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 산중 속, 한 폭의 그림 같은 종가
종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 수많은 예술인들과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전통을 알리고 있다는 그곳을 찾아 양반의 마을로 알려진 안동으로 떠났다. 그 유명한
문경세제를 넘고, 예천과 풍산을 지나 안동에 도착한 지 다섯 시간 정도. 영덕 방면 34번 국도를 타고 한참을 더 가 찾은 곳은
박곡리라는 작은 마을. 이 쯤에 그곳이 있겠다라는 기대는 저버리고, 구불구불 산길을 8km쯤 한참 더 오르고 내려가니 휴대폰도
연결되지 않는 산 중의 종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호수의 물안개, 여기저기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름모를 들꽃들, 산새 소리. 모든
시름을 잊고, 경건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동양화 속 그 모습이라 표현하면 적당할까.
이곳 지례예술촌(知禮藝術村)은
조선 숙종 때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대사간이라는 벼슬을 지낸 의성(義城) 김씨 지례파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杰
1623-1695)선생의 종가로, 지금은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공간, 자녀들에게는 산 교육장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종가에는 지촌 선생의 12세 종손 김구직(金九稷)옹을 모시고 김원길(金源吉) 차종손과 부인 이순희(李純熙)씨가 살고
있었다. 지금은 종가만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일가 친적들이 모두 모여 30여 호 무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흩어졌지만 종가는 경북 문화재 46호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예술촌으로 단장한 350년 고가
이
곳을 지키고 있는 차종손 김원길 촌장은 교수이며, 교수 이전에 시집을 세 권이나 낸 시인이다. 그가 실력 있는 교수직을 버리고
종가로 돌아와 예술촌의 촌장이 된 진정한 이유는, 종손으로서 집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늘 가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문화재로 지정된 아름다운 종가라도 종손이 그 집에 머물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종손 없는 종가는 죽은 집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더불어 건축물로서의 종가집 보존말고도 종손의 삶이나 전통 방식 자체를 보존하는 일도 중요한 정부의 문화재
지원 방향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가 이 넓은 종가를 돌보며 늘 생각한 것은, 이제 1남 2녀의
자녀들도 도시에서 각자의 사회 생활을 하고, 4대가 살아도 부족함이 없는 이 너른 집을 어떻게 돌볼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빈집으로 둘 수도 없고, 일반인들에게 무작정 개방하면 종가가 훼손될까 걱정이었다. 결국 창작을 하는 예술인들에게 공간을
제공하자는 의미에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동지부장’ 답게 이곳 종가를 예술촌으로 새 단장한 것이다. 좋은 공기, 속세를
떠난 자연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창작의 산실이 되기에 충분했다. 벌써 종가가 예술촌으로 거듭난 지는 12년째다. 그동안
이문열, 구상, 유안진, 이어령 등 그 유명한 문인들이 다녀가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한다.
본채 뒷산에 있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과 제사를 모시고 있는 주사 등 종가의 상징인 이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술촌을 찾는 예술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종가의 규모는 3천여 평의 대지에 경북 문화재 제 46호로 지정된 건물 10동 125칸으로 엄청난 규모. 종가가 이곳에 자리잡은
지도 자그마치 336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대유학자 학봉 김성일 선생의 맏형 약봉의 증손으로, 의성 김씨
지례파의 파종이 되는 지촌 김방걸 때부터다. 지촌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1689년에는 임금에게 바른말을 전하는 대사간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당쟁의 시대에 살며 인형왕후 민씨 폐출의 비극을 보고, 벼슬을 버리게 되었다. 그 후
지촌은 지례촌에 정착해 그의 학문을 후대에 이어 많은 시인과 학자를 배출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김원길 촌장 역시 문인이었고,
종가를 지키며 생긴 에피소드나 구수한 입담을 담은 90편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안동의 해학’이라는 책을 펴내 종가의 재미있고
진솔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기도 했다.
자연을 담은 종가의 장, 장아찌
명
절을 제외한 일년에 지내는 기제사만 10회, 일년에 몇 천 명의 접빈을 대하는 종가의 살림. 평범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싶지만 우리가 만난 종부의 모습은 그저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녀린 체격과 하얗고 고은 얼굴에 서려 있는 종부의
자존심과 고집은 존경할만한 자태였다. 굳이 촬영을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은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교직 생활을 하다가 스물
일곱에 퇴계 집안에서 시집을 와 벌써 30년이 넘었다. 남편의 푸근한 마음씨와 박식함에 반해 결혼 후 딴 살림을 하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15년 전부터 13대 종부가 됐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종가의 음식 비결은 바로 좋은 재료와 좋은 공기,
인공을 거치지 않고 전하는 자연의 맛이다.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그녀의 부엌에는 아직도 불을 지피는 커다란 가마솥과 마르고
닳도록 상을 차린 흔적이 보이는 손님상, 한 아름에 손이 닿지도 않을 정도로 넉넉한 품의 항아리들, 넓은 들과 산 속에 자연의
재료를 가득 담은 소쿠리들이 도시에서 온 우리의 정서를 넉넉하게 해주는 풍경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