矗石樓中 三壯士 記實碑

宣祖壬辰五月 鶴峯金文忠公 誠一 以嶺南招諭使 來到晋州 與大笑軒趙忠毅公 宗道 松巖李貞義公 魯 同上矗石樓 時倭亂方棘 官守皆逃 軍民不集 城中寥寥 江水茫茫 擧目山河 不勝悲원 趙李二公 欲執手投江鶴峯以爲徒死無益 死亦非晩 吾非畏死者 당所否者 有如此水 遂把酒吟 詩曰 矗石樓中三壯士 一盃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巡使吳公 숙刻詩揭板以識其事 後人由是稱矗石樓三壯士 三賢始終履歷各有文集 及諸公私史乘 今只서此一事 刻石樓傍以示衆觀 時壬辰後三百六十九年也 

金 榥 撰

 

선조 임진년 5월에 문충공 학봉 김성일은 영남초유사로 진양성에 다다라 충의공대소헌 조종도와 정의공 송암 이로와 함께 촉석루에 오르다. 때는 왜란으로 강토에 선지피 낭자하니 벼슬아치는 모두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은 흩어졌다. 성안에 텅비어 쓰슬하고 강물만 예대로 아득히 흐르는데 멀리 눈을 들어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리어 조공과 이공은 초유사 김공의 손을 잡고 “삶이 차라리 욕되도다. 강물에 몸을 던져 한을 씻자.”하였으나, 학봉은 짐짓 잠시의 괴로움을 잊을 뿐이라며, “한은 천추에 씻지 못하리니 오직 한 번 뿐인 장부의 죽음을 허술히 하랴, 여기 푸른 물굽이 상기 뜻 있어 흐르거늘 남은 목숨은 더욱 원수 앞에 질기리니, 이 유서(由緖)있는 터전을 지켜 나라에 갚으리라.” 분연히 맹세하여 술 한잔 높이 들고 시 한 수를 읊으니「촉석루 삼장사는 잔을 들고 굽어 볼 제 뜻 있어 흐르는 물, 웃는 가슴 미어지다. 세월도 강물이거니 넋은 길이 남으리라.」이 시는 뒤에 순찰사로 부임한 오공 숙(?)이 새겨 높이 현판으로 달았으니 이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 되어 후인들이 일컬어 촉석루 삼장사라 하였다. 세 현자의 자세한 내력은 각기 그 문집과 사승(私乘:개인적인 기록)에 남았으니 여기 다만 이 한가지 사실만을 돌에 새겨서 촉석루 곁에 세우고 지나는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하니, 때는 임진년으로부터 삼백 예순 아홉 해가 지난 뒤의 일이다. 

김황(金榥) 지음(撰), 최재호 새기고, 허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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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후 목사로 온 천파 오숙은 학봉 김성일이 조종도, 이로와 더불어 지은 촉석루 삼장사 시를 자제 발문과 함께 촉석루에 걸었다. 이에 불복한 전라도 유생 2백 75만명의 이름으로 진주로 통문을 보내니 1773년 2월 29일이다. 또 이들은 1822년 11월에 영여에 정문을 보내고 있다. 호남에서는 삼장사를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라 하고, 속전에는 최경회, 김천일, 황진이라 한다. 시판에는 김성일 조종도 이로라 하였다. 또한 이로와 곽재우의 집안에서는 조정에까지 탄원이 올라가는 시비가 일어났다. 삼장사라는 문구는 영남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삼대장 삼사 삼신과 충신의 문구는 호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애닯게도 영남 삼장사와 호남 삼장사의 엇갈린 주장은 2백여년을 거듭되니 사가의 속단은 금물이라 할 것이다.
http://chinju.street.co.kr/areainfo/chinju/chinju2/history-14.htm

 

[스크랩 일자] 200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