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이것이 궁금하다] 宗家의 삶
  • 입력 : 2009.05.30 03:25 / 수정 : 2009.05.30 15:51

 

4명의 宗婦가 말하는 宗家의 삶

충무공 이순신의 15대 종부 최모(53)씨가 사기 등의 혐의로 지난 14일 검찰에 구속됐다. 종부(宗婦)란 종손의 배우자로 종가의 맏며느리다.
종부는 결혼 후 아들을 출산하여 가문의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종부는 가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에 고달프다.
종부로서의 삶을 들어보기 위해 우리나라의 네 명문가(家) 종부들을 만났다.


禪 | 내 욕망 체념해야 마음 편안해져 - 안동 학봉家 15대 종부 이점숙(李點淑)씨

경북 안동 시내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서후면 금계리에는 경북도 기념물 제112호 의성 김씨 학봉 종택이 있다.

이 종택은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꼽히는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의성 김씨 학봉가(家)는 독립운동으로도 유명하다.
후손 중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 훈장을 받은 사람이 11명이다.
13대 종손 김용환은 재산을 팔아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
이 집 유물 전시관에는 72종의 유물 1만5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그중 503점이 국가 지정 보물이다
.

         
        ▲ 종부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었이냐고 묻자 이정숙씨는 "책임감" 이라고 했다.
            그의 달력은 매달 제사와 집안 일정으로 빽빽하다    / 김성민 기자


470여년의 전통을 가진 가문의 15대 종부 이점숙(李點淑·69)씨는 이틀 후인 22일에 있을 시조 학봉 선생의 제사 준비로 몹시 바빴다.
이씨는 중매로 의성 김씨 15대 종손 김종길(68)씨를 만났다.
퇴계 이황 16대 손녀인 이씨(15대종손 李東恩翁의 따님)는 종부로 시집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매일 제사를 지내는 퇴계 이황 15대 종부였던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보이더군요.
기왕이면 피하고 싶었어요. " 그는 아버지, 어머니께 종부로 시집가기 싫다고 졸랐다.
부모님은 그를 이해했지만 할아버지의 뜻은 달랐다.
이씨는 1966년에 학봉가 15대 종부가 됐다.

그는 결혼 후
부산과 서울에서 살았다.
차(次)종부로서 이씨는 한 달에 2~3번 종택에 내려와 시어머니와 제사를 준비하고 집안 대소사를 챙겼다.  이씨는 "제사와 집안 어른들 생신 등을 챙기다 보면 한 달에 보름 정도는 안동에 머물러야 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퇴계 종가와 학봉가는 가풍이 비슷했다. 그는 "퇴계 종가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학봉가 종부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종가에서 생활해 매일 제사 지내고 손님 대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딸만 셋을 낳았다.  혼인 후 20년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다. 학봉가는 대신 양자를 들였다. 현 종손의 작은 동생의 아들인 김형호(29)씨다. 그는 "솔직히 말하면 그에게 종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학봉가는 고정 제사만 13번을 드린다.  가문의 시조인 학봉 제사와 4대조 조상,  2년 전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 14대 종손 김시인의 제사를 포함한다.
이씨는 "고정적인 제사가 13번이지만 실질적인 제사 준비는 1년 내내 한다"고 했다.

이씨의 남편인 15대 종손 김종길씨는 성공한 CEO였다.   
삼보컴퓨터 대표이사, 컴퓨터 산업협의회 초대회장, 나래이동통신 대표이사, 두루넷 대표이사 등을 거쳤고
2001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2007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안동으로 내려와 종택을 지키고 있다.

이씨는 2년 전 안동에 내려오면서 좋아하던 골프와 친구들과의 모임을 포기했다. 그녀는 "종부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욕망을 체념해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이씨는 달력을 받으면 제일 먼저 제사 일정을 달력에 써 넣는다.
그 후에 집안 어른 생신을 체크하고 다른 일정을 표시한다.

그는 이순신 종부 사건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씨는 "종부는 죽으면 죽었지 종가의 재산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며  "종부는 종가를 관리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이씨는 "학봉 종택을 한번도 내 소유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이씨는 "지금 우리들이 하는 모든 것을 젊은 종부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는 퇴계 이황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종갓집에서 살아온 사람인데도 내 것을 포기하기 힘들었다"며 "요즘 같이 개성 강한 젊은 여성들이 감당하기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어디서 '종부라서 참 수고가 많다'는 이야기 듣는 것이 가장 싫어요. 종부라고 어디서 대우를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요. 그냥 학봉가 종부로서 가문에 피해가 안 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시아버지 3년 탈상 중이라 아직 흰 한복을 입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결연했다.



고산 윤선도 고택‘녹우당’입구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20m, 둘레 5m의 나무는 고산의 4대조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이 아들의 진사시(進士試) 합격을 기념해 심었다. 종부가 20대째 바뀌어 내려오는 동안 꿋꿋이 잎을 틔웠던 나무는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忍 | 종가의 체통… 참고 또 참아야 - 율곡 이이 15대 종부 서경옥씨

"대한민국 돈은 우리 덕수 이씨 가문이 접수했단다. 100원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고 5000원에는 율곡 할아버지, 5만원에는 신사임당이 계시잖아?" 율곡 이이(1536~1584) 가문의 15대 종부(宗婦) 서경옥(64)씨가 손녀에게 말했다. 그는 '가문의 영광'을 가르칠 때 항상 이 레퍼토리를 쓴다고 했다.

15대 종손(宗孫) 부부는 경기도 일산의 아파트에서 14년째 산다. 율곡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는 이 집이 덕수 이씨 율곡파의 종갓집이다. 해방 후 황해도 해주에 있던 종택(宗宅)에서 가족이 1947년 월남한 후 자리 잡은 곳이다.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이 율곡의 후손이라는 걸 알았어요. 얼결에 종갓집 며느리가 된 거죠. 부모님은 오히려 양반집에 시집 잘 갔다며 좋아하셨어요."

율곡 이이 가문의 15대 종부 서경옥씨. 고종이 하사한 교지(敎旨)는 남으로 내려올 때 신주(神主)와 함께 시아버지가 유일하게 들고 온 것이다. / 박국희 기자
율곡의 후손은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 사당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60년대 친척의 사기 행각으로 법정 싸움까지 가는 끝에 홍파동 집이 헐렸다. 지금의 구세군회관이 바로 그 자리다. 율곡의 후손은 미아리와 구로구 개봉동을 거쳐 일산에 자리를 잡았다.

종부 서씨는 "당시 1650㎡(500여평)되는 집은 제2의 창경원이라고 불릴 만큼 큰 한옥이었는데 우리 집이 신문에 나오기에 남편에게 물어봤다"며 "그때 집안의 정체를 처음 알았다"고 했다. 남편 이천용(67)씨는 "명문가 자손이라고 과시하는 듯 보일까 봐 결혼 전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나고 자란 아내는 춘천시청에서 일했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강원도청에서 일했다. 둘은 3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이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사돈 삼자는 집안이 많았다"며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간 것만 수십 차례, 선을 본 것만도 50번은 된다"고 했다.

"결혼할 때 155㎝에 44㎏이었어요.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펑퍼짐해야 애도 잘 낳을 수 있는데, 너무 왜소하다는 이유로도 엄청 반대했어요." 서씨는 "마음고생한 것도 모르고 양반집 며느리 됐다고 좋아하신 부모님이 야속할 때도 많았다"고 했다.

'상봉하솔(上奉下率·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거느림)' '출필곡 반필면(出必告 反必面·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부모를 뵙고 아룀)'

위패와 교지(敎旨)만 들고 월남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르쳤다. "시아버님이 하루를 밖에서 주무시고 와도 온 가족이 나가 큰절을 했어요. 시아버님은 '너는 몰라도 남은 너를 알아본다'며 주의를 줬어요. 매니큐어, 바지, 짧은 머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 1년 후 낳은 첫딸을 시작으로 2년 터울의 딸만 넷을 낳았다. 남편 이씨는 "옆집 색시 데려와 대를 이으라며 '옆 치기'를 하라는 말도 들었다"며 "종갓집에서 종손 못 낳으면 소박맞는다고 했는데 집사람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서씨는 "월급쟁이하는 남편 생활이 뻔히 보이는데 아이를 더 가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며 "4명 모두 대학 졸업시킨 것만도 버거웠다"고 했다. 그는 "45세가 되던 해, 아이를 더는 못 낳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주위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했다.

부부는 요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누구에게 물려줘야 할지 고민이 많다. 종친 중에서 양자를 들이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만 그마저도 걱정이다. "종손이야 도포 입고 와서 절만 하면 되지만 한 달 전부터 제사 음식 준비해야 하는 게 종부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겠어요?"

집에는 갓, 유건(儒巾), 도포, 행전(行纏) 30명 분이 있다. 165㎡(50여평)되는 집이 좁아 가구를 밖으로 끌어내고 부엌 문짝도 떼어낸다. 1년 중 가장 규모가 큰 제사인 율곡의 기일에는 요즘도 50여명이 종갓집을 찾는다. 서씨는 "그중 3분의 1은 율곡학회 학자들이나 교수 같은 타성(他姓)"이라고 했다.

서씨의 네 딸 중 종갓집 며느리가 된 딸은 없다. 서씨는 "애들 스스로가 종갓집에 가식이 많다고 싫어한다"고 했다. 서씨는 "종부는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강릉 율곡제 같은 전통 행사에 갔다 오고 나면 '내가 진짜 종갓집 며느리'라는 생각에 더욱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했다.


禮 | 한복 입고 앉고 서는 법 절하는 법만 100일간 배워 - 고산 윤선도 14대 종부 김은수씨

뜻밖에도 종부(宗婦)는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했다. 조선 중기 문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14대 종부 김은수(70)씨 이야기다. 종손(宗孫)인 남편 윤형식(75)씨와 전남 해남군 윤선도 고택 '녹우당(綠雨堂)'에서 40년 넘게 살아오고 있다. 종갓집 며느리는 "그래도 자식된 도리로서 지켜야 할 원칙은 원칙"이라며 "종부의 직함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못살겠네 진짜, 밤낮으로 손님 때문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씨는 찻물을 끓이고 몸단장을 했다. 지난 21일, 아침부터 남편의 광주서중 동창 5명이 찾아왔다. 종부는 "평생 손님 받는 게 일"이라고 했다. 다과상을 들고 와 한 쪽에 앉았다. 비자강정, 감단자, 다식과 곶감 등 윤씨 가문의 전통 음식과 잘 우려낸 녹차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고택‘녹우당’에서 40년 넘게 살고 있는 종부 김은수씨는“‘도회지 아가씨’였던 내가 이런 첩첩산중 시골에서 평생 살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했다. / 김영근 기자
해남 윤씨 일가가 20대째 살고 있는 윤선도 고택 녹우당. 3만3000㎡(1만평)의 55칸짜리 녹우당에는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 등 일가 유물 4600여점이 전시돼 있다. 1968년 사적(史跡)으로 지정된 이후 남도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관광 명소가 됐다.

이곳 안채에 14대 종손 윤형식씨 부부가 산다. 관광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유일한 장소다. 하루 평균 200~300명, 휴가철에는 하루 최대 1000명까지 찾는다. 사랑채 바로 앞까지 몰려와 "누구 없느냐"고 묻는 통에 종부는 "우리에 갇힌 동물이 따로 없다"고 했다.

종부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김해 김씨 김수로왕의 18대손 방계(傍系) 집안으로 분위기가 엄했다. 하이힐을 신으면 아버지가 "톱으로 뒷굽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씨는 "내가 38년생 호랑이 띠인데 기가 세다고 호적을 늦게 올려 토끼띠가 됐을 정도"라고 했다.

김씨는 "엄한 집안 분위기에 대한 반발 심리 탓에 성격은 오히려 자유분방했다"며 "4·19 때도 앞장섰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세종대의 전신(前身)인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교육과를 나왔다. 수도여중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26세 되던 해 친오빠의 친구였던 종손 윤씨와 선을 봤다. 종손이라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지만 집안의 성화를 이길 수 없어 만난 지 20일 만에 결혼했다.

"시골에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근데 온양 온천,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부산 친정에 하루 들르고는 해남으로 내려가는 거야. 눈앞이 깜깜했지."

해남읍 연동리에는 지금도 버스가 하루 5번밖에 없다. 김씨는 "가도 가도 끝없는 첩첩산중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당시 집안에는 소작인만 19세대였다. 김씨는 "서울까지 우리 땅을 안 밟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다"며 "논밭만 수백만평인데 일꾼들 밥 해주는 게 모두 내 일이었다"고 했다.

한복 입고 앉고 서는 법, 절하는 법만 100일 동안 배웠다. 각종 제사만 1년에 30여 차례였다. 큰 제사 때는 일가 어른만 150여명이 왔다. 지금도 안채 부엌에는 대형 냉장고가 4개, 전기밥솥이 2개, 커피포트가 5개 있다. 밥그릇과 접시는 음식점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집성촌인 해남읍 연동리에는 윤씨 친인척 50여명이 산다. 종부의 낙은 저녁마다 아낙끼리 모여 마을 한바퀴를 산책하는 것이다. 김씨는 "자유가 없는 것이 종부의 삶 중 가장 힘든 점"이라며 "알게 모르게 억눌려 왔던 답답한 것들을 하루 한 시간의 산책으로 풀어왔다"고 했다. 채마밭에 풀 매러 나갈 때도 사람들이 "종부 아니냐"고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그냥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댄다"고 했다.

김씨는 제사상을 간소화하고 따로 지내왔던 부부의 제사를 합쳐 횟수를 줄이는 등 15대 종부가 될 며느리의 '앞길'을 위해 노력했다. 아들이 종손인 걸 알면서도 연애결혼을 한 며느리가 기특하다.

"딸한테도 못하는 비밀 얘기를 며느리하고는 해. 종손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한다고 하지만 에이, 난 다시는 안 할래."


傳 | 가문의 전통이 곧 명품 종가도 소득 사업 해야 - 보성 선씨 21대 종부 김정옥씨

"5만원도 말이 안 되는데 500만원이라니요."

2006년 4월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에서 보성 선씨 21대 종부 김정옥(金貞玉·57)씨의 간장이 500만원에 팔렸다. 충북 보은군 장안면 속리산 남쪽에는 보성 선씨의 대종택인 선병국 가옥이 있다.

보성 선씨는 고려 때부터의 명문가다. 고려 말 여진 정벌, 왜구 소탕에 참여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99칸 대종택인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보은 선병국 가옥을 찾았다. 32년간 종부로 살아온 김정옥씨는 "하루에도 백여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사생활도 없다"고 했다.

 "대량생산이요?말도안되죠 저는 우리집안 전통대로 장(醬)을 만들거예   요" 김정옥씨는 사업가보다 보성선씨 21대종부로 불리길 원했다
   / 김성민 기자

김씨는 1977년 25세 꽃다운 나이에 중매 결혼했다. 그는 종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결혼은 필연인지 그는 보성 선씨 종갓집에 시집을 왔다. 김씨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한 달에 2번은 제사와 생신 등의 행사가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찾아왔다.

김씨는 결혼 후 7년간 동네 어귀도 나가보지 못했다. 그는 "부엌에 싱크대를 설치했던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농촌 지도소 생활개선프로그램 중 현대식 싱크대를 무료로 설치해 주는 것이 있었다. 철없던 새댁은 무료로 최신식을 달아준다는 말에 어른들의 허락없이 신청을 했다.

김씨는 "시아버지께서 '집구석이 망해간다'며 불같이 화를 내셨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좋아하셨다"고 했다. 그는 또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아버님이 '양년 연습한다'고 화를 내셨지만 나중에는 돌아가실 때까지 커피만 드셨다"고 말했다.

그는 딸 2과 아들 1명을 자식으로 뒀다. 지금 종손인 선민혁(62)씨가 양자 종손이라 집안에서 아들을 더욱 바랐다. 김씨는 "어른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딸만 연달아 낳았을 때는 많이 속상했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김씨가 결혼 5년 만에 아들을 낳자 잔치가 벌어졌다. 그 잔치를 보며 종부는 울었다.

김씨는 사기죄로 구속된 이순신 장군의 종부가 "참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종가를 지키려면 알게 모르게 금전적인 것이 많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는 "종택과 대지는 종손과 종부의 것이 아니라 문중의 것"이라며 "조상을 잘 만나 우리가 좋은 집에서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선씨 가문의 덧간장은 김진흥 한국농어업예술위원회 박사가 얻어간 간장 1L가 식품전에서 '대박'을 치면서 알려졌다. 선씨 가문 21대 종부 김씨는 스타가 됐다. 심지어 보은군수까지 찾아와 보은 특산품인 대추와 황토를 이용한 '기능성 장' 제조를 요청했다. 그는 용기를 냈고 기능성 장(醬)을 판매하는 '아당골'의 대표가 됐다.

그는 보은군과 문화재청의 협력을 받아 선씨 가문의 장류 개발과 관광상품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21일 장 담그기 체험행사를 벌였고, 다음 달 20일에는 장아찌 체험행사를 열 예정이다. 김씨는 "아들은 '왜 자꾸 일을 벌이냐'고 하지만 가문을 알리고 좋은 전통을 공유하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문중 어른들은 종부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매년 봄에는 84세 숙부가 보약을 보내오는 등 가문의 종부 챙기기는 눈물겹다. 김씨는 "한번은 독일에 있는 친척이 '가문을 널리 알려줘서 고맙다'는 전화를 해왔다"며 "문중 어르신들이 반대하시면 절대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고시원도 운영한다. 안채 맞은편 20칸의 방에 고시생 10여명이 생활한다. 벌써 '고시원 어머니'가 된 지 18년째다. 김씨는 "옛날 선씨 종가에서 무료 교육을 펼쳤던 관선정이 있었다"며 "일이 늘어나 하기 싫었지만 가문의 전통을 잇는다는 생각에서 학생들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의 종가와 종부는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가문의 전통을 보호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종가도 소득 사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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