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홍아, 수진아 역사 공부 하여라 3
수홍이, 수진이가 들으면 참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병호시비다. 屛은 屛山書院을 뜻하고 엄마네 조상인 西崖 柳成龍을 모신 書院이다. 虎는 虎溪書院의 약칭인 동시에 우리집 검제측을 말하는 지칭이다. 그러니까 병호시비란걸 쉽게 이야기 하면 엄마네 집과 아빠네 집이 싸웠다는이야기다. 그것도 처음엔 서로 자기 조상의 位牌를 왼쪽에 놓아야 한다며. 엄마네 쪽에선 서애가 영의정을 지냈으니까 당연히 왼쪽이라고 주장하고, 우리집 鶴峰후손은 나이도 네 살이나 위이고 학문적으론 상대가 안된다고 우기며 싸웠다. 1620년에 시작된 분쟁은 250여년이나 끈 셈이다. 그만큼 그때를 살았던 우리들 조상들로선 심각한 문제였다. 시작은 廬江書院에 退溪를 주벽으로 하고 서애와 학봉을 봉안하는 과정에서 발단이 되었다. 그게 1620년, 17세기 초엽이었다. 그뒤 이 여강서원이 숙종 2년(1676)에 왕으로부터 호계서원이란 액자를 하사받아 嗣額 서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부르길 병호시비 혹은 鶴崖是非, 崖鶴是非라 했다.
알고 보면 검제(金溪)와 河回는 서로 싸울래야 싸울수 없는 사이다. 학봉과 서애는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고 同門 修學한 사이인데 학봉은"서애는 나의 師表"라고 말했고 서애는"나는 학봉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서로 존경 했다. 또 퇴계는 학봉에게 傳統箴인 屛銘을 써 주었고 서애가 가르침을 받으러 처음 퇴계를 찿아 왔을 때 "이 사람은 하늘이 태어나게 했구나, 他日(훗날) 수립하는바가 반드시 클것이야"라며 극찬을 했다. 더구나 학봉이 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와 倭必不來라고 復命했다가 막상 壬亂이 터저 일본이 처들어오자 위기에 처했다. 이때 학봉을 구해준 사람이 左議政으로 있던 서애다. 또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혼인을 통해 핏줄로도 얽혔다. 하회사는 서애후손은 拙齋 자손인데 그졸제가 검제로 장가를 오셨다. 상주에 가서산 柳袗의 후손을 제하면 모두 검제 外孫들이다. 문제는 학봉이 29살 때 퇴계가 써주었다는 병명을 검제후손들은 首弟子로 인정한거라고 확신했고 학봉계열의 여러학자들도 이를 뒷받침하는 저술을 남겼다. 심지어 柳致 같은 학자는 학봉이 납실(猿谷)이란곳에 거주할 때 병명을 받았다고 그 자리에 병명서원 건립을 추진 하기도 했다. 학봉제자들이 하회를보고 서애는 再造之恩의 영의정을 지냈고 망한 나라를 새로 이르킨 명재상이었음을 기리며 당연히 위패를 왼쪽에 놓으시라고 사양하고 서애 제자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 나이도 학봉이 네 살 위시고 퇴계로부터 수제자란 인증으로 屛銘까지 받으셨으니까 말할 것 없이 위패를 왼쪽에 놓으시라고 우겼으면 참 아름다운 전설로 내려 올뻔 했다. 그러나 17세기 당시를 산 제자들은 굳이 자기 스승의 위패를 왼쪽에 놓아야 한다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다. 그래서 타협한게 당시 영남남인의 영수인 愚伏 鄭經世의 裁定을 받기로 했다.
우복 정경세(1563-1633)는 서애의 수제자로 大提學과 왕자의 師父를 지낸 당시 영남학파의 제일 어른 이었다. 우복은 서애를 상석인 왼쪽에 모시라고 재정했다. "年齒의 差는 肩隨에 미치지않고 爵位의 차는 絶席에 있다."라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나이차 네 살은 별것 아니지만 관직으로 보면 영의정과 관찰사는 비교할수없이 큰것이란 말이다. 이 우복의 재정에 학봉제자들은 불만이 많지만 일단 받아드리므로 1차전은 서애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뒤 鶴峰,西崖,寒岡,旅軒 4賢의 陞廡 문제로 1805년 2차 시비가 일어나기까지는 18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정치,경제,사회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정치적인 측면에선 老論인 畿湖학파는 湖洛논쟁을 거치면서 정통학맥임을 자처하던 湖論(이 경우 湖論은 병호의 虎論이 아니고 호수 호자를 쓰며 韓元震,尹鳳九등이 주도함)이 사라지고 洛論을 대표 하던 李柬, 李縡, 金元行 계열이 학계와 정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正祖이후 少論도 배제되면서 노론의 전횡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영남남인은 철저히 권력에서 소외되었으며 屛虎 양측 중에서도 특히 屛論측이 타격을 심하게 받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15세기부터 영남지역의 농업발달이 학문의 진흥을 가져왔는데 이양법의 보급등 평야지대의 급속한 발전이 산간지역이 많은 영남의 상대적 우위를 잃어가는 현상을 불러왔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嫡庶의 차별이 가장 혹심했던 慶尙左道지역에서 노론의 사주를 받은 庶孼들이 조직화 하면서 도전을 시도했다. 이와동시에 노론은 영남을 효과적으로 분열, 무력화하기위한 갖은수단을 다 동원했다. 특히 1728년에 일어났던 李麟佐의 亂 같은걸 노론은 아주 교묘히 이용, 경상 上下道와 南,北人,少論의 싸움을 첨예화 시켰다. 또 영남의 서얼은 물론 신흥노론 세력을 집중적으로 부식하기위해 애를 썼다. 예를들면 1719년 慶州에다가 宋時烈을 모시는 仁山書院(남인들의 서얼세력동원), 尙州에다가는 1702년 宋浚吉을 모신 興巖書院, 1708년에는 金尙容,金尙憲을 배향한 西山書院, 1738년 안동에다가 김상헌서원(남인과 격렬한 싸움을 일으킴)등 많은 서원을 세워 끝없는 공격을 남인에 가하므로 중앙에의 관심을 못돌리게 효과적으로 남인들을 옥죄었다. 이에 따라 사소한 이해관계나 견해차로 날카롭게 대립한 현상들을 묶어 사학자들은 膷戰이라 부른다. <羅巖隋錄>에 나타나는 하회의 겸암.서애파의 시비, 하회와 미동 김씨 사이의 알력, 도산.병산서원 사이의 갈등등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게 다 이 현상들이다. 그결과 더더욱 생존을위해 관심을 향촌사회의 이해관계에 집착하게 되고 조그마한 문제에도 대립, 갈등을 격화시켰다. 영남남인은 정조때 京南(寒岡 鄭逑, 許眉 , 星湖 李瀷등을 거쳐 丁若鏞, 丁若銓, 權哲 身등 近幾地方에 뻗어난 퇴계학파를 京南이라 부른다)인 樊巖 蔡濟恭을 매개로 정치에 접근할려고 시도한다. 정조도 노론을 견제하기위해 영남남인을 외곽세력으로 키울려고 애썼으나 그의 죽음으로 그시도는 무산되고 노론은 영남남인을 효과적으로 향촌지배세력으로 묶는데 성공한다. 일본인사학자 <槽谷憲一>의 논문에 당시의 남.북인의 정계진출비율을 8.3%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치는 노론의 완전한 장악이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노론의 핍박 속에서도 퇴계학파중 학봉파를 대표하는 호론은 세나 학문적 깊이에서 병론을 압도 하게되고 거기에 따라 퇴계의 嫡統을 강하게 주장하며 당연히 우리것이란 인식속에 1805년 2차 병호시비를 맞게 된다! .
文廟란 영어로하면 Shrine 혹은 Pantheon이라고 표현하면 너희들이 이해하기 쉬울까. 이조시대 최고의 祠堂으로 조상이 여기에 모셔진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 이었다. 여기엔 Confucian의 원조인 孔子를 비롯 그 제자70명, 네 聖人을 중심으로 10哲, 宋朝의 6賢, 李朝시대와 중국의 유학자 111명이 配享되어 있다. 1805년 영남유림에서 학봉 金誠一, 서애 柳成龍 한강鄭 逑, 여헌 張顯光등 4賢의 문묘종사를 위해 그 자손 및 제자들이 서울에 모여 청원을 위한 솟장을 쓰면서 누구이름을 먼저쓰느냐는 문제 때문에 또 싸움이 시작 되었다. 학봉파는 나이순서를 주장했고 서애파는 이미 그 문제는 1620년 여강서원에 모실 때 우복 정경세의 재정으로 서애를 상좌에 놓은 전 예가 있다고 대응 했다. 서로 양보 하지않으니까 한강, 여헌파도 학봉이 위라고 虎論을 편들었다. 왜 그러냐 하면 앞에 설명 한데로 학봉파의 數나 학문적 심도가 屛論을 압도한 시점에 와 있는데다가 寒岡, 旅軒 두사람 다 벼슬을 싫어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한 이들이었으니 벼슬을 가볍게본 학봉파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屛論 측은 노발대발했다. 솟장을 독자적으로 내며 서열이 바뀌었음을 지적 했다. 같은 일을 가지고 두가지 솟장을 받아든 노론정권은 얼시구나 하고 둘다 받아드리지 않았다. 한강과 여헌측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듬해 11월 대구 伊江書院에 모여 학봉과 서애측을 빼고 자기들만 陞廡 상소를 내기로 결의하고 儒林에 通文을 돌렸다. 이를 접수한 학봉과 서애측은 虎溪書院에 급히 모여 대책을 상의 하며 한강과 여헌측을 규탄하는 통문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또 양측이 결정적으로 싸움이 붙었다. 통문을 쓴 사람은 虎論의 柳晦文이었는데 서애파 주장은 처음에 서애,학봉순으로 되어 있었는데 밤중에 학봉,서애로 바꿔치기 했다고 흥분, 병론의 柳亨春이 그 통문을 찟어 버렸다. 학봉파 주장은 처음엔 순서가 드러나지않게 네 선생 이라고 썼는데 모임에서 衆論이 차례로 明記하는게 좋겠다고 협의해서 학봉,서애 순으로 썼다고 했다. 문제는 통문을 찟은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호론측에서 柳亨春에게 文罰을 가했다. 문벌이란 당시로선 선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제재 방법이었다고 한다. 선비로서 해서는 않될짓을한 사실을 쭉적어서 서원 벽에 걸어놓는 것이었는데 이에 발끈한 병론측은 절교를 선언하고 호계서원을 떠나 버렸다. 역사학자들은 병론이 자발적으로 떠난게 아니고 호론한테 勢에 밀려 축출 당했다고 보고 있다. 그뒤 병론측은 모든 문제를 병산서원에 모여 처리했다. 호론은 호계서원을 독차지했다. 여기서 屛虎란 말이 생겨난거다.
일이 여기 까지 가버린 원인은 앞서 이야기 한데로 정치에선 병론측이 우세하고 학문에선 호론측이 한수위인데 노론의 전횡에 밀려 병론측이 상대적으로 위축 된 반면 호론은 학맥이 점점더 커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병론측에 가담한 가문은 퇴계자손 중에선 上溪, 渼洞 金씨, 우릉골 宣城 李씨, 가일 權씨, 愚山의 晉州 鄭씨등 단출한 반면 虎論측 멤버는 엄청 많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퇴계후손 으로 下溪, 韓山 李씨, 全州 柳씨,닭실 權씨, 光山 金씨, 高靈 金씨, 靑道 金씨, 載寧 李씨, 固城 李씨, 光州 李씨, 永川 李씨, 산운 李씨, 英陽 南씨, 南平 文씨등 이다. 그러면 퇴계학파는 도데체 어떻게 이루어 져있는지 궁금해 지는데 대게 略述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陶山及門諸賢錄>이란 퇴계제자 명단엔 260여명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栗谷 李 珥, 高峰 寄大升, 蘇齊 盧守愼, 지제 洪仁祐등 갈라져 나간 이들을 빼고 뒷날 학맥의 師承 관계에 의한 제자를 거느리고 祖師로 된사람은 서애, 학봉, 한강 세사람을 꼽는다. 이3명 외로는 趙 穆 李德弘, 黃俊良, 權文海, 曺好益,, 吳 健, 朴光前, 丁時翰등이 유명한 학자들이다.,
서애파는 鄭經世, 柳袗, 柳元之 ,柳世鳴, 柳後章, 朴遜慶, 鄭宗魯, 柳尋春, 柳疇睦 이런 순으로 학맥이 흘러 내려 가는데 보시다시피 家學으로 전해 내려간다. 정종로는 정경세의 6대 손자이다. 류 진은 서애의 아들이고 류원지는 손자이며 류후장은 류원지의 손자이다. 류심춘은 류 진의 6대손이고 류주목은 류심촌의 손자이다. 또 류 진, 정경세, 정종로, 류심춘, 류주목은 尙州에 살았다. 그외 정도응,辛百源,李 埈, 李 集, 柳 規등도 서애계열 학자들이다.
학봉파는 張興孝, 李玄逸, 李 裁, 李象靖, 南漢朝, 柳致明, 金興洛, 金道和, 李震相, 郭鍾錫, 權相翊 金秉宗, 曺兢燮, 李承熙 朴章鉉, 河謙鎭 李炳憲, 金昌淑, 金 榥, 宋贊植 등이 있다. 특징은 퇴계학을 집대성 했다는 대산 이상정에서 高弟들이 기라성 같이 있으며 병론 학자들도 보인다. 柳尙春, 柳謙祚, 柳泰春, 鄭宗魯, 李源朝도 병론인데 大山에게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호의 대립이 격화 되지 않았다는 원인도 있고 또 정종로 같은이는 외조부가 호론의 金道和다. 大山 李象靖의 수제자인 柳致明의 大坪約案에 오른이만 550명인데 문과 급제자만 11명, 생원,진사가 34명 나왔지만 屛論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 .이때부터 屛虎의 싸움이 치열 했다는 증거 이다. 김흥락의 제자 명단인 輔仁契帖에 오른이만 707명, 金道和 文人錄엔 322명 이나 올라있다. 이러니 虎論이 數에서 압도 했다고 내가 자꾸 쓰는 이유이고 虎論이 퇴계의 학통은 당연히 鶴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寒岡 鄭逑의 학맥은 특이하다. 우선 본인이 퇴계 뿐만 아니라 南溟 曺 植의 문하에도 드나들었다. 또 그의 학맥이 近畿學派의 開山之祖라는 眉瘦 許 穆으로 내려가서 영남이 아닌 서울을 비롯한 근기지방에서 뻗어난다. 그래서 이를 京南이라 부른다. 즉 京은 서울을 뜻하니까 서울 쪽의 남인이란 뜻이다. 또 미수에서 그 유명한 星湖 李 익으로, 거기서 우파는 安順庵 , 黃下廬, 許性薺으로 흐르고 좌파는 권녹암을 거처 정약용, 정약전 등으로 학맥이 흘러 간다. 천주교도 이계열을 타고 이땅에 들어오고 實學도 이줄기에서 꽃피운다. 결국 퇴계학파는 정치에서 노론에 밀려 학문 밖에 할것이 없었다는 여실한 증거다.
자 그럼 제일 치열했던 3차 병호시비는 어떻게 전개 되었나 살펴 보자. 3차는 1812년에 발생한다. 屛論들은 몸만 병산서원으로 갔지 西崖의 位牌는 여전히 호계서원에 모셔져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다 大山 李象靖의 위패를 같이 모시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물론 호유측이 주도했다. 대산 이상정은 牧隱 李 嗇의 후손으로 원래는 서울 살았는데 고조부인 李弘祚가 광해군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환멸을 느끼고 식솔을 이끌고 외손인 西厓의 연고를 따라 안동으로 내려온 집안이다. 오늘날의 퇴계학이 일본, 미국, 독일, 대만, 심지어 모스코바까지 세계 수십군데에 연구소가 생겨 난데에는 大山의 功이다 . 그만큼 大山의 학문적 깊이나 업적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1812년 禮安鄕校에서 都會를 열고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合祀 하자고 결의 했으나 병론측이 극력 반대 무산되고 말았다. 병론측 주장은 호계서원에 위패를 모실곳이 앞이 좁고 뒤가 넓어 또하나의 위패를 추가하기엔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거 였다. 이는 앞에 내세우는 구실이고 대산을 追享 하면서 호론측이 이기회에 鶴峰을 上席에모시겠다는 의도로 해석 했다. 또 대산의 遺稿중 <退溪書節要>의 출판을 둘러 싸고 병론과 대산 제자,후예들과 격렬한 시비가 있었다. 퇴계서절요 본고에 언급된 西厓를 脚註에서 豊原府院君을 豊山府院君으로 誤記했고 謙庵은 각주도 없이 홀대했다는게 병론측이 노한 이유이다, 이의 시정을 대산 제자들이나 자손들이 받아드리지 않았다. 스승이 직접 쓴글을 감히 우리가 손 댈수 없다며. .
특기 할 것은 퇴계학파가 대산에서 확 분화되기 시작한다. 정통파인 유치명 계열에서 보면 이단도 생겨 난 것이다. 대산 제자중 우뚝한 5명을 꼽으라면 첫째가 당연히 정제 유치명이고 성주의 李震相, 칠곡의 張福樞, 창녕의 曺兢燮, 김해의 許 전 이다. 이중 이진상의 <心卽理說>이 퇴계학설에서 벗어 나 있다. 문집을 도산서원에선 반송하고 상주 향교에선 불태우기도 하고 許薰은 이진상의 寒州文集의 교열을 거부했다. 이진상의 제자가 俛宇 郭鍾錫이다. 또 이제자가 심산 김창숙이다. 빠리장서사건이 이 계열에서 일어 났고 내 개인적으론 이진상, 곽종석 계열을 무척 좋아 한다. 그 책들이나 메모가 미국에 있어 이유는 나중에 추가 하마. 우리집은 철저한 유치명 계열이다. 우선 핏줄로도 大山의 高孫女가 내 고조모다. 고조모의 오빠가 유명한 학자 참판 李敦禹다. 또 수정제 柳鼎文의 외손자가 내 고조부다. 수정제라면 19세기 초엽 안동동부학단을 이끌었던 柳範休의 아들로 양대다 큰족적을 남긴학자다. 유명한 일화로 죽어 유림의 만장만 20리 따랐다는 내증조부의 사촌 柯山 金형模가 곽종석이 찿아오니까 설렁줄을 당겨 머슴방에 재워 보냈다는거다. 고종 년간에 유명했던 학자가 면우 곽종석과 艮薺 田 愚 이다. 곽종석은 高宗을 독대까지 하며 나라를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한다고 직언 했다. 간제 전 우는 신기리장수의 아들로 학문을 이르킨 특이한 학자인데 신분 때문인지 현실은 아주 외면하고 나중엔 계화도로 숨어들어가 소위말하는 界化學派를 성립시켰다. 또 서산 김흥락은 우리 종손인데 下人이 <黃遵憲私擬書>와 유길준의 <西遊見聞錄>을 어사가 보내왔다고 아뢰자 아무 대꾸도 안하고 장지문을 닫아 버렸다는거다. 이런 원칙주의 영향으로 뒷날 輔仁契帖에 올린 707인의 제자들 대부분 항일전선에 뛰어들고 해방뒤 건국훈장만 60명 받고 우리집안만 12명이다. 종가재산 18만평 다 팔아 독립자금으로 들어갔다. 상해임정 국무령을지낸 李相龍, 모진 고문 끝에 그 너덜너덜한 시신을 卍海가 거두었다는 一松 金東三장군, 빠리장서사건의 핵심멤버 였던 이중업, 송준필등 다 꼽을려면 한량이 없다 .이렇게 우리집 조상들은 원칙에 살았고 의에 매달렸다. 그럼 이야기가 옆길로 갔는데 다시 점점더 치열하기 시작하는 병호시비로 돌아 가보자.
1812년에 시작된 3차전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호계서원이 훼철 되므로 일단락 짓는데 이 59년간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고 그이후 길게보면 해방을 맞을 때 까지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노론정권이 그냥 두고 볼리도 없었다. 大山追享의 여진이 길게 이어진 가운데 1816년 12월말 호계서원안의 위패를 옮겼다고 병론측이 들고 일어났다. 李謙淳의 투서로 발단된 이사건은 그진위는 지금 알길이없다. 병유들은 호계서원으로 달려갔고 서애의 위패가 北壁으로 가있는걸 확인했다고 한다. 병유들은 다음해 1월18일 도회 개최를 儒林에 통지했다. 이에 대해 虎儒들은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위패는 원래 북벽에 백수십년간 그 자리에 있던거고 병론측이 대산추향을 방해하기위한 야비한 트집이라고. 虎儒들은 屛儒보다 하루 앞당겨 1월 17일 都會를 열자고 유림에 알렸다. 도회는 양일간 서로 동원 경쟁을하며 1천여명의 선비들이 그좁은 호계서원 계곡을 매웠단다. 서로 논쟁만 있었지 진실은 밝혀진게 없다. 병유들은 경상도 관찰사 金魯敬에게 호소했다. 위패가 옮겨진걸 찿아내 처벌 해달라고. 김노경은 간단하게 위패를 원위치 하라고 판결했다. 호유측이 발끈했다 .병유측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가를 조목조목 따져 관찰사에게 반론을 제기 했다. 노론 관찰사는 남인들이 싸우면 싸울수록 즐거웠다. 이번엔 당신내들 싸움엔 개입하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병유들은 몇 번 도회를 더열어 복원을 주장했고 호유측은 꼼짝도 안했다. 어쩠던간 魯鄒之鄕으로 불리는 안동 유림의 자존심만 여지없이 구겨나갔다. 병론의 병호시비에 관한 기록인 <廬江誌>에 보면 1817년3월13일 경상도 관찰사 노론의 김노경이 순흥부사, 풍기군수, 창락찰방, 봉화현감을 데리고 도산서원에 나타나 원장 李 淳과 호론의 李泰淳, 李家淳을 노골적으로 공권력을 동원 협박 한다. 이 김노경은 秋史 金正喜의 아버지다. 결국은 병유는 정치력을 동원 호유를 압박했고 호유는 이에맞서 學緣에 근거한 탄탄한 조직력으로 대항 했다. 그럼 우선 호론이 어떻게 조직의 저변 확대를 해갔나를 살펴본 다음 병론이 대원군의 등장과 함께 정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柳厚祚를 통해 한 일들을 더듬어 따라가 보자.
호론은 先賢을 추모하는 사업이나, 선배학자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사업, 사당을 건립 하고 정자를 세우는 일은 물론 끊임없는 講會(학술 세미나)를 통해 내부를 결속시켜 나갔다. 柳範休 주도로 金是溫의 景節祠를 건립하는데 몇 년에 걸쳐 온 정력을 경주한다. 김시온은 우리 현조인 靑溪公의 증손자로 원래 金守一의 자손이었으나 손이 없는 金克一집으로 양자를 들어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서 의병을 조직 맹활약했고 그뒤엔 오로지 經學 연구에 몰두 유림의 존경을 받는 깨끗한 삶을 살다간 師表였다. 1823년3월18일 경절사 낙성에 1000명의 유림이 모였고 모두 다녀간 儒生이 1800명이란 기록이 나온다. 이는 내가보기엔 좋은 단결 훈련 이고 일종의 변형된 정치활동 같다. 이어 1834년엔 경절사에 金學培를 追享하는 운동도 일어 났다. 그는 예조좌랑을 거쳐 經書校正官으로 일했는데 李端夏, 金萬重과 더불어 字學에 일인자로 추앙 받았으며 자기 字 天休를 딴 休體를 남긴 書藝의 대가이기도 하다. 학술적인 측면에선 1827년 유치명이 <대평약안>을 만들면서 定薺學派의 성립과 동시에 활발한 講會등 통해 학문적 깊이를 넓혀 나간다 .강회 기록을 쭉 훌터 보면 우리 직계조상들이나 外祖들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定薺派는 大坪約案 가입 儒生이 너무늘어 나니까 1839서 1844년까지 등록 중단도 했다가 1845년 다시 등록을 재개한다. 1847년 가을 <大山實記>를 간행하자 또 양측의 충돌이 시작된다. 병론측에서 柳相祚가 앞장 섰는데 특히 그의 아들 柳進翼등 150여명의 병유가 10월15일 모여 8개 항목의 부당성을 지적, 고산서당등 호론계 서원에 통문을 발송한다. 11월28일 상주 道南書院에서도 병론측이 모여 통문을 작성 호론측에 보낸다. 결국 1848년 1월15일 도회를 소집, 병론에선 류진익, 柳厦祚 호론에선 柳致儼, 金邁洙등이 만나 조정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2월9일에 다시 시도 했으나 또 실패, 급기야 2월19일엔 병유들이 유치명 집 뜰을 3일간 점거한 끝에 도회를 열어 柳祈睦, 柳進祚등이 대산실기 수정과 서애위패를 원위치로 돌리라고 주장 했으나 柳致明, 李晩慤등이 한마디로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고 거절 했다. 그해 12월에 유치명은 자기의 주장을 정리 유림의 여러 학자들에게 돌렸다. 이처럼 유치명 시대에 접어 들어 병호 분쟁은 한없이 치열해졌다. 아울러 호론들은 학봉이 적통이란걸 기정사실화 하기위해 학봉이 29세때 퇴계로 부터 받았다는 屛銘을 천착했다. 大山 李象靖은 <屛銘發揮>를 쓰고 李野淳은 <屛銘圖> 柳致儼은<屛銘發揮圖>를 그렸다. 병명이 무엇이냐하면 퇴계가 1566년 학봉을 위해 堯,舜,禹,湯,文王,武王,周公,孔子,朱熹까지 心學의 道統을 적어 준거다.
이러다가 1863년 대원군이 등장하면서 정세는 확 일변한다. 대원군은 초야에 있을때 영남을 주유했다. 그때 상주 류진의 愚川派 종손인 柳厚祚집에 들러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영남유생들과 교류한다. 의성의 申錫祜집에 들렀다가 의기가 맞아 許交도 하고, 경주 양동 無添堂과 봉화 진양 강씨 집엔 현액도 남겼다. 낙파 류후조는 40세에 司馬試, 61세 文科 급제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고종3년에 右議政이되고 5년에 左議政이 되었다. 발탁 인사였다. 대원군은 정권은 잡았으나 지지기반이 허약했다. 노론일부, 조대비파, 서얼, 중인층등이 고작이었다. 남인의 협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집권10년간 기록을 보면 判書 이상엔 京南(서울등 근기지역 남인)은 12명 기용했으나 영남남인은 류후조와 星州의 李源祚만 기용했다. 둘다 屛論이었다. 北人은4명 기용했다. 인사를 이렇게 하면서 남인들의 지지는 몹시 갈망했다. 그래서 분열된 京南을 먼저 保合했다. 화해하는걸 그때말로는 보합이라했다. 경남중에서 蔡濟恭손자 蔡東述과 직각 洪殷鎬 사이의 오래된 갈등을 강제조정하고 龍洲 趙 형의 자손(교리 趙濟華)과 愚潭 丁時翰의 자손 사이 멀어졌던 것도 봉합했다. 병호 양측에 대한 보합도 대원군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羅巖隨錄(1870년8월 77쪽)에 나와있는 다음 글을 한번 보자.
"영남의 鄕論은 안동이 宗長이다. 그러나 남인들이 京南들은 蔡(채제공)니 洪(홍양호)이니 하고 영남에선 屛이니 虎니 하니 모두 좋지못한 일이다. 설혹 원수사이라 하더라도 우리집에서부터 혐의를 해소한 뒤라야 모두가 이를 모방 할 것이다. 아직 和協하였다는 보고가 없다. 영남의 병호는 그들이 비록 어렵게 말하나 나는 지극히 간단하다. 지금 경향이 화협하니 이和氣를 맞이하여 임금에게 복이 돌아가게 하고저 한다. 편지가 도착한후에 안동부사는 몸소 해당 서원에 나가 양쪽 사람들을 불러 이편지를 보인뒤 병호시비가 일어나게된 초기의 오고간 文籍들을 모두 모아 올려 보내고 그가운데 서로 걸려 말하지 못한 것은 날을 잡아 和會하여 시비를 가마득한 먼 옛일로 붙여라. 그리고 그뒤부터 다시 好意를 맺으면 이는 人和의 근본이 된다. 인화한 연후에야 가히 元子의 탄생을 바랄수 있다. 금일 이말은 体天行道에서 나온 일이니 여러 선비들에게 曉諭하여 스스로 忠逆이 큼을 헤아리게 하라. 이러한 뜻을 장차 류후조에게 편지 쓸려고 한다. 류후조 역시 내가 원자의 탄생으로서 이말을 하면 뛸 듯이 기뻐 할 것이다. 내가 이일을 거론하는 것은 오랫동안 경영 한 것이다. 한번 발설 한후에 그만 둘수 없음을 잘 알 것이다." 이처럼 대원군은 공권력과 류후조를 통해 병호시비를 다루고 있다. 그럼 洛坡先生文集 卷1에 남아 있는 柳厚祚의 글을 보자.
"1870년 7월 안동부사가 병산서원에 내린 帖紙를 보니 병산.호계서원에 소속된 각 문중 유생들을 이달 27일 호계서원에 모으고 관에서도 그때 참석한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합하께서 어떤 합당한 대책을 시달한 것이 있으리라 짐작됨니다. 1866년 봄 제가 병산.호계 양쪽의 보합한 사실을 알리온봐가 있어서 합하께서도 유념하신 것이 있으시어 沈東臣 안동부사에게 교시까지 있었으나 8월 제가 중국에서 돌아와 보니 아무런 결정이 없었습니다. 들으신바가 무엇이었으며 통촉하신바가 무엇이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비록 병산서원쪽 사람이오나 保合하는 일에 있어서는 많은 고심을 하였으니 어디까지나 사심이 아닌 公道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위의 글에서 병호의 보합은 대원군과 류후조와 공권력 만에 의해 모두가 화평해야 元子가 탄생한다는 논리로 밀어 붙였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1870년 8월27일 호계서원 에다가 호유 600명과 병유 400명을 모아 대원군의 지시를 전하면서 안동부사가 보합을 시도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대원군은 크게 노했다. 9월에 류후조와 안동부사에게 다시 보합을 지시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안 까지 언급했다. 대원군은 판서 최우형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리며 류후조의 역할에 대해 크게 실망 한다고 말한다. 나암수록 9월22일자 79쪽에 보면 대원군은 보합이 안되는 이유를 병유들이 겉으로는 자기말을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호유를 이기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최판서에 적고있다. 그러나 나는 대원군이 호유와 접촉이 있었나 하고 뒤져 봐도 흔적을 보지 못했다. 오로지 류후조와 공권력만 동원 했다. 그뒤 병호간의 보합은 강권에 의해 겉으로 이룩된걸로 나타난다. 나암수록 12월 기록을 보면 1870년 12월 호론을 대변하는 <大山實記>와 병론의 병호시비 기록인 <廬江誌>를 관정에서 破板했다는게 나온다. 그 다음해 10월 류후조는"명령을 받들어 보합한뒤 별다른 일" 없음을 보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화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柳道性의 <石湖集> 묘갈명에 나오는 글을 보면 20년 뒤인 1890년에도 병론을 대표해서 류도성과 호론을 대표하여 김도화가 만나 세가지 안건을 합의하고 饗宴禮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이때서야(1890) 병호는 서로 병호시비건에 대해 일체 언급을 금하기로 약조한 것 같다. 내가 문헌에선 찿을수 없었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말로는 그렇다고 나를 키워주신 큰집 又泉 金鎬冕 형님 말씀이시다. 대원군에 의해 강제 保合이 성립 된지 20년 지나서야 양측에 의한 자발적인 보합이 이뤄졌다는 말이다. 대원군은 南人을 이용 할려는 욕심만 있었지 얼마나 일은 부실하게 다루었나를 알수있다. 또 철권정치 일변도 였다. 대원군은 1865년 萬東廟 철폐를 시작으로. 1868년엔 전국에 미사액 원사를 철폐했다. 이때 우리선조인 학봉을 모신 臨川書院도 뜯겨 나갔다. 1863년 가을 李啓魯의 청으로 병산서원을 사액 한다는 명이 내리자 임천서원도 사액 서원으로 지정해달라고 청원중 이었다. 사액은커녕 임천서원은 훼철이란 극약 처방을 받자 定薺學派 유생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1870년11월17일 내 고조부를 비롯 14명의 유생이 상경 疏廳을 차리고 대원군에게 통지했다. 대원군은 대노했다. 그로선 독한 마음먹고 자기 선조인 仁平大君의 서원마져 뜯어놓고 시작한 일이었다. 내고조부는 12월10일 구류되어 21일 함경도 金城으로 유배를 떠났다. 이때 같이 유배를 떠난 학자는 14명으로 李文稷, 柳基鎬, 金養鎭, 李집, 李경在, 權胄煥, 張九鳳, 金耆永, 李炳瀚, 權光夏, 李晩協, 金秀洛, 李찬燾, 그리고 우리고조부 金헌洛등 이다. 이들은 남북으로 흩어져 귀양을 떠났다. 내 고조부는 이듬해 3월19일 解配 되어 금강산과 강릉을 거쳐 귀향 하셨다. 이때 고조부가 남기신 금강산 기행문은 문장이 유려하기로 이름났고 용庵集에 전한다. 이14명은 流配에서 돌아와 <同舟契>란 모임을 만들어 日帝때 까지도 자손들 사이 유대관계가 지속 되었다.
더디어 1871년 전국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경상도엔 사액 72개서원, 미사액 639개 서원이 있었다. 호계서원도 이때 뜯겼다. 병산서원은 류후조의 로비로 살아남은 기록이 <나암수록>己巳 1-2월, 7쪽에 보면 나온다. 오늘날 그 아름다운 병산서원을 볼수있는걸 우리들은 낙파 류후조에 감사 해야한다. 그러나 병호 양측은 마음속으로 흔쾌한 화합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丙寅洋擾때 군수원납 이라던가 경북궁 중건, 만인소, 의병활동 등을 통해 사사건건 서로 어깃장을 놓는다.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 뒤 류후조와 신석호, 許元拭등이 앞장서서 영남에다가 원납을 독려 한다. 물론 호론들은 냉담했다. 심지어 병유들도 크게 기여 하지는 못한다. 경제사정이 어렵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북궁 중건 때도 마찬 가지였다. 황해도나 평안도의 10분의 1도 못 됐다. 그만큼 경제의 축이 대중국 무역을 쥐고있는 서북쪽으로 쏠려 있는 시기 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경복궁이 중건되면 남인이 發揚 한다"고 류후조를 독려 했다. 그러나 호론들이 류후조에 협조 했다는 자료는 못 보았다. 그럼 萬人疏를 들여다 보자. 우선 만인소가 무엇이냐 하면 영남남인들의 정치활동 이라고 보면 된다. 일반 상소는 성균관 掌議에 의해 謹悉을 받아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 올라 가게 되어 있었다. 이 길목마다 노론들이 진을 치고 앉아 방해를 하니까 정권에서 소외된지 오래된 남인들은 근실없이 상소가 가능한 만인소란 형태를 원용했다. 물론 이경우도 노론의 방해가 자심했지만.
1871년 서원훼철반대 만인소가 일어났다. 물론 호유가 이끌었고 10,027명이 서명 했다. 李震相, 柳寅睦, 李晩起, 李寅華 등이 주도 했고 疏首는 鄭民秉이 맡았다. 그러나 남인 관료들과 병유들은 불참했다. 냉담정도가 아니라 적극 저지에 앞장 섰다. 하회,우천의 류씨를 비롯 梅院의 광주 이씨, 경주 良洞 驪江 이씨까지. 이는 자기 조상을 모신 서원은 헐리지 않았기 때문도 있고 문중에 인물이 대원군에 의해 기용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류후조의 맞아들 류주목은 선두에 서서 만인소를 막았다. 대원군은 경주의 孫尙駿과 상주의 柳寅睦에게 참봉 자리를 주는등 회유책을 쓰는 한편 같은해 일어난 李弼濟의 난을 침소 봉대 虎儒들을 협박하는데 이용했다. 그러나 이 만인소로 아무도 처벌 받은사람은 없고 대원군은 스스로 남인의 후견자로 자처하며 대원군과 남인은 그래도 한통속이란 선에서 미봉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년뒤인 1873년 10월25일 동부승지 崔益鉉이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제기 하므로 정국은 회오리 치기 시작, 고종은 親政을 결심하게 된다. 최익현은 만동묘의 철폐, 서원훼철, 종실의 양자, 남인 李玄逸. 睦來善등의 신원, 청나라 돈의 사용, 군수원납등 대원군의 모든 시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연이어 대원군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게 벌어 졌지만 결국엔 실각, 楊州 直谷으로 물러났다. 이사건으로 1875년에 일어난게 대원군 奉還 萬人疏 였다. 이번엔 병유가 주동이되고 호유는 불참했다. 우리 의성 김씨나 안동 권씨는 전연 참여한 사람이 없다. 李鉉燮의 <愚軒實記>에 보면 李章浩가 "금번의 상소는 전 영남의 대의인데 대문중에서 전연 불참한 곳에 죄를 밝히지 않을수 없다"고 나온다. 이는 호론측을 가리키고있다. 이 만인소의 앞장은 上溪쪽 퇴계후예가 앞장서고 서애후손중 류후조가 이때는 사직,낙향하여 柳道洙등을 뒤에서 밀었다.. 상계측이 발론단계부터 대원군과 접촉했다. 10월25일 안동 숭보당서 상소 도회를 열었다. 서원훼철과 戶佈문제로 논란은 있었으나 疏首를 상주의 鄭民采로 정하고 11월20일 시작키로 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疏首와 李章浩, 李中麟등 주동자가 안동부에 구금된다. 그이후 전국 규모로확산, 류도수등 여러명이 유배도가고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전라도, 함경도 유생도 참여하자 고종은 疏首등을 처형하겠다고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다급해진 대원군 은 이듬해 6월22일 비를 무릅쓰고 서울로 돌아와 가까스로 소수등을 처형에서 구해냈다. 그결과 대원군의 재등장을 원하는 상소는 사라졌다고 梅泉野錄 18쪽에 전한다.
그다음 1881년 일어난 斥華 萬人疏는 屛虎의 관점에서 볼수는 없다. 만인소중 가장 많이 알려져있고 또 가장 복잡한 양상을 띠우나 이는 고종과 대원군의 마지막 세력 다툼이라고 볼 때 대원군과 병론 이 합심, 함께 움직인 정치행태는 보이나 호론이 끼어서 어떤 역할을 한 흔적은 별로 안보인다고 나는 추정한다. 다만 끝무렵 전국의 유림이 다 斥倭, 斥洋을 외칠 때 虎論은 누구보다 앞장설 도그마는 갖고 있었지만 서원철패와 戶佈실시의 대원군정책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히려 소극적이 되어 조용히 抗日을 예비했던 시기 같다. 참 복잡했지만 척화 만인소를 이해 하지않고는 병호의 한쪽인 병론을 이해 하는데 갭이 생기니까 그전말을 따라가보자 .시작은 李恒老제자인 재야 노론 金平默이 주도했다. 고종이 親政과 함께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여기에 필수적으로 따르는게 虎論을 뺀 대원군세력과의 충돌이다. 고종은 倭와 洋을 분리, 왜와 국교정상화를 추진한다. 일본의 무력시위로 이 일방적인 정책은 실패 하지만 어쩌던 개항은 이뤄졌다. 이걸 김평묵이 보고 들고 일어난다. 이유는 집권 노론세력 과 아직도 관료화되어 고종 밑에 남아 있는 京南(서울 및 근기 지역 남인)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개화를 반대하며 겨냥은 정권에 남아있는 노론과 남인 이었다. 요란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큰움직임이 없었다. 왜냐하면 병론들도 俸還萬人疏의 여진에서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번 만인소를 벌리면 그 경비가 엄청 났다. 그러다가 1880년 김홍집이 가져온 <朝鮮策略>이 고종에 의해 전국에 유포, 조정에 의해 지지를 받자 영남 儒生들이 척사를 외치며 일어났다. 11월26일 안동향교서 都會를 열고 疏首에 李晩孫을 뽑고 金祖永, 金鎭淳, 金錫奎등이 주도했다. 이게 전국으로 확대되어 결국엔 5월15일 고종의 斥邪윤音 발표로 가닥을 잡지만 내막적으론 민씨네와 이최응의 처벌 주장을 빼는 대신 金弘集만 탄핵하는 선에서 타협하므로 상소를 주도했던 측에선 아무도 벌 받은이도 없다. 다만 당시 영중추부사 韓啓元이 영남남인에 협박편지를 보내므로 전과 다르게 京南이 고종의 산하로 관료화되가는 과정을 볼 수 있고 李晩由는 承旨로 발탁, 고종의 회유책도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세력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다시 정권을 쥔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걸 확인 했다. 이 때문에 소위 말하는 安驥泳 사건(李載先 사건이라고 부르기도함)이 발생 했다. 안기영은 대원군사람으로 權鼎鎬, 蔡東述(번암 채재공의 손자) 柳道洙(류후조의 손자벌)등과 친히 지내며 영남만인소 疏儒들과 어울렸다. 실력행사를 어설프게 준비하고 8월21일거사날 까지 잡았으나 고변으로 일망 타진되었다. 이사건으로 병론은 완전 失勢의 길로 접어 든다. 민비측에 의한 대원군세력의 소탕작업에 말려든 것이다. 柳道洙는 길주로 유배됐다.
1895년 乙未사변 발발과 함께 시작된 항일 의병활동에선 군데 군데 병호가 티각거리는 현상을 볼수있으나 퇴계파 전체가 항일이란 大命題엔 이론이 없었다. 여기 세세하게 따져보는 것은 나로선 참 주저 된다 . 아니 시시 콜콜하게 자료를 정리 하다가 사실은 그만 두었다. 어느집이던 항일의 열사는 다 있고 그만큼 퇴계학 자체가 항일전선에 몸을 불태우지 않으면 안될 명제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나는 항일의 문제를 생각할 때 마다 李朝 후반을 꽉 쥐고 흔들었던 老論의 친일 문제를 더 캐보고 싶은 욕망을 금할 수 없다. 의병들의 노래가락 속에서 尤巖을 야유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한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러나 反日이냐 親日이냐 하는 문제는 또다른 긴 思索을 강요 당한다. 그래서 이걸 잣대로 병호를 분석하는건 뒤로 남겨두고 이 두서없는 내 ESSAY를 여기서 마치자. Dec 17 2003 Gene Kim
<이글을 너희들께 남기는 이유는 내가 하회로 장가를 갔고 너희들은 屛虎 양쪽의 피를 다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진이가 이글을 읽는다면 weird !하고 소리칠게 뻔하다. 다만 내고조부는 그래도 비교적 병호문제에 대해 균형 감각을 잃지 안을려고 애 쓰신 것 같다. 屛論의 맹장 柳疇睦(낙파 류후조의 맞아들, 낙파보다 먼저 죽었다)이 "옛말에 '名下에 헛된 선비가 없다'하더니 내가 용庵(내 고조부)을 보고서 이말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믿게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 내 할배는 병론측집에 딸을 둘이나 보냈다. 사실 이 병호시비에 대해선 양측이 전연 더 언급않기로 약조가 되어 있단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는 노론계의 봉화출신 사학자 申奭鎬가 1931년 靑丘學叢에 쓴글이 유일하다. 청구학총이란 청구학회 기관지이다. 조선총독부 관리와 京城帝大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국사 歪曲과 渟滯史觀의 전파에 첨병 역할을 한게 이 청구학회인데 홍희, 최남선, 정만조, 이창근, 이능화가 평의원으로 활약했고 이병도, 신석호등 대표적인 정체사관의 사학자들이 위원으로 활약했다. 병호시비도 한민족의 전형적인 분열상 이니까 그들의 연구대상 이었다. 병호양측 자료는 병론을 대변한 여강지 3책과 호론을 대변한 여강전말 4책이 있을 뿐이다. 큰집 又泉 형님은 내게 申奭鎬의 논문을 밑줄 그어가며 주셨다. 낙동대감 柳厚祚의 6대종손 되는 世夏가 내어린 시절 둘도없는 벗이었다. 나하곤 열촌 사이였는데 한학년 아래고 상주서 우리집을 보고 이사와 바로 앞집에 살았다. 그 어른되는 時浣씨도나중에 김천고등학교교장을 지내셨는데 우리 사랑에 살다싶이 했다. 10여년전 내가막 미국서와 어느날 골프샾에 들렀더니 상주중학 후배되는 주인 녀석이 세하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부산 대선소주 회장으로 있다가 암으로 갔는데 골프를 너무좋아해 친구들이 관속에 치던 골프채를 넣어 주었단다. 우리는 군청 뒷마당을 무대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世夏는 부랑스런 나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그때 洛坡의 행적을 내가 알았더라면 더 때려 줄걸 그랬지....
<後記 2> 이글을 읽으시고 又泉형님은 龜窩 김굉이 학봉등을 빼고 퇴계에게 대산이 적전이란 주장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하셨다. 또 내가 미국있을 때 臨川誌와 金溪誌를 다시 찍어돌리는 문제를 논의 했는데 그때 내 아버님이 臨川誌는 屛虎問題를 담고 있으니까 빼자고 주장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단다. 비록 지금으로 부터 114년전 兩家의 약속이지만 지켜주는게 도리라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이글을 처가쪽엔 장인, 두처남에게 주었는데 전화를 해서 양가 약조를 어기고 써 돌린걸 사과하고 갖고있는 글을 없애라고 부탁했다.. 龜窩 김굉의 주장은 1815년11월 6條疏를 올리며 이상정의 贈職, 贈諡와 사당의 설립을 청하는 글에서 퇴계이후 1인이란 주장을 했다. 龜窩文集 卷3 疏,辭禮曹參判疏에 나온다. 그러나 척암 김도화의 증조부인 김굉이 1813년 학봉의 묘갈명을 쎴고 또 같은 청계공 후손이란 점에서 학봉과 서애를 의식적으로 폄하한게 아니라 大山을 강조 하다가 보니까 이른 글을 남긴 것 같다. 어째던 큰틀에서 又泉형님의 지적은 예리하고 또 그렇게 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 Jan 3 2004 )
출처 : 개인별 특별 블로그 - 병호시비 屛虎是非 - http://kim25.net/kim/blog_my/10917
하계문화
문화가 그렇듯이, 하계문화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성립된다면 그 특징은 독자성에 있다. 하계는 하계만의 주장과 여론이 있었고, 여기에 반하는 이론은 수용되지 않았다. 다른 씨족과는 물론이고 동족 사이에도 나타났다. 자연 상계와의 대립과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하계의 이런 측면은 ‘병호시비屛虎是非’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진성이씨 전 문중은 ‘병론屛論’에 가담했다. 퇴계 후손들이 당시 중립을 취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당시에는 이 시비의 어느 편에든 포함되지 않으면 양반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시대였다.
회자되는 예기지만 상계도 처음에는 ‘호론虎論’이었고, 표면상 중립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퇴계 10대 종손 고계 이휘영이 예천 맛질의 도회道會에 참석했을 때 진행자가 ‘어느 쪽인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 때 고계는 “우리는 비병비호非屛非虎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중립이라는 예기였다. 젊은 퇴계종손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수사였다. 그러나 이 말은 즉시 공박을 받았다. 참석자들은 “그렇다면 그대는 비반비상非班非常아닌가”했다. 이 공박은 결국 상계를 병론으로 굳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상계의 병론으로의 입장 정리는 진성이씨의 전 문중을 ‘병론’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하계는 끝까지 ‘호론’의 입장을 견지했다. 하계의 호론 측 가담은 시비 초기, 하계의 문장門長이라 할 수 있는 광뢰 이야순(廣瀨 李野淳)이 대산(大山 李象靖)의 제자 신분임도 한 몫을 했고, ‘계남댁’의 호론 가담은 하계의 버팀목이었다. 그런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어 하계는 최근까지도 하회의 풍산류씨들과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서애파’와만 하지 않는다. 겸암파는 관련이 없다.
여담이지만, 겸암파는 겉으로는 병론을 표방하고 내면으로는 호론이나 중립을 견지하여 이른바 ‘외병내호外屛內虎’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 말 역시 오래도록 안동일원에 회자되었다. 이런 측면은 겸암을 배향한 ‘화천서원’의 차원에서, ‘병호시비’를 어디까지나 ‘병산서원의 일’로 바라보는 겸암후손들의 시각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廬江書院(여강서원) :
이 서원(書院)은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으로서 창건 당시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이름하였으나,
사액(賜額) 후에 ‘호계서원(虎溪書院)’로 이름하였다.
현재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84번지에 소재하며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월곡면(月谷面) 도곡동(道谷洞)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197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선조 8년(15758) 지방사림들이 安東府 동북쪽 여산촌(廬山村) 오로봉(五老峯) 아래-예안 여강-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헐고 짓기로 하였으나, 승려들의 항거로 난관에 봉착했을 때 예천 남악선생이 왔다는 말 한마디에 승려들이 굴복하고 순응함으로써 쉽게 세워졌다.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享禮)를 치르며 도학(道學)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선조 38)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중창하였다.
광해군 12년(1620) 퇴계 이황의 큰 제자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숙종 2년(1676)에 임금으로부터 ‘호계(虎溪)’라는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은 후에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무렵에 발생한 학봉과 서애의 위패 봉안 서차(序次)에 따른 병호시비(屛虎是非) 문제는 서애(西厓)의 문인으로 예학파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중재로 일단락되었으나, 순조 5년(1805)에 발생한 문묘(文廟) 배향(配享) 청원과 관련된 병호시비와, 순조 12년(1812) 이상정(李象靖)의 합사(合祀)문제로 다시 격화된 병호시비로 인하여 결국은 봉안되어 있던 위패를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으로 각각 옮겼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졌다가 7년 뒤에 강당 만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1회 당회(堂會)를 개최하고 있다.
무송할배와 재수 군은 오해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댓글은 반론을 하기 위하여 올린 글이 아닙니다. 상보하여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일 뿐입니다. 참고 자료라고 편하게 생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한 번 더 기록하겠습니다.
1620년에 학애 양 선생의 위패를 여강서원에다가 이봉하였다고 거의 모든 자료는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여강전말'(한들의 류회붕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몇 년 전에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자료를 옮겼음 -정재 류치명의 부친이신 류회문 선새의 수필본)에, '여강지'(현재 동경대학에 소장된 것을 복사하여 내앞의 김복영 군이 가지고 있음 - 병산서원 판본임)에, '경사류방'(검제의 김규성 선생이 편찬함)에도 162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복집'을 번역하여 펴낸 '국역 우복집'에서 번역자가 주를 달았는데 1620년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우복집'의 한문 원문에는 날짜가 없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1620년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측 기록인 '운천선생문집' 기록에는 경신년(1620년-선생64세) 9월에 以鶴峯西厓兩先生從祀廬江事 答鄕校會中書'가 있습니다. 각주에 "이에 앞서, 여강 임천 병산 세 서원 원장이 두 번이나 글을 보내서 학당에 모이기를 약속했으나, 선생은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므로 이에 ‘合享至當之意'를 글로서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운천 김용 선생은 학봉 선생의 조카이시고, 퇴계 선생의 손서입니다. 서애 상공을 따라서 선조를 호종하셨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서 1620년에는 합향의 의사를 밝히는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합향을 원했습니다. 이 때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학봉 선생의 직손과 방손을 가리킵니다. 원래는 도산서원의 묘우인 상덕사에 배향되기를 원했습니다. 후보로 세 분이 추천되었습니다. 월천 조목 선생, 학봉 김성일 선생, 서애 류성룡 선생입니다. 당시 조정은 북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서애 선생과 정인홍 선생은 앙숙이어서 자연 탈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월천 선생만이 상덕사에 배향되었습니다. 이에 안동의 수선서원인 호계서원에 봉안되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월천 선생이 상덕사에 배향되는 사실을 다음 댓글에다가 싣겠습니다.)
위차를 1625년 우복 선생이 강제로 재정하여 위판을 위설하자 신석호의 표현대로 "당시의 사론은 심히 옮다고 여기질 않았다"이며 "학봉의 자손(이 때는 방손도 포함됨 - 이어지는 병호시비를 보면 천김수류가 대단한 단결력을 보임) 및 제자들은 怏怏하여 마지않았다"입니다. 우복 선생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여강서원의 묘우인 尊道祠에 학봉 선생을 서에, 서애 선생을 동에 위설하자 이에 임천서원 측에서는 이미 놓여진 위판을 다시 임천으로 이봉할 수도 없고 하여서 울며 겨자먹기로 앙앙(怏怏), 우복 선생을 향하여 앙앙거렸다고 세간에는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는 요사이와 달라서 의견을 수렴하자면 상당한 시간을 요했습니다. 우선 교통수단이 형편이 없었습니다. 의견의 개진과 수렴을 할라치면 몇 달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1620년에 합향에 대한 의견수렴을 하였는데 어찌하며 당년에 임천과 병산의 위패를 함부로 옮겼겠습니까? 임천서원측은 무조건 합향이 지당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임천서원의 공간이 너무 작고 건물들이 협소하여서 여강서원으로 옮기기를 적극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임천서원은 내앞 장고쑤 지나 반변천 건너 임하동 독산 아래의 언덕에 1607년 사림이 ‘임천사’를 세워 향사하다가 1618년 한강 정구 선생의 발의로 ‘임천서원’으로 승사하고 묘호를 ‘존현사(尊賢祠)’라고 했습니다. 여강서원의 존도사에 주향인 퇴계선생과 함께 종향되어 배향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산서원에는 월천 선생만이 배향되었고, 이 때 사림에서는 많은 분들이 학봉 선생이 상덕사에 종향되지 못한 점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산서원측은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여강서원으로 옮겨가자는 측과 그대로 두자는 측이 양존하고 있었습니다. 병산서원은 서애 선생 생존 시에 동서재를 갖추어서 이미 병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1608년 사당인 尊德祠를 짓기 시작하여 1613년에 위패를 봉안했습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병산의 사당을 훼철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정경세 선생이 김이득(윤사) 김이정(윤안)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있습니다. 여론 수렴이 대단히 복잡하였습니다. 사림의 공론을 충분히 수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의 기록 뿐만 아니라 '우복집'에도 보입니다. 1620년에 정경세 선생이 '병산의 원장에게 답한 편지'가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합향하자는 의논은 바로 두 분 선생을 높이 받들어서 다른 여러 서원들과 차이가 나게 하려는 것이니 어찌 事宜에 아주 합당하지 않겠으며 ……"입니다. 그러니까 병산서원의 위판을 여강서원으로 옮기는 것은 여강서원을 높이 받들기 위함이라고 병산서원 원장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1621년에서 1625년 사이에 일어난 학애 선생 서차 내용은 다음에 밝히겠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서원의 승무가 향당이냐 조정이냐인데 퇴계 선생의 설과 우복 선생의 설로 양측이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다 결국 노론 정권하에서 친노론화한 대사헌 우복 선생이 강제로 공권력을 동원하여 위판을 설위합니다. 1625년 가을 향사에서입니다.
1614년(광해군6) 11월, 조목(趙穆)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에 종향(從享)되었다. 16세기 이후 주자학이 심화되고 도학이 강조되면서 서원 향사는 도통 전수의 상징이 되었다. 이황의 문하에는 제자가 무려 300여 명이나 있었지만, 도산서원에 제향된 사람은 조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생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이황을 섬긴 덕분에 죽어서도 스승의 사당에 제향되는 영광을 입은 것이다.
조목은 1524년(중종 19) 경상도 예안현 월천리에서 출생했다. 집안은 평생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고, 인근 토계리(兎溪里)에는 이황과 같은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학자로 성장하기에 최상의 여건이었다. 조목은 약관 15세에 이황의 문하에 입문했다. 이후 30년을 하루같이 이황을 시종하며, 학문과 예법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행신과 출처도 배웠다. 일생의 지표가 있었다면 학자로서의 이황과 인간으로서의 이황을 체득하는 것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도산서원에 종향되어 수제자의 지위를 선점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정하는 사람보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서원 향사는 사림의 중대사로서 공론이 요구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조목의 종향에는 사림의 공론이 충분히 수렴되지 못했다. 공론 대신에 퇴계학파와는 매우 이질적인 권력이 개입했다. 바로 북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친북(親北)에 따른 반대급부였다.
이황의 제자들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유성룡과 조목이었다.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을 지낸 중앙 정계의 거목이었다. 반면에 조목은 일생을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 활동과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도산서원을 창건하고 『퇴계연보』ㆍ『퇴계선생언행총록』의 초본을 작성한 사람도 조목이었다.
두 사람이 이황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다. 유성룡이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중시했다면, 조목은 향촌에서의 이황을 중시했다. 이러한 차이점은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목은 이황의 모든 글을 수록하되 향촌에서 간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부각시켜 중앙에서 간행하고자 했다. 이는 유성룡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도 직결되는 부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옥신각신 하는 가운데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특히 20년 년하의 유성룡에게 제지를 당한 조목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목이 '주화오국(主和誤國)'의 표어를 내걸고 유성룡 비판 운동을 전개했다. 유성룡의 기반을 한 순간에 붕괴시킬 수도 있는 대단히 미묘한 정치 문제였다.
<상국(相國)께서 평생 동안 성현의 글을 읽고 배운 것이 고작 주화 오국 넉자란 말이오? (동계집』「월천시도비명」)>
유성룡에 대해 화의를 주장해 나라를 망친 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조목과 북인
그 틈을 북인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북인의 영수 이산해가 조목의 문인을 자처하는가 하면, 폐모론의 주창자 정조(鄭造)가 예안을 빈번하게 왕래했다. 조목과 북인의 연대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목의 유성룡 비판 운동은 주효해 유성룡 실각의 계기를 마련했다. 북인들은 유성룡에 대한 탄핵을 전개하여 1598년(선조 31)에 그를 파직시키는 데 성공했다. 파직된 유성룡의 심경을 『서애연보』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노기가 날로 심해 손님을 만날 수조차 없었다. 한준겸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방문하려 했으나,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사절했다.(『서애연보』 만력 27년 2월)>
조목과 북인의 연대를 통해 예안 일대에는 친 북인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퇴계학파의 본거지인 안동ㆍ예안에는 남인ㆍ북인이 공존하는 가운데 북인이 남인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1605년(선조 38) 조목이 사망하고, 1607년(선조 40) 유성룡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611년(광해군3) 정인홍의 ‘회퇴변척소’가 단행되었다. 퇴계학파는 물론 8도의 유림들이 분노했지만, 조목의 문인들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친북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본거지에 자파를 부식하려는 북인의 노력은 집요했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그 절정이었다. 정인홍은 조목의 공로를 인정해 그의 종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사실 정인홍과 대북의 입장에서는 조목의 종향이 여러 면에서 이점이 있었다. 가장 큰 목적은 예안의 조목 문인들을 포섭하여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반면에 조목의 문인들은 권력에 의지하여 조목이 이황의 수제자임을 천명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양측의 이해는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바로 그 결과였다.
< 아래의 글은 이수건의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의 기록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선조 말에서 광해조에 걸친 북인정권 하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류성룡과 정인홍 및 조목과의 미묘한 관계로 인해 예안 유림에 북인 세력이 한때 도산서원을 움직여 갔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그들은 처형, 유배, 훼가출향(毁家黜鄕)을 당해 북인계는 도태되었다. - (인조반정 후 예안 출신으로 북인화된 인사 가운데 이강<이덕홍의 아들>은 처형되고 조목과 금난수의 아들들은 유배에 처해지고 손우孫祐, 서긍徐兢 등은 훼가출향(毁家黜鄕)이란 향벌(鄕罰)을 받았다.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의리(義理)를 논설하는 데는 뭇 서적에 밝아 수미(首尾)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을 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으나 힐난(詰難)하지 못하고서는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가 융숭하였다.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국가의 안위(安危)가 그에 의지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과 의논이 맞지 않아서, 인홍이 매양 공손홍(公孫弘)이라 배척하였고, 성룡 역시 인홍의 속이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 같았다.
성룡은 조목(趙穆) · 김성일(金誠一) 과 함께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계사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자수(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강개(慷慨)해 마지않았는데 지난해 죽었다. 조목은 일찍이 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絶交)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영수(領袖)로 삼는다.
유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상의 권우(眷遇)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유모(柳某) 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心服)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규모(規模)가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었지만 직간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비록 전단(專斷)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의 변에 권간(權姦)이 화(禍)를 요행으로 여겨 역옥(逆獄)으로 함정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얽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일망타진하여 산림(山林)의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군신(君臣)이 들판에서 자고 백성들이 고생을 하였으며 두 능(陵)이 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불에 탔으니 하늘까지 닿는 원수는 영원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는 데도 계획이 굳세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서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千古)에 한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해 하고 언자(言者)들이 말을 하였다. 부제학 김우옹(金宇顒) 이 신구(伸救)하는 상소 가운데 ‘성룡은 역시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마는 재보(宰輔)의 기국(器局)이 부족하고 대신(大臣)의 풍력(風力)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한 논의이다. 무술년겨울에 변무(辨誣)하는 일을 어렵게 여겨 사피함으로써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 후에 직첩(職牒)을 돌려주었고, 상이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의관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前議政府領議政 豊原府院君 柳成龍 卒。
【史臣曰: “ 成龍 , 慶尙道 安東 豐山縣 人。 天資聰穎, 氣象端雅。 早歲從遊 退溪 先生門下, 矜束以禮, 見者器之。 妙齡應第, 譽望日著, 夙夜之暇, 又自力於學問, 終日端坐, 未嘗跛倚。 應接之際, 靜雅簡默, 操筆爲文, 一揮而就, 若不經意, 而精熟有味。 博覽諸書, 未嘗誦讀, 而過眼了然, 片字不忘, 論說義理, 澄明群書, 首尾精到, 聞者歎服。 奉使朝京時, 華士坌集, 而不能難, 稱之以 (西崖)〔西厓〕 先生焉。 由是, 名位俱顯, 寵渥隆洽。 及登台位, 倚爲安危, 與 鄭仁弘 議不合, 仁弘 每以 公孫弘 斥之; 成龍 亦惡 仁弘 之隘僻, 士論携貳, 相攻擊如水火。 成龍 與 趙穆 、 金誠一 俱學於 退陶 之門。 誠一 剛毅篤實, 風裁峻整, 以直道不容於朝, 而大節卓落, 人無異議, 歲在癸巳, 盡瘁王事, 卒於軍中。 穆 終身索居, 篤學自修, 遭國多艱, 慷慨不已, 亦以去歲卒。 穆 嘗多 誠一 , 而少 成龍 , 晩年頗憤 成龍 所爲, 至作絶交書。 然 退陶 門下, 以此三人爲領袖。 成龍 立朝三十餘年, 爲相者十年, 上眷不衰, 傾耳以聽。 獻替經幄, 言巽而意盡, 以此, 上尤重之, 嘗曰: “予觀 柳 某學識、氣象, 不覺心服之時多矣。’ 然, 規模少狹, 脊樑不牢, 利害當前, 未免動搖。 故, 得君雖久, 鮮聞謇諤之言; 爲政雖專, 不救偸靡之習。 己丑之變, 權姦幸禍, 以逆獄爲機穽, 羅織無辜, 網打異己, 山林善人, 相繼殄戮, 而未嘗發一言救一人, 而至於分疏自明, 苟保身位。 壬辰、丁酉之間, 君臣拔舍, 赤子殷衁, 兩陵遭辱, 宗社燒夷, 通天之讎, 九世必報, 而謀猷不競, 國是靡定, 力主和議, 通信求媚, 使忘讐忍恥之罪, 貽羞恨於千古。 由是, 義士憤惋, 言者藉口。 副提學 金宇顒 申救疏中有曰: ‘ 成龍 亦難得之人。 但乏宰輔器局, 無大臣風力。’ 斯爲的論也。 戊戌冬, 以辭難於辨誣之事, 削其職, 歸田里。 其後還授職牒, 上聞其病危, 遣醫治之。 及是卒。”】
※ 호계서원이 훼철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871년 3월 19일 / 20일 - 전국 47서원 제외, 모든 사당과 서원 훼철령
1871년 4월 9일 - 안동에서는 안동부사 박제관이 아직 훼철하지 않은 호계서원, 삼계서원, 주계서원, 서간사에 훼철령
호계서원,삼계서원,주계서원,서간사(1785년 건립, 1786년 사액, 김상헌 배향)는 모두 사액(賜額)원사)
1871년 4월 15일 - 10027명의 이름으로 서원 훼철 반대 만인소 올림
1871년 6월 15일 - 대원군 재차 훼철 강행령
1871년 7월 21일 - 호계서원의 제유사 장관청에 구금
1871년 7월 25일 - 김우수, 류치임, 김진대, 김평수, 권진박, 류지호 이상 6명 안동부에 불려가서 구타, 협박, 투옥됨
1871년 7월 28일 - 안동부사는 학봉종손 김흥락에게 공문 발송, 훼철 명령 : 김흥락 훼철 거절
1871년 8월 2일 - 묘시에 안동부사 관권 동원. 퇴계, 학봉, 서애의 위판을 사당 뒤에 매안(埋安-묻음). 유생 6명 석방함.
1871년 9월 9일 - 호계서원의 주사마저 헒. 이로서 완전 훼철
※ 다시 한 번 더 중복하여 입력하겠습니다. 우복 정경세 선생이 서애 선생을 여강서원에 종향하자고 설득하는 대목을 ‘국역 우복집’에서 옮기겠습니다. < >표 안의 것은 입력자 저의 주석입니다.
김효백(金孝伯) 봉조(奉祖)에게 답한 편지 <쓴 연도가 없습니다>
…… 사문(斯文)<유림 또는 유림 문화를 가리킴>의 중대한 일에 대해 심부름꾼을 보내어 물으셨는데, 이것은 형편없이 못난 제가 감히 언급할 바가 아니어서 위축되고 부끄러운 심정을 스스로 금치 못하겠는 바, 답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평소에 서애 선생으로부터 전해들은 바가 있으니, 옥연(玉淵)과 서동(西洞)에서 한가로이 모시고 있을 때 매번 본부(本府)에 서원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걱정하시면서 “끝내는 반드시 난처한 걱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먼 뒷날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지난번 무신년(1608, 선조 41) 가을에 이득(而得), 사열(士悅)과 함께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모였을 때 서애와 학봉 두 분 선생을 여강서원에 함께 향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고하였습니다. 그 뜻은 대개 선생<서애 선생을 가리킴>께서 일찍이 걱정하시던 바를 가지고 선생을 존봉(尊奉)하는 일에 시행하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그 당시 우복 선생은 병산서원에 존덕사를 세워서 향사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음 - 1608년부터 병산의 풍악서당 옆에 尊德祀를 건립하기 시작했음> 지금은 사우(祀宇)가 이미 세워 졌으니<1613년에 존덕사에 위패를 봉안했음> 중간에 철폐하기는 미안합니다. 그러니 풍산에 있는 여러 벗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도 마땅한 것입니다. 다만 현재 수호하기가 어려움이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옮겨서 모시는 거조를 아마도 그만 두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두 분 선생<학애 양 선생>을 퇴계 노선생의 사당<여강서원의 尊道祀>에 당(堂)<원문은 廟로 되어 있음>을 같이하여 배향하는 것이 어찌 또 사리에 있어서 온당하지 않겠습니까. ……
병산의 원장에게 답한 편지 경신년(1620, 광해군 12)
말씀하신 몇 가지 조항은 몹시 중대하여 판단하기 어려운 의논으로, 몽매한 제가 언급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저를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고서 두 서생을 멀리까지 보내어 묻게 하였으며, 또한 이는 바로 사문(師門)의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스로 제 자신을 도외시하여 어리석은 소견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앙에 서원을 옮겨서 건립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부(本府)의 사론(士論)이 전부터 귀일되지 못하였으므로 선생께서 다시 짓는 날에도 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형께서는 이에 이미 설립한 뒤에 옮기려고 하시니, 역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데에 가까운 것은 혹 아닙니까? 오늘날의 햡향(合享)하자는 의논은 바로 두 분 선생을 높이 받들어서 다른 여러 서원들과는 차이가 나게 하려는 것이니, 어찌 사의(事宜)에 아주 합당하지 않겠으며, 앞으로 수호(守護)하는 일에 있어서도 영구히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즉 빙 둘러서서 바라보기만 하면서 방백(方伯)과 읍수(邑守)에게 빈축을 받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서로 간의 거리가 아주 현격하다고 하겠습니다.
세대가 서로 떨어진 것이 1000여 년이나 되고, 지역이 서로 떨어진 것이 1000여 리나 되는데도 이 마음이 귀의함이 마치 함장(函丈) 사이에 모시고 있는 것만 같은 것은, 다른 이우에서가 아니라 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몇 십 리밖에 안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 갑작스럽게 의뢰할 바가 없다고 할 바가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평소에 머물러 계시던 곳에서 제사를 받드는 예를 이미 설립하였다가 도로 철거한다는 것은, 과연 마음에 크게 편안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중한 바가 따로 있으니 어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많은 말을 할 것 없이 여러 가지 염려를 말끔히 거두시기만을 바랍니다. 그리하여 상대와 나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지 말고, 도로의 멀고 가까움은 헤아리지 말고, 이해가 있고 없음을 생각하지 말고, 단지 선생께서 이곳에 있는 것과 저곳에 있는 것이 어느 것이 중해지고 또 높아지느냐 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이 일을 따르거나 어기는 것도 두말할 필요 없이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의 소견은 이와 같은 바, 감히 저의 속마음을 모두 쏟아내어 채택하는데 갖추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한 것일 뿐이자, 감히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직 잘 재량하여 조처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향사(享祀)하는 날이 국기(國忌)와 상치되는 것은 과연 난처한 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혹 마지막 달의 상정일로 늦추어 지낸다면 이달 21일에는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 경건하게 고하는 일이 있어야만 할 듯합니다. 긴 사연을 다 쓰지는 못하겠습니다.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이 월천 조목(1524~1606) 선생에게 보낸 서찰을 입력합니다. 두 분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조사경(趙士敬) 목(穆)에게 답함
서울에 머물러 있는 사이에 해가 이미 바뀌었습니다. 서글픈 마음으로 동각(東閣)을 바라보니 친구를 그리는 생각이 간절하기만 합니다. 그러던 차에 보내주신 서찰을 받들었으니 위로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저는 보름쯤에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여러 달 동안 병을 앓은 나머지 또다시 한질(寒疾)이 들어 현재 자리에 누워 신음하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 안에 출발할 수 있을는지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객지에서 곤경을 당함이 이루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듣건대, 공께서는 다른 사람이 말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흠이 있으며,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조처함에 있어서도 융통성이 없이 꽉 막혀 있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이유에서 이런 말이 떠도는 것입니까? 바깥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것이야 돌아볼 것이 못되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돌이켜서 반성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어찌 사실이나 아니냐를 따지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저는 일찍부터 공의 높은 풍모를 흠모하면서 평소에 교분을 맺어왔으니, 들은 것이 있는데 어찌 감히 고해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붕우 간의 도리가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라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벗에게 고해주는 도리를 볼 수가 없습니다. 저 성일이 당신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감히 제 스스로 세 가지 이로운 벗으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실로 약한 자가 선수치는 법인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서신을 왕래하면서 병통에 따라 치료할 약을 내어 사문(師門)을 욕되게 하지 않기를 천만 간절히 바랍니다.
뵙지 못하는 동안에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여강서원은 안동부 내의 노산촌에 있었습니다. 부의 동쪽 30리에 일명 백련사라고도 했습니다. 그 위가 사이촌이었고 좀 더 올라가면 도곡촌이 나옵니다. 도곡촌(道谷村)의 속명은 돗질(都叱質)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에 행정구역이 바뀌어 월곡면 도곡동이 되었다가, 1973년에 임하면 임하동으로 옮겼습니다.
당시의 여강서원은 안동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서원으로 총 97여 칸에 달하였습니다. 퇴계 문인 중 핵심 세력은 거주지에 따라 예안과 안동으로 구별되며, 연령의 차이와 과거급제냐 천거냐에 따라서도 달랐습니다. 대략 구분해보면 김부륜(1521), 조목(1524), 금응협(1526), 금난수(1530), 금응훈(1540), 이덕홍(1541), 김택룡(1547) 등 예안 출신은 연배가 높은 편으로 이른 시기에 퇴계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관직보다는 향촌에서의 사족 생활에 만족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반면 유성룡(1542), 우성전(1542), 김복일(1541), 유운룡(1539), 김성일(1538), 정탁(1526)등은 안동을 거주지로 하였고, 퇴계가 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인 명종 7~8년 이후에 사제 관계를 맺어 상대적으로 후배들이었고, 또 문과 급제하였던 만큼 관료로서의 활동에 적극적인 세력이었습니다. (하회의 겸암 류운룡은 문과급제가 아니고 천거임)
두 계열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퇴계 사후 예안과 안동에 경쟁하듯 도산서원과 여강서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산과 여강의 게판식은 같은 해입니다.
이글은 신석호가 일본어로 쓴 논문을 번역 한 내용이며
오랜 교직생활을 하시고 퇴임하신 김태원 님이 원동파 카페에 직접 올려주신 내용을 스크랩하여 게시하였습니다.
병호시비에 대하여
신석호(申奭鎬)
1. 서언(緖言)
조선 말기, 순조 5년 乙丑(서기 1805) 이후 약 80년간 영남(주로 지금의 경상북도)의 유림은 안동군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병론(屛論)․호론(虎論)의 두 파로 나누어져 굉장한 당론(黨論 *요사이 학자들은 향전이라 함)을 하였다. 이것이 소위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원래 경상도 특히 안동은 학자의 배출에 있어서 다른 곳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이며, 명종 시대의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해서 그 제자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및 그 학통을 계승한 영조 시대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같은 주자학의 거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안동의 유자(儒者)는 그 지방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칭하고, 스스로를 추로의 선비라고 일컬었는데, 다른 곳에서도 또한 이를 인정할 정도이다. 그르므로 이 안동 땅은 유림이 가장 성하고, 동족 사람들은 모두 문호를 이루고 각각 그 조상의 지위와 명예를 안고 서로 할거하고 있었다. 아직도 양반개념이 뿌리 깊게, 그리고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전 조선을 통해 안동만한 곳은 없다.
그 가운데 군의 서쪽, 지금의 풍남면 하회에 뿌리를 둔 류성룡의 자손, 및 군의 북쪽 지금의 서후면 금계에 근거를 둔 김성일의 자손은 서로 영남의 명족으로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병호시비는 실로 이 류․김 양가 조상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며, 드디어는 영남 전체에 확산되어 서애와 학봉 양학파의 다툼이 되었다. 서애와 학봉은 서로 우정이 두터운 동향인이고, 같은 스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근본적으로 학설의 상위 등은 있을 수 없었으나, 그 제자들에 의해 학통이 갈라지게 되었다. 지금 두 사람의 학문을 전승한 사람의 계통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柳成龍--+--鄭經世--+-- 金應祖
| ↳ 李 埈 ↳ 申碩藩
李滉--+
+--金誠一 --- 張興孝 ---- 李玄逸 ---- 李 裁 ---- 李象靖 ---- 柳致明
그러나 병호시비는 위에 표기한 사람들의 싸움이 아니고 그 자손의 싸움이다. (단 柳致明은 아니다. *류치명 자손이 싸운 것이 아니라, 유치명 학파가 가장 치열하게 시비를 하였다는 뜻).
그리고 논쟁 문제는, 노론의 호락시비(湖洛是非)와 같은 학설의 다툼이 아니고, 그 선조의 우열의 다툼이며, 묘위(廟位 *사당의 위판)에 대한 다툼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는 일과 같지만, 조상을 숭배하고 사부를 존경하고, 예의를 존중하던 당시의 유림입장에 생각하면, 실로 중요한 문제이다. 이 논쟁은 서애, 학봉 양 학파의 다툼이므로, 말할 것도 없이 연관된 사람은 모두 남인들뿐이며, 그 장소도 영남 특히 경상북도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이외같이 이 논쟁은 한정된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이에 관한 기록은 중앙에는 거의 없다. 다만 이 논쟁에 관계해서 가장 많이 활동한 사람의 자손이 이를 소장하고 있을 뿐이다.
작년 늦은 가을, 나는 우연히 조선사편수회에서 사료(史料) 수집을 위해 안동으로 출장을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안동군 임동면 수곡리 류동시(柳東蓍) 씨 집에서 그가 소장한, 이에 연관된 기록 ‘.여강전말(廬江顚末)’ 다섯 권을 볼 수 있었다. 이 류동시 씨 집은 호론 계통이며, 그의 고조부 회문(晦文) 이래 이 논쟁에 깊게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호론의 본종(本宗)이라고도 할 만한 집이다. 따라서 ‘여강전말’은 호론에 유리하도록 기록한 점을 여러 곳에서 엿볼 수 있으나, 공사를 불문하고 병호 모든 쪽, 이 논쟁에 관계있는 문서(통문, 정영장, 제사 등속)를 거의 모두 망라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연대순으로 수록 기재하고 있으므로 그 전말을 아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병호시비에 관한 자료로서 이것 외에 병론의 본종(本宗)인 하회류씨(서애 자손)에서 출판한 ‘여강지’ 3책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이를 볼 기회가 없으므로, 지금 나는 ‘여강전말’을 중심으로 본고를 초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호론측 자료만을 보고 병호시비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것 같지만, 이 ‘여강전말’에 수록된 양편의 문서를 비교 대조하며 비판을 가하면, 대략 그 진상을 알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문제가 된 호계서원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고종 8년 신미(명치4년, 1871)에 이미 철훼를 명령 받았고, 또한 당시 논쟁의 중심인물들은 모두 묘 속의 흙으로 변했으니, 시비를 논하는 것은 언뜻 보아 매우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논쟁의 자손들은, 지금은 밖으로는 이를 입에 담지 않으나 아직도 마음속에는 서로 전통적 반목을 품고 있다. 그르므로 이 문제를 말함에 있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라는 것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르므로 본고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다만 어떤 문제를 놓고 어떻게 다투었는가를 말하고, 아울러 서원을 중심으로 조선유림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다.
2. 애학(厓鶴)․학애(鶴厓)론
병호시비는 순조 5년 을축(1805년) 겨울, 영남의 사림들이 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한강 정구․여헌 장현광의 네 사람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서, 서애․학봉을 종향하는 위차의 상하, 즉 소위 애학․학애 문제 때문에 폭발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이때 처음으로 일어난 문제가 아니고, 이미 광해군 12년 경오(1620년)에 서애․학봉을 그 스승인 퇴계 이황을 제향한 여강서원(廬江書院)에 종배(從配)하려 했을 때부터 일어난 문제이다. 여강서원은 병호시비의 중심이 된 호계서원의 옛 이름이며, 안동군의 동쪽 30리 여산 오로봉 밑, 낙동강 연안, 지금의 동후면 노산동에 있었으며, 선조 6년 경오(1573년)에 퇴계를 위해 창건하고 ‘여강’이라 이름 하였으나, 그 뒤 숙종 2년 병진(1676년) 3월, ‘호계’라는 액이 하사되어 그 뒤로 ‘호계서원’이라 이름하였다. 병호시비 사실을 기록한 기록물을 혹은 ‘여강지(廬江志)’라 하거나, 혹은 ‘여강전말(廬江顚末)’이라 하는 것은 이 자료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광해군 12년 경오(1812)에 서애․학봉을 여강서원에 종향하려 할 때, 두 분의 위판을 배치하는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문제가 제출되었다. 즉 퇴계의 위판을 중심으로 하여 이들은 동서벽에 분봉하느냐, 또는 동쪽 일렬로 봉안하느냐가 제1안인데, 만일 동서로 분봉한다면 어느 분을 동에, 어는 분을 서에 할 것인가. 또 만일 동쪽 일렬로 한다면 어느 분을 먼저, 어느 분을 뒤로 할 것인가가 제2안이다. 제1안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제2안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에 의해서 서애와 학봉의 지위와 선후가 결정된다. 두 사람의 학문과 도덕에는 서로 상하가 없지만, 연치에서는 학봉이 서애보다 4년 연장자이며, 작위 면으로 말한다면 서애는 일국의 수상인 의정부영의정까지 올랐고, 학봉은 겨우 경상도관찰사라는 한 지방장관에 불과했다. 서애의 자손은 작위를 갖고 서애를 위에 올리려 했고, 학봉의 자손은 연치를 갖고 학봉을 위에 두려 해서,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며 다툼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사림은 상주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글로서 물었는데, 우복은 제1안에 대해서는 문묘의 예에 따라 동서로 분봉하라고 말하고, 제2안에 대해서는 두 선생의 연치가 서로 다른 것은 견수(肩隨)에 미치지 못하고, 작위(爵位)가 서로 다른 것은 절석(絶席)에 있다 ( *나이의 차는 5년에 미치지 않아서 기러기가 날아가듯 조금 뒤쳐져서 다니지 않아도 되고, 벼슬은 서로 멀어서 거리가 매우 떨어져 있다) 하였으며, 서애를 동, 학봉을 서로 하는 것이 옳다고 답하였다.
당시 우복은 국가의 원로이며 한 고을의 장로로서 중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학봉의 자손들도 여기에 반대는 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의 의견대로 봉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강전말’에 “당시의 사론은 이를 심히 바르다고 하지는 않았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일단 우복의 의견대로 결정은 되었지만, 학봉의 자손과 제자들은, 기꺼이 승복하지 않고 앙앙(怏怏 *원망할 앙)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수백 년 간 이 문제를 두고 논쟁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순조 5년(1805)에 이르러 이것이 다시 재연되어, 드디어 영남 남인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순조 5년(1805) 을축 겨울, 안동지방의 서애․학봉 관계의 사림 및 대구 칠곡․인동 방면의 한강(寒崗)․여헌(旅軒)관계의 사림, 다시 말하면 영남의 사림인 서애․학봉․한강․여헌의 승무(陞廡 *문묘에 올려 합사함)를 상소하기 위해 경성에 모여 임시 소청을 마련하고, 상소의 절차를 의논할 때, 학봉학파 사람들은 4선생의 승무 순서는 연치의 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애학파 사람들은 여강서원의 위차가 이미 애학의 순이므로, 문묘의 승무도 역시 그 순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여, 의논은 결정되지 않았다.
이때 대구 지방의 유림은 학애론에 가담해서, 호계서원의 위차는 애․학 순으로 봉안했지만, 이번 네 분 선생을 병거(竝擧)하는 경우에는 연치 순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드디어 학봉․서애․한강․여헌의 순으로 할 것을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애의 자손이 이를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단독으로 상소해서 승무 순서의 전도를 꾀하였고, 또한 소수(疏首)(당시의 소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구방면의 사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를 논박했으므로, 왕은 이 네 분의 승무를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애학․학애론 때문에 그들의 당초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향리에 돌아와서도 역시 이를 논하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다툼도 후세와 같이 격렬하지는 않았다. 이 논쟁이 일단 더 격렬하게 진행된 것은 다음 해 즉 순조 6년 병인(1806) 11월에 대구 이강서원(伊江書院 *달성군 다사면 이천동 소재. 미락재 서사원 배향)에서 발송한 통문이 온 뒤부터이다.
원래 대구, 칠곡, 인동 방면의 유림은, 이미 정조조(正祖朝)에 한강․여헌의 승무를 허락하는 비답(批答)을 받아놓은 지라 이때도 아무 일 없이 승무가 허락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논쟁 때문에 일이 그릇되어 성사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다음해 병인(1806) 11월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안동지방의 유림과 일을 같이하면 애학․학애론 때문에 한강․여헌의 승무까지도 윤허(允許)되지 않으므로, 이후로는 단독으로 상소할 것을 의논하고, 이 뜻을 도내에 통보했다.
이 통문이 안동에 도착하자, 안동의 유림은 그들이 단독으로 상소한다는 데 대해 크게 분개하고, 이를 논책하려 호계서원에 향회를 설치하고서 반박 통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하회류씨는 반박통문에, 처음에는 애․학이라 적혔던 것을 밤중에 몰래 학․애라고 고쳐 썼다고 말하며 이를 찢어버렸다. 이 통문을 기초한 사람은 ‘여강전말’의 소장자 류동시의 고조부 회문(晦文)이며, ‘여강전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다만 4선생이라고만 썼고, “학․애․한․여” 넉 자를 밝히지 아니했으나, 회석의 중론이 모두 명기하라 하므로 드디어 “학․애․한․여”라고 썼다라고 하였으며, 병산서원 통문에는 밤중에 몰래 고쳐 썼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하회류씨가 이 통문을 파열한 것은 사실인데, 이 때문에 학․애를 주장하는 사림은, 이를 파열한 류형춘(柳享春) 등에 문자(文字)의 벌(罰)을 가했다. 동류 유생으로부터 문자벌을 받는 것은 유생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에 하회류씨는 호계서원에 절연(絶緣)을 고하고 이들과 단절(斷絶)했으며, 쟁론은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서원은 원래 배향자의 자손뿐만 아니고, 그 지방의 사림 등으로 관리되는 것이다. 호계서원은 사액서원으로 남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퇴계 서애․학봉 세 분을 배향한 곳이므로, 안동의 수선서원이라 일컬어졌으며, 안동의 사림뿐만 아니고 의성, 예천, 영주, 봉화 등 인접 여러 군의 사림도 역시 여기 통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임직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호계서원에 관계를 갖은 사람의 범위는 실로 넓었으나, 이에 이르러 하회류씨가 탈퇴한 것을 비롯, 애․학을 논하는 사림 ―서애학파의 사림은 이에 따라 모두 관계를 끊고, 서애를 배향한 병산의 병산서원에 모여 항상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여기에 반해 학․애를 논하는 사림 ―학봉학파 사림은 호계서원을 독점해서 항상 호계서원에서 일을 의논했다. 병론․호론이라 말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3. 대산 이상정의 추향(追享) 문제(問題)
병호시비의 주요 논점은 이상 애학․학애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호계서원의 묘위 천불천(遷不遷) 문제에 있는데, 이것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이와 같은 문제를 초래하게 된 대산 이상정의 호계서원 추향 문제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정은 한산이씨이며, 고려 말 유명한 이색의 후예이고,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 영조 때에 벼슬길에 올라 관직은 형조참판에 그쳤으나, 그의 학문은 근대에 드문 귀한 것이었으며, 근세영남의 대학자라고 일컬어 졌다. 그는 밀암(密菴) 이재(李栽 *갈암의 아들)의 문인이며, 학봉학파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아니 퇴계학파의 적통을 전승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르므로 영남의 남인 특히 학봉학파 사람들은 모두 그를 숭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그를 한 고을의 수선서원인 호계서원에 추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의논이 처음 일어난 것은 순조 12년 임신(1812년)이며, 같은 해 10월에 호유는 예안향교에서 도회를 열고 ―보통 이를 선성도회라 한다. 예안의 구호가 선성이기 때문이다.― 우선 도회에서 논의하여 이를 결정한 뒤, 추향의 상소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병유와의 의논일치를 볼 수 없어, 드디어 산회되고, 이후 4∼5년간, 이 문제는 지붕 밑의 사담이 되고 말았는데, 순조 16年 병자(1816) 12월에 이르러 호유는 다시 이를 관철하려고 청성서원(靑城書院 *안동 풍산 막곡. 권호문 배향)에서 도회를 열었으나 이때도 역시 병유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병유는 무엇 때문에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게 되었는가.
우선 두 번의 ‘도회일기’와 병유가 호유에게 보낸 많은 ‘통문’을 참고로 하여 이를 살펴보면, 첫째는 호계서원에 추향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즉 병유는 호계서원의 사당 내부의 형상이 후공전착(後廣前窄 *뒤쪽은 너르고 앞쪽은 좁음)하여 만일 추향하려 하면, 원래 있던 위판을 전부 옮겨서 뒤로 물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 백 년 동안 편안히 모신 위판을 하루아침에 천동하는 것은 후배로서 심히 죄송한 일이라고 하며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고 있다. 이 사당 내부가 후광전착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뒤에 문제가 된 묘위천동의 변란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된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다음절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병유는 이런 이유 때문에 대산의 추향을 방해했다.
둘째 이유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유훈이다. 즉 병유는 우복의 유훈에 호계서원의 문은 다시 열지 말라 하는 것이 있다 하여, 선배의 유훈이 있는 이상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주장이다. 지금 만일 대산을 추향하기 위해 문을 열면, 이는 그 유훈에 위배되는 것이며, 선배를 존경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호유는 이 유훈을 병유가 조작한 사실무근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전적으로 의심이 가는 문제이다. 우복은 서애․학봉의 자손이 서로 위차를 두고 다투는 것을 봤으므로, 후세를 경계하기 위해 혹 이와 같은 유훈을 남겼을지도 모르지만, 그 출처는 실로 애매하다. ‘우복집’에는 이와 같은 글은 없다.
병유는 가가전송되는 것이라 하지만, 그래서는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우복이 이와 같은 유훈을 남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 것이 첫째의 중요한 목적이므로 춘추 제향을 올릴 때 사당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1년에 두 번은 반드시 여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의 두 가지 이유는 병유가 호유에게 통한 문서에 근거를 두고 정리한 것인데, 호유의 기록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모두 병유가 조작한 사실무근의 말이라는 것이다. 병유가 감이 이렇게 한 것은 당시 학․애가 공론이었으므로 대산을 추향할 때 서애․학봉의 위판 위치를 바꾸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과연 호유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하는 것은 지금 당장 말 할 수 없으나, 당시 병유는 호계서원에서의 서애․학봉의 위판 순서를 바꾸지 않을까 걱정한 것은 사실이다. 순조 5년 을축(1805) 겨울, 학․애론이 우세해졌을 때, 승무의 순서를 학․애라고 한다면, 호계서원의 위차도 역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제창한 사람이 있다. 이 말을 꺼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병유에서는 금계의 김완찬(金宛燦)이라 하고, 김완찬과 그의 아들 김진락(金鎭洛)은 자기가 말한 것이 아니고 을축(1805) 겨울, 경성 소청에서 하회의 류철조(柳喆祚)가 학(鶴)․애론이 우세한 것을 보고 성을 내며 발설한 것이라 하고 있다.
이 말은 병유의 말과 같이 호유쪽에서 먼저 발설했다고도, 또한 김진락이 말하는 것처럼 병유 쪽에서 성이 나서 말한 것으로도 생각되나, 이는 선배가 제정해서 수 백 년 동안 편안하게 모신 위판을 전환하는 큰 문제에 관여된 일이므로, 모두 그 발언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래서 이는 누가 먼저 발설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호계서원의 서애․학봉의 위판을 전환하려는 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병유가 이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병유는 추향을 방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즉 병유가 대산 추향 방해의 제3의 이유였다.
병유가 대산추향을 방해하는 소이는 오직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즉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에 관해서, 대산의 자손과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퇴계서절요’는 이상정이 퇴계가 저술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본을 따서 편찬한 것으로, 퇴계의 언행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이 문제가 된 것은 소호의 대산 본손가에 소장하는 ‘퇴계서절요’ 목록 중, 서애에 대한 각주에 오류가 있는 것과, 서애의 형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에는 각주도 달지 않고 성명만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다. 마침 순조 14년 갑술(1814) 9월에, 대산의 종손이 일반의 요청으로 ‘퇴계서절요’를 출간하려 할 때, 하회류씨는 이점을 지적하고 출판하지 말 것을 청했으나, 대산의 종손은, 비록 겸암의 각주가 누락되었고, 서애의 각주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퇴계서절요’는 대산 선생의 수필본이므로, 후배들이 감이 자의로 손을 대서 개정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서애의 각주에 어떠한 오류가 있었던가. 이것은 병산서원에서 고산서원으로 보낸 통문 속에 상세히 적혀 있다. 그것을 초록하면 다음과 같다.
復有仰質者 目錄中 文忠公 條題註所錄 叉有爽實 有曰 以壬辰中興功 錄扈聖 封豊山府院君云云 生等以爲 文忠公 以宗系辨誣事 萬曆庚寅 錄光國功 封豊原府院君 壬辰中興功 則至甲辰 錄扈聖勳 載任國乘與年譜 昭然可按 而今註中 乃以庚寅作壬辰 光國作扈聖 豊原作豊山 一則庚甲之勳相換 一則父子之封號相蒙
여기에 의하면 ‘퇴계서절요’ 목록 가운데 서애의 각주에는 만력경인광국의 공을 기록하지 않았고, 모든 훈공을 모두 임진의 일로 하고 있으며, 또한 풍원을 풍산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서애의 자손은 이 때문에 장문으로서 두세 번 논쟁을 한 일이 있었는데, 대산의 자손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으므로(다만 퇴계서절요의 간행을 정지停止하였지만) 대산 자손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자기 조상에 대해 유념해서 쓰지 않았던 대산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곧 병유가 대산을 호계서원에 추향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이로부터 5년 뒤, 즉 순조 19년 기묘(1819년) 7월에 이르러 하회류씨는 풍기 황언한(黃彦漢)의 집에서 ‘퇴계서절요’의 한 별본을 발견하고 다시 논쟁한 일이 있었다. 황씨 소장본도 또한 대산의 필사본이며 언한의 아버지가 대산의 제자였으므로, 이 책이 황씨집에 전하게 된 것이다. 보통 황씨의 소장인 ‘퇴계서절요’를 기본(基本 *풍기본이라는 뜻)이라 하는데 대해 소호 본가에 있는 것을 호본(湖本 *소호본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리고 기본은 그 목록 중에, ‘겸암의 각주에는 상세하게 적혀 있고 서애의 각주에는 앞에서와 같은 오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하회 류씨는 대산의 종손에게 기본으로서 호본의 결함을 보충할 것을 청했으나, 기본은 대산 초년의 초본이고, 호본은 만년의 정본이므로, 정본을 고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또 거절했다.
요컨대, 병유는 표면에는 호계서원에 추향의 여지가 없는 것과, 우복의 유훈이 있다고 하면서 대산의 추향을 방해했으나, 그 이면에는 대산 추향 시 서애․학봉의 위차가 전환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또 대산이 그 저서 ’퇴계서절요‘에 겸암․서애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호유는 그 뒤에도 자주 추향 문제로 도회를 열었으나 묘위 천동의 문제가 일어난 후, 병유가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으므로 대산의 추향은 실현시킬 수 없었다.
4. 묘위(廟位)의 천(遷)․불천(不遷)론
상술한 바와 같이 호유는 대산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추향하기 위해 예안향교, 청성서원에서 두 번 도회를 열었으나, 모두 병유 때문에 좌절되어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 대산의 추향문제는 병호시비의 중심인 호계서원의 원위(元位 *퇴계 선생 위판)가 옮겨졌느니 아니 옮겼느니 하는 문제를 유발해서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이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청성도회 다음 달, 즉 순조 16년 병자(1816) 12월이다. 이 달 말엽, 하회류씨는 의인의 이겸순(李謙淳) 등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고, 이로 인해 묘위(廟位 *사당의 위판))의 천동이 있었음을 알고, 순조 6년(1806) 11월에 류향춘 등이 문자벌을 받은 이후, 발을 들어 놓지 않았던 호계서원에 가서, 조사한 결과 중당에 있었던 원위가 북벽 밑에 옮겨져 있다고 말하면서 병산서원에 모여 누군가가 움직여 옮긴 위판을 원래 장소에 환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의논하고, 환안의 도회를 다음 달인 정월 18일로 정해서 이 뜻을 도내에 통보했다.
여기 대해 호유는 사당 내부의 현상은 수 백 년이래 조금도 변함이 없고, 원위는 북벽 밑에 있다고 하면서 병유가 말하는 묘위(廟位 *사당의 위판) 천동설(遷動說 *남몰래 움직여서 옮김)은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망한 설이라고 하며, 병유보다 하루 앞서 도회를 열고 공론으로서 이 문제를 결정하려 한다고 그 뜻을 도내에 통보했다. 그리하여 이 병유와 호유의 도회는 예정대로 순조 17년 정묘(1817) 정월 17, 18 양일간에 걸쳐, 호계서원에서 열려 도내의 유림 700여명이 모여 묘내(廟內 *사당 내부)를 조사하며 돌아보았는데, 병유는 천동했다고 주장하고, 호유는 천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서, 말이 오고가는 사이에 감정의 격돌이 일어날 뿐 아무 해결도 못보고 산회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뒤로는 서로 증거를 들어, 혹은 말로, 혹은 글로서 묘위의 천 불천을 논쟁했지만,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각 대구 순찰사영(巡察使營 *경상감영)에 호소해서 이를 바꾸려 하였으며, 나아가서 조정에 상언(上言 *백성이 임금에게 글을 올림)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결론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부수된 문제가 많이 파생하게 되었다. 거기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기로 하고, 먼저 양자의 통문 및 정영장 등에 의해서 병유가 묘위를 천동했다고 주장하고, 호유가 천동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근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각각 거론된 것을 세분하면 한이 없으나, 병론은 세 조목, 호론은 네 조목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병유가 천동했다고 주장하는 증거를 말하면, 제1은 사당모양의 후광전착설(後廣前窄說 *뒤는 넓고 앞은 좁다)의 공론이다. 그 주장하는 바는 중당에 있었던 원위를 북벽 밑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이므로 원위가 중당에 있었다는 것, 즉 묘내의 후면이 넓다는 것을 밝히면 천동설은 성립된다. 그러므로 묘내의 후광전착은 영남 원근이목(遠近耳目)이 다 함께 보는 바라하며, 이것이 공론임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1) 李謙淳의 書
廬江事變證左 三從弟遇渟 去臘月間 往臨河權積仁家 歷路瞻謁奉審 則元位奉安於壁下 間不容手 與曾前後廣前窄之說 不啻丁寧相反 心甚訝惑 到權戚家 設問廟貌 則權以爲 後面一人恢恢往來云 … 遇渟歸傳所見與所聞 鄙鄕聽之者 亦皆驚惑 轉相探問于曾前瞻謁之人 則面面所言 皆與權戚之言相符 …
(2) 周溪 儒生의 聯連中의 文
廬江廟貌之後廣前窄, 鄙院章甫之曾所講熟 一道士林之所共見知矣
(3) 丁丑 正月 18일 도회에서 도의 유생 등이 중당봉안설을 한 것.
(4) 호유 김방철(金邦喆)이 병유 류철조(柳喆祚)에게 묘내는 후광전착이라고 말 한 점.
이상 이겸순 및 주계 유생들은 모두 본래 병론을 지지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말을 믿고 공론이라 할 수는 없다. 다음에 도유가 중당 봉안설을 말한데 대해서는, 병산답사빈문에 다만 막연하게 도유가 이런 말을 했다라고 적혀있어, 도유의 누가 말했다고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호유측과 그 도회기록에 의하면,
朴在璣曰 此院廟貌之中堂 十六歲時 聞於生曾大夫
金公員曰 虎溪廟貌之中堂 鄙家傳授 已四世矣
이라 하고 있는데 영주 박재기, 예안의 김공원이 중당 봉안설을 발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병론측 사람의 주장이므로, 이것을 갖고 공론이라고 할 수 없다. 다음에 호유인 김방철이 후광전착설을 말한 것에 대해, 김방철 자신이 이를 부정하므로, 이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요컨대 병유가 묘내의 후광전착이 공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병론들만 하는 말이고, 이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더 정확한 증거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제2는 선성도회에서의 양자의 수작이다. 즉 앞에 말한 대산추향을 위해 모인 순조 12년 壬申(1812) 10월의 선성도회 및 동 16년 병자 11월 청성도회에 있어서 병유 쪽에서, 만일 대산을 추향한다면, 수백 년 간 안치한 구위를 천동시키는 것과 같은 일은 없겠느냐는 물음을 제출했을 때에 호유는 만일 추향이 공론이라면 구위(舊位)의 천동은 그렇게 미안한 일이 아니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이때는 아직 묘위 천, 불천의 분쟁이 일어나기 이전이므로 병유는, 만일 원위가 본래 북벽 밑에 봉안되고 있었다면, 이때 천동 운운하는 말은 나올 이가 없고, 또 호유는 천동이 미안하지 않다고 대답할 이가 없으므로, 이것은 원위가 중당에 있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동의 명확한 증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유는 그때의 일은 가정적인 말이므로, 그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변명하고 있으나, 묘위 천, 불천 논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호유에게 매우 불리한 일이며, 이는 천동의 한 증좌가 되기에 충분하다.
제3은 ‘우복집’에 “只依文廟坐次 豈容他說云云(*다만 문묘의 좌차에 의거해야지 어찌 다른 설을 용납하겠습니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술한 광해군 12년(1620)에, 서애․학봉을 여강(호계)서원에 추향할 때 여강, 병산, 임천의 세 서원 유생이 두 분의 위판 배치에 대해 물었을 때 우복의 답이다.
병유는 이를 해석해서 문묘는 문선왕(공자)을 중심에 봉안하고, 사성 십철을 각각 문선왕의 남방, 동서에 분봉하고 있으니, 문묘는 묘내의 후방이 넓다고 주장했다. 우복집의 전문에 의하면 호계서원의 묘위의 좌차를 문묘의 예에 따랐다는 것이 분명하므로, 호계서원의 묘내의 후방이 넓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므로 천동한 증거라고 했다. 병유의 이 해석은 일견 타당한 듯하게 보이지만 이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오류가 있다. 원래 광해군 12년(1620)에 세 서원 유생이 우복에게 물었던 것은 서애․학봉의 위차이지 원위의 배치가 아니다. 즉 이것을 동서로 분봉하는가 또는 동일렬(東一列)에 봉안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복이 답한 것은 이것을 동서로 분봉할 것을 지시한 것이 결코 문묘의 좌차에 따라, 퇴계의 위판을 중당에 분안하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를 갖고 천불천의 증거로 할 수는 없다.
병유가 천동했다고 하는 증거는 대략 이와 같은 것이지만, 다음에 호유의 천동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제1은 묘내의 천동 흔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순조 17년 丁丑(1817) 정월 18일의 호계도회 때, 병유 호유 및 도유 등이 묘내를 검사해서, 상탁(제상, 교의, 향안)의 다리 아래의 마룻바닥이 다른 곳 보다 희고 또한 움푹 들어간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즉 호유가 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커다란 증거이지만, 병유는 다른 고서원(古書院)들의 상탁다리 밑에는 요면(凹面)도 없고 또한 희지도 않는데, 오직 호계서원에서만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묘위를 천동한 뒤 일부러 조작한 것이라 하며 일소에 붙이고 있다. 병유가 말하는 대로 호유가 일부러 조작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때 상탁다리 밑에는 흰 기미가 있었고, 요면이 있었던 것은 수백 년간의 긴 세월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정치한 제상(祭牀)이므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제2는 원위를 중당에, 배위를 협문 내에 봉안했다고 하는 병유의 설은 묘내의 척도 및 각 위의 교의, 제상, 향안이 차지하는 넓이에서 미루어 각각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호계서원의 사당은 합계 6칸이며 동서가 3칸 남북이 2칸이다. 그래서 동서는 23척 7촌, 남북은 15척 8촌이므로, 한 칸의 길이가 꼭 7척 9촌에 해당한다. 또 각 위판이 차지하는 곳은 교의, 제상, 향안을 합친 전후의 길이가 6척 남짓하며, 제상 좌우의 길이가 6척2촌이므로, 꼭 6평방척이다. 그러므로 만일 원위를 중당에 봉안했다고 한다면 그 남방, 양협문(정문 양측에 있는 소문) 내에는 배위를 봉안할 수가 없다. 비록 봉안할 수 있다고 해도 분향, 헌작을 하기에는 매우 불편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척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같은 호유 가운데서도 한 칸의 길이를 혹은 6척, 혹은 7척 등 여러 가지 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유는 척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논박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생각해서 후면 무용의 땅을 넓게 하고, 전면 유용한 땅을 좁게 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제3은 여강서원은 도산서원과 같은 날에 그 위판을 봉안하고, 그 규모는 역동서원의 예를 따라서 서로 참작해서 제정했으므로, 역동과 도산이 이미 벽 밑 봉안인 이상, 오직 홀로 여강(호계)만이 중당 봉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역동서원은 지금은 폐철되였으나 한 때 예안에 있었고, 고려말 우탁(제주)을 제향하고, 도산서원은 지금 아직도 안동군 도산면에 있으며, 퇴계를 제향하고 있다. 그래서 두 서원이 모두 벽 밑 봉안임에는 의론이 없으나, 위판을 봉안할 때 역동, 도산의 규모를 참작하고 제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즉 이 사실을 기록한 문안(文案)인데, 호유는 그것이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광산김씨)의 행장에 있다고 하지만,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으니, 여기서는 논하기를 피하기로 한다.
제4는 원임재석의 제사(題辭 *관청의 판결이나 지령, 비답)이다. 일찍이 호계서원의 재임을 거친 김희주(金熙주)등 16명이 호계서원의 사당 위판을 옮겼다는 말을 듣고 호계서원의 위판은 벽 밑에 봉안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의 제사를 발한 일이 있다. 호유는 이것을 천동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로 삼고 있다. 그렇지만 김희주 등 16명은 모두 호론 측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병유가 주계의 유생 및 이겸순 등의 서신을 후관전착의 증거로 삼은 것과 같은 것이다.
양자의 주장하는 바는 대개 이상과 같은 것이나 그것에는 각각 일장일단이 있어서 여기에서 경솔하게 단정할 수가 없다.
5. 정영(呈營) 사건
병호시비의 중요 논점은 앞에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호계서원의 위판 천․불천이라는 일, 즉 병유는 호유가 몰래 위판을 옮겼다고 말하고, 호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고을 안에서 이와 같이 논쟁을 해도 해결할 수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들은 대구 순영(巡營), 즉 관찰사에게 이를 소송하고 나아가 왕에게 상언하기에 이르렀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따르는 시비의 묘위 천․불천 외에 또 새로운 문제가 제출되어 양편의 다툼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호론측에서 말하는 소위 위관문제(僞關問題 *문서위조 사건)인데, 이를 논하기 전에 먼저 정영사건(呈營事件)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일을 최초로 관찰사에게 소송한 사람은, 병유 김상공(金相恭) 등이며, 그것은 꼭 묘위문제가 있은 지 3개월째인, 즉 순조 17년 정축(1817) 2월 20일의 일이다. 그들의 정영장(呈營狀 *고발 또는 소장)에 의하면 먼저 호유가 묘위를 천동한 것을 논하였다. 다음에 호계서원의 묘직(사당지기)을 소환해서 범인을 구문하고, 범인을 법률에 따라 엄벌할 것을 청하였으며, 위판을 구 위치에 환안할 것을 청원하고 있다. 그때의 관찰사는 김노경(金魯敬)이었다. 그는 호를 원당 또는 추사라고 하는 유명한 김정희의 아버지이며, 뒤에 이조참판의 중직까지 이른 사람이다. 감영에 제출된 정영장에 대해 관찰사는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려 환안을 허락하였다.
… 苟有是也 誠不可不及早還奉是遺 其暗地還奉之儒生段 士林齋會 各別施罰事
다만 이 비답에 대해 여강전말은 “誠不可不及早還奉”이하의 불자(不字)는 병유의 삽입이라는 주석이 있으므로 만일 그렇다면 관찰사는 환안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전후의 관계에서 이를 살펴보면 이는 주석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렇고, 병유는 위와 같은 비답을 얻었으므로 의기가 크게 올라 안동에 돌아와서 관찰사의 명령이라 하여 묘위를 환안하려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호유는 크게 놀라 한편 서원 주위의 경계를 엄히 하고, 다른 한 편으로 병유의 무망(誣罔 *남을 속임)을 논하는 진정서를 감영에 보내어, 관찰사가 친히 호계서원에 와서 사당 내부를 돌아보고 심사하여 진부를 경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청원했다.
관찰사 김노경이 이 호유의 소장을 보자,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어, 이 논쟁은 진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먼저 병유에게 보낸 비답을 취소하고, 다시 사림의 일은 관청에서 처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병유는 환안을 허락한 먼저의 비답을 구실로 자주자주 환안을 거론하며 도회를 열고 호유에 압박하니, 호유는 그때마다 서원의 주위를 경계하며 이를 저지하는데 힘을 썼으며 그 사이에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그 뒤 양편은 여러 번 경상감영에 소송해서 그 시비를 논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노경는 관찰사가 결정지울 문제가 아니라는 제사만은 내려, 전여 무관심의 태도로서 싸우는 대로 방치해 두었다. 다만 김노경뿐만 아니고 그 뒤 모든 관찰사도 모두 같은 태도를 취했다.
만일 그때, 관찰사가 권력으로서 이를 처결했다면, 이 싸움은 혹은 진정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림 사이에 이러한 다툼이 있는 것은 심히 유감 된 일이며 불상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위정자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를 통징할 일이었다. 그런데 김노경를 비롯한 모든 관찰사는 모두 일관되게 싸우는 대로 방치한 것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래 조선에서는 유림의 세력이 매우 커서 그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바는 정부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싸움은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한 도의 유림 대 유림의 문제이며, 양편의 세력이 모두 매우 컸다. 그래서 관찰사가 일시적 공권력으로 이를 눌리려 해도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잘못하면 관찰사 자신도 그 와중에 휘말려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관찰사가 무관심의 태도를 취하게 된 소이이지만, 이보다도 더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시의 집권층이 서인이므로 관찰사 내지 안동부에 파견된 사람은 모두 그 당파 사람이며, 이 논쟁의 주인공인 남인과는 전연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인은 정치상으로는 아무런 권력도 없었지만 그들은 다시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고, 서인은 남인의 재기를 겁내고 있었다. 그르므로 서인은 남인들 서로 간에 이러한 다툼이 있어 그 힘이 분열되는 것을 오히려 기화(奇貨 *못되게 이용하는 기회)로 생각할 정도였으며 이를 애써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이로서 남인의 파멸을 기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뒤의 일이지만 헌종 원년 을미(1835) 9월에, 관찰사 조병상(趙秉相)이 안동 영호루에서 양반 유생을 회유하는 자리에서 한 그의 말에서도 이런 것이 잘 엿 보인다. ‘을미양조일기(乙未兩造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巡相曰, … 南人事不關西人, 嶺南之片片破碎, 固無關於吾輩, 且以心術言之, 則或有幸之者云云
관찰사 조병상이 이렇게 말한 것은 물론 반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이것으로 미루어 서인 일반들이 이 다툼을 보는 견해와 태도를 알 수 있다.
더욱 남인들 가운데에는 중앙정부에서 경상감사를 임명할 때 미리 병호시비에 관계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어 파견한다는 말도 있고, 또 서인이 이 싸움을 조장했다는 말도 있다. 거기 대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나, 좌우간 서인은 이 사건을 조정(調停)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를 조정하려 한 자가 대원군이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뒤에 말하기로 하고, 다음에 위관 문제(僞關問題)를 살펴보기로 한다.
6. 위관 문제(僞關問題)
병․호 양측은 서로 경상감영에서 승패를 결정하려 했지만, 관찰사는 완고하게 이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병유는 왕에게 상언(上言)하기에 이르렀다. 병유가 이렇게 하기에 이른 것은 다만 관찰사가 자기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고, 호유가 대산 이상정의 추향상소를 올리려 하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앞에서도 말 한바와 같이 위판 문제는 호유가 대산을 호계서원에 추향하려 한 데서 생긴 것이므로, 만일 호유들 사이에 대산 추향문제를 거두어들인다면 위판을 움직여서 옮김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이 싸움은 스스로 사그라질 수 있으나, 그러나 호유는 끝까지 그 목적을 관철하려 하고, 또 순조 17년 정묘(1817) 5월에 같은 남인인 경기도 마전(麻田 *경기도 연천)의 미강서원(湄江書院 *미수 허목 배향서원)의 유생들로부터, 대산의 추향을 촉구하는 글이 왔으므로, 여기 한층 더 자극을 받고 드디어 같은 해 7월 2일, 타양서원(陀陽書院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서원)에 모여 이를 실행할 것을 의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유는 아직 묘위문제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런 일을 하려하는 것은 심히 옳지 않다고 말하며 주계서원(周溪書院 *와룡면 주계동, 구봉령 배향서원)에 모여 묘위환안을 상소할 것을 의결하고, 소수로서 김종규(金宗奎 *풍산김씨)를 선출했다.
그런데 호유은 어떠한 사정인지 몰라도 그 결의를 실행하지 않았으나, 병유은 드디어 그 유명한 김종규 등이 상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언의 주요한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호유가 묘위를 천동했다는 것을 논하고 이를 환안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를 상언한 것은 동년(1817) 9월 2일 순조왕이 경릉, 명릉, 홍릉의 삼릉에 참배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어가(御駕)막고 그 앞에서 상언을 하였다. 그래서 예조가 이를 왕에게 회계(回啓 *임금이 하문한 것을 심의하여 보고함)한 것은 같은 달 10일의 일이며, 그 보고서에는 ‘여강전말’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중앙의 기록인 ‘일성록’에도 역시 실려 있다. 다만 ‘순조실록’ 및 ‘승정원일기’를 뒤져봐도 이것이 보이지 않고, ‘비변사등록’에는 불행히도 순조 17~18연 부분이 훼손되어 있으므로 이를 살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강전말’과 ‘일성록’을 비교해 보면 뜻은 전적으로 같으나 자구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가 있다. 특히 ‘여강전말’은 이두가 섞인 채이지만 ‘일성록’은 그것을 뺏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구를 생략하고 간략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여강전말’로서 그것에 대한 원래대로의 원문을 볼 수 있으므로 ‘여강전말’이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알 수 있다.
또 ‘일성록’ 쪽은, 이 사건을 종합 정리해서 기록했으므로 전후의 관계를 보는데 좋다. 지금 여기 일성록의 기사를 실어본다.
禮曹啓 … 慶尙道生員金宗奎等 以安東虎溪書院三賢位版遷動 請行査本道 還安位次矣 按其狀辭 則虎溪書院 則文純公李滉尸祝之所 而以文忠公柳成龍․金誠一躋配矣 去年 安東進士柳晦文輩 將以贈參判李象靖 追配於該院 潛遷中堂奉安之位 貼於壁下後面云 而一則曰 三賢之外不當追配 一則曰 三賢之外又當追配 至以位次遷不遷 爲兩邊爭詰之端 而本院是宣額之所 則其配與否 一俟朝命而已 不命之前 奚以配不配爲爭 旣末及配 則先遷位版又何故也 請分付該道 兩造誨勉 明示可否 使許多縫掖 尊賢院而敦儒行 無敢以似此爭下之辭 更徹朝聞 … 並允之
여기에 의하면 예조는 김종규 등의 상언인 이 쟁론을 왕에게 아뢰고 그 처결방법으로서는 관찰사로 하여금 양쪽 유생을 한 곳에 모아 다시는 이런 일로 다투지 말 것을 회유하게 했다. 왕은 이를 윤허했다. 그래서 예조는 관찰사 김노경에게 다음과 같은 관문(關門 *하급기관에 보내는 문서)을 주어, 이를 실행하게 했다.
… 九月初十日 左副承旨臣韓耆裕次知 啓 依允事判下敎是置 判下內辭意奉審施行爲乎矣 到付日時 回移宜當向事 合行移關請 此亦中査實還安後回移次
이 문서는 매우 읽기 불편하지만, 그 요점은 앞에서 왕의 윤허가 있었던 일, 즉 양방 유생을 회유할 것을 명하고, 뒤에는 천동한 위판을 환안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뒤의 것, 즉 “此亦中査實還安後回移次”라는 말이 바로 호유가 주장하는 바의 위관(僞關 *위조 문서)인 것이다.
병유는 이상과 같은 문서가 관찰사에게 간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향리에 돌아가서 호유를 호령하고, 또한 묘위를 환안하려 했다. 그러나 호유는 예조가 왕에게 보고한 글에는, 다만 양쪽 유생을 회유하라는 말뿐이지, 아직 환안에는 언급이 없었는데, 관찰사에게 준 문서에서 돌연 이런 사실이 보이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1817년) 11월에 이를 예조에 하소연했으므로 예조는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리고, 이것은 예조에서 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今見單辭 乃有此亦中還安云云 若曰還安 乃是自決 又何行査 告君之辭所無者 何以別添一條 若非傳者之誤傳 必是中間之用奸 聞來不勝駭歎 往呈本道巡營 以下有無 以爲嚴處之宜當事
그래서 호유는 앞에 말한 문서 가운데 “合行移關請”까지를 예조의 원본문서라 하고 “此亦中” 이하를 병유가 첨가한 위조문서라 주장하며 병유 공문서의 위조죄를 논하였다. 그런데 병유는 이 문서는 동일인이 쓴 것이며. 또한 쓴 사람은 예조의 관리이고, 여기에 찍은 도장은 예조의 것이므로 위조문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는 병호시비에 있어서 묘위 문제 다음으로 중대한 것이며, 이후 이 때문에 자주 충돌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어찌된 일일까 조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지금 만일 당시의 ‘예조등록’이 있다면, 이 문제는 쉽게 풀 수 있겠지만, 그 원본이 지금 전하지 않으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위 예조가 호유에 준 제사(題辭)에 “임금에게 고하는 보고서에 없는 것을, 무엇을 갖고 한 조항을 첨가했겠는가. 만일 전달한 자의 오전이 아니라면 반드시 중간에서 간계를 부린 것이다.”라고 쓴 것으로 보아 그것은 예조에서 쓴 것이 아니고 따라서 위조된 문서와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문서가 나온 이후, 호유는 자주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경상도감영에 호소했으나, 관찰사는 한 번도 여기에 대해 위조라는 판결을 내린 일이 없고, 또 병유가 이 문서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사당 내부를 실사하고 위판을 환안할 것을 청해도 관찰사는 “此亦中者 乃是原關外 該曹之追書者 是不足援而爲重事”라는 판결을 내려, 이에 응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호유가 말하는 것과 같이 병유들이 첨서한 것이 아니고, 역시 예조에서 쓴 것이지만, 뒤에 추서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조에서 이를 추서한 자는 누구 일가. 순조 20년 경진(1820) 10월 2일, 관찰사 이재수(李在秀)가 안동군청에 양파의 유생을 모아서 위조문서의 진위를 조사했을 때, 병유 류가조(柳家祚)의 공사(供辭 *진술서)를 보면
柳家祚口呼供辭 大槩以謂 矣身卽柳璧祚之弟也 虎儒之以潛圖僞關掛書矣兄 盖以矣兄中庭試初試 獨留伴中 決科後 身往禮曹 問于曹吏曰 禮關辭意何如 曹吏答曰 以査以誘以飭以導云云 矣兄答曰 嶺外多士 千里跋涉 所望只在於還安二字 而原關中無還安字 心甚悵缺 曹吏曰 原關未盡之意 有此亦中揷入之例 小人當禀于堂上 以爲周旋云云 伊后數日 又往禮曹 更問曹吏 則果有此亦中還安 二字 其後虎儒執此爲僞 然矣身亦往營門 取見關辭 則書之者一人之筆也 該堂之署押與印跡班班 則虎儒僞關之設 甚險慝
라고 한 것이 있다. 이것에 따르면, “此亦中云”이라는 구절을 추서할만한 힘이 있는 자는 류가조와 조리(曹吏 *예조의 아전 관리)라고 생각이 된다. 但 이 기사는 호론측 기록이므로, 전체를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예조 관리가 이에 관여되었다는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종규 등이 위조문서는 병유가 아는 바 아니라고 예조에 올렸을 때, 예조 문서의 한 구절 “吏誡有罪”라고 쓰여 있는 점으로도 역시 알 수 있다. 또 순조 20년 경진(1820) 10월 11일, 금종규의 위조문서제작죄(호유는 항상 김종규를 위조문서 주범자로 보았다)를 논하는 호유의 소장에서 “曹吏裵光玉 卽蒙勘汰 而宗奎之至今假貸 寧可曰國有法乎”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예조관리는 배광옥(裵光玉)이며, 광옥은 이것으로 인해 면관을 면직 당한 사실까지도 분명히 밝힐 수가 있다.
요컨대, 이 문제는 호유가 말 하는 대로 병유들이 첨가한 것이 아니고, 역시 예조에서 첨가해 넣은 글귀이며, 이것을 추서한 것은 예조아전 배광옥이었다고 생각된다.
7. 묘위(廟位) 잠천(潛遷) 범인(犯人) 문제(問題)
논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발전하고 복잡해져서 진상을 규명하기는 매우 곤란해 졌으나, 또 서로의 감정을 격앙시키는 일이 순조 20년 신사(1820) 8월에 돌발했다. 그것은 병론이 주장하는 묘위잠천(廟位潛遷 *사당에 몰래 들어와서 위판을 옮김)에 대한 범인 문제이다. 지금까지 병유는 묘위 천동설을 할 때, 다만 막연하게 호유가 했다고 만 주장했을 뿐, 언제 누가 어떻게 천동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 호유의 한 사람인 이현주(李顯周)라는 자가 이것을 병유에게 통고했으므로, 그들은 묘위 천동의 진상을 알고 있다고 하고, 또 환안하라고 호유를 윽박질렀다.
그런데 이현주(*진성이씨 17세손으로 두루파 지파인 아호파로서 월곡면 구계리 세거)가 병산서원에 통고한 글을 보면 언제 누가 이를 천동했다고는 하지 않았으나, 일의 출처에 대해 당시 호계서원 재임인 박겸중(朴謙中)으로부터 듣고 알았다고 쓰여 있다. 이현주 혼자만이 아니고 현주의 일가인 아호이씨들이 함께 이 사실을 병유에게 통고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겸중은 자명(自明) 단자(單子)를 내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명하고 있다. 그 단자에 의하면 이현주는 전에 병유의 돈 300량을 받고 이 사건을 지어내려하다가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 마치 이현주가 병유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런 일을 꾸며서 만든 것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또 ‘여강전말’에는 병유가 이현주를 매수해서 이와 같은 사실무근의 말을 꾸몄다고 쓰여 있으나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병유는 이현주의 글에 의해 묘위 천동은 확실하다고 주장하며, 이 기회에 환안하려고 도내 각처에 도회 개최를 통고했다. 그리하여 도회는 예정대로 9월 27일, 호계서원에서 열려 그 석상에서 이현주는 순조 16년 丙子(1816) 12월 3일 밤, 소호의 이병운(李秉運), 삼현 류치직(柳致直), 사당지기 막삼(莫三)이 위판을 움직여 옮겼다고 말했다. 이에 묘위천동의 일시 및 범인을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병운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이를 부정했으나 병유는 그들을 그 진범이라 보고, 이미 범인이 나타난 이상 5년간이나 천동되었던 위판을 환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위판의 환안을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호유의 필사적 대항 때문에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다음달 2일 도회를 파하고 해산했다. 이때의 ‘도회일기’를 보면, 회의는 공전의 대혼란을 일으켰으며, 서로 격노하고 욕설과 억설로서 일관했다고 쓰여 있다. 추태백출하여 예의를 존중하는 유림회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주의할 일은 이현주가 병산에 알린 이후, 병유는 그 말을 절대로 믿고, 이병운, 류치직 등을 묘위 천동의 진범으로 단정했는데, 과연 그 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이현주가 전한 말을 상술할 수는 없으나, 그는 호계서원의 근처인 아호에 살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호론 편에 서 있었고, 이 논쟁이 일어난 뒤 호계서원의 원임을 거친 사람 같다. 그러므로 그는 상당히 유력한 호유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사람이 진범을 말했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발설할 때의 그는 호론 사람이 아니고 병론 사람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말하는 것은 호론으로서의 발언이 아니고 병론으로서의 말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전적으로 믿기가 어렵다.
다음에 호론은 이현주가 매수되어서 거짓말을 꾸며냈다고 하나 과연 그러할까? 여기에 대해 박겸중의 자명단자에 이현주는 전에 이것을 거짓꾸며내기 위해, 병유의 돈 300량을 갖고 자기와 사당지기 막삼을 유혹하다가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도회일기’를 보면 박겸중과 이현주의 문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齋席朴謙中曰 兄之誘我曰 本院是非 已成疑案 此時 君以院村之人 善誘廟直 使人證成遷動之 誰某與日月 則屛院錢三百兩 方在府中 當以二百兩償廟直 百金則君與我當分食云云 此言兄果不爲耶 李顯周徐曰 爲之
마치 이현주 자신이 호유 앞에서 그 수뢰사건을 폭로한 것 같이 되어 있으나 이들은 모두 호유 쪽의 기록이므로 또한 전적으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 요컨대 이것도 묘위문제와 같이 그 진상은 밝힐 수 없지만 이 사건이 있은 이후 병유는 이병운, 류치직을 그 진범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8. 대산실기(大山實記)의 논난(論難)
병호시비는 한 시대로 끝마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자자손손 전해져서 전통적 논쟁이 되어 오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해를 거듭할수록 서로의 질시반목은 더욱 그 도를 더해서 사소한 일에도 흠을 찾아 서로 공격하며 그치질 않았다. 그 가운데서 특히 기록할 만한 것이 ‘대산실기(大山實記)’에 관한 문제이다. ‘대산실기’는 말할 것도 없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실기지만 ‘대산실기’는 헌종 13년 정미(1847) 가을, 이상정의 자손 및 제자와 호유들이 고산서당(高山書堂)에서 간행한 책이다. 그것이 간행되자마자 병유는 ‘대산실기’ 속에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기록 두 세 곳을 찾아 호론을 공격하기 위해 순조 21년 신사(1821) 호계도회 이래 약 30여 년 간 겉으로는 별로 다투지 않았던(물론 이 사이에 논쟁을 중지한 것은 아니다) 쌍방 유림은 이를 두고 다시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병유가 문제 삼는 것은 ‘대산실기’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병산서원, 영천향교, 상주 도남서원 등 세 곳에서 각각 호유에 통고한 글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들면 제1은 대산을 실기에 찬양하여 “퇴계 이황 이후 오직 일인뿐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었다. 병유가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퇴계 이후 서애․학봉․우복․갈암 등 다수의 명유가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산만을 일인자로 한다는 것은 선배를 능멸하는 심히 과도한 기술법이라고 이것을 공격했다. 특히 병산서원으로부터 발송한 글에는 “어찌 주자 이후 일인뿐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퇴계 이후 일인이라고만 하는가”라고 비꼬면서 매도하고 있다. 생각건대 이상정은, 그 학문의 해박함과 실천궁행이라는 점에서는 퇴계 이후 영남의 학자로서는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실기에서 말하는 바는 지나친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2는 대산의 문인록을 편찬하고 성명을 열기하며, 그 밑에 분주로서 충재(冲齋)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서애(西厓)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학봉(鶴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한강(寒岡)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우복(愚伏)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후라고 한 것같이 명현의 성함을 직필하고 있는 데에 있다. 조선에서 선현 또는 조상을 칭할 때는 절대로 휘로 하지 않고, 그 호 또는 시호, 혹은 관명으로 나타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존현 존조의 도라고 한 것은 모두가 상식화된 일이므로 병유가 이를 공격하는 소이는 새삼스럽게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제3은 김종규 등의 상언을 칭해서 무고라고 한 것이다. 병유가 ‘대산실기’를 갖고 호유를 공격하는 주안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미 30년 전에 범인까지 나타나서 묘위 천동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김종규 등의 상언은 조금도 무고가 아니며 꾸며낸 말이 아닌데, 지금 이것을 무고 상언이라 하고 있고, 그것을 ‘실기’에 까지 쓴다는 것을 심히 합당하지 않다고 논하고 있다.
요컨대 병유는 ‘대산실기’에서 대산을 퇴계 후 제일인자로 하고, 명유의 이름을 휘로 하지 않았고, 김종규의 상언을 무고로 치부한다는 것 등을 들어 호유를 공격하고, ‘주자서절요’가 이미 배포된 것은 회수하고, 그 판목을 파쇄 없애버릴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호유는 이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많은 반박문을 발송하여 이를 변명하였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병유의 논박에 대해 적당한 반박은 되지 못했다. 여기서 앞의 제2항에 대해서는 쉽게 그 잘못을 사과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김종규의 상언을 무고라고 하는 것과 묘위 문제에 대해서는 30여 년 전 그들의 부조(父祖)가 주장한 바를 조금도 굽히지 아니했으므로, 이것을 중심으로 한 때 심한 논쟁이 전개되었었다.
9. 대원군의 조정(調停)과 호계서원의 철폐(撤廢)
병호시비 논쟁은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으나 마지막 결론으로서 이태왕(고종) 7년 경오(1870)에 대원군이 이 논쟁을 조정하려하다가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다음 해(1871) 4월 논쟁의 초점인 호계서원의 철폐를 명하게 된 것에 대해 알아본다.
병․호 논쟁이 영남남인의 대 폐해인 것을 묵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정자로서는 당연히 이것을 없애는 방법을 취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집권자인 서인 등이 조금도 이런 뜻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던 것은, 그들은 모두 남인의 힘이 분산되는 것을 속으로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제6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이에 대원군은 무엇 때문에 이 사건을 조정하려 했을까? 우선 그가 당시 안동부사 박재관(朴齋寬)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嶺南之諭安東爲宗 而午人京鄕之論 曰蔡(蔡濟公) 曰洪(洪良浩) 曰屛 曰虎 此是不吉之事 … 京而蔡洪已合相好 又結陳晋之誼矣 擲而屛虎 渠誰言重 我則至易也 今此京鄕之和協 卽欲導迎吉祥 歸福聖躬之計也 書到後 令須躬進該院 招致兩邊之人 出視此紙後 屛虎初次起鬧之往復文蹟 一一搜得上送 其中相相不言之地 期日相會 曰是曰非 歸之先天 縱今以後更結式相好矣 則此爲人和之本 人和然後 可以望元誕生也 …
이라 한 것을 보면 이 논쟁을 조정함으로서 길상을 맞이하고, 성궁(聖躬 *임금의 몸)에 복을 빌고, 원자를 탄생하게 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서신뿐만 아니고 앞서 그가 등용해서 판중추부사를 임명한 하회 류후조(柳厚祚)에게 답한 서신에도 역시 이런 사실을 말하고 있었고, 또 양편 유생에게 보낸 서신에도 쓰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표면상 구실에 불과하다. 이 싸움을 조정하려하는 참 뜻은, 분립된 남인의 힘을 통일해서 당시 가장 세력이 강한 노론과 소론에 대항하게 하여 한 쪽으로 치우친 정국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대원군이 시정에 있을 때 노론, 소론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잡자, 그 예봉을 노소론에 들이대고, 미약한 남인, 북인을 등용한 것은 세인이 다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원군을 남인이라고 하는 사람조차 있었으나, 왕족은 당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말 할 수는 없다.
아무튼 대원군은 남인 북인을 등용해서 노소론의 세력을 눌린 것은 사실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남인에게 해로운 폐단인 이 싸움을 조정할 필요를 느껴서 조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대원군은 이 싸움을 조정하려고 안동부사 박재관에게 앞에 말한 글을 내렸고 쌍방 유생을 보합(保合 *화합, 화해)시킬 것을 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박관용은 이태왕 7년 경오(1870) 8월 27일, 양쪽 유생을 호계서원에 불러서 이를 보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양편의 보합문제는 여기서 처음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이미 묘위 문제가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기되어 추로지향의 한 골 안에서 살고 있는 유림들 사이에 이와 같이 창칼을 맞대고 사림의 품격을 타락시키는 것은 개탄할 일이라고 말하며, 다시 자리를 같이하며 과거의 분쟁을 씻고, 미풍에 찬 옛 영남으로 돌아가자는 설은 양편에서 제출한 내용이 통문가운데 자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때문에 자주 도회를 열기도 했는데, 단 보합하는 데는 각각 서로가 달리 주장하는 한 가지의 조건이 있었다.
한 쪽은 묘위를 환안하기를 말하고 있고, 또 한 쪽은 현상대로 그냥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요컨대 지금까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쟁론의 폐해를 논하면서, 보합할 것을 제창한 일은 자주 있었지만, 각각 묘위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맺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들은 태도를 고치지 아니하였고 병유는 묘위를 환안하지 않으면 보합할 수 없다고 하고, 호유는 묘위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면 보합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안동부사 박재관은 양측의 쟁론을 조정할 길이 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묵묵히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매우 노하고, 안동부사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 양 유생가운데 우두머리를 엄벌하고, 또 문제가 된 ‘대산실기’ 및 기타 여기에 관계있는 서류를 모두 수색해서 보내줄 것을 명령하고, 다음해 신미(1871) 3월에는 논쟁의 초점인 호계서원의 철폐를 명했다. 호계서원의 철폐 명령을 받은 것은 이것이 병호시비의 원인의 인자가 될 때문만이 아니라 대원군의 서원에 대한 정책의 일환에 의해 철폐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때가 대원군이 전 조선에 걸쳐 서원 철폐를 단행했을 때이었다.
그런데 서원은 호계서원의 한 예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거기에서는 양반 유생들이 지기들의 기반으로 점거하여 서원 본래의 목적인 독서와 강학 등의 일은 전연 여사의 일로 삼고, 시끄럽게 정치를 의론하거나, 당쟁을 음모하거나, 천민을 학대하는 등, 여러 가지 폐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또 서원은 많은 전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으므로 대원군은 이와 같이 서원의 철폐를 단행한 것이었다.
요컨대, 호계서원은 이것이 병호시비 문제의 중심이었으므로 철폐되었는데, 대원군이 서원에 대한 정책에서 보더라도 역시 철폐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호계서원 철폐에 즈음하여 호유들은 비상한 반대를 시도하여 철폐의 명령을 회수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하기 위해 상경하였지만 대원군에게 몰리어 쫓겨나고, 유생들이 투옥되는 등 한바탕 비극을 야기 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계서원의 원사(院舍)은 마침내 1871년 9월 9일에 훼철되고 말았다. 그래서 병호시비 문제의 중심은 완전히 제거되었지만 오히려 이들은 잠시 동안 만이라도 선린관계를 맺지 못하고 서로 시비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병호시비는 이상과 같이 위차 문제를 주제로 삼고 그것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하여 다투었던 것이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늘 서애․학봉의 위차 문제가 잠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애․학봉을 호계서원에 종향하고, 그리고 문묘에 승무함에 있어서 서애를 선위로 하느냐 또는 학봉을 선위로 하느냐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퇴계학파의 정통을 정하는 데에도 서애로서 할 것이냐 또는 학봉으로 할 것이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병유는 서애를, 호유는 학봉으로서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병유의 통문 중에 여러 차례 “도산의 도통을 바르게 하렴”이라는 것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퇴계학통의 정통을 정하려고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여러 번 도회를 개최한 일까지 있으나 각각 그들의 사부(師父)로서 퇴계의 정통으로 삼으려 한 까닭에 이것도 역시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서애․학봉 두 분은 다 같이 퇴계의 고제로서 학문․도덕 또한 백중지간(伯仲之間)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퇴계학파의 정통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문제이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병호시비는 외면으로부터 보면 다만 위차문제의 싸움뿐인 것같이 생각되지만 내면으로 보면 애학․학애의 문제 즉 퇴계학파의 정통문제가 잠재하고 있고, 이것이 싸움을 더 한층 심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청구학총’ 1․3권. 1930~1931.)
1620년에 우복 선생이 위패의 서차를 재정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1621년 이후에 품의(여쭈어보는 것)한 글에 대한 답 (답문목) 입니다. "두 선생의 좌차의 선후에 대해서는 후학이 감히 망녕되이 논할 바가 아닙니다만, 마땅히 두 선생께서 평소에 서로 대하는 것이 어떠하였느냐에 의거하여 서차를 정하면 될 것입니다. 더구나 나이는 서로 간의 거리가 견수에 이치지 못하고, 작위는 서로 멀어서, 떨어진 자리에 있더라도 아마도 다른 의논은 없을 듯합니다."입니다. 그 유명한 年齒相去 不及肩隨 而爵位之相懸 又在絶席입니다. 그러나 학봉의 문인들이 향당에서 왜 작위를 논하느냐는 반발로 합의가 되지 않아서 1621년부터 1624년까지 임천, 병산 두 서원에서는 두 선생의 위패를 일년에 두 번씩 춘추로 여강서원까지 이봉하여 왔다 갔다를 반복했습니다. 향내 유림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위설하지 못했습니다.그러니까 1625년에 우복 선생이 대사헌으로 안동부의 나졸과 수행원을 데리고 호계서원에 와서 곳곳에 배치하여 놓고 강제로 학애 양 선생의 위패를 위설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호시비는 검재와 하회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학봉의 문인과 서애의 문인간의 시비로 보아야 합니다. 1805년부터 시작된 시비를 병호시비라고 세간에서는 일컽고 있습니다. 하회 중에서도 겸암 선생의 후손들은 대체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