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고 기행 2

김창현
  역사와 전설이 숨쉬는 시라무런草原

                                                      씨야의 內蒙古 기행 (2)

 

 

내가 하룻밤 묵은 <蒙古人經地>가 있는 이 시라무런(希拉穆仁)은 빙둘러보아야 아무것도 안보이는 황량한 구릉이지만 지난 2천년간 역사적으로 영고성쇠가 참많은 내몽고안에서도 가장 손꼽는 대초원이다. 4세기경부터 몽골족의 한갈래인 거란족이 살던곳이 여기다. 비록 218년을 지속했던 단명한 나라였지만 발해를 쓰러트린 거란족의 요(遼)나라가 서기 907년 창업한곳이다.

형 몽케 칸으로부터 북중국 경영권을 넘겨받은 쿠빌라이가 카라코롬을 떠나 첫터를 잡은 곳도 내몽골의 금련천(金蓮川)평원이고 통풍(痛風)을 앓으며 몸을 운신하기도 힘들었던 73세의 쿠빌라이가 1287년, 36만의 기병과 10만의 보병을 거느리고 반란군 <나얀>의 40만 기병을 치겠다고 대도(大都,지금의 북경)를 떠나 22일만에 당도한곳도 이 시라무런 초원이다.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는 쿠빌라이를 수행해서 이전투를 참관한 흥분의 기록이 적혀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허풍에 웃음 짓는다. <나얀>군, 기껏 해야 4-6만. 대도부근서 전광석화 처럼 모은 쿠빌라이군은 수가 그보다 훨씬 적었다는게 정설이다.

 

시라무런에 서면 또 미인 왕소군의 이야기를 빼놓을수 없다.

달기(妲己) 서시(西施)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 하나같이 나라를 말아먹은 요녀들이지만 시라무런초원을 지나며 그 미모에 놀라 기러기마져 떨어뜨렸다는 왕소군(王昭君)만은 아니다.

중국의 역사라는게 중원의 농경민족(漢)과 초원 유목민족(胡)간의 투쟁사가 주류다. 농경민족이 힘이 없으면 민초와 여인들이 특히 가련해 진다. 삭풍이 부는 새상(塞上)의 땅으로 울면서 시집을 간 여인들을 우리는 화번공주(和蕃公主)라고 일컷는데 그중에서도 왕소군의 이야기는 제계집을 빼앗긴 녀석들에겐 마르지 않는 문학 소재였다. 중국역대 뛰어난 문학작품만 모아놓은 <문원영화文苑英華>란 책에는 송대이전 왕소군을 읊은 시만 35편이나 전한다. 왕소군의 능은 지금 알려진곳만 10군데, 그중에서 이곳 후허하오터에 있는 청총(靑塚)은 한나라 땅의 풀로 덮였다며 나를 보고 믿으란다. 능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시라무런 초원에 왕소군의 낙안(落雁)고사가 있는걸 보면 내가 와서 선 이초원에 가마를 타고 지나간것만은 틀림없는것 같다.

 

내몽고여행 이랍시고 새벽에 후허하오터공항에 내려 한잠 붙이고 달려온게 이 시라무런 대초원. 말 2시간 반 타고나니 만고 할 일이 없다. 하도 할일이 없으니 가이드는 낮잠이나 즐기시란다.참, 이런 관광은 나도 처음이다.

하늘과 구릉들이 맞닿은 어슴프레한 지평선을 향해 나는 역사나 물을 수밖에.

 

거란은 우리와 참 많은 역사를 주고 받은 나라다. 내가선 바로 이곳이 거란의 요람이고 창업의 터라는 사실은 많은 감희를 불러온다. 거란은 5세기이래 이 시라무런 초원을 근거지로 살던 몽골계 유목민. 당나라때 8개부족이 연합, 큰세력을 이루고 10세기초 추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등장, 내몽고 만주지역 흩어진 여러부족을 통합해 나라를 세운것이다. 아들 태종때 이름을 요(遼)라고 불렀다.

고려는 건국초부터 거란과는 무척 불편한 관계, 동족국가인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었다. 거란은 교류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벗어나길 원했기에 고려와는 원만하게 지내기를 바랐으나 왕건의 옛고구려땅을 회복해야된다는 명분과는 충돌했다. 그래서 993년 요(遼)는 소손녕(蕭遜寧)이 이끈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했고 서희(徐熙)가 나서 그들과 담판, 강동6주를 찿았다.

 

이번여행 후허하오터 박물관에서 본 높은 수준의 요(遼)나라때 유물들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조의 기록으로 봐선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족속에 불과한데 그들에게도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제작에 많은 영향을 끼친게 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이다. 우리의 초조대장경보다는 약간 늦지만 북송 칙판대장경의 영향을 받은  거란대장경은 거란 홍종(1031-1054)때 만들기 시작,  거란 도종이 고려 문종 17년(1063년)에 한질을 고려에 보낸 기록이 나온다. 거란대장경 속에는 송 칙판대장경, 우리의 초조대장경, 의천의 속대장경에는 없는 일부 불경이 수록 되어 있었다. 이 거란대장경은 내용이 우수하여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각을 지휘하던 수기대사(守其大師)에 의해 광범위 하게 참조 인용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거란문자는 한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세계학계는 보고있다. 다트머스대학 Pamela Crossley교수나 컬럼비아대학 게리 레드워드교수등이 이지론을 펴고 고대 정광교수와 계명대 유창균교수등이 이학설을 일부 받아드리고 있다. 거란문자는 야율아보기가 만든 표의문자인 대자(大字)와 그동생 질랄(迭剌)이 만든 소자(小字)가 있다. 소자는 대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또 표음문자이다. 여진이나 몽골제국도 한때 거란문자를 썼다니 고도의 문화국가임에는 틀림없는것 같다. 영어로 Cathay가 거란을 뜻하는거니 이미 유럽쪽에도 이때부터 중국을 대표했던 그무엇이 숨어 있는것 같다.

훈민정음 창제에 끼친 서아시아 셈-위구르, 거란, 쿠빌라이 지시로 만들어진 파스파(八思巴 Pagspa)문자의 영향등에 대해 이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는 단계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대학 라이너 도르멜스 교수 같은이는 “훈민정음은 파스파문자의 대체물”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파스파(1235-1280)는 티벧승려 이름인데 그의 머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7세때 이미 안읽은 불경이 없고 15살 때 육반산에서 쿠빌라이와 첫대면을 했다.티벧어로 파스파란 뜻이 “현명한 아이”. 쿠빌라이가 칸이된 뒤에는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 되었고 문자창제를 명받은 그는 1269년 파스파문자를 만들어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사용에는 실패했다. 몽골인, 중국인들의 외면으로. 물론 도르멜스교수의 극언은 IT시대의 최고의 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깎아내리는 감이 있어 우리가 듣기에는 좀 거북하다.

 

죽기 6년전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쿠빌라이가 반도(叛徒) 나얀과이 시라무런 초원에서 벌린 전투는 역사의 희화다. 나얀은 쿠빌라이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해준 타가차르의 손자다. 73세의 쿠빌라이가 수도인 대도(大都)부근의 병력을 은밀하게 모아 22일을 행군, 이 시라무런초원 아래쪽 요하부근서 나얀반도들과 대치했을때 양측병사들이 평소 너무나 잘아는처지라 머뭇거리며 서로 공격을 하지않았다고 한다. 이 대치를 깬것은 코끼리들의 느닺없는 질주. 쿠빌라이병사들이 대경실색했지만 결국 돌격을 했고 전차를 일열로 앞세웠던 나얀반도들은 패한다. 나얀은 시라 오르두( 왕궁 게르)속에서 잡혔다.

 

왕소군은 전한 원제(前漢 元帝)조정 후궁의 몸으로 삭풍이 휘몰아치는 흉노의 땅에 시집가 그곳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다.본명은 왕장(王牆), 소군은 그의 자(字)다.호북성 향계하구가 그의 고향, 후세 사람들은 그녀를 명비(明妃)라고 부른다. 당시 남흉노 선우였던 호한야가 한나라의 부마가 되어 교분을 두텁게 하자는 의사를 전해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그의 청혼을 받아드리기로 하고 화번공주를 물색했다.<서경잡기>란 책에 왕소군이 뽑혀가게된 경위가 전하는데 화공(畵工)이 뇌물을 10만냥, 5만냥 받고 잘그려주어야 원제와 잠자리에 드는데 왕소군은 그짓을 안하니 황제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하는 후궁이었다. 출발에 앞서 왕소군을 본 원제는 미모에 놀랐지만 이미 명적이 상대에게 간뒤라 어쩔수 없었고 화공의 목만 베었다. 그녀의 삶은 장렬하거나 위대하지도 않다. 그저 자신에게 닥쳤던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슬피 울었던 가냘픈 여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가련한 삶이 시인묵객들의 눈에는 애초롭게 투영되어 많은 문학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소군 옥안장에 치맛자락 스치며 (昭君拂玉鞍)

                  말에 오르매 붉은 빰에 눈물적시네(上馬啼紅煩)

                            오늘은 한나라 궁인이지만 (今日漢宮人)

                          내일은 오랑케땅의 첩이로다 (明朝胡地妾)

                                                                            李 白

 

과연 대시인 이백 답게 왕소군 떠날때 옆에서 본것처럼 읊었다.

 

우리에게 “봄이와도 봄같지 않더라(春來不似春)”란 유명한 싯귀절을 남긴 시인 동방규(東方虯)는 싸워 보지도 않고 가냘픈 여인을 희생시킨 한나라 조정을 맹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시도 썼다.

 

                            한나라 힘 이제 강력하고 (漢道今初全盛)

                            조정도 무신도 충분하건만 (朝廷足武臣 )

                             박명한 첩 무슨 필요있어 (何煩須薄明妾)

                             고생스럽게 화친의 먼길을 (辛苦遠和親 )

 

왕소군은 시집간지 2년만에 남편 호한야 선우가 죽는다. 둘사이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도 낳았지만 호한야의 전처 아들 조도막고(雕陶幕皐)가 다음 선우가 되자 부인이 되어 딸 둘을 더 낳는다. 초원의 풍습인 수계혼(受繼婚)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와 살던 여인을 아들이 데리고 사는 초원의 전통 이랄까. 그들생각에 우선 아버지의 여인이 다른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집안의 재산을 잃는다고 보았고 혹 혼자 살면 생계문제도 큰 걱정 이었다고 한다. 여자입장에서 보면 사냥 전투 약탈을 일삼는 약육강식의 유목사회에서 남자없이 살아간다는것은 불가능 이었다고.

 

왕소군의 출새화친(出塞和親)으로 “몇년동안 봉화불을 볼수없고 백성은 번성하고 소와 말도 들판에 가득했다(數世不見煙火之警 人民熾盛 牛馬在野)”고 사서에 기록된걸 보면 한나라는 왕소군 덕을 아주 톡톡히 본것 같다. 그뿐이랴, 연호까지 경령원년(境寧元年)으로 썼다. 흉노측에서도 호(胡)를 편안하게한 선우의 여인 이라며 왕소군을 영호연지(寧胡閼氏)라고 불렀다.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것은 자원(自願)이며 황제가 한번도 불러주지 않는데 대한 ‘悲怨의 선택’이라고 적고있다. 또 채옹(蔡邕)이 쓴 <금조琴操>에는 남편의 아들, 새 선우가결혼을 재촉하자 왕소군은 자살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살을 했던 안했던 왕소군의 문제는 근 2천여년 세월 중국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한족의 부끄러움과 한여인의 애잔함을 동정하는.

왕소군 이야기는 세계화 되었다. 19세기에 벌써 그녀의 가련한 이야기는 영역이 되어 유럽에도 전해지고 일본의 시인묵객들도 많은 글을 남겼다. 유럽에 전해진 왕소군 이야기는 마치원(馬致遠)이 쓴 한궁추(漢宮秋)를 번역한것인데 원제의 화공 모연수의 암약이 묘사 되어 있다. 일본에 건너간 왕소군 스토리는 아주 다양하다. 능운집(凌雲集)에 수록 되어있는  지노 시다누시(滋野貞主)의 <왕소군>이 유명하고 금석설화(今昔物語), 회아설화(會我物語)등 전승설화에도 녹아 있고 일본 사람들에게 제일 잘알려진것은 요곡(謠曲) 소군(昭君)이다. 

 

그러나 모택동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이바구가 완전히 달라진다. 소수민족과의 관계에 속을 썪이는 그들은 왕소군을 <화합의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다. 갑자기 내몽고에 있는 왕소군의 묘는문화재로 지정되어 삐까뻔쩍 관리되고 무산혁명가의 대표라는 동필무(董必武)의 아래와 같은 시비(詩碑)가 세워지고.

 

             소군은 천추동안 그 스스로 있었을뿐(昭君自有千秋在)

     호와 한의 화친에 대한 식견 높기만 하구나(胡漢和親識見高)

  글짓는 사람 각각 소군 가슴속 번민 나타내려(詞客各攎胸臆懣)

                 글짓고 먹칠해 보아야 말짱 헛고생(舞文弄墨總徒勞)

 

왕소군의 묘는 후허하오터의 청총(靑塚)도 있고 그옆 빠오투우(包頭)에도 있고 ....모두 10군데나 있다. 중국사람들 답다. 아직 몇 개나 더만들어야 직성이 풀릴런지.

 

시라무런 대초원의 마지막날밤, 같은 버스를 탄 일행들은 앞마당에 모여 술한잔을 했다. 나를 이여행에 초청한 동서가 느닺없이 나보고 이번여행에 대해 한말씀 해달라고 여러사람 앞에 소개를 했다. 갑작스런 요청이라 준비도 없고 그렇다고 피할수도 없어 나는 횡설수설하기 시작 했다.

 

내몽고는 고조선의 도읍터고 칭기스 칸의 땅이다.

요녕성 북부에서 요하(遼河)는 동,서요하로 갈라 지는데 이중 서요하의 물줄기가 내몽고자치주로 뻗어 올라온다. 서요하에 합류되는 한지류가 노합하(老哈河)이다. 노합하는 적봉(赤峰)시가 있는 지역에서 영금하(英金河)를 지류로 받아드리는데 이 두강이 합수되는 지점이 홍산(紅山)이다. 홍산서 걸어서 30분거리에 하가점(夏家店)이 있다. 홍산에서 꽃핀 신석기 후기문명을 <홍산문화>라 일컷고 하가점하층에서 발굴된 청동기문명을 <하가점 하층문화>라고 부르는데 현대고고학은 고조선의 출범지가 여기로 추정하고 있다.

 

칭기스 칸은 서양에는 축복을 동양에는 저주를 가져다준 정복자로 나는 기억한다. 바울을 통해 서양은 기독교화 되어 중세기독교문명이 출현 하는데 아주심한 배타성을 띠우며 1천년을 보낸다. 바울이 서쪽으로 전도여행을 떠난 200년뒤 로마는 콘스탄티우스가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테오르디우스때 기독교는 국가종교가 된다. 서양에서 국가와 종교의 관계는 항상 종교가 우위에 선다. 즉 교황권은 언제나 군주권 보다 우위였다는 말이다. 이것이 불러온것은 지독한 배타성과 폐쇄성. 참 이세상 명분없던 전쟁, 십자군 원정이란것도 이런 맥락속에서 전투적 신앙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 서양의 폐쇄성을 깨고 근대로 인도해준게 빈 근교까지 처들어 갔던 칭기스 칸의 손자 바투다.

프랜시스 베이컨 말로는 몽골군은 서양에 이슬람을 통해 근대화의 3가지 선물, 종이 화약 나침판을 안겨 주었다. 종이를 전해 받은 서양은 활판인쇄를 발달시켜 성경을 찍고 성경의 보급은 지식을 장악하고 있던 중세기독교권력을 무너뜨리고 지식의 개방성을 가져왔다. 이게 르네상스를 불러오는 초석이 된것이다. 중국사람들이 폭죽놀이로만 즐기던 화약은 이슬람을 거쳐 서양의 손에 들어가 100년전쟁말 대포가 처음 출현한다. 성에 들어앉아 기사를 거느리던 영주는 대포의 출현으로 몰락의 길을걸어 권력의 개방을 불러왔고 용병을 주축으로한 보병의 시대가 온것이다. 중국서 수침판을 가져와 나침반으로 개량한 이슬람은 이것을 유럽에 전해주고 유럽은 이 나침반으로 바다로 나가 돈을 벌어 용병 살 돈을 마련했다. 즉 나침반은 영토의 개방성을 초래한것이다.

얼마전 까지 서구는 르네상스를 거치며 그리스 로마문화를 자기들이 바로 전수해 받은양 역사 기술을 했는데 그것처럼 웃기는 것이 없다. 그리스 로마문명은 일단 이슬람으로 전수되었다가 인도의 수학과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중국문화와 합쳐저서 이베리아반도를 통해 유럽에 전파된다. 유럽문화에 0의 개념이 있었든가? 123을 아라비아숫자라고 부르는데 유럽에 전해질때 아라비아에서 온것이지 원래는 0의 개념과 함께 123은 산스크리스트문화에서 아랍으로 간것이다. 유럽에 대수(代數)란 개념도 없었다. 대수를 영어로 Algebra라고 쓰는데 이 Al이 붙은 영어 단어는 전부 아랍에서 온 어휘들 이다. Alcohol, Alkali, Album, Albumin, Algorism, Aldose....화학 의학용어가 참 많다. 세계최초의 종합병원도 바그다드에 세워진것이고 특히 의학개론과 인체해부도를 쓴 이븐 시나는 근대의학의 비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도 전부 아랍어에서 번역되어 르네상스 전 서구에 전해진것이다. 심지어 경제활동으로 세계최초의 수표는 9세기 바그다드에서 발행된것이 4천Km 떨어진 마드리드에서 결제된게 효시다. 다시말해 칭기스 칸과 그손자들은 유럽의 잠을 깨워준 은인들 이다.

 

반대로 동양을 개방에서 폐쇄사회로 가게 만든게 쿠빌라이다.당시 동양이라면 중국이 핵심인데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만발했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를 거쳐 법가(法家)의 시대인 진(秦), 또 유가(儒家)의 한(漢)까지는 중국고유의 사상과 한족이 지배하던시절이었다. 그뒤를 이어 나타나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부터 북방 이민족의 통치가 등장한다. 소위말하는 호한체제(胡漢體制)다. 이때부터 중국은 개방체제가 된다. 파천황의 영가의 난 이라는것이 이때 등장, 한족은 강남으로 쫒겨간다. 수(隨)나 당(唐)나라 창업자 피에도 북방 오랑케의 피가 썪이기 시작한다. 외래민족이나 사상이 중원땅으로 들어오니 중국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성당(盛唐)의 시대가 전개 된것이다. 여기에는 후한(後漢)말부터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인도불교가 큰몫을 차지한다. 인도불교가 격의(格義) 불교란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화 되기 시작하는데 그 꽃으로 피어난게 화엄(華嚴)이나 선(禪)사상이다. 이사무애(理事無碍 근본적인것과 현상적인게 가이 없는것)는 사사무애(事事無碍현상적인것과 현상적인게 가이없는 극단)까지 치닫고 일즉다(一卽多 하나가 여럿) 다즉일(多卽一 여럿이 하나)을 외친게 화엄사상이다. 즉 한족과 북방민족이 한데 어울려 개방을 이룩하는 사상인 것이다. 무주(無住 머물지 않음)을 외친 선(禪)도 마찬가지다. 이런 극도의 개방사회 뒤에 온게 송(宋)인데 정치적으로는 무척 나약했고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성당(盛唐)보다 한차원 더높은 원숙기 였다. 이때 북방의 금(金)과 몽골이 정치적 나약을 깔보기 시작하니 상처받은 한족의 자존심을 아파하던 송나라는 점점 내면지향적 경향을 띠게된다. 즉 성당(盛唐)의 개방사회가 남으로 쫒겨가 이름마저 남송(南宋152년 지속, 북송 166년)으로 바꿔달고 폐쇄사회로 흐르기 시작한것이다. 이때 남송에 나타난게 주자학(朱子學). 불교같은 외래적인것을 까부수고 내것, 즉 유학(儒學)으로 돌아가자는것 이다. 주자는 불교를 철저하게 공부, 불교를 비판하는 논리로 씀은 물론 불교를 엄청 카피했다. 화엄의 이사(理事)를 변용한게 성리학의 이기(理氣)가 아닌가? 그래서 이름 붙인게 신유학(新儒學). 우리 선조들이 올인한 학문이지만 아주 폐쇄 지향적인 철학이다.

이 신유학이 몽골제국을 사실상 해체하고 이름마져 원(元)으로 갈아달며 중국화를 시도한 쿠빌라이의 생각과 만나면서 그 폐쇄성 때문에  수백년 서양 앞에 무릎을 꿀고 살아야하는 동양이 되어 버린다.내후손들이 말을 멈추고 정착하는 순간 망하기 시작할꺼라고 이미 할애비 칭기스 칸이 예언 했건만 쿠빌라이는 말위에서 천하를 정복할수는 있지만 말위에서 천하를 통치할수는 없다며 중국화의 길을 걷는다. 원(元)이란 나라 이름을 보라. 중국땅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모든 나라 이름이 전부 지명에서 유래 했지만 유독 원(元)만 추상명사다. 쿠빌라이가 세상의 읽지 않은 책이 없다는 천재 유병충을 시켜 역경의 대재건원(大哉乾元)에서 따온 이름이다. 건원, 즉 하늘의 시작, 만물의 근원 그게 바로 쿠빌라이의 철학 이었던 것이다.남송이란 조그마한 동네의 주자학을 원은 공무원 채용시험의 텍스트화 함으로 전국화를 시킨다. 그렇게 주자가 미워한 비한족적 상징 쿠빌라이가 주자를 전도해준 전도사 역을 맡은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여! 퇴계 할배여!

사문난적이라며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에 칼자루를 내휘두른 송시열 이여!

이게 한반도에서 극복되기 시작한것은 박정희의 개발독재부터 라고나 할까?

 

                                                   Aug 24 2009

                                                   씨야 김 창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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