屛虎是非


 수홍아, 수진아 역사 공부 하여라 3



   수홍이, 수진이가 들으면 참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병호시비다. 屛은 屛山書院을 뜻하고 엄마네 조상인 西崖 柳成龍을 모신 書院이다. 虎는 虎溪書院의 약칭인 동시에 우리집 검제측을 말하는 지칭이다. 그러니까 병호시비란걸 쉽게 이야기 하면 엄마네 집과 아빠네 집이 싸웠다는이야기다. 그것도 처음엔 서로 자기 조상의 位牌를 왼쪽에 놓아야 한다며. 엄마네 쪽에선 서애가 영의정을 지냈으니까 당연히 왼쪽이라고 주장하고, 우리집 鶴峰후손은 나이도 네 살이나 위이고 학문적으론 상대가 안된다고 우기며 싸웠다. 1620년에 시작된 분쟁은 250여년이나 끈 셈이다. 그만큼 그때를 살았던 우리들 조상들로선 심각한 문제였다. 시작은 廬江書院에 退溪를 주벽으로 하고 서애와 학봉을 봉안하는 과정에서 발단이 되었다. 그게 1620년, 17세기 초엽이었다. 그뒤 이 여강서원이 숙종 2년(1676)에 왕으로부터 호계서원이란 액자를 하사받아 嗣額 서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부르길 병호시비 혹은 鶴崖是非, 崖鶴是非라 했다.

   알고 보면 검제(金溪)와 河回는 서로 싸울래야 싸울수 없는 사이다. 학봉과 서애는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고 同門 修學한 사이인데 학봉은"서애는 나의 師表"라고 말했고 서애는"나는 학봉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서로 존경 했다. 또 퇴계는 학봉에게 傳統箴인 屛銘을 써 주었고 서애가 가르침을 받으러 처음 퇴계를 찿아 왔을 때 "이 사람은 하늘이 태어나게 했구나, 他日(훗날) 수립하는바가 반드시 클것이야"라며 극찬을 했다. 더구나 학봉이 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와  倭必不來라고 復命했다가 막상 壬亂이 터저 일본이 처들어오자 위기에 처했다. 이때 학봉을 구해준 사람이 左議政으로 있던 서애다. 또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혼인을 통해 핏줄로도 얽혔다. 하회사는 서애후손은 拙齋 자손인데 그졸제가 검제로 장가를 오셨다. 상주에 가서산 柳袗의 후손을 제하면 모두 검제 外孫들이다. 문제는 학봉이 29살 때 퇴계가 써주었다는 병명을 검제후손들은 首弟子로 인정한거라고 확신했고 학봉계열의 여러학자들도 이를 뒷받침하는 저술을 남겼다. 심지어 柳致  같은 학자는 학봉이 납실(猿谷)이란곳에 거주할 때 병명을 받았다고 그 자리에 병명서원 건립을 추진 하기도 했다. 학봉제자들이 하회를보고 서애는 再造之恩의 영의정을 지냈고 망한 나라를 새로 이르킨 명재상이었음을 기리며 당연히 위패를 왼쪽에 놓으시라고 사양하고 서애 제자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 나이도 학봉이 네 살 위시고 퇴계로부터 수제자란 인증으로 屛銘까지 받으셨으니까 말할 것 없이 위패를 왼쪽에 놓으시라고 우겼으면 참 아름다운 전설로 내려 올뻔 했다. 그러나 17세기 당시를 산 제자들은 굳이 자기 스승의 위패를 왼쪽에 놓아야 한다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다. 그래서 타협한게  당시 영남남인의 영수인 愚伏 鄭經世의 裁定을 받기로 했다.

    우복 정경세(1563-1633)는 서애의 수제자로 大提學과 왕자의 師父를 지낸 당시 영남학파의 제일 어른 이었다. 우복은 서애를 상석인 왼쪽에 모시라고 재정했다. "年齒의 差는 肩隨에 미치지않고 爵位의 차는 絶席에 있다."라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나이차 네 살은 별것 아니지만 관직으로 보면 영의정과 관찰사는 비교할수없이 큰것이란 말이다. 이 우복의 재정에 학봉제자들은 불만이 많지만 일단 받아드리므로 1차전은 서애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뒤  鶴峰,西崖,寒岡,旅軒 4賢의 陞廡 문제로 1805년 2차 시비가 일어나기까지는 18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정치,경제,사회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정치적인 측면에선 老論인 畿湖학파는 湖洛논쟁을 거치면서 정통학맥임을 자처하던 湖論(이 경우 湖論은 병호의 虎論이 아니고 호수 호자를 쓰며 韓元震,尹鳳九등이 주도함)이 사라지고 洛論을 대표 하던 李柬, 李縡, 金元行 계열이 학계와 정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正祖이후 少論도 배제되면서 노론의 전횡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영남남인은 철저히 권력에서 소외되었으며 屛虎 양측 중에서도 특히 屛論측이 타격을 심하게 받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15세기부터 영남지역의 농업발달이 학문의 진흥을 가져왔는데 이양법의 보급등 평야지대의 급속한 발전이 산간지역이 많은 영남의 상대적 우위를 잃어가는 현상을 불러왔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嫡庶의 차별이 가장 혹심했던 慶尙左道지역에서 노론의 사주를 받은 庶孼들이 조직화 하면서 도전을 시도했다. 이와동시에 노론은 영남을 효과적으로 분열, 무력화하기위한 갖은수단을 다 동원했다. 특히 1728년에 일어났던 李麟佐의 亂 같은걸 노론은 아주 교묘히 이용, 경상 上下道와 南,北人,少論의 싸움을 첨예화 시켰다. 또 영남의 서얼은 물론 신흥노론 세력을 집중적으로 부식하기위해 애를 썼다. 예를들면 1719년 慶州에다가 宋時烈을 모시는 仁山書院(남인들의 서얼세력동원), 尙州에다가는 1702년 宋浚吉을 모신 興巖書院, 1708년에는 金尙容,金尙憲을 배향한 西山書院, 1738년 안동에다가 김상헌서원(남인과 격렬한 싸움을 일으킴)등 많은 서원을 세워 끝없는 공격을 남인에 가하므로 중앙에의 관심을 못돌리게 효과적으로 남인들을 옥죄었다. 이에 따라 사소한 이해관계나 견해차로 날카롭게 대립한  현상들을 묶어 사학자들은  膷戰이라 부른다. <羅巖隋錄>에 나타나는 하회의 겸암.서애파의 시비, 하회와 미동 김씨 사이의 알력, 도산.병산서원 사이의 갈등등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게 다 이 현상들이다. 그결과 더더욱 생존을위해 관심을 향촌사회의 이해관계에 집착하게 되고 조그마한 문제에도 대립, 갈등을 격화시켰다. 영남남인은 정조때 京南(寒岡 鄭逑, 許眉 , 星湖 李瀷등을 거쳐 丁若鏞, 丁若銓, 權哲 身등 近幾地方에 뻗어난 퇴계학파를 京南이라 부른다)인 樊巖 蔡濟恭을 매개로 정치에 접근할려고 시도한다. 정조도 노론을 견제하기위해 영남남인을 외곽세력으로 키울려고 애썼으나  그의 죽음으로 그시도는 무산되고 노론은 영남남인을 효과적으로 향촌지배세력으로 묶는데 성공한다. 일본인사학자 <槽谷憲一>의 논문에  당시의 남.북인의 정계진출비율을 8.3%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치는 노론의 완전한 장악이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노론의 핍박 속에서도 퇴계학파중  학봉파를 대표하는 호론은 세나 학문적 깊이에서 병론을 압도 하게되고 거기에 따라 퇴계의 嫡統을 강하게 주장하며 당연히 우리것이란 인식속에 1805년 2차 병호시비를 맞게 된다! .   

   文廟란 영어로하면 Shrine 혹은 Pantheon이라고 표현하면 너희들이 이해하기 쉬울까. 이조시대 최고의 祠堂으로 조상이 여기에 모셔진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 이었다. 여기엔 Confucian의 원조인 孔子를 비롯  그 제자70명, 네 聖人을 중심으로 10哲, 宋朝의 6賢, 李朝시대와 중국의  유학자 111명이 配享되어 있다. 1805년 영남유림에서 학봉 金誠一, 서애 柳成龍 한강鄭 逑, 여헌 張顯光등 4賢의 문묘종사를 위해 그 자손 및 제자들이 서울에 모여 청원을 위한 솟장을 쓰면서 누구이름을 먼저쓰느냐는 문제 때문에 또 싸움이 시작 되었다. 학봉파는  나이순서를 주장했고 서애파는 이미 그 문제는 1620년 여강서원에 모실 때 우복 정경세의 재정으로 서애를 상좌에 놓은 전 예가 있다고 대응 했다. 서로 양보 하지않으니까 한강, 여헌파도 학봉이 위라고 虎論을 편들었다. 왜 그러냐 하면 앞에 설명 한데로 학봉파의 數나 학문적 심도가 屛論을 압도한 시점에 와 있는데다가 寒岡, 旅軒 두사람 다 벼슬을 싫어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한 이들이었으니 벼슬을 가볍게본 학봉파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屛論 측은 노발대발했다. 솟장을 독자적으로 내며 서열이 바뀌었음을 지적 했다. 같은 일을 가지고 두가지 솟장을 받아든 노론정권은 얼시구나 하고 둘다 받아드리지 않았다. 한강과 여헌측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듬해 11월 대구 伊江書院에 모여 학봉과 서애측을 빼고 자기들만 陞廡  상소를 내기로 결의하고 儒林에 通文을 돌렸다. 이를 접수한 학봉과 서애측은 虎溪書院에 급히 모여 대책을 상의 하며 한강과 여헌측을 규탄하는 통문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또 양측이 결정적으로 싸움이 붙었다. 통문을 쓴 사람은 虎論의 柳晦文이었는데 서애파 주장은 처음에 서애,학봉순으로 되어 있었는데 밤중에 학봉,서애로 바꿔치기 했다고 흥분, 병론의 柳亨春이 그 통문을 찟어 버렸다. 학봉파 주장은 처음엔 순서가 드러나지않게 네 선생 이라고 썼는데 모임에서 衆論이 차례로 明記하는게 좋겠다고  협의해서 학봉,서애 순으로 썼다고 했다. 문제는 통문을 찟은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호론측에서 柳亨春에게 文罰을 가했다. 문벌이란 당시로선 선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제재 방법이었다고 한다. 선비로서 해서는 않될짓을한 사실을 쭉적어서 서원 벽에 걸어놓는 것이었는데 이에 발끈한 병론측은 절교를 선언하고 호계서원을 떠나 버렸다. 역사학자들은 병론이 자발적으로 떠난게 아니고 호론한테 勢에 밀려 축출 당했다고 보고 있다. 그뒤 병론측은 모든 문제를 병산서원에 모여 처리했다. 호론은 호계서원을 독차지했다. 여기서 屛虎란 말이 생겨난거다.

  일이 여기 까지 가버린 원인은 앞서 이야기 한데로 정치에선 병론측이 우세하고 학문에선 호론측이 한수위인데 노론의 전횡에 밀려 병론측이 상대적으로 위축 된 반면 호론은 학맥이 점점더 커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병론측에 가담한 가문은 퇴계자손 중에선 上溪, 渼洞 金씨, 우릉골 宣城 李씨, 가일  權씨, 愚山의 晉州 鄭씨등 단출한 반면 虎論측 멤버는 엄청 많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퇴계후손 으로 下溪, 韓山 李씨, 全州 柳씨,닭실 權씨, 光山 金씨, 高靈 金씨, 靑道 金씨, 載寧 李씨, 固城 李씨, 光州 李씨, 永川 李씨, 산운 李씨, 英陽 南씨, 南平 文씨등 이다.  그러면 퇴계학파는 도데체 어떻게 이루어 져있는지 궁금해 지는데 대게 略述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陶山及門諸賢錄>이란 퇴계제자 명단엔 260여명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栗谷 李 珥, 高峰 寄大升, 蘇齊 盧守愼, 지제 洪仁祐등 갈라져 나간 이들을 빼고  뒷날 학맥의 師承 관계에 의한 제자를 거느리고 祖師로 된사람은 서애, 학봉, 한강 세사람을 꼽는다. 이3명 외로는 趙 穆 李德弘, 黃俊良, 權文海, 曺好益,, 吳 健, 朴光前, 丁時翰등이 유명한 학자들이다.,  

  서애파는 鄭經世, 柳袗, 柳元之 ,柳世鳴, 柳後章, 朴遜慶, 鄭宗魯, 柳尋春, 柳疇睦 이런 순으로 학맥이 흘러 내려 가는데 보시다시피 家學으로 전해 내려간다. 정종로는 정경세의 6대 손자이다. 류 진은 서애의 아들이고 류원지는 손자이며 류후장은 류원지의 손자이다. 류심춘은 류 진의 6대손이고 류주목은 류심촌의 손자이다. 또 류 진, 정경세, 정종로, 류심춘, 류주목은 尙州에 살았다. 그외 정도응,辛百源,李 埈, 李 集, 柳 規등도 서애계열 학자들이다.

  학봉파는 張興孝, 李玄逸, 李 裁, 李象靖, 南漢朝, 柳致明, 金興洛, 金道和, 李震相, 郭鍾錫, 權相翊 金秉宗, 曺兢燮, 李承熙 朴章鉉, 河謙鎭 李炳憲, 金昌淑, 金 榥, 宋贊植 등이 있다. 특징은 퇴계학을 집대성 했다는 대산 이상정에서 高弟들이 기라성 같이 있으며 병론 학자들도 보인다. 柳尙春, 柳謙祚, 柳泰春, 鄭宗魯, 李源朝도 병론인데 大山에게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호의 대립이 격화 되지 않았다는 원인도 있고 또 정종로 같은이는 외조부가 호론의 金道和다. 大山 李象靖의 수제자인 柳致明의  大坪約案에 오른이만 550명인데 문과 급제자만 11명, 생원,진사가 34명 나왔지만 屛論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 .이때부터 屛虎의 싸움이 치열 했다는 증거 이다. 김흥락의 제자 명단인 輔仁契帖에 오른이만 707명, 金道和 文人錄엔 322명 이나 올라있다. 이러니 虎論이 數에서 압도 했다고 내가 자꾸 쓰는 이유이고 虎論이 퇴계의 학통은 당연히 鶴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寒岡 鄭逑의 학맥은 특이하다. 우선 본인이 퇴계 뿐만 아니라 南溟 曺 植의 문하에도 드나들었다. 또 그의 학맥이 近畿學派의 開山之祖라는 眉瘦 許 穆으로 내려가서 영남이 아닌 서울을 비롯한 근기지방에서  뻗어난다. 그래서 이를 京南이라 부른다. 즉 京은 서울을 뜻하니까 서울 쪽의 남인이란 뜻이다. 또 미수에서 그 유명한 星湖 李 익으로, 거기서 우파는 安順庵 , 黃下廬, 許性薺으로 흐르고 좌파는 권녹암을 거처 정약용, 정약전 등으로 학맥이 흘러 간다. 천주교도 이계열을 타고 이땅에 들어오고 實學도 이줄기에서 꽃피운다. 결국 퇴계학파는 정치에서 노론에 밀려 학문 밖에 할것이 없었다는 여실한 증거다.

   자 그럼 제일 치열했던 3차 병호시비는 어떻게 전개 되었나 살펴 보자. 3차는 1812년에 발생한다. 屛論들은 몸만 병산서원으로 갔지 西崖의 位牌는 여전히 호계서원에 모셔져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다 大山 李象靖의 위패를 같이 모시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물론 호유측이 주도했다. 대산 이상정은 牧隱 李 嗇의 후손으로 원래는 서울 살았는데 고조부인 李弘祚가 광해군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환멸을 느끼고 식솔을 이끌고 외손인 西厓의 연고를 따라 안동으로 내려온 집안이다. 오늘날의 퇴계학이 일본, 미국, 독일, 대만, 심지어 모스코바까지  세계 수십군데에 연구소가 생겨 난데에는 大山의 功이다 .  그만큼 大山의 학문적 깊이나 업적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1812년 禮安鄕校에서 都會를 열고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合祀 하자고 결의 했으나 병론측이 극력 반대 무산되고 말았다. 병론측 주장은 호계서원에 위패를 모실곳이 앞이 좁고 뒤가 넓어 또하나의 위패를 추가하기엔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거 였다. 이는 앞에 내세우는 구실이고 대산을 追享 하면서 호론측이 이기회에 鶴峰을 上席에모시겠다는 의도로 해석 했다. 또 대산의 遺稿중 <退溪書節要>의 출판을 둘러 싸고 병론과 대산 제자,후예들과 격렬한 시비가 있었다. 퇴계서절요 본고에 언급된 西厓를 脚註에서 豊原府院君을 豊山府院君으로 誤記했고 謙庵은 각주도 없이 홀대했다는게 병론측이 노한 이유이다, 이의 시정을 대산 제자들이나 자손들이 받아드리지 않았다.  스승이 직접 쓴글을 감히 우리가 손 댈수 없다며. .

   특기 할 것은 퇴계학파가 대산에서 확 분화되기 시작한다. 정통파인 유치명 계열에서 보면 이단도 생겨 난 것이다. 대산 제자중 우뚝한 5명을 꼽으라면 첫째가  당연히 정제 유치명이고 성주의 李震相, 칠곡의 張福樞, 창녕의 曺兢燮, 김해의 許 전 이다. 이중 이진상의 <心卽理說>이 퇴계학설에서 벗어 나 있다. 문집을 도산서원에선 반송하고 상주 향교에선 불태우기도 하고 許薰은 이진상의 寒州文集의 교열을 거부했다. 이진상의 제자가 俛宇 郭鍾錫이다. 또 이제자가 심산 김창숙이다. 빠리장서사건이 이 계열에서 일어 났고 내 개인적으론 이진상, 곽종석 계열을 무척 좋아 한다. 그 책들이나 메모가 미국에 있어 이유는 나중에 추가 하마. 우리집은 철저한 유치명 계열이다. 우선 핏줄로도 大山의 高孫女가 내 고조모다. 고조모의 오빠가 유명한 학자 참판 李敦禹다. 또 수정제 柳鼎文의 외손자가 내 고조부다. 수정제라면 19세기 초엽 안동동부학단을 이끌었던 柳範休의 아들로 양대다 큰족적을 남긴학자다.  유명한 일화로 죽어 유림의 만장만 20리 따랐다는 내증조부의 사촌 柯山 金형模가 곽종석이 찿아오니까 설렁줄을 당겨 머슴방에 재워 보냈다는거다. 고종 년간에 유명했던 학자가 면우 곽종석과 艮薺 田 愚 이다. 곽종석은 高宗을 독대까지 하며 나라를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한다고 직언 했다. 간제 전 우는 신기리장수의 아들로 학문을 이르킨 특이한 학자인데 신분 때문인지 현실은 아주 외면하고 나중엔 계화도로 숨어들어가 소위말하는 界化學派를 성립시켰다. 또 서산 김흥락은 우리 종손인데 下人이 <黃遵憲私擬書>와 유길준의 <西遊見聞錄>을 어사가 보내왔다고 아뢰자 아무 대꾸도 안하고 장지문을 닫아 버렸다는거다. 이런 원칙주의 영향으로 뒷날 輔仁契帖에 올린 707인의 제자들 대부분 항일전선에 뛰어들고 해방뒤 건국훈장만 60명 받고 우리집안만 12명이다. 종가재산 18만평 다 팔아 독립자금으로 들어갔다. 상해임정 국무령을지낸 李相龍, 모진 고문 끝에 그 너덜너덜한 시신을 卍海가 거두었다는 一松 金東三장군, 빠리장서사건의 핵심멤버 였던 이중업, 송준필등 다 꼽을려면 한량이 없다 .이렇게 우리집 조상들은 원칙에 살았고 의에 매달렸다. 그럼 이야기가 옆길로 갔는데 다시 점점더 치열하기 시작하는 병호시비로 돌아 가보자.

  1812년에 시작된 3차전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호계서원이 훼철 되므로 일단락 짓는데 이 59년간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고 그이후 길게보면 해방을 맞을 때 까지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노론정권이 그냥 두고 볼리도 없었다.  大山追享의 여진이 길게 이어진 가운데 1816년 12월말 호계서원안의 위패를 옮겼다고 병론측이 들고 일어났다. 李謙淳의 투서로 발단된 이사건은 그진위는 지금 알길이없다. 병유들은 호계서원으로 달려갔고 서애의 위패가 北壁으로 가있는걸 확인했다고 한다. 병유들은 다음해 1월18일 도회 개최를 儒林에 통지했다. 이에 대해 虎儒들은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위패는 원래 북벽에 백수십년간 그 자리에 있던거고 병론측이 대산추향을 방해하기위한 야비한 트집이라고. 虎儒들은 屛儒보다 하루 앞당겨 1월 17일 都會를 열자고 유림에 알렸다. 도회는 양일간 서로 동원 경쟁을하며 1천여명의 선비들이 그좁은 호계서원 계곡을 매웠단다. 서로 논쟁만 있었지 진실은 밝혀진게 없다. 병유들은 경상도 관찰사 金魯敬에게 호소했다. 위패가 옮겨진걸 찿아내 처벌 해달라고. 김노경은 간단하게 위패를 원위치 하라고 판결했다. 호유측이 발끈했다 .병유측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가를 조목조목 따져 관찰사에게 반론을 제기 했다. 노론 관찰사는 남인들이 싸우면 싸울수록 즐거웠다. 이번엔 당신내들 싸움엔 개입하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병유들은 몇 번 도회를 더열어 복원을 주장했고 호유측은 꼼짝도 안했다.  어쩠던간 魯鄒之鄕으로 불리는 안동 유림의 자존심만 여지없이 구겨나갔다. 병론의 병호시비에 관한 기록인 <廬江誌>에 보면 1817년3월13일 경상도 관찰사 노론의 김노경이 순흥부사, 풍기군수, 창락찰방, 봉화현감을 데리고 도산서원에 나타나 원장 李 淳과 호론의 李泰淳, 李家淳을  노골적으로 공권력을 동원 협박 한다. 이 김노경은 秋史 金正喜의 아버지다. 결국은 병유는 정치력을 동원 호유를 압박했고 호유는 이에맞서 學緣에 근거한 탄탄한 조직력으로 대항 했다. 그럼 우선 호론이 어떻게 조직의 저변 확대를 해갔나를 살펴본 다음 병론이 대원군의 등장과 함께 정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柳厚祚를 통해 한 일들을 더듬어 따라가 보자.

  호론은 先賢을 추모하는 사업이나, 선배학자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사업, 사당을 건립 하고 정자를 세우는 일은 물론 끊임없는 講會(학술 세미나)를 통해 내부를 결속시켜 나갔다. 柳範休 주도로 金是溫의 景節祠를 건립하는데 몇 년에 걸쳐 온 정력을 경주한다. 김시온은 우리 현조인 靑溪公의 증손자로 원래 金守一의 자손이었으나 손이 없는 金克一집으로 양자를 들어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서 의병을 조직 맹활약했고 그뒤엔 오로지 經學 연구에 몰두 유림의 존경을 받는 깨끗한 삶을 살다간 師表였다. 1823년3월18일 경절사 낙성에 1000명의 유림이 모였고 모두 다녀간 儒生이 1800명이란 기록이 나온다. 이는 내가보기엔 좋은 단결 훈련 이고 일종의 변형된 정치활동 같다. 이어 1834년엔 경절사에 金學培를 追享하는 운동도 일어 났다. 그는 예조좌랑을 거쳐 經書校正官으로 일했는데 李端夏, 金萬重과 더불어 字學에 일인자로 추앙 받았으며 자기 字 天休를 딴 休體를 남긴 書藝의 대가이기도 하다. 학술적인 측면에선 1827년  유치명이 <대평약안>을 만들면서 定薺學派의 성립과 동시에 활발한 講會등 통해 학문적 깊이를  넓혀 나간다 .강회 기록을 쭉 훌터 보면 우리 직계조상들이나 外祖들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定薺派는 大坪約案 가입 儒生이 너무늘어 나니까 1839서 1844년까지 등록 중단도 했다가 1845년 다시 등록을 재개한다. 1847년 가을 <大山實記>를 간행하자 또 양측의 충돌이 시작된다. 병론측에서 柳相祚가 앞장 섰는데 특히 그의 아들 柳進翼등 150여명의 병유가 10월15일 모여 8개 항목의 부당성을 지적, 고산서당등 호론계 서원에 통문을 발송한다. 11월28일 상주 道南書院에서도 병론측이 모여 통문을 작성 호론측에 보낸다. 결국 1848년 1월15일 도회를 소집, 병론에선 류진익, 柳厦祚  호론에선 柳致儼, 金邁洙등이 만나 조정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2월9일에 다시 시도 했으나 또 실패, 급기야 2월19일엔 병유들이 유치명 집 뜰을 3일간 점거한 끝에 도회를 열어 柳祈睦, 柳進祚등이 대산실기 수정과 서애위패를 원위치로 돌리라고 주장 했으나 柳致明, 李晩慤등이 한마디로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고 거절 했다. 그해 12월에 유치명은 자기의 주장을 정리 유림의 여러 학자들에게 돌렸다. 이처럼 유치명 시대에 접어 들어 병호 분쟁은 한없이 치열해졌다. 아울러 호론들은 학봉이 적통이란걸 기정사실화 하기위해 학봉이 29세때 퇴계로 부터 받았다는 屛銘을 천착했다. 大山 李象靖은 <屛銘發揮>를 쓰고 李野淳은 <屛銘圖> 柳致儼은<屛銘發揮圖>를 그렸다. 병명이 무엇이냐하면 퇴계가 1566년 학봉을 위해 堯,舜,禹,湯,文王,武王,周公,孔子,朱熹까지 心學의 道統을 적어 준거다.

  이러다가 1863년 대원군이 등장하면서 정세는 확 일변한다. 대원군은 초야에 있을때 영남을 주유했다. 그때 상주 류진의 愚川派 종손인 柳厚祚집에 들러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영남유생들과 교류한다. 의성의 申錫祜집에 들렀다가 의기가 맞아 許交도 하고, 경주 양동 無添堂과 봉화 진양 강씨 집엔 현액도 남겼다. 낙파 류후조는 40세에 司馬試, 61세 文科 급제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고종3년에 右議政이되고 5년에 左議政이 되었다. 발탁 인사였다. 대원군은 정권은 잡았으나 지지기반이 허약했다. 노론일부, 조대비파, 서얼, 중인층등이 고작이었다. 남인의 협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집권10년간 기록을 보면 判書 이상엔 京南(서울등 근기지역 남인)은 12명 기용했으나 영남남인은 류후조와 星州의 李源祚만 기용했다. 둘다 屛論이었다. 北人은4명 기용했다. 인사를 이렇게 하면서 남인들의 지지는 몹시 갈망했다. 그래서 분열된 京南을 먼저 保合했다. 화해하는걸 그때말로는 보합이라했다. 경남중에서 蔡濟恭손자 蔡東述과 직각 洪殷鎬 사이의 오래된 갈등을 강제조정하고  龍洲 趙 형의 자손(교리 趙濟華)과 愚潭 丁時翰의 자손 사이 멀어졌던 것도 봉합했다. 병호 양측에 대한 보합도 대원군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羅巖隨錄(1870년8월 77쪽)에 나와있는 다음 글을 한번 보자.

    "영남의 鄕論은 안동이 宗長이다. 그러나 남인들이 京南들은 蔡(채제공)니 洪(홍양호)이니 하고 영남에선 屛이니 虎니 하니 모두 좋지못한 일이다. 설혹 원수사이라 하더라도 우리집에서부터 혐의를 해소한 뒤라야 모두가 이를 모방 할 것이다. 아직 和協하였다는 보고가 없다. 영남의 병호는 그들이 비록 어렵게 말하나 나는 지극히 간단하다. 지금 경향이 화협하니 이和氣를 맞이하여 임금에게 복이 돌아가게 하고저 한다. 편지가 도착한후에 안동부사는 몸소 해당 서원에 나가 양쪽 사람들을 불러 이편지를 보인뒤 병호시비가 일어나게된 초기의 오고간 文籍들을 모두 모아 올려 보내고 그가운데 서로 걸려 말하지 못한 것은 날을 잡아 和會하여 시비를 가마득한 먼 옛일로 붙여라. 그리고 그뒤부터 다시 好意를 맺으면 이는 人和의 근본이 된다. 인화한 연후에야 가히 元子의 탄생을 바랄수 있다. 금일 이말은  体天行道에서 나온 일이니 여러 선비들에게 曉諭하여 스스로 忠逆이 큼을 헤아리게 하라. 이러한 뜻을 장차 류후조에게 편지 쓸려고 한다. 류후조 역시 내가 원자의 탄생으로서 이말을 하면 뛸 듯이 기뻐 할 것이다. 내가 이일을  거론하는 것은 오랫동안  경영 한 것이다. 한번 발설 한후에 그만 둘수 없음을 잘 알 것이다."   이처럼 대원군은  공권력과 류후조를 통해 병호시비를 다루고 있다. 그럼 洛坡先生文集  卷1에 남아 있는 柳厚祚의 글을 보자.

     "1870년 7월 안동부사가 병산서원에 내린 帖紙를 보니 병산.호계서원에 소속된 각 문중 유생들을 이달 27일 호계서원에 모으고 관에서도 그때 참석한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합하께서 어떤 합당한 대책을 시달한 것이 있으리라 짐작됨니다. 1866년 봄 제가 병산.호계 양쪽의 보합한 사실을 알리온봐가 있어서 합하께서도 유념하신 것이 있으시어 沈東臣 안동부사에게 교시까지 있었으나 8월 제가 중국에서 돌아와 보니 아무런 결정이 없었습니다. 들으신바가 무엇이었으며 통촉하신바가 무엇이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비록 병산서원쪽 사람이오나 保合하는 일에 있어서는 많은 고심을 하였으니 어디까지나 사심이 아닌 公道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위의 글에서 병호의 보합은 대원군과 류후조와 공권력 만에 의해  모두가 화평해야 元子가 탄생한다는 논리로 밀어 붙였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1870년 8월27일 호계서원 에다가 호유 600명과 병유 400명을 모아 대원군의 지시를 전하면서 안동부사가 보합을 시도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대원군은 크게 노했다. 9월에 류후조와 안동부사에게 다시 보합을 지시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안 까지 언급했다. 대원군은 판서 최우형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리며 류후조의 역할에 대해 크게 실망 한다고 말한다. 나암수록 9월22일자 79쪽에 보면 대원군은 보합이 안되는 이유를 병유들이 겉으로는 자기말을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호유를 이기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최판서에 적고있다. 그러나 나는 대원군이 호유와 접촉이 있었나 하고 뒤져 봐도 흔적을 보지 못했다. 오로지 류후조와 공권력만 동원 했다. 그뒤 병호간의 보합은 강권에 의해 겉으로 이룩된걸로 나타난다. 나암수록 12월 기록을 보면 1870년 12월 호론을 대변하는 <大山實記>와 병론의 병호시비 기록인 <廬江誌>를 관정에서 破板했다는게 나온다. 그 다음해 10월 류후조는"명령을 받들어 보합한뒤 별다른 일" 없음을 보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화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柳道性의 <石湖集> 묘갈명에 나오는 글을 보면 20년 뒤인 1890년에도 병론을 대표해서 류도성과 호론을 대표하여 김도화가 만나 세가지 안건을 합의하고 饗宴禮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이때서야(1890) 병호는 서로 병호시비건에 대해 일체 언급을 금하기로 약조한 것 같다. 내가 문헌에선 찿을수 없었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말로는 그렇다고 나를 키워주신 큰집 又泉 金鎬冕 형님 말씀이시다. 대원군에 의해 강제 保合이 성립 된지 20년 지나서야 양측에 의한 자발적인 보합이 이뤄졌다는 말이다. 대원군은 南人을 이용 할려는 욕심만 있었지 얼마나 일은 부실하게 다루었나를 알수있다. 또 철권정치 일변도 였다. 대원군은 1865년 萬東廟 철폐를 시작으로. 1868년엔 전국에 미사액 원사를 철폐했다. 이때 우리선조인 학봉을 모신 臨川書院도 뜯겨 나갔다. 1863년 가을 李啓魯의 청으로 병산서원을 사액 한다는 명이 내리자 임천서원도 사액 서원으로 지정해달라고 청원중 이었다. 사액은커녕 임천서원은 훼철이란  극약 처방을 받자 定薺學派 유생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1870년11월17일 내 고조부를 비롯 14명의 유생이 상경 疏廳을 차리고 대원군에게 통지했다. 대원군은 대노했다. 그로선 독한 마음먹고 자기 선조인 仁平大君의 서원마져 뜯어놓고 시작한 일이었다. 내고조부는 12월10일 구류되어 21일 함경도 金城으로 유배를 떠났다. 이때 같이 유배를 떠난 학자는 14명으로 李文稷, 柳基鎬, 金養鎭, 李집, 李경在, 權胄煥, 張九鳳, 金耆永, 李炳瀚, 權光夏, 李晩協, 金秀洛, 李찬燾,  그리고 우리고조부 金헌洛등 이다. 이들은 남북으로 흩어져 귀양을 떠났다. 내 고조부는 이듬해 3월19일 解配 되어 금강산과 강릉을 거쳐 귀향 하셨다. 이때 고조부가 남기신 금강산 기행문은 문장이 유려하기로 이름났고  용庵集에 전한다. 이14명은 流配에서 돌아와 <同舟契>란 모임을 만들어 日帝때 까지도 자손들 사이 유대관계가 지속 되었다.

     더디어 1871년 전국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경상도엔 사액 72개서원, 미사액 639개 서원이 있었다. 호계서원도 이때 뜯겼다. 병산서원은 류후조의 로비로 살아남은 기록이 <나암수록>己巳 1-2월, 7쪽에 보면 나온다. 오늘날 그 아름다운 병산서원을 볼수있는걸 우리들은 낙파 류후조에 감사 해야한다. 그러나 병호 양측은 마음속으로 흔쾌한 화합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丙寅洋擾때 군수원납 이라던가 경북궁 중건, 만인소, 의병활동 등을 통해 사사건건 서로 어깃장을 놓는다.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 뒤 류후조와 신석호, 許元拭등이 앞장서서 영남에다가 원납을 독려 한다. 물론 호론들은 냉담했다. 심지어 병유들도 크게 기여 하지는 못한다. 경제사정이 어렵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북궁 중건 때도 마찬 가지였다. 황해도나 평안도의 10분의 1도 못 됐다. 그만큼 경제의 축이 대중국 무역을 쥐고있는 서북쪽으로 쏠려 있는 시기 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경복궁이 중건되면 남인이 發揚 한다"고 류후조를 독려 했다. 그러나 호론들이 류후조에 협조 했다는 자료는 못 보았다. 그럼 萬人疏를  들여다 보자. 우선 만인소가 무엇이냐 하면 영남남인들의 정치활동 이라고 보면 된다. 일반 상소는 성균관 掌議에 의해 謹悉을 받아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 올라 가게 되어 있었다. 이 길목마다 노론들이 진을 치고 앉아 방해를 하니까 정권에서 소외된지 오래된 남인들은 근실없이 상소가 가능한 만인소란 형태를 원용했다. 물론 이경우도 노론의 방해가 자심했지만.

      1871년 서원훼철반대 만인소가 일어났다. 물론 호유가 이끌었고 10,027명이 서명 했다. 李震相, 柳寅睦, 李晩起, 李寅華 등이 주도 했고 疏首는 鄭民秉이 맡았다. 그러나 남인 관료들과 병유들은 불참했다. 냉담정도가 아니라 적극 저지에 앞장 섰다. 하회,우천의 류씨를 비롯 梅院의 광주 이씨, 경주 良洞 驪江 이씨까지. 이는 자기 조상을 모신 서원은 헐리지 않았기 때문도 있고 문중에 인물이 대원군에 의해 기용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류후조의 맞아들 류주목은 선두에 서서 만인소를 막았다. 대원군은 경주의 孫尙駿과 상주의 柳寅睦에게 참봉 자리를 주는등 회유책을 쓰는 한편 같은해 일어난 李弼濟의 난을  침소 봉대 虎儒들을 협박하는데 이용했다. 그러나 이 만인소로 아무도 처벌 받은사람은 없고 대원군은 스스로 남인의 후견자로 자처하며 대원군과 남인은 그래도 한통속이란 선에서 미봉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년뒤인 1873년 10월25일 동부승지 崔益鉉이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제기 하므로 정국은 회오리 치기 시작, 고종은 親政을 결심하게 된다. 최익현은 만동묘의 철폐, 서원훼철, 종실의 양자, 남인 李玄逸. 睦來善등의 신원, 청나라 돈의 사용, 군수원납등 대원군의 모든 시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연이어 대원군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게 벌어 졌지만 결국엔 실각, 楊州 直谷으로 물러났다. 이사건으로 1875년에 일어난게 대원군 奉還 萬人疏 였다. 이번엔 병유가 주동이되고 호유는 불참했다. 우리 의성 김씨나 안동 권씨는 전연 참여한 사람이 없다. 李鉉燮의 <愚軒實記>에 보면 李章浩가 "금번의 상소는 전 영남의 대의인데 대문중에서 전연 불참한 곳에 죄를 밝히지 않을수 없다"고 나온다. 이는 호론측을 가리키고있다. 이 만인소의 앞장은 上溪쪽 퇴계후예가 앞장서고 서애후손중 류후조가 이때는 사직,낙향하여 柳道洙등을 뒤에서 밀었다.. 상계측이 발론단계부터 대원군과 접촉했다. 10월25일 안동 숭보당서 상소 도회를 열었다. 서원훼철과 戶佈문제로 논란은 있었으나 疏首를 상주의 鄭民采로 정하고 11월20일 시작키로 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疏首와 李章浩, 李中麟등 주동자가 안동부에 구금된다. 그이후 전국 규모로확산, 류도수등 여러명이 유배도가고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전라도, 함경도 유생도 참여하자 고종은 疏首등을 처형하겠다고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다급해진 대원군 은 이듬해 6월22일 비를 무릅쓰고 서울로 돌아와 가까스로 소수등을 처형에서 구해냈다. 그결과 대원군의 재등장을 원하는 상소는 사라졌다고 梅泉野錄 18쪽에 전한다.

     그다음 1881년 일어난 斥華 萬人疏는 屛虎의 관점에서 볼수는 없다. 만인소중 가장 많이 알려져있고 또 가장 복잡한 양상을 띠우나 이는 고종과 대원군의 마지막 세력 다툼이라고 볼 때 대원군과 병론 이 합심, 함께 움직인 정치행태는 보이나 호론이 끼어서 어떤 역할을 한 흔적은 별로 안보인다고 나는 추정한다. 다만 끝무렵 전국의 유림이 다 斥倭, 斥洋을 외칠 때 虎論은 누구보다 앞장설 도그마는 갖고 있었지만 서원철패와 戶佈실시의 대원군정책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히려 소극적이 되어 조용히 抗日을 예비했던 시기 같다. 참 복잡했지만 척화 만인소를 이해 하지않고는 병호의 한쪽인 병론을 이해 하는데 갭이 생기니까 그전말을 따라가보자 .시작은 李恒老제자인 재야 노론 金平默이 주도했다. 고종이 親政과 함께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여기에 필수적으로 따르는게 虎論을 뺀 대원군세력과의 충돌이다. 고종은 倭와 洋을 분리, 왜와 국교정상화를 추진한다. 일본의 무력시위로 이 일방적인 정책은 실패 하지만 어쩌던 개항은 이뤄졌다. 이걸 김평묵이 보고 들고 일어난다. 이유는 집권 노론세력 과 아직도 관료화되어  고종 밑에 남아 있는 京南(서울 및 근기 지역 남인)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개화를 반대하며 겨냥은 정권에 남아있는 노론과 남인 이었다. 요란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큰움직임이 없었다. 왜냐하면 병론들도 俸還萬人疏의 여진에서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번 만인소를 벌리면 그 경비가 엄청 났다. 그러다가 1880년 김홍집이 가져온 <朝鮮策略>이 고종에 의해 전국에 유포, 조정에 의해 지지를 받자 영남 儒生들이 척사를 외치며 일어났다. 11월26일 안동향교서 都會를 열고 疏首에 李晩孫을 뽑고 金祖永, 金鎭淳, 金錫奎등이 주도했다. 이게 전국으로 확대되어 결국엔 5월15일 고종의 斥邪윤音 발표로 가닥을 잡지만 내막적으론 민씨네와 이최응의 처벌 주장을 빼는 대신 金弘集만 탄핵하는 선에서 타협하므로 상소를 주도했던 측에선 아무도 벌 받은이도 없다. 다만 당시 영중추부사 韓啓元이 영남남인에 협박편지를 보내므로 전과 다르게 京南이 고종의 산하로 관료화되가는 과정을 볼 수 있고 李晩由는 承旨로 발탁, 고종의 회유책도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세력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다시 정권을 쥔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걸 확인 했다. 이 때문에 소위 말하는 安驥泳 사건(李載先 사건이라고 부르기도함)이 발생 했다. 안기영은 대원군사람으로 權鼎鎬, 蔡東述(번암 채재공의 손자) 柳道洙(류후조의 손자벌)등과 친히 지내며 영남만인소 疏儒들과 어울렸다. 실력행사를 어설프게 준비하고 8월21일거사날 까지 잡았으나 고변으로 일망 타진되었다. 이사건으로 병론은 완전 失勢의 길로 접어 든다. 민비측에 의한 대원군세력의 소탕작업에 말려든 것이다. 柳道洙는 길주로 유배됐다.

    1895년 乙未사변 발발과 함께 시작된 항일 의병활동에선 군데 군데 병호가 티각거리는 현상을 볼수있으나 퇴계파 전체가 항일이란 大命題엔 이론이 없었다. 여기 세세하게 따져보는 것은 나로선 참 주저 된다 . 아니 시시 콜콜하게 자료를 정리 하다가 사실은 그만 두었다. 어느집이던 항일의 열사는 다 있고 그만큼 퇴계학 자체가 항일전선에 몸을 불태우지 않으면 안될 명제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나는 항일의 문제를 생각할 때 마다 李朝 후반을 꽉 쥐고 흔들었던 老論의 친일 문제를 더 캐보고 싶은 욕망을 금할 수 없다. 의병들의 노래가락 속에서 尤巖을 야유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한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러나 反日이냐 親日이냐 하는 문제는 또다른 긴 思索을 강요 당한다. 그래서 이걸 잣대로 병호를 분석하는건 뒤로 남겨두고 이 두서없는 내 ESSAY를 여기서 마치자.     Dec 17 2003  Gene Kim

   
   <이글을 너희들께 남기는 이유는 내가 하회로 장가를 갔고 너희들은 屛虎 양쪽의 피를 다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진이가 이글을 읽는다면 weird !하고 소리칠게 뻔하다. 다만 내고조부는 그래도 비교적 병호문제에 대해 균형 감각을 잃지 안을려고 애 쓰신 것 같다. 屛論의 맹장 柳疇睦(낙파 류후조의 맞아들, 낙파보다 먼저 죽었다)이 "옛말에 '名下에 헛된 선비가 없다'하더니 내가 용庵(내 고조부)을 보고서 이말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믿게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 내 할배는 병론측집에 딸을 둘이나 보냈다. 사실 이 병호시비에 대해선 양측이 전연 더 언급않기로 약조가 되어 있단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는 노론계의 봉화출신  사학자 申奭鎬가 1931년 靑丘學叢에 쓴글이 유일하다. 청구학총이란 청구학회 기관지이다. 조선총독부 관리와 京城帝大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국사 歪曲과 渟滯史觀의 전파에 첨병 역할을 한게 이 청구학회인데 홍희, 최남선, 정만조, 이창근, 이능화가 평의원으로 활약했고 이병도, 신석호등 대표적인 정체사관의 사학자들이 위원으로 활약했다. 병호시비도 한민족의 전형적인 분열상 이니까 그들의 연구대상 이었다. 병호양측 자료는 병론을 대변한 여강지 3책과 호론을 대변한 여강전말 4책이 있을 뿐이다. 큰집 又泉 형님은 내게 申奭鎬의 논문을 밑줄 그어가며 주셨다. 낙동대감 柳厚祚의 6대종손 되는 世夏가 내어린 시절 둘도없는 벗이었다. 나하곤 열촌 사이였는데 한학년 아래고 상주서 우리집을 보고 이사와 바로 앞집에  살았다. 그 어른되는 時浣씨도나중에 김천고등학교교장을 지내셨는데 우리 사랑에 살다싶이 했다. 10여년전 내가막 미국서와 어느날 골프샾에 들렀더니 상주중학 후배되는 주인 녀석이 세하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부산 대선소주 회장으로 있다가 암으로 갔는데 골프를 너무좋아해 친구들이 관속에 치던 골프채를 넣어 주었단다. 우리는 군청 뒷마당을 무대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世夏는 부랑스런 나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그때 洛坡의 행적을 내가 알았더라면 더 때려 줄걸 그랬지....


<後記 2> 이글을 읽으시고 又泉형님은 龜窩 김굉이 학봉등을 빼고 퇴계에게 대산이 적전이란 주장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하셨다. 또 내가 미국있을 때 臨川誌와 金溪誌를 다시 찍어돌리는 문제를 논의 했는데 그때 내 아버님이 臨川誌는 屛虎問題를 담고 있으니까 빼자고 주장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단다. 비록 지금으로 부터 114년전 兩家의 약속이지만 지켜주는게 도리라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이글을 처가쪽엔 장인, 두처남에게 주었는데 전화를 해서 양가 약조를 어기고 써 돌린걸 사과하고 갖고있는 글을 없애라고 부탁했다.. 龜窩 김굉의 주장은 1815년11월 6條疏를 올리며 이상정의 贈職, 贈諡와 사당의 설립을 청하는 글에서 퇴계이후 1인이란 주장을 했다. 龜窩文集 卷3 疏,辭禮曹參判疏에 나온다. 그러나 척암 김도화의 증조부인 김굉이 1813년 학봉의 묘갈명을 쎴고 또 같은 청계공 후손이란 점에서 학봉과 서애를 의식적으로 폄하한게 아니라 大山을 강조 하다가 보니까 이른 글을 남긴 것 같다. 어째던 큰틀에서 又泉형님의 지적은 예리하고 또 그렇게 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 Jan 3  2004 )
 


 


 

조회 수 :
138858
등록일 :
2008.09.08
11:17:00 (*.125.102.129)
엮인글 :
http://kim25.net/kim/10917/5b2/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kim25.net/kim/10917

김태원

2008.11.17
22:11:16
(*.25.210.106)
  여강서원에 학봉, 서애 양 선생을 봉향한 연대는 1620년이 아니고, 1625년입니다.  광해군 12년(1620)에 학애 양 선생을 추향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향내의 유림이 추향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다음해에 어떻게 위패를 봉안하느냐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나 의견대립이 심하여 봉안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여강서원 동주(원장)인 김봉조 선생은 상주에 은거중인 우복 정경세 선생에게 세 서원. 여강 임천 병산의 산장과 더불어 연품하여서 서신으로 답을 받았으나 그러나 많은 학봉 선생의 문인들은 옳지 않다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인조 3년(1625)에  우복 정경세 선생이 그해 추전에 강제로 (합의없이) 서애 선생을 동에, 학봉 선생을 서에 종향했습니다. 전방대고, 서원등록, 열읍원우사적에는 1625년에 봉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성김씨 천상문화보존회에서 간행한 국역 연방세고 p.160에도 '인조3년(1625)에 학봉 선생과 서애 선생을 추가봉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20년에 우복 선생이 위패의 서차를 재정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1621년 이후에 품의(여쭈어보는 것)한 글에 대한 답 (답문목) 입니다. "두 선생의 좌차의 선후에 대해서는 후학이 감히 망녕되이 논할 바가 아닙니다만, 마땅히 두 선생께서 평소에 서로 대하는 것이 어떠하였느냐에 의거하여 서차를 정하면 될 것입니다. 더구나 나이는 서로 간의 거리가 견수에 이치지 못하고, 작위는 서로 멀어서, 떨어진 자리에 있더라도 아마도 다른 의논은 없을 듯합니다."입니다. 그 유명한 年齒相去 不及肩隨 而爵位之相懸 又在絶席입니다. 그러나 학봉의 문인들이 향당에서 왜 작위를 논하느냐는 반발로 합의가 되지 않아서 1621년부터 1624년까지 임천, 병산 두 서원에서는 두 선생의 위패를 일년에 두 번씩 춘추로 여강서원까지 이봉하여 왔다 갔다를 반복했습니다. 향내 유림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위설하지 못했습니다.그러니까 1625년에 우복 선생이 대사헌으로 안동부의 나졸과 수행원을  데리고 호계서원에 와서 곳곳에 배치하여 놓고 강제로 학애 양 선생의 위패를 위설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호시비는 검재와 하회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학봉의 문인과 서애의 문인간의 시비로 보아야 합니다. 1805년부터 시작된 시비를 병호시비라고 세간에서는 일컽고 있습니다. 하회 중에서도 겸암 선생의 후손들은 대체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8.11.18
17:44:55
(*.213.243.47)
profile
김창현(아재) 종친님께서 그려주신 병호시비의 글을 보면서
그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그 배경들, 구체적인 원인등을 알기쉽게 이해가 되는 듯 합니다.


글로 표현을 하다가 보면 같은 내용인데도 읽히기에 따라 자칫 다른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할것 같습니다.
제가 평소에 걱정 하던것 역시 학문을 연구하는 제도권내의 의견과, 제도권 밖의 의견이 상충이 될 경우에
같거나 혹은 다른 주장과의 상호간의 토론을 통해 귀결점을 찾을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러한 토론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글들을 보는 다른분들에게 정확한 지식을 주고, 많은 도움이 된다고도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곳에 쓰여진 글들이 포털사이트나, 개인 블로그나 카페로도 리포팅(스크랩게시)되어 거미줄 같이 재배포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
두고두고 이글을 읽는 분들은 수백,수천이 될것이며 그분들에게 알찬 지식이 될수 있다는 의미로 볼때에..
논쟁이 의미가 아니라 토론이라는 방식으로 쓰고 읽고 하는것으로 글을 쓰는 의도자체를 바람직하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알차고 깊은 지식을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8.12.05
17:27:35
(*.213.243.47)
profile
제덕형님께서 보내주신 수정요청 메일이 오늘 도착했습니다.
요청하신 내용은 댓글내용을 수정해서 내용상에 별 문제가 없을듯 합니다.
(댓글에 댓글이 달린글은 그 댓글의 수정은 가능하나 그 댓글의 또다른 댓글이 있으면 원문댓글이 삭제되지 않도록 되어있습니다.)(#물론 방법은 있습니다만)

죽산재 행사부분의 일부사진(두장)은 삭제한지 한참 되었습니다.(원래 한시적으로만 게시후 삭제할거라는 예고를  했었습니다)
갑자기 추워졌네요. 내일은 한양으로 해서 강원도쪽으로 출장을 가야하는데 동장군이 버티고 있을거 같아 두렵습니다. 허허허

김태원

2008.12.17
22:29:02
(*.25.210.22)
 강호문학연구소의 이성원이 쓴 글 한 편을 댓글로 붙입니다.  참고가 될 것입니다. 이성원은 분천의 농암선생 종손입니다.


하계문화

  문화가 그렇듯이, 하계문화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성립된다면 그 특징은 독자성에 있다. 하계는 하계만의 주장과 여론이 있었고, 여기에 반하는 이론은 수용되지 않았다. 다른 씨족과는 물론이고 동족 사이에도 나타났다. 자연 상계와의 대립과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하계의 이런 측면은 ‘병호시비屛虎是非’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진성이씨 전 문중은 ‘병론屛論’에 가담했다. 퇴계 후손들이 당시 중립을 취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당시에는 이 시비의 어느 편에든 포함되지 않으면 양반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시대였다.

  회자되는 예기지만 상계도 처음에는 ‘호론虎論’이었고, 표면상  중립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퇴계 10대 종손 고계 이휘영이 예천 맛질의 도회道會에 참석했을 때 진행자가 ‘어느 쪽인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 때 고계는 “우리는 비병비호非屛非虎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중립이라는 예기였다. 젊은 퇴계종손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수사였다. 그러나 이 말은 즉시 공박을 받았다. 참석자들은 “그렇다면 그대는 비반비상非班非常아닌가”했다. 이 공박은 결국 상계를 병론으로 굳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상계의 병론으로의 입장 정리는 진성이씨의 전 문중을 ‘병론’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하계는 끝까지 ‘호론’의 입장을 견지했다. 하계의 호론 측 가담은 시비 초기, 하계의 문장門長이라 할 수 있는 광뢰 이야순(廣瀨 李野淳)이 대산(大山 李象靖)의 제자 신분임도 한 몫을 했고, ‘계남댁’의 호론 가담은 하계의 버팀목이었다. 그런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어 하계는 최근까지도 하회의 풍산류씨들과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서애파’와만 하지 않는다. 겸암파는 관련이 없다. 

  여담이지만, 겸암파는 겉으로는 병론을 표방하고 내면으로는 호론이나 중립을 견지하여 이른바 ‘외병내호外屛內虎’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 말 역시 오래도록 안동일원에 회자되었다. 이런 측면은 겸암을 배향한 ‘화천서원’의 차원에서, ‘병호시비’를 어디까지나 ‘병산서원의 일’로 바라보는 겸암후손들의 시각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김태원

2009.06.06
21:34:22
(*.25.210.97)

'척암 김도화의 증조부인 김굉이 1813년 학봉의 묘갈명을 쎴고 또 같은 청계공 후손이란 점에서'---구와선생과 척암선생은 청계공의 후손이 아닙줄 알고 있습니다. 일직의 구미에 세거한 의성김문입니다. 내앞파가 아니고 구미파라고 합니다.  

" 병유들은 호계서원으로 달려갔고 서애의 위패가 北壁으로 가있는걸 확인했다고 한다. " --- 서애의 위판이 북벽을 옮겨진 것이 아니고, 원위(퇴계위판)의 위판이 중당에 있었는데 북벽하에 옮겼다고 천`불천론으로 대립합니다. 동-서애. 서-학봉의 위패는 처음부터 훼철되어 뒷산에 매안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수
62 김시무 [34世-安東] 친구/박강수의 라이브 포크송 모음 movie id: 김시무김시무 2008-07-11 94951
61 김제덕 [36世-大邱] 八公山과 壬辰倭亂과 八公山 上庵會盟 [1] id: 김제덕김제덕 2008-07-12 126043
60 김시무 [34世-安東] 인사를 잘 합시다/청바지에 통기타 베스트1 movie id: 김시무김시무 2008-07-20 286605
59 김영시 [34世-大邱] "김영시" 종친님의 경북대 평생교육원 08년2학기 강의 안내 [1] file 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8-07-23 88679
58 김제덕 [36世-大邱] 의성김씨 시조 김 석(錫)할아버지의 경순왕(傅 : 부) 4子說, 5子說에 대하여 [1] id: 김제덕김제덕 2008-07-25 138659
57 김창현 [35世-安養] 낙양성 십리허에......... 김창현 2008-07-30 136655
56 김창현 [35世-安養] 비빔밥, Medici, 관롱 김창현 2008-07-30 118174
55 김창현 [35世-安養] 인수문고 [2] 김창현 2008-07-30 138548
54 김창현 [35世-安養] 십만양병설의 허구 김창현 2008-08-03 564747
53 김창현 [35世-安養] 나이와 내일에 대한 상념 김창현 2008-08-12 94220
52 김창현 [35世-安養] Frame 김창현 2008-08-12 85929
51 김창현 [35世-安養] 蔚珍 김창현 2008-08-21 166896
50 김창현 [35世-安養] Gentleman C image 김창현 2008-09-01 187253
49 김시무 [34世-安東] 삶의 한 가운데서/김연숙의 카페음악 모음 movie 김시무 2008-09-02 118399
» 김창현 [35世-安養] 병호시비 屛虎是非 [5] 김창현 2008-09-08 138858
47 김창현 [35世-安養] 輓 Robert Mondavi 김창현 2008-09-08 615953
46 김재수 [36世-大邱] 자라나는 세대에게 한자 (漢字)교육 강화해야 image 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8-09-16 112858
45 김재수 [36世-大邱] 통신언어를 둘러싼 논쟁. 언어파괴냐? 문화다양성이냐? 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8-09-24 366408
44 김창현 [35世-安養] 氏也 燕京別記 [1] 김창현 2008-10-08 94673
43 김창현 [35世-安養] 씨야 연경별기 기이 김창현 2008-10-14 123219
42 김창현 [35世-安養] 車와 manzanita와 그리고......... 김창현 2008-10-19 118824
41 김창현 [35世-安養] Google 김창현 2008-10-19 81475
40 김창현 [35世-安養] 전립선암 투병기 [1] 김창현 2008-10-24 463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