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안동 계몽운동의 본산 협동학교와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고종 을미년(1895)에 명성황후 민씨가 강도 일본의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을미개혁이라 하여 단발령과 복제혁파의 조명朝命이 잇따라 내려오자 안동의 유림은 전국 최초로 창의를 결의하고 일어섰다. 조선祖先으로부터 이어온 형체를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하회의 석호石湖 유도원柳道聖, 검제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구미의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등 향중 원로가 주도하여 닭실(유곡)의 성대星臺 권세연權世淵을 의병대장으로 선임하고 의병진을 구성하였다. 소위 을미의진이다.


 이 때 향중이 일체가 되어 거병했음에도 마침 내앞에서는 거의 창의에 가담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대종손과 운천 종손, 또 향중에 명망이 높았던 도사都事 김진린金鎭麟이 잇따라 작고하여 온 동네가 상갓집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각 문중에 배정된 군자금을 부담하고, 상례에 대한 구애가 없어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검제의 학봉파에서 많은 장정인력을 내는 한 편, 일흔이 넘은 서산 김흥락이 의진義陣의 주획에 적극 합류하는 정도의 형편이었다.

 내앞을 중심한 안동유림의 근대적 변용變容은 1906년의 흥학조령興學詔令이 반포된 후 향촌에서도 계몽운동의 사조가 전파되던 시기부터 본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임동 면장에 재임하던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이 내앞 종손인 김병식金秉植과 그의 재종형제 김후병金厚秉, 하중환河中煥의 협력과 김긍식金肯植(김동삼의 본명)의 적극적 활동에 힘입어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처음에는 협동학교가 서당식의 구제도를 혁파하고 신문물 수용을 적극 지향하는 모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백하 김대락까지도 그의 매부인 석주石洲 이상룡李象龍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신문명을 제창하자 계몽운동의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여기에는 활발하게 움직임을 보이던 종손 김병식이나 백하의 아들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 일송 김동삼 등 청장년 층의 꾸준한 설득 노력도 일정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협동학교가 표방한 것은 그  설립취지문設立趣旨文과 권면문勸勉文에 잘 드러난다. 취지문은 “열강의 각축이 풍운을 몰아오는 이 때, 예로부터 인물의 고장이었던 안동이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새 기풍을 세우고 인물을 길러 능동적으로 새 시대를 맞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권면문에서는 동양의 학문에 근거하여 “경도經道와 권도權道를 구분한 위에 ‘나의 도道를 道로 세우고’ ‘저의 기술技術을 技術’로 쓸 수 있다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이른 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내앞의 협동학교에 관계하던 모든 인사가 도만한 후 협동학교는 수곡의 한들로 옮겨가고 1919년의 챗거리 장터의 만세운동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마감했다. 그러나 협동학교의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던 인사와 여기서 배출된 인사의 면면은 도만 이후 경학사, 신흥학교, 백서농장의 주체로서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서 그들의 장엄한 독립전쟁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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