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서원(虎溪書院) 이야기 (1)


1. 서원 창건

  1-1. 위치와 규모

    1573년(선조6)이었다. 안동 소속 유림들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돌아가신지 4년이 되는 해에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를 동주(洞主, 서원 원장)로 삼아 안동부 동쪽 20리에서 30리쯤에 있는 노산촌(盧山村)의 오로봉 서쪽 백련사(白蓮寺) 옛터에 공사에 시작하여 1575년 준공을 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이곳이 안동군 월곡면 도곡동이었다. 만력 병자년(1576) 봄 贈領議政文純公退陶李先生(퇴계 이황)을 봉안하여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 했다. 이에 노산촌은 여산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당은 존도사(尊道祠)이다. 도산서원의 상덕사(尙德祠)와 같은 날에 퇴계의 위판을 봉안했다.

   이수환의「조선후기 서원 연구」p.83.에 의하면 “여강서원은 백련사 구기(舊基, 옛터)에 설립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림들이 서원 건립을 위해 탈취한 것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언기 행장에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지 4년이 되자 사림에서는 여강의 오로봉 아래에 서원을 만들자 하여 유일재 선생을 동주로 삼아 백련사를 철거하고 불상을 걷어서 강에 던졌는데, 처음에는 승도들이 항거하여 철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다가 학봉 김성일이 그곳까지 와서 일을 도와주어 여강서원 건립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규모가 매우 컸다. 사당(존도사) 6칸, 신문 3칸, 신주(神廚) 5칸, 강당(崇敎堂) 15칸, 동재 4칸, 서재 4칸, 진학문 1칸, 동몽재 15칸, 유사방 5칸, 재주(齋廚,주사) 10칸, 보상고(寶上庫) 15칸, 양호루(養浩樓) 10칸 등 93칸으로 이루어진 안동의 수선서원(首善書院)이었다. 매년 춘추중월(春秋仲月,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 중순경의 그 달의 두 번째 丁일)에 향사하였다.


  1-2. 창건 배경

 노산촌은 이른바 영호(映湖)의 아름다운 경치의 본원이었다. 물에 임하여 넓고 평평하였으며, 낙동강이 옷의 띠처럼 두르고, 오로봉과 향로봉 등의 여러 봉우리가 빼어나게 솟아 둘러 있어서, 낙동강 상류의 승경이었다. 백련사 남쪽에 침벽루가 있었는데 퇴계가  어렸을 때 독서하던 곳이었다. 주로 안동 출신 사림들이 힘을 모아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와 같은 날에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퇴계 문인 중에는 핵심 세력이 거주지에 따라 예안과 안동으로 구별되었으며, 연령의 차이와 과거급제냐 천거냐에 따라서도 달랐다. 대략 구분해보면 김부륜, 조목, 금응협, 금난수, 금응훈, 이덕홍 등 예안 출신은 연배가 높은 편으로 이른 시기에 퇴계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관직보다는 향촌에서의 사족 생활에 만족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정사성, 유성룡, 김복일, 김성일, 권호문, 김극일 등은 안동을 거주지로 하였고, 퇴계가 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인 명종 7~8년 이후에 사제 관계를 맺어 상대적으로 후배들이었다. 또 대부분 문과 급제하였던 만큼 관료로서의 활동에도 참여한  세력이었다.
  두 계열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퇴계 종명 후 예안유림들이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을 점령하자 안동유림들은 예안유림에 뒤질세라 안동에다가 경쟁하듯 여강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2. 중건

  1605년에 대홍수가 났다. 사당과 당재의 집들이 물에 잠겨서 넘어졌다. 이때 금역당 배용길은 여강서원과 병산서원을 합치자고 주장하였으나, 서애 유성룡은 병산서원을 폐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하면서 합치지를 아니 하였다. 배용길의 아버지는 임연재 배삼익(裵三益)이다.

  배삼익과 유성룡은 평소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그래서 배용길은 그의 아버지 배삼익의 신도 비명을 유성룡에게 청했는데, 동문 후배이고 8년 연하인 유성룡이 1596년에 신도비명을 지었다.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내 벗이다. 평소 교분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으니 내가 신도비명을 짓지 않고 누가 짓겠는가?

  내 나이 열여섯 살(1557년) 때 한성 감시(초시)를 보았는데 그 해 가을에 임연재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두각을 나타내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고금의 일을 논함에 막힘이 없었고 나는 그의 처소로 가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험을 치던 전날 밤 나는 그의 처소로 가서 잠을 잤는데 거리에는 인적이 끊기고 달이 대낮같이 밝았으며 종소리가 밤새 들렸다. 닭이 홰를 치자 그는 나를 일으켰으며 말을 타고 나란히 시험장으로 들었다. 뜰 가운데 큰 홰나무 아래서 나무를 우러러보니 불빛 속에 녹색 나뭇잎 빛이 겹겹이 우거져 아름답게 빛났다.

  시제(詩題)가 나오자 그는 그다지 생각하지도 않고 날이 저물기 전에 두 편 모두를 완성하고도 왕성하게 힘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를 완성했으나 쓰지를 못하자 그가 내 대신 썼는데, 합격 발표를 보니 나는 다행히 합격했지만 그는 뜻을 펴지 못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감에 내가 다시 술을 가지고 가서 전송하면서 요행과 불행이라는 말로 작별하였다.”

  배삼익은 다음해 1558년에 생원이 되었다. 그리고 1564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유성룡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한다.

  여강서원이 물에 무너지자 옛 자리에서 북쪽 백 보 쯤에 터를 잡아 다음해 1606년 임좌(壬坐) 병향(丙向)으로 중건하였다. 남남남동이다.  중건에 소극적이었던 유성룡은 정사성의 적극적인 종용으로 중건에 적극 앞장을 섰다. 안동부사 김늑의 적극적인 지원과 유성룡, 정사성, 권춘란, 김용, 이형남 등의 힘으로 중건할 수 있었으며, 1607년 퇴계의 위판을 다시 봉안함으로써 중건이 마무리 된다.


3. 퇴계의 세 제자

  ‘도산급문록’에 수록된 퇴계의 제자는 모두 310명이고, 그 중 정승을 지맨 분이 11명, 시호를 받은 분이 34명에 이른다. 그러나 도산서원 상덕사에 퇴계와 함께 배향될 수 있는 후보 물망에 올랐던 분은 조목, 김성일, 유성룡 세 분이었다. 이 중 조목 한 분만이 결국 종향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3-1.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

  월천(月川)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안동부 유림의 분열을 초래했다.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이성무의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옮긴다.

  “1614년(광해군6) 11월, 조목(趙穆)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에 종향(從享)되었다. 16세기 이후 주자학이 심화되고 도학이 강조되면서 서원 향사는 도통 전수의 상징이 되었다. 이황의 문하에는 제자가 무려 300여 명이나 있었지만, 도산서원에 제향된 사람은 조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생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이황을 섬긴 덕분에 죽어서도 스승의 사당에 제향되는 영광을 입은 것이다.

  조목은 1524년(중종19) 경상도 예안현 월천리에서 출생했다. 집안은 평생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고, 인근 토계리(兎溪里)에는 이황과 같은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학자로 성장하기에 최상의 여건이었다. 조목은 약관 15세에 이황의 문하에 입문했다. 이후 30년을  하루같이 이황을 시종하며, 학문과 예법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행신과 출처도 배웠다. 일생의 지표가 있었다면 학자로서의 이황과 인간으로서의 이황을 체득하는 것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도산서원에 종향되어 수제자의 지위를 선점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정하는 사람보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서원 향사는 사림의 중대사로서 공론이 요구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조목의 종향에는 사림의 공론이 충분히 수렴되지 못했다. 공론 대신에 퇴계학파와는 매우 이질적인 권력이 개입했다. 바로 북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친북(親北)에 따른 반대급부였다.

  이황의 제자들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유성룡과 조목이었다.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을 지낸 중앙 정계의 거목이었다. 반면에 조목은 일생을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 활동과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도산서원을 창건하고 『퇴계연보』ㆍ『퇴계선생언행총록』의 초본을 작성한 사람도 조목이었다.

  두 사람이 이황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다. 유성룡이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중시했다면 조목은 향촌에서의 이황을 중시했다. 이러한 차이점은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목은 이황의 모든 글을 수록하되 향촌에서 간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부각시켜 중앙에서 간행하고자 했다. 이는 유성룡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도 직결되는 부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옥신각신 하는 가운데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특히 20년 연하의 유성룡에게 제지를 당한 조목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목이 '주화오국(主和誤國)'의 표어를 내걸고 유성룡 비판 운동을 전개했다. 유성룡의 기반을 한 순간에 붕괴시킬 수도 있는 대단히 미묘한 정치 문제였다.

     <상국(相國)께서 평생 동안 성현의 글을 읽고 배운 것이 고작 주화 오국 넉자란 말이오? (『동계집』 「월천시도비명」)>

  유성룡에 대해 화의를 주장해 나라를 망친 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그 틈을 북인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북인의 영수 이산해가 조목의 문인을 자처하는가 하면, 폐모론의 주창자 정조(鄭造)가 예안을 빈번하게 왕래했다. 조목과 북인의 연대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목의 유성룡 비판 운동은 주효해 유성룡 실각의 계기를 마련했다. 북인들은 유성룡에 대한 탄핵을 전개하여 1598년(선조 31)에 그를 파직시키는 데 성공했다. 파직된 유성룡의 심경을 『서애연보』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노기가 날로 심해 손님을 만날 수조차 없었다. 한준겸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방문하려 했으나,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사절했다.(『서애연보』 만력 27년 2월)>

  조목과 북인의 연대를 통해 예안 일대에는 친 북인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퇴계학파의 본거지인 안동ㆍ예안에는 남인ㆍ북인이 공존하는 가운데 북인이 남인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1605년(선조 38) 조목이 사망하고, 1607년(선조 40) 유성룡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611년(광해군3) 정인홍의 ‘회퇴변척소’가 단행되었다. 퇴계학파는 물론 8도의 유림들이 분노했지만, 조목의 문인들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친북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본거지에 자파를 부식하려는 북인의 노력은 집요했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그 절정이었다. 정인홍은 조목의 공로를 인정해 그의 종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사실 정인홍과 대북의 입장에서는 조목의 종향이 여러 면에서 이점이 있었다. 가장 큰 목적은 예안의 조목 문인들을 포섭하여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반면에 조목의 문인들은 권력에 의지하여 조목이 이황의 수제자임을 천명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양측의 이해는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바로 그 결과였다.” <조선시대 당쟁사. p.169~172>

  “선조 말기에서 광해조에 걸친 북인정권하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유성룡과 정인홍 및 조목과의 미묘한 관계로 인해 예안 유림에 북인세력이 한때 도산서원을 움직여 갔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그들은 처형․유배 또는 훼가출향(毁家黜鄕)을 당해 북인계는 도태되었다. 인조반정후 예안출신으로 북인화된 인사 가운데 이강(李茳, 이덕홍의 아들)은 처형되고, 조목과 금남수의 아들들은 유배에 처해지고, 손우(孫祐) 서긍(徐兢) 등은 ‘훼가출향’이란 향벌을 받았다. 조목 사후 조목이 도산서원에 배향된 뒤 그 문인들이 그의 비문을 정인홍의 제자인 동계(桐溪) 정온(鄭蘊)에게 의뢰, 그 비문 중 서애와의 관계에서 강화오국(講和誤國)<임진왜란 때 대왜화책>이란 4자가 삽인된 결과 이의 삭제 여부를 두고 예안과 안동 서애계 유림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통문이 오가고 했다.”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p.579>


3-2. 임천서원

  임천서원(臨川書院)은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임하 사림의 발의로 1607년(선조40)에 임하현이 있는 임하촌에 임천사를 세우고 향사하다가, 1618년(광해10) 한강 정구의 발의로 임천서원으로 승격되며, 1620년 또는 1625(인조3)년에 여강서원으로 위판이 이봉되어 임천서원의 사당인 존현사(尊賢祠)에는 위판 없이 비어진 상태로 있었다. 위판이 이봉될 때, 임천서원에 딸린 서책과 노비를 여강서원으로 넘겼다. 그러다가 1847년(헌종14)에 석문정사 서쪽 엄곡에 새로 서원을 세워서 임천서원이 복설된다. 따라서 이때부터 학봉은 1열읍에 2위판이 만들어 진다. 그러다가 1868년(고종3) 대원군의 서원 철훼령으로 훼철되었다. 다시 1907년(순종원년) 겨울에 임천서원 복설을 신청하여 1908년 10월 31일 장례원의 정식 준허를 받아 1909년 안동시 송현동에 서원을 건축하고 숭정사(崇正祠) 위판을 봉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3. 병산서원

  병산서원(幷山書院)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배향된 서원이다. 1572년(서애 32세)에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병산으로 옮겨서 새로 건축했다. 공식적인 명칭은 풍악서당이었으나 동․서재를 갖추었으므로 이때부터 유림들이 더러 병산서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서재를 갖추면 사당이 없더라도 서원이라 할 수 있다고 퇴계가 말했다. 1608년 안동의 후학들이 사당을 짓기 시작하여 1612년에 마치고, 1613년(광해5)에 존덕사(尊德祠)에 서애를 향사했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병산서원이라고 했다. 1620년 또는 1625년에 여강서원으로 위패를 이봉하였다. 이봉할 당시부터 1열읍 1위판 설이 무너져, 1629(인조7)년에 서애의 위판을 하나 더 만들어서 설위했으며 셋째아들 류진을 종향하였다. 1863년 병산서원으로 사액되었으며, 1871년 훼철 당시 류후조의 노력으로 훼철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된다.

 

이어지는  (2)에서는 '학봉과 서애의 여강서원 배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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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쉽게 자료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글이 모든 분들에게 읽혀 지면서 많은 보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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