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溪할배 후손들을 위한 苦言

이달 초 虎溪書院 복설에 따른 위패서열문제가 검재와 하회종손간에 원만하게 합의, 좌 西崖 우 鶴峯으로 결정 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왔다.

이 기사가 보도 되자 검재종손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문제를 독단적으로 합의했느냐는 의견이 표출, 390년전 退溪學派가 위패문제로 양분되어 싸운 시행착오가 다시 재연될 조짐 마져 보인다.

내앞, 하계, 무실, 소호리등 옛날 학봉학파를 지탱했던 일부 후예들은 분개마져 서슴없이 드러내고 하회 종손은 병산서원 행사 뒤에 파안대소를 감추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참 극히 우려되는 현상들이다.

이런때 일수록 우리 청계공 후예들은 정말 냉정하게 올바른 판단을 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내가 속한 학봉자손들은 우리 선조의 문제니까 깊은 성찰과 함께 무엇이 미래지향적인 판단인가 고민해야 한다.

390년전 퇴계학파가 휘말려 들었던 <鄕戰>을 다시 되풀이 하는것은 정말 바보짓중에 하나다.

학봉차종손은 차제에 호계서원이 복설 되는것은 퇴계학파의 오랜염원 이었슴을 밝히고 정녕 위패의 좌우가 문제라기 보담 퇴계학파 전체의 consensus를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도출하는냐가 관심 이란것을 지적해야 한다. 언론이 양반 다툼이고 퇴영적인 싸움이라고 몰고 가는것을 극히 경계해야 하고 sensationalism에 휘말려 들면 절대 안된다.

아울러 청계공 후예들이 지금 당장 해야할 몇가지 문제를 나는 제기 하고 싶다.

첫째 돈을 모으는 훈련을 한 십년 계획으로 해야한다. 예를 들면 청계공 적서손은 물론 외손까지 파악, 전산화 하고 앞으로 몇 년간 얼마를 모을것인가를 정하고 가구당 월5000원 정도 모두 부담없는 액수를 정해서 꾸준히 모아 나가면서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우리는 왜 돈을 모아야하며 어떻게 쓰기위해 모으고 이것은 멈추면 안된다는것을 훈련해야한다. 이렇게 모은 돈은 무엇을 위해 써야한다는걸 명확하게 밝혀 놓아야 한다. 무슨일 있을때 마다 얼마씩 거두는 것은 부담되고 눈치보이고 못내면 죄송하니 이런것에서는 이제 벗어나야 한다. 물론 년에 한차례나 몇차례 정해서 Fund raising하는 행사는 열심히 유지해야 한다.우리는 이런걸 배우기위해 수조 달러의 펀드를 월스트리트와 런던 시티에 굴리고 있는 중국客家들과 유대인들의 Fund raising 노하우를 연구 해야한다.

두번째 옛것을 무조건 지키고 따르면서 우리가 양반 이었슴을 뽐내기 보담 과감하게 개혁할것은 머리맞대고 논의, 바꿀필요가 있는것은 바꿔야 한다. 제사같은것은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잇돼 차리는 음식이나 지내는 방법등 전연 새로운 각도에서 합리적으로 청계공 후예들만의 틀을 새롭게 짜야한다. 내생각에는 제사는 부모세대까지 지내고 음식은 내앞 부설 떡공장 같은걸 설립, 우리 씨족을 위한 기금도 모을수 있고 또 이 떡을 놓고 절하면 떳떳한 제사가 되게 매뉴얼을 다시 짜야한다.

문중산이 있으면 활용, 청계공 후예 모두가 묻힐수 있는 공원을 마련하고 조상들의 동상도 세우고 또 경제적으로 큰 기여를 한 직계후손이나 사위, 외손 까지 아우르고 훌륭한 인물도 동상을 세워 줘야한다. 또 위대한 후손의 탄생을 위해 待望의 후손을 위한 자리는 근사하게 비워두고 격려해 나가는것도 필요하다. 중국 客家들은 후손이 하버드대학만 입학해도 고향에 石筆이나 功名柱를 세워주고 싱가포르에 있는 이광요가 세워놓은 본부에서 인력관리를 한다.

세 번째 온라인 청계공 후예 역사가들을 의도적으로 키워 노론후예 강단사학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정체사관의 왜곡된 역사학을 깨부셔야 한다. 쉽게 이야기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가겠다는 인재는 장학금을 줘서 키우자는 이야기다. 우리도 계획을 세워 인재를 양성, 한국사학계를 주도해야 한다. 비근한 예로 하버드나 예일, 프린스턴 신학과를 통일교도들이 수십년에 걸쳐 의도적으로 장악한것을 벤치마크 해야한다.

또 각파의 종손은 특별한 매뉴얼을 짜서 교육하고 키우자. 어학교육이나 고강도의 역사, 철학교육을 시켜 학위도 최고로 따게 하고 하버드 엔칭에 가서 영어로 퇴계의 사상 같은 것을 거침없이 강연 할수있는 정도까지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돈이 있고 목표를 세우면 할수 있다.

문중일을 하는 사람은 젊은 나이때부터 뽑아 평생 우리의 내력을 소상히 파악하고 대외적 거침없는 창구역을 맡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서 키워야 한다. 미국에 와 있는 월남사회는 그렇게 운용한다.

특히 미래사회는 IT시대니까 문중일을 위해 헌신할수있는 컴전문가등도 아낌없이 지원, 키워야 한다. 예를 들면 지금 김재수가 맡아 이끌어 나가는 청류회(http://kim25.net) 사이트 같은것도 합리적인 지원을 하여 임진왜난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될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의 역사해석을 수용할때까지 지켜보고 감시하는 첨병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씨족의 의사를 집약하고 소통을 위한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젊은 세대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門長들이 노구를 이끌고 애쓰는 수고도 덜게 된다.

이번 호계서원 복설에 따른 논의 때문에 혹시 차종손 종길이가 수세에 몰리면 검제후손은 흐트러짐 없이 똘똘뭉쳐 그를 지원하자. 그가 어떤 판단을 했던 그것은 최선의 결정 이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것은 유대인들은 제사장가문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전통이 참 부러워서 하는 소리다. 유대인중 코헨Cohen이란 성씨는 12지파중 제사장 가문이다.

참고로 내가 옛날에 썼던 客家란 글과 뿌리찿기란 글을 여기 첨부 한다.

 客家 1

나는 내심 며느리는 Jew, 사위는 객가 출신을 보고 싶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내가 살던 Lake forest에서 조금 떨어진  Newport beach에 있는 유대인들의 Synagogue에 토요일이면 우리 애들을 부지런히 데려갔다. 뭐 일부러 아무도 아는이가 없는데 우정 간것은 아니고  그때 큰애의 학우들이 죄다 jew들이라 나는 특정 종교가  없고 하니 친구 사귀라고 데려다 준셈 이었는데  그 부모들은 참 나를 반겼다.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는 그들이 도사들이라 도움도 많이 받은 셈이다.

         그때만 해도 내가 살던 Saddleback Valley지역의 교육기관들은 이 Jew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교육감은 물론 영재학교, 일반 국민학교등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심지어 Jew들 명절인 Hanukkah 같은날은 전학교가  공휴였고 학예회때는 Jew들의 노래만 불렀다.

          에랜 파이커, 애나 고만, 에랜 샤츠, 데이빗 밴스라이크.... 내 큰애의 어릴때  Jewish동창들은 지금은 전부 훌륭히 자라 모두 전문직의 자기 갈길을  걷고 있다.

          비록 Jew는 아니지만  지금 며느리도 부계는 선조가 유럽의 명문이었다. 재작년 바티칸을 가보고 그건물 지을때 기증가문 명단을 보니 기둥뿌리 하나는 내며느리네 선조가 바쳤다는걸 알고 꽤나 내력은 긴집이구나 여기고 있다.

 

          딸 하나 있는것 혼기가 늦어지니  애비로서는 내색은 안해도  걱정 이다. 오는 6월 MBA를 마치니 이제 갈 직장도 결정 되었고 이것 저것 합치면 대망의 6 digit 연봉도 되고 하니 어느놈 나서 줄때도 되었는데 아직 이다. 

          내가 기왕이면 객가 출신 사위를 바라는건  그까짓 사랑이란 기끗 시효가 한 6개월이면 짝인것 같고 어차피 미국서 대를 잇고 살아야 하니 중국계가 무난하다고 보았는데 한족은 별로고 역시 내 마음에  드는건 이 객가Hakka들이다.

          물론 객가도 17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한족이었다. 처음엔 황하 유역에 살다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받고 영가의 난등을 거치면서  광동 복건 강서등에 흩어져 지금은 한 6천만 정도 된다고 하는데 중국인구의 98%나 차지 한다는 한족과는 판이한 문화와 음식과 풍습을 지니고 있는 소수 민족이 되었다.

          흔히들 학계에서 이세계를 이끌고 가는것은 Jew, 인도, 중국등 5대 유랑민족 이라고 꼽는데 중국에서 유랑의 세월을 보낸건 이객가가 주류다.

          객가란 명칭은 송대宋代에 호적이란게 생기면서 토착민을 주적主籍  유입인을 객적客籍 이라고 표기 한것에서 시작 되었다지만 이들의 언어나 의복 , 토루란 둥그런 주거양식, 전족을 하지않는것, 아주 외향적이고 검소 근면 한것등  그들 특유의 문화를 갖고 있고 족보를 아주 중시 한다거나 성공하면 꼭 고향을 찿아 조상을 기리는 습속등 우리와 참 기질이 비슷한것이 많다. 객가어는 중국 7대 방언중 하나고 내가 보기에는 중국을 이끌어 온 정수가 이들 객가다.

           有太陽的地方, 就有中國人. 有中國人的地方, 就有客家人-----태양이 있는곳에 중국인들이 있고 중국인들이 있는곳에 객가들이 있다. 그렇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그들은 새로 떠오르는 중국의 핵심에 서 있다.

            객가 출신으로 뛰어난 사람을 꼽으려면 한량이 없다. 멀리는 우리 선조들의 신神 노릇을 한 주자朱熹 부터 태평천국의 홍수전, 손문, 송경령 남매,등소평, 싱가폴의 이광요, 대만총통  이등휘,  홍콩재벌 이가성, 태국재벌  陳有漢, 인도네시아 재벌 林紹良, 대만재벌 王永慶, 태국 파타야를 건설 한 謝구泗, 황금유 재벌 胡文虎, 중공군 총사령관 朱德, 현대 중국의 대문호 郭沫若.......

            내가 객가에 대해 처음 안것은 역시 우리 큰애의 영재학교 동기인  Richard Hsei네를 알고 부터다. 이들이 謝씨 객가 였다.Kindergarden부터 같이 애를 키우며 그 부모들과도 가까웠는데 아버지는  80년대초 나이키 운동화 공장을 대만에 갖고 있는  기업인이었다. 나는 한족을 아주 싫어 하는편인데 어쩐지 이양반은 다정다감하면서도 대인 풍모가 있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Sun &sail club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Richard는 고등학교를 우리애 다음 2등으로  졸업, 하바드서 경영학을하고 런던서 투자은행에 일했는데 벌써 10년전 년봉이 50만불 넘는다고 했다.  지난 2년동안  크리스마스 때면 스카치 한병들고 우리를 찿아 온다. 아직 미혼인데 내가 물어 보았더니 돈버는 재미에 장가갈 틈이 없다나.

            작년 부터 우리 딸애를 따라다니는 객가 청년이 있는데  U Penn을 나와 골드만삭스에 다니다가  MBA를 우리애와 같이 하고 있는데  나이가 안맞다. 두살 어리고 또 너무 미남이라 아무래도 손탈것 같아  속으로 찜찜 했는데  우리애가 묻기에  내가 관상을 좀 연구했다면서 솔직하게 내 의견을 말했다.

            우리 나이 또래가 다 격는 일이지만 애들 혼사는 우리 마음데로 결정하던 시절은 멀리 멀리 가고 없다. 그저  좋은놈 나서 주길 간절히 기원 할뿐.

                                     Eugene C Kim   씨야    김창현    

客 家 2

     

세 사람이나 객가가 뭐냐 처음 듣는다고 해서 다시 쓴다.

       

          객가는  황하유역에 살다가  3세기경 흉노등 북방 유목민의 침입과  전란, 기근, 정치적 압박을 피해 고향을 등진 diaspora다.   한족漢族의 가지라고 하지만  수세기에 걸친 유랑을 겪으면서도 똘똘 뭉쳐 자기들의 고유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결국 광동 복건등 해안쪽으로 펴졌다가 명明 영락제때 정화鄭和의  7차 세계원정에 주축을 담당했고 청淸조에 거세계 저항, 태평천국난 때는  홍수전을 도운 객가여자전사들이 105000에 이를 정도로 진취적이고 투쟁정신이 강하다. 결국 청나라도 객가 원숭환袁崇煥이 청태조 누르하치와 싸운게 구원이 되어 260년간 어르다가  객가손문의 손에 망한다.참 무서운 종족의 집념이다.

           컬럼버스 보다 미국 대륙에 먼저 발을 들여놓은게 이 객가들이고(Gavin Menzies가 쓴  1421을 꼭 읽어 보시길) 동남아 호주 남미등 온세계에 퍼져 있는게 이 객가다. 특히 내가 살던 orange county의  Westerminster도 옛 촐롱계 객가 자본으로 베트남촌을 형성 하고 있다. 나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건너온 중국계들, 인동 장씨-영양 남씨-화회 류씨-고성 이씨-성주 여씨등 도래인들의 뿌리가 이 객가라고 본다. 

            Jew와 객가와 우리 한민족은 참 유사성이 많다. 이세상에서 교육에 All-in하는 몇 안되는  종족 이다. 지금도 이객가들은 하바드만 나온 자녀가  있어도 중국 본토 마지막 떠나온 고향 사당 앞에 석필石筆 , 공명주功名柱를 세운다. 일종의 기념 석물이다.  우리에게도 이풍속이 남아 있다. 내 여동생이 박사 학위 받았다고 종가에서 도포입은 문중 어른들이 모여 조상들에게 고유했다. 정작 본인은 부끄럽다고 불참 했지만. 또 우리애가 예일 들어 갔다고 고시 패스한 외사촌과 함께 외가사당에 온 문중 사가 어른들이 모여 고유했다. 그모른 남들은 웃긴다고 하겠지만 나는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하나의 생활 방식 이라고 받아드렸다.

             음식 같은것도 우리와 유사성이 많다. 개고기를 우리와 객가들만 좋아하지   한漢족은 먹지 않는다.한족은 북송 휘종이 개戌띠라고  개고기 먹는걸 못하게 한후 입에 대지 않는다. 객가채客家菜의 특징은  멀리서 식 재료를 구하지 않는게 특징 이고 내장, 닭발이니 모조리 요리의 대상이 되는거다.

             우리가 제사 지내면서 할머니나 어머니 지방을 쓸때 유인孺人이란 말이 들어 가는데 이게 객가 유풍이다.  남송 최후의 황제 단종이 위기에 처한걸 객가 여인이 구해준 보답으로 조서詔書를 내려 쓰게 했다. 우리 조상들이  객가 주자의 맹신자들이니 이게 한반도에 내려온 유습이다. 한족들은 대부 부인 이상이 되야 유인孺人이란 지방을 썼다.

              임진왜난때 명 객가출신 진린陳璘 장군이 객가수병 5000을 이끌고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과 싸웠다.

              모택동의 중국 장악도 이 객가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 했다. 1926년 대장정 끝에 쫓겨간 강서성 정강산도 원래는 객가 원문재袁文才와  왕좌王佐의 아지트 였다. 1949년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자리에는 객가가 절반 이었다.

 

               1950년대 이광요 주도로 조직된 남양객족총회를 시발로 이객가들이 움직이는 재력은 몇년전 통계가  cash  flow만 3조 달러, 중국 현대화의 밑돈이 전부 이들 손에서 나왔다. 나는 5년전 싱가포르에 일주일 머물며 이들의 총본부를 일부러 찿아가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들과 손잡고 배워야 한다는 거다.  그들의 고향 사람들이 똘똘 뭉치는 향방鄕幇, 같은 업종끼리 슬기롭게 조정 해나가는 업방業幇의 정신은  참 탄복 할 이야기다. 이런게 다 성숙되어 양안문제를 조정하는 무서운 network을 형성 하고 있고 자라나는 자기 자녀들을 remote control 하고 있다. 내 아들 죽마고우 Richard Hsei가 하바드 나온지 얼마 안되 런던서 년봉 50만불을 받는 원인이 여기 있다. 

               피를 토할 이야기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Jew나 객가와 연대 할려는 소이所以가 여기 있다. 

                                              Eugene C Kim 씨야  김창현

뿌리찿기 1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에게 말을 떠거는 사람에게만 그 비밀을 귀에 들려 주는법이지.

     

      내 뿌리를 찿는 여정은 이제 햇수로 십수년이 넘은것 같다.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걸음이니까 이젠 무언가 어렴풋이나마 윤곽을  잡을 때도 된것 같은데 나는 아직 헤매기만 한다. 김알지부터 지금 까지 1940여년 세월은 얼추 얼개가 잡히는데 알지 이전의 나날에 대해선 참 여러 학설이 있어 아무리 귀를 기우려도 가닥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래서 이사람의 이소리와 저사람의 저소리를 잔뜩 주워 모으기는 했는데 워낙 아는게 없어 이게 맞지 하고 주장할수가 없어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NASA발표로는 우주의 나이 137억년,  약 20만년전 동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서 돌연변이로 태어난게 인류의 조상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는게 Cann이 주장하는 분자유전학적 방법에 의한 인류 기원설이고 이젠 여러 학제간에도 이의 없이 이걸 받아드리는 형상이다. 이것은 연구가 고고학을 넘어서는 시간의 한계를 DNA를 통한 과학적 방법이 추구하고 있다는 증거고  서울대학 의과대학 이홍규 교수같은 유전분석학자들이 시베리아를 넘나드는 이유다.

      내조상 김알지가 어디서 왔다는 학설 참 여럿이다.  사카釋伽족설(정형진), 대쥬신의 한가닥(김운회)이란 주장, 흉노(김병모)설등 참 다양하다. 이 잡다한 여러 주장에 코가 꿰어 따라가다가 보니 점점 읽어야 하는 책만 늘어나고 온산천 다헤매다가 이젠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린 비키니도의 거북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81년전에 최남선이 썼다는 불함론不咸文化論을 읽다가 무릎을 치기도 하고  또 청나라 조상이 마의태자의 손자 김함보의 후손이란걸 알고는 길길이 뛰기도 했다. 임진왜난때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왜구를 해치우겠다는 편지를  보낸걸 보고 송시열 일파가 주도한 대명大明에 대한 모화사상이 얼마나  역사를 모르는 집권논리일 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내친 발걸음은  Hun족의 왕 Attila도 거슬러 올라가면 나와 동조同祖란 사실에 희열을 느끼고  이젠 한족漢族의 눈이 아닌 내눈으로 중국사를 처다보는 안목이 생기고 자꾸만 중국의 주변사를 더듬게 되고 일본학자들의 연구 깊이에 탄복 하기도 한다.

       내뿌리를 찿기 위한 내가 읽는 책의 범위가 너무 산만하고 멀리 나가 있다. 이젠 추스려 무언가 아귀를 맟추어 볼시간도 된것 같은데 아직도 책을 찿는 발걸름을 멈출수가 없고 보면 사야 한다.  읽는건 이젠 나이가 들어 굼뱅이고. 그래서 어떤때는 나증이 나고 여기서 도망 갔으면 하는 피로가 솟기도 하는데  그래도 느리지만 가야하는 천형의 길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존경하는 생물학자 최재천은 인생을 이모작하라고 속삭인다. 번식기 50년, 번식후기50년.   그렇게 따지면 나는 내달이 되야 기끗17살이 된다. 힘을 내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도 보러가고(그것은 나의 먼 일족 바바리언들에의 침략에 운 전설 이다) 김호동이나 정수일의 저술들을 부지런히 사모아 보자.  내고향 안동 일대 ,봉화 의성등등에 산 씨족들의 미세사도 한없이 한번 추적해 보자. 경북 북부 일대의 집안 내력을 따지는 파계派系나 세의世誼추적, 보학譜學에 대해선 나도 이젠  일가견이 있지 않나 하는 자만심에 빠져 보기도하고  그러다가 힘들면 <치즈와 구데기>란  유렆의 미세사도 사들고 희식희식 웃기도 한다.

 

       역사에 너무 말을 떠 걸었나 보다. 듣다가 보니 이젠 귀가 먹먹 하다.

 

                              Eugene C. Kim    씨야    김 창 현

  

뿌리찿기 2   

  몇자 적은 내글이 무슨 소리인지 납득이 안간다는 꾸중이라 여기 변명을 다시 해야 겠다.

 

         내 뿌리를 찿아 보자는 관심이 일어 난것은 1968년  대한일보 시절 모시고 있던 보학의 대가 이종성차장 때문인데 그분은 학문적 접근을 한게 아니고 충청도 양반 이다 보니  집안 으로 내려오는걸 익히고 딱은건데 당시 20대 였던 나로서는 참 신기하고  궁금한게 많아 묻고 또 물었다. 그 분이 노론의 후예라 그쪽 방면으로 훤한게 몹씨 부러웠다.

         그후 1977년 Santa Ana살때  CBS가 방영한  알렉스 헤일리의 8부작 <Roots> 가  참 심금을 울렸다. 흑인도 저래 자기 뿌리를 찿아 명작을 남기는데 항차 나는 영남학파의 법통이 우리집에 있다고 자부 하면서도 이게 뭔가 자괴 했다. 그러나 그때는 먹고 살기위해 뒤돌아 볼 시간이 없던 시절이라 마음만 끈할뿐  뿌리를 찿아 책을 구해 본다는건 무리였다. 그저 유타주 Brigham Young대학이 어쩌면 한국 보학연구가 한국보다 한발 앞서 가는게 아닌가 하는걸 느끼는 정도고 호남의 송준호 교수나 안동의 소극 서주석 어른이 현재 한국서는 그래도 대가 구나 하고  느끼고 있었다.

         간혹 구해 읽는 글은 미국이다가 보니 한계가  있고 갈증만 더했다.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책을 찿기 시작한것은 역시 94년 한국에 와 있으며  부터인데 특히 내큰집 우천又泉형의 장서가 많은 눈뜸을 주었다. 또 <경사유방景泗流芳> 같은 내 9촌숙의 역작이 있고 그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서 우리집 고문서만 철저하게 연구해낸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 백산서당> 또 내고조부의 저술 <금계지金溪誌>같은 책들이 있어  기록상 나타나는 내조상의 상한선인 김알지金閼智 까지의 내 family tree는 얼추 다 찿아 낸 셈이다. 선라선보 라든가 신라범김씨사, 내앞500년, 이수건의 영남 사림파의 형성등 많은 책들을 구할수 있었고 읽었다.

         2년전인가 내가 쓴 <가계기록>이란글은 이런 연유에서 남긴 기록이다.

        

         자  그럼 김알지 이전의 내 부계父系는 ?  또 내모계外系는 어떻게  정리해야 되느냐 가 화두였는데 참 힘에 부친다. 여기서는 고고학에 의존해야 하고 또 한발 더나가 DNA를 더듬는 유전학 까지 나타나니 역부족을 느낀다.

         한반도에 삶을 펼친 한민족의 뿌리에 대해선 여러 학자 들이 각각 지론을 펴지만 나는 그저 책을 구해 읽을 뿐 이게 맞겠다하고 선별할 안목은 아직 내게 없다. 다만 내마음에조금 신빙성을 주는 쪽은 한양대학 김병모 교수의 흉노계설 이다.

          흉노란 몽골고원에서 발흥하여  백등산白登山에서 한漢을 굴복 시키고  BC129년 한무제漢武帝가 장장 50년에 걸친 복수전을 펼치기전 까지는 중원천지를  지배 했다. 왕소군 이야기 같은것도 한 漢족이 흉노에 바친 공물의 하나 였고 한漢족 이 중원을 지배한 시간은 극히 짧다.  한-송-명 漢宋明 정도 랄까.  그외 시간은 그들이 북적, 동이, 서융, 남만 이라고 멸시 하는 이민족의 역사다. 만리장성도 이래서 생긴거고. 모택동이 세운 지금 중국이 어째 한漢족의 나라냐. 그게 벌써 1700년전 한족서 갈라져 나온 객가들의 나라지 하는 내억지가 여기서 출발한다.

          아무턴 흉노는 BC 1세기전 인가 기후의 이변으로 유목민이니까 풀을 찿아 동서 흉노로 갈라져 서흉노가 AD 5세기경 유럽쪽으로 진출해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유발하고 흉노가 Hun이란 영어 이름으로 헝가리 Hortobagy대평원에 둥지를 튼다. 학계서는 항가리가 분명한 흉노의 후예로 보고 불가리아와 핀랜드 의 조상도 흉노라는게  한학설이다. 이들은 동서 로마를 망하게 하고 공포의 대명사가 된다. 이시절 AD 5세기 마지막 8년 흉노족을 지휘했던 인물이  Attila 대왕 이다.

          유럽의 고전이나 그림에 Attila 대왕의 족적은  무수히 나타난다. Corneille가 1667에 쓴 아띨라란 희곡도 있고 키플링의 시구절에도 "훈족이 문앞에 와있다" 라는 구절이 나타나며  라파엘로의 그림속에서 Attila는 교황 레오와 말을 타고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Verdi가  Werner의 희곡 Attila, A Tragedy를 보고 작곡한 오페라<니벨룽겐의 반지>는 불휴의 명작 이다. 얼마전 한국서도 공연했는데 아내와 같이가 볼려고 생각다가  가난한 서생인 나에겐 몇시간씩 며칠을 봐야하고 한번 보는데 60만원씩줘야 하는 표값이 너무 비싸 포기했다.

           심지어 아프리카서 멀리 북구까지 족적을 남긴 Hun의 자취는 기독교도들의 적이 였기에 유럽은 정색을하고 깔아 뭉겠다. 20세기들어서야 고고학적 발굴 이나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김병모 교수는 이 서흉노 계열에서 김알지가 나온다고 본다. 금관이나 적석총, 뿔잔등 으로 추정해서.

 

           이렇게 찿다가 보니까 청淸의 조상 금나라 시조 김함보가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란 이야기가 금사金史에 나와 있었고 만주국 최후의 꼭두각시 부의가 평민으로 돌아가 쓰는 성이 김金 이란것도  보였다. 또 그들이 쓰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가 신라를 잊지 말고 사랑하자에서 연유되었다는걸 알았다.

            지금 내가 주시하는것은 바이칼 포럼 이다. 학제간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우리민족의 뿌리를 찿는 연구는 아직도 끝이 아닌 초입에 서서  고고학을 뛰어 넘어  이젠 DNA로 찿아가는 여정에 들어 섰다. 그저 나는 김산호,김운회의 <대쥬신>론이나 정형진의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등을  조용히 읽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학자가 아니다. 한국일보 주필 오석천이 내게 해준 "자네 기자는 거리에선 학자야"란 말씀을 잊지 않고 있을뿐 아직 기자다.

                           Eugene C Kim     氏也       金  昌  鉉 

 

자네 지적이 맞다. 와그너의 오페라는 Der ring des  Nibelungen 이고  Zacharias Werner의 희곡을 보고 Verdi가 작곡한것은  오페라 Attila다. 그냥 내 노트를 보고 막 쓴건데 책을 다시 꺼내 자세히 읽으니 항가리가 전부 Hun족의 후예가 아니고 Szeklers로 알려진 소수 부족만 Hun의 후예였다. 항가리의 절대 다수는 마자르족의 후예다. 그러나 흉노란 국가 이름이지 종족의 이름이 아니고 또 몽골고원에서 발흥한 그들이  동서로 분열 하고 그뒤 남북으로도 갈라지는등 그지역 종족들과 동화 과정도 거치고 그 변신은 변화 무쌍이다. 오히려 불가리아가 Hun의 후예라고 책에 나와 있다. 내게 있는 책은 Attila, king of the Huns(patrick Howarth)이다.  니벨룽겐의 반지는 북구의 신화가 모태인데 아주 복잡하게 여러가지가 내려오고 또 그속의 핵심 주제가 Hun족의 야만적 침입에 따른 전설 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내 이해가 맞는지... 이걸 와그너가 작곡했고.

 

영화는 나도 봤다만 오래되 기억이 없다. 신화였던걸로 기억 한다. 나이들면 기억이 엉망이다 父系도 夫系라 처놓고  전에는 한족이 중국인구에 92%라 친다는게 98%로 처놓은것도 보이고. 이러니 블로그인가 하는거는 내게 가당치 않다. 앞으로 고집은 더 쎄 질테고 글은 더 오류가 많아 질테니까.

 

내가 쓴 기자란 말은 직업으로 기자가  아니고 적바람을 받아 적는 소임으로 기자를 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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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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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9
01:19:32
(*.48.192.198)
profile
아재께서 오랜만에 발걸음 해 주셨네요?
지난번 방문시에 건강에 관련 말씀이 계신 후라 걱정스러웠던 차인데 이러한 글을 주심에 조금 안도하겠습니다.
미국에 가 계신줄로 알았는데 귀국하셨나 봅니다.

전 며칠전 오토산 추향에 갔다가 2박3일 업무차 서울을 다녀와서 조금 전에야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집떠나면 고생이라는 말.. 한창 팔팔할땐 몰랐으나, 이젠 불편함이 느껴져서 인지 표시가 생기는가 봅니다.

아재께서 주시는 말씀을 보면서 절대공감을 합니다.
또한 언론이라는 매체가 경우에 따라서 참 어처구니가 없음도 다시한번 느끼게 해줍니다.
이번의 호계서원 복원에 대한 기사와 관련해 제 개인적으로는
언론의 부풀리기식, 흥미꺼리 만들기 식으로 원래의 취지를 벗어난 방향의 보도라는 점에서 눈살이 찌푸려 지기도 합니다.

호계서원 복설의 원래의 취지에 반하는 내용으로 뒤바꾸어 병호시비라는 흥미꺼리로의 확대 재생산 해 놓은 것이라 보며
언론들이 해야하는 원래의 양심을 벗어나 버린 폐해중의 하나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역시 기사들을 접하면서 조심스러움에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만...
이러한 기사꺼리에 종친님들의 다양한 의견들과 오해 혹은 그에 반하는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생길수는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를 통해 종친들의 뜻을 한곳으로 결집하고자 하거나, 결집하는 방안을 만들고 가꾸어 키워가는 연습이 된다면
하나의 계기로서의 한걸음 딛음일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문중의 일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특정한 해당 당사자만의 고민과 결정등으로 된것이 아니라
충분한 의견수렴과 그 결정과정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모든 과정의 설명을 종친님들 모두에게 일일이 다 하지 못함과,
또 어떠한 사안을 결정을 함에 있어서도 100% 만족하는 결과를 도출하기는 힘들거라 봅니다.
백인백색의 의견들을 어느정도 절충해가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졌다면 일단 그 결과에 힘을 모으는게 좋다고 봅니다.
조심스럽다 하여 입을 닫고, 어르신들의 일이라 해서 젊은이들이 구경만 하고, 행여 꾸지람 들을까 해서 모른척 하는것도
무엇인가를 해야함에도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는것이라 보아지기 때문입니다.

김이오 넷도 그러한 부분에 대한 구심점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한 하나의 작은 구성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더러 의견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사이버의 다양함 속에서 감시나 견제도 해가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종친님들과 호흡하는 곳이 되고 싶습니다.

수백년간의 병호시비의 결론이 아닌,
좌서애 우학봉이라는 인정을 했다 안했다의 시각으로 보는것과 (실제 이번 호계서원 복설관련 합의에 그 내용은 없는걸로 알지만)
학봉선조님의 문맥을 이어왔고 후학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호계서원의 복설이 주는 상징성의 의미로 생각하면 
여유롭게 이 문제를 이해하게 되진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 해 봅니다.
또한 제가 아는것도 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러한 입장을 피력 한다는 것도 송구스럽지만,
한사람의 작은 의견으로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PS : 모 신문기자에게 전화를 받아 종친회 홈페이지 운영자로서 보는 이번의 각계의 의견들의 질문을 받은바...
         이 문제는 분명 병호시비의 내용과는 무관한 문제이며 언론에서의 재밋거리식의 기사 만들기의 문제라고 밝혔으며
         호계서원 복설관련 협의시에 병호시비와 관련된 좌서애 우학봉의 문제를 합의 해줬다는 식의 의논이 없었음에도
         흥미꺼리식의 기사화 된것은 유감이라고 밝히고 병호시비의 문제는 호계서원의 역사속의 담겨진 하나의 이슈일 뿐임을 
         인식하고 기사 한줄한줄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줄것을 당부한바 있습니다.

김창현

2009.04.09
08:21:23
(*.48.192.198)
호계서원이 오랜시간 퇴계학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이걸 복설하는데 의의가 있는거지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문제는 지금 시대정신으로는 큰 문제가 못됨니다. 퇴계학파 후예들이 합당한 방법으로 합의점을 도출하면 그만 입니다.  문제는 유림의 의견을 어떤방식으로 집약 하느냐의 문제 인데 누가봐도 치우침 없고 합리적 방법을 찿아내는 슬기가 퇴계학파 여러문중에서 나오리라 기대 합니다.
제가 위의 글을 올린거는 옛을 알고 공부하는 자세는 치열하게 갖되 이제는 21세기를 바라보는,  거칠게 닥아오는 내일을 우리 씨족은 빈틈없이 맞을 준비를 갖추자는거지요. 그 많은 종가 재산 독립자금으로 쓴것도 옳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동경유학도 주실사람들처럼 보냈어야 한다는게 저의 인식 입니다. 이런 치밀한 준비가 없으면 또 한세대 우리는 헛바퀴 돌아야 합니다. 우리 씨족내의 세대간 소통과  보다 창의적 사고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 입니다. 지금  우리는 앞으로 몇세기 동안 쓸 문법을, 좌표를 다시 설정 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4-50대등 에서 기수들이 나서서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모든 가능성을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씨족도 門長들이 좌지우지 하던 시대는 갔습니다. 보다 다양한 창의력을 모아 농경사회, 산업사회를 지나 찬란한 지식사회가  도래한 이시대를 영명하게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직도 청계후손들은 뿔뿔이 각자 자기 살길을 찿아 헤매지 뭔가 집약된 구심점은 없는것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해체기에 들어서 있는거지요. 그것은 우리에게 토라나 탈무드 같은 우리 고유의 정신적 유산이 없어서 입니다. 불교, 신유학, 기독교, 공산주의등등 안동 땅을 스처간 모든 외래 사상들은 저 솔밭에서 불어오는 松뢰 같은것 입니다.
우리는 우리식의 현실적응 기법과 씨족 번영 노하우를 개척해야 합니다. 우리 전세대가 매달렸던 공맹사상은 공자에서 시작 천년을 잠들다가 한유가 잠을 깨워 주자의 신유학으로 살아 났지만 원나라에 의해 과거시험 교재로 기능 했고 동양을 폐쇄사회로 몰아간 폐단이 있는 생각이란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09년은 자본주의가 창조적 파괴를 쓰나미처럼 모든 인류에게 퍼붓는 전환기란걸 깊이 인식 해야 합니다.
자칫 현실 파악을 등한시 하면 우리는 도태됩니다.
벌써 한세대 청계후손들은 멈칫 멈칫 제자리 걸음 했다는 기본인식에서 판을 다시 짜야하는 시점에 와 있다는걸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힘을 합쳐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안양 씨야 老

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9.04.18
20:33:29
(*.48.192.198)
profile
태원형님 안녕하셨습니까?
형님께서 활동하시는 모습은 원동파 카페(다음)에서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제가 아는 범위라는게 깊이가 없고 단순할 뿐입니다.
또한 제가 드릴수 있는 답변은 특정한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 아닌 원칙에 가까운 말씀이거나
현상 그대로를 전해 드리는 수준이기에 참고만 하시기 바라오며 무게는 두시지 않는게 좋을듯 합니다.

호계서원 복설에 관한 제가 아는 범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저의 알고자 하는 정보 제공처는 그리 다양하지는 않습니다)

1) 재건,중건,중창,복원중 어떤 표현이 맞는가?
     저는 복설이라는 표현이 적절 할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아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들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2) 추진처와 결정권자는 누구인가?
     엄격히 말하자면 현재로선 안동시청이라고 봅니다.(국가지원사업)

     2005년도에 "호계서원 건설추진위원회"라는 것이 몇몇 뜻있는 분들의 발의와 의논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때는 추진처가 현재와 같이 안동시청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의 시작은 안동시 혹은 국가에서 지원이라는 형태가 아닌 뜻있는 분들의 결성체로서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랬던 모습이 안동시 혹은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 싯점에서 추진체가 현재처럼 확대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3) 진행형태는 어떠한가?
     메스컴에 발표가 되고, 오보가 나가고, 다소 다른 주장들이 흐르는 과정에는 있습니다만..
     현재에도 진행중인 사안으로 알고는 있습니다.

4) 이문제의 핵심이 호계서원 복설을 통해 얻을수 있는 것과, 위패의 서열로 문제제기 되는 것 두가지로 보여집니다.
    퇴계문하 중에 학봉학통을 계승 발전할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우리문중을 포함한 학봉의 제자문중)의 역할인가?
   
    아니면 퇴계문하의 학봉/서애 두 학파간의 엇갈린 주장에 대해 (학파간의 논쟁이지 학봉/서애 집안논쟁이 절대 아닙니다)
    그시절의 일방적 권력으로 결정해 버려서 발생한 학봉/서애 사후 400년간의 논쟁인  위패의 서열 인정으로 볼것인가? 

    이문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정답을 찾을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보아집니다.
    나의 주장이 맞다고 하드라도  상대방의 주장에 일리가 없다고 하기엔 너무 첨예한 부분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5) 그러면 누가 결정을 할 문제인가?
    기둥을 사고 대들보를 사도 일할수 있는 사람과 비용이 있어야 하기에 지원이 필요함이며,
    지원을 해주기 위해선 그에 맞는 명분을 주어야 하고, 그 명분을 얻기 위해 유림이나 문중들의 동의를 받아야 할것으로 보입니다.

    서원에 관한 문제는 문중이 앞장서기 보다가는 사림,유림에서 하는 일인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작금의 사림이나,유림이라는 형태는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서 그 기능이 한없이 축소되어 있는 실정이라고 보여집니다.
    어쩌면 각 문중이 더 활성화 되어있는 실정이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태원형님께서는 감히 저와는 견줄수 없는 훨씬 많은 부분을 알고 계시지만,
    제가 알기론 호계서원 복설관련 추진은 퇴계/학봉/서애문중에서의 역할은 "고문직"으로만 참여하고 있으며
    결정에 관련한 부분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림이라는 단체에 대해 현실적으로 그 활동 및 역량등에 대해서는 민감한 부분이라 더이상 언급하기가 그렇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기능이 향교의 수준이라고 보며 네이버 검색에서 나와있는 원래의 기능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조상님들을 생각하고 연구하고 받드는 사고를 가지는 분 모두가 사림,유림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슈가 생기고 목소리를 보탤 즈음에 평소 유림,사림이라는 틀의 제도권 안쪽에서 활동을 했는가? 에 대하여서
    안쪽과 바깥쪽의 주장과 생각이 다를수도 있다고 봅니다.

6) 언제 어떻게 하는것이 옳은가?
    언제 할것인가를 놓고 400년이 흘렀으며, 지금 할수도 있고 400년 후에도 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다만 성급하게 하다가 발생되는 오류를 최소화 하는것이 바람직하며
    그러한 부분은 추진하는 단체에 믿고 맡기고 지켜보는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백인백색의 의견을 모두 아우르는 100% 만족시킨 후에만 복원을 한다..라는건 지나간 400년을 더 보내어도 불가능 할테니까요.
    
    바둑판 전체를 머릿속에 그리며 두는 대국자의 고민어린 심정도 이해 해가면서,
    어깨너머로 보이는 한수가 더 정확할 수도 있듯이 훈수의 맥점도 수용하는 그러한 사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러한 제 생각은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이곳을 통해서 호계서원 복설관련 이슈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다소 작은 의견을 보태는 글이라고 생각해 주시고 가볍게 읽으셨으면 합니다.

    태원형님께서도 항상 좋은 글 깊이있는 글로 건필 하시기 바랍니다. (한없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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