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淸요리 이야기

 ----氏也 燕京別記   其三-----


나는 언제부터 인지 <중화요리>하면 반감부터 갖는다.

중화中華란 그들의 중화이지 내 중화는 아니니까.

그들은 우리를 보고 동이東夷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분명 동쪽의 오랑케는 아니다.

적어도 지난 수 천여년 이땅에는 높은 수준의

염치와 범절과 중국을 능가하는 예의가 있었다.

아편전쟁이후 청과 영국사이 체결된 남경조약에

서양사람을 양이洋夷라고 부르지 말라는 조항이

있는걸 보면 이夷자 속에 무지한 욕이 들어있다.

옛 숙신 예맥을 동이東夷라고 중국인들이 불렀는데

예맥濊貊이란 “똥오줌 묻은 더러운 짐승”이란 뜻.

그런걸 알면서 그들을 중화 운운 하는것은

도저히 내 상식 가지고는 용납 할수 없다.


세계 4대 성인이란 공자도 괴상한 소리를 했다.

“오랑케들에게 임금이 있다는 것은 제하諸夏 여러

나라에 임금이 없다는것 보다 못하다“.....論語

그 제자라는 맹자는 한술 더 뜬다.

“나는 중국사람(夏)이 오랑케(夷)를 변화 시켰다는 말은

들었어도 오랑케가 중국인을 변화 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孟子  騰文公篇


우리 아버지네 세대만 해도  중국식당 음식을

<청淸요리>라고 일컬었다. 다 뜻이 있었다.


청요리의 백미는 누구나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연상한다.

이번 북경여행 다녀온 글에서 만한전석 한구절

썼더니 모두 먹어보고 왔느냐고 묻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못 먹어 봤다.

만한전석이란 지금 이세상에 존재하는 요리가 아니다.

그럼 홍콩의 광동요리 위주로 한 <만한췐시>나

북경의 방선반장仿膳飯莊에서 파는 만한전석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관광객용 이라고 답할수밖에.


1995년 홍콩의 영화 <만한췐시>도 관관용 미끼다.

또 중국식 만담 <샹성相聲>에서도 각종 진귀한

식재료 이름과 기기묘묘한 음식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것 다 부정확한 헛소리다.

이렇게 대중예술과 자의적 관광용 왜곡에 의해

만한전석은 신비적 요소와 과장으로 포장 되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묘사된 만주지방의

엽기적 식문화도 일종의 흥행을 위한 뻥튀기다.


만한전석이 언제 누구때부터 시작했고 음식가지수는

몇 개나 되는가는 참 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 할수 있는것은 청이 개국초의

혼돈을 정리 하고 정신을 차린게 강희대제 부터니까

그때부터 생겨난 음식 이라고 보는게 옳다.


소수민족으로 천하를 잡아쥔 만주족은 언젠가

한족에 동화, 정체성을 잃을까 전전긍긍.

산해관을 넘어온 이후 자신들의 혈통과 문화를

지키려고 갖은 노력을 경주한다.

다수의 한족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위해

몽고족과 혼인을 통해 머릿수 확충도 시도하고

한족의 심정적 복속을 검증하기위해 변발도 강요한다.

뿐만 아니라 한족과 통혼도 금지하고 북경 내성

內城에서 한족을 몰아내고 만주족 기인旗人들만

살게하는 특단의 조치도 취했다.

모든 공문서에 만주어를 병기倂記케 하고 열하熱河에

피서산장을 만들어 정기적 사냥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북방민족의 야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음식에서도 구분이 뚜렸했다.

만주족은 만석, 한족은 한석으로 구분해 들었다.


이 두음식의 상차림이 합쳐진건 강희제의 회갑연부터.

청淸의 성조聖祖인 강희제康熙帝는 재위 61년,

두차례나 어마어마한 천수연千叟宴을 개최한다.


역사는 강희를 서슴없이 대제大帝라 부른다.

천하통일의 진시황, 태양왕 루이 14세,

불교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아쇼카왕 등을

대제라고 부르는 법은 없다

대제라고 부르는데는 일정한 룰이 있다.

적어도 모든이가 머리숙여 존경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강희대제는 한족이 이룩하지 못한 신강과 티벧등

영토확장에 성공, 청조의 권위를 중국인에 각인 시켰고

어느 황제가 따르기 힘든 찬란한 문치文治를 남겼다.


1679년 명사관明史館을 열고 청조를 외면했던

천하의 석학을 뫃아 정사正史중에 걸작이라고

칭송되는 명사고明史稿의 편찬을 시작 했다.

1716년, 그 유명한 4만2천자의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완성, 모든 한자권 문화에 이정표가 되었고

그 외에도 패문운부佩文韻府, 연감유함淵鑑類函,

병자유편騈字類編등을 발간, 사서류를 완결지었다.

강희는 그 자신이 뛰어난 독서광 이었다.


이런 빼어난 명군 이었으니 두 번씩이나

천수연을 즐겼다 해도 나무랄 사람 없다.

천수연이란 천자의 경로사상을 형식으로

구현한 일종의 초청연招請宴 이다.

여기서 만주족과 그 지배 받는 한족의 음식이

처음 합쳐져 유명한 만한전석이 시작 되었다는게

정설 이다.

첫 천수연은 1713년 3월 임인壬寅에 장춘원서 열렸다.

강희의 환갑기념, 전국서 65세 이상 4,235명을 초대했다.

90세 이상 33명, 80대 533명, 70세 이상 1823명.

65세 이상 1846명을 불러 모셨다.

술은 종실자손 20세이하 10세 이상 70여명이 올렸다.

셋째날에 만몽한군문무대신滿蒙漢軍文武大臣, 관원官員

호군護軍, 병정兵丁, 간산인間散人등 65세 이상

2,305명에게 만한전석을 대접 했다고 한다.


두 번째 천수연은 1722년 강희의 고희연 이다.

정월 초이틀 이번에는 건청궁 앞뜰에서 열렸다.

역시 만몽한군문무대신, 관원 및 관직을 사직한

사람중에 60세 이상 초대 되어 사흘간 열렸다.


강희의 아들인 옹정때는 천수연 기록이 없다.

독재자 옹정은 황제에 오를 때도 미스테리 였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도 의문 투성이다.

강희가 임종하며 시신侍臣의 손바닥에 十四황자라고

썼는데 앞 십十을 지워 四황자인 윤진, 옹정이 등극 했단다.

죽을 때는 옹정의 손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주자학자

여유량呂留良의 손녀 여사랑呂四娘이 어용 도자기를

만드는 경덕진에 잠입, 황제용 도자기에 서서히 녹는

독약을 비장, 독살 당했다는게 야사로 전한다.

옹정의 비위를 건드리는 대목이 여유량의 저서에

있다고 하여 무덤에서 파내 목을 자르고

아들 여의중呂毅中을 죽이고 제자들도 참형 했다.

옹정 급사 이후 경덕진은 폐쇄 되었다가

청말에 다시 문을 열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10대 평전의 하나라고 일본 사람들이 꼽는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쓴 <옹정제>란

책을 보면 독재자 였지만 치자治者로 옹정만큼

주도치밀하고 다음 오는 아들을 위해 큰 곳간을 남긴

명군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황실예산을 명나라때

10%로 줄인게 옹정이고 그래서 만한전석은 없었다.

나는 정녕 박정희와 옹정을 비교하는 글을 쓰고 싶다.

 


천수연은 옹정의 아들 건륭제때 부활, 두 번 열었다.

황조皇祖인 강희대제의 성전盛典을 본받아 1785년

정월 초엿새 건청궁 앞마당서 만한전석을 펼친다.


천수연 외에도 외국공식사절 내방이나

변방의 반란을 진압한 대장군이 개선 했을때

또 황실의  경사가 있을때 만한전석이 차려졌다.

어느듯 만한전석은 한족과의 화합을 도모하려는

지배 만주족의 정치적 목적도 깔려들기 시작했다.


이 특별한 상차림이 최고의 경지로 완성된시기는

건륭과 그의 아들인 가경제嘉慶帝 시절 이다.

강희등 앞선 시절은 역시 의식주가 몹시 검소했다.

또 만주인의 입맛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때 였다.

상어지느러미나 해삼 같은 해산물이 궁중요리

식재료로 등장한게 역사적으로 건륭제 이후다.

만한전석의 상차림에 대해서는 설이 아주 구구.

음식 가짓수가 108가지란 설부터 218가지 까지.

또 만석, 한석, 몽고풍, 회족풍 다 썪였다는 말도있고

주요리가 양자강 하류 중심의 화이양요리淮楊菜 ,

황하 중하류 산둥요리魯菜 , 주강유역의 광둥요리

粵菜 설등 이야기가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현재 만한전석에 대해 전하는 궁중사료나

Recipe는 찿을 길 없다.

마지막 궁중 어선御膳요리를 먹은 부의溥儀의

자서전 <나의 前半生>에도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만한전석에 관한 이설 중의 하나가 건륭제의

남순南巡을 맞아 양주의 소금장수들의 요리사를

차출하여 마련한 연회상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때

만한전석은 중국 각 지방서 진상된 진귀한

식재료와 궁중 어선방 요리사들의 축적된 미식

노하우가 장기간에 걸쳐 집대성한 음식문화다.

전국의 소문난 별미들이 황제의 입을 위해

궁중으로 모여 축적된 자랑스런 결과물이다.

이렇게 궁중식탁에 오른 지방 토속음식은 어선요리

족보에 올림으로 그 음식이 고귀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범, 성성이, 비룡, 사향삵, 곰등

전설처럼 떠도는 식재료는 국가보호 동식물이 되어

홍콩의 <만한췐시>나 북경의 <仿膳飯莊>의

식탁에 오를수도 없으니까 그들이 파는 만한전석은

관광객 유치용 이란게 드러나고 있다.

어선방御膳仿의 황제 요리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생각 저주장을 꿰어 맞춘 짝퉁이란 소리다.

만한전석도 역사의 뒤안길서 화려했던 기억의 하나다.


<청요리>를 가장 즐겼던 미식가는 건륭과 서태후다.

두사람의 음식에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전해온다.


건륭은 강희로 시작된 청 최고 전성기 정점의 제왕.

풍류를 즐기며 4만여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자 많은

무공을 세우기도 했던 그는 89세까지 산 장수노인.

이세상 부러울게 없고 모든걸 다갖추었다고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이라고 불렀다.

많은 연구가들은 그의 장수가 독특한 식단에 있었다고

보는데 매끼 10가지 음식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메뉴라야 총 160여가지,  절제속 규칙적인 식사와

제비집요리, 콩, 산나물등을 즐겨 먹었다고 전한다.


황제의 어선御膳(황제의 음식을 이렇게 부른다)은

자금성안 양심전 밖 외선방에서 만들어져 내선방에

대기하다가 황제가 “전선傳膳”이라고 말하면

태감이 즉시 식탁을 마련하고 보온상태의 어선을

식합에 담아 순서대로 올리는데 음식마다 쪽지가

붙어있다. 음식이름, 누가 만들었고, 음식설명까지.

또 황제 앞에 오기전에 물론 태감이 먼저 시식.

쌀은 강희제가 개발한 붉은쌀赤米을 꼭 썼다.

이쌀은 어원인 풍택원에 심어진 벼 가운데 강희가

우연히 발견한  크고 조숙한 메벼로 알려졌다.

맛이 향기롭고 이모작이 가능해 궁중 입쌀로 지정.

황제의 어선에는 술이 없는데 건륭과 아들 가경제만

술을 즐겨 별도로 제공 받았다고 한다.


건륭은 귀령주龜齡酒, 송령주松鈴酒, 옥천주玉泉酒

도소주屠蘇酒 등을 즐겨마셨다.


귀령주는 명나라 도사인 소원절이 처음 빗었다.

명황제들이 모두 애지중지한 약주. 인삼 녹용 해마

구기자 참새뇌 등 28가지 재료가 들어가고 달이는

시간만 한달이 걸린 독특한 술 이었다.

이걸 청대에 들어 와서 옹정제때 어약방등에 명령을

내려 완전히 재료를 다시 배합하고 개선 했다.

생지 숙지 당귀 두중杜仲 쇄양鎖陽 천문동 육종용

천우슬 구기자 보골지 청염등 재료를 33가지로 바꿨다.

청 황실에서는 이술을 거의 약으로 취급했다.

송령주는 대신 장조의 비방인데 장수주 였다.

심산 늙은 소나무 아래 뿌리까지 파고 상처를 낸뒤

그밑에 술단지를 묻고 1년뒤 꺼낸 술.

옥천주는 옥천산에서 나는 물에 효능이 있는술.

건륭은 저녁마다 꼭 2잔씩 마시고 가경제는 이술을

무척 좋아해 매일 6-7잔, 기분나면 많이 마셨다.

도소주는 병을 예방 하는 술, 단오절에 꼭 마셨다.

  

건륭은 직접 술을 빗기도 하고 시詩나 부賦를 지어 미주를

찬미했다. 과음도 안하고 술은 장과 위를 따뜻하게 하고

풍한을 막고 양기를 돋우며 백독을 제거한다고 여겼다.

  

황제의 식사시간에는 두가지를 결정 해야 한다.

아침에는 어느 신하를 만날건가 저녁엔 어느 비빈을

이밤 품을건가, 물론 결정을 안할수도 있다고 한다.


이번 베이징 여행에서도 동서의 용의주도한 준비로

많은 청요리를 먹었지만 무엇을 먹었는지 하도 많아

기억도 하기 힘든다.

언젠가 이향방여사가 주도하는 약선요리 여행을

한번 따라 갔으면 하는게 고소원이다.


Oct 20 2008

씨야 김창현

Eugene C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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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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