氏也 燕京別記  其 1


여행이란 홀로 방랑하고 빈둥거리면서 가야한다.

어떤곳으로 가더라도 어디도 가지 않는것 처럼.

머뭇거리다가 바람따라 걷고.

갓난애 처럼 모든 우연에 몸을 맡겨야

그게 진정한 여행일 터다.

그게 진정 내가 꿈꾸는 여행이란 거다.


벌써 나이 칠순.

올해도 길을 떠난다고 부지런히 나서

4월엔 배타고 황해건너 낙양洛陽등 황하문명 원류도 더듬고

7월엔 고희古稀생일 이라고

동유럽 7개국을 근 보름 종종 걸음 쳤지만

주는밥 먹고 봉사 단청 구경하듯

예가 거긴가 쟤가 여긴가 그저 심드렁

그룹이란 떼거리속에 한 마리 빠른느쥐르의 羊이 되어

졸졸 쭐쭐 그냥 따라나선

무거운 발길 위에선 노구에 불과 했다.


하늘이 파란 9월, 마음씨 넉넉한 동서가

베이징하고 운을 떼기에 내 먼저 반기고 나서며

만한전석滿漢全席을 머릿속에 그리고 침부터 흘렸다.


발길 닿는데로 가다가 힘들면 쉬자는데 Bravo지

창춘원暢春園서 명군 강희제도 뵙고

폐허 원명원圓明園서 옹정雍正도 위로 할겸.


천안문 광장에 섰다.

One world, One dream.

그제 끝난 올림픽 슬로건

나를 향한 외침인가. 세계에 대한 진솔한 목소리 인가?

아니면 독립 하자는 티벧吐蕃이나 위그르를 향해

13억 억조창생들 까불지 말라고 지르는 욱박인가.


총알 구멍 숭숭...아들 주검 부여잡은 딩쯔린丁子霖의 절규가

한 어머니의 가여린 외침이 내귀에는 환청으로 들린다.

1989년 6월 4일

그래 3천여 젊은 학생들은 천안문사태란 이름으로

스러져 갔었지.


높다란 비 하나가 우뚝 섰다.

이름하여 인민영웅기념비

무찌르자 오랑케, 그 모택동이 썼다는가

위에서 아래로 휘갈겨 쓴 <人民英雄永垂不朽>

개떡 같은 필치筆致다.

느끼한 그얼굴, 앤디 워홀이 그리면 30억원을 홋가 한다든가

지난 겨울 메트로폴리탄서 만난 그낯빛에 토악질이 났었다.

이젠 먼길 떠나야 할 수구꼴통 이라 그런가

분명 나는 노무현은 아니다.


다섯개나 되는 대리석다리 진수이차오金水橋를 건너

띵띵한 毛선생의 초상화 아래, 천안문 누대 밑을 지나

단문端門 문지방 건너, 세계최대 성문이라는 오문午門 앞에 섰다.

단오端午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던가

망할놈의 동북공정東北工程.

그 단오라는 말도 자기네 꺼라고 못쓰게 우긴다.


오문午門앞 드넓은 광장

불현듯  431년전  4월 7일의 모습

오문 어로御路에  업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내 15대 선조先祖 할아버지가 거기 계시는구나.

이름하여

사은겸개종계주청서장관 謝恩兼改宗系奏請書狀官

무슨 은혜 그리 고마워 하시고

李씨네 어느대가 잘못 적혀

바로 적어 줍싸고 머리를 숙이고 있으시는지.


아! 우리의 비극은, 내 민족의 아픔은

지정학적으로 이 니글니글한 짱개들의 옆에 빌붙어

5천년을 시달려 왔고 또 살아 가야한다는 사실이다.


해자垓子 금수하金水河  건너니

태화문 넘어 태화전太和殿

메이드 인 코리아 페인트로 나홀로 단청 요란하고

나머지 온 자금성이 추리하다 못해

땟물 까지 질질 흐른다.

이모습으로 올림픽은 어째 치뤘는지

곤궁한 모습의 중국촌노들로 고궁은 넘처났다.

황제즉위식도 하고 신년 하례도 받는 태화전은

4만 궁녀 거느린 황제의 정전이고

드높은 처마끝 중국서 제일 큰 목조건물 이란다.

그뒤에 나타나는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은 외전外殿.

중화전에서 황제는 휴식을 즐기고

보화전에서 서생들은 과거科擧 답안지를 쥐어짰다.

보화전 앞 비스듬히 선 17m 답도踏道에

아홉 마리 용이 통돌위에서 트림을 하고 있다.


건청궁乾淸宮,  만주어가 현판에 세로로 병기倂記 되었고

여기서부터 교태전交泰殿 곤령궁坤寧宮은 내정內廷 이란다.

건청궁은 황제의 집무실이자 침실.

암살이 두려워 마당에 나무 한그루 못심고

삼구 이십칠, 침대 27개를 펴놓고 돌아가며 잤다니

참 불행했던 황제들이여, 다리나 뻗고 살일이지

황후의 침실, 장방형의 교태전

너무나 작아 초라하기까지

곤령궁은 황후를 맞아 혼례를 치르던곳.


건청궁 앞마당

건륭제乾隆帝의 천수연千叟宴이 벌어졌네

때는 1785년 정월 초이레

조선에 일흔넘은 축하사절을 보내라고 명하여

71세의 우상右相 이휘지李徽之가 정사正使.

정조가 의주까지 마중 보낸 어삼御蔘도 무효인지

그는 돌아가자 노독을 못이겨 9월에 숨을 거두었다.

부사副使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은 일흔셋.

받아온건 고희천자지보古稀天子之寶가 찍힌

어제천수연시御製千叟宴詩의 어필御筆 하나


태호석 쌓아 만든 퇴수산堆秀山위에

덩거러니 올라앉은 어화원御花園.

좌우대칭으로 자금성안 최대 화원

녹나무라는 남목楠木, 금전金磚 장전墻磚 같은 벽돌.

한백옥漢白玉 이라는 이름의 대리석등

최고급 재료로 15년 이라는 세월과 20만명이 동원된 자금성

1420년에 완공해 근6백년, 명청 스물네 황제가 살다가간

방 8,704개, 건물 700동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

신무문神武門 나서서 햇빛에 반사된 황금색 지붕 처다보며 

8년만에 다시 찿아와 봐도 스케일에 새삼스레 놀랐다.


가을비를 추정 추정 맞으며 유리창琉璃廠에 섰다.

조선 북학파北學派의 정신적 고향

아니 명청明淸 인문학의 1번지.

이동네서 선비에게 문사철文史哲은 필수전공이고

시서화詩書畵는 교양전공 이다.

유리창이란 유약을 바른 기와 즉 유리기와 만들든곳.

이곳이 인문학의 본산이 된 연유는

자금성 다짓고 난뒤 1420년 이후부터

그 땅에 책 종이 붓 벼루 먹 가게가 들어서고 부터다.

책방이 있으니 석학들이 찿아들고 시인 묵객이 모이고.


묘하다. 프랑스는 루브르 궁전을 짓고나서

기와공장터 튈르리Tuileries(琉璃廠)에 정원을 앉혔는데

명나라 사람들은 학자들이 꼬이는 서사書肆를 들였다. 


원래 북학北學이란 말은 맹자 등문공滕文公편에 나온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 학문을 지칭 한다.

주자학 양명학을 거쳐 나타난 청淸의 고증학이 그렇듯

이들은 이상 보다는 현실, 관념 보다는 사실을 더 중시했다.

북학에 매달린 쪽은 노론 서얼들이 주축.


조선후기 실학實學에는 세갈래가 있다.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용파의 대종大宗은 남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이 파派를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 정약용.

농민본위의 경제관과 철저히 독실篤實한 사상을 견지했다.

북학이 파생돼 나온 이용후생파는 다분히 사고思考가

약간은 도시적이고 자기들 노론의 학문적 줄기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지녔다. 특히 유득공이.

서얼이 주축이었기에 한도 품었고 소시민 의식이 강했다.

북학파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형암 이덕무

혜풍 유득공등 모두가 한다리 잘숙한 서출.

정조의 사검서四檢書중 소완정 이서구와 초정 박제가의 제자

추사 김정희만 정실 소생 북학파다.

북학이란 송宋의 주자학 언저리를 못벗어 나고

양명학도 거부하며 정권장악 논리로 북벌이나 되네든

우암 송시열의 노론 패거리가 강희 옹정 건융 년간의 청淸의

찬란한 사상적 발전을 보고 경끼를 일으킨 리엑션 이다.

실사구시를 외친 고증학 교과서 청淸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을 발간된지 백년이 지나도 몰랐다니.

아! 우물안 개구리들. 어차피 내것 없고 남의것

베껴먹고 살다가 졸지나 말지, 깨어나 외친게 북학이다.

그러나 위안은 일본의 후지츠카 린藤塚鄰은

청조학淸朝學의 연구가 북학파의 막내

추사김정희에 와서 집대성 되었다고 단언한다.

그 밑바닥에는 추사의 경학에 대한 완벽한 터득이 깔려 있고.

후지츠카는 유리창에서 수만권의 책과 수만점의 서예, 탁본등을

수집하여 청淸조 경학經學이 어떻게 북학파에 와 닿았나를

규명한 경성제대 동양학 교수 였다.

길을 터 놓은 선배 홍대용, 또 연암 박지원, 그 뒤를 잇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등 사검서四檢書의 활약,

북학의 마지막 세대 김정희, 자하 신위, 해거 홍현주까지

<朝鮮朝에 있어서의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란

그의 동경대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 규명했다.


유리창과 북학파의 만남은 담헌 홍대용에서 시작된다.

1765년 11월 사은사가 떠날때 숙부 서장관 홍억洪檍의

수행원으로 홍대용은 연경길에 오른다.

부사 김선행의 수행원 김재행金在行과 함께.

12월 27일 연경에 도착, 두달 머문다.


홍대용과 청淸의 신진학자들과 첫 조우는 안경에서 비롯되었다.

정사正使의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1766년 2월 어느날

안경을 사러 유리창 서가西街 만물상에 들렀다가

항주杭州서 회시會試를 치러 올라온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과 마주친다.

말쑥한 차림의 이 두 젊은 선비는 안경을 썼다.

비장 이기성이 그 안경이 탐이 났다.

“제가 안경을 사러 여러곳을 돌아 다녔으나 시중에는 마음에 드는

 안경을 찿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끼고 있는 그 안경을 샀으면 합니다”

항주선비가 말했다. “하필이면 사신다고 말씀 하십니까?”

안경을 벗어 주었다. 이기성이 사례를 하려니까

옷깃을 뿌리치고 유유히 떠나 버렸다.

뒤 따라가 거처를 물으니 “절강浙江의 거인擧人으로

지금은 성남의 건정호동乾淨胡同에 머뭄니다“

당시 건정호동은 지금 감정호동甘井胡同인데

그나마 개발 바람에 사라질 처지다.

감격한 이기성은 돌아와 홍대용과 김재행에 만나보라 권했다.

엄과 반이 머문곳은 전문前門 남쪽에 위치한 여관 천승점天勝店.

엄성은 당시 35살, 반정균은 십년 아래였고

그중 반정균은  유명학자가 되어 나중에 중국서 출간한

사검서四檢書의 시가집 <사가시집四家詩集> 서문도 썼다.

홍대용,김재행이 천승점으로 찿아가 엄,반과 첫대면을 했다.

반潘이 먼저 필담으로 물었다.

 “김상헌金尙憲을 아는가?” 김재행은 상헌의 5대 족손 이었다.

“아니 8천리 밖 당신네가 청음 선생을 어이 아는가?”

엄성이 갖고 있던 왕사정王士禎의 <감구집感舊集 >권12에 들어 있는

청음淸陰의 시 8편을 보여 주었다.

청음이 1626년, 정묘호란 1년전 후금이 무서워 육로를 피해 배를 타고

 명에 원군을 청하는 진주사로 가다가 산동성 등주登州에서

 왕사정을 만나 수창酬唱한 시들 이다.

청음은 광해의 중립외교를 뒤엎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노론 줄기.

병자호란때 대명의리관을 투철하게 주장,

소중화의식이 뼈에 사무치게 밖힌 척화파다.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밑바닥에 깔고 살던 문장가 왕사정이나

이 항주의 시골선비 엄성 반정균도 좋아 할수밖에.

이렇게 시작된 사귐은 홍과 김이 일곱 차례나 천승점을 찿는다.

홍대용이 거문고도 뜯고 필담은 늘어만 갔다.   

엄성, 반정균이 상경 하고 20일뒤, 항주 향시鄕試 장원을 한

육비陸飛가 올라와 합류했다.

육비는 지기知己를 만난것이 기뻐 <소음재고筱飮齋稿>5책과

生平以朋友爲命...글씨 한폭도 써 주었다.

다섯 사람의 만남 중에서도 엄성과 홍대용이 아주 가까웠다.

홍대용은 그때의 만남을 <담헌연기湛軒燕記>에서

“한두번 만나자 곧 옛친구 같아 마음이 기울고

창자를 쏟아 형님 아우 같았다”고 적고 있다.

엄성은 어느날 담헌이 “군자가 자신을 드러내는것과 감추는것은

 때에 따른다”는 말에 감동,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떠났다.

불행하게도 남으로 가는 도중 학질이 걸려 숨을 거둔다.

죽는 순간에도 담헌에게 받은 글을 가슴에 얹고 향묵鄕墨의 향기를 맡으며 죽었다.

형 엄과嚴果가 임종장면을 자세히 적어 연경 반정균을 거쳐

서울의 홍대용에 보냈다. 담헌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위패를 설치하고 피끊는 애사哀辭를 낭독했다.

중국으로 보낸 이 애사가 엄성의 대상大祥날 항주에 도착

형 엄과가 참사자들 앞에서 애절한 목소리로 읽었다.

형 엄과가 동생을 추모하여 펴낸 <철교집鐵橋集>에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철교는 엄성의 호號.

이 초상화는 현재 북경대학 도서관에 소장 되어 있다.

또 형 엄과는 친구인 화가 나감羅龕을 시켜 엄성의 초상화도

중모重摹하고 동생의 친구들 추모 시도 모아 발간했다.


담헌 홍대용은 기행문 <담헌연기湛軒燕記> 말고도

엄성, 반정균, 육비와 나눈 필담을 <회우록會友錄>이라고

연암 박지원의 서문을 받아 세권으로 폈다.

이 회우록이 신진학자들에게 엄청난 충격, 감동, 자극을 주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는 회우록울 읽고 서상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밥먹다가 숟가락질을 잊고 밥알이 튀어 나올정도”라고 썼다.

이덕무는 책을 읽고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라는 글을 남겼다.

홍대용은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서상수, 유득공등이

북학파를 이루는데 결정적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또 1767년 엄성 육비 반정균도 조선의 홍대용 김재행 이기성

이훤李煊 김선행金善行 홍억洪檍등 사행으로 다녀가 사귄 벗들과

주고 받은 시 편지등을 엮어 <日下題襟集>이란 책을 발간 한다.

육서금석六書金石의 대가 주문조朱文藻의 서문을 달아.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네검서의 <四家詩集, 일명 韓客巾衍集>

신위申緯의 <紫霞詩集>, 박제가의 <정유고략貞蕤稿略>이

연경서 먼저 출간 되었다. 활발한 문화 교류여!

 

담헌이 유리창을 찿은지 13년 뒤 박제가와 유득공이 간다.

2년 뒤엔 연암 박지원이 찿아가 유명한 <熱河日記>를 남긴다.

한참 뜸을 드린 10년뒤 박제가 유득공이 다시 들린다.

박제가는 그다음해(1791년), 또10년 지나 한번 네차례나 찿는다.


1783년 홍대용이 죽자 연암 박지원이 연경의 대학자

손유의孫有義를 통해 벗들에게 부음을 전한다.

벗들은 <書畵尺牘詩文>10권을 보내와 영전에 놓고 분향한다.


청 건융황제는 담헌이 유리창을 다녀온지 8년뒤

<사고전서四庫全書>출판 이라는 엄청난 사업을 착수한다.

천하의 홍유석학鴻儒碩學 361명을 모아 10년

전중국의 전적을 수집, 검토, 정리한다.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분류, 36,000여 책을 출판 한다.


이때가 유리창의 최고 전성기 였다.


학자, 돈이 유리창으로 몰려들고 서적상은 전적수집에 광분했다.

저 지방 강남의 서적상도 유리창에 가게를 냈다.

유리창 서사書肆들에 대한 기록은 육롱기陸隴其의

<三魚堂日記>나 이문조李文藻의 <琉璃廠西肆記>.

후지츠카 린의<琉璃廠書肆史>에 상세하게 전한다.

이문조가 그려놓은 유리창 서사 약도를 보면

30여개의 책방이 적혔는데 주목해야할 집은 오류거五柳居.

서가西街에 위치한 이책방 주인은 도정상陶正祥.

뛰어난 학식, 호쾌한 성격. 조선 사행의 은인이다.

고판본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안목으로

사고전서 편찬 팀에 많은 서적을 납품함과 동시에

조선사행의 많은 의문에 일일이 답해준 사람이다.

사고전서의 편찬으로 학예의 열풍이 중국에 진동할 때

많은 북학파는 유리창으로 가서 두터운 교류를 했다.

한 예로 박제가는 하도 청나라에 경도되어

유득공은 초정을 당벽唐癖 당한唐漢 당괴唐魁로 지칭했다.

초정의 아들 박장엄이 펴낸 <호저집縞紵集>에

청나라 문인 학자 이름이 172명이나 등장한다.

북학파가 교류한 청 문사는 당대 일류들.

사고전서 편찬 책임자 기윤紀玧, 옹방강翁方綱,

양주팔괴의 막내 羅聘, 전별도의 대화가 朱鶴年

강남의 대학자 완원阮元,오숭량吳崇梁 섭지선葉志詵

이장욱李璋煜 왕희순王喜荀 장심張深

가히 청나라 문화계의 Who's who 다.

(계속)

Eugene C Kim
Oct 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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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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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8.10.08
17:16:06
(*.125.102.129)
profile
감히 아제께 말씀 올립니다.
필체가 읽고 이해하기에 간결하면서도 의미전달이 시원하게 와 닿습니다.
몇번을 탐독해서 보고싶은 글 매력이 넘쳐납니다.

기행문 한자락에, 
엮이어 있는 그때의 시대를 조명해 주신듯 한데요.
읽어주실 다른 종친님들을 위해 위에 나열하신 인물들에 대한 주석[註釋] 이 있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깁니다.

아울러 화면 우측메뉴의 하단부에 "개인별 특별 블로그" 부분 아제 글목록을 별도로 설치해 드렸습니다.(글머리에 표기됨)
아무 게시판이던 글 쓰시드라도 제가 해당되는 항목으로 모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소처럼 마음 편하시게 쓰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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