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가 처음 안동에 입향하게 된 것은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낸 김거두(金居斗)가 안동의 풍산현으로 낙향하게 되면서이다. 전서공의 웃대 태권(台權)은 벼슬이 문예부좌사윤으로 공민왕 12년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용(金鏞)의 난에 여러 시종대신과 함께 희생되는데, 직후에 전서공이 풍산으로 낙향한 것은 어머니가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의 증손녀로 그 집안이 풍산일대에 재지기반을 둔 여말 신진사대부였기 때문이다.
뒷날, 전서공의 아들 천(洊)은 나라의 운명이 기우는 것을 슬퍼하여 안동부 율세동 부근으로 이거하였다. 율세동의 옛 이름은 방적골인데 우거할 때에 “나라가 망하려 하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꼬(邦之革矣我安適歸)”라 한탄한 데서 붙여진 말이라 한다.
낙향 이후 토성이족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출사(出仕)를 위한 향촌 기반을 구축한 후 선초 세종조(世宗朝)부터는 上京從仕하기도 하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 때 다시 낙향하여 그 때까지 어느 정도 공고해진 기반 위에서 마침내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말 이래 조선전기의 사회상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는 여말의 무신의 발호와 불교의 타락, 부원세력(附元勢力)의 권귀화(權貴化)와 모점(冒占) 등의 여러 사회문제로 기인한 극도의 혼란을 새로운 이념과 사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치 사회적 주체로 부상하였던 신흥사대부의 정권이다.
독서유생인 사(士)와 전현직 관료인 대부(大夫)가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이 되어 초기의 정권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 여말의 신흥사대부가 왕조교체를 계기로 집권사대부와 재야사대부로 나뉘어지고, 15세기 이후의 왕위찬탈 및 정정 혼란의 와중에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로 분기되어 갔다. 내앞 김문의 선조 김거두와 아들 천이 안동부 풍산현과 부치 방적동에 우거하고, 세종 문종 조에 출사하여 청요직을 역임했던 김한계가 관직을 떠나 향촌에 은거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
또 입향 이후 재지사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배경에는 한편 사림세력의 성장 및 분화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는 당시의 혼속과 재산상속제가 깊이 관계되어 있다. 여말까지는, 특히 지방 향촌에서 흔한 현상이었지만, 부자나 형제 사이에도 향리(鄕吏)와 관인(官人)이 공존하였고, 吏族도 의연히 고을의 한 지배세력으로서 과거나 군공을 통해 사환에 진출하였으니만큼 士族과 이족의 신분적 구별 자체가 희미하였다. 따라서 둘 사이에 빈번한 혼인관계가 맺어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상속에 있어서도 남녀 균분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낙향과 상경종사 모두가 처가 또는 외가를 통한 반연과 경제적 지원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특히 상경종사자가 낙향할 경우에는 토성인 안동권씨와의 인척관계 유무가 재지기반을 위해서 결정적이었다.
내앞 김씨가 안동에 입향하게 된 배경은 바로 안동김씨와 권씨가 처향 또는 처의 외향으로 이미 향촌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성 김문은 이후에도 안동권씨를 비롯한 재지명문사족들과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한다. 우선 김천의 아들 영명(永命)은 문종(文宗)의 장인 권전(權專)의 사위였고, 그의 장자 한계(漢啓)는 문과를 거쳐 승문원 등 청환(淸宦)에 재직하였는데 세조 찬탈 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게 된 내력도 문종왕후의 인척이며 단종과 이종 간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한계의 장자 만근(萬謹)이 안동부 속현 임하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가졌던 오계동(吳季童)의 사위가 되어 비로소 내앞에 정착하게 되고, 다시 아들 예범(禮範)을 거쳐 청계(靑溪) 김진(金璡)---극일(克一) 형제의 세대로 이어지면서 문호가 크게 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안동 권씨 뿐 아니라 진성이씨와도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은 김만근의 아우 충순위 만신(萬慎)의 장인이고, 이계양의 아들, 곧 퇴계의 바로 윗어른 이식(李埴)은 김한계의 아우인 한철(漢哲)의 사위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주촌(周村)(두루)의 참봉 이희안(李希顔)은 승지 김예범의 사위가 되었으니 청계와 처남매부 간이며, 청계의 손자 운천(雲川) 김용(金溶)은 퇴계의 손서이기도 하다.
2. 청계 김진과 문호의 창달
흔히 선비의 고장으로서 안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내앞이라 하며, 그 이유는 안동을 대표할 만한 한 문헌의 집안이 십수 대, 오백여 년을 이어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그 문헌의 집안을 말하면서 개창의 주인공인 청계 김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설명에 문헌이란 역사적 사실을 증험하는 데 필요한 문적과 현인을 뜻한다 하지 않았던가.
김진(金璡)은 관향이 의성, 자는 영중(瑩中), 세칭 청계(靑溪)는 그 호이다. 연산군 6년 1500년 2월 내앞 본가에서 출생하여 1580년 영양 청기 흥림초사(興林草舍)에서 작고하니 향년 여든 하나였다. 의성김씨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 석을 득관 시조로 하고 의성군 석으로부터 9세를 전하여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를 지낸 용비가 의성군을 습봉함으로써 그를 중시조로 삼는다. 다시 삼대를 내려와 위에서 언급한 바, 12세 고려 문예부 좌사윤 태권(台權)이 흥왕사에서 김용(金鏞)의 난에 순국하는데 이 좌사윤공이 청계의 7대조이고 6대조인 전서공 거두(居斗) 때에 안동에 입향한다. 이후의 가계는 5대조 천(洊), 고조(高祖) 영명(永命) 증조(曾祖) 한계(漢溪) 조부(祖父) 만근(萬謹) 아버지 예범(禮範)을 거쳐 청계공에 이르는데 임하에 처음 기틀을 잡은 이는 조부인 망계(望溪) 만근(萬謹) 공이다.
집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6세 때에 청송에 있던 종고모부 권간(權幹)에게서 수학하고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5대손 민세경(閔世卿)의 사위가 되었는데, 처숙 민세정(閔世貞) 공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바로 이 처숙을 종유하며 당대의 현사들과 사귐에 견문이 크게 진전되었다. 26세(152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각별한 친교를 맺고 각지에서 온 명사들과 사귀는 등 학업에 정진하였다. 이 시기 이후 곧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와 향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후대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 일을 경영하는데 천전을 기반으로 인근의 임하 신덕 망천 추월 사빈 송석 선창 낙연까지 반변천 중상류를 개척하여 가원을 삼았으며 나아가 중년에는 멀리 강릉 땅의 금광평을 입안 개척하였고 영양의 청기를 개척하여 별업을 삼았다.
금광평은 현재의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어단리, 학산리 일대로서 당시 동서 십리, 남북 십리의 황무지였다. 청계는 이 땅을 입안 개척하여 후일 자손들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다. 155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영양 청기에 들어가 미개지를 농경지로 개척하고 영양에서는 처음으로 서당을 세워 강학과 향림교화에 정열을 기울였다. 백년 대계의 초석이 될 경제적 기반을 마련코자 한 일이거니와 이는 16세기 재지사족의 새로운 농장개척, 집단촌락 형성 등 문호확장 사업의 선구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청계공의 사업이력을 연조에 따라 간추려 메모해 본다.
26세 : 사마시 급제. 서울 태학에 유학.
29세-39세 : 둘째 수일(守一), 셋째 명일(明一), 맏딸 유실(柳室), 넷째 성일(誠一) 출생.
41세(1540년) : 부친 승지공의 상을 당함.
42세 : 막내 아들 복일(復一) 출생
47세(1546년) : 맏아들 약봉 문과(갑과) 급제.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 상을 당함.
이때부터 속현하지 않고 학봉(8세) 아래 남악(5세)과 젖먹이 딸들까지 모두 8남매를 직접 보살펴 양육함.
48세 : 마을 건너 부암(현 백운정 아래)가에 독서당을 짓고 거처하면서 자제와 고을의 영재를 모아 교육함
58세(1557년) : 귀봉의 장자인 손자 용(涌)(운천-雲川)이 출생함. 이 무렵 청기에 별업을 짓고 그 곳에 기거함.
65세(1564년) : 위로 약봉, 귀봉이 대 소과에 급제하고 약봉은 벼슬길에 나아감.
아래 삼형제가 모두 진사회시에 동반 급제함.
67-69세 : 선유정(仙遊亭)을 지음. 학봉이 대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름. 이때쯤 귀봉에게 백운정을 짓게 함.
71세 : 둘째 귀봉, 셋째 운암과 막내 남악이 대과 응시를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운암의 병세 악화로 운암과 귀봉은 귀향하고 막내 남악만이 대과에 응시, 등제함.
귀향길에 운암은 용인 금량역 부근에서 끝내 요몰함.
73세 : 화공에게 진영을 그리게 하고 선유정 남쪽 벽에 걸게 함.
77세(1576년) : 오토산 입석 발문을 짓고 묘역을 수축함.
78세 : 1570년대 초반에 영양사림에 통지하고 영해부사 양사기공의 협력을 얻어 건립을 추진하였던
영산서원이 이 해에 완성됨.
80세(1579년) : 팔순을 맞아 육남매와 대소가 친척들이 청기에 모임.
이 무렵 대과에 오른 세 아들, 사위 이봉춘李逢春 등의 네 문관이 영산서원의 향회에 참석함.
80세(1580년) : 윤사월 신유, 청기 우사에서 돌아감. ‘나이 여든이 넘었으니 천수를 누렸다.
하늘이 내게 내린 복이 이처럼 많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며 태연히 임종함.
대강의 이력에서도 자세히 보이듯, 청계의 평생은 자손의 교도와 향리의 흥학양속으로 점철되었다. 시례(詩禮)를 자손의 장래를 위한 계책으로 삼아, 차례로 도산문하(陶山門下)에 집지(執贄)케 한 일이며,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덕목을 강조하여 제사를 성심으로 받들 것을 유훈으로 남긴 일, 친척인아(親戚姻婭) 간의 돈목(敦睦)을 몸소 실행하여, 재산의 분배에서 문권을 남기지 않아도 원망이 없도록 처사한 일이나, 멀고 가까운 친척과 이웃 사이에 한결같이 후박(厚薄)이 없도록 대우한 일, 고아가 된 외손이나 가난한 생질들을 거두어 자애로 육성하고 안돈시킨 일 등은 모두가 당장은 문호의 기풍을 두터이 하는 일이면서 결국은 향리의 습속을 두텁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중년부터 고향의 부암에 서당을 열어 마을 자제들을 훈도하고 만년까지도 그제껏 무무한 해읍의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영양(英陽)(당시는 영해-寧海의 속현이었다)에 영산서당(英山書堂)을 발기하여 글 읽는 풍습을 이끌어내고 수많은 사류를 성립시킨 일들도 이러한 일의 연장에서 가능하였다.
항상 강조하였던 바, ‘인신된 사람은 훌륭한 일을 하다가 명예롭게 죽을지언정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신명을 보전하여 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군자로서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오히려 산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살아남는다면 나는 오히려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는 말은 세전(世傳)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어 넷째 자제 학봉의 구국활동으로 구체화되었을 뿐 아니라 한말 이후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의 역사적 삶을 규정하는 제일의적 규범이 되었다.
청계와 그 다섯 자제의 유문집인 연방세고(聯芳世稿)의 서문에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하늘이 인재를 냄이 잦지 않아서 한 대를 걸러서 한 사람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몇 대를 지나 한 사람을 내기도 하였다. 그 부자 형제가 발굽을 잇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일은 수백 대에 겨우 한 둘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중략---
우리 부자께서 언젠가 자천(子賤)(공자의 제자)을 두고 말씀하기를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품덕을 배웠겠는가’라고 하였거니와 이 말을 해설한 이는 ‘다른 사람의 선행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부형과 사우에 근본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지극히 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청계선생이 아버지로서 경사를 길러 음덕을 쌓는 일을 앞에서 하셨고 퇴계선생이 스승으로서 재덕을 이루고 창달하는 일을 나중에 해주셨으니 비록 오형제 분의 높은 자질과 품성은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훈도와 점염의 공은 부모와 스승의 도움에 바탕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먼저...새해에도 복많이 받으시고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위의 댓글에서 요청해 주신 부분은... (아래 네모칸 속 글부분)
이 토론 이후에 청계 할아버님의 직계 자손 10남매분의 토론주제로 실시 예정이며,
그때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을듯 하여 그때에 같이 다루는게 좋을듯 하여 일단 미루어 봅니다.
청계의 학문적 연원
청계 김진은 1515년(16세)에 고모부인 청부 권간(1478~?)에게 학문과 예법을 배워 몇 년 만에 학업이 크게 성취되었고, 결혼한 뒤로는 처숙부인 민세정(閔世貞)에게 수학하여 당대의 이름난 선비(명유)들의 학문과 사상을 듣게 되면서부터 그의 견문이 날로 넓어지고, 문예가 더욱 진전을 보게 되었다. 1525년(26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뒤로는 성균관에 유학하여 당대의 사림들 사이에 그 이름이 나 있던 하서 김인후와 숙식을 같이하면서 당시의 이름 있는 사림파 명사들과도 서로 교유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는 갑자기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임하의 부암(傅巖)곁에다 부암서당을 세우고 집안의 자제들뿐만 아리라 향리의 청소년까지도 모두 불러 모아 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오로지 전념하였다.〔※부암은 내앞 남쪽의 강 건너 백운정에서 새대, 임천서원과 그 위의 독산까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백운정 바로 밑에 있는 바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바위를 내앞에서는 범바위(범바우)라고 했다. 너럭바위란 뜻이다. 이~삼십 명이 족히 않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지금은 임하보조댐으로 물에 잠기었고, 여러 번 큰물이 져서 바위 일부가 손실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오십 보 위에까지 토끼길이 있었다. 거기에 부암서당이 있었다. 새대 건너다. 이 일대는 내앞 강 건너여서 천전동이 아니고 다추월과 임하인데 부암서원은 추월이다.〕
당시 그가 무슨 이유 때문에 과거를 단념하고 별안간 낙향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그의 학문 연원과 당대 사림파 명사들과의 교유관계 등을 통해 그의 과거 포기의 동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청계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청부 권간은 문종왕비의 인척으로 안동의 인근지역인 청송에 은거한 사림파 계통인 바, 그런 인물이 고모부가 되자 청계의 부친이 그에게 배움을 청했던 것이다. 당시 권간은 자기 방식의 일정한 교육방법으로 소년 청계를 교육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효제(孝悌)의 도리’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는 유교적인 실천윤리를 서당교육의 기본 내용으로 설정하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청계가 결혼한 뒤에 수학하였던 처숙부 민세정 역시 청계의 학문적 지향에 실제로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보여 진다. 민세정은 태종조에 왕의 외척 세력이라는 이유 때문에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하루아침에 거세된 민무질(閔無疾)의 증손인 민세경(閔世卿 1466~?)의 아우로, 이른바 현량과를 통해 중앙관료로 전격 발탁된 기묘명유의 한 사람이다. 민세정은 자가 정숙(正叔)이고, 기묘사화(1519년) 시에 현감의 신분으로 삭탈관직 당했다가, 나중에 다시 함경도 도사로 복직된 인물이다.
현량과는 조광조(1482~1519)의 건의에 의해 인재 등용을 목표로 1519년(중종 14)에 설치된 것인 바, 김식 등 사림파 계통의 선비들이 이 제도를 통해 대거 발탁되었다. 현량과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가 발발한 이후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영남사림파가 중앙정계에 다시 진출하는 실질적인 등용문이 되었던 것으로, 당시 정암 조광조는 “소학(小學)은 인재를 기르는 근본이 되고, 향약은 풍속을 교화하는 법도가 된다.”라로 주장하여, 왕에게 소학 ․ 근사록 ․ 성리대전 등의 유교 경전을 읽어 왕도정치를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청년 시절의 청계의 학문적 성숙에 큰 영향을 끼쳤던 처숙부 민세정이 바로 이 현량과 출신이란 점에서 우리는 그가 청년시절에 어떠한 내용을 주로 공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소학을 바탕으로 한 효제충신의 실천유학이 강학의 주된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ㅇ 자료 검토와 부연
청계 공은 16세에 고모부인 권간 공에게 가서 학문과 예법을 배우셨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하신 것 같다. 장가를 언제 가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20세(1519년) 전후인 것 같다. 1522년(청계공 23세) 5월에 맏아들 극일 공이 태어나신다. 처가는 현재 청송군 안덕면 명당2리 당밑마을이다. 마을 앞에 계류가 흐르는데, 이 물은 안동의 길안천으로 내려온다. 현량과 출신인 처숙부 민세정 공과 교유하면서 당대의 현사들과 사귐으로써 견문이 크게 넓어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 조광조의 건의에 의하여 현량과가 실시된 연도가 1519년이다. 후보자를 120명 선발하여 28명을 급제시켰는데 학식과 행실을 기준으로 선발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민세정 공으로부터는 학문을 배웠다기보다는 처세하는 방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민세정 공과의 만남이 언제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현랑과는 그 해 12월 조광조가 사사되면서 폐지된 제도이고, 민세정 공은 귀양을 가게 된다.
1525년(26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시면서, 성균관 유생들과의 만남이,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길을 포기하신 것 같다. 하서 김인후 선생과는 같은 방에서 공부하셨고, 호남의 최운수 공과는 경산(京山)의 사자암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하셨다. 대체로 30세 전후를 하여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자녀 교육과 향촌 인재 양성에 힘쓰셨다. 아마도 성균관 유생시절에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현실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신 것 같다. 아마도 군자의 삶을 동경하신 것으로 보이고 공은 군자답게 사시었으며, 안동의 재지사족의, 안동 선비의 전형이시다.
실천유학의 생활화
안동선비는 인륜을 현실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일을 학문의 가장 요긴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수신의 큰 법도인 육례와 효제충신의 유교적인 실천윤리를 담고 있는 소학의 공부는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13~15세기가 되면 안동의 선비들은 대부분 자기의 자제들에게 소학을 먼저 가르치지 시작한다. 안동선비들이 이와 같이 소학의 실천을 학문의 가장 요체로 생각한 것은 물론 퇴계 선생의 실천적 학문관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 그러나 이 점은 퇴계학파가 아직 성립되기 이전부터 안동지역의 젊은 청년자제들을 가르친 청계 김진과 유일재 김언기(1520~1588)의 학문적 성향과도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청계는 1525년(26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뒤 몇 년 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고는 일찌감치 과거합격을 통해 입신출세하려는 생각을 단념하고 향리로 내려오고 만다. 이때부터 그는 임하의 부암이라는 곳에다 집을 짓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이곳에서 창계는 그 동안 자기가 연마하였던 유교적 학문을 생활현장 속에 직접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래에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처소에 반드시 문안 인사를 올린다.
* 부모님의 상례는 반드시 주문공 가례를 따라 실천하였다.
* 평상시에 조상의 제사 지내는 일을 아주 근엄하게 한다.
* 무속이나 불사(佛祀) 등을 아주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 농사를 백성의 천직이라 생각하고 아울러 권농, 권상(양잠)하는 일을 선비의 본분으로 삼았다.
위의 열거된 몇 가지 사례는 청계의 행장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이는 대개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이 일상의 규범으로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주자가례의 실천은 바로 조광조 등이 실행한 소학실천운동과 일정하게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바, 특히 안동의 선비들에게 있어 소학의 실천은 향약의 실천운동과도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는 1515년(중종 10년, 청계 16세)에 조광조가 등용되면서 소학 ․ 여씨향약 ․ 근사록 등이 간행 ․반포되었고, 그 이듬해(1516년)는 역시 김안국(1478~1543)이 오륜행실도와 언해여씨향약 등을 간행하여 소학실천운동을 더욱 확산시키는데 적극적인 힘을 기울였던 영남학파의 일련의 사상혁신운동과 서로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는 것이다.
김안국은 소학동자로 자청하던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답게 스승의 학문을 그대로 계승하여 이를 소학실천운동으로 적극 이어 나갔다. 김안국은 바로 청계와 같은 계파인 의성호족인 김홍술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천계의 계파가 의성 - 상경종사 - 안동지방으로 이주한 전형적인 영남사림파인데 반해서, 모재의 계파는 의성 - 상경종사 - 기호지방으로 이주하여 여주에 정착한 전형적인 재경관료(기호사림파)였던 셈이다.
청계는 특히 제사를 지낼 때면, 사흘간 목욕재계를 하고 집 안팎으로 감히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엄격하게 훈계하고 온갖 공경을 다하는 바람에 집안사람들이 감히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매양 “한 가문의 흥폐는 제사를 어떻게 지내느냐 하는 일에 달렸으니, 제사를 근엄하게 지내지 않고서 어찌 조상의 음덕을 받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며 자손들을 훈계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종가가 무너지고 자식들이 호활해지면 제물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는 법이니, 만약 종손이 가난해지면 닭 한 마리, 호박 한 덩어리를 놓더라도 제삿날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만약 재물이 넉넉한 형편이면서도 가묘(家廟)에 제사지내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음사나 불사 등을 일삼는 자가 있으면, 장노(杖奴=노비) 1백 명으로 하여금 몽둥이찜질을 하여도 좋다.”라는 내용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청계가 영해의 청기현에 있는 자신의 전답을 자손들에게 상속하면서 향사(享祀)시에 일족이 종가에 모여 집회를 하면 종가가 오래 지탱하지 못하여 결국 제사를 지내지 못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청지의 대저(大田)에 있는 전답 40여 두락과 그곳에 지은 가사를 승중자에게 따로 상속하여 제사를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을 보아도, 우리는 그가 조상에 올리는 제사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었든가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무당의 무리들이 요망한 귀신에 의지하여 백성들의 미풍양속을 무너뜨림이 날로 더욱 심해진다.”라고 하여 임하면 남산 높이 세워져 있던 신당(神堂)을 헐어버린 일도, 고려 말 이래로 남아있던 미불음사(媚佛淫祀)의 풍속을 타파하기 위한 것인 바, 이는 곧 유교적인 생활을 행동으로 실천한 것에 다름 아니다.
ㅇ 자료 검토와 부연
서당의 창건과 강학활동
청계가 과거를 단념하고 향리로 돌라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26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뒤 성균관에서 몇 년 간 공부를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략 그의 나이 30세쯤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대략 1530년 이후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집안의 자제들과 향리의 청소년을 교육하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 부암서당의 창건
향리로 내려온 뒤 청계 자신이 직접 터를 잡아 집을 지은 임하의 부암 곁에 지은 것이 바로 부암서당이다. 청계는 이 부암서당의 학령과 교육과정을 엄격하게 세우고 서당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같은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본가와 처가로부터 상속받은 노비와 임하면 일대의 많은 전답을 소유했던 그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는 당시 부암서당 외에도 백운정, 선유정, 호은정 등 여러 개의 정자를 소유하고 있었던 바, 이러한 곳에서 백담 구봉령, 양곡 이국량, 성재 금난수 등과 논도 강학을 하거나 시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다. 특히 구백담과 금성재는 청계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퇴계의 문하에 다시 들어가 퇴계문학의 수제자가 되었던 인물인 바. 퇴계 선생이 강학을 위해 지은 도산서당이 1560년에 건립되었던 점을 생각하면, 청계의 초기의 강학활동은 안동의 선비문화형성에 그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보면 안동지방 초창기의 사학교육에 끼친 청계의 공적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 청기서당의 창건
청계는 만년에 안동 인근지역인 영해의 청기현으로 이주한 뒤에 농토를 새로 개간하여 대규모의 농장을 일구어 치산에 힘을 쏟는 한편, 여기에다 역시 서당을 건립하였다. 당시 영해지방은 지역적으로 외진 곳이어서 아직 성현의 교화가 미치지 못해 안동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당당히 낙후된 지역이었다. 여기에다가 젊은이들을 교육할 만한 서당하나 없었던 까닭으로, 이 지방의 젊은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학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자라 점차 무뢰배와 같은 처지로 전학하고 있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청예는 이곳에다 자신의 사제를 털어 청기서당을 지었는데, 당시 영해부사였던 양사기는 이와 같은 청계의 교학정신에 감동하여 관가창고의 남은 곡식을 서당의 건립비용으로 선뜻 내어놓고, 아울러 서당의 상량문까지 이어주는 등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다. 이때부터 영해지방은 사방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고, 고을의풍속도 한결 밝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청계는 퇴계학단이 성립되기 이전부터만년에 이르기까지 임하와 영해지방의 청년자제들을 교육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셈이다.
ㅇ 자려 검토와 부연
안동지방에 미친 청계의 논도 강학의 선비정신
한편 청계의 이러한 강학활동은 그 자신에게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자제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그의 둘째아들인 귀봉 김수일(1528~1583)은 부암의 백운정에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집안의 자질이나 향리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넷째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안동부의 서쪽인 서후면 금계의 청선산 아래에다 석문정사를 건립하여 이곳에서 역시 강학의 뜻을 펴려고 한 자 있다. 그리고 막내아들인 남악 김복일(1541~1591)은 중년에 예천으로 이주하여 그곳 금곡의 덕진동에다 금곡서당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 서당은 후일에 정산서원으로 개칭되어 퇴계와 월천을 배향하게 된다. 부친인 청계가 청기서당을 세워 안동선비의 실천 유학적 교학정신을 인근의 영해지방으로 전파시켜 나갔듯이, 그의 아들 남악의 경우도 안동의 학풍을 예천지방으로 다시 확산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셈이다.
안동선비의 전형
청계 김진
오수경(안동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가문과 성장 환경
청계 김진(金璡, 1500~1580, 자;형중(瑩中), 호;靑溪)은 안동의 명가로 알려진 의성김씨 태생이다. 그는 1500년(연산군 6) 임하면 내앞에서 태어나 1580년(선조 13)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관향이 의성이 된 까닭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석(錫)이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 그의 후손들은 의성(문소)에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토성 이족(吏族)이었던 청계의 조상은 고려 말에 이르러 군직과 첨설직을 발판으로 점차 신분 상승을 꾀하다가, 그의 7대조인 김태권(金台權) 대에 이르러 처향인 안동으로 이주하여, 그 아들인 김거두(金居斗) 대로부터 이곳 안동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김거두는 고려후기의 김방경의 4대손서인 안동의 권문세가인 권한공의 외손서로, 공조전서를 역임한 바 있다. 그 손자인 김영명(金永命)은 비록 신령현감이라는 낮은 벼슬을 역임하였지만, 장가를 세 번이나 들어서 중앙관료인 재경사족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즉, 광주이족에서 15세기 초엽에 문벌귀족으로 급성장한 이지유, 고려 말의 세족에서 15세기 초엽에 남쪽으로 낙향한 김무, 그리고 역시 고려 말의 이족에서 15세기 초엽에 문종의 사돈이 되어 국부가 된 권전의 사위가 되면서 (김영명은 단종과 동서 사이임)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가 바로 청계의 고조이다.
청계의 증조인 김한계(金漢啓)는 문종 때(1438년)에 성삼문, 하위지 등과 동방 문과급제하여 단종 때 집현전 학사와 지승문원사 등을 역임하는 등 고위관료직에 오른 인물이었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1455년)하여 즉위하자 병을 핑계삼아 다시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그리하여 이 가문은 결국 영남의 대표적인 사림파 가문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청계의 조부인 성균진사 김만근(金萬謹)은 안동부 임하현 일대에 강력한 재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해주오씨인 병절교위 오계동의 사위가 되어 비로소 내앞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때 그는 처가로부터 임하현 일대의 전답을 비롯하여 많은 노비와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는데, 김진을 중시조로 모시는 안동의 청계파가 이곳 내앞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결국 처가로부터 상속받은 경제적 기반이 밑받침이 되었던 셈이다. 한편 청계의 부친 김예범(金禮範) 역시 청송 일대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가졌고 그 당시 벽동군수에 재임 중이던 영해신씨(평산신씨) 신명창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된다.
청계의 부친인 김예범 역시 청계와 마찬가지로 내앞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은 병절교위라는 하급 관료직에 머물렀지만, 2대에 걸쳐 마련한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발판으로 안동의 재지사족으로 급부상하면서 주위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치가리재(治家理財)에 능하여 저택을 크게 꾸미고 정자를 세워 문화생활을 향유하였고, 자녀들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 향촌사회의 토착양반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상을 통해 그의 가문과 성장환경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 청계의 가문은 고려 말에 지방에 토착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토성의 지방관료계층에서 일약 신분상승을 하여 중앙의 관료계층이 되었다가 세조의 왕위찬탈 때에 일시적으로 다시 낙향하게 된다.
그러나 증조부 김한계가 문과급제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중앙관료에 임명되면서 다시 재경관인의 대열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찬탈을 꾀하는 과정에서 단종세력으로 지목된 증조부 김한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낙향하면서 청계의 조부 김만근과 부친 김예범은 다시는 벼슬에 나갈 뜻을 버리고 이곳 천전에 은거하고 말았다.
주지하듯 15세기의 영남사림파는 이씨왕조의 건설에 적극 참여하였던 급진개혁세력인 삼봉 정도전 계열의 ‘신왕조파’에 목숨을 걸고 항쟁하였던 포은 정몽주 계열의 ‘불사이군파’와 세조의 왕위찬탈을 불의로 간주하여 재야세력으로 밀려났던 ‘재지사족파’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청계 김진 가문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는 일은 바로 고려말조선초의 이와 같은 영남사림파의 학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청계 김진의 학문연원과 의식, 성장환경과 생활방식 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주변 환경이 고려되고 연구 검토되어야만 가능할 것으로 짐작된다.
ㅇ 자료 검토와 부연
1. 청계 공의 가계를 살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김태권( ? ~1368) ; 고려봉익대부문예부좌사윤이시다. 묘소는 경기도 죽산인데 외손인 신(辛)씨들이 수호했으나, 1579년 학봉 공이 신씨들과 상의하여 묘비를 세우시고, 각처의 자손들이 함께 보존케 했다. 고려조에서 예장(국장)을 했다. 안동김씨 김승고(金承古), 죽산박씨 박인용(朴仁龍)의 사위이시다.
② 김거두(1321~ ? ) ; 봉익대부 공조전서이시다. 고려가 쇄퇴함에 만년에 안동의 풍산현에 이주하여 자손이 안동사람이 된다. 풍산은 공의 외가로서 상낙김씨(사촌김씨, 선안동김씨)가 세거하던 곳이다. 아우 김거익 공은 전라도에 정착한다. 묘소를 잃었으나 1689년 지석이 발견되어 다시 찾았다. 삼국사기 중간본의 발문을 쓰셨다. 문화류씨 류총(柳總)의 사위이시다.
③ 김천(1362~ ? ) ; 진례도도절제사이시다. 안동의 풍산에서 안동 방적동(현제 율세동)으로 옮시셨다. 양촌 권근과 같은 동리에서 살으셨다. 홍주이씨 이처겸(李處謙)의 사위이시다.
④ 김영명(1398,태조7년 ~ 1463) ; 풍산에서 태어나시었으나 율세동으로 옮시셨고, 신령현감 겸 권농판관, 대구도병마단련관이시다. 광주(廣州)이씨 이지유(李之柔), 안동권씨 권전(權專), 광주(光州)김씨 김무(金務)의 사위이시다. 권전은 단종의 장인(국부)이어서 공과 단종은 동서 사이이시다. 단종이 즉위한 해는 1453년이다.
⑤ 김한계(1414~1461) ; 이지유이 외손자이시다. 1438년 성삼문, 하위지 등 동방급제하여 집현전수찬, 지승문원사이시고 경연에 출입하셨다. 단종의 처이질이시다. 세조가 1455년 즉위하고, 1457년에 단종이 승하할 무렵 안동의 율세동으로 돌아오셨다. 초배위 덕산송씨에게는 후사가 없으며, 후배위는 순흥안씨 안보(安堡)의 따님이시다.
⑥ 김만근(1446,세종28년~1500) ; 1477년 진사시에 합격하셨으나 벼슬이 없었고, 학봉 공이 귀해서 좌통례에 증직되시다. 해주오씨 오계동(吳季童)의 사위가 되시면서 처향인 내앞에 정착하시다.
⑦ 김예범(1479~1550) ; 학봉 공의 귀로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으로 증직되시었다. 현재 내앞종가 터에 좋은 집과 정자도 지으셨다고 한다. 현재의 내앞종가는 아니므로 그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입구자로 안동지방 사대부의 집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단양(丹陽)의 망족(望族)인 벽동군수 신명창(申命昌)의 사위이시다.
⑧ 김진(1500~1580) ; 3남2녀 중 장남이시다. 16세 때에 청송에 있던 고모부 권간(權幹)에게 수학(권간은 김예법의 자형이다).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5대손 민세경(閔世卿)의 사위가 되신다. 26세(152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 32세에 금강평 입안 개척. 한 때 내앞 건너 임하의 독산에서 거주하신다. 내앞을 기반으로 인근의 임하, 신덕, 망천, 추월, 사빈, 송석, 선창, 낙연까지 반변천 중상류를 개척. 말년에 영양의 청기를 개척하시어 별업(요사이의 별장)을 삼으시다.
2. 청계 공이 태어나서 자란 시절은 도덕이 물란하고 정국이 불안했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고 약 100여 년 동안은 왕조의 계승과 찬탈로 매우 소란했으나 성종이 등극하고, 성종의 도학정치에 조선은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훈구세력이 발호하여 1476년경에는 훈구세력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고 이에 사림세력이 등장한다. 1480년대의 중반이다. 밀양 출신의 길재 학통을 이어받은 밀양의 김종직이 중앙에 등장하면서 현풍의 김굉필, 함양의 정여창, 청도의 김일손 등이 포진되어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 균형이 가능했다. 도학적 성리학자들이 정계에 진출하니 학문과 정치가 하나로 묶였으며, 유교를 장착시켜 민간교화에 성공했다. 1478년 ‘동문선’이 편찬되고, 1481년 ‘동국여지승람’, 1485년 ‘동국통감’ 개찬, 1485년 ‘경국대전 완성’, 1488년 유향소가 부활되었으며, 1593년 ’악학궤범‘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성종 자신이 후기에는 유흥에 빠져들어서 야행(음행)을 즐기니 풍속이 어지러웠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거듭되는 학정으로 1498년에는 무오사화가, 1504년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신진 사림과 훈구세력, 궁중세력과 부중세력의 힘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1500년. 연산군 5년에 청계 공이 태어나신다.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중종을 등극시키니, 훈구세력인 반정세력의 힘이 과대해 지게 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1515년 조광조가 등용된다. 1517년 본격적인 개혁이 단행되어 향약이 실시되며, 훈구파의 반대 속에 1519년 현량과가 도입되고,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훈구파에 의해 축출되며, 이들의 과격한 개혁이 오히려 역작용을 빚어낸다. 이후 사림파는 힘을 잃게 된다.
1545년, 인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9개월에 불과하고, 1545년 7월에 명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12세여서 중종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3. 재지사족들과의 혼인을 하였다.
양반은 양반끼리 혼인을 했다. 청계 공의 가계도 그랬다. 장가를 가면 그대로 처가에서 눌러앉아 생활을 하거나, 그 자녀가 거기서 길러져 손자가 태어날 때까지 생활하는 시대였다. 초선초기까지도 그랬다. 김태권 공의 처향이 안동의 풍산이므로, 김거두 공은 외가인 풍산으로 이주하신다. 김거두 공의 외가는 전외가가 풍산의 안동김씨(상낙김씨)이고, 후외가는 죽산의 죽산박씨이다. 김만근 공이 내앞에 정착하시게 된 것도 그의 처향이기 때문이다. 공의 아들은 당연히 외가에서 자라서, 김예범 공도 차자이지만 내앞에 정착하시는데, 공이 처향인 청송으로 가시지 않고, 외향에 정착해서 내앞의 재지사족으로 발전할 기틀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내앞파를 재지사족으로 정착시킨 분는 청계 공이시다.
4. 청계 공이 물려받은 재산은 많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의 기록을 보면 청계 공이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풍부한 생활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당시는 재산상속, 봉작상속, 음직상속, 제사상속 등에서 남녀나 장차자의 차별이 없었다. 특히 노비 상속에는 철저한 균등분배이었으며, 토지는 조선중기 이후에야 봉사를 위한 것을 제외하고 균등하게 분배했다. 또한 무남독녀이면 그 재산은 딸(여서)에게로 모두가 상속된다.
김태권(2남 중 차남) - 김거두(2자2녀 중 장남) - 김천(독자) - 김영명(2남 중 차남) - 김한계(4남4녀 중 장남) - 김만근(3남3녀 중 장남) - 김예범(2남2녀 중 차남) - 김진(3남2녀 중 장남)이어서 청계 공이 받은 재산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청계공이 받으신 분재기는 노비만 분급되고, 전답은 예범 공이 작고하신 뒤 5남매 구두 분배가 이루어졌으므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청계 공이 예범 공에게 받은 노비는 68구 중 13구이다. 공은 처가로부터도 받은 재산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처질인 민추 공이 일찌기 고아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으므로 데려와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기르고 배우게 했다. 공의 재력은 자수성가로 보아야 한다. 청계 공의 적자녀는 5남3녀이고, 서자녀는 1남2녀이다. 자수성가한 공의 탄탄한 재력은 공의 자제들이 대성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그리고 자녀 11남매에게 재산을 균분하시었다면 내앞 종가의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다. 공의 장자인 약봉 공은 아드님이 없으셨으므로 양자로 승중된 대박공에게 많은 재산을 주시었는데, 내앞파는 청계 공으로부터 제사상속, 재산상속이 종가 위주로 되었고, 내앞 종가는 청계 공의 유훈으로 500 여 년이 넘도록 공의 자손들이 타 문중으로부터 천금쟁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종통을 세우신 분이시며, 내앞파(천전파)는 내앞종가를 중심으로 뭉치고 단결하고 화합하여 군자나 처사로서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만드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