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협동학교(協東學校)의 설립(設立)
 
 협동학교는 1907년 3월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서 설립되었다. 협동학교는 설립배경 이나 설립과정을 볼때 계몽운동에서 주목되는 학교이다. 왜냐하면 그간의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안동지방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볼때 보수 유림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수유림을 개화하여 안동지방 계몽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l6) 그런데 여기서 협동학교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17)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략) 아! 거연히 몇백년을 지나온 오늘, 머리를 들고 현시국을 돌이켜 살펴보자. 이 무슨세계, 이 무슨 기운인가! 높은 산을 넘고 험한 바다를 건너온 낯이 선 흑백 각색 인종이 분주히 몰려와 상업과 공업의 이권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고, 꿈에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기화광전(氣化光電)의 학(學)이 지구상에서 경쟁의 장으로 나타났다.
  일본과 청, 일본과 러시아의 두차례의 전쟁은 동양전역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일본과 영국, 일본과 프랑스 등 열방(列邦) 사이의 각종 협약으로 인하여 세계의 미래는 큰 풍운을 일게하는 원인을 만들고 있다. (중략)
  아! 우리 안동의 인사이시여! 우리 안동은 옛날부터 학문을 쌓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찌기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찌기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기대하던 희망이 가장 두터운 고을이었다. 그러한 즉 우리 안동인사는 국가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지 아니 한가, 우리 안동인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른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개화를 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홀로 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앞서 나와 이끌고 있다. 우리 안동인사가 홀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 말라 .
  지금 한 개의 학교 창립도 오히려 못이루고 우리 안동인사가 무슨 얼굴로 다른 곳의 사람을 대하려 하는가! 오늘 비록 늦기는 하였으나 뜻을 모아 여러 동지들이 발기하여 이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후략)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을 통해보면, 당시 국제정세의 인식과 아울러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안동 유림의 분위기가 일신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울러 전통적 유림의 본고장인 안동지방이 그 폐쇄성으로 인하여 타지역에 비해 낙후한 점을 맹박하고, 1905년 을사5조약 강제 체결 이후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보호국화 되어 가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구국을 위한 방략으로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으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협동학교 명칭의 동(東)은 "나라 지향(志向)은 동국(東國)이요, 향토(鄕土) 지향(志向)은 안동(安東)이오, 면(面)의 지향(志向)은 임동(臨東)이므로"이고,18) 협(協)은 안동군의 동쪽에 소재한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하였으므로l9) '협동(協東)'이라 한 것이다.
  협동학교 발기인은 이 지역의 각 문중을 대표하는 인사로, 이상룡 · 김동삼 · 김후병(金厚秉) · 유인식 · 하중환(河中煥)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는데20) 개교당시의 교사(校舍)는 김대락(金大洛)의 집 사랑채를 임시교사로 사용하다가 후에 가산서당(可山書堂)(현재 천전국민학교 자리)을 개수하여 사용하였다.21) 교장에는 김병식(金秉植), 교감에는 김동삼,22) 교사로는 외지인사인 김기수(金箕壽) · 이관직(李觀稙)23)등이 활약하였다.24) 교사로 취임한 김기수는 보성전문학교 법률학전문과 제1회 졸업생으로25) 광신상업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협동학교 교사 김기수와 이관직은 상동청년학원 계열 인사로 보인다.26) 또한 협동학교가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구국을 위한 기초로 삼기 위해 설립되었음이 협동학교 권면문27)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모든 것이 때에 따라 변한다」했고, "성인(聖人)의 도(道)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이것은 경도(經道)와 권도(權道)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이 예나 오늘에 있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기수(氣數)가 변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오늘날 세계 육주(六洲)대륙에 있어 선진하여 개화를 이룩한 나라는 기차와 기선을 타고 어느 곳에나 쉽게 갈 수 있고, 더욱 놀랍게 하는 전기불이 번쩍이는 세계 풍조로 변화하는 모습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게 발전한다. 기술에 있어서는 정말하고 기묘하며, 기능도 재주를 다하여 모두 사회 변혁에 이바지하는 그 나라 그 사회는 괄목하게 발전을 거듭하니, 이와같은 사회상은 개벽후 처음으로 맞는 좋은 행운인 것이다.(중략) 

  다행한 일이다. 뜻있는 선비가 시국을 통찰하고, 공립 사립학교를 열심히 세워 나아가고, 또 발전과 희망이 엿보이는 듯하니, 곧 우리나라 개화의 길과 구국의 한가닥 밝은 빛이 되는 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옛 습관과 옛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탓으로 신구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오늘 학교를 반대하는 논리는 신학(新學)은 외도(外道)이니 선비는 배울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이는 정말 올바른 견해를 하지 못하는 탓이다.
  개화 이후에는 학술의 길이 고루 열리기가 어렵고, 또 향하는 바가 다 같을 수 없으니, 나의 도(道)를 도(道)로 알고, 저 사람의 기술도 기술로 알 수 있다면, 어찌 불가능한 것이 있을까 하는 말이다.(중략) 

  아! 어이하여 문을 닫고 먼지 쌓인 책상머리에서 경전이나 읽고, 문밖에 나타나는 세계의 양상을 알려하지 않는가. 이러한 사람이 입신하여 조정에 들어가 정사(政事)에 임한다 해도 임금을 옳게 보필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약속을 하고 설교(設校)할 것을 발기하니, 이름을 협동학교(協東學校)라 하고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나라의 기초를 삼으려고, 이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중략) 

  지금 비록 늦었다고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다. 훗날 깨닫고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할 즈음에 심장과 허파가 쪼개어지는 듯한 아픈 가슴으로 동포에 알리노니 따라오라. 그렇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 되리라.

 
 협동학교 권면문에서는 서구의 선진문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이러한 서구의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여 개화하는 길만이 구국의 길임을 강조하고 그 실천방안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시대변혁에 따라 우리도 하루빨리 깨달아 세계의 양상에 발맞추어야 한다고 하여 협동학교 설립자들이 계몽운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이러한 계몽운동에의 참여를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협동학교는 보수 유림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1909년 협동학교 교직원과 학생 30여명의 단발 단행은 보수 유림들의 심한 비난을 받았으며,28) 1910년 7월 18일에는 이 지역 의병들이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협동학교를 공격하여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安商德)과 회계 이종화(李鐘華)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9) 이사건을 당시의 중앙 언론지인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는 <조협동학교(弔協東學校)>라는 논설로30) 보도하면서, "협동학교의 볼행한 변"이라 하며 안상덕 · 김기수 두 청년교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 교원중에서 2명이 두교사의 죽음을 원통히 여겨 안동으로 달려 갔으며,3l) 대구군 대한협회지회에서는 특별회를 개최하여 안동 유림의 완고함을 성토하는 성토문을 발표하면서 협동학교를 지지하였다.32) 또한 협동학교 학생일동이 교감 김기수의 어머니 김씨에게 보낸 다음의 애도의 글33)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신교육을 전개한 협동학교의 교육방침에 보수 유림이나 의병이 크게 반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략) 일반학생(一般學生)에게 항시(恒時) 훈시(訓示) 권고(勸告)하시기를 국민정신(國民精神) 사자(四字)를 각기(各其) 뇌리(腦裡)에 인치(印置)하라 하셨으며 매일(每日) 상오(上午) 오시(五時)에 목욕재계(沐浴齋戒)하시고 육시(六時)에 일반직원(一般職員)과 생도(生徒)와 집합장(集合場)에 취립(聚立)하야 상견례(相見禮)를 행(行)하고 애국가(愛國歌)를 창(唱)한 후(後) 일반학생(一般學生)에게 정신적(精神的)으로 훈시(訓示)하되 활발(活潑)한 기상 (氣像)을 양성(養成)하고 부인적(婦人的) 행동(行動)을 물위(勿爲)하라 하시며 교과(敎科)는 분장(分掌)한 자(者)가 다(多)하나 그중 수신과목(修身科目)을 독담(獨擔)하야 구술(口述)로 교수(敎授)하시는데 교감야(校監爺)나 수교(受敎)하는 생도(生徒)가 차시간(此時間)으로 정신(精神)을 수양(修養)하였고 국가(國家)의 국가(國家)됨과 국어(國語)가 국민(國民)에게 관계(關係)됨을 자세(仔細)히 설유(說鍮)하며 학생(學生)의 뇌수(腦髓)가 명랑(明朗)치 못함을 일상(日常) 개탄(慨歎)하시고 우모험적(又冒險的) 행동(行動)을 행(行)하라 하시며 우(又)는 자언(自言)하기를 아(我)는 감념(感念)이 다(多)한 인(人)이라 만일 문명국(文明國) 국민(國民)이 되얏스면 철학가(哲學家)가 될지나 불행(不幸)히 아한(我韓)의 국민(國民)이 되야 국민(國民)의 의무(義務)를 포기(抛棄)키 난(難)하고 국가(國家)의 현상(現狀)을 애석(愛惜)하야 지기(志氣)를 견확(堅確)케 하고 사상(思想)을 분려(奮勵)케 하야 국가(國家)에 헌신(獻身)하기로 아(我)의 목적(目的)을 정(定)하노라.(후략)

 
  김기수 · 안성덕 피살사건은 안동지역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전통보수세력과 개화혁신세력간의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의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는 안동의 보수 유림이 얼마나 완고하였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안동완고(安東頑固) 김소락씨(金紹洛氏)는 기자(其子)가 단발(斷髮) 입학(入學)할까 염려(念慮)하여 단지혈서(斷指血書)로 금계(禁戒)를 작(作)하였다지 현세(現世) 소위(所謂) 완고배(頑固輩)가 단발(斷髮)을 배척(排斥)하여 언필칭(言必稱)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라하니 발자(髮者)는 불과시혈지여(不過是血之餘)오 수지(手指)는 일신(一身)의 대부분(大部分)이라 혈여(血餘)를 애석(愛惜)하다가 단지유혈(斷指流血)함은 부모(父母)의 유체(遺體)를 전이귀지(全而歸之)한다. 칭(稱)할까 여하(如何)하였던지 인발단지(因髮斷指)하였슨즉 진개시두발(眞個是頭髮)에는 효자(孝子)러군"34)

 
  초대 교장에 취임한 유인식은 부친으로부터 부자절연까지 당하고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협동학교에 잔류하여 교육에 전념하고 대외적으로는 김병식을 교장으로 하였다. 이러한 시련과 좌절을 겪으면서 협동학교는 폐교위기에 이르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후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김하정(金夏鼎) · 김철훈(金轍勳) 등의 청년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협동학교는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부활하게 된다.35) 그리하여 1911년 3월 30일 협동학교는 23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한다.36) 

  협동학교는 3년제 중등학교로 예과와 본과를 두었다.37) 교과목은 수신 · 국어 · 역사 · 지지 · 외지 · 한문 · 작문 · 미술 · 대수 · 물리 · 화학 · 생리 · 동물 · 식물 · 박물 · 창가 · 체조등 17과목인데,38) 교과과정을 볼때 협동학교가 중등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김동삼은 협동학교 1 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중국으로 망명한다.39) 그후 1911년 여름 유인식도 협동학교를 유동태(柳東泰)에게 맡기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 가산을 정리하기 위하여 그해 겨울에 귀국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석방되어 중국 망명을 포기하고 안동에 남아서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40) 1913년 협동학교는 임동면 수곡동 한들로 이전하여 교장은 유연갑(柳淵甲)이 맡아 1915년 4월 17일 2회 졸업생을 배출한다.41) 1918년에는 3회로 6명이 졸업하였다.42) 협동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김성로(金聲魯) · 김광재(金光哉) · 유림(柳林) · 이광민(李光民) · 정현모(鄭顯模) 등이 있다. 43) 

  협동학교는 1907년에 설립하여 1911년에야 2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후 졸업생이 점점 줄어 드는데 그 이유로는 다음의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 재정 문제를 들수 있겠고, 둘째 1909년 교직원과 학생 단발 단행후에 일어난 교사 김기수 · 안상덕 피살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보수 유림들의 반대와 비난, 셋째 1906년의 보통학교령 · 고등학교령 등과 1911년의 조선교육령 그리고 1915년 사립학교령 등 제반 교육령을 퉁한 일제의 식민지교육 정책 시행과 이에 따른 민족 교육 탄압 등을 들 수 있겠다. 1907년 3월 김동삼 · 유인식 · 김후병 · 하중환의 발의로 개교한 사립협동학교는 경북북부지역 최초의 3년제 중등학교로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19년 3 · 1운동 당시에는 안동군 의거의 중심이 바로 협동학교였다.44) 그후 협동학교는 휴교 상태가 되었다가 1919년 설립한지 12년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협동학교의 남은 재원은 1920년에 개교한 임하공립보통학교와 임동공립보통학교의 설립기금으로 사용되었다.

 
  (2)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安東支會)의 설립(設立)

 
  김동삼의 계몽운동 가운데 협동학교의 설립 이외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이다. 대한협회 안동지회가 설립되는 것은 1909년 3월경이다. 역시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의 중심인물은 앞에서 살펴본 협동학교를 설립한 이상룡 · 유인식 · 김동삼 등이었다.

1905년 을사5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한국이 일제의 반식민지화(半植民地化)되자, 개화자강계열의 계몽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계몽운동을 주도한 전국 규모의 대표적인 계몽단체로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 그리고 신민회(新民會)가 있었다.45)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10일 창립되었다.46) 대한협회는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 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 · 의무 · 책임 · 복종의 사상을 고취 등 7개항의 강령47)을 내걸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는 중앙의 본부조직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지회(支會)(군(郡)단위 조직) · 분지회(分支會)를 설립하여 조직을 확대하여 나가던 중 이상룡에게 참여를 요청하였다. 이상룡은 의병 항전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방략을 일제와의 직접적인 항전이 아니라 신교육을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민권을 신장하여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대한협회 본회와 서신연락48)을 한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발기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회원모집이 잘 되지 않았고, 보수 유림의 반대와 냉소로 좌절되었다.49)

그러나 그후 1909년 김동삼은 유인식 · 김형식 등과 같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이상룡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정확한 설립일자는 알 수 없으나, 대한협회회보 11호 회중역사(會中歷史)에 "1909년 2월 6일 평의회에서 지도(智島) · 영천(永川) · 순창(淳昌) · 이원(利原) · 안동(安東) 5개군 지회 청원에 대하여 지도 · 순창 양군(兩郡)에는 김광제(金光濟)씨로 이원군에는 단천군지회(端川郡支會) 부회장 최병진(崔秉珍)씨로 영천 · 안동 양군(兩郡)에는 윤효정(尹孝定)씨로 시찰원(視察員)을 선정하다"50)라고 되어있고, 회장으로 피선된 이상룡이 1909년초에 의병과의 연락 혐의로 일제에 구금되었다가 같은해 3월에 석방된 점으로 보아 1909년 3월 이후에 설립된 것 같다. 또한 이상룡의 구금은 일제의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 방해 책동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상룡이 구금되어 있던 중에 대한협회 회원들로 생각되는 민중이 몰려와 이상룡의 구금에 대해 항의를 하였고, 이상룡이 석방되자 바로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을 전개하였기 매문이다.51) 그들은 협회 설립 이유를 다음 과 같이 밝히고 있다.52)

   오늘날은 바야흐로 경쟁의 시대이다. 그러나 국세는 위태롭고 민심은 흩어져 이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잘 다스릴 것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나라는 쇠하고,  백성은 병들어 백가지로 할 일이 많은데, 만약 지금에라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후일 우리들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이를 위하여 협회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대한협회 안동지회 회장 이상룡은 설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53)

   대한협회는 대한(大韓) 국민의 정당이여, 무릇 국가란 것은 백성과 함께 있는 것이며,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국가를 군주(君主)의 사유(私有)인양 생각하여 관(官)이 혼자 일을 처리하더니, 이에 합방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어찌하랴, 비록 인명과 재산에 손실이 있더라도 정의로써 용감히 싸우면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면 시국은 어지럽고 백성은 양풍(洋風)에 정신이 끌려 스스로 외국의 노예가 되려하니 이것은 국민의 의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되며, 그리하면 나라는 영원히 망하고 말 것이다. 

  나라가 백성이 모여서 된 것과 같이 백성들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단체를 만들고 시무(時務)를 강습하고 그 업(業)을 충실히 하면 날로 백성의 지혜가 열리고 국력이 일어나서 능히 외세와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제국도 이러한 방법으로 일어났으니 우리도 이를 본받아 열심으로 배우고 익히며 정신을 합하여 자주권을 회복하자.

  그리하여 2천여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매월 2회씩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법률 · 민권 · 사회 · 단체 · 교육 등에 대하여 광범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그중에서도 청년들의 신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각 서원의 재산을 모으는 등 다방면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협동학교를 지원하고 군내 각 처에 초중등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54) 또한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으로 학교에 취학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별반학규(別般學規)(특별과정)를 설치하여 야간이나 휴일에 교육하는 등 대중교육도 실시하였다.55) 또한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1909년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로 흡수되어 교과가 폐지되고 학생이 줄어드는 등 사립학교 탄압에 대하여 안동군수 송헌면(宋憲冕)에게 항의서한56)을 보내어 일제의 식민교육화정책에 항쟁하였다. 

  대한협회는 1907년 창립 당시에는 애국적이고 항일투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부 인사들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친일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일진회와 연합제휴설이57) 나돌더니 1908년 임원진이 개편되어 김가진(金嘉鎭)이 회장이 되면서부터 일진회에 휘말려 노골적으로 친일화되어58)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의병진압책을 건의하였을 뿐만아니라 의병 진압에 필요한 여러가지 정보를 탐지하여 일제군경에 제공한 실례가 허다하였다.59) 그러나 안동지회는 본회의 변질을 규탄하고 협회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였으나 차츰 쇠퇴하여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대한협회 안동지회도 해산당하고 말았다.60)

   (3)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의 결성(結成) 

   그리고 이시기 김동삼의 계몽운동과 관련하여 언급되어야 할 것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의 결성이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 김동삼 · 남형우(南亨祐) · 안희제(安熙濟) · 서상일(徐相日) 등의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였다. 대동청년단이 결성된 때는 이미 일제의 한국병합이 기정 사실화된 시기로 1909년 7월 일제는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성안하여 각의에서 통과시키고 그 시기와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이등박문 저격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국병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1907년에 결성된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는 그 조직이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중부지방 이북에 치우쳐 있는 반면에 대동청년단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대동청년단은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김동삼은 신민회에도 영남인사로 참여하였고61)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영남일대의 단원가입과 교양 선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의 단규(團規)62)와 단원 명단63)을 살펴보면, 단장에는 남형우, 부단장에는 안희제(2대 단장), 그외 단원으로는 김동삼, 서상일, 이극로(李克魯), 윤세복(尹世復), 신팔균(申八均), 신채호 등이 눈에 띈다. 그리고 단원의 대부분은 영남 일원의 청년지사들이며, 일부 신민회 잔존세력이 참여하고 있는데 대동청년단 단원중에서 신민회 참여 인사로는 김동삼외에 남형우 · 김홍량(金鴻亮) · 박중화(朴重華) · 신백우(申伯雨) · 신채호 등이 있다.64)

대동청년단원 중에는 신민회 · 교남교육회 · 달성친목회 · 조선국권회복단 · 백산상회 등에 관련된 인사가 많은데, 이들은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여 계몽운동의 지방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상경하여 신교육을 받고 신서적을 접하게 되는 많은 청년들이 증가하게 되고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계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65) 김동삼이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하게 되는 계기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동청년단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조직된 점을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겠고, 1907년 협동학교 설립 ·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 등 계몽운동에 투신한 그가 대동청년단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대동청년단에 관계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대동청년단에 관한 근래의 연구가 있으나, 조직이나 구체적인 활동이 분명치 않는 등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필자의 의견으로는 신민회 조직이 영남지역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신민회계열의 뜻있는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적으로 민족의식 결집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상룡, 김동삼, 유인식 등이 보수 유림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사상 전환은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 협동학교 권면문, 그리고 대한협회 설립 취지문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지역이 타지역에 비해 개화의 영향을 늦게 받았으나, 1905년 을사 5조약 강제 체결로 인한 망국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구국을 위한 계몽운동 참여에 분발할 것을 안동의 인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김동삼은 협동학교 · 대한협회 안동지회 · 대동청년단 등을 통해 계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다가,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마침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이 전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4. 중국(中國)으로의 망명(亡命)과 서간도(西間島) 독립군기지(獨立軍基地) 개척(開拓) 

  (1) 경학사(耕學社)의 설립(設立)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한국강점을 전후하여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전국적인 한인 대이주 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는데,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로 선정한 곳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였다.66) 이후 서간도 이주계획은 급진전되어 양기탁(梁起鐸) · 임치정(林蚩正) · 이동녕(李東寧) · 김도희(金道熙) · 이회영(李會榮) · 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이주민을 모집하였다.67) 대한협회 안동지회와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안동지방의 개화 유림들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어렵게 되자,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대거 서간도로 망명하게 된다.

신민회의 계획이 안동지방에 전달된 것은 신민회 모금 담당 강원도 책임자인 주진수에 의해서 1910년 12월 하순에 이상룡을 통해서였다.68) 주진수는 강원도 평해 지방의 황만영(黃萬英)의 동의를 얻어 함께 안동의 이상룡을 만나 신민회의 계획을 알렸다. 이상룡은 주진수 · 황만영의 제의에 동의하고 중국으로의 망명 문제를 김대락(金大洛)(이상룡의 처남)과 상의하여 1911년 1월 5일 가산을 정리하고 의성김씨 문중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김대락 부자, 김성로(金聲魯) · 김병대(金秉大) 등 30여명이 집단으로 서간도로 망명하게 된다.69)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김동삼은 1911년 3월 협동학교 제1회 졸업식에 참석한 후 서간도로 망명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상룡 · 김동삼 등의 안동지방 인사들이 망명할 당시는 1911년 1월 소위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의 보안법위반사건으로 양기탁 · 임치정 · 김도희 · 김구(金九) · 안명근(安明根) 등이 구속되는 등 신민회 관계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어수선할 때였다.70) 1910년 12월 말 부터 1911년 1월 초에 걸쳐 이동녕과 이회영 형제가 제일 먼저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하였고, 뒤를 이어 이상룡 · 김동삼 · 유인식71)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망명하였다.

이상룡이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자, 그의 동지이자 인척인 김형식(金衡植) · 황만영 · 이명세(李明世) · 정생(鄭生) 등은 이상룡보다 먼저 서간도로 떠났다.72) 한 일제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경상북도의 경우 이상룡(안동출신)과 주진수(울진출신)가 망명한 이후 그 일대에서는 이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후속이주가 활발하여73) 조선총독부에서는 경상북도에서의 서간도 이주통계와 이주로 및 이주지역도를 작성하여 이주를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도 하였다.74) 당시의 망명 상황은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이은숙(李恩淑))와 「만주생활(滿洲生活) 77년 (年)」(이해동(李海東))75)등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험난한 여정 끝에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현재 길림성(吉林省)) 삼원보(三源堡)에 도착한 김동삼은 이회영 · 이시영(李始榮)등 형제와 이동녕 · 이상룡 · 김창환(金昌煥) · 주진수 · 윤기섭(尹琦燮) 등과 같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하였다. 이들의 망명 목적은 신민회 사건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도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 재력 있는 다수의 인민을 동지(同地)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새로운 영토로 삼고 다수의 교육 있는 청년을 모집하여 동지(同地)에 보내어 민단(民團)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설(設)하고 진(進)하여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을 시(施)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일으켜서 구한국의 국권을 회복코자 한다.'76)

한편,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중(大孤山中)에서 노천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초대사장에는 이상룡을 추대하고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 장에 장유순(張裕淳),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 등이 선출되었고,77) 김동삼은 경학사의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78) 아울러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경학사 취지서79) 이다. 경학사 취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같이 이들 민족운동가들은 일면 민생 일면 교육이라는 두가지 목표 아래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지 개척과 이주민 안정책을 도모하기 위하여 서간도에서 최초의 국권회복을 위한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창설하게 되었다.80) 그리고 경학사의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하였다.81)

이회영 · 이동녕은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를 답사하고 이곳을 독립군 양성의 기지로 정하고 토지를 구입하였다. 1912년 3월 이회영은 합니하에 집을 짓고 학생들을 수용하였다. 그후 유하현 고산자(孤山子)에 넓은 토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신축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산자로 학교를 옮긴 후 고산자에는 본교를 두고 합니하에는 분교를 두어 김창환이 교관으로 남아 있었다.

서간도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신흥무관학교82)의 전신인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이 취임하고 교감에는 김달(金達), 학감에 윤기섭, 교관에 김창환, 교사에 이갑수(李甲洙) · 이규룡(李圭龍) 등이 취임하였다.83) 신흥(新興)이라는 학교명은 신민회(新民會)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독립전쟁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흥(興)자를 합하여 붙였다.84) 

  1911년의 대흉년으로 이주 동포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고, 학교 운영도 재정난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11년 1년 동안은 이회영 형제의 자금으로 경학사 경비를 충당하였으나, 신민회의 경비 지원도 105인 사건으로 어렵게 되자, 같은 해 가을 경학사를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이동녕은 노령으로, 이시영온 봉천으로 떠나고 김창환 · 윤기섭이 남아 신흥강습소를 지켰다.85) 그러던중 1912년 농사가 잘 되어 여준(呂準) · 이탁(李鐸) 등이 중심이 되어 신흥학교유지회(新興學校維持會)를 조직하였다.86) 

1912년 가을에는 이상룡 · 허혁(許赫) ·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경학사의 후신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87) 이 초대 단장에 선출되었다. 부민단은 경학사를 재정비하여 발전시킨 자치단체로 중앙부에 서무(庶務) · 법무(法務) · 검무(檢務) · 학무(學務) · 재무(財務) 등의 부서를 두었는데88) 김동삼은 서무를 맡았다.89) 중앙부를 추가가에서 통하현 합니하로 옮겼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였다.90)

 
  (2) 백서농장(白西農庄)의 경영(經營) 

   김동삼은 경학사의 설립에 참여하고, 경학사의 부속기관으로 설립한 신흥강습소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중어학원(中語學院)을 설립하여 중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경학사가 제창한 변장운동(變裝運動)9l)의 일환으로 생각된다.92) 1913년 3월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과 신흥강습소 제1회 졸업생 김석(金石) · 강일수(姜一秀) · 이근호(李根澔) 등의 발기로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였다. 신흥학우단은 신흥강습소의 교직원과 졸업생이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는 일종의 동창회 성격을 띤 단체로서 처음에는 명칭을 '다물단(多勿團)'이라 하였다가 부르기 쉽게 '학우단'이라고 개칭하였다.

학우단은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大花斜)에 두었고, 《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도 간행하였다.93)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은 1914년 이후에는 신흥학교나 각 분지교에 설치한 노동강습소 등에서 양성한 독립군 385명을 근간으로 하여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설하고 서간도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94) 백서농장은 봉천성 통화현 제8구 관할 팔리초(八里哨)(빨리소) 구(區) 소관하의 소북(小北)(쏘베차)란 백두산 서쪽편 산기슭 사방 200리의 무인지경의 고원평야에 건설한 독립군영의 이름인데 다만 내외의 이목을 고려하여 일반이 쉽게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서농장이라 하였다.95)

백서농장에 관한 자료로는 원병상(元秉常) 수기(手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8항에 소북차(小北차)분교인 백서농장이라 하여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작자미상의 <제9항(第九項) 백서농장사(白西農庄史)>(필사본)가 있는데 원병상의 수기보다 비교적 자세하게 창설 배경을 기록하고 있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96)

   백서농장은 단기 4247년(1914) 갑인에 (중략) 혈전 준비에 급급하던 우리(신흥학우단)수뇌부와 부민회 간부들은 다시 방법을 달리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연복년(年復年) 배출되는 필업생과 각처 분지교 및 각처 노동강습소를 거쳐 나오는 군인들의 기운을 소화, 조절하기 위하여 이미 물색 결정된 곳으로 군관구(軍管區) 기지를 정하고 혈전 태세를 갖추기로 하니 이곳 봉천성(奉天省) 동변도(東邊道)에 속한 통화현(通化縣) 제8구(第8區) 관할 팔리초(八里哨) 구(區) 소관하(小管下)에 있는 소북(小北)란 백두산 서맥(西脈) 고원 평야이다. 백두산 서면이란 뜻을 가져 백서농장(혹은 서장(西庄))이라고(우리군영이라 하지 않았음을 남의 땅인 때문에 국제적 체면을 생각하여 백서농장이라 했다)하고, 내용에서만 우리 군영이라고 불리었다. 

  백서농장 창설일에 대해서는 원병상의 수기 <신흥무관학교>에는 1917년 봄이라 하였는데, 1914년이 정확한 것 같다. 왜냐하면 백서농장의 설립 배경을 살펴보면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중 · 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틈타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다가 실패하자 다시 혈전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김동삼을 비롯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과 부민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백서농장을 창설하여 대일무장투쟁에 대비하였다.97) 서간도지역의 독립군영인 백서농장의 중요 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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