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城金氏 歷代 人物

        高麗朝

김석(金錫)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넷째아들이며 어머니는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인 신란공주 일명 낙랑공주이다. 김알지의 28대손으로 고려 태조의 외손, 의성군에 책봉되어 의성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용비(金龍庇)

아 버지는 복야 김공우(金公瑀)로 고려 항몽기에 중서성 참지정사로 번다한 국난에 유공하여 추절보절공신(推節保節功臣)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의성군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기리는 진민사(鎭民祠)를 세워 오늘에 전해졌다.

김용필(金龍弼)

아버지는 공우(公瑀)이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義城君에 봉해졌다.

김용주(金龍珠)

아 버지는 공우(公瑀)이고 登第하여 4대왕을 섬기면서 여진(女眞)의 난을 평정하여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녹훈되고 개성부사를 역임한 후 평장사(平章事)에 가자(加資)되었으며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본관을 개성으로 써 왔으나 1865년(고종 2년)에 특령으로 일부가 義城金氏로 환본 되었다.

김의(金宜)

감문위 상장군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야로 추봉되었다.

김굉(金紘)

아버지는 太子詹事(諱 龍庇)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지내고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영(金英)

아버지는 태자첨사(太子詹事 諱 龍庇)이고 전객시(典客寺)의 판사(判事정3품)겸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에 올랐다.

김성단(金成丹)

아버지는 門下侍郞( 諱 自然)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정2품)를 지냈다.

김서지(金瑞芝)

宜의 둘째 아들로 흥안(現 성주) 도호부부사(都護府副使)를 지냈고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조현대부(朝顯大夫) 내영고(內盈庫) 소윤(少尹 종4품)을 지냈다.

김지예(金之銳)

英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내고 병부상서(兵部尙書)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 되었다.

김영렬(金英烈)

자는 열지(烈之)이며 호는 맹암(孟巖)으로 아버지는 복야 김굉(金紘)이다.

고려 전서로 태조 을해에 등과하여 수군절제사·안무사·수군도지휘사·삼군총제·병조참판·지삼군부사를 거쳐 추충분의익대공신(推忠奮義翊戴功臣)으로 녹훈되고 좌찬성을 지냈다.

 사후에 우의정을 증직하여 양소(襄昭)라 시호하고 학림(鶴林)·옥산(玉山)·신천서원(新川書院)에 봉향되었다.

김춘(金椿)

아버지는 좌복야 김의(金宜)로 고려때 등과하여 은청광록대부 삼사문하시랑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다.

김옥(金玉)

평장사 춘(平章事 椿)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정의대부(正議大夫 정3품) 좌사의(左司議)를 지냈다.

김연(金衍)

평장사 춘(平章事 椿)의 넷째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군국평장사(軍國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을 지냈다.

김경복(金慶復)

맹암(孟巖 諱 英烈)의 셋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김광부(金光富)

호는 남파(南坡)이며 아버지는 병부상서 김지예(金之銳)이다.

고려 충혜왕 초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대호군·계림윤(鷄林尹)을 거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에 유공하여 거듭 2등공신으로 녹훈되고 나아가서 원의 잔당을 요동에서 물리쳤다.

우왕 5년 왜구의 침입에 합포(合浦)도순무사 겸 합포원수로 출전하여 전사하매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의성군(義城君)으로 책봉되었다.

김태권(金台權)

아버지는 소윤 김서지(金瑞芝)이며 문예부 좌사윤으로 공민왕 계묘 흥왕사(興王寺)의 난에 공민왕을 호가하다가 해를 입고 순직하였다.

김거두(金居斗)

아버지는 좌사윤 김태권(金台權)이며 고려 때 벼슬길에 올라 문하주서를 거쳐 공조전서를 지내고 경주부윤으로 민몰(泯沒)상태에 있던 『삼국사기』를 중간하여 발문을 남겼다.

김거익(金居翼)

호는 퇴암(退庵)이며 아버지는 좌사윤 김태권(金台權)으로 고려 때 출사하여 광정대부 정당문학 겸 성균악정을 지냈다. 조선조에서 우의정에 누징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부여 반월성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다.

김현주(金玄柱)

평장사 춘(平章事 諱 椿)의 손자이며 옥(玉)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대사간(大司諫  정3품)에 이르렀으며 문예관(文藝館)의 대제학(大提學 종2품)과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김용초(金用超)

 

호는 내성재(內省齋)로 아버지는 판서 김수덕(金修德)이다.

고려 충숙왕 기사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를 거쳐 조선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성품이 질박하고 곧으며 문무를 겸비했다.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았다.

김을방(金乙邦)

호는 둔번(遁煩)으로 아버지는 대제학 김현주(金玄柱)이며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흥위우위 보승낭장을 지냈다.

김로(金路)

호는 석포(石圃)로 아버지는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이며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농경을 지내고 태조의 잠저고인(潛邸故人)으로 이조판서를 추증받았다.

        朝鮮朝

김섭(金涉)

호는 소정(疏亭), 아버지는 고려때 정당문학(政堂文學)겸 성균악정(成均樂正)을 지낸 김거익(金居翼)이다.  조선조 태조 5년(139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제학(提學)의 벼슬에 올랐다.

김미(金湄)

퇴암(退庵 諱 居翼)의 넷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직제학(直提學 정3품)을 지냈다.

김숙량(金叔良)

석포(石圃 諱 路)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당진감무(唐津監務)를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김숙검(金叔儉)

호는 괴정(槐亭)으로 아버지는 사농경 김로(金路)이며 태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김양중(金養中)

남파(南坡 諱 光富)의 손자이며 숙온(叔溫)의 둘째 아들로 조선조 12대 인종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외증조.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 종5품)으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어 판교(判校 정3품)를 지냈다.

김명중(金命中)

석포(石圃 諱 路)의 손자이며 동헌(桐軒 諱 叔良)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제용감정(濟用監正)을지냈다.

김자중(金自中)

석포(石圃 諱 路)의 손자이며 叔良의 셋째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과 오위(五衛)의 司直을 거쳐 호군(護軍 정4품)을 지냈으며 건공장군(建功將軍 종3품)의 품계를 받았다.

김남보(金南寶)

충의공(忠毅公 諱 龍珠)의 6대손으로 고려조 판도판서(判圖判書 정3품)를 지냈으며 조선조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이조판서(吏曹判書)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에 증직되었다.

김한계(金漢啓)

자는 형운(亨運)이며 호는 휴계(休溪)로 아버지는 현감 김영명(金永命)이다.

세종 무오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현관을 거쳐 집현전사·승문원사를 지냈다.

記注官으로 있을 때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 하였다.

김한철(金漢哲)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는 송호(松湖)로 아버지는 현감 김영명(金永命)이다. 예종 기축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현관을 거쳐 예조정랑을 지내고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낙향하였다.

김축(金軸)

소정(疎亭) 諱 涉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정3품)을 지냈다.

김경조(金敬祖)

渡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고 안동대도호부사, 전라도 관찰사(종2품),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성균관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김자한(金自漢)

둔번(遁煩 諱 乙邦)의 손자이며 軸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 정3품)을 지냈다.

김한경(金漢卿)

자는 국보(國寶)이며 호는 도곡(道谷)으로 아버지는 사직 김자중(金自中)이다.

무과로 출사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내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김전(金전)

자는 사앙(士仰)이며 호는 송정(松亭)으로 아버지는 부사(府使) 김안중(金安中)이다.

생원으로 출사하여 성종 계묘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김흠조(金欽祖)

자는 경숙(敬叔)이며 호는 낙금당(樂琴堂)으로 아버지는 첨정 김효우(金孝友)이다.

연산 신유 문과에 급제하여 장례원(掌隷院) 판결사를 지냈다.

김통(金統)

호지(好智)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校理, 正言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을 지냈다. 증손 모재(慕齋)가 귀하게 되어 예조참판과 양관제학에 증직되었다.

김사언(金士彦)

치재(恥齋 諱 玧)의 아들로 號는 반학당(伴鶴堂)이다. 만년에 문과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시독관(侍讀官), 기주관(記注官)등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김세우(金世瑀)

자는 공근(公瑾)이며 호는 약재(約齋)로 아버지는 참군 김정(金整)이다.

연산 신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김윤석(金潤石)

낙금당(樂琴堂 諱 欽祖)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侍講院)사서(司書)를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과 사헌부 지평, 장령(종4품)을 지냈다.

김익령(金益齡)

統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 종3품)을 지냈다.

그 뒤 사옹원(司饔院) 정(正 정3품)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사후 이조판서겸 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김관석(金關石)

자는 의중(倚中)이며 호는 사우당(四友堂)으로 아버지는 장사랑 김윤적(金允迪)이다.

공은 효성스러운 천성에 덕을 갖추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경향(京鄕)에 칭송되더니 사후에 덕천서원(德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처음으로 倫洞에 터를 잡았다.

김제민(金齊閔)

자는 사효(士孝)이며 호는 오봉(鰲峯)으로 아버지는 증형조판서 김호(金顥)이다.

이 항(李恒)의 문인으로 선조 계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임란을 당하매 아들 엽(曄)·섬(暹)·안(晏)·흔(昕)을 거느리고 역전하여 다대한 전과를 거둔 호남 삼대 창의장(倡義將)으로 이름을 남겼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강(忠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김민국(金敏國)

자는 화여(和汝)이며 호는 만회(晩檜)로 아버지는 부제학 김치중(金致重)이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출사하여 관이 승지에 이르렀다가 대북파(大北派)의 폐모론을 배척하여 벼슬을 버리고 제주도로 낙향·은둔하였다.

김안국(金安國)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는 모재(慕齋)로 아버지는 증좌찬성 김연(金璉)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연산 계해 별시와 정묘 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지평·장령·예조참의·경상관찰사를 지내며 실학(實學)과 권선(勸善)·풍속순화와 사문진작(斯文振作)에 힘썼다.

전라관찰사로 재임할 때 사화로 파직되어 여주로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중종 정유 서환되어 삼조(三曹)의 판서·양관 대제학·의정부좌찬성·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냈다.

사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하고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되고 오산(鰲山)·임강(臨江)·기천(沂川)·빙계(氷溪)·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정국(金正國)

자 는 국필(國弼)이며 호는 사재(思齋)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김연(金璉)으로 모재 김안국의 아우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중종 기사 별시 갑과에 장원으로 등제하여 교리·정랑 등을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직제학·동부승지에 오르고 황해관찰사를 지냈다. 기묘사화로 고양(高陽)으로 낙향했다가 복직되어 병조참의·공조참판·경상관찰사·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사후에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을 추증하고 문목(文穆)이라 시호를 내리고 오산(鰲山)·임강(臨江)·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진(金璡)

자 는 형중(瀅仲)이며 호는 청계(靑溪)로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김예범(金禮範)이다. 중종 을유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가 성균관 생원으로 학업을 닦다가 뜻하는 바 있어 향리인 안동(安東)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자질(子姪)들을 충효로 훈육하여 세아들은 대과로 두 아들은 소과로 등제한 오현자(五賢子)를 길러내어 경세에 몰두한 경략가 였다. 후일 아들들이 귀히되어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주벽으로 모셨다.

김희삼(金希參)

자는 사로(師魯)이며 호는 칠봉(七峯)으로 아버지는 증승지 김치정(金致精)이다.

중종 경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수찬·부교리를 거쳐 양조 정랑 의정부사인을 지내고 삼척부사(三陟府使)를 끝으로 물러났다.

청렴한 학자로 이황(李滉)·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등과 교우하며 사현자(四賢子)를 훈육하여 후일 넷째 아들 동강(東岡) 우옹(宇옹)이 귀히되어 이조판서를 추증받았다.

김담수(金聃壽)

자는 태수(台수)이며 호는 서계(西溪)로 아버지는 참봉 김관석(金關石)이다.

황준량(黃俊良)·조식(曺植)·이문건(李文楗)에게 수학하고 명종 갑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경전을 탐독하고 현우(賢友)와 학문으로 교우하여 사후에 청천(晴川)·낙암서원(洛암書院)에 배향되었다.

김극일(金克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약봉(藥峯)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 병오 문과에 급제하여 내자시정을 지내고 후일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여부(金汝孚)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의 아들로 중종 기유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김우홍(金宇弘)

자는 면부(勉夫)이며 호는 이계(伊溪) 또는 지족당(知足堂)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중종 계축 문과에 급제하고 나주목사·영흥목사를 지냈다.

김우굉(金宇宏)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개암(開巖)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에게 배우고 중종 병인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대사성을 거쳐 관찰사를 지냈으며 후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우옹(金宇옹)

자는 숙부(肅夫)이며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直峰)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중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양관제학·이조참판·대사성·대사헌을 지낸 임난(壬亂)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사후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을 추증받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청천·회령서원(會寧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성일(金誠一)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다.

이황(李滉)의 학지요체(學之要諦)를 득심(得心)한 학자로서 선조 무진 문과에 급제하고 삼조낭관,대사성,부제학,부승지,형조참의,경상병사,경상좌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였다.

임난(壬亂)에 유공하여 선무원종공신일등에 녹훈되어 이조판서 의금부사 춘추관사 오위도총관 양관대제학을 추증받고 시호는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임천(臨川)·호계(虎溪)·사빈서원(泗濱書院)등에 배향되었다.

김복일(金復一)

자는 계순(季純)이며 호는 남악(南嶽)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아우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경오 문과에 급제하고 삼조낭관을 거쳐 울산군수·창원도호부사 성균사성을 지냈으며 종부시정으로 추증되고 사빈(泗濱)·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정룡(金廷龍)

자는 시현(時見)이며 호는 월담(月潭)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담수(金聃壽)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선조 을유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예안현감으로 군량미 수송에 공을 세웠으며 양조좌랑을 비롯하여 영월·풍기군수와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낙암서원(洛암書院)에 배향되었다.

김택룡(金澤龍)

자는 시보(施普)이며 호는 조성당(操省堂)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양진(金楊震)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무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현관을 거쳐 헌납을 지냈다.

김지수(金地粹)

 자는 거비(去非)이며 호는 태천(苔川) 또는 천태산인(天台山人)으로 아버지는 증병참 김서(金曙)이며 할아버지는 충강공(忠剛公) 김제민(金齊閔)이다.

 광 해   병진 문과에 급제하고 교서판교감이 되고 폐모론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양조낭관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종성부사를 끝으로 고부로 낙향하였다. 고매한 인품으로 명망을 얻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지남(金地南)

 자는 대뢰(大賚)이며 호는 구봉(九峯)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성(金晟)이다.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관계진출을 단념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공조좌랑에 올랐으며 인조 무인에 무과에 급제하고 기사관·삼조좌랑·무장현감을 거쳐 직장·지평을 지냈다.

김용(金涌)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운천(雲川)으로 아버지는 찰방 김수일(金守一)이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숙부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닦고 선조 경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검열이 되었다가 물러났다.

 임 란(壬亂)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수성(守城)하고 행재소에 가서 호가(扈駕)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환도하여 삼사·양조 현관을 지내고 예천군수·선산부사·여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주(金주)

자는 여정(汝定)이며 호는 불구당(不求堂)으로 아버지는 도사 김극계(金克繼)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인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여 무장현감·정랑·양산군수 겸 경주병마절제사를 지냈다. 義城金氏 世譜庚寅, 丙申譜 편찬을 주관하고 그 서문을 썼다.

김욱(金頊)

자는 신백(愼伯)이며 호는 사월당(沙月堂)으로 아버지는 감찰 김효가(金孝可)이고 할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옹)이다.

인조 갑자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과 흥해·서산군수 그리고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김시주(金是柱)

자는 이립(以立)이며 호는 개호(開湖)로 아버지는 병조참의 김용(金涌)이다. 광해조 계축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을 지냈다.

김시권(金是權)

자는 자중(子中)이며 호는 봉파(鳳坡)로 아버지는 익위사(翊衛司) 김집(金潗)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다.

김시영(金是榮)

자는 인여(仁汝)이며 호는 청음(淸陰)으로 아버지는 김즙(金즙)이다.

효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기주관. 성균관직강. 예조정랑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김창석(金昌錫)

자는 천여(天與)이며 호는 월탄(月灘)으로 아버지는 호군동추를 지낸 김이기(金履基)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문집이 있다.

김세호(金世鎬)

자는 경백(京伯)이며 호는 구주(龜洲)로 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김익기(金益基)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었으며 문집이 있다.

김덕제(金德濟)

자는 경언(經彦)이며 아버지는 부호군 김호(金鎬)이다.

숙종 을묘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만경현령을 지냈다.

김빈(金빈)

자는 빈여(賓如)이며 호는 갈천(葛川)으로 아버지는 김시각(金是각)이다.

효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외직으로 경주부사 광주목사, 한성좌우윤, 내직으로는 도승지, 예조참판을 비롯 사조의 참판을 지냈고 기로연에도 참여하였다.

김방걸(金邦杰)

자는 사흥(士興)이며 호는 지촌(芝村)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시온(金是온)이다.

현종 경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김극령(金極齡)

자는 남로(南老)이며 아버지는 통덕랑 김이표(金爾標)이다.                     

영조 기유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 황해도사. 춘추관기주관. 병조좌랑을 거쳐 운산군수를 지냈다.

김학배(金學培)

자는 천휴(天休)이며 호는 금옹(錦翁)으로 아버지는 김암(金암)이다.

현종 계묘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현령을 지냈다

김성구(金聲久)

자는 덕휴(德休)이며 호는 팔오헌(八吾軒)으로 아버지는 증이참 김추길(金秋吉)이다.

현종 기유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와 집의를 하고 병조참의 여주,홍주 목사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도 지냈다.

김여건(金汝鍵)

자는 천개(天開)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김성구(金聲久)이다.

숙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관을 거쳐 수찬을 지냈다.

김세흠(金世欽)

자는 천약(天若)이며 호는 칠탄(七灘)으로 아버지는 주부 김태기(金泰基)이다.

숙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김성탁(金聖鐸)

자는 진백(振伯)이며 호는 제산(霽山)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김태중(金泰重)이다.

숙종 신묘 진사로 출사하여 을묘 문과에 급제하고 부수찬. 지평을 거쳐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김응렴(金應濂)

자는 성희(聖希)이며 아버지는 김이도(金以鍍)이다. 영조 경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김택수(金宅洙)

자는 도원(道元)이며 호는 휴촌(休村)으로 아버지는 증호참 김재령(金再齡)이다.

영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고 좌우승지. 돈영도정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김한로(金漢老)

자는 상수(商수)이며 호는 성와(省窩)로 아버지는 첨추 김치복(金致福)이다.

영조 신유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김굉(金굉)

자는 자야(子野)이며 호는 귀와(龜窩)로 아버지는 증이참 김광헌(金光憲)이다.

이상정(李象靖)에게 수학하고 생원으로 출사하여 정조 정유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현관을 거쳐 예조참판을 지냈다.

김한동(金翰東)

자는 한지(翰之)이며 호는 와은(臥隱)으로 아버지는 좌랑 김경필(金景泌)이다.

진사로 출사하여 정조 기유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현관을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김직(金直)

자는 경지(敬之)이며 호는 지애(芝厓)로 아버지는 김광호(金光鎬)이다.

정조 임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다.

김서(金瑞)

자는 맹집(孟輯)이며 호는 응암(鷹岩)으로 아버지는 김정신(金鼎臣)이다.

순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김이상(金履常)

자는 무숙(懋叔)이며 호는 수와(睡窩)로 아버지는 생원 김국채(金國采)이다.

영조 을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김기찬(金驥燦)

자는 덕여(德汝)이며 호는 동곽(東郭)으로 아버지는 김주훈(金柱勳)이다.

정조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김희락(金熙洛)

자는 숙명(淑明)이며 호는 식헌(寔軒)으로 아버지는 증참의 김두동(金斗東)이다.

이상정(李象靖)에게 배우고 생원으로 출사하여 지평. 군수를 지냈다.

김희주(金熙周)

자는 공목(公穆)이며 호는 갈천(葛川)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시동(金始東)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을묘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안악. 안주. 영흥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지냈다.

김낙풍(金樂풍)

자는 적여(績汝)이며 호는 삼낙재(三樂齋)로 아버지는 첨지중추 김성(金珹)이다.

순조 을해 평안도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병조참의를 지냈다.

김희직(金熙稷)

자는 공숙(公叔)이며 호는 표림(豹林)으로 아버지는 김호동(金虎東)이다.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김두명(金斗明)

자는 백원(伯圓)이며 호는 낙천와(樂天窩)로 아버지는 생원 김희용(金熙鏞)이다.

순조 을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김여서(金驪書)

자는 중연(仲淵)이며 호는 담운(淡雲)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희질(金熙質)이다.

순조 정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관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김규서(金奎瑞)

자는 국서(國瑞)이며 아버지는 첨추 김유성(金維城)이다.

순조 정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부승지를 지냈다.

김건수(金建銖)

자는 공립(公立)이며 호는 만회(晩悔)로 아버지는 첨추 김재인(金在仁)이다.

순조 경인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승지로 물러났다.

 

        近世

김도화(金道和)

자는 달민(達民)이며 호는 척암(拓庵)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김약수(金若洙)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문장. 덕행이 뛰어나 일천(逸薦)으로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을미사변에 창의,의병대장으로 유공하다. 1983년 건국포장추서.

김우수(金禹銖)

자는 내석(乃惜)이며 호는 학포(鶴浦)로 아버지는 김재선(金在善)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순조 갑오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관직을 거쳐 예조참의를 지냈다.

김진우(金鎭右)

자는 국원(國元)이며 아버지는 김기수(金驥壽)로 순조 갑오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를 지냈다.

김진형(金鎭衡)

자는 덕추(德錘)이며 호는 겸와(謙窩)로 아버지는 현감 김종수(金宗壽)이다.

철종 경술 문과에 급제하여 부승지를 지냈다.

김진의(金鎭懿)

자는 미경(美卿)이며 아버지는 김평수(金平壽)이다.

고종 임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김흥락(金興洛)

자는 계맹(繼孟)이며 호는 서산(西山)으로 아버지는 목사 김진화(金鎭華)이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주손(胄孫)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아 영남유림의 유종(儒宗)으로 천거되어 음관(蔭官)으로 우부승지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김용락(金龍洛)

자는 여운(汝雲)이며 호는 춘고(春皐)로 아버지는 참봉 김진국(金鎭國)이다.

순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김달연(金達淵)

자는 이활(而活)이며 아버지는 김진락(金鎭洛)이다.

헌종 경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김홍락(金鴻洛)

자는 우경(羽卿)이며 호는 모계(某溪)로 아버지는 김진의(金鎭疑)이다.

고종 을사 문과에 급제하여 시독. 비서감랑을 거쳐 승지를 지냈다.

김두병(金斗秉)

자는 대규(大奎)이며 아버지는 김진건(金鎭健)으로 고종 병자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군수를 지냈다.

김하락(金河洛)

일명 길주(吉周)이며 자는 계삼(季三)으로 호는 해운당(海雲堂)이며 아버지는 김건휘(金建輝)이다.

 천 문. 지리. 병서. 의학서를 널리 탐독하였다. 고종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켜 백현(魄峴). 노루목. 이현(梨峴)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의병대장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위훈을 세우고 영덕에서 전사하여,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김대락(金大洛)

자 는 중언(中彦)이며 호는 백하(白下)로 아버지는 도사(都事)를 지낸 진린(鎭麟)이다. 서산공의 문인으로 안동 내앞에 민족교육의 일환(一環)으로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만주의 독립기지 건설과 각종 광복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구자이며 계몽주의 민족운동가이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김동삼(金東三)

일명 긍식(肯植)이고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일송(一松)으로 아버지는 김계락(金繼洛)이다.

 경 술국치 후 이상룡(李相龍)과 더불어 만주 유하현(柳下縣)으로 이주하여 백서농장(白西農場)을 개척하고. 경학사(耕學社). 한족회(韓族會).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세워 군정부(軍政府) 운동을 전개하여 통의부(統義府). 정의부(正義府)를 이끌었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參謀長)을 역임하고 민족유일당촉진위원장을 겸임하여 삼군부(三軍府) 통합사업을 추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해방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김창숙(金昌淑)

자는 문좌(文佐)이며 호는 심산(心山)으로 아버지는 김호림(金護林)이다.

왜정의 감시 아래 한때 우(愚)로 개명하였고 고문으로 다친 뒤에는 벽옹(벽翁)이라 별호 하기도 하였으며 곽종석(郭鍾錫). 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을 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五賊)을 참하라는 소를 올리고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등과 교육. 언론운동을 창도(唱導)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대표로 장서(長書)를 제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임시 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총장, 성균관장, 유도회 본부 위원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김붕준(金朋濬)

자는 군석(君錫)이며 호는 당헌(棠軒)으로 아버지는 김의현(金義鉉)이다.

고 향에서 3.1 운동을 창도(唱導)하고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비서장. 임시의정원 의장. 국무위원을 역임하고 해방 후 환국하여 좌우합작 우측대표. 신진당 창당위원장. 입법위원을 역임하다가 납북되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김동만(金東萬)

자 는 우서(禹緖)이며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의 동생으로 한일합방후 만주로 망명하여 삼광학교(三光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항일사상 고취에 진력(盡力)하였으며 부민단, 한족회등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중 日軍에 의해 피살. 1991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김원식(金元植)

자는 계서(繼緖)이며 호는 소창(笑蒼). 아버지는 김종락(金鍾洛)이다.

만 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군정서독판 이상룡의 지시로 국내에 밀입국 군자금 모금. 대한통의부. 정의부. 혁신의회. 길림전만선반제동맹(吉林全滿鮮反帝同盟). 한국독립당군. 신한독립당 결성등 많은 항일애국 활동을 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추서.

김  황(金  榥)

一名 우림(佑林).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로 아버지는 김극영(金克永)이고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옹)의 12代孫이다. 곽종석의 문하에서 主理學에 전념하여 심즉이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한 도학(道學)을 정립하여  김우옹(金宇옹)→ 이진상(李震相)→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 마지막 유종(儒宗)으로 50여 년 동안 1000여명의 門徒를 배출하였으며 서기 2000년 後孫과 後學들에 의하여 建立된 道陽書院에서 享祠하고 있다.

 

 

       現代 (無順)

金在春       중앙정보부장(전), 무임소장관, 국회의원(전), 대종회 회장(현)

  昶穆  중앙종친회 2대회장

  寅煥  농촌진흥원장(전)

  一魯  축협중앙회장(전)

  道昶  문교부차관(전)

  宗吉  영문학자. 학술원회원(현)

  昌槿  국회의원(전). 교통부장관(전)

  忠銖  국회의원(전)

  光俊  국회의원(전)

  三祥  국회의원(전)

  昌煥  국회의원(전)

  命潤  국회의원(전). 변호사(현)

  重緯  국회의원(전). 환경부장관(전)

  鍾學  국회의원(전)

  吉弘  국회의원(전)

  昌甲  교통부차관

  庸來  총무처장관(전). 서울시장(전)

  元雄  국회의원(현)

  希宣  국회의원(현)

  道鉉  문화체육부차관(전)

  和男  국회의원(전). 경찰청장(전)

  元煥  경찰청장(전). 경우회 회장(현)

  昌燁  서울신문사장(전)

  尙哲  서울시장(전). 변호사(현)

  暻林  외환은행장(전). 亞太은행협의회 의장(현)

  俊協  신탁은행장(전)

  時衡  산업은행총재(전). 국무행정조정실장(전)

  晋榮  국회의원(전). 영주시장(전)

  時福  보훈처차관(전)

  勳基  노동부차관(전). 평남지사(전)

  正國  현대건설회장(전). 문화일보사장(현)

  元燮  전북대총장(전). 경원대총장(전)

  浩吉  포항공대총장(전)

  翰周  경기대총장(전)

  泳吉  한동대총장(현)

  重洵  한국디지털대총장(현)

  甲周  동국대부총장(전)

  宇甲  고려대부총장(전)

  植鉉  서울대 교수

  鳳九  고려대 노동대학원장

  時업  성균관대 교수 대동문화연구소장

  東石  인천기능대학장

    源  서울시립대학장    

  源大  계몽사회장(전)

  泓殖  대구시의회의장(전) 금복그룹회장. 2대 대종회 회장

  澈運  충효예본부총재(현) 물가협회장(현)

  昌佐  루시아스포코아회장. 3대 대종회 회장

  鍾吉  (株)두루넷대표(전) 삼보컴퓨터부회장(현)

  泰雄  한남체인회장(전)

  有滿  국제호텔회장(전)

  桂輝  한국전력부사장(전)

  鳳燮  한국도로공사부사장(전)

  柱燮  한국담배인삼공사자판기(주)회장(전)

  永旭  생산기술연구원장(전)

  國柱  예비역육군준장

  德模  예비역육군중장

  相駿  예비역육군중장

  鍾泰  육군준장(현)

  東圭  경남일보사 대표이사

  圭成  홍익회회장(전)

  光洛  국립중앙극장장(전)

  基泳  분당경찰서장(전)

  관식  크라운관광호텔대표

  大煥  서울고등법원장(현)

  洪植  (주)星志건설대표이사

  点東  (주)東勳대표이사

  周仁  (주)시-즈통상대표이사

  哲正  在日本흥양상사(주)대표이사

  國雄  (주)무등대표이사

  潤周  군포시장(현)

  善基  평택시장(현)

  聖泰  밀양군수(전)

  煥默  괴산군수(전)

  圭晩  애국지사(독립운동, 국립묘지 안장) 국회의원(전)

  圭牧  보령, 명천군수(전)

  奎章  판사(지방법원지원장)(전)

  明根  극동건설사장, 부회장(전)

  英夏  명예문학박사, 국사편찬위원(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장(전)

  重銖  판사(지방법원지원장,부장판사)(전), 변호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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