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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답변질문 전에 게시판 하단의 파란색 글을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등을 활용하여 답변한 내용은 댓글을 생략하였습니다. 계파와 대수, 항렬자 등의 유사한 질문은 이미 답변이 되어 있을수도 있으니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010-9860-5333 안녕하십니까?
저는 문학공(정민공)파 31세(30대)손 김상래라고 합니다. 전북 정읍생이고..현재는 서울에 있습니다. 항렬과 관련한 운영자님의 답변글들을 보면 목화토금수 오행기운을 바탕으로, 30세(金)- 31세(水) - 32세(木) - 33세(火)-34세(土) - 35세(金)......이렇게 설명을 하셨더라구요.(아래 그림에서 처럼) 현재 대동보를 가지고 있구요. 641페이지에 아버지 30세 요자락자, 저는 31세손 相來로 정확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대동보에서는 29세(金)- 30세(水) - 31세(木) - 32세(火)-33세(土) - 34세(金) 순으로 되어있고 제가 木자 항렬이니 31세인것이구요. 혹시 제가 가진 대동보에 代를 世로 잘못 표기한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운영자님께서 世를 代로 오해하신것은 아니신지요? 아니면 제가 대와 세를 잘못알고 있는건가요? 하지만... 제가 지금 헷갈리는것은요. 제가 가지고있는 대동보와 운영자님의 대동보(아래 그림)와는분명 1세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요? 아래 그림의 계산으로 하면 운영자님의 말씀이 맞는것이지요. 제가 32세손이 되는거구요. 제가 가지고있는 대동보로 보면 제가 31세손으로 되어있는데 .... 혹여 제가 가지고있는 대동보가 잘못된것인지요? 가승을 만들어 이번 추석에는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는데....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혹시 답변이 가능하다면 아래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gocine@snu.ac.kr 연락처 016-650-0953, 02-880-1476 감사합니다. ![]() 선대 (부, 조부, 증조부 등)의 諱字(이름)과 살았던 곳(고향)을 알기 위해서는 질문자의 읍.면 동사무소에 가서 제적부를 발급 받아 보시면 국가에서 호적을 만든 이후의 해당 조상분들의 "인적사항과 출생지" 등을 쉽게 확인 하실수 있습니다.(세거지,항렬자,가계도를 찾기 위함) 그러면 이를 단서로 "의성김씨 대동보"를 보고 이름과 대조하여 일일이 찾아야 하며 제적부 상의 이름이 족보의 항렬자로 되어있지 않거나 몇 대손, 어느 파인지 모른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문의 하실 때에 쓰신 실낱같은 자료도 많은 힘이 됩니다) 질문을 하실 때에는 가능한대로 많은 내용을 알려 주셔야 찾을 범위가 줄어 들기에 신속히 찾을수 있으며 정확성을 기대 할수 있습니다. 뿌리를 찾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이럴 것이다?"라는 대답은 자칫 엄청난 오류를 드리게 되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질문내용이 부족하거나,답변에 필요한 재확인을 할 필요가 있을때를 대비해 회원 가입시에 연락처는 꼭 기록해 주세요. 운영자는 함부로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에는 문자메시지를 이용합니다.때로는 메일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각종 포털사이트의 검색으로 찾아오신 손님들께서도 "의성김씨"에 관련한 질문을 하시면 성심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
김상래 종친님!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종친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중
대동보와 저가 김봉수 종친이 질문에 답변한 항렬자와 世數가 상이하다고 하였는데 저도 구체적인것은 알수 없으나 생각하건데
우리나라 족보문화가 조선중엽부터 활성화 되여 족보를 만들당시에 조상을 찾지 못하거나 누락 되여 그후에 족보를 만들면서
항렬자와 世數가 차이가 나는것을 그대로 내려온것 갔습니다.
저희 족보도 김상래 종친님께서 질문시 올려놓은 족보와 똑같습니다. 상이하더라도 세수되로 항열자를 맞추어 사용하면 될것
갔습니다.
☞ 참고로 18번 김광명 종친님께서 질문에 답변한 자료 일부를 복사해서 올립니다.
의성김씨는 항렬자를 오행의 순서되로 하고 있습니다.
오행은 우주만물을 이루고 있는 다섯가지 원소 즉 金 , 水 , 木 , 火 , 土 를 말하는데
항렬은 같은 혈족간 직계에서 갈라져나간 혈통 사이의 대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일족간 계촌(系寸)을 알수있도록
만들어 놓은 의성김씨의 약속 입니다
후손으로 태어나면 항렬자로 이름을 짓는것은 선조에 대한 약속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래 항렬자를 景泗流芳에서 발췌 옮기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의성김씨 항렬자(31세∼44세)
- 31세(水항렬) : 락(洛) , 영(永) , 호(浩) , 영(泳) , 연(淵) , 한(漢)
- 32세(木항렬) : 모(模) , 병(秉) , 동(東) , 식(植) , 림(林) , 상(相)
- 33세(火항렬) : 환(煥) , 형(衡) , 대(大) , 섭(燮) , 창(昌) , 로(魯)
- 34세(土항렬) : 시(時) , 규(奎) , 규(逵) , 재(在) , 성(聲) , 중(重)
- 35세(金항렬) : 종(鐘) , 호(鎬) , 현(鉉) , 용(鏞) , 수(銖) , 선(善)
- 36세(水항렬) : 수(洙) , 원(源) , 택(澤) , 태(泰) , 순(淳) , 하(河)
- 37세(木항렬) : 권(權) , 목(穆) , 근(根) , 래(來) , 직(稷) , 영(榮)
- 38세(火항렬) : 헌(憲) , 엽(燁) , 형(炯) , 훈(勳) , 희(熙) , 덕(悳)
- 39세(土항렬) : 규(圭) , 혁(赫) , 각(珏) , 주(周) , 재(載) , 은(垠)
- 40세(金항렬) : 건(鍵) , 옥(鈺) , 일(鎰) , 전(銓) , 련(鍊)
- 41세(水항렬) : 용(溶) , 제(濟) , 해(海) , 준(浚) , 홍(洪)
- 42세(木항렬) : 병(柄) , 정(楨) , 화(和) , 수(秀) , 빈(彬)
- 43세(火항렬) : 영(榮) , 병(炳) , 엽(燁) , 문(文) , 도(道)
- 44세(土항렬) : 건(建) , 배(培) , 균(均) , 달(達) , 중(中)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소재 좌사윤 태권(台權)선조와 아드님이신 장남 전서공 거두(居斗 : 안동시 남후면 박일동 소재),
차남 문학공 거익(居翼 : 부여읍 중정리 소재)) 세부자분 약력 및 산소 전경을 올립니다.
죽산재 좌사윤 태권(左司尹 台權)선조와 두아드님이신 전서공 거두(典書公 居斗) 문학공 거익(文學公 居翼) 略史
☞ 김태권(金台權, 의성김씨 12세 )
벼슬이 고려봉익대부(奉翊大夫, 從2品) 문예부 좌사윤(文睿府 左司尹)으로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12년 1360. 9
월에 홍건적(紅巾賊)이 2차 20만명 침입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蒙塵) 하였다가 1362. 1월에
반격하여 호가 환도중(扈駕 還都中) 김용(金鏞, 都僉議府 : 從三品)이 충선왕(忠宣王) 3자 덕흥군(德興君)을 옹립
한 후 역란(逆亂)을 일으켜 개풍군 적덕산 흥왕사(開豊郡 積德山 興王寺)에서 왕을 호위하다가 순절(殉節)하여
고려조(高麗朝)에서 경기도 죽산 장광촌에 예장(禮葬 : 국가에서 禮儀를 갖추에 葬禮를 치루는 國葬) 하였으며 위전
(位田) 30만평을 사패(賜牌)함
배위 안동김씨는 판관(判官) 승고(承古)의 따님으로 일찍 돌아가셨으며 부군과 합폄(合貶 : 合葬)하였으며
후배위 竹山朴氏는 판서(判書) 인룡(仁龍)의 따님으로 부군묘 2∼3보 뒤에 모셨다
좌사윤공의 묘를 중간에 실전(失傳) 하였으나, 8대손 학봉(鶴峯)선조분 3형제(藥峯,南嶽)가 한양을 가다가 죽산
부근 에서 하룻밤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는데 학봉선조 꿈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에 수염이 한자나 되는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너의 선조인데 어찌 너희들은 조상을 찾지 않느냐고 꾸짖어 깜짝놀라서 깨어보니 꿈이
었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였다 이상하게도 두 형제분들도 일어나서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여 그 이튼
날 수소문하여 좌사윤공의 산소를 찾아 본 바 외손(外孫)인 辛氏(좌사윤 둘째따님 辛元生에 출가) 들이 오랫동안
산소를 수호(守護) 해 내려온 사실을 알고 학봉선조께서 외손들과 상의하여 선조(宣祖) 14년 1581년 비문(碑文)
을 지어 묘비(墓碑)를 세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래 묘비 사진 참조)
2男 2女를 두셨으니
맏아드님은 거두(居斗)로 皇비(女+比 : 죽은 先代의 皇后) 안동김씨께서 고려충숙왕(忠肅王) 8년 1339년(己卯年)에
낳으셨으니 벼슬이 고려 봉익대부 공조전서(奉翊大夫종2품, 工曹典書)로 경주부목사(慶州府牧使)재임시 삼국사기
(三國史記)를 중간(重刊) 하셨고 그 발문(跋文)을 지으신바 있다.
배위(配位) 문화류씨(文化柳氏)는 대언(代言) 총(總)의 따님이시고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문정공(文正公)
경(璥)의 현손(玄孫)이시다. 아드님 한분을 두셨으니 진례도 만호공(進禮島 萬戶公) 천(水+存)이시다.
전서공(典書公)께서는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져감을 보시고 만년에 안동으로 내려오셔서 풍산현(豊山縣)
에 살으셨으니 자손이 이때부터 안동 사람이 되었다.
墓所는 安東府 南後面 朴日洞 午向으로 계시다.
그러나
중간에 묘소를 실전(失傳) 하여 설단(設壇)으로 제사(祭祀)를 모셨으나 숙종(肅宗) 15년 1689년(己巳年)부터 지석
(誌石)을 찾기 시작하여 몇해뒤 묘소를 확인하고 영조(英祖) 7년 1731. 10월(辛亥年)에 12代孫 제산(霽山) 성탁공
(聖鐸公)께서 지으신 묘표(墓表)를 가지고 12代孫 세일(世鎰)공과 우계(雨溪) 명석(命錫)공께서 주장하시어 비석
(碑石)을 세우셨다.
따님 두분은 이중귀(李仲貴) , 신원생(辛元生)에 出家 하였다.
둘째 아드님 거익(居翼)은 고려 정당문학(高麗 政堂文學 : 中書門下省의 從三品 官職)으로 當代의 대석학(大碩學)
목은 이색(牧隱 李嗇) 선생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사돈(査頓)이 되었으며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는 잠저(潛邸 : 임금이 되기전 살던집)에서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로 이태조가 조선왕조
를 세워 퇴암(退庵 :호)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제수(除授 : 왕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임명하거나 승진 시키는 것)
하였으나 출사(出仕)를 하지않코 扶餘 半月城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선생이 자손들에게 유훈(遺訓)하시기를 나는 고려의 臣下이지 조선의 臣下가 아니다며 비문에 고려의 벼슬을
쓰고 조선의 벼슬을 쓰지 말도록 하였으나 , 후일 자손들이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앞에『右議政』
비(碑) 를 세웠더니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어 벼락(落雷 : 락뢰)이 비신(碑身)을 내리쳐 두동강을
내는 이변(異變)이 일어나 그 후 『高麗 政堂文學』으로 비를 새로이 세워 현존 하고 있다.
(아래 묘비 사진 참조)
2009 . 7. 2 濟德 삼가 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장광촌 죽산재(竹山齋) 전경
좌사윤 태권(左司尹 台權)선조 산소전경 , 배위 안동김씨는 합폄, 후배위 죽산박씨는 뒤편 산소임
비석 : 오른쪽 부터 1581년 학봉선조가 묘소를 찾아 세운 비석, 오른쪽 두번째 1831.3월에 16대손 택운(澤雲)등 3인이 1차개갈. 세번째 비석은 1973.10월에 18대손 진옥(鎭玉)등 23인이 2차 개갈한 비석이며 네번째는 비석 3座를 모아서 세웠다는 내용임
1581년도 학봉선조가 세운비 전면모습
1581년도 학봉선조가 세운비 후면모습
신사년 학봉선조가 비문을 지으신 위 비석 초비 원문내용
公諱台權義城人 高麗太子 詹事 諱 龍庇 曾孫 麗季 達官 初娶金氏 再娶朴氏 生二子二女 居斗工曹典書 居翼成均樂正
女適李仲貴 辛元生 內外雲仍世有무(月+無)仕 今牧使克一 佐郞復一 기(旣+旦=및기)不肖承餘慶又첨(添-水)
朝列 而형(瑩-玉+土=무덤형)墓崩頹莫伸追遠之懷 幸因辛公 後裔之居墓下 得以修墓立石 嗚呼子孫尙永泯哉
萬歷九年 辛巳 8代孫朝散大夫議政府舍人兼 春秋館編修館 知製敎誠一謹撰 (※ 컴퓨터 한자가 없는자는 조합)
《해석》
공의 휘는 태권이요 의성인으로 고려 태자첨사 휘 용비의 증손으로 려말에 높은 벼슬의 직에 오르셨다.
첫 배위는 김씨요 후배위는 박씨 이신대 2남2녀를 두시니 장남은 휘 거두로 공조전서에 오르셨고
차남은 휘 거익인데 성균락정에 오르셨다.
딸은 이중귀 신원생에게 각각 출가하여 내외로 후손들이 후한 봉록의 벼슬살이를 하였다
목사 극일, 좌랑 복일과 불초가 그 음덕으로 현재 조열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부군의 묘소가 무너지고 퇴락하여 조상을 그리는 마음을 펼수 없더니
다행이 산소 부근에 살고 있는 외손 신공 후예들이 묘소를 수봉 하고 입석도 할수 있었다.
오호라 자손들이 어찌 영면 할 수 있겠는가
만력 9년(1581) 신사 8대손 조산대부 의정부 사인겸 춘추관 편수관 지제교 성일(誠一) 삼가 씀
2009 . 7 . 3 濟德 옮겨 적음
고려정당문학의성김공거익지묘(高麗政堂文學義城金公居翼之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