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채워지는 역사속의 지식은.. 자신의 뿌리를 알기위해 검색을 통해서 방문하는 젊은이들,과제물을 찾기위해 방문하는 청소년,
학문을 연구하시는 학계에서 찾아오시는 분들 그리고 의성김씨 종친님들 등 모두에게 도움이 될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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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학교 앞에서 청송/영덕으로 가는 국도 35호를 따라 8km 정도 가면 좌측에 있다. 마을 앞에 청송에서 내려오는 반변천(낙동강 지류)이 있어 '내앞(川前)'이 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을 중시조로 하는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내앞파(川前派) 집성촌이다.
청계는 다섯 아들을 퇴계(도산서당)에 보내 공부시켜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 으로도 불렸다(악봉 김극일 1522~1585, 귀봉 김수일 1528~1583, 운암 김명일 1534~1570, 학봉 김성일 1538~1593, 남악 김복일 1541~1591). 장남은 종택에서 살고 나머지 네 아들은 인근으로 분가하여 각각 소종택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
섯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시킨 아버지(청계)의 행장에 학봉은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니 어버지께서 하시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 양쪽에 아이들을 안고 자다가 어린아이가 젖을 찾으면, 당신의 젖을 물려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말씀을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100여명이고 90여명이 문집을 남길 정도로 문명이 높지만 벼슬은 높지 않았는데 "벼슬은 정이품 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 하지 말라"는 청계의 유훈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청
계공 탄생 500주년(2001년 2월) 기념 학술 논문집에 수록된 조동걸 교수의 논문인 안동 전천문중의 독립운동 내용에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후 엄동설한인 12월24일 백하 김대락(1845~1914)은 6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증손들이
식민지에서 태어나 일본신민이 되는 치욕을 줄 수 없다며 서간도로 망명하는데 만삭인 손부와 손녀가 따라 나서 것을 보고 내앞 사람
22가구 50여명이 함께 만주로 가면서 엄동설한의 여로에서 해산을 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일송 김동삼(~1937)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해 의장을 맏았고(부회장은 안창호 윤해)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여 만해 한용운이 삼우장에서 화장한후 소원대로 한강에 뿌렸다.
김
대락의 아들 월송 김형식(1877~1950)은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을 하던 도사댁에서 태어나 협동학교 교사를 하다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에서 사회를 보았고 노년에 금강산에서 휴양중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깨끗하게 생을 마친다며 절명시를 남기고 구룡폭포에서 투신 자살했다"라고 적고 있다.
(참고 자료: http://blog.naver.com/kvipkk?Redirect=Log&logNo=20023532361)
[의성김씨 귀봉종택(鶴峯宗宅)] 청계의 둘째 아들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의 종택, 위의 의성김씨(학봉 생가) 내앞파 종택 오른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