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 제산(諱 聖鐸)선조 불천위 제사를 아래와 같이 봉행할 예정이오니 종친
제위님께서는 많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특히 대구 청류회 및 청류회청년회
회원님께서는  한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선조의 음덕을 기리며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가 되였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           래    ─
        · 일   시 : 2010 . 6 .11. 00:30 (음력 4.29) 금요일
        · 입   제 : 2010 . 6 .10 (목요일)
        · 장   소 :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56번지 제산종택 祭廳
        · 제산선조(諱 聖鐸) : 비 무안박씨(음력 : 2 .27)




☞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略史
 

김성탁의 자(字)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본관은 의성(義城).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의
오대손(五代孫), 표은(瓢隱) 김시온(金是?)의 증손(曾孫). 통덕랑(通德郞) 김태중(金泰重)의 장남이다.


제산은 숙종(肅宗) 10년(1684)에 경상도 영양현(英陽縣) 청기리(靑杞里) 우거(寓居)에서 출생하여,
영조(英祖) 23년(1747) 전라도 광양(光陽) 적소(謫所)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享年) 64세였다.


 >> 제산종택 : 시도민속자료 제129호,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있다. ⓒ문화재청

















17세기 후반기부터 약 100여년간은 이른바 당쟁의 시대로 경신출척(庚申黜陟, 1680) · 기사환국
(己巳換局,1689) · 갑술정변(甲戌政變,1694) · 신임옥사(辛壬獄事,1721~1722) · 정미환국(丁未換局, 1727) 등 정변의 연속이었다. 집정자(執政者)들은 정권쟁탈에만 급급하여 시비사정(是非邪正)은 따지지 않고 이취자(異趣者)는 대역죄인으로 몰아 극형에 처하거나 찬배(竄配) 또는 폐고(廢錮)하였다. 그래서 이 당쟁이 사림이나 국정에 해독을 끼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군주의 부자 · 형제간의 살육(殺戮) · 이간(離間) 등의 참화까지 빚어내었던 것이다. 이때에는 도학자의 처세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제산은 1692년 10세 때에 고향인 안동 천전리(川前里)로 돌아와 종숙부(從叔父)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에게 수학하였는데, 적암은 『이 아이는 천자(天資)가 근도(近道)하다.』고 격찬하였다. 이때 벽에 그려진 매(鷹)를 보고 시를(詩) 지어 세인을 놀라게 했다한다.

1700년 17세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 나아가 사사(師事)하였는데, 뛰어난 자품과 정명(精明)한 견식(見識)으로 사문(師門)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 갈암의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여러 학도에게 각자의 포부를 물었는데, 제산만이 대답이 없었으므로 거듭 물으니, 제산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뜻은 크더라도 실행이 미치지 못하면 실지가 없을까 두려우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당시 갈암이 광양적소(光陽謫所)로부터 방환(放還)되어 안동 금양(錦陽)에서 강도(講道)하자, 사방의 학도가 모여들었는데, 문제자(門弟子)들은 먼저 그의 아들 밀암에게서 강론을 받았던 것이다. 사서(四書)와 성리서(性理書) 등을 강명(講明)하여, 자기 덕성(德性)을 수양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소중함을 알고 명리를 추구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을 좋아하지 않았다.

1711년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우곡초당(雨谷草堂)을 창건하고 학문 연마와 후배 양성에 전념하였다. 나이 30여 세에 이미 문장과 학행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당시 당색이 다른 어사(御史)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가 예방한 일이 있고, 또 안동부사였던 내헌(耐軒) 박사수(朴師洙), 시임감사(時任監司)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등과도 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야(朝野)의 명사나 공경재상(公卿宰相)들도 한번 보기를 원하였고, 비록 당로(當路)의 명재(名宰)들이라도 사명을 띠고 영남에 내려오면 몸소 예방하였다 한다.

 >>의성김씨 제산종택 무인년 7월에 모가 김성탁에게 보낸 간찰(簡札) ⓒ유교넷









1728년 이인좌난(李麟佐亂) 때에는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요청으로 용와(?窩) 유승현(柳升鉉) · 강좌(江左) 권만(權萬) 등과 즉시 창의소(倡義所)에 가서 토적방략(討賊方略)을 의논하고 토역격문(討逆檄文)을 지어 열읍(列邑)에 통유(通諭)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엄정강개(嚴正慷慨)하였다.

1730년 40세 때에 안핵사(按?使) 오광운(吳光運)이 예방하였고, 그가 환조(還朝)하여 조정에 천거,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어 관찰사(觀察使) 조현명(趙顯命) · 감진어사(監賑御使) 이종백(李宗白) · 승지(承旨) 이종성(李宗城) 등의 잇단 천거로 정릉참봉(靖陵參奉) ·  용양위부사과(龍?衛副司果)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더니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를 제수하고 도신(道臣)에게 하유(下諭)하여 권가(勸駕)하도록 명하였다.

제산은 매번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예궐숙배(詣闕肅拜)하였더니, 즉시 입시(入侍)하게 하고는 학문과 정치의 요도(要道)에 대해 하문(下問)하였다. 수삼차(數三次)의 입시에서 일부나마 자신의 경세관 · 학문관을 피력하였더니, 영조(英祖)는 가납(嘉納)하고 경연신(經筵臣)에게나 내리는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1735년 51세 때에 사복사주부(司僕寺主簿) ·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 해 사월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였다.


『제산선생문집(霽山先生文集)』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성탁(金聖鐸 ; 1684∼1747)의 문집
으로, 원집 16권 연보 부록 합 9책의 목판본 이다.














제산은 부모의 영광을 위하여 초년에 한두 차례 과거에 응시하기는 하였으나, 중년 이후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이때에 와서 영조의 권애(眷愛)가 융숭하여 사피(辭避)할 길이 없으므로 부득이 응시 하였는데 이는 유일(遺逸)로 자처하지 않으려는 겸덕(謙德)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조는 주시관(主試官)을 불러 『이번에 영남의 현사(賢士)가 과장(科場)에 들어올 터인데, 인재를 빠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는데, 제산이 과연 합격하였다. 영조는 제산의 합격을 기뻐하여, 방방(放榜)하는 날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입시(入侍)하게 하고, 축시일절(祝詩一絶)을 지어주고 즉석에서 차운(次韻)하도록 하였다.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제시(御製詩)에
지난날 영남의 천거한 사람이,
오늘날 머리 위에 월계화 새롭구나.
어버이 위하는 너에게만 기쁘랴!
나에게도 김마문(金馬門) 문학신(文學臣)이 되도다.

제산의 답시(答詩)에,
이내몸 먼 시골의 미천한 사람인데,
오늘날 깊은 성은(聖恩) 감당하기 어렵다오.
부모 귀근(歸覲) 허락이라 영광도 특이하니
죽어도 갚지 못할 부끄러운 소신(小臣)이네.

하였다. 이는 전후 유례(類例)가 드문 일로서 당시의 조야(朝野)가 영광으로 여겼다.

 이로부터 지평(持平)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면서 말미(末尾)에 당쟁의 침고(沈痼), 향곡(鄕曲) 사습(士習)의 부정과 그리고 민생이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실태, 부세(賦稅)가 과중한 폐단 등을 논하고, 이어 도백(道伯)이 농시(農時)에 축성(築城)하는 일 등을 논급(論及)하였다.

이듬해 홍문관(弘文館)의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다. 왕의 신뢰와 존총(尊寵)이 날로 융숭해져서 곧 중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때 반대당의 사주를 받은 이해노(李海老) · 신헌 (申金憲)  등이 소를 올려 제산을 얽어 모함하였다. 제산이 정언(正言)으로 있을 적에 올린 소에서 『향곡(鄕曲) 사습(士習)이 부정하다』는 등의 어구가 자기들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하여 원한을 품은 데다가, 당로자(當路者)에게 아첨할 양으로 이런 모함을 했던 것이다. 또 그들은 제산의 스승인 갈암까지 모독(冒瀆)하였다.

제산은 자신이 모함받은 것은 고사하고 선사(先師)를 모독함에는 좌시할 수 없어 상소하여 갈암의 억울함을 변백(辨白)하였는데 그 소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의 스승 이 현일이 아직까지 죄적(罪籍)에 있게 된 것은 기사년 가을 응지소중(應旨疏中)의 한 구절 때문입니다만, 만일 전소(全疏)의 본의를 살펴보면, 실로 성모(聖母, 仁顯王后 閔氏를 지칭)께 존안(尊安)의 도리를 다하고 선대왕(先大王, 肅宗을 말함)께 처변(處變)의 의리를 다하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신은 전하께서 기사년의 일을 선천(先天)에 부치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신 때문에 사문(師門)에 욕이 미치게 된 것을 아프게 여깁니다.……』

갈암 이현일은 퇴계학통을 계승한 주리학자다. 그는 숙종 기사년(1689) 민비폐위(閔妃廢位) 때에는 재향중(在鄕中)이어서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환국 이후 성균사업(成均司業)으로 승소도중(承召途中) 광주(廣州)에서 폐위사실(廢位事實)을 듣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나 시임광주유수(時任廣州留守) 이항(李沆)이 엄지(嚴旨)에 위배된다 하여 올리지 않았다. 그 뒤 재직시 민비를 위해 올린 소문중(疏文中) 『자절우천(自絶于天)』,『위설방위(爲設防衛) 근기규금(謹其糾禁)』 등의 말이 있었는데, 갑술정변(甲戌政變) 때 그의 정적들이 전기문자(前記文字)를 문제삼아 오히려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었다가 뒤에 방면되었다.
제산의 상소문중의 『기사사(己巳事)』란 민비폐위 때의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소가 정원(政院)에 들어가자,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별도로 영조를 자극하고 격동하는 말로 계사(啓辭)를 만들고 제산의 소와(疏) 함께 올려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나명(拿命)이 내려지고 국청(鞠廳)을 개설하여 호역죄(護逆罪)를 적용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여섯 차례의 모진 형장(刑杖)에도 조금도 동요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당시 문사랑(問事郞)은 『천하에 극히 드문 사람이다. 이 사람이 국난을 당하면 절의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그의 꿋꿋한 기개를 격찬하였다 한다. 제산은 옥중에서도 위국존사(爲國尊師)의 굳은 신념에 변함이 없는 자신의 뜻을 시로 읊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침침한 온 누리는 사경(四更)이 되려는데,
외로운 이 죄수는 작은 등불 벗하누나.
베갯가 수졸(守卒)은 머리 맞대 졸고 있고,
옥문 밖 순령(巡鈴) 소리 귓전에 울려오네.
내 몸 이미 상했으니 슬픔이 어떠하며,
부모 은혜 못 갚으니 유한 어이 가실 소냐.
국은에 보답하고 스승 높이려는 이내 뜻이
허사로 되고 보니 피눈물이 쏟아지네.

당시 제산을 얽어 넣은 것은, 그의 상소문 중의 『기사사(己巳事)는 선천에 부쳤다(己巳事 付之先天)』라는 『선천(先天)』 두자에 불과하다. 『先天』이란 세월이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제산은 기사년(1689)이 당시로부터 50년이 넘었으므로 영조의 효심으로 그 때의 일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었다. 또 실은 민비폐위는 숙종의 자의로 행한 것이지 당시 집정자(執政者)와도 관계가 없었다.

이 때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이 일은 이현일이 근본이고 김성탁은 지엽입니다. 근본인 이현일은 집에서 종신하고 지엽인 김성탁은 형장 아래에서 죽게 되니 그 본말경중(本末輕重)의 차례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조정에서 역률(逆律)로 이현일을 다스리지 않았는데, 호역(護逆)으로 김성탁을 치죄하는 것은 백성을 죄망(罪網)에 얽어넣는데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극력신구(極力伸救)하고, 그 뒤에 또 상소하여,

『지난 신사년(숙종27, 1701)에 고상신(故相臣) 이여(李?)는 이현일을 방면하기를 청하였고, 갑진년(경종4, 1724)에 나학천(羅學川)은 상소하여 이현일을 송변(訟辨)하였습니다.‥‥‥전후 똑같은 현일인데, 나학천이 송변하면 장용(?用)하고 김성탁이 말하면 주륙(誅戮)을 행하며, 이현일을 방면하기를 청한 고상신 이여(노론, 老論)는 영수(領袖)로 추대되고, 김성탁을 약간 논구(論救)한 현명(顯命, 少論)은 호역죄를 면하지 못하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명분ㆍ의리도 시대에 따라 경중이 있고, 법률도 사람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입니까?』하고, 치죄의 부당함을 극력논변하였다.

이 조현명의 신구로 극형을 면하고 구금 오개월 만에 풀려나 제주 정의현(?義縣)으로 정배(定配)되었다. 이듬해 광양(光陽) 섬진(蟾津)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우연히도 선사(先師) 갈암의 유배지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1739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유의(遺衣)를 걸어놓고 조석으로 호곡(號哭)하니, 왕이 듣고 특명으로 고향에 가서 어머니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장례를 마치고는 도로 배소(配所)로 돌아왔다. 1745년에 해남(海南) 신지도(薪智島)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광양으로 환배(還配)되고, 영조 23년(1747)에 유배생활 11년만에 배소인 광양 용선암(龍仙庵)에서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제산은 11년 동안의 (艱苦)한 유배생활중에서도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였고, 진주ㆍ함안 등지의 선비로 청학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되, 죄적(罪籍)에 올려 있는 처지라 하여 사절하였다. 특히 성심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혹 재능에 따라 가르쳐 주었다. 운명하기 하루 전날에 칠언절구 10수를 지어 아들 낙행(樂行)에게 주었는데, 가학(家學)을 면려(勉勵)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임종 직전에도 동자를 시켜 고시(古詩)를 외게 하였다.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제산은 문장과 학행으로 조야의 촉망과 군주의 존총을 한 몸에 지니고 출세하였으나, 당론이 심각(深刻)한 그 시대에 무욕(誣辱)당한 스승을 변백(辨白)하다가 경륜을 펴지 못하고, 끝내는 억울하게 죄명을 쓴 채,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당쟁의 폐해를 절감케 한다. 더구나 문자를 들추어 내어 대역죄인으로 얽어 치죄하는 것이야 말로 조선조 후기의 당화(黨禍)의 심각성을 입증한다 하겠다.

제산이 몰후 48년 만인 정조 19년(1795)에 그의 손자 김시전(金始全)의 송원(訟寃)으로 복관(復官)되었다.

제산은 문장에도 뛰어났지만, 이학(理學)이 그 본령으로서, 그 연원은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로 이어지며, 기본 학설의 차이는 없으나, 제산은 밀암 이재와 함께 각기 한 학파를 형성하여,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 묵헌(?軒) 이만운(李萬運)에게로 전수하였다. 성리학ㆍ경학 외에 지지(地志)ㆍ복서(卜筮)ㆍ의락(醫樂)ㆍ병률(兵律) 등에도 정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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