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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보(乙丑譜)'에 의하면, 의성군(義城君)의 9世孫 김용비(金龍庇)이래로 관향(貫鄕)인 경북 의성(義城)을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아왔으므로 일찍이 의성 (義城)에 터를 잡아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용비(龍庇)의 맏아들 의(宜)의 자손들인 복야공파(僕射公派)는
13세거두(居斗)·거익(居翼)의대에 안동(安東)·부여(扶餘)·영일의(迎日) 청하(淸河)· 청원(淸原)의 문의(文義) 등지로 가 자리잡았고, 다시 15세 진(晋)·원(源)의 대부터 3대(代)에 걸쳐 군위(軍威)· 수원(水原)· 고창(高敞)의 흥덕(興德)· 청양(靑陽)의 정산(定山)· 김해(金海)· 보령(保寧)의 남포(藍浦)· 영천(永川)의 두협(斗峽) 등지로 산거(散居)해갔다.
그 가운데 13세 득수(得水)가 북청(北靑)의 사동(蛇洞)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으므로 그의 후계 (後系)가 북청(北靑)에 세거했고, 16세 부현(傅顯)의 부인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세아들과 함께 고부(古阜)의 도계리(道溪里)로 옮겨간 뒤 고부(古阜)를 비롯한 정읍(井邑)에도 일부 자손들이 뿌리를 내렸던 것 같다. 또한 16세 의동(義同)이 장사(長沙)로 유배되어 그 자손들이 고창(高敞)일대에 터를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 첨사공 김용비(金龍庇)의 묘소 (소재지 : 경북 의성군 사곡면 토현동) |
▲ 보물 450호(의성김씨 종택)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소재 |
용비(龍庇)의 둘째 아들 굉(紘)의 자손들인 부원군파(府院君派)는
굉(紘)의 증손 하(河)· 한(漢)· 호(浩)의 대에 장성(長城)·강진(康津)·해남(海南)·광주(光州) 등지에 자리잡았고, 일부는 14세 계환(繼環)이래로 황해도 신천(信川)의 문화(文化) 등지에, 17세 국진(國璡)이래로 충주(忠州)·해주(海州) 등지로 가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용비(龍庇)의 세째 아들이며 굉(紘)의 아우 영(英)의 자손들인 찬성공파(贊成公派)는
일부가 13세 용초(用超)의 대부터 성주(星州)에 정착·세거했고, 일부는 고령(高靈)으로 가 살았다. 또한 16세 한경(漢卿)의 대부터 3대에 걸쳐 청송(靑松)· 괴산(槐山)· 합천(陜川)· 경주(慶州)· 전주(全州) 등지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용비(龍庇)의 넷째 아들이며 영(英) 의 아우 세인(世인)의 자손들인 전서공파(典書公派)는 전북 정읍(井邑)을 거쳐 안성(安城) 등 경기도 일원에 세거의 터를 굳혔던 것 같다.
용비(龍庇)의 아우인 용필(龍弼)의 아들 윤관(允寬)의 자손들인 어사공파(御史公派)는 평남 평양(平壤)을 거쳐 16세 경(經)의 대 이래로 용강(龍岡)에서 살았고
용비(龍庇)의 아우인 용주(龍珠)의 자손들은 개성(開城)에서 살다가 15세 남보(南寶) 이래로 충북 옥천(沃川)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9세 성단(成丹)의 자손들은 선대(先代)부터 세거해 온 의성(義城)에 많이 살았으며,
9세 흥(興)의 자손들인 선략장군파(宣略將軍派)는 능주(綾州)를 거쳐 합천(陜川)에 가 살았다. 특히 경북 성주군(星州郡) 수륜면(修倫面) 수륜동(修倫洞)은 1980년 당시 의성김씨(義城金氏) 1백 3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의성군(義城君) 9世 용비(龍庇)의 後孫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