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尙法)과 상의(尙意)라는 두 가닥이 길고 길게 갈마드는 중국의 서법사(書法史)는 나같은 문외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특정시대 서단(書壇)에서 때로는 상법이, 때로는 상의가 피고지는 꽃처럼 엎치락 뒷치락 한게 바로 중국의 역사다.

상법은 전통이자 ‘고古’를 의미 하는것이고, 상의는 창신(創新)이자 ‘금今’을 표현 하는것이다. 전통적인 전범(典範)이 나를 옥죄어 온다고 느낄때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 쳤고 그래서 과감하게 부정하고 벗어나 새로움을 쫒는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게 자기만의 세계고 고유한 개성을 얻었다면 그게 곧 창신이다. 하지만 시대의 예술적 흥취는 마냥 만가지 색깔을 즐기게 놓아두지 않는다. 새롭다는 화사함에 지친 영혼은 슬며시 옛법도를 되돌아보게 되어있다. 이렇듯 오늘의 새로움과 어제의 질박함이 줄곧 꼬리를 물고 심미적 전환을 반복하는게 인간사고 중국서법사 인것이다.

그렇게 수천년 흘러온 중국서법사 에서도 내심금을 치는 두 이야기는 무덤을 파헤친 해서(楷書)의 아버지 종요(鍾繇)의 집념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를 무덤속에 싸들고 갔다는 당태종의 설화다.

종요(151-230)는 글씨연습을 위해 16년을 자기집 문밖을 나서본적이 없다는 위인이다. 위나라 두번째 황제, 명제(明帝)때 천자를 보좌하는 태부(太傅)벼슬을 지냈기에 흔히들 종태부라고 부른다. 잠자리서도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이불에 획을 그어대니 이불이 온통 구멍투성이.

양나라때 원앙(袁昻)이 쓴 <고금서평古今書評>이란 책에 보면 종요는 “뜻과 기운이 조밀하면서도 아름다워 마치 기러기가 바다를 희롱하며 학이 춤추며 하늘을 노니는것과 같고 행간이 빽빽하게 우거져 실로 지나가기가 어렵다”(鍾繇書, 意氣密麗 若飛鴻戱海 舞鶴遊天 行間茂密 實亦難過)라고 쎴다. 종요의 해서는 순박하면서도 고아한 맛이 진나라의 해서와는 또다른 의취가 서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림志林>과 <서원청화書苑菁華>란 책에 전하는 구혈발총(嘔血發塚) 이란 고사는 소름이 끼친다.

어느날 종요는 위탄(韋誕)의 집에서 조조(曺操)등과 용필법에 대해 야기를 주고 받다가 책상위에 채옹(蔡邕)이 쓴 <필론筆論>이란 책이 놓여 있는것을 보고 얻어볼것을 청했다. 그러나 위탄은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위탄(179-253)도 당대의 서법가였다. 특히 제명(題銘)에 뛰어나 사체서세(四體書勢)란 책에보면 위나라의 보물이나 그릇의 제명은 모두 위탄의 글씨라고 적혀있다.

종요의 상심은 너무나 커서 돌아와 가슴을 너무쳐 명이 오락가락 했는데 마침 조조가 갖고 있던 ‘오령단’이란 비약으로 생명을 건졌다니 그의 글씨에 대한 집념이 어느정도였나를 상상할수 있다.

그런데 마침내 일은 벌어졌다. 위탄이 죽은 것이다. 옹고집 위탄답게 채옹의 <필론>을 무덤속으로 가져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종요는 사람을 시켜 위탄의 무덤을 팠다.

채옹(133-192)은 동한말기 경사 천문 수학 회화 음악 서법등에 뛰어났던 문화천재. 불행하게도 악덕 동탁을 주살했던 왕윤에게 피살 당했다.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문화거장 이었지만 자기를 알아준 동탁의 죽음을 전해듣고 눈물을 흘린 죄였다. 왕윤도 뛰어난 문화 엘리트였기에 시기에 의한 문인상경(文人相輕)이란 설도 있고.

채옹의 필론은 서법사의 경전이다.

한번 일어난 붓은 아홉단계를 거친다는 구세운필론(九勢運筆論)은 음양오행론이 녹아 있는 만고의 탁론이다.

“오는 필세 막을수 없고 가는 필세도 멈출자 없다”는 그의 선문답같은 운필론은 서법가들의 귀감이다.

남의 무덤까지 파 필법을 터득한 종요는 “힘이 있어야 뛰어난 것이요. 힘이 없음은 곧 병통(多力豊筋者聖 無力無筋者病)”이란 오도송(?)을 우리에게 남겼다.

종요의 발전은 비약적 이었고 후세사람들은 그를 ‘해서의 아버지’라고 추앙한다. 운치가 뛰어나고 강유(剛柔)가 서로 어울리니 고아(古雅)한 깊이는 극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 태종(太宗)이 무덤속으로 가져갔다는 난정서 이야기는 무엇인가?

영화구년세재계축모춘지초(永和九年歲在癸丑慕春之初)로 시작되는 난정서 325자는 왕희지의 글로 위진남북조를 통털어 사대부들의 사상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나타낸 문장은 없다고 평가될 만큼 유명한 글이다. 산수(山水)에 대한 사랑, 영원한것에 대한 그리움, 인생의 즐거움을 찿으려는 마음, 유한한 삶의 덧없는 유전(流轉)에 대한 슬픔등이 구구절절하게 녹아있는 명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656년전, 서기353년(東晉 穆帝 永和9년)

3월3일 절강성 소흥(紹興)시내 서남쪽 12.5Km에 있는 난저산(蘭渚山)아래 난정이란 곳에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가 네아들(玄之 渙之 徽之 獻之)과 함께 당대의 명사 42인을 모아 수계사(修禊事)를 열었다. 수계사란 흐르는 물에 몸을 맑게하고 상서롭지 못한일을 없에는 행사인데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을 가득채운 술잔을 띄워 잔이 도달한 자리에 앉은자가 술을 마시고 즉석에서 시를 짓는 모임 이었다.

동양에는 수많은 유상곡수가 있는데 그 원조가 바로 이 소흥의 난정이다. 경주 포석정, 창덕궁 안에 있는것, 일본 구주 시마즈(島津)의 선암원(仙巖園) 안에 있는 곡수(曲水)의 정원등이 전부 이 난정의 유상곡수를 본딴것이다.

잔이 흘러가 자기앞에 왔는데도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석잔(三觴)을 마셔야 했다. 이모임을 통해 26명이 지은 37수(首)의 시가 모아지자 주재자였던 왕희지가 편집하여참석한 여러명사들과 나눈 감상을 적은게 바로 이 난정서다.

글 자체도 명문이지만 글씨가 이세상에 쓰여졌던것중 가장 뛰어난 천하제일 행서(行書)로 알려졌는데 이글씨에 미친 당 태종이 죽을때 자기 관속에 넣어 가버려 이세상에 전해 지지 않는다. 난정안 어비정(御碑亭 )에 새겨져 있는 난정서나 서안 비림(碑林)에 있는 모본,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져간 신용본(神龍本), 내며느리가 거금을 들여 혼수로 들고온 난정서, 이 모든게 가짜다.

왕희지는 동진 개국 원훈인 왕도(王導)의 당질 이다.왕도는 낭사왕 사마예(司馬睿)를 도와 동진(東晉318-420)이란 망명 정권을 창업한다. 사마예는 서진의 실질적 창시자 사마의의 증손 이다. 51년간 지속된 서진의 멸망이 다섯 오랑케(匈奴 鮮卑 氐 羌 鞨)의 침입 때문 이라지만 그것은 표면적 이유이고 꼭 망해야할 나라가 망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진때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것들 이었다. 사람의 젖으로 키운 돼지를 최고의 미각이라고 즐기고 술은 하인들이 24시간 껴안고 익혀야 제맛이라고 우겼다. 부패와 향락이 이처럼 철철 넘친 시대도 드물었다.

위(魏)로부터 왕권을 선양받아 개국한지 15년뒤 오(吳)를 통합해 중원을 차지한 서진은 역사상 몇안되는 통일왕조였다. 중원을 차지한지 20년이 채 안되 8왕의 난이 일어났고 황족을 비롯한 상류계층의 사리와 위선에 가득찬 도덕적 붕괴는 걷잡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호(胡)족들에 대한 한(漢)족들의 박해는 비인간적이다 못해 처절 그 자체였다.

한족위주의 역사 기술은 다섯 오랑케의 서진 침입을 영가(永嘉)의 상난(喪亂)이니 파천황(破天荒)이라고 적고 있지만 참 동의 하기가 난감하다.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들이 8왕의 난을 낳았고 이를 위해 오랑케의 무력까지 자기편으로 끌여들여 자기편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오랑케들에게 오랑케의 힘이 강대함을 자각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중원땅에 이룩해 놓았던 한족의 질서와 문화는 산산히 부서지고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남으로 남으로 한족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새로 찿아가 판을 벌린곳이 지금의 남경(옛 이름 建業), 나라 이름은 동진(東晉)이었다. 역사는 서진(西晉)의 사족(士族) 80%가 남경으로 달아나 동진에서 새삶을 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부패가 있어야 축재가 뒤따르고 돈이 쌓여야 그걸 기반으로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다. 그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한 인간사의 철칙이다. 유럽의 그 거대한 문화를 선도했던 메디치가의 부패를 보라. 지오바니 메디치는 16살에 추기경에 오르지 않았던가! 낙양을 중심으로 한 중원땅을 이민족에 빼앗기고 회수(淮水) 건너 강남에 남조(南朝)라는걸 건설한 한족들이 부패를 버리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것은 아니다. 오히려 옛영화를 못잊어 축재에 더 혈안이 되었다.

왕희지의 글이나 글씨도 이러한 바람직 스럽지 못한 시대적 배경을 깔고 피어났다. 도교(道敎)의 원류인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신봉했던 그는 양생술에 심취해 만년에는 천리길을 마다 않고 약석(藥石)을 찿아 헤맸고 약물중독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삶을 마감했다.셋째아들 휘지(徽之)도 한식산 중독으로 등이 썪어 생을 끝냈다. 한식산(寒食散)이란 단사(丹砂) 웅황(雄黃) 석영(石英) 석류황(石硫黃) 증청(曾靑) 같은 광물질을 갈아 만든 환각제다.

글씨 쓰는걸 중국서는 서법(書法) 한국서는 서예(書藝) 일본서는 서도(書道)라 일컷지만 세나라를 통털어 왕희지는 서성(書聖)으로 추앙된다. 그는 저멀리 400여년의 한(漢)문화를 온축시켜 귀족적이고 전아(典雅)한 해서 행서 초서등의 글씨꼴을 정립 했으며 글씨쓴다는게 그에게 와서 예술로 승화 되었다. 특히 난정서에 나타난 20번의 지(之)자가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줌은 물론 뛰어난 아름다움에 당대의 사람들은 혼을 빼앗겼다. 그래서 막내아들 헌지(獻之)와 함께 사람들은 이왕(二王)이라고 부른다.

그의 글씨에 미쳤던 왕은 당 태종 말고도 동진을 찬탈했던 환현(桓玄)도 둘째 가라면 울고갈 위인 이었다. 환현은 이왕의 일품(逸品)들을 구해 항상 곁에 놓고 즐기다가 동진 찬탈의 백일몽이 끝나 배를타고 그의 본거지인 형주로 도망치다가 어느 누구에게도 그 글씨를 줘서는 안된다며 장강에 던져 버렸다고 전해진다.

지금부터 1391년전 아버지를 앞세우고 아버지의 이종인 폭군 수양제를 쓰러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연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희대의 강골 무인이었지만 황제가 된뒤에는 누구보다도 문(文)을 사랑한 인문주의자가 된다. 한족과 선비(鮮卑)족의 혼혈 이었던 그는 272년간이나 갈라져 싸운 남북조의 역사 저술을 명했음은 물론 진서(晉書)일부는 자기가 직접 집필했을 정도의 문한(文翰) 이었다.

그가 남긴 온탕비(溫湯碑) 진사비(晉祀碑)등은 천년이 지나도 본받을 서체로 각급학교 학생들이 공부한다니 글씨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위인 이었다. 태종은 서기 632년 위나라 종요와 왕희지의 진적을 수집, 1510권의 방대한 서첩을 발간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왕희지의 글씨를 수없이 베끼고 공부하다가 더디어 639년 천하에 흩어져 있는 왕희지의 글씨를 모두 모아 올리라고 칙령을 내린다. 그 결과 왕희지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40여지(紙)를 비롯 1290지(紙)를 수집했다. 그러나 난정서는 얻을수가 없었다. 태종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알아본 결과 소흥 난저산 아래에 있는 영흔사(永欣寺) 변재(辯才)라는 스님이 갖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변재가 왕희지 7대후손 지영(智永)스님 수제자이기에 이정보가 확실 하다고 믿은 태종은 궁중의 불교사원인 내도량(內道場)으로 그를 불러 모셨다. 며칠 뜸을 들인뒤 변재를 불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난정서를 화제로 올렸다. 변재는 스승인 지영을 모시고 있을때 난정서를 본적은 있지만 입적하신 뒤로는 난세가 거듭되어 그 행방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아무리 천하를 쥐고 흔드는 황제라도 모른다는데는 방법이 없었다.

태종은 밀사를 파견하여 변재주변을 감시하는것은 물론 신하들을 모아 난정서를 찿아낼 방법을 강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방현령(房玄齡)이란 신하가 감찰어사 소익(蕭翼)이 재주가 비상한 인물이니 이 문제를 틀림없이 해결할거라고 천거를 했다.

난정서는 왕희지가 죽은뒤 막내아들 휘지의 손에 들어가 그 후손인 정지(楨之) 언조(彦祖) 주욱(冑昱)을 거처 7대손인 지영스님이 보관하고 있었다. 지영은 왕희지의 후손답게 그 자신이 뛰어난 명필 이었다. 조상의 묘 가까운 영흔사에 주석하던 그가 100세로 죽자 수제자인 변재가 난정서를 맡았다. 변재는 스승인 지영의 글씨를 빼어나게 모사했다고 전해지는데 난정서를 보관 하는데 엄청 고심했다. 아무도 몰래 대들보에 사방 일장(一丈)의 홈을 파고 감추어 두었다.

태종의 명을 받고 영흔사에 잠입한 소익은 변재와 바둑도 두고 거문고 투호(投壺) 악삭(握槊)등을 즐기며 금방 절친해 졌다. 소익은 어느날 태종에게 빌려온 자기 증조부 양(梁) 원제(元帝)가 그리고 글씨를 쓴 직공도(職貢圖)를 들고 변재를 찿아가 자연스레 화제를 난정서에 돌려 양나라 이후 혼란으로 난정서가 사라지고 없다고 단정지어 말했다. 그러자 변재가 뭘모르는 무식한 소리 하지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결국 언쟁 끝에 화가난 변재는 소익이 태종의 첩자인줄 가맣게 모르고 난정서를 보여주고 말았다.

소익은 변재의 불사를 틈타 난정서를 훔쳐 영안역(永安驛)으로 내달아 그 지역 도독의 협조를 받아 태종에게 갔다 바쳤다. 태종의 입이 찟어 졌다. 당장 소익을 천거한 방현령에게 금채(錦綵) 1천단(段)을 내리고 소익은 원외랑(員外郞)으로 승진 시키고 수많은 하사품에 장원저택 까지 주었다. 태종은 변재가 80고령임을 감안 벌을 주지 않고 월주자사에게 명하여 비단 3천단과 쌀 3천석을 주었다. 변재는 비단과 쌀을 3층 보탑을 세우는데 쓰고 스승으로부터 받은 유품을 잃어버린것을 원통해 하다가, 식음을 전폐 1년만에 죽고 말았다.

태종은 난정서를 손에 넣은지 10년뒤 649년 죽음을 맞는다. 함풍전(含風殿)에서 태자 치(治)를 앉혀 놓고 너에게 모든걸 주고 가지만 난정서 하나만은 황천길에 가지고 가겠다고 단호하게 천명 했다.

난정서는 배장품(陪葬品)으로 태종의 무덤 소능(昭陵)에 묻혔다.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는 난정서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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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ly 22 2009

                                       씨야 김 창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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