氏也 燕京別記  其 二



1750년 우부승지 박평(朴玶)의 서자로 태어난 초정 박제가는

워낙 머리가 영민해 스물여덟살때 정조의 이례적 발탁으로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연경행.

여기서 그 유명한 시대를 아파한 북학의(北學議)를 쓴다.

경제 문화 산업 동물 기구 건물등 각 방면에 걸친 논구였다.

경세가로서의 탁견을 보여주고 만주조정을 멸시하고

청조문화를 애써 외면하는 조선의 수구들을 통쾌하게 매도했다.


두 번째 간것은 1790년 건융제 80수 축하사절 수행.

벗인 유득공과 함께  많은 대가 석학과 학연을 맺는다.


청말 젊은 경학의 대가 연여(淵如) 손성연(孫星衍)이

유리창 서가(西街)에 문자당(問字堂)을 열고 살고있었다.

그곳은 청 지성인들이 모이는  살롱.

당대의 석학 필원(畢沅) 추사의 스승 완원(阮元) 위성헌(魏成憲)

방체(方體) 이동수(伊東綬) 양몽부(楊夢符)왕염손(王念孫)

서대용(徐大榕)장문도(張問陶)등이 드나들었다.


박제가가 우연히 유리창 서사에서  손성연의 고서 교열을 읽고

책방 오류거(五柳居)주인 도(陶)를 앞세워 문자당을 찿았다.

손성연은 1777년 청에서 발간된 네검서의 시집 건연집(巾衍集)을

이미 읽었고 초당 박제가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의기투합, 손은 당각석경(唐刻石經)을 선물하고

초정은 당액(堂額) 문자당(問字堂)을 대서(大書)해 주었다.

또 초정은 그 유명한 <不讀五千卷書者 母得入此室>을 휘갈겼다.

“무릇 5천권의 책을 읽지 못한자는 이집을 드나들지 말라”

손성연의 치성집(治成集)에 보면 이글을 받고 남긴 긴 시가 있다.


초정은 사고전서의 총책임자였던 건융의 대거물 노대가

기효람(紀曉嵐)과도 깊은 사귐을 갖는다.

아니 초정의 시재와 인물을 무척아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서로 많은 시를 주고 받았다.

한번은 사행편에 노대가가 비단에 손바닥만한 큰글자로 시를 써 보내니

정조가 입이 찟어 졌다는 일화가 남아있고.


1795년 순조때 초정이 사문난적 흉서사건에 연루되어

종성(鐘城)으로 귀양 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효람은 애 끓는 시를 보냈다.

기(紀)의 이런 대접 받은이는 조청(朝淸) 통털어 오직 초정뿐.

초정은 과연 연암의 애제자고 추사의 스승 이었다.


초정과 나빙(羅聘)의 우정은 그림, 글, 술로 전설처럼 떠돈다.

박제가도 뛰어난 화가, 나빙과 수많은 제화시(題畵詩)를 교환.

내가 월간아세아 일할 때 <우리나라의 옛 그림>을 연재해 주신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선생은 초정의 연평초령의모도

(延平髫齡依母圖)를 나빙 박제가 합작 이라고 추정한다.

상상을 해봐라. 두 천재가 술에 취해 니 한붓, 내 한붓.

전생이 승려였다는 화가 나빙은 유리창의 관음사,법원사를 떠 돌았다.

그는 김농(金農)의 제자이자 양주팔괴의 막내.


양주(楊州), 그 이름에서 우리는 아련한 역사를 느낀다.

돈황 한단 낙양 장안 이라는 지명을 들을때의 감정처럼.

옛시(詩)의 편린에 점점이 파고 드는 아지랑이....

장강(長江)과 경항대운하 교차점에 소금장수들의 부가 쌓였고

졸부들 수요에 맞춰 가난한 사대부들이 화폭에 그림을 쳤다.

그래 모인 여덟 선비화가들을 이름하여 양주팔괴(楊州八怪).

내가 읽은 <양주팔괴>는 괴이한게 하나도 없었다.

문인화가들을 양주팔괴라고 이름 지은게 괴이할뿐.

명말(明末) 동기창(董其昌)은 화지(畵旨)라는 글에서

문인화의 왕초는 당(唐) 왕유(王維)라고 정의 했지만

그종착점이 미국 내서가에 걸렸던 세한도(歲寒圖)라고 기억할뿐.


나빙은 팔괴의 제일 늙은 왕사신보다 마흔일곱살 어리고

팔괴중 제일 젊은 이방응 보다 서른여섯 살이 적었다.

그러나 가장 사랑스러운 화가고 가장 유명한 화가다.

지난 겨울 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서

그의 정씨소원도(程氏篠園圖)가 걸려 있는걸 보았다.

나빙의 증조모는 청(淸) 팔기군의 양주침약에 처절하게 대항

열한명의 여인과 자기집 번가원(樊家園)서 몸을 불살랐다.

추사의 스승 옹방강의 <열녀 나씨를 위한 시>가

중국인들의 애창시다.

그래서 빈한이 찿아들고 나빙은 고아였다.

그러나 장가는 아주 잘갔다. 아내는 방백년, 그녀도 뛰어난 화가.

나빙의 첫 그림 과과잡책(瓜果雜冊)에 적혀있는

그의 시는 그도 훌륭한 시인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마름따는 항구는 풍파가 잦아들고

길게 머리 땋은 처녀들 노래 부르네.

오(吳) 지방의 미녀는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네.

석양이 지기전에

문득 저녁비 날린다.....


나빙과 초정 박제가는 죽이 맞아 그래 유리창서 어울렸다.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초상화는 북경대학이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후지츠카 지카시의 아들 아나키오(藤塚明直)는

3년전 동양평화(東洋平和)란 잡지에

한류의 원조는 배용준이 아니고 박제가라고 썼다.

그만큼 초정이란 천재가 중국을 사로잡았다는 증거.


초정과 함께간 유득공도 연경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가 몸보다

먼저 연경에 가 많이 알려졌기에.

이시는 유득공이 31세때 쓴 한반도 옛 도읍들을 읊은

아주 아주 명문(名文)의 역사 회고시다.

얼마나 잘 썼으면 연경의 문사들이

이글을 갖기 위해 몸살을 했을까!.

유득공은 수고본을 대학자 기효람에게 주었는데

이를 읽어본 나빙이 한부 달라고 졸랐다.

기효람이 가진 원본은 나중에 옹방강, 그 제자 섭지선

또 그 제자 조지겸, 줄줄이 애지중지 모셔졌다.

나빙은 기효람에게 빌려 자기가 베껴 애장하고.


더디어 1809년 유리창에 추사 김정희가 등장한다.

약관 24살, 생부(生父) 이조판서 김노경을 수행했다.

박제가가 얼마나 제자 자랑을 해놓았는지

이미 추사를 위한 레일은 길게 길게 깔려 있었다.

사실  추사에 대한 따뜻한 눈길은

미리 연경을 다녀온 조선의 천재들의 행적이란

무형의 자산 위에 가능 했다.

스승과 노닐던 기효람, 나빙은 벌써 가고 없었다.

다행히 옹방강는 아직 학단에, 완원이 상경해 있었다.

처음 만난 학자는 조강(曺江), 초정 유득공의 지기(知己).

추사보다 다섯 살 위인 그는 조선사행들과 깊이 사귀었다.

조강의 소개로 만난 사람이 유명한 지리학자 서송(徐松).

서송을 고리로 추사의 일생일대의 스승 옹방강, 완원을 만난다.

옹방강은 추사를 보고 탄복, 감탄 했다.

經術文章 海東第一... 해동에 아직 이런 영물이 있었던가?

“옹방강은 늙음을 잊고 추사는 젊음을 잊었다”고

후지츠카는 학위 논문에서 청.조문화의 터닝 포인트로 표현.

옹방강은 엄청난 근시 였지만 매년 정월 초하루 참깨에

천하태평(天下太平) 넉자를 썼다. 추사를 만난게 1810년 정초.

담계( 옹방강의 호)가 추사에게  참깨위에 쓴 글씨를

자랑한게 완당집(阮堂集) 권4에 남아있다.

완원을 만난건 두사람 모두에게 큰 행운.

항주에 사는 그가 마침 상경 후실 공씨 집에 머물고 있었다.

유득공이 47세때, 27세의 완원을 만나 그의 거제고(車制考)란

글을 격찬했는데 어느듯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완원은 추사를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반겼다고 전한다.

완원이 희대의 명차 용단승설(龍團勝雪)을 손수끓여 추사에게

주었는데 이를 못 잊어 훗날 추사는 승설도인이란 호를 썼다.

옹방강은 보담재(寶覃齋)란 당호(堂號)를,

완원은 완당(阮堂)이란 아호를 추사에게 주었다.


추사는 이런 만남 위에 청나라와 조선의 금석학과

고증학을 완결 짓는다.

그가 진심으로 공부한것은 13경, 그 중에서도 주역이었고

유(儒)를 학하고 석(釋)에 입문한 진실한 애불(愛佛)의 일인자.

그의 모든 저술과 예술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을 불러

일으키지 않음이 없고  또 통선(通禪)된 석지(釋旨)가

한결 굳세게 느끼지 않을수 없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리창를 찿았던 천재들은

추사라는 한 높은 봉우리로 우리를 데려갔던 가이드일 뿐.

후지츠카의 학위논문도 내가 읽기엔 70%가 추사로 채워져있다.

후지츠카는 호 마져 북한산을 바라본다고 망한려(望漢廲).

세한도도 돈한푼 안 받고 한국에 넘겨 주고

추사에 관한 수집품 모두는 아들 아키나오(明直)에 의해

완당이 만년을 보낸 과천시에 기증 되었다.

그가 남긴 말은 “추사학은 이제 한국이 완결 하십시오”


유리창에서의 조선 학자들의 행적은 갈증 그 자체다.

이덕무가 유리창을 훓고 뒤져 사야할 책

리스트를 남긴게  후지즈카의 논문에 나오는데

조선 학단의 빈약이 한눈에 들어 온다.

명군 정조도 책에 굶주렸다.

1776년 사은부사로 떠나는 서호수(徐浩修)에게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오라고 엄명을 내린다.

<흠정>은 강희 옹정 연간, 근 50년에 걸쳐 완성한

미증유의 총서(叢書)고 아주 귀중본 이었다.

하다가 하다가 안되니까 뇌물을 콱 뿌리고 구해

1만여권을 여러 수레에 나눠싣고 몇천리 길을 날랐다.


정조는 사고전서도 구해오라고 안달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게 어떤 책인가.

건융제가 전중국 전적을 끌어 모아

혹시나 반청 구절이 없나 검열을 위해 시작한 사업.

무의식에서 나온 한구절만 있어도 태우고 판절 시켰다.

건융 38년부터 14년간, 경(經)사(史)자(子)집(集)

4부로 나누어 3,503종, 3만6천권을 간행했다.

이일을 담당했던 정총재관(正總裁官) 16명중 세명을

황제의 아들로 임명했을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검열에 걸린  금서 리스트가 쇄훼추훼서목(鎖燬抽燬書目),

금서총목(禁書總目) 위애서목(違碍書目)등의 이름으로

지진재총서(咫進齋叢書)에 수록 되어 있다.


사고전서라면 떠오르는 인물이 마일부(馬一浮1883-1967).

그 처럼 사고전서 3만6천권을 완독하고 이해한

사람이 아직 이세상에는 없다고 회자 된다.

소흥(紹興)에서 태어나 사고전서가 갈무리 되어있는

문란각 근처 광화사에 기거하며 3년 걸려 다 읽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동양인으로 제일 먼저 읽었고

그 잽싼 일본인들에게  처음 강의한 천재.

그가 살던 상하이 지역 사령관 진의(陳毅)가

馬門立雨.....뵈울려고 비를 줄줄 맞고 기다려도

느긎이 낮잠을 즐겼다는 전설.

중국사람들 에겐 사고전서란 하늘 같은 책이다.

정조가 구했나? 못 구했다. 내가 미안하다.

나는 유리창 동가(東街)로 들어갔다.

거유 손성연의 집 문자당은 길건너 저 어디메겠지

알아봤자 아직 책5천권을 못 읽었으니 출금(出禁)일테고.

나빙이 전전 했다는 관음사, 법원사는 어디쯤 일까?

즐비한 도자기 책 그림 옥 가게들.

그들은 이제 이 거리를 고문화 거리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 하면 5천년 이끼낀 문화와 학문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관광객 지갑이나 털어 보겠단다.

국영상점 이라고 통역이 안내해 들렀더니

붓 하나에 수만 위안. 족제비털 이라나. 미친놈 들.

벼루가게엔 단계(端溪) 단연(端硯)을 써 붙였고

종이가게엔 선지(宣紙)를 자랑 했다.

이수연(易水硯)도 엄청 알아 준다지

붓은 절강성 오흥 호필(湖筆)이 유명하고

먹은 안휘 서현 휘묵(徽墨)이 으뜸 이란다.

아마 단계석은 광동 조경(肇慶)에서 나오고

선지는 안휘성 선성(宣城)에서 나오지.


서점에 들렀다.

아는 책이라곤 우단(于丹)의 논어심득(論語心得)

이중천(易中天)의 품 삼국(品 三國)

여추우(余秋雨)의 문화고여(文化苦旅) 산거필기(山居筆記)

내가 살 책은 없다. 통역을 시켜 영어로된

유리창 책이 있나 물었더니 없단다.

묻는 내가 바보지. <琉璃廠 百年>이란 책을

빼들었지만 뭔가 이빠진듯한 간자체.

책만 잔뜩 사다놓고 공부를 안하게 후회 스럽다.


유리창을 걸으며 나는 우리들의 선인들은 명(明)만 처다보고

청(淸)을 왜 그렇게 업신 여겼는지 이해를 못했다.

송시열의 존주대의(尊周大義)와 존화출이(尊華黜夷)가

어째 만 3백년동안 이땅을 횡행 했는지.

청을 세운 사람들은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을 쓰고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말자”고 외치지 않았는가

Last Emperor 애신각라 부의(愛新覺羅 傅儀)도

모택동 치하서 복역을 마치고 김(金)이란 성으로

돌아와 살다가 갔지않는가?

임진왜란때 청태조 누르하치도 선조에게 편지를 썼다.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왜구를 해 치우겠다”고

삼전도에서도 그들이 인조에게 뱉은 말은

“그대는 왜 동족의 말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金史)에도 시조 이름은 함보(函譜),
마의태자 후예로 고려에서 왔다고 적혀있지 않은가.

강희 옹정 건융을 거친 찬란한 문예부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궂은비 마다 않고 뒷골목 후퉁(胡同)으로 들어섰다.

앞거리의 상품을 만드는 공방이 간혹, 적막했다.

내 선조들이 책을 찿아 헤메던 이거리

나는 무식해  서지(書誌)에 대해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

답답 하지만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씨야 김창현

Eugene C. Kim

Oct 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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