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금성대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은 연꽃잎이 새겨진 네모난 대석을 제외한 다른 석물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및 안평대군의 태와 태실비는 파내어 태봉
아래로 버렸다고 하는데 1975년도에 태실을 보수 정화하면서 기의 대석을 찾아서 제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세조가 등극한 뒤 세조의 태비 앞에 홍윤성이 글을 짓고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웠으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화강암으로 깍은 19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儀軌)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胎壺)를 넣었다.태호속에는 태항(胎缸)과 태주(胎主)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誌石)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조선 세종 20년(1438년)에서 24년(1442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에는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을 태실로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왕자들의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1977년 태실 보수시 발견된 분청인화문대접과 분청상감연화문 뚜껑 1벌, 명기가 있는
지석 2점이 현재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밖의 것들은 1929년에
왕가로 모두 옮겨갔다고 한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가장 큰 규모의 왕자태실이 이렇게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것으로는유일하고,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수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문종실록에 보면, 풍수학(風水學)에서 말하기를 "태장경(胎藏經)에'하늘이만물(萬物)을 낳는데 사람으로 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胎)로 인하여 장성(長成)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胎)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명당을 가리고 때에 맞춰 태를 묻어야 자신의 일생이 복을 받고
후손에게 복이 온다는 풍수적 믿음을 굳게 지녔던 것이다.그것이 어머니 자궁 속 태아의 생명 줄이었던 태를 소중히 여긴 이유인 것이다.
육신사(六臣祠 :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 정문
육신사 정문 안쪽에는 절의묘(節義廟) 현판
정면의 홍살문
우측으로는 태고당이 있고
좌측으로는 성인문(成仁門)이 있다
앞쪽에는 성역화에 참여하신분들의 휘호가 있는데 좌로 부터 박정희대통령,최규하대통령 그리고 후손인 박준규국회의장의 휘호다
휘호 앞쪽에는 육각형의 비석이 있는데 백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선생의 사적이 음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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