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박씨 부인이 퇴계 선생을 낳을 때 공자가 방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던 까닭에 그 집 문을 성림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문은 지금도 태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 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 없이 타일렀던 것이다.
그런 관계로 퇴계는 어릴 때부터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고 동무들을 항상 온순하고 겸손하게 대해왔다.

그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고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글을 두어 번 외워본 후에야 선생 집에 들어갔고, 선생 집 앞에서는 공손히 엎드려 스승에게 대한 인사를 엄격하게 올렸다. 이처럼 퇴계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시초부터 성실했던 까닭에 그의 학력은 날이 갈수록 착실해 갔다.

퇴계가 8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위의 형인 해가 칼에 손을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퇴계는 얼른 달려와 상처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하고 물었다. 그래도 퇴계는 여전히 울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는 아니하나,피가 이렇게 흐르느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그 대답 하나만 들어보아도 퇴계의 성품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인자한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대장장이 배순과 퇴계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10월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우가 형의 부하로 근무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넷째 형 온계가 충청감사로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1년 동안 있으면서 백운동 서원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청탁을 일절 배제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 중에서 계급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천민인 배순을 교육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퇴계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배순이 살았던 곳은 소수서원에 가까운 배점리였으며, 직업은 야공(冶工 : 대장장이)이었다.그는 신분이 비천함에도 학문을 좋아하였고, 퇴계가 백운동서원에서 가르칠 때 자주 뜰아래에 와서 돌아갈 줄 모르고 즐겨 청강하기에 아는 정도를 시험해 보았더니 능히 이해하므로 기특하게 여긴 퇴계가 함께 가르쳤다고 한다. 퇴계가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는 선생의 철상을 주조하여 아침 저녁으로 분향하면서 경모하였다. 22년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퇴계가 풍기를 떠난 것은 1549년 11월이고 돌아가신 것은 1570년 12월 8일이다) 삼년복을 입었으며, 철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가 죽은 뒷날 배순의 손자가 조부의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창석 이준 군수가 지은 시가 비문으로 전해졌다


일화1 퇴계의 죽음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인간상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멋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으로 옮겨서도 방당을 만들고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송·죽·매·국·연)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의 단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 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청량산으로 도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을 지었으며, 홍응길의 '금강산유산록'에 서문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두류산유산록'에 후식을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을 정했으며 죽계구곡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과 함께 귀담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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