盛京지방)를 공격하기 위하여 다시 병력동원과 군량미의 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임경업을 주사상장(舟師上將), 황해병사 이완(李浣)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이듬해 4월 그는 전선(戰船) 120척, 격군(格軍:조선시대 水夫의 하나로 沙工의 일을 돕던 사람) 1,323명, 사수(射手) 1,000명, 포수(砲手) 4,000명, 화약 1만근, 철환(鐵丸) 4만2000개, 조총(鳥銃) 4,170정, 군량미 1만7160석, 그리고 세공청국미(歲貢淸國米) 1만석을 싣고 안주를 출발하여 금주위로 향하였다.
한편, 재상이었던 최명길과 밀의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어 이 사실을 등주의 명군문 홍승주(洪承疇)에게 통고하게 하고 애써 싸우게 하지 않았다.
그해 7월 청나라는 범문정(范文程)을 통하여 심양에 있는 세자에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임경업의 함대를 전진시키려 하나 전진하지 않고, 세폐미를 요하 입구까지 운반하라고 하였으나 거절하고, 또한 명나라 배를 만났으나 싸우지 않았으며, 배가 표류하였다고 속여 두 사람을 몰래 명나라로 보내어 내통하였으므로 우리 조정과 서로 짜고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라고 힐책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극부 부인하였다.
이에 따라 범문정은 그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재삼 임경업을 달래었으나 듣지 않았다.
7월 14일 부장 이완은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임경업은 나머지 50척의 배와 1, 500명의 선군 및 격군을 이끌고 개주위(蓋州衛)에 이르러 배에 있던 세폐와 군량미를 모두 버리고, 다시 해주위(海州衛)·이주위(伊州衛)·금주위·대승보(大勝堡) 등지로 진주하였으나 다만 청나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같이 하였을 뿐, 그 동안 한번도 명군과 싸우지 않았다.
 
1641년 정월 임경업은 배를 버리고 육로로 요양·심양·압록강까지 청나라의 허와 실을 일일이 정탐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청나라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내통하고 있는 사실을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여 고민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삭탈 관직하였으나, 그해 12월에는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1642년에 임경업의 청나라에 대한 비협조의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금주위 공격으로 명장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자 그의 부하인 예갑(倪甲)과 선천부사 이계(李#계21)의 실토로 임경업이 승려 독보를 명나라로 파견한 전말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정주의 고충원(高忠元)이 심양 감옥에서 이 사실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함으로써 그가 청나라에 협력하지 않은 죄상이 드러났다. 이러한 확증에 의한 청나라의 압력으로 조정에서는 형조판서 원두표(元斗杓)로 하여금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압송도중 11월 6일 그 일행이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는데, 그는 붙잡히기 전에 심기원(沈器遠)을 만나 그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僧服) 및 체도(剃刀)를 얻어 기회를 노리다가 붙잡혀 압송되던 도중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명나라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하여 처음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맡겨두었던 승복을 찾아 포천과 가평의 경계지대에서 승복으로 갈아입고 중이 되어 양구현의 어느 골짜기에서 초막을 치고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정월 양양으로 갔으나 복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양구로 돌아왔다가 사잇길로 상원(祥原)으로 갔다가 다시 회암사로 숨어들어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이겨 그의 처를 비롯하여 형제 등 가족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였으며, 그의 처 이씨는 그 이듬해 9월 심양옥에서 자살하였다.
 
한편,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無金, 일명 孝元)의 주선으로 배 한척과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군관이었던 이형남(李亨男)·박수원(朴守元:일명 車自龍)과 일찍이 사귀어온 임성기(林成己)·최수명(崔守明)의 두 승려(일설에는 知明·小明이라고도 함.)를 대동하고 상선을 가장하여 서울의 마포(麻浦: 일설에는 泰安이라고도 함.)를 출발하여 황해로 나아갔다. 그해 가을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였다. 그곳에서 명나라의 수비대 군관인 곽이직(郭以直)의 조사를 받고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군문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가니 명나라에서는 그에게 평로장군(平虜將軍: 일설에는 부총병)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하였고 청 태종은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도독 황종예는 남경으로 도망쳤다. 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石城)으로 들어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명나라 조정은 남경으로 갔으나 그곳도 곧 함락되자 마등고도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본국에서는 그의 후원자인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으니 그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임경업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독보에게 배의 주선을 부탁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그의 부하였던 장련포수(長連砲手)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는 당시 섭정자 예친왕(睿親王)이 집권하면서 대사령을 내리고 임경업에 대하여도 그 재략(才略)을 아껴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역관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그리고 조신 김자점 등 반역 부청배(附淸輩)가 결탁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646년 6월 임경업은 죄인이 되어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에 의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8일에 서울에 이르러 인조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심기원의 옥사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그는 심기원으로부터 은 700냥과 승복 및 체도를 받은 것은 시인하였으나 역모가담은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달아날 당시 형조판서로 있다가 그 사건으로 파직되었던 원두표와, 임경업과 지난날 가장 가까웠던 김자점이 이를 반대하고 죽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자점은 임경업이 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서북면의 방어에 전책임을 지고 있었고 임경업은 그의 막하로서 그를 따랐으며, 임경업이 상인 잠송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여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이었는데, 임경업을 죽여야 된다고 주장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즉, 임경업에게 배를 알선하였던 무금은 그의 첩인 매환(梅環)의 오라비였고, 이들은 모두 김자점의 종이었으며, 임경업이 마포에서 탈출할 때 무금의 처에게 탈출사실을 김자점이나 그의 아들 식(#식11)에게 알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임경업이 살아서 문초를 받게 되면 무금의 처도 문초해야 되고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도 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며, 그러면 심기원의 당으로 몰려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해 6월 20일 임경업은 심기원사건의 연루 및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53세였으며 고향인 충주의 달천에 장사지냈다.
임경업은 당시 친명반청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 그가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분위기대로 의리와 명분에 투철하고 고집 센 무장이었지만, 당시 실제적인 국제정세, 즉 역사의 흐름에 어두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의 조국이 무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망해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하여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였지만 그의 조국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당시의 국민이나 조정의 감정과 함께 충의·지조, 그리고 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속에 자리하였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97년(숙종 23)12월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 충주의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忠愍祠), 백마산성의 현충사(顯忠祠) 겸천(兼川)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해(李해)  ?∼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공신.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 대사간 효원(效元)의 아들이다.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아버지가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형인 한림 정(瀞)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자, 그는 벼슬을 단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릉군(咸陵君)에 봉하여졌다. 반정하던 날 심기원(沈器遠)이 궁중에 쌓여 있는 물건을 나누어 가지자고 하였으나 분연히 거절하였다. 공신에게 지급되는 전답을 모두 반환하여 청백한 사람으로 칭송이 높았다.
이듬해인 1624년 개성부유수가 되고, 그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49년(인조 27) 인조가 죽자 장릉(長陵:인조릉)의 수릉관(守陵官)이 되고, 이어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1652년(효종 3)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그해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653년에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669년(현종 10)에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처음에 충정(忠靖)으로 시호를 받았다가, 숙종 때 충민(忠敏)으로 개시되었다.
 
 
 
허목(許穆) 1595-1682(선조28-숙종8)
 
찬성 자(磁)의 증손으로, 별제 강(#강18)의 손자이고, 현감 교(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옹01)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하여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그는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를 명하였는데, 뒤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영동(嶺東)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으며,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게 되었다.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으며, 그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 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이에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궤02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이해 효종이 죽자 상소로써 상례를 논하였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하였고, 다시 장령이 되어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하여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는데,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에 의거하여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해석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하여 사실상 맏아들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하여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 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大功)으로 9개월복을 정하였으나 대구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맏아들·중자의 구별이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하였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하여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었으며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이 즉위한 왕, 즉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기해복제가 잘못이라 판정되어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옳았다고 인정되어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되었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이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 이로 인하여 남인은 양파로 갈라져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 등을 반대하였으며, 이해 왕으로부터 궤장(#궤02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해 사임을 아무리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하여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휴17)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 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 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그의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 東事》·《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경설 經說》·《경례유찬 經禮類纂》·《미수기언 眉#수04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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