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 前期


김영렬(金英烈)



 


?∼1404(태종 4).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의성. 호는 맹암(孟巖).1394년에 전서(典書)로 있던 중 그해 경기우도수군첨 절제사가 되었다.그때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1395년에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1397년 중요한 실책을 범해 파직이 되어 옹진(甕津)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에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에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태종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작되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김효손(金孝孫)
    1373(공민왕 22)∼1429(세종 1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존성(存誠)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 진사시에 합격, 예문관한림(藝文館翰林)에 임용되고,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이 되어 별사전(別賜田)의 신규발급을 혁파시켰다.  
환관(宦官)과의 반목으로 파직되었다가,  1410년(태종 10)38세에 사헌부 장령에 발탁되고, 이어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올랐다. 
1412년 대간(臺諫)의 고신서경법(告身署經法)을 부활시켰고, 함흥에 있는 환왕비문(桓王碑文)의 개찬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충청도 도체찰사 박자청(朴子晴)의 부사(副使)가 되어 조운(漕運)의 불편지역인 태안일대의 지형을 답사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여 제출 하였다.  이어서 지형조사(知刑曹事)·좌대언(左代言)을 지냈으나, 세종 즉위 때 비위 사건에 연루되어 진천에 위리 안치되었다.   7년 만에 석방되어1426년(세종 8)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함경도일대의 진보(鎭堡) 설치 상황을 현장 답사하였고, 1427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거쳐 경기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형조·예조의 참판을 지냈고, 특히 외교에 많은 공을 세웠다.   1429년 대사헌에 제수되어 국가 기강을 확립하고 상벌제도의 공정한 실시를 시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그해말에 갑자기 서거하였다.

김 통(金 統)
    1408(태종 8)~? ,조선의 문신. 咸興 少尹(함흥소윤) 好智(호지)의 아들.  1435년(세종17)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제, 承文院 正字(승문원정자)를 거쳐 副校理(부교리)·正言(정언)·직강 등을 역임하고,  1451년(문종 1) 禮曹 正郞(예조정랑)에 이르러 英陵(영릉:世宗의 陵)의 祭祀(제사)를 소홀히 하여 付處(부처)되었다.

김숙검(金叔儉)
    조선의 문신.
사농경(司農卿), 증 호조판서(戶曺判書) 로(路)의 넷째 아들. 조선 태종 정유(丁酉)년 문과(乙科)급제,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괴정공파(槐亭公派)의 派祖

김한계(金漢啓)
    조선의 문신. 縣監(현감) 永命(영명)의 아들. 1438년(세종20)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제, 直提學(직제학)을 거쳐 1454년(단종 2) 校理(교리)·直講(직강)·副承旨(부승지) 등을 지내고 正言(정언)에 이르렀다. 1455년(세조 1) 佐翼原從功臣(좌익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 참봉(參奉) 연(璉)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 의성(義城). 자 국경(國卿). 호 모재(慕齋). 시호 문경(文敬).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사림파(士林派)의 학통을 계승하 였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0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부수찬 ·부교리 등을 지내다가 150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장령(掌令)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거쳐, 15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성리학의 실천 ·보급에 주력하여 각 고을의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보급하고, 각종 농서와 의서(醫書)도 널리 간행 하여 향촌민들을 교화시키는 데 힘을 썼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성리학의 실천적 입장을 중시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실각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37년 재등용되어 이후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천문과 병법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드는 방법도 연구하였다. 성리학을 이념으로서만이 아닌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중시한 학자였으나, 조광조와 같은 급격한 정치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인종(仁宗)의 묘정에 배향되고,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이천(利川) 설봉서원(雪峰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모재집》, 편서에 《창진방(瘡疹方)》 등이 있다.

김    전(金   전)
    조선의 문신. 호는 송정(松停).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숙검(叔儉)의 孫子.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안중(安中)의 長男으로  성종 계묘년(癸卯年)  春場 登科(甲科), 성균관 生員,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을 역임 하였다.




 


백운서당 = 詞宇(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소재)
조선 정조(正祖) 2년(1778)에 홍문관 직제학을 지낸 의성김씨 16세손(世孫) 송정공(松亭公) 김 전(金 전)의 詞宇로 세워졌으며  1915년 중수하였다. 가운데는 대청마루를 설치하고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방의 문은 붙박이로 하였다.  주초는 정평주초아 호박돌 주초가 혼용 되었다.    봉서재(鳳棲齋) 밖으로는 솟을 삼문이 옛모습을 가직한 채 서있고 대문 밖으로는 괴강(槐江)의 맑은 물이 흐른다. 집 주위로는 죽담이 전통기법(傳統技法)을 둘려져 있다


    
김    헌(金  헌)
    
조선의 문신. 김 전(金 전)의 아우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숙검(淑儉)의 孫子.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안중(安中)의 次男으로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 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1519년(중종14년)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는등 신진사류가 사사되거나 투옥되는 일대 정국의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대제학에 올랐던 봉교공(奉敎公) 휘(諱) 헌(獻)은 낙향을 서둘렀다.    공은 삼가현의 거부인 졸당공(拙堂公)  박총(朴聰)의 손서(孫서)였다. 이로인해 처가를 의탁하여 경상도 합천군 대병면 송지촌으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다.  

김여부(金汝孚)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기복(基福). 아버지는 안국(安國), 어머니는 임효창(林孝昌)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관직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인물이 경박하고 출세에 급급하여 가정의 교훈을 따르지 않아 일찌기 숙부 정국(正國)이 우리 형제의 뒤를 이을 만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에 와서 외척 윤원형(尹元衡)에게 붙으니 정국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평소 김홍도(金弘度)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서로 당을 만들어 다투었다.
1557년(명종 12) 윤원형이 첩을 처로 삼은 사실을 김홍도가 못마땅하게 생각 하더라고 윤원형에게 고자질 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어 그의 당인 대사간 김백균(金百鈞)·사간 조덕원(趙德源)과 함게 탄핵하여 김홍도와 김규(金#규31)를 각각 갑산과 경원으로 귀양보내고 김계휘(金繼輝)를 삭출시켰다.  뒤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으로부터 사사로운 원한으로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을 받았고 또 이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1574년(선조 7)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서용을 청하여 한때 선조의 허락을 받았으나 삼사(三司)에서 극력 반대하여 끝내 서용되지 못하였다.




김흠조(金欽祖)
     자는 敬叔(경숙), 호는 樂琴堂(낙금당).
     1501년(연산군 7)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제, 1506년(중종 1) 檢閱(검열)이 되었다.  다음해 奉敎(봉교)로서 왕에게 상소하여 甲子士禍(갑자사화) 때 화를 당한 金宗直(김종직)·金馹孫(김일손) 등을 伸寃(신원)케 하였고, 뒤에 濟州 牧使(제주목사)를 거쳐 判決事(판결사)가 되었다.

김 순(金 淳)
    ?∼1462(세조 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아버지는 판서 석아(錫我)이다.
    1432년(세종 14)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43년 우헌납이 되었으며, 양전편의지책(量田便宜之策)을 올렸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1450년(문종 즉위년) 성균사예로서 충청·전라·경상도체찰사의 종사관이 되어 연변의 주·현의 성터를 살폈다.   이듬해 성주목사가 되어 하삼도(下三道)의 축성사업을 전담하였다. 
1453년(단종 1) 형조참의에 이어 겸지병조사로 경상도에 가서 거제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1455년(세조 1) 형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할머니의 상으로 경상도 영산에 거처했으나, 특명으로 기복(起復)하여 동지 중추원사가 되었다.   1457년 대사헌·이조참판·병조참판이 되었으며, 가을에 동여진(東女眞)부락에 살고 있는 낭북얼케(浪卜兒哈)에 이어서 그의 아들  아비차(阿比車)가 변방을 침입해오자 이를 토벌, 평정하였다.   1459년 경창부윤 겸 경상도관찰사·한성부윤·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경기· 강원도 진휼사가 되었고,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가지고 왔던 칙유(勅諭)의 뜻을 아뢰고, 또 자유책로(刺楡柵路)를 청한 것을 보고하고 돌아 왔다. 1461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시호는 희헌(僖憲)이다

김세우(金世●)
   조선의 문신. 자는 公瑾(공근), 勅正(칙정)의 아들. 1501년(연산군 7)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乙科(을과)로 급제,  1504년 史官(사관)으로서 甲子士禍(갑자사화)로 削職(삭직),    1506년 中宗反正(중종반정)으로 기용되어, 여러 淸宦職(청환직)을 역임하고 1509년 兵曹佐郞(병조좌랑)이 되었다.   활을 잘 쏘았다.

김윤우(金允佑)
    조선의 무신. 자는 충경(忠卿)  
봉교공(奉敎公)
대제학(大提學)  헌(獻)의 아들.   연산군 무오(茂午)년 절충장군행의흥위 대호군(折衝將軍行義興衛 大護軍) 역임.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정국(正國)
    본관 의성. 자 국필(國弼). 호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 시호 문목(文穆). 학자 안국(安國)의 동생.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급제, 승지(承旨)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탈관직되어 고향에  칩거하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1537년(중종 32) 복관, 전라감사가 되고 뒤에 병조참의 ·공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일찍이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  시문이  당대에 뛰어났고 또한 의서(醫書)에도 조예가 깊었다. 좌찬성(左替成)이 추증되었다.  문집에 《사재집》, 저서에《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경민편(警民篇)》《기묘당적(己卯黨籍)》 등이 있다.

김요립(金堯立)
    1550(명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공(士恭), 호는 서봉(西峰). 할아버지는 정국(正國)이며, 아버지는 계조 (繼祖)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2년에 사복시첨정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운반의 임무를  맡아 공을 세웠다. 1599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이듬해 지평이 된 뒤, 1601년 사도시정(司#도42寺正)·장령·사간·사성·상의원정(尙衣院正)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시와 서화에 이름이 높아 선조가 일찍이 ‘선서재자선화학사(善書才子善畵學士)’의 8자를 써서 내려주었다고 한다.

김  진(金    璡)
    1500(연산군 6)∼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의성.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靑溪). 아버지는 교위 예범(禮範)이다
안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기묘명유(己卯名儒)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또한, 음사(淫祠:邪神을 祭祀하는 사당)나 귀신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멀리하매 무당이 그의 마을에 감히 들어 가지 못하였다.      마을 남쪽 산에 염흥방(廉興邦)의 사당이 있었는데, 그는 “네가 전조(前朝:고려)의 간신으로서 죽었어도 남은 죄가
   있는 터에 어찌 너의 귀신을 용납하여 백성들을 미혹(迷惑)하게 하랴.” 하고 이를 헐어 버렸다.  그는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훈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성일(誠一)의 父

김성일(誠一)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   1556년(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해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金汝)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 문제를 의논하였고, 그해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內治)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金)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며, 저서로는 《해사록(海錄)》《상례고증(喪禮考證)》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을 남겼고, 1527년 후손들에 의하여 문집 《학봉집》이 간행되었다

김복일(復一
    
1541(중 종36)~1591(선조24) 조선의 문신. 자는 季純(계순), 호는 南嶽(남악), 生員(생원) (진)의 아들.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誠一(성일)의 아우.  李滉(이황)의 문인. 1564년(명종19) 司馬試(사마시)를 거쳐 1570년(선조 3)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成均館(성균관)의 學諭(학유)·典籍(전적)을 역임하고 형조·호조·공조의 郞官(낭관)을 지냈다.    全羅道 御史(전라도어사)로 나가 汚吏(오리)들을 숙청, 1587년 蔚山 郡守(울산군수) 이어 昌原 府使(창원부사)·慶州 敎授(경주 교수)·成均館 司藝(성균관사예)·司成(사성)·豊基 郡守(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형 克一(극일)·守一(수일)·明一(명일)·誠一(성일)과 함께 安東(안동)의 泗濱書院(사빈서원)에 祭享(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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