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 2년(1456) 처참하게 목숨을 잃게 된 6명의 신하의 무덤이라 하여 사육신 (死六臣)묘라고 하며, 지금은 공원으로 잘 꾸며 놓아 주민들의 산책,휴식공간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 노들섬에서 바라 본 풍경.ⓒ 2007. 한국의산천

 

▲ 한강대교  ⓒ 2007. 한국의산천  

용산에서 노량진 방면으로 가는 한강대교 끝단 오른쪽 동산에 사육신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 노량진 역 옆에 위치한 사육신 묘 입구 ⓒ 2007. 한국의산천

 

민절서원(愍節書院)

한강가(일명 노들강변)의 언덕자락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은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을 모셨던 곳이다. 

 

이 서원은 조선조 숙종 8년(1682년)에 동재기 나루(銅雀津)에 육대사(六臺飼)로 세워졌다가 9년 뒤인1691년 오늘의 사육신묘가 있는 곳으로 옮겨지면서 숙종이 친필 사액을 내린 곳이다. 이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건재했으나 건물은 허물어지고, 지금은 육각비 옆에 주춧돌만이 남아 그 흔적을 전한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사육신묘로 올라가는 길어귀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이 있었다. 사충서원은 조선조 제20대 임금인 경종 원년에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희생당한 노론(老論)의 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이이명을 배향하던 곳. 
이 서원은 서원 철폐령 때도 건재했으나 1924년 일제의 식민 통치 때 용산구 보광동으로 옮겨진 뒤 지금은 그 내력을 새긴 묘정비(廟庭碑)만이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사육신 묘 입구 ⓒ 2007. 한국의산천

 

북소리 둥둥둥 갈 길을 재촉하는데

서녘 하늘에 해는 저무는구나.

황천길에 주막집은 없다던데

오늘밤은 어디서 자고 갈거나. 

 

이 시는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에게 무참히 국문을 당하고 거열의 형(車列之刑)에 처해져, 사형장인 새남터(한강가 서부이촌동 철길 부근)로 끌려가면서 당당히 읊은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의 시다. 이 시는 죽음 앞에서도 호탕하고 당당한 매죽헌의 선비로서의 진면모를 읽을 수 있게 한다. 

 

 

▲ 홍살문(紅箭門) ⓒ 2007. 한국의산천


예로부터 성스러운 곳을 나타내는 곳 입구에 지붕이 없는 붉은살을 꽂은 문으로서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의 뜻을 기리기 위해 기둥 두개에 세운 문.  

 

단종 복위를 주장하다가 처형당한 집현전 학자 6명이 잠들어 있는 곳 사육신 묘.

서울 특별시 유형 문화재 8호

위치 : 서울 특별시 노량진동

 

사육신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복위를 주장하다 처형당한 충신들이다.

성삼문(成三問 : 承旨), 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 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 이개(李塏 : 直提學), 유성원(柳誠源 : 司藝), 유응부(兪應孚 : 中樞院同知事) 와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의에서 현창된 김문기(金文起 :工曹判書)를 말한다.  

 

조선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六角)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수축하였다. 1978년에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4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비각을 새로지어 충효사상 실천도장으로 정화하였다.

 

 

▲ 안내판 ⓒ 2007. 한국의산천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만 묻혔으나, 1977∼19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 때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도 추봉하였다.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었다.

 

▲ 불이문 ⓒ 2007. 한국의산천

 

 

 ▲ 불이문(不二門)ⓒ 2007. 한국의산천 

 

흔히 불가에서 '진리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에서 유래하며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라는 뜻을 품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유가경전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불이심지신(不二心之臣 : 두마음을 갖지 않는 신하)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두 왕을 모실 수 없다는 뜻이라 해석된다. 

 

 

▲ 불이문 ⓒ 2007. 한국의산천

정면에서 아침해가 떠올라  촬영이 쉽지 않았다.

 

 

▲ 불이문 안으로 보이는 의절사 ⓒ 2007. 한국의산천

 

 

 ▲ 신도비각ⓒ 2007. 한국의산천

 

 

▲ 위패가 모셔진 의절사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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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절사 뒤에 위치한 사육신의 묘. ⓒ 2007. 한국의산천

 

 

▲ 의절사 후문 ⓒ 2007. 한국의산천

 

 

▲ 사육신 묘 위의 정자 ⓒ 2007. 한국의산천

숲이 우거지고 한강이 내려 보이는 이곳은 주민들의 산책로 휴식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다.  

 

참고 영월 창절사  (답사 2005년 8월 16일 한국의산천 )

 

▲ 영월 시내에 있는 창절사 (촬영:2005년 8월 16일)ⓒ 2007. 한국의산천

 

창절사는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세조에게 죽은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6위(位)와 생육신 가운데 김시습, 남효온 2위, 박심문, 엄흥도 충신 2위를 합쳐 10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단종이 승하한 이후, 영월의 사림(士林)은 노산군의 묘 앞에 육신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에 의해 사당을 지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숙종 11년(1698)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군의 묘는 장릉이란 능호를 받았다. 따라서 그 격식에 맞게 능을 새로 단장하면서 영월 유림의 오랜 숙원인 육신사를 장릉 아래쪽에 세운 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숙종 31년(1705), 장릉 안에 있던 육신사를 장릉 밖으로 옮기면서 창절사(彰節詞)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창절이란 모든 불의에 항거하며 대의를 따른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절개를 표창한다는 뜻에서 숙종이 사액했던 것. 창절사 앞에 있는 창절서원 원장이 이들 충신들에게 봄과 가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
단 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충신으로 성삼문(成三問:承旨), 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 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 이개(李塏:直提學), 김문기(金文起:工曹判書), 유성원(柳誠源:司藝) 을 말한다.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유응부,권자신,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생육신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으로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聘壽), 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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