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학자들 무수히 배출
녹전면의 호적계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둔번마을이 700년을 이어오며 독성마을을 유지해 온 이유를 지형적 조건과
양반 종택문화의 보수성에서 찾고 있었다. 즉, 둔번마을은 요성산과 국망봉과 같은 높은 산 아래 감추어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적고, 학문에만 전념한 둔번공 후손의 깐깐함이 타성들에게 마을 문화에 융화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더욱이 산을 포함한 인근 전답이 모두 종가와 김씨 문중의 땅인 관계로 실제로 농사를 지으려면 김씨 문중의 하인이 되거나 소작농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벼슬하는 사람이 없어 녹봉을 받는 이가 없으니 소작농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니껴.”
둔번공 25세 종손 김태협씨(77)는 소작농이 견디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타성이 살지 못한 것은 둔번공
당시에도 그러했다며 선조의 둔번마을 입향에 얽힌 전설 한 토막을 풀어놨다.
“둔번공 할배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평해 황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김씨 종택이 들어서고 난 뒤부터 시름시름 앓아 누워
더 이상 못 배기고 다 나갔다 카지 아이니껴.” 종손 김씨는 그 이후에도 타성 사람들이 들어오기만 하면 가정에 병마와 우환이
끊이지 않아 마을을 떠나곤 했다며 둔번마을의 지기(地氣)가 타성을 거부한다고 믿고 있다.
안동대학교 사학과 김희곤 교수는 “안동지역은 산이 많은 지형적 영향과 벼슬보다는 학문을 중요시한 풍토 때문에 중소지주가 많았고, 이는 소작농이나 자작농이 생겨날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독성부락 형성 배경을 분석했다.
문중에서도 둔번마을이 이처럼 독성부락을 유지하며 살아온 데는 출향 인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에서 내린 벼슬과 시호(諡號)는 쓰지 말라는 둔번공의 유명(遺命)에 따라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거의 대부분 선조들이
거부(不就)했기 때문.
김을방의 아들 김축(軸)을 비롯, 증손 완(琬), 고손 영균(永鈞), 8세손 약( ), 13세손 만휴(萬烋) 등….
그 아랫대에 이르기까지 문필이 이미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모두 천거된 벼슬을 뿌리치고 둔번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한평생을 보냈다는 것.
안동향교 전교를 지낸 김춘대씨(80)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한 축을 이룬 안동이지만 이 지방의 유림들 가운데서도
둔번의 문필이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데 이설(異說)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윗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현 종손의
조부인 동식(東植)씨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서예대전에서 특선을 하는 등 ‘조선명필’로 유명했고, 종손의 동생 태균(泰均,
석계)씨는 서예 국전심사위원을 거쳤을 정도다. 심지어 종손의 손자인 재일(渽一)군은 전국서예대전 초등학교부문에서 장원을 할
정도이니 이 집안의 글씨는 타고났다 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