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1주기

김창현

“이청준 선생은 어머니와 고향에 진 빚을 늘 말해 왔습니다. 살아서 행한 모든 작업은 빚갚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24권에 이르는 작품 곳곳에 그 노력이 묻어 있습니다.”(소설가 한승원) “이미 10년 전에 연구서만 4권, 논문 비평이 150여편이었으니 이제는 두 배는 족히 될 것입니다. 이청준의 문학과 삶에 대해, 그의 정신과 기법에 대해, 그의 시대와 그가 남긴 영향에 대해 앞으로 더욱 숱한 연구와 비평이 이뤄질 것인 만큼 ‘이청준학’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문학평론가 김병익) 지난해 7월 타계한 이청준의 동료인 소설가 한승원과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이청준과 그가 남긴 작품의 오라(aura)를 이렇게 기억하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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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이청준(오른쪽)이 2005년 봄 영화감독 임권택(왼쪽), 소설가 한승원(가운데) 등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전남 장흥군 진목리에 복원한 생가를 찾았다. 폐암 선고를 받기 직전인지라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1주기를 앞두고 22~23일 전남 장흥에서 ‘이청준 선생 추모학술대회’가 열린다.

그의 고향인 장흥군과 그가 마지막 석좌교수로 있었던 ‘고향과 가장 가까운 대학’인 순천대학에서 함께 준비하는 행사다.

그에 대한 추모는 단순히 동료, 후배들이 모여서 행하는 회고 행사 또는 낭독회 행사와는 격을 달리한다. 전남대 임환모 교수와 상명대 김한식 교수, 순천대 임성운 교수 등 10여명의 이청준 작품 연구자들이 대거 모여 치르는 학술대회다. 여기에 중앙대 교수인 김선두 화백은 자신에게 미술적 영감을 줬던 스승으로서 이청준을 돌아본다. 다른 곳에 눈돌리지 않고 전업작가로서 평생을 지내며 24권의 소설 작품을 남긴 이청준이었기에 가능한 행사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단순히 소설의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을 통해 영화로 만들어진 ‘서편제’, ‘축제’, ‘선학동 나그네’(‘천년학’의 원제)는 남도의 멋과 한 등 빼어난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단편소설 ‘석화촌’은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벌레이야기’(‘밀양’의 원제)를 영화화한 이창동 감독에게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전도연) 수상 등 국제적 명성을 안기기도 했다.

이렇듯 이청준의 숱한 작품들이 영화화됐고 탁월한 작품성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이는 단순한 작품성, 대중성을 논하기에 앞서 ‘문학이 모든 예술의 영감을 주는 원천’이라는 명제를 강렬하게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이청준이 ‘소문의 벽’과 같은 작품에서 정치 폭력과 억압적인 체제에 대해 매서운 폭로를 감행하고 있음에도 당시의 혹독한 검열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교묘한 창작 테크닉과 고도의 문학적 성취 덕분이었다.”면서 “중층 구조와 추리적 기법을 통해 한국 전쟁과 유신 독재, 글쓰기의 자유와 작가의 억압의 치열한 주제들을 중첩하고 연계하는 치밀한 장치로 형상화함으로써 벌거벗은 권력의 악독한 입질을 피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23일에는 이청준 선생의 생가가 있는 장흥군 진목리와 ‘천년학’ 등 영화를 찍었던 장소,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 ‘눈길’, 마지막 유작이 된 ‘신화의 시대’의 무대가 됐던 곳 등을 둘러보는 문학기행이 진행된다. (서울신문)

 

 

 -----단편 <퇴원>으로 등단한 이청준이 죽은지  1년.

내가 이청준과 함께 일했던 시간은 벌써 41년 전 이다.

우리는 참 큰 꿈을 품고 <월간 아세아>에 모였다.

 

월간 아세아 물주 잔 리John Lee박사는 한국정유 소유주였고

미국세계문서선교회 실질적 오너였다.

John Lee박사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돗드 소장의 통역 출신이다.

19살. 돗드소장과 함께 공산포로들에게 잡혔다가 풀려나 미국으로 갔다.

 

Lee박사의 가계는 독립운동에 올인한 집이다.

아버지는 목사고 어머니도 김구선생 수족으로 은밀한곳에

비밀문서를 감춰 압록강을 넘나들었던 여류투사였다.

상해임정 교통부장을 지낸 선우 혁 선생이 Lee박사의 외삼촌. 

Dr. Lee의 마더 텅Mother tongue이 영어 였다.

상해서 태어 났고 아버지 이목사의 직업이 영어선생이었기에.

그가 얼마나 영어에 유창했는가는 미국서 라디오를 통한 설교로

크게 성공하고 부를 잡아 쥔거에서 드러난다.

그가 "예수 형님!" 외치며 라디오 설교를 시작하면 백인할머니들이

바짝 긴장하고 듣다가 나중에는 크게 은혜를 받고 감동했다.

수표가  그의 과장을 빌면 "비처럼 쏟아져" 들어 왔다.

 

그렇게 생긴 돈으로 시작한게 <월간 아세아> 였다.

그림을 크게 그렸다.

일본의 이와나미岩波文庫 같은걸 모색한게 <아세아문고>였고

박종홍, 김형효, 이용희등 여러 학자들에게 착수금으로 300만원씩 건냈다.

농민신문을 창간하고 기독교방송을 인수하고 김포에 헤드코터를 짓고....

분명 Dr. Lee는 한국의 케네디를 꿈꾸었다.

 

이때 조인했던 친구들이 최인환(전 교통방송사장) 구동태(高僧)황문수(고대교수)

이문규(학사주점 주인,임자도 간첩사건주범, 사형당함) 이창재(고려혁명당 당수)

노종호(사상계 편집장)등 이었는데 문학파트를 맡은게 이청준 이다.

<농원> 편집장을 하고 합류했던 이동규는 전두환 정권서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고.

 

이청준은 <월간 아세아>서 문학계를 엮는 작업을 맡았다.

이청준이 쓴 <68문학> 서문을 보면 거창하다.

한국문화계의 위기를 "샤마니즘적인것과 관념적인 유희 비슷한것이

되는데로 결합하여 빚어내는 정신의 혼란상태"라고 진단했다.

<68문학>운동은 단 한권의 단행본으로 끝났다.

<월간 아세아>의 모회사인 한국정유의 부도때문에.

<68문학>에 참여했던 문인들은 김현 김치수 김병익 김주연 이성부 정현종 등이다.

여기를 모태로 갈라져 나간게 김현 김화영 주도로 <문학과 지성>이고

염무웅 이성부가 꾸렸든게 <창작과 비평>이다.

또 하나 특이했던 인물이 민비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나왔던 김승균인데

나중에 그가 사상계 편집장으로 가 김지하의 <오적>사건을 터뜨렸다.

모든 사람들의 우려를 뿌리치고 내가 발탁, 나와 함께 편집을 같이 했다. 

그는 일월서각을 세워 많은 좌파 서적들을 출판했고 民佛聯을 주도 했다.

과수원집 아들인 그가 좌파 이론가가 된것은 십수년의 옥고와 고문 탓이다.

 

이청준은 나와 동갑, 우리는 어지간히 청자담배를 피웠고 술도 마셨다.

그래서 그는 폐암으로 갔고 나도 암을 앓았는지 모른다.

그는 또 길건너 있던 서린호텔 지하 슬랏머신에 빠져 정신을 못차렸다.

삽화를 맡아 나를 도왔던 박정래씨와 함께 노름의 유혹에서 헤맸다.

그는 참 처신이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이청준학>이 운위 되니 참 세월이 어지간히 흘렀다.

곁눈 한번 안팔고 문학으로, 글 팔아 먹고산 그의 조신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1주기 추모 학술대회가 그의 고향 장흥서 내일 까지 열린다지만

아픈 내허리를 갖고는 가볼 엄두를 못낸다.

 

May 22 2009     안양 씨야 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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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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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

2009.05.22
14:50:10
(*.48.192.198)
김창현 73년 10월 내가 이민을 가니 이미 부도로 손털고 미국에 와 있던 Dr. John Lee가 LA Wilshire와 Crenshaw 코너에 있는 한인경영 룸살롱으로 나를 초대했다. 우리는 정말 엄청 마셨다. 실패한 혁명(?)을 아쉬워 하며. 그는 그밤 내내 나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를 계속했다. 그는 엄청난 돈을 대었지만 월간 아세아 편집에 전연 관여 하지 않았다. 칼럼을 하나 매월 썼을뿐. 그는 겸손하게 직원들을 동지로 호칭했고 자기는 한명의 동지일뿐 이라고 겸손해 했다. 한국을 나와 있는 동안 카나다 선교사에 맡겨 놓았던 세계문서선교회도 배신으로 그의 손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는 Garden Grove,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의 Robert Schuller보담은 한발 앞섰던 비교단Denominationless 시대의 선구자 였다. TV이전 래디오 선교 시대의 총아였고 Du Pont, Nixon등 미 상류사회나 유럽, 아프리카등 집권자들과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재기에 실패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4.19날도 그는 경무대 경찰서에 잡혀가 꺼꾸로 매달여 물고문을 받은 반골 이었다. 숨 넘어 가던 장준하의 <사상계>에 돈을 대어준 죄로.
어떻게 하던 그는 부도위기의 한국정유를 살릴려고 삼선 개헌 지지성명을 내었고 월간 아세아에 일하던 우리들은 삼선개헌반대 성명을 같은 신문에 내고 그와 갈라섰다. 이청준이나 나나 그날로 백수가 되었다.

이윤옥

2009.07.27
09:25:39
(*.138.74.69)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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