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느 분 불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서 옮겨보는데 어느 것이 사실인지요?

의성(義城)은 경북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 소문국이었다. 그후 신라때 문소
     개칭되었다가 고려초에
의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 김 석(金錫)이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에는 김 석(金 錫)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  등의  문헌과 [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의성김씨는 8세손 공우(公瑀)의 아들대에서크게 번창하였는데, 장자인 용비(龍庇)가 태자첨를
     지냈고, 차자
용필(龍弼)은 수사공을 ,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외 인물로는 찬성사를 지낸 훤(暄)과 우왕때 도순문사 광부(光富)가 유명했 고, 공조전서를  
     지내고 삼국사기의 발문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 거익(居翼), 추밀원부 춘(椿),
    
 평장사  연(衍) 등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와 대사간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때 추충분의좌명공신에 올랐다
     조선 중기에서 의성김씨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
     형제를 들수있다. 안국(安國)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로 나가 각 향교에 소학을 권장하고
     [벽온방]·[창진방(瘡疹方)] 등을  간인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국문학을 비롯한 성리학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조광조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헌,·대제학,·
     좌찬성 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모재가훈]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안국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이조정랑을 거쳐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병조,·예조,·형조 의 참판을 지낸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성리대전절요]를 비롯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한말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군수 겸 병마절제사에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고, 철종때 [북천가]를  지은
진형(鎭衡)과 예조참판 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성김씨(義城金氏)는 남한에 총 53,633가구,
     219,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의성군 단촌면 상화동, 관덕동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경북 의성군 사곡면 화전동
충북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 일직면 구미동
평남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일전에 회식자리에 의성김씨와  조상다툼으로 이어졌는데 경순왕 의 4째 어르신이 의성김씨의 1세조라고 하고 저는 의성김씨는 5째라고 붙었데요.
근데 어찌 하여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요, 아마
딴 성씨들이 경주 김씨가 두개 있는 것을 이해 못해서 그런것이 아닌가 합니다.
70년대 이전에도 경순왕 4째 어르신이 있는냐 없는냐로 양분 된 상황에서 이때에 우리 일세조 어르신인 은설공이 빠진 상태에 5째가 4째로 올라온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주김씨가 2개로 나눠질 이유가 모르는 상항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멀쩡히 후손들이 은설공의 후손이라고 하는데도 없다니, 나참,
그러던중 어떤 성씨집안에서 묘지 이장중에 개천에 박힌 큰 비석을 발견하고 자기 조상것이 아니냐하면서 훌터 보다가, 여기에 우리 은설공으로 부터 몇대손 누구 아무개 이런 식으로 비문이 새겨져 있어 이때 부터 은설공의 존재가 보학계에 정설로 남게 된것입니다. 논란이 끝이죠. 이러면 본래 4째는 우리 은설공이 5째는 김 석 어르신이 들어가 제자리에 맞게 되는 것이죠, 이 와중에 혼란으로 지금도 옛날에 은설공이 빠진 족보을 보고 그 저희 직장 선배분이 우기는 것 같습니다.죽어도 자기 족보에는 경주 김씨에서 갈라져 나와 의성이 되다네요, 의성과 경주은 같은 시대의 같은 항렬에서 비롯 되는데,그리고 의성김씨 족보 홈피에 가보면 4째다 하더니 한참 뒤에 또 5째다 하면서 왔다 갔다한다, 또 경주김씨는 왜 들어가는지. 족보 좀 공부 해야 겠습니다.
 
참고로
경순왕 9분 후손은
 
첫째는 김 익마의태자-후손들이 있어 만주에 건너가 후일에 금나라와 후금인 청나라을 세움
 
둘째 김 굉가야산의 해인사로 들어가 학문를 정진 하다가(중으로 된 것이 아닌 ) 후손없이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70년대에 들어 후손들이 자기 조상이라고 하여 지금은 인정 하고 있음?
 
셋째는 김 명종 어르신인 경주 김씨로 본부인의 막내 아들분임,경주김씨영분공파로 이어짐
 
넷째 어르신이 바로 쟁점의 김 은설공으로 고려태조의 장녀인 낙랑공주의 첫째 아들로 두번째로 경주김씨대안군파로 바통을 받고 내려옴.
아마 본부인의 아들과 나이차로 아마 부친인 경순왕은 사심관으로 개성에 있었고 그 부인인 낙랑공주는 경주에 살아오면서 3째와 함께 경주김씨로 불어어지지 않았겠나 한다. 왜냐하면 사는 지명이 붙어지는 초기니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성씨에다 자기가 사는 지명이 붙어 성씨가 나누어지니.
그래서 두개의 일세조가 있는 것을 딴 성씨들이 우기다고 한다.
그리고 70년대 까지 이런 현상이 있다보니 그 비석이 발견되기 까지 보학계에 큰 혼란이 있을 것으로 본다.
고려왕조을 외가로 둔 관계로 이 두번째 경주김씨가 엄청 번창을 하고 모든 성씨의 가라짐은 여기에서 비롯된것이라고 해다 과언이 아니다
 
다섯째가 김 석 어르신이바로 의성김씨의 일세조 임.
 
여섯째가 김 건 어르신 강릉김씨- 이전에 통일시대 시대에 왕권도전에 패해 강릉(그 아들이 나중에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을 분해서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 반란이라고 함)으로 피신해 간 왕족도 강릉김씨 되었다고 하는데 말기에도 또~!????
 
일곱째가 김 선 어르신 언양김씨로 나옴.
 
여덞째가 김 추 어르신이  삼척김씨로 나옴.
 
아홉째가 김 덕지 어르신으로 울산김씨로 나옴, 여기도 ??????
 
이렇게 나오는데 어찌 4째다 5째다 하는지. 그리고 아래에 자세히 나오는 곳을 소개 합니다.
 
 
김씨분파도(金氏分派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