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그보다 더 나쁜 생각들

[매일춘추 2010.06.25 김계희변호사]

 

술에 취해 사무실 소파에서 졸 고 있는 중년 남자. 물 컵을 들고 들어온 여비서.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소리. 여비서는 그가 자신의 엉덩이를 만졌다 하고 남자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사장인 장인도, 그의 아내도 여비서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느냐며 그를 몰아세운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남자는 CCTV도 들이대고 거짓말탐지기에도 적극 응하지만 문제의 장면에 이르러 화면은 지직거리고 탐지기에선 거짓이라는 경고음이 울릴 뿐이다. 그의 결백을 믿는다던 가정부도 뒤돌아서서는 방문을 잠그고 자야겠다 다짐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 그의 결백을 어리석게도 나는 믿었다. 무능하고 눈치 없고 소심하지만 눈물 많은 선량한 인물. 그에게 CCTV 속 화면을 지워 증거로 들이댈 영악과 파렴치는 없다고 믿었다. 여비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접촉은 있었겠지만 추행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해실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순진한 믿음을 무참히 깨뜨렸다. 익살스런 고해 모습에는 웃음소리가 효과음으로 깔렸다.

술에 취해 여기자의 가슴을 만진 정치인이 있었다. 그가 내놓은 해명은 음식점 여주인인 줄 알았다는 것. 결국 그 해명이 그의 정치 생명을 앗아갔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잘못할 수 있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내 사람은 그럴 수 없다고 무참히 칼로 베는 엄격과 가혹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추행은 잘못이고 범죄이지만 용서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의 결백 증명이나 착각 해명이다. 한마디로 죄질이 나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범죄와 파렴치가 농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음식점 여주인으로 착각했다는 게 해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행위로 드러나지 않는 한 생각은 범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범죄를 양산하는 토양이 된다. 특히 성범죄는 그런 생각의 영향력이 크다.

성폭력범에게 유기징역의 상한인 25년형이 잇따라 선고되는 등 성범죄자에 대한 형량이 강화되고 있다. 형사사건에서 성범죄가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아무리 영혼의 살인이라지만 실제 살인보다 형이 더 무거운 것은 문제가 있다는 반론이 있지만 양형 기준을 새로이 정비하자는 것이지 성범죄자의 형을 가볍게 하자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아동 성폭행범에 대한 엄중한 처벌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껏 우리 사회는 앞에서는 근엄과 엄숙을 강요하지만 뒤돌아서는 술과 성(性)에 관대했다. 법도 재판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 법도 재판도 바뀌고 있다. 생각들이 모여 법과 재판을 바꾸었고 바뀐 법과 재판이 다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것이다.

 

톨스토이와 세 여자 이야기

                                                    [매일춘추 2010.06.18 김계희변호사]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올해로 서거 100주년을 맞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구절이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사랑=결혼’이라는 등식이 막 발명되어 이미 이루어진 사랑 없는 결혼과의 충돌이 불거지던 때였다. 자유연애, 공공연한 불륜, 아내의 이혼 요구 등이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안나는 오빠의 불륜으로 인한 그들 가정의 불화를 해소하고자 모스크바로 오고 그 기차역에서 브론스키를 만난다. 그는 그녀의 억눌린 생기에 이끌리고 그녀는 이제까지의 도덕적이나 죽어있는 삶(결혼) 대신 부도덕하나 생기 있는 삶(불륜)을 택한다. 그 선택은 기차역 철길 투신이라는 안나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다.

'크로이처 소나타'에도 부정(不貞)한 아내의 죽음이 등장한다. 엄밀히 말해 ‘죽임’, 부정한 아내를 죽인 한 남자의 독백이 이어진다. 아내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연인과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한다. 주인공에 의하면 그 곡은, 특히 그 첫머리의 프레스토는 무서운 것이다. 음악은 영혼을 향상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흥분시켜 현재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게 한다. 작곡 당시 작곡가의 심경으로 무차별적으로 이끎으로써 무시무시한 에너지와 감정의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사랑 없는 결혼은 견딜 수 없고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할 수 없다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는 귀부인의 행로가 흥미롭다.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톨스토이의 아내는 악처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톨스토이는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급진적 사상을 몸소 실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아내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톨스토이는 34세에 18세의 소피아와 결혼했다. 한 번 읽기도 버거운 '전쟁과 평화'의 여러 필사본은 그녀가 받아쓴 것이다. 다툼 끝에 모든 저작권이 소피아에게 양도되었다고 하나 그녀는 장성한 자식들의 결혼을 앞둔 어머니였다. 악처(?) 소피아의 잘못은 평범한 그녀가 위대한 톨스토이의 아내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톨스토이와의 결혼이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소설 속의 두 여자는 물리적 죽음을, 현실의 소피아는 악처라는 사회적 죽음을 맞는다. 세 여자의 가정은 제각기 불행한가? 모든 행복한 가정이 엇비슷한 게 아니라 모든 가정이 엇비슷하게 행복해 보이는 건 아닐까. 들여다보면 제각기 나름대로의 문제를 안고 있고 그걸 불행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가정은 불행하다 할 것이다. 아직 불행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행복이라고 속고 있는 가정만 행복할 뿐이다. 늘 그렇지는 않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가족사진 속 모든 가정은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는 맘만 먹으면 그런 가족사진을 몇 장이고 찍을 수 있다.

 

복수도 그의 것, 용서도 그의 것 

                                                [매일춘추 2010.06.11 김계희변호사]

 

동남권 신국제공항 유치 문제로 ‘밀양’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3년 전에는 영화 ‘밀양’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유명세를 탔었다. 원작이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로 영화는 원작의 감동이 컸던 만큼 아쉬움이 더 많았다.

소설 속 화자는 아이의 아버지. 약국을 경영하는 부부의 유순하고 내성적인 아이는 어느 날 학교와 주산학원을 거쳐 집으로 돌아와야 하나 오지 않는다. 두 달이 넘어서야 재개발사업이 한창이던 빈 건물 지하실에서 아이는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범인은 주산학원 원장. 그에게 사형이 집행되고 아이의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소설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신(神)을 통한 구원을 꾀함으로써 벌어지는 신과 인간, 구원과 절망, 속죄와 용서를 이야기한다. 분노에서 체념으로, 그리고 용서를 통한 마음의 구원을 얻으려던 피해자는 그녀보다 신이 먼저 가해자를 용서하고 이제 구원받은 가해자가 오히려 그녀의 참된 평화를 신에게 기도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법과 제도는 그녀에게서 복수의 기회를, 신과 종교는 용서의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신의 섭리와 인간의 한계에서 절망한 그녀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同害報復)의 해외 기사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명사회에 아직도 저런 야만이!"라며 고개를 내젓지만 피해자의 사적 복수를 다룬 영화나 소설은 여전히 인기가 있다. 강력사건의 피의자일수록 경찰의 철통 경호(?)를 받고 피해자들은 "무슨 이런 법이 다 있냐"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피해자도 국가도 법이 정한 형을 넘어서는 제재를 할 수 없다. 죄형법정주의가 피의자 인권 신장에 기여한 바 적지 않으나 피의자 인권을 이야기하느라 정작 피해자는 법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버렸다.

피해자를 위한 법으로 ‘범죄피해자구조법’이 있다. 그 존재조차 모르는 피해자가 많을 뿐더러 구조금의 액수는 적고 지급 요건은 지나치게 까다롭다. ‘김길태 사건’의 피해 유족이 지급받을 수 있는 최고 금액은 3천만원인데 요건 미비로 받지 못한다. ‘강호순사건’의 피해 유족 또한 강호순에게 재산이 있어 지급대상에서 제외된다.

살아남은 피해자 혹은 피해 유족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파괴된 생활터전 복구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깊게 팬 정신적 외상을 치유할 의학적 지원도 모두 절박하고 부족하다. 피해자 문제를 외면하면서 피의자 인권을 얘기하는 것은 야만은 아니더라도 위선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선은 때때로 야만보다 더 참혹할 수 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

[매일춘추 2010.06.04 김계희변호사]

 

대학 시절 들은 이태리어 수업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왔다. 유학을 염두에 둔 성악과·의류학과 학생들, 그들과 옷깃이라도 스치고픈 남학생들, 그리고 오페라를 좋아하는 그 나머지들. 그 수업의 기말고사에는 ‘라 돈나 에 모빌레'(La Donna e Mobile)라는 아리아를 외워 쓰는 문제가 나왔다. 오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여자의 마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한없이 변하는 여자의 마음···' 이렇게 시작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이다.

초등학교 음악책에 실린 이 노래를 부르다 ‘무슨 그런 노래를 부르느냐’는 엄마의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도 가사가 마뜩잖았지만 경쾌한 선율에 이끌려 불렀던 것인데 시조부 앞에서조차 ‘계집 녀’가 아니라 ‘여자 녀’를 끝내 고집하셨던 엄마에게는 몹시 듣기 거북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노래만 들어서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몰라주는 변덕스런 여자를 향한 안타까움과 원망이 담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류의 탄식과 애원인 듯한데 경쾌하고 발랄한 선율이 익살맞고 장난스런 투정처럼 웃어넘기게 한다. 그 기괴한 익살스러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오페라 '리골레토' 속에서 이 아리아를 들은 이후였다.

리골레토는 만투아 공작의 꼽추 어릿광대이다. 공작은 난봉꾼, 호색한이고 리골레토는 그 일에 충실한 조력자이지만 자신의 딸 질다가 혹여 그런 몹쓸 꼴을 당할까 전전긍긍이다. 하지만 신분을 숨긴 공작은 이미 질다를 만나 그녀의 사랑을 얻었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리골레토는 청부업자에게 공작 살해를 요청한다. 공작을 유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부업자의 요염한 여동생이 등장하고 공작은 그녀를 꼬드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때 바로 이 아리아가 나온다. 리골레토는 질다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공작의 실체를 알리려 그곳에 질다를 데려간다. 숨어서 자신에게 한 공작의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이었음을 고통스럽게 확인하고도 질다는 공작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딸을 구하고 그 복수를 하려던 리골레토는 죽어 가는 딸을 부둥켜안고 저주하며 울부짖는다.

변덕스런 게 여자의 마음이라 알 수 없다는 공작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질다가 숨어 가슴 치며 듣는 아리아가 바로 그 ‘여자의 마음’인 것이다. 예전보다 덜 하다고는 하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자가’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말들이 많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지만 남자의 적이 여자인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남자의 적 또한 남자임이 분명한데 아무도 그런 얘길 하지 않는다. 이는 ‘자, 봐라.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마음이 갈대’라고 반박하는 것과 같다. 그런 치졸과 우매로 허비하기엔 우리의 진짜 적들이 너무 많다.

 

어른들을 위한 네발 자전거

[매일춘추 2010.05.28 김계희변호사]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언제든 배울 수 있겠다고 미뤄왔는데 그 ‘언제’는 아직도 기약이 없다. 배우고는 싶지만 노인을 위한 자전거 교실을 기웃거리기엔 아직 이르고 아이 때처럼 마구 넘어지면서 배우기엔 회복이 늦고 어려울까 두렵다. 왜 어른들을 위한 네발 자전거는 없는 걸까? 무서운 속도의 시대. 느림이 죄악시된다는 건 초등학생도 다 안다. 그러나 자전거는 더 이상 속도를 위한 운송 도구가 아니다.

검찰시보 시절 수사 기록들을 넘기다가 ‘2’로 시작되는 주민등록번호를 본 적이 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노인 범죄가 예전보다 많이 늘었다고는 하나 80대 노인이 도대체 무슨 범죄를? 죄명은 특수절도. 형법상으로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죄로 흉기를 이용하거나 둘 이상이 가담한 절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뉴스에서 보았던 그 노인 소매치기단?

실제 사건은 이랬다. 80대 노인이 훔친 것은 낡은 자전거 1대. 도심 광장 자전거 거치대에 몇 달째 방치된 것으로 끝내 주인은 알 수 없었지만 분실방지용 고리로 거치대에 매여 있었던 것. 그래서 자전거를 가지고 가기 위해서는 흉기(?)인 공구용 펜치 사용이 불가피했을 터. 흉기를 이용한 절도임에는 틀림없었다. 매일 그곳을 지나다니면서 그 자전거를 보았다고 했다. 주인이 잊어 버렸거나 버린 것이라고 생각되어 고쳐서 손자에게 주려 했다고 했다. 노부부가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 했다. 문제의 그 자전거 사진도 있었다. 구멍 뚫린 타이어, 벌겋게 녹이 슨 몸통. 사진으로도 능히 상태가 짐작하고도 남음 직한 그 자전거의 시가는 3천원. 맨 뒷장의 전과 기록을 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소유예. 분명한 사건, 명쾌한 결론. 그럼에도 자꾸만 그 자전거가 마음을 녹슬게 했다. 어릴 적 읽은 장발장의 빵 한 조각이 남긴 각인 효과일까? 그때는 참 어리석은 빵집 주인이라고 생각했었다. ‘빵집 주인이 경찰관에게 자신이 그냥 준 것이라고 이야기해 줬다면 장발장은 더 빨리 부자가 되어서 그 빵집의 빵을 더 많이 사 주었을 텐데. 다시, 그냥 할아버지가 가져가시게 했더라면 손자에게는 30만원, 아니 300만원 못지않은 자전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고작 폐기처분될 3천원짜리 자전거 하나를 두고 경찰에서, 검찰에서 사건을 처리하느라 여러 사람이 들인 노력과 시간과 비용은 그 빵집 주인의 어리석음에 비할 바 아니라 생각되었다.

넘어지지 않게 잡아줄 두 손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두 개의 보조바퀴는 그 두 손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제도이고 사회적 안전망일 것이다. 법과 질서라는 두 바퀴만을 고집하다 그 자전거는 폐기처분되고 말았다. 80이 넘도록 그야말로 ‘법 없이 살 사람’이셨던 할아버지와 우리 사회 조손(祖孫)가정의 문제에 관한 배려와 고려라는 두 개의 보조바퀴가 있었다면 그 자전거는 ‘함께’ 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저탄소 녹색성장의 기수로, 건강 지킴이로 경쾌하게 햇살을 가르는 창밖의 자전거들을 보면서 자꾸만 그 자전거 생각이 난다.

 

                    ‘석명’하세요. 무슨 ‘설명’을?

                                             [매일춘추 2010.05.21 김계희변호사]

 

40대이신 판사님이 자신은 ‘진상’이 ‘진국’과 비슷한 말인 줄 알았다고 해서 그 자리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분들도 많으리라. 한창 자기 일 하기에도 바쁜 40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방송과 인터넷상의 온갖 신조어와 약어들을 따라 간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야말로 화성인(?)에 가깝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나홀로 소송을 힘들게 하신 분의 법정 경험담이 생각났다. 판사님이 ‘석명’하세요 라고 하시는데 네? 네?를 연신 반복하다 당혹감에 아무 말도 못하고 법정을 나왔다 했다. 처음엔 ‘설명’이라는 줄 알았는데 다시 들어보니 ‘석명’이고, ‘석명’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설명’과 비슷한 말인지 그렇다면 나에게 무엇을 설명하라는 것인지 그렇게 머릿속에서만 웅웅거리던 물음들 때문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역지사지가 될 법한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진상’을 ‘진국’으로 알았다는 건 좌중을 한바탕 웃게 한 농담에 지나지 않으나 ‘석명(釋明)’을 ‘설명(說明)’으로 알았단 건 자신의 전 재산을 두고 벌어질 수도 있는 소송의 승패와 연관되기에 웃음조차 얼어붙는 절박함일 뿐인 것이다.

법전의 한글화 작업이 완료되면 한자를 모르고선 읽을 수조차 없다든가 일본식 한자 표현이라 이해가 안 되는 경우는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말이지만 내게는 우리말 아닌 부분이 남는다. 남을 수밖에 없다. 전문 분야, 전문 용어란 게 그런 거니까. 그래서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게 적어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므로. ‘선의’, ‘악의’는 아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전에서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으로 그 쓰임새가 다르다.

이쯤에서 되묻게 된다. 법전, 판결문, 진단서를 어째서 다 알아야만 하는가? 주식 용어도 IT관련 용어도 우리말 아닌 것은 매한가지인데 아무도 이를 크게 불평하지 않는다. 복잡다기한 각계 분야들을 모두 알 수도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관심 분야라면 찾아 공부하면 되는 것이어서 모르는 말로 대화하는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서나 의학서를 공부하지 않았으면서 ‘왜?’ 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아픈 것도 소송도 관심 분야가 아닌 내게 들이닥쳐 치명적인 나의 불이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문제는 생사 혹은 그에 견줄만한 일생일대의 내 일에 내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 내가 알기만 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 터인데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불안과 불신.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자는 생쥐를 못 믿어도 크게 해될 게 없으나(물론 동화 속 사자는 사정이 다르지만) 생쥐가 사자를 잘못 믿었다가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문제인 것이다.

불신이란 게 원래 하루아침에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법조계 안팎에서 쏟아지는 불신타파용 개혁안들을 보다 보면 도대체 불신을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가 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불신의 해소는 그 불신을 이해하려는 한걸음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혼녀?  미망인?

                                                        [매일춘추 2010.05.14 김계희변호사]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자신만이 그 사실을 모르는 여자가 암 투병 중인 자신을 방치하는 남편에게 이혼을 청한다. 이혼남이 되려던 남편은 자신이 수혜자인 거액의 생명보험 가입 사실을 알고선 홀아비가 되기로 한다. 여자는 몇 개월짜리 다정하고 헌신적인 남편을 새로운 시작이라 믿고, 지켜보는 이들은 여자의 남은 생을 망칠까봐 씁쓸히 함구한다. 얼마 전 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본 일화다. 한 사람에게는 생과 사의 갈림길의 문제가 그와 혼인한 다른 사람에게는 법적으로 재산분할이냐 상속이냐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은 배우자를 상대로 혼인해소 및 재산분할청구를 했는데 그 배우자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법적으로는 사망 전 혼인이 해소되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재산분할과 상속이 갈리는 문제이다. 요즈음에는 전업주부라 하더라도 대략 40%가량을 재산분할로 인정하는 점을 고려하면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듯하나 문제는 그 혼인이 사실혼이었다는 점이다. 사실혼이란 단순한 동거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일반적인 혼인에서 혼인신고만이 빠진 경우를 가리킨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실혼인 부부들이 많은 현실이 반영되어 법적 불이익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나, 사실혼 배우자가 상속인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부득불 의식불명이더라도 아직은 살아있는 배우자를 상대로 다급한 혼인해소 및 재산분할 청구가 필요했던 것이고 재산분할이냐 상속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재산분할이 가능한가 아닌가의 절박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지난해 대법원은 상대방이 의식불명 상태이더라도 일방의 의사만으로 사실혼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재산분할 청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했다.

법원 앞 여자의 기다림으로 시작되는 소설이 있었다. 기다림의 대상은 남편. 그녀는 마침내(?) 이혼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고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들의 만남에서 그 마침에 이르기까지의 회상으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로 끼어든 작은 소란. 건너편 횡단보도에서의 교통사고. 기다리는 남편은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올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래서 이혼녀가 되려다 미망인이 되고만 여자. 헤어지기 위해 기다리던 이가 영정사진 속에 있고 다시(?) 그의 아내라는 자리에 영구히 고정되어 문상객을 맞는 미망인의 표정이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어야 할까, 미움이 극에 달해서이든 미움마저 고갈된 무심의 경지에서이든 이혼에까지 이르렀던 마음과 가장 가까웠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의 온전한 슬픔과 회오. 예전에는 그런 생각들만 막연히 했던 듯하다.

세 이야기는 결국 모두 같은 거라고, 살아남은 자의 일상이고 슬픔이라고 뭉뚱그린다면 지나친 단순화인 것일까. 더 이상 마음의 일로만 읽히지 않는 지금의 안타까움은 무엇보다도 현실에서 온전히 그 마음들을 헤아리려는 애씀이 되어야 할 것이기에.

 

'사랑=결혼'시대에 우리는…

                                                 [매일춘추 2010.05.07 김계희변호사]

 

‘사랑=결혼’의 등식이 현대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서구 문화사에서 사랑은 12세기만 해도 궁정의 유희에 불과했다. 결혼은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가문간의 결합이었을 뿐 사랑과는 무관했다.

‘사랑=결혼’이라는 낭만적(?) 공식이 엄격할수록 결코 낭만적이라 할 수 없는 ‘이혼’이라는 현실과 더 자주 부딪혀야 한다는 게 이 등식이 지닌 양가성이다. 불확실한 사랑의 토대에 놓인 결혼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정성은 남녀 두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요즈음 이혼 법정에서는 서로 아이를 맡지 않겠다는 부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남편이 휘두른 칼에 몇 번 찔리기까지 한 아내의 이혼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런 남편에게 세 아이를 맡기고 자신만 나오겠다는 대목에 이르면 차마 묻지 않을 수 없다. ‘지 자식은 안 찔러요’ 라는 퉁명스런 대답. 장애가 있는 두 아이는 맡지 않겠다면서 현재 살고 있는 임대주택이 전 재산인 남편을 상대로 재산분할을 청구하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비해 법정 양육비가 많이 올랐다고는 하나 월 30만~40만원을 넘기기 어렵고 그나마 꼬박꼬박 지급되는 경우도 드물다. 지난해 말부터 월급에서 바로 지급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었지만 봉급생활자에게나 해당되는 얘기다. 사교육비를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이다. 그래서인지 영어, 수학, 피아노 등의 학원비를 깨알같이 적어 몇 십 원까지 상세하게 양육비를 청구하는 경우도 본 적이 있으나 실제로는 어림도 없다.

저출산 대책을 고심하던 서울의 한 구청이 아이를 낳으려면 결혼부터 해야 하지 않는가란 생각에서 직접 중매자로 나섰던 일이 있었다. 남녀 50명씩을 모아 1년여에 걸쳐 몇 차례 만남을 주선한 결과 1쌍이 결혼해서 1명의 아이를 출산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그 한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들인 비용과 정성을 생각한다면 태어난 이후의 그 아이에게 우리 사회는 너무 무심한 게 아닐까.

저출산 대책들이 공허한 이유 중 하나는 낳으라고만 하고 정작 태어난 아이의 복리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자(子)의 복리를 최우선하는 방향으로 가족법이 개정되고 있다. 법도 제도도 아직은 다행스럽게도(?)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사랑=결혼’이라는 오늘날의 사회적 합의는 ‘사랑=>결혼’, 다시 ‘결혼=>사랑’이라는 양방향성이 균형 있게 유지된다는 전제에서 이룩된 것일 것이다. ‘사랑=>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열정만큼 ‘결혼=>사랑’에도 동일한 함량의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사랑=결혼’이라는 등식이 지닌 진정한 낭만성인 것은 아닐까. 

 

 

 ☞ 김계희 변호사 프로필

      ·  출생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353번지

       ·  본    관 :  義 城 , 始祖 35代, 文忠公派 (鶴峯 金誠一) 15代

       ·  학    력 :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경    력 :  제49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자치회여성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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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6. 10. 20:00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학봉기념관앞에서 ...........              
김계희변호사님! 光門會에 들어오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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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2010년 5·6월 필진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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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으로 인해 슬픈 4월이었습니다. 그래서였나요, 4월에 웬 비가 그렇게 자주 내리고 날씨는 춥기까지 했는지요. 잔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4월이 가고 5월이 왔습니다. 움츠렸던 봄이 이제 짧은 잔여 기간을 채우겠군요. 나무에도 물이 본격적으로 오를테지요. 햇살이 강한 대구는 여름 같은 봄이 지나가곤 했는데 봄인지 여름인지 애매한 날씨가 찾아올 때입니다.

청년과 같은 계절입니다. 햇살은 따가우면서도 포근하고 바람은 싱그럽고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생기가 넘치는 시간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 이상씩의 고민을 달고 다니더라도 앉아있기보다는 걸어나가 부딪치고 즐기고 활약할 때입니다. 매일춘추 5·6월 필진이 새롭게 찾아갑니다. 좋은 계절에 이들과 함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박월수

▷수필가 ▷2009년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대구 수필사랑문학회 간사

◆추선희

▷수필가·번역가 ▷전 중등 영어 교사 ▷영남대 심리학과 박사과정 ▷번역서 '마음이 지닌 치유의 힘'(공역)  

◆최동욱  

▷주택분양 사업가 ▷전 우방 근무 ▷(주) 대경 대표

◆김계희

▷변호사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제49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자치회 여성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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