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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되찾겠다" 내앞마을 150명 이끌고 만주로 망명
[역사의 현장을 가다] <3>항일의 땅, 안동 (하)-백하 김대락과 내앞마을
보수적 완고함 버리고 협동학교 지원, 사랑채를 校舍로 내줘
1910년 문중 단위론 첫 집단망명, 신흥강습소 건설 등 매진
백하 가문 6명 등 내앞마을에서만 독립유공자 25명이나 배출

안동=오미환기자 mhoh@hk.co.kr  blog.gif
김희곤 안동대 교수ㆍ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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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 백하 김대락의 고택 '백하구려' . 마당의 표지판 뒤 바위는 협동학교 교사들이 의병에 피살된 곳이다. 개화와 신교육에 반대하는 보수 유림의 반발이 그만큼 컸다.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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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2월 24일, 안동 내앞마을(임하면 천전리)의 노 선비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의성 김씨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 길에 오른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한 지 넉 달, 그 때 나이 65세.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독립투쟁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압록강 건너 서간도까지 가는 넉 달 간의 험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국내를 통틀어서 첫 번째의 문중 단위 집단 망명이었다. 일행에는 백하의 손자며느리와 시집 간 손녀까지 있었는데, 둘 다 만삭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1주일을 걸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 거쳐 신의주까지 간 다음 다시 걸어서 압록강 너머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에 닿은 것이 1911년 4월 10일. 손부와 손녀는 유하현으로 가는 도중 2월에 해산을 했다. 엄동설한에 일제의 눈을 피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갔으니, 고생이 오죽했을까.

내앞마을은 백하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5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전국 시ㆍ군 단위 독립운동 유공자 수가 평균 35명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숫자다.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망명객은 150여명에 이른다. 백하의 내앞 문중을 시작으로, 1911년 무렵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만주로 독립투쟁하러 간 사람은 100여 가구 약 1,000명에 이른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1878~1937),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1877~1950)도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내앞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영덕 방향으로 15㎞ 지점, 임하댐 입구 보조댐 앞에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흘러 내앞(川前)마을로 불린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안동에서 하회마을과 쌍벽을 이루던 곳이다. 하지만 하회 모르는 이는 없어도 내앞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마을이 거의 통째로 만주로 가서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만주로 간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가세가 기울고 후손은 흩어진 탓이다.
 
마을에는 백하의 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와 김동삼의 생가가 있다. 백하구려에 살고 있는 후손 김시중(73)씨는 방 안 벽에 선조들의 독립투쟁 훈장증과 이 집을 임시교사 겸 기숙사로 썼던 협동학교 관련 기사가 실린 일제강점기의 황성신문 복사본을 붙여놨다. 백하 집안의 독립 유공자는 백하를 비롯해 막내 여동생 김락, 조카 만식 정식 규식, 규식의 아들 성로 등 6명이다.

1907년 내앞마을에서 문을 연 협동학교는 경북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류인식 등 혁신 유림이 설립했다. 의성 김씨 문중 서당인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1919년 3ㆍ1운동 이후 강제 폐교될 때까지 독립 투사의 산실이었다. 초기에는 지역 유림의 반대가 극심했다. 위정척사를 외치며 개화에 반대하던 보수 유림으로서는 신학문도, 학생들의 단발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7월에는 의병이 협동학교를 기습해 교직원 3명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백하구려 마당의 큰 바위가 그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김시중씨는 "귀신 나오는 바위라고 해서 어릴 때 밤에는 무서워 마당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백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의병 투쟁이 곳곳에서 일제에 패하고 망국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09년 초 그는 혁신 유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육십 평생 보수 유림으로 살아온 선비가 세계관의 대전환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협동학교 교사로 내주고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변화는 안동 지역 뿐 아니자 전국에 영향을 끼칠 만한 큰 사건이어서, 황성신문은 '교남 교육계에 새로운 붉은 기치'라는 제목의 논설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백하의 변모는 그 무렵 독립운동 단체 '대한협회보'를 읽고 쓴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난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뼈저린 대오각성이었다.

만주에서 백하는 매부인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다 1914년 삼원포에서 세상을 떠난다.

'돈 천 석, 사람 천 석, 글 천 석'의 '삼천 석 댁'으로 불리던 백하 집안도 독립운동으로 쇠락했다. 김시중씨는 "사람과 돈이 모두 없어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고 말한다. "선조들의 독립투쟁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몸서리 나도록 들으며 자랐죠. 독립운동 이야기, 양반 이야기가 제일 듣기 싫었어요. 만날 굶고 경찰에 불려 다니는데 좋겠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집안 할매, 아지매들이 해준 그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생각 나요. 백하 할배만 해도 그래요. 망명 당시 65세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구십 노인 아녜요? 죽으러 간 거지."

백하의 묘는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2002년 안동의 의성 김씨 선산에 가묘를 쓰면서 역사학자 조동걸이 비문을 지었다. "백하는 유학자, 선비, 계몽주의 민족운동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 선구자다… 세상에 외치노니 지사연 하는 학자가 의리를 찾는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 애국자연 하는 위정자가 구국의 길을 묻는다면 여기 와서 배우라, 저승으로 가는 늙은이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지혜를 구한다면 여기 와서 묻고 배우라고 하자."

시아버지·남편·두 아들·사위까지 항일 투신
3·1운동 참여했다가 고문당해 두 눈 잃어

■ 독립운동 3代, 그 명가를 지켜낸 김락

여성 독립운동가는 무척 드물다. 그것도 신여성이 아니라 전통 양반 가문의 안주인이 항일투쟁에 나선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10년 전인 2000년 여름, 일제가 쓴 '고등경찰요사'를 읽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안동 양반 이중업의 아들 이동흠이 "내 어머니가 3ㆍ1운동 때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딱 넉 줄 적혀 있었다. 그 어머니는 누구인가. 추적에 나섰다.

족보에는 의성 김씨 김진린의 딸이라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안동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이다. 친정 제적등본에 적힌 형제자매의 이름은 모두 김대락처럼 김O락인데, 주인공인 막내만은 그냥 김락(1862~1929)이다. 하는 수 없이 그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 포상받게 되었다.

김락이 3·1운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낸 중심인물이다. 열다섯 살에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시집가서, 양산현령을 지낸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가 되었다. 새댁 시절 시어머니를 여읜 그는 시누이와 시동생을 돌보며 안방 주인으로서 집안을 도맡았다. 그런데 1895년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남편도 마땅히 함께 나섰다. 일제의 공격으로 이웃 퇴계 종가가 불타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집안을 지켰다.

48세 되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시어른은 24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장례를 치르고 상복에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 김대락과 김동삼 등 친정 집안이 대거 만주로 망명 길에 나섰다. 큰 형부 이상룡 집안도 함께 갔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고난의 길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남편 이중업은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렸다. 맏아들 이동흠은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다가 구속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편은 '파리장서'라 불리는 독립청원서를 발의하고, 강원도와 경북 지방 유림 대표의 서명을 받는 일을 맡았다. 바로 이때 김락은 57세의 나이에 예안면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혔고, 취조를 받다가 두 눈을 잃는 참극을 당했다.

앞을 못 보고 귀로만 듣고 살던 터에 다시 놀라운 일과 마주쳤다.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한숨 짓는 사이에 맏사위 김용환이 일제에 붙잡혔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맏사위는 만주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던 의용단에 가담했던 것이다. 김용환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자금을 댔다. 그 바람에 요즘으로 치면 100억원이 훌쩍 넘을 종가 재산이 거덜났다. 둘째 사위 류동저는 안동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둘째 아들 이종흠은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그 바람에 두 아들이 모두 잡혀갔다. 이런 사이 두 번이나 자살하려다 가족들 손으로 살아난 그는 1929년 2월 67세로 눈을 감았다.

35년 동안 시가와 친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해가 뜨고 졌다. 그 한가운데 김락이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현재 그의 사진 한 장 없다. 그가 시집 가서 살던 하계마을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쓸쓸하고 횡한 마을에 독립운동 내력을 전하는 기적비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잊혀질 수 없다. 안동에서 그를 되살려 인형극을 공연하고, 뮤지컬을 준비하는 것은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ㆍ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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