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들이 남기신 사적이나, 고문서, 소장품등을 게시합니다. 개인이 소장하신 미공개된 사적도 발굴 및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id: 운영자 (金在洙)운영자 (金在洙)
2008.06.20 02:24
아래의 글은 김영시 할배께서 그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대동보..등을 비교하면서
번역하고 고증을 해주신 자료입니다.


한글파일로 보내주셔서 신유보의 자료내용이 있는 이 본문글에 연결해서 게시해 드립니다.

아울러 신유보의 의미를 새길수 있도록 '신유보' 문서를 보내주신 '김재기' 종친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를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신 '김영시' 할배께도 이글을 보시는 종친님들을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또한 이글을 읽으시는 종친님들도 감사의 말씀 한줄씩이라도 보태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신유보(辛酉譜)에 대하여

  신유보(辛酉譜)는 1790년대 말경에 태복씨(泰復氏)께서 족보 편수를 역설하고 석두보(碩斗甫)께서 정성을 다하여 권장하므로 써, 이를 종인(宗人)들이 회합(會合)으로 결의하여 순조 1년(1801) 신유(辛酉) 5월에 편찬작업을 시작하여 다음해인 순조 2년(1802) 임술(壬戌) 10월에 보사(譜事. 족보를 만드는 일)를 마치고 간행된 6번째 의성김씨 족보이다.
  족보를 편찬하는 일을 맡은 선조님들을 살펴보면, ‘김굉’, ‘김계운’, ‘김호수’, ‘김지헌’, ‘김희성’ 등께서는 보사(譜事)를 주관하셨고, ‘홍하노인’께서는 경향 각지를 왕래하시면서 종인들을 지휘하셨으며, ‘석두보’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정성으로 족보를 편찬하는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족보를 편찬하는 일이 마치자 '김굉'께서 신유보(辛酉譜)의 간행내력에 대한 기록인 족보서문(族譜序文)을 족친이신 약봉부군(藥峰府君)의 7세손(世孫)인 ‘김도행’께 편지로 부탁해서 그해 겨울(순조 2년. 1802. 임술) 10월에 이루어졌다.

신유보(辛酉譜) 서문(序文)

  우리 의성김씨(義城金氏) 족보(族譜)는 여러 번 자료를 모으고 편수(編修)를 거쳐 왔으나, 계축(癸丑)․경인(庚寅) 두 족보는 다만 견문(見聞)한 대로만 대강(大綱)을 조금 기록 했을 뿐인데, 오직 경자보(庚子譜)는 그 근본원류(根本源流)에 대한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발굴하여 조사했으며, 내외종파(內外宗派)와 지파(支派)들을 잃지 않고 빠짐없이 모두 다 깊게 얻어 수록함으므로, 씨족을 유별해서 계통을 잇는 선왕(先王)의 법을 잘 따랐으니, 이것이 온전하게 만든 족보인 것이다.
我義城金氏之譜 屢經修輯 而癸丑庚寅二譜 只隨見聞 姑錄大槩而已 惟庚子譜 廣蒐博採 極本窮源 內外宗支 備悉無遺深得 先王類族 尊繫之法 斯其爲全譜乎

  세대(世代)가 옮겨져 바뀌고 인사(人事)가 변하여 바뀌었다. 경자년(更子年)부터 지금까지 80여 년간 자손이 점점 번성하였고, 파계(派系)가 더욱더 넓어져서 후생(後生)인 우리들은 간혹 대수(代數)의 멀고 가까움과 소목(昭穆)의 차서(次序)에 아득함이 있어 친한 이가 멀어지고, 멀어진 이는 잊어버리게 되니, 그런즉 족보를 계속 정비보완(整備補完)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世代推遷 人事變易 庚子於今已 八十餘歲 子支漸繁 派系益廣 後生小子 間有茫然 於世數之遠近 昭穆之次序 親子至於踈 踈者至於忘 則續譜修整 不可已也

  몇 해 전 호서(湖西)에 사는 태복씨(泰復氏)가 편지로, 또 면대(面對)해서 족보를 다시 편수(編修)하는 일이 긴급함에 이르렀을 역설하였으며, 종인(宗人) 석두보(碩斗甫)는 여러 차례 오고가면서, 수보(修譜)를 권장하는데 열심과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이에 이곳 모든 종약회(宗約會)가 수보(修譜)할 것을 수의(收議)로 결의(決意)하고, 각지(各地)에 통고하여 물자(物資)를 나누어 정하고, 단자(單子)를 모아 조속히 서사(書寫)하기로 하였다. 유례(類例)와 규모는 경자보(庚子譜)의 예에 따랐으며, 활자로 인쇄하여 책을 만들어 낸 것을 보니 구보(舊譜)보다 거의 3분의 2가 더 보태어 졌다.
年前 湖西宗人泰復氏 文諭面對 盛言譜事之 甚緊急至 於宗人碩斗甫 累次往來 勸成勤至 於是 此地諸宗約會 收議決意修譜 通告諸道 分定物資 收聚單子 克期書寫 類例規模 舊譜殆加三之二

  보사(譜事)를 신유년(辛酉年. 순조純祖 1, 1801) 5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임술년(壬戌年) 10월에 이르러 마쳤다. 이 일은 시독군(侍讀君) 굉(土宏)과 유학(幼學) 계운(啓運), 호수(虎壽), 지헌(持憲), 희성(熙成) 등이 주관하여 결과를 이루었다. 경향(京鄕)을 뛰어 다니면서 모든 종인(宗人)을 지휘한 이는 홍하노인(弘河老人)이며, 한결같은 정성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족보 일을 맡은 사람은 석두보(碩斗甫)이다.
  始事于辛酉五月 以翌年十月訖功盖 此事 侍讀君土宏 幼學啓運虎壽持憲熙成 成實主之 奔走京外 指揮諸宗 弘河老人也 一誠不怠 始終譜事者 碩斗甫也

  대개 사족(士族)들의 사보(私譜)는 한당(漢唐)이후로 모든 씨족(氏族)마다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는데, 송대(宋代)에 와서 구소씨(歐蘇氏)가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생각하건데 두 집안의 족보가 모자람이 없이 자세하게 정성을 다했으나, 지금 그 족보의 서차(序次)를 살펴보면 불과(不過) 5세와 6세에 그쳐서 친진(親盡)과 복참(服斬)에 한정(限定)했다.
夫士族私譜 漢唐以來 諸家所未有者而至宋歐蘇氏始刱焉 意二家譜 詳盡無欠 而今觀其譜書 則不過五世六世而止 盖以親盡服斬限也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 가(家)에서는 집집마다 세보(世譜)가 있었으나 간혹 한두 번 수보(修譜)가 이루어지고 중간에 쉬게 된 까닭이, 이 어찌 선조(先祖)에 대한 정성이 부족해서 그러 했겠는가. 그 수보(修譜)하는 일이 너무도 어렵고 편집과 인쇄가 아주 힘들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我國士大夫家有所謂世譜者 而間或一再修成 因以中寢 豈爲先之誠不足而然哉 以其修譜之□難 功役之最重而然也

  생각해보면 우리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족보는 효종(孝宗. 1660~1699)이후로는 수보(修譜)하는 데만 멈추지 아니하고, 서울에서 시골까지 가까운 곳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비록 십세(十世)에서 수십세(數十世)되는 지파(支派)와 그 밖의 후손(後孫)들까지 빠짐없이 찾아 상고(詳考)하고 수합(收合)하여 하나의 족보를 만들었으니, 그 구소씨(歐蘇氏)의 족보 보다는 역시 내용이 더 잘 갖추어졌다 할 수 있다.
惟吾金氏之譜 自 寧陵以後 不住修改 由京及鄕 自近至遠 雖十世數十世之支流餘裔 而靡不搜考合而爲一 其視歐蘇氏譜 亦已備矣

  선배들의 위선사업(爲先事業)에 다 쏟은 힘씀이 이와 같았으니, 대개 이번 족보는 각파(各派)가 회동(會同)해서 논의한 것도 아니고, 또한 재정(財政)도 저축함이 없으면서 급자기 일을 시작하여 일 년 만에 마쳤으니, 일의 신속함이 마치 일의 도움이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구보강령(舊譜綱領)이 이미 정연(整然)하였고, 조례(條例)가 명백하여 계속 수보(修譜)하는 데는, 다만 그 규례(規例)에 맞추어 기록을 첨가(添加)할 뿐이므로, 노력(努力)은 반으로 줄이면서 공적(功績)은 배(倍)가 됨이 이와 같았다. 또한 생각해보니 제현(諸賢)들이 근본을 중히 여기는 성의와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니,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先輩爲先事 費盡功力如是 夫今玆之譜 非有諸派 會同之議 又無經紀畜力之事 而卒체始事周年而畢 事之神速 若有相之者 實以舊譜綱領已整 條例明白 繼而修之者 只是就其中 而添錄之而已 故事半而功倍如此也 亦惟諸賢 重本之誠 幹事之勤是賴 豈非幸歟

  도행(道行)은 늙고 병들어 칩거(蟄居)하고 있어서 여러분이 일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하지 못했으니 도리(道理)가 아니고, 휴궐(虧闕)하여 죄스럽기 그지없는 바인데, 그저께 시독군(侍讀君)이 편지로써, 보사(譜事)가 완성되었으니, 마땅히 그간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문자가 있어야 어긋남이 없으므로 그것을 유념함이 어떠한지 하기에, 도행(道行)은 자질이 부족하고 문장이 졸렬(拙劣)해서 한결같이 사양하였으나, 그 책무를 면할 수 없어서 참람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일의 시종(始終)과 결과를 대략 오른편과 같이 기록하였다.
道行老病蟄伏 一未側跡於諸公相役之 末道理虧闕 罪恨無窮 迺者侍讀君 書敎曰 譜成矣 合有紀事文字 子其留念焉 道行以人微文拙固辭 而其責不已 乃不揆僣妄 略叙之顚末如右

  몸가짐을 경계하여 조심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선조(先祖)들의 규범에 따라 근본을 소중히 하고, 윤리를 돈독히 하여 백대(百代)라도 친애하는 뜻은 선배들이 구보서문(舊譜序文)에서 말을 다하였으니, 제공(諸公)들은 당연히 깊이 이해하고 망각하지 아니 하였을 것이므로 이에 거듭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순조(純祖) 2년 임술(壬戌. 1802) 겨울 10월
                                                 후손(後孫)  도행(道行) 삼가씀

若砥身飭行聿 追先矩重本 敦倫百代親愛之意 先輩舊譜序文中盡之 諸公當佩服無忘 今不敢疊床焉
上之二年冬十月後孫生員道行謹叙


신유보(辛酉譜)서문을 쓰신 김도행의 생애(生涯)

도행(道行) : [1728~1812]. 김도행(金道行)선조는 약봉부군(藥峰府君)의 7세손(世孫)으로서, 자(字)는 중립(中立), 호(號)는 우고(雨皐)이시다. 선조(先祖)의 할아버지는 태중(泰重)이시고 아버지는 정탁(正鐸)이시며, 제산(霽山) 성탁(聖鐸)선조가 숙부(叔父)이시다. 영조(英祖) 4년(1728, 무신戊申)에 장남으로 태어나셨으나 남동생은 없으시고, 예천(醴泉) 권응구(權應玖)에게 시집간 여동생 한 분 있었다. 생원(生員)으로 계시다가 순조(純祖) 12년(1812, 임신壬申)에 돌아가셨다. 남아 있던 문집은 최근에 우고문집(雨皐文集)으로 간행되었으며, 묘(墓)는 천전(川前) 갑수동(甲水洞) 해향(亥向)에 있으며, 족손(族孫) 정와(丁窩) 대진(岱鎭)께서 찬(撰)한 묘지(墓誌)가 있다. 배(配)는 안동(安東) 권상리(權相履)의 딸로서 영조(英祖) 6년(11730. 경술庚戌)에 태어나셨으며, 묘(墓)는 임하(臨河) 송석(松石) 술향(戌向)에 있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시간(始幹)이고 차남은 시한(始翰)이다.


( 2008년 6월19일 남악공(南嶽公) 휘(諱) 복일(復一) 14대손(代孫) 영시(永時) 삼가 국역(國譯)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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