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산 윤선도 고택‘녹우당’입구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20m, 둘레 5m의 나무는 고산의 4대조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이 아들의 진사시(進士試) 합격을 기념해 심었다. 종부가 20대째 바뀌어 내려오는 동안 꿋꿋이 잎을 틔웠던 나무는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대한민국 돈은 우리 덕수 이씨 가문이 접수했단다. 100원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고 5000원에는 율곡 할아버지, 5만원에는 신사임당이 계시잖아?" 율곡 이이(1536~1584) 가문의 15대 종부(宗婦) 서경옥(64)씨가 손녀에게 말했다. 그는 '가문의 영광'을 가르칠 때 항상 이 레퍼토리를 쓴다고 했다.
15대 종손(宗孫) 부부는 경기도 일산의 아파트에서 14년째 산다. 율곡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는 이 집이 덕수 이씨 율곡파의 종갓집이다. 해방 후 황해도 해주에 있던 종택(宗宅)에서 가족이 1947년 월남한 후 자리 잡은 곳이다.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이 율곡의 후손이라는 걸 알았어요. 얼결에 종갓집 며느리가 된 거죠. 부모님은 오히려 양반집에 시집 잘 갔다며 좋아하셨어요."
- ▲ 율곡 이이 가문의 15대 종부 서경옥씨. 고종이 하사한 교지(敎旨)는 남으로 내려올 때 신주(神主)와 함께 시아버지가 유일하게 들고 온 것이다. / 박국희 기자
종부 서씨는 "당시 1650㎡(500여평)되는 집은 제2의 창경원이라고 불릴 만큼 큰 한옥이었는데 우리 집이 신문에 나오기에 남편에게 물어봤다"며 "그때 집안의 정체를 처음 알았다"고 했다. 남편 이천용(67)씨는 "명문가 자손이라고 과시하는 듯 보일까 봐 결혼 전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나고 자란 아내는 춘천시청에서 일했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강원도청에서 일했다. 둘은 3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이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사돈 삼자는 집안이 많았다"며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간 것만 수십 차례, 선을 본 것만도 50번은 된다"고 했다.
"결혼할 때 155㎝에 44㎏이었어요.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펑퍼짐해야 애도 잘 낳을 수 있는데, 너무 왜소하다는 이유로도 엄청 반대했어요." 서씨는 "마음고생한 것도 모르고 양반집 며느리 됐다고 좋아하신 부모님이 야속할 때도 많았다"고 했다.
'상봉하솔(上奉下率·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거느림)' '출필곡 반필면(出必告 反必面·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부모를 뵙고 아룀)'
위패와 교지(敎旨)만 들고 월남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르쳤다. "시아버님이 하루를 밖에서 주무시고 와도 온 가족이 나가 큰절을 했어요. 시아버님은 '너는 몰라도 남은 너를 알아본다'며 주의를 줬어요. 매니큐어, 바지, 짧은 머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 1년 후 낳은 첫딸을 시작으로 2년 터울의 딸만 넷을 낳았다. 남편 이씨는 "옆집 색시 데려와 대를 이으라며 '옆 치기'를 하라는 말도 들었다"며 "종갓집에서 종손 못 낳으면 소박맞는다고 했는데 집사람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서씨는 "월급쟁이하는 남편 생활이 뻔히 보이는데 아이를 더 가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며 "4명 모두 대학 졸업시킨 것만도 버거웠다"고 했다. 그는 "45세가 되던 해, 아이를 더는 못 낳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주위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했다.
부부는 요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누구에게 물려줘야 할지 고민이 많다. 종친 중에서 양자를 들이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만 그마저도 걱정이다. "종손이야 도포 입고 와서 절만 하면 되지만 한 달 전부터 제사 음식 준비해야 하는 게 종부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겠어요?"
집에는 갓, 유건(儒巾), 도포, 행전(行纏) 30명 분이 있다. 165㎡(50여평)되는 집이 좁아 가구를 밖으로 끌어내고 부엌 문짝도 떼어낸다. 1년 중 가장 규모가 큰 제사인 율곡의 기일에는 요즘도 50여명이 종갓집을 찾는다. 서씨는 "그중 3분의 1은 율곡학회 학자들이나 교수 같은 타성(他姓)"이라고 했다.
서씨의 네 딸 중 종갓집 며느리가 된 딸은 없다. 서씨는 "애들 스스로가 종갓집에 가식이 많다고 싫어한다"고 했다. 서씨는 "종부는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강릉 율곡제 같은 전통 행사에 갔다 오고 나면 '내가 진짜 종갓집 며느리'라는 생각에 더욱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했다.
禮 | 한복 입고 앉고 서는 법 절하는 법만 100일간 배워 - 고산 윤선도 14대 종부 김은수씨
뜻밖에도 종부(宗婦)는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했다. 조선 중기 문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14대 종부 김은수(70)씨 이야기다. 종손(宗孫)인 남편 윤형식(75)씨와 전남 해남군 윤선도 고택 '녹우당(綠雨堂)'에서 40년 넘게 살아오고 있다. 종갓집 며느리는 "그래도 자식된 도리로서 지켜야 할 원칙은 원칙"이라며 "종부의 직함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못살겠네 진짜, 밤낮으로 손님 때문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씨는 찻물을 끓이고 몸단장을 했다. 지난 21일, 아침부터 남편의 광주서중 동창 5명이 찾아왔다. 종부는 "평생 손님 받는 게 일"이라고 했다. 다과상을 들고 와 한 쪽에 앉았다. 비자강정, 감단자, 다식과 곶감 등 윤씨 가문의 전통 음식과 잘 우려낸 녹차다.
- ▲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고택‘녹우당’에서 40년 넘게 살고 있는 종부 김은수씨는“‘도회지 아가씨’였던 내가 이런 첩첩산중 시골에서 평생 살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했다. / 김영근 기자
이곳 안채에 14대 종손 윤형식씨 부부가 산다. 관광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유일한 장소다. 하루 평균 200~300명, 휴가철에는 하루 최대 1000명까지 찾는다. 사랑채 바로 앞까지 몰려와 "누구 없느냐"고 묻는 통에 종부는 "우리에 갇힌 동물이 따로 없다"고 했다.
종부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김해 김씨 김수로왕의 18대손 방계(傍系) 집안으로 분위기가 엄했다. 하이힐을 신으면 아버지가 "톱으로 뒷굽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씨는 "내가 38년생 호랑이 띠인데 기가 세다고 호적을 늦게 올려 토끼띠가 됐을 정도"라고 했다.
김씨는 "엄한 집안 분위기에 대한 반발 심리 탓에 성격은 오히려 자유분방했다"며 "4·19 때도 앞장섰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세종대의 전신(前身)인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교육과를 나왔다. 수도여중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26세 되던 해 친오빠의 친구였던 종손 윤씨와 선을 봤다. 종손이라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지만 집안의 성화를 이길 수 없어 만난 지 20일 만에 결혼했다.
"시골에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근데 온양 온천,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부산 친정에 하루 들르고는 해남으로 내려가는 거야. 눈앞이 깜깜했지."
해남읍 연동리에는 지금도 버스가 하루 5번밖에 없다. 김씨는 "가도 가도 끝없는 첩첩산중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당시 집안에는 소작인만 19세대였다. 김씨는 "서울까지 우리 땅을 안 밟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다"며 "논밭만 수백만평인데 일꾼들 밥 해주는 게 모두 내 일이었다"고 했다.
한복 입고 앉고 서는 법, 절하는 법만 100일 동안 배웠다. 각종 제사만 1년에 30여 차례였다. 큰 제사 때는 일가 어른만 150여명이 왔다. 지금도 안채 부엌에는 대형 냉장고가 4개, 전기밥솥이 2개, 커피포트가 5개 있다. 밥그릇과 접시는 음식점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집성촌인 해남읍 연동리에는 윤씨 친인척 50여명이 산다. 종부의 낙은 저녁마다 아낙끼리 모여 마을 한바퀴를 산책하는 것이다. 김씨는 "자유가 없는 것이 종부의 삶 중 가장 힘든 점"이라며 "알게 모르게 억눌려 왔던 답답한 것들을 하루 한 시간의 산책으로 풀어왔다"고 했다. 채마밭에 풀 매러 나갈 때도 사람들이 "종부 아니냐"고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그냥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댄다"고 했다.
김씨는 제사상을 간소화하고 따로 지내왔던 부부의 제사를 합쳐 횟수를 줄이는 등 15대 종부가 될 며느리의 '앞길'을 위해 노력했다. 아들이 종손인 걸 알면서도 연애결혼을 한 며느리가 기특하다.
"딸한테도 못하는 비밀 얘기를 며느리하고는 해. 종손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한다고 하지만 에이, 난 다시는 안 할래."
傳 | 가문의 전통이 곧 명품 종가도 소득 사업 해야 - 보성 선씨 21대 종부 김정옥씨
"5만원도 말이 안 되는데 500만원이라니요."
2006년 4월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에서 보성 선씨 21대 종부 김정옥(金貞玉·57)씨의 간장이 500만원에 팔렸다. 충북 보은군 장안면 속리산 남쪽에는 보성 선씨의 대종택인 선병국 가옥이 있다.
보성 선씨는 고려 때부터의 명문가다. 고려 말 여진 정벌, 왜구 소탕에 참여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99칸 대종택인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보은 선병국 가옥을 찾았다. 32년간 종부로 살아온 김정옥씨는 "하루에도 백여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사생활도 없다"고 했다.
- ▲ "대량생산이요?말도안되죠 저는 우리집안 전통대로 장(醬)을 만들거예 요" 김정옥씨는 사업가보다 보성선씨 21대종부로 불리길 원했다
- / 김성민 기자
김씨는 1977년 25세 꽃다운 나이에 중매 결혼했다. 그는 종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결혼은 필연인지 그는 보성 선씨 종갓집에 시집을 왔다. 김씨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한 달에 2번은 제사와 생신 등의 행사가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찾아왔다.
김씨는 결혼 후 7년간 동네 어귀도 나가보지 못했다. 그는 "부엌에 싱크대를 설치했던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농촌 지도소 생활개선프로그램 중 현대식 싱크대를 무료로 설치해 주는 것이 있었다. 철없던 새댁은 무료로 최신식을 달아준다는 말에 어른들의 허락없이 신청을 했다.
김씨는 "시아버지께서 '집구석이 망해간다'며 불같이 화를 내셨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좋아하셨다"고 했다. 그는 또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아버님이 '양년 연습한다'고 화를 내셨지만 나중에는 돌아가실 때까지 커피만 드셨다"고 말했다.
그는 딸 2과 아들 1명을 자식으로 뒀다. 지금 종손인 선민혁(62)씨가 양자 종손이라 집안에서 아들을 더욱 바랐다. 김씨는 "어른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딸만 연달아 낳았을 때는 많이 속상했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김씨가 결혼 5년 만에 아들을 낳자 잔치가 벌어졌다. 그 잔치를 보며 종부는 울었다.
김씨는 사기죄로 구속된 이순신 장군의 종부가 "참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종가를 지키려면 알게 모르게 금전적인 것이 많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는 "종택과 대지는 종손과 종부의 것이 아니라 문중의 것"이라며 "조상을 잘 만나 우리가 좋은 집에서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선씨 가문의 덧간장은 김진흥 한국농어업예술위원회 박사가 얻어간 간장 1L가 식품전에서 '대박'을 치면서 알려졌다. 선씨 가문 21대 종부 김씨는 스타가 됐다. 심지어 보은군수까지 찾아와 보은 특산품인 대추와 황토를 이용한 '기능성 장' 제조를 요청했다. 그는 용기를 냈고 기능성 장(醬)을 판매하는 '아당골'의 대표가 됐다.
그는 보은군과 문화재청의 협력을 받아 선씨 가문의 장류 개발과 관광상품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21일 장 담그기 체험행사를 벌였고, 다음 달 20일에는 장아찌 체험행사를 열 예정이다. 김씨는 "아들은 '왜 자꾸 일을 벌이냐'고 하지만 가문을 알리고 좋은 전통을 공유하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문중 어른들은 종부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매년 봄에는 84세 숙부가 보약을 보내오는 등 가문의 종부 챙기기는 눈물겹다. 김씨는 "한번은 독일에 있는 친척이 '가문을 널리 알려줘서 고맙다'는 전화를 해왔다"며 "문중 어르신들이 반대하시면 절대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고시원도 운영한다. 안채 맞은편 20칸의 방에 고시생 10여명이 생활한다. 벌써 '고시원 어머니'가 된 지 18년째다. 김씨는 "옛날 선씨 종가에서 무료 교육을 펼쳤던 관선정이 있었다"며 "일이 늘어나 하기 싫었지만 가문의 전통을 잇는다는 생각에서 학생들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의 종가와 종부는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가문의 전통을 보호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종가도 소득 사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