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백하白下(또 다른 호는 비서賁西이다) 김대락金大洛은 자제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 등 일가와 함께 1911년 1월, 67세의 고령으로 가솔을 모두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백하의 웃대 진린鎭麟(호는 愚坡우파)공이 도천道薦으로 도사都事를 지냈으므로 세칭 ‘도사댁’이라 하는데, 지례의 지촌댁, 망천의 화동댁과 함께 ‘글 안 빌리고, 제수祭需 안 빌리고, 말[馬] 안 빌리는’ 삼불차三不借의 집이라 하여 도만渡滿 이전까지는 형세 좋기로 인근에서 으뜸으로 여겼다.

 한말 이후 이 집안의 행로는 안동 법흥의 임청각과 거의 똑같은 궤적 위에 있었다. 백하는 당시 임청각 주인이었던 임정초대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象龍과 처남매부지간이다. 똑같이 검제의 서산西山 문하에서 수학하여 존주근왕尊周勤王의 유가적儒家的 경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라의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의 수용이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세 인식의 산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의 설립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이었다.


 백하는 당초에 협동학교가 지향하는 신문물의 수용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마침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에 뛰어든 석주의 입장에 공감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그 이후, 백하는 학교의 운영기금으로 호계서원 등, 향내 서원의 재정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내앞과 무실, 외내의 중진들을 설득하던 동산이나 일송의 후견 역할을 자담하게 된다. 종전의 자세가 어떠했든, 남의 이목이 어떻든,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실행으로 옮기는 데 전혀 주저가 없었다.  교사校舍로 쓰려 했던 가산서당可山書堂의 사용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사랑채를 동산 유인식 일송 김동삼 만원 김형식등 협동학교를 창도하던 신진기예에 선뜻 내놓은 것도 그 일면이었다.


 그 당시까지도 향중 척사유림의 의식을 지배하는 논리는 ‘왜이에 부화하여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 = 민지의 발휘를 운운하며 신사조를 주창하는 세력 = 매국역적’의 완고한 등식이었다. 을미년 국모의 시해와 단발령 시행으로 불타올랐던 안동의 을미의병 운동이 겨우 10여년 전의 일이었던지라, 단발은 신조류며, 곧 일제의 책동이니 매국매족이 된다는 인식이 일반에 설득력 있게 인식된 것도 일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정척사 의병의 일대가 협동학교에 난입하여 교감 김기수와 교사 및 학도 수 인을 격살(바로 지금의 사랑채 앞 바위 부근이라고 전한다)한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위정척사와 구습혁파, 신교육을 통한 인재의 양성이라는 두 사조의 갈등을 극명히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경술년의 국치를 당한 후, 백하와 석주는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이 국내에서보다 만주지역에서 새로 개척한 기지에서가 유리할 것이라는 신민회의 전망에 공감한다. 섣달 말에 백하가 먼저 가산을 정리하여 떠나고, 석주는 달포 뒤 쯤, 일정의 감시를 피하여 도만 길에 올랐다. 더구나 백하는 만삭 잉부의 몸인 손부를 소달구지에 싣고 북만주 그 먼 길을 떠났다. 타고 걷기 달포 넘는 고단한 길 끝에 압록강을 건너고, 손부가 해산하자 태어난 아이의 아명을 ‘쾌당快唐’이라고 짓는다. 원수 일제의 아귀를 벗어나 중국에서 아이를 얻으니 통쾌하다는 뜻이다.  


 도만 4년이 되는 1914년 말에 백하는 연세가 일흔이었다. 워낙 고령인데다, 수토가 다르고 풍속이 다른 곳에서 기지의 개척은 그만두고라도 우선 정착을 위해서 문사구전問舍求田에 동분서주하는 자질들의 고생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 않아도 좋았을 만년 고난이 어떠했던 간에, 당대의 어른 백하가 함께 있다는 믿음은 국내 활동시기 이들 계몽사상가에 큰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도만 이후 허허벌판에 새 움을 틀어야 했던 구국운동가들의 정신적 의지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이 갈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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