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10世孫 김 의(金 宜)의 넷째 아들로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사헌부 소속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공양왕 때 서해도관찰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러, 밀직제학 이지(李至)와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王)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392년 개성부판사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가 제거되자, 그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상주목사로 있을 때 정자를 지었는데, 이색(李穡)이 풍영루(風樓)라 이름 짓고 이숭인(李崇仁)이 시를 남겨, 명승지가 되었다.
선생의 휘는 남득(南得)이요 초휘는 기지(麒芝) 이고 자는 중서 (重瑞)이며 시호는 충익 (忠翊)이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제4자인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11세손이며 후의성군(後義城君) 김 용비(金 龍庇)의 장손이며 김 의 (金 宜)의 큰아들이다.
선생은 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년)에 진사 (進士)가 되어 감찰집의(監寮執義)가 되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안렴사 (楊廣道接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 문하평리 (判開城府事門下評理)가 되었다. 1364년 (고려 공민왕 13년)에 원제(元帝)가 최 유(崔 濡)의 농간에 속아 왕을 폐하고자 어사 유 린 (御皮 유潾)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할 때 선생이 접반시랑 (接伴侍郎 )이 되어 무고임을 역설하였던 바 원제 (元帝)가 크게 감회하여 계속 재위케 했다.
선생이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가 금자광록대부 예부상서 (金紫光祿大未 禮部尙書)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 고양 부원군(翊戴功臣 高陽府院君 )에 봉하고 남득(南得)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남득(南得)의 뜻은 영남 (嶺南)에서 왕의 뜻에 맞은 인재를 얻었다는 것이다. 시호는 충익(忠翊)으로 내리고 후손들은 선생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본관은 고령으로 하였는데 고양(高陽)은 고령(高靈)의 고호이다. (참고문헌 :인명대사전, 한국인의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