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안씨(平安安氏)

평안안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54가구 2,2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와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평택안씨(平澤安氏)

평택안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9가구 1,0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주양씨(慶州梁氏)

경주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990가구 6,27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계림양씨(鷄林梁氏)와의 관계는 상고할 수 없다.

 


김해양씨(金海梁氏)

김해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81가구 1,48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양씨(羅州梁氏)

나주양씨 시조는 양열(梁悅)의 아들로 조선 중종조에 문과출신으로 도사(都事)를 역임한 양인(梁認)이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14가구 1,6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양양씨(南陽梁氏)

남양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173가구 7,28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원양씨(南原梁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남원 양씨(南原梁氏)의 시조(始祖)는 양을나(良乙那)이며 양 탕(良 宕)의 후손 우량(友諒)이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공(功)을 세워 남원백(南原白)에 봉해졌으므로 제주(濟州)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남원(南原)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능양(能讓 : 병부공계)․주운(朱雲 : 용성군계)․윤위(潤渭 : 장영공계)를 각각 일세조(一世朝)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때 견(堅)이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책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冠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동국(東國)의 백이숙제(伯二叔薺)라 불렸던 우(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라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관료파(官僚派) 학자로서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던 성지(誠之)가 유명했는데, 그는 세종(世宗) 때 신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조(世祖)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연(淵)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이조 판서(兵․吏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증손 구신(久信)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다.

  이외에도 희(喜)가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전선에 앞장선 대박(大樸)과 홍주(弘澍), 그리고 몽열(夢說)과 황(榥),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형․공조 판서(形․工曹判書)를 역임한 헌수(憲洙) 등이 가문을 빛냈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병장(義兵將)

상기(相基)와 한규(漢奎), 독립운동가로 광복군 사령부

(光復軍司令部)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세봉(世奉)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52,230가구, 219,9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양씨(南漢梁氏)

남한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37가구 2,25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제주양씨(濟州梁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시조(始祖)는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중의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영주지(瀛州誌)」에 의하면 양을나는 아득한 옛날 제주도 한라산 북족기슭 모흥혈(毛興穴 : 삼성혈이라고도 함)에서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용출(湧出)하여 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이 되었고, 그의 자손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938년(고려 태조 28)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후 양을나의 후손 양궁왕자(良宮王子)가 신라(新羅)에 사신으로 예방(禮訪)하니 내물왕(奈勿王 : 제 17대 왕, 재위기간 356~402)이 많은 상을 내리고 성(姓)을 양(梁)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며, 그의 후손 수(洵)이 682년(신문왕 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제주로 삼게 되었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과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낸 진(진)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로 치사(致仕)했고, 녹사(綠事) 한신(漢臣)의 아들 숙(淑)은 명종(明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지지당(知止堂) 송 흠(宋欽)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팽손(彭孫)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소장파 현량(賢良)을 특채, 혁신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낙향하였다가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가 실각된 후 복관되어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한 응정(應鼎)은 팽손의 아들로 공조(工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으며,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효행이 뛰어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응정의 아우 응태(應台)는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으며, 응정의 아들 산숙(山璹)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을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였고, 그의 처 이씨(李氏)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에 칼을 찔러 자살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산보(山甫)는 스승이 기묘사화에 화를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자징(子徵)은 효행(孝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어 거창(居昌)과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역임했고, 장인 김인후(金麟厚)의「하서집(河西集)」에 행장(行狀)을 썼다.

  당대의 석학(碩學) 우계(牛溪) 성 혼(成 渾)의 문인(門人)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을 개탄했던 천운(千運)은 감찰(監察)과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를 역임했고, 부호군(副護軍) 우규(愚圭)의 아들 거안(居安)은 박세당(朴世堂)과 윤 증(尹 拯)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으며,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쌍봉(쌍峯)에 살면서 학문에만 전력했다.

  한말에 와서는 회일(會一)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화순(和順)과 동복(同福)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강진(康津)에서 체포되어 단식 7일만에 순국했으며, 한묵(漢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여「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 국민의 항일사상 고취에 앞장 섰던 기탁(起鐸)과 함께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의맥(義脈)을 살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26,699가구, 113,4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양씨(淸州梁氏)

청주양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숙종조에 양효상의 아들 양성준(梁聖駿)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649가구 8,4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원양씨(南原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남원 양씨(南原楊氏)의 시조(始祖)는 양경문(楊敬文)인데,「남원양씨족보(南原楊氏族譜)」에 의하면 경문(敬文)은 고려(高麗)에서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조상(祖上)들의 토착 세거지(土着世居地)인 남원(南原)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朝鮮) 때 집의(執義)를 역임한 자유(子由)와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공준(公俊), 그리고 산림은일(山林隱逸)로 당대의 명사들과 이름을 나란히 한 백운거사(白雲居士) 공말(公말)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외에도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거쳐 부사(府使)를 역임한 홍(洪), 경사(經史)에 능통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전선에 나섰던 사형(士衡),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회영(會榮) 및 의병활동을 하다가 옥사(獄死)한 영(泳)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양씨(南原楊氏)는 남한(南韓) 총 9,703가구, 40,9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양씨(密陽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밀양 양씨(密陽楊氏)의 시조(始祖) 양 근(楊 根)은 청주 양씨의 시조인 상당백(上黨伯) 기(起)의 다섯째 아들로 고려 말에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청주 양씨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밀양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 후 근(根)의 아들 문(文)이 조선 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손자 세경(世經)이 전서(典書)를 지냈으며, 8세손 자부(自敷)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를 역임했고, 12세손 허국(許國)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 양씨(密陽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1,161가구, 5,1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화양씨(中和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때 정승(政丞)을 역임하고 당악(唐岳 : 중국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진 포(浦)를 시조(始祖)로 하고 중화(中和)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포(浦)의 아들 동무(東茂)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경무(慶茂)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견무(堅茂)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고, 5세손 원격(元格)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8세손 희지(熙止)는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고 대사간(大司諫)과 관찰사(觀察使)․도승지(都承旨)를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

  또한 학자(學者)로 이름난 덕록(德祿)은 임진왜란 때 종질(從姪) 의직(懿直)의 증손 현망(顯望)은 현종(顯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부사(府使) 등 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名望)이 높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4가구, 4,7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양씨(淸州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양씨(楊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원(元)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른 양 기(楊 起)가 황제(皇帝)의 명(命)을 받고 제국대장공주(薺國大長公主 : 충령왕비)를 배종(陪從)하여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에 들어와서 정착(定着)하게 된 것이 우리 나라 양씨(楊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 후 삼한창국공신(三韓昌國功臣)으로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고 관적(貫籍)을 하사(下賜) 받음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淸州)로 항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기(起)의 아들 지수(之壽)가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손자 백연(伯淵)이 동강 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와 서강 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왜구(倭寇)를 격퇴하여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정방 제조(政房提調)를 겸했고, 증손 영수(英秀)가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의 무신(武臣)으로 무예에 뛰어났던 정(汀)은 세조(世祖) 때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양산군(楊山君)에 봉해졌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에 이르렀다.

  또한 안평대군(安平大君)․김 구(金 絿)․한 호(韓 濩)와 더불어 조선(朝鮮) 전기(前期)에 사대명필(四大名筆)로 일컬어졌던 사언(士彦)은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와 함흥 부윤(咸興府尹)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응춘(應春)과,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홍농군(弘農君)에 봉해진

순민(舜民), 그리고 서예(書藝)에 뛰어났던 만고(萬古) 등이 청주 양씨(淸州楊氏)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양씨(淸州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6,856가구, 27,8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양양씨(南陽樑氏)

남양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창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57가구 3,21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충주어씨(忠州魚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충주 어씨(忠州魚氏)의 시조(始祖) 어중익(魚重翼)은 본성(本姓)이 지씨(池氏)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에 세개의 비늘(鱗)이 있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어씨(魚氏)로 사성(賜姓)했다고 한다.

  그후 시조 중익(重翼)의 후손 승진(升震)이 고려 말에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어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그의 증손(曾孫) 유소(有沼)가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하는데 좌대장(左大將)으로 공(功)을 세워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승진(升震)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삼게 되었다. 17세 때 내금위(內禁衛)에 들어갔다가 1456년(세조 2)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유소(有沼)는 백 근짜리 무거운 활을 지고다니며 북변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치장(治將)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느 북변의 오랑캐를 잘 다스려 이름을 떨쳤는데, 오랑캐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뵈면 그는 “너희들에게 취하지 않고, 추호라도 범하지 아니하리”하며 거절하였기로 야인들이 손을 들어 이마에 올리면서 “공은 우리 아버지시다”라고 하였다. 그가 다시 북병사로 기용되었을 때 노모를 핑계삼아 사양하니 성종은 “북변을 편하게 함이 경보다 나은이가 없어 그런 것이니 어머니는 걱정말라”하면서 유소의 어머니에게 태후와 동등한 예우를 하도록 하사품(下賜品)을 내렸다고 한다.

  구후 나라에서는 오랑캐들과 무슨 외교를 진행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어령공(魚令公)을 오시게 한다>고 공갈하여 곧잘 화의를 보았으며, 그들은 <어령공이 정말 오시는가, 오신다면 그이는 곧 우리 아버지이니 만

나뵐 수 있을까>하며 반가와 했다고 한다.

  오늘날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와는 통혼(通婚)을 하지 않으며, 경기도를 비롯한 서울과 충청북도․강원도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남한(南韓)에 총 825가구, 3,5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종어씨(咸從魚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풍익현(馮翊縣) 출신인 어화인(魚化仁)이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하여 동래(東來)해 강원도 강릉부(江原道江陵府)에 뿌리를 내린 것이 시초이다. 그 후 다시 평안도 함종현(平安道咸從縣 : 지금의 강서군)으로 옮겨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고려 명종(明宗) 때 인장 동정(仁長同正)을 지낸 어화인(魚化仁)을 시조로 하고 함종(咸從)을 본관(本貫)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중흥(中興)의 인물(人物)인 변갑(變甲)은 현령(縣令)을 지낸 연(淵)의 다섯 아들중 맏아들로서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그는 일찍이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를 거쳐 좌정언(左正言)․우헌납(右獻納)을 역임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함안(咸安)으로 돌아가 노모(老母) 봉양에 진력했다.

  특히 그는 평소에 신숙주(申叔舟)의 아버지인 신 장(申 檣)과 친하여 “우리가 충성껏 임금을 섬기고 이름이 이룩되면 고향에 돌아가 노친(老親)을 봉양하자.”고 약속한 바 있었다.

  변갑의 아들 효첨(孝瞻)은 1429년(세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을 거쳐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가 되어 젊은 학자(學者)로서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1446년(세종 28) 집현전 응교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는 데 참여했다. 세조(世祖)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오른 그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효첨(孝瞻)에게는 세겸(世謙)․세공(世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세겸(世謙)은 세조(世祖)와 연산군(燕山君) 대(代)에서 각 조(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봉상시 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낸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특히 학문과 문장(文章)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세공(世恭)의 10세손 유봉(有鳳)은 김창협(金昌協)에게

학문을 배워 조선 후기(朝鮮後期)를 대표하는 거유(巨儒)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문하(門下)에서 이천보(李天輔)․홍상한(洪象漢)․윤득관(尹得觀) 등 훌륭한 학자(學者)를 배출시켜 경종(景宗)의 국구(國舅)인 아우 유귀(有龜)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이밖의 인물(人物)로는 정조(正祖) 때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석정(錫定)과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판관(判官)․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재연(在淵)이 유명했고, 한말(韓末)의 개화파 대신(開化派大臣) 윤중(允中)은 독립운동에 몸바친 윤희(允姬)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남한(南韓)에 총 2,687가구, 10,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엄씨(光州嚴氏)

광주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45가구 2,31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엄씨(羅州嚴氏)

나주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 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46가구 1,69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밀양엄씨(密陽嚴氏)

밀양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67가구 1,5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영월엄씨(寧越嚴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영월 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漢)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陵先生)의 후예이며 당(唐)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 제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신라(新羅)에 동래(東來) 하였다가 본국(本國)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 땅인 내성군(奈城郡)에 안주(安住)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君)에 추봉(追封)하고 후손들에게 영월(寧越)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자,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특히 엄씨의 관적지(貫籍地)인 영월읍 하송리(寧越邑下松里)에는 처음 엄시랑(嚴侍郞)이 정착 하면서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보수(寶樹)로 천연기념물 제76호로 지정 되었으며, 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와 을유해방(乙酉解放) 시(時)에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고, 6․25 동란 시에는 북편의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이변(大異變)이 있을 때 마다 무언(無言)의 예시(豫示)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영월 엄씨는 시조의 아들 3형제 대(代)에 와서 장남 태인(太仁)이 고향을 지키며 군기공파(軍器公派)를 이루었고, 차남 덕인(德仁)은 한양(漢陽)으로 이주(移住)하여 복야공파조(僕야  公派祖)가 되었으며, 3난 처인(處仁)은 함경도(咸鏡道)로 이주하여 문과공파조(文科公派祖)가 되어 현재 그의 후손들이 북한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대(代)를 거듭 하면서 참봉공계(參奉公系)․교수공계(敎授公系) 등 37계통으로 갈라져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특히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11세손 유온(有溫 : 장군 비의 증손, 준의 아들)이 조선 창업(創業)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총제(同知總制)를 역임했고, 판관(判官) 한저(漢著)의 아들 흥도(興道)가 절행(節行)으로 뛰어났다.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王位)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 되었던 단종(端宗)이 화(禍)를 당하자 명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더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옥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御命)에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 호장(寧越戶長)이라는 미관말질(微官末職)에 있던 흥도(興道)가 관(棺)을 마련하여 선산(先山)에 장사 지내고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는 말을 남긴 후 영남지방으로 피했다.

  후환이 두려워 세인(世人)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한 흥도의 충절은, 선조(宣祖) 때 그의 영웅성이 재 평가 되어 후손을 찾아 증손 한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해 주고 단종릉(端宗陵)인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비로소 그 후손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에 등용되었다.

  영조(英祖) 때 와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 순조(純祖)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가자(加資)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로 내려져,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祠)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 되었다.

  한편 시조의 16세손 흔(昕)은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정자(正字)를 지냈고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수찬(修撰)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세자시 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을 지냈다.

  특히 그는「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그 행적(行蹟)이 등재(登載)되어 영월 엄씨를 더욱 빛냈으며, <선(善)으로 패(敗)한 일 보며 악(惡)으로 이긴 일 본가, 이 두 즈음에 취사(取捨) 아니 명백(明白)한가, 평생(平生)에 악된 일 아니하면 자연유성(自然有成)하리라>라는 시조(時調) 한 수가「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한다.

  흔(昕)의 현손 집(緝 : 성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과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했으며,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냈으며 폐모론(廢母論)에 유생(儒生)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파직 당한 성(惺)과, 효종(孝宗) 때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나갔던 황(愰)이 유명했고, 성의 조카 정구(鼎耈)는 효종(孝宗) 때 좌승지(左承旨)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 되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뒤에 교리(校理)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한석봉(韓石峯) 이후의 명필로 이름났던 한명(漢明)은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집고첩(集古帖)」과「만향제시초(晩香薺詩抄)」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엄문(嚴門)을 대표했으며, 집(緝)의 아들 경수(慶遂)는 숙종(肅宗)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여,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연행록(燕行錄)」을 간행한 숙(璹), 순조 때 암행어사를 지낸 도(燾), 고종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석정(錫鼎)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세영(世永)은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 내각이 수립될 때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을 역임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한 후 군자금(軍資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정섭(正燮)과 더불어 충절(忠節)의 전통 가문인 영월 엄씨(寧越嚴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216가구, 114,1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해여씨(金海呂氏)

김해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90가구 1,4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선산여씨(善山呂氏)

선산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0가구 1,2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성산여씨(星山呂氏)

성산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438가구 7,79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동향(同鄕)인 성주여씨(星州呂氏)와의 관계도 상고할 수 없다.

 

 

 

성주․성산 여씨(星州․星山呂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성산 여씨(星山呂氏)는 여어매(呂御梅) 이전의 선계(先系)를 병란(兵亂)으로 인한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자세히 알 수 없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여양유(呂良裕)를 시조(始祖)로 하며 그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성산(星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양유의 아들 위현(渭賢)이 고려(高麗)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던 손자 극회(克誨)가 조선(朝鮮)에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5세손 문승(文承)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중종(中宗) 때 학자(學者)로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던 희림(希臨)은 현량과(賢良科)에 합격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주(星州)에서 정주학(程朱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선조(宣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낸 대로(大老)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조선 말 의병장으로 임실군의 대운치(垈雲峙)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주목(柱穆)과 북간도(北間島)에서 이동녕(李東寧)․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세워 후진 교육에 힘쓴 독립 운동가 준(準) 등이 성산 여씨(星山呂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성산 여씨(星州․星山呂氏)는 남한(南韓)에 총 4,814가구, 19,8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안여씨(咸安呂氏)

함안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3가구 1,0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함양여씨(咸陽呂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시조(始祖) 여어매(呂御梅)는 중국(中國) 내주(萊州) 사람으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877년(신라 헌강왕 3년)에 신라(新羅)에 귀화하여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에 정착하고 고려(高麗)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어매(御梅)는 두 아들 임청(林淸)과 광유(光有)를 두었는데, 임청(林淸)의 후손 자열(子列)․자장(子章)․존혁(存赫) 3형제와 광유(光有)의 계통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어매(御梅)의 8세손 공계(公係)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고, 공계(公係)의 손자 칭(稱)은 조선(朝鮮)에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칭의 증손 자신(自新)은 뛰어난 무신(武臣)으로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거쳐 중종(中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안도(平安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부자(父子)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로 산수(算數)를 잘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유길(裕吉)과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를 지낸 우길(祐吉) 대(代)에서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가문은 더욱 번성하였다.

  유길(裕吉)의 아들 이징(爾徵)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고, 인길(裀吉)의 아들 이재(爾載)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이량(爾亮)의 아들 성제(聖齊)는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한 말

(韓末)에 와서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규형(圭亨)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한 운형(運亨)이 함양 여씨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 여씨(咸陽呂氏)는 남한(南韓)에 총 6,025가구, 25,1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흥여씨(咸興呂氏)

함흥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02가구 2,18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의령여씨(宜寧余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여씨(余氏)는 본래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 우리나라 여씨(余氏)의 연원(淵源)은 조(趙)․송(宋)나라 때 이르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오른 여선재(余善才)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려(高麗)에서 의춘군(宜春君)에 봉(封)해지고 의령(宜寧)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으면서 부터이다.

  그후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선재(善才)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한 현경(玄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여씨(余氏)의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외에도 12본이 나타나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직유(稷蕤)가 고려(高麗)에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검교장군(檢校將軍)을 역임하였고, 그의 손자 정(廷)이 군기감(軍器監)을, 정(廷)의 5세손 중엄(仲淹)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부전서(禮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중부(仲富)의 아들로 조선(朝鮮) 때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를 지낸 흥열(興烈)과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안주진 병마절도사(安州鎭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원경(元暻), 이조정랑(吏曹正郞)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낸 건(健)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여씨(宜寧呂氏)는 남한(南韓)에 총 3,432가구, 14,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곡산연씨(谷山延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연씨(延氏)는 본래 중국(中國) 남양(南陽)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려(高麗) 때 홍농(弘農) 출신인 연계령(延繼苓)의 7세손 연수창(延壽菖)이 제국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 고려 충렬왕비)를 배종(陪從)하고 고려에 들어와 곡산(谷山)에 정착(定着)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연씨(延氏)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11세손 주(柱)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라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으며, 주(柱)의 아들 사종(嗣宗)은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고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계령(繼苓)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연씨(延氏)의 본관(本貫)이 곡산(谷山) 외에도 개성(開城)․광주(廣州)․남양(南陽)․서원(西原 : 청주 별호)․충주(忠州) 등 36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의 연씨(延氏)는 곡산(谷山) 단일본으로 전한다.

수창(壽昌)의 아들 경(鏡)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과 태사(太師)를 역임한 명신(名臣)이었으며, 당대의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숙종(肅宗) 때 문장가(文章家)로 유명하였던 최적(最績)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올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으나 당쟁(黨爭)이 격화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學問)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덕물포(德物浦)와 삭녕(朔寧)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의병대장(義兵大將) 기우(基羽)와,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중심 인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병호(秉昊) 등이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산 연씨(谷山延氏)는 남한(南韓)에 총 6,300가구, 27,058명이 살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곡산연씨(谷山燕氏)

곡산연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66가구 3,2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개성염씨(開城廉氏)

개성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7가구 1,21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경주염씨(慶州廉氏)

경주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68가구 1,20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나주염씨(羅州廉氏)

나주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2가구 1,04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용담염씨(龍潭廉氏)

용담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4가구 1,26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창녕염씨(昌寧廉氏)

창녕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6가구 1,1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파주염씨(坡州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파주 염씨(坡州廉氏)는 중국(中國) 교목세가(喬木世家)의 후손(後孫) 염형명(廉邢明)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며, 그는 후당(後唐)의 국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신라(新羅)에 들어와 봉성(峰城)에 자리잡은 뒤 대사도(大司徒)를 지내면서 뿌리를 내렸다.

  그후 고려(高麗) 때 와서 후손 한(漢)이 문종(文宗) 때 무신(武臣)으로서 동해(東海)에 침입해 온 해구(海寇)를 격퇴하였고, 북변(北邊)을 침범한 동번족(東蕃族)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병부 상서(兵部尙書) ․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현손(玄孫)으로 전하는 신약(信若)은 명종대(明宗代)에 이름 난 명신(名臣)이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지낸 승익(承益)의 손자(孫子) 제신(悌臣)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원(元) 나라에 가서 평장사(平章事)로 있는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수학(修學)하며 원(元)나라 태정황제(泰定皇帝)의 총애를 받아 정동성 낭중(征東省郎中)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충숙왕(忠肅王)의 신임을 받았으며,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1354년(공민왕 3)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그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권신 신 돈(辛 旽)과 김흥경(金興慶) 등의 모함을 받았으나, 공민왕(恭愍王)은 끝까지 그를 신임했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와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를 지냈으며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제신(悌臣)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처음에는 봉성(峰城)으로 하였다가 곡성(曲城)으로 개관(改貫)하였으나 곡성현(曲城縣)이 서원(瑞原)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다시 서원(瑞原)을 본관(本貫)으로 삼았고,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와서 서원(瑞原)이 다시 파주(坡州)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재(現在)의 파주(坡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

를 이어왔다.

  염씨(廉氏)의 본관(本貫)은 파주(坡州)를 포함하여 광주(廣州)․개성(開城)․순창(淳昌)․담양(潭陽) 등 83본(本)까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모두가 파주 염씨(坡州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제신(悌臣)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는데, 맏아들 국보(國寶)가 공민왕(恭愍王)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고, 둘째 흥방(興邦)도 충목왕(忠穆王) 때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진 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엇으며, 특히 학문(學問)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막내인 정수(廷秀)는 1371년(공민왕 20)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동지밀직(同知密直)․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염씨(廉氏)는 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증(憎)과 서산 군수(瑞山郡守)와 단천 부사(端川府使)를 역임한 상항(尙恒), 상호군(上護軍) 종항(從恒)등이 뛰어났고,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우고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된 걸(傑)과 서(瑞)는 명문인 파주 염씨를 빛냈다.

  그외 세경(世慶)과 경(慶)․제립(珶立)․홍립(弘立)도 함께 창의(倡義)하여 임진왜란 때 공(功)을 세웠으며, 효자(孝子)로 이름난 상렬(相烈)․호(鎬)․진기(鎭基)․성대(性大)와 한 말(韓末)에 광복군 사친 온동(溫東) 등이 가문(家門)을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주 염씨(坡州廉氏)는 남한(南韓)에 총 12,099가구, 51,1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평염씨(坡平廉氏)

파평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2가구 1,3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부계․의흥 예씨(缶溪․義興芮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예씨(芮氏)는 중국(中國)에서 왔다고 하나 정확한 문헌(文獻)이 없어 선계(先系)를 알 수 없다.

  의흥 예씨(義興芮氏)의 시조(始祖) 예락전(芮樂全)은 문장(文章)과 덕망이 뛰어난 석학(碩學)으로 고려 인종(仁宗)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부계(缶溪 : 의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의흥(義興)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의하면 예씨(芮氏)의 본관(本貫)은 의흥(義興) 외에도 수원(水原), 남양(南陽), 청풍(淸風) 등 18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의흥(義興) 단본으로 전한다.

  조선(朝鮮)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승석(承錫)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락전(樂全)의 8세손으로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충년(忠年)은 1475년(성종 6)에 문과(文科)에 올라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한 인상(仁祥)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몽진(夢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흥래(興來)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계․의흥 예씨(缶溪․義興芮氏)는 남한(南韓)에 총 2,424가구, 9,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도예씨(淸道芮氏)

청도예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2가구 1,07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강화오씨(江華吳氏)

강화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178가구 6,53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주오씨(慶州吳氏)

경주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949가구 6,029명이 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성오씨(固城吳氏)

고성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44가구 2,75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와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창오씨(高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고창 오씨(高敞吳氏)의 시조(始祖) 오학린(吳學麟)은 고려(高麗) 정종(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를 지냈으며, 외적(外敵)을 토평한 공으로 고창(高敞)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고창(高敞)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질(質)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질의 아들 세문(世文)은 승보시(陞補試)에 장원(壯元)한 후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렀다. 세문의 형(兄) 세공(世功)과 동생 세재(世才)도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는데, 시(詩)와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었던 세재(世才)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李仁老) 등과 교우관계를 두터이 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세문(世文)의 증손인 계유(季孺)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으며, 계유(季孺)의 손자 엄(淹)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와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으며, 엄(淹)의 손자 원찬(原纘)은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그밖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던 운(澐)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커다란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近代人物)로는 3․1운동(運動)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 선 화영(華英)이 가문(家門)을 빛냈는데, 특히 그는 목사(牧師)로서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함양에 노력하였으며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당수(黨首)와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會長) 등을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창 오씨(高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380가구, 27,7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주오씨(公州吳氏)

공주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0가구 1,2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군위오씨(軍威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군위 오씨(軍威吳氏)의 시조(始祖) 오숙귀(吳淑貴)는 현좌(賢佐)의 둘째 아들로 고려(高麗)에서 벼슬하면서 군위군(軍威君)에 봉하여졌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이 군위(軍威)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동복 오씨(同福吳氏)에서 분적(分籍)한 뒤 본관(本貫)을 군위(軍威)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숙귀(淑貴)의 7세손 광계(光桂)가 고려에서 부위(副尉)를 역임했고, 광계(光桂)의 아들 경안(景安)이 천호(千戶)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성(晟)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맹을 떨쳤고, 석효(錫孝)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으며, 도환(道桓)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밖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도태(道泰)와 명기(命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재운(在運)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군위 오씨(軍威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5,067가구, 21,7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성오씨

금성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480가구 4,90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해오씨(金海吳氏)

김해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0가구 1,05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주오씨(羅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중엽에 진사(進士)를 지낸 오숙규(吳淑珪)로 전하며,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언(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선조(先祖)들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언(偃)의 5세손인 자치(自治)는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된 뒤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선조(先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겸(謙)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남원부사(南原府使)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이르고 금양군(金陽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주사고(全州史庫 : 실록을 보관하던 서고)의 실록(實錄)을 병화(兵火)로부터 잘 보존하는데 공(功)이 큰 희길(希吉)과,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효석(孝錫) 등이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오씨(羅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003가구, 26,2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낙안오씨(樂安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낙안 오씨(樂安吳氏)의 시조(始祖) 오사룡(吳士龍)은 고려(高麗)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내고 외적(外敵)을 토벌한 공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낙안군(樂安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낙안(樂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8세손 척지(陟之)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경연관(經筵官)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척지(陟之)의 아들 백안(伯顔)이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손자 원로(元老)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광주목(光州牧)의 교수(敎授)를 지냈다.

  이외에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철검(哲儉),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던 경홍(景弘)․경의(景毅) 형제와 희기(喜麒),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진 연(連)이 있다.

  무신(武臣)으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 참군(訓鍊參軍)을 지낸 흡(洽)과 역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역임한 시준(時俊),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덕근(德根)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낙안 오씨(樂安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1,774가구, 7,4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원오씨(南原吳氏)

남원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8가구 1,15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동복 오씨(同福吳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거란을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진 오 녕(吳 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녕(寧)의 손자 대승(大陞)이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증손 광찰(光札)이 대장군(大將軍)을, 5세손 선(璿)이 판판도낭사(判版圖郎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6세손 잠(潛)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져 대대로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 와서는 세현(世賢)의 아들 억령(億齡)과 백령(百齡) 형제가 유명하였는데, 억령(億齡)은 선조(宣祖) 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을 5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3회나 역임하였으며, 관직생활 동안 근검․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 탁월한 재질(才質)이 있었다.

  그의 동생 백령(百齡)도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지고 인조(仁祖) 때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들 형제의 후손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을 번성시켰는데, 억령(億齡)의 세아들 익(翊 : 승지를 역임)․정(靖)․전(전 : 교리와 지평을 역임)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한가(文翰家)로 이름을 날렸다.

  뿐만 아니라 백령(百齡)의 맏아들 준(竣)이 효종(孝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지춘추관사(知春秋官事)가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능했으며, 둘째 아들 단(端)은 인평대군(麟平大君 : 효종의 동생)의 장인(丈人)으로 장령(掌令)․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황해

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단(端)의 아들 모두가 뛰어나 정일(挺一)은 인조(仁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로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각 도(道) 관찰사(觀察使)․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정위(挺緯)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각 도(道) 관찰사(觀察使)와 각 조(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정창(挺昌)은 지평(持平)․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또한 백령(百齡)의 증손들도 매두 뛰어나 정일(挺一)의 아들인 시만(始萬)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교리(校理)와 이조좌랑(吏曹佐郞)․승지(承旨)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고, 정원(挺垣)의 아들 시수(始壽)가 현종(顯宗) 대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남인(南人)의 거두(巨頭)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정규(挺奎)의 아들인 시복(始復)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대사간(大司諫)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글씨에 능했다.

  이외에도 광운(光運)은 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했으며, 대익(大익益)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덕영(德泳)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복 오씨(同福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11,977가구, 50,6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부오씨(東部吳氏)

동부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88가구 3,4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보성오씨(寶城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보성 오씨(寶城吳氏)의 시조 오현필(吳賢弼)은 수권(守權)의 셋째 아들로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고종(高宗) 대 형(兄)인 현보(賢輔)․현좌(賢佐)와 함께 거란(契丹)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보성(寶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손자 한경(漢卿)은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고, 6세손 사충(思忠)이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과 좌상시(左常侍)를 역임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사충(思忠)은 좌명개국삼등공신(佐命開國三等功臣)이 되었고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를 지냈다.

  현필(賢弼)의 7세손 천복(天福)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고 보성부원군(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천복(天福)의 아들 점(漸)이 조선(朝鮮)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고려 말(高麗末)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몽을(蒙乙)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었고,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자경(子慶)은 단종(端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내고 이어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으며,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지낸 대남(大南)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서 거란군(契丹軍)에 항거하다 순절하여 후에 순절비(殉節碑)와 충신문(忠臣門)이 세워졌다.

  이외에도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천을(天乙)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연찰(延札),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른 집(執), 그리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른 성(誠) 등이 배출되어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12,341가구, 52,5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오씨(蔚山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시조(始祖)는 오연지(吳延祉)로, 고려(高麗) 때 군기감(軍器監)을 지내고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동남 변경(東南邊境)에 출몰한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하여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울산(蔚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손자 수천(受天)이 고려(高麗)에서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냈으며, 증손 식(湜)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를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 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5세손 흠로(欽老)는 세종(世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제용 판관(濟用判官) 및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지냈다.

  또한 이 괄(李 适)의 난 때 왕(王)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策錄)된 도남(道男)과 장사랑(將仕郞) 적남(迪男), 그리고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경사(經史)에 깊은 조예가 있어 덕망(德望)이 높았던 탁(琢) 등이 유명하였다.

  이외에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환(瓛),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른 필제(必濟),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찬웅(贊雄), 그리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한 병규(炳奎)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산 오씨(蔚山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60가구, 2,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흥오씨(長興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흥 오씨(長興吳氏)의 시조(始祖)인 오천우(吳天佑)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의 시조)의 6세손인 사충(思忠)의 둘째 아들로 조선조(朝鮮朝)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그후 후손들이 장흥(長興)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장흥(長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朝鮮)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섭의(燮宜)와 목사(牧使)를 지낸 신언(愼言), 그리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신행(愼行)이 있다.

  이외에도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맹을 떨친 계은(繼殷),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린(麟)과 언신(彦信)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오씨(長興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876가구, 3,89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오씨(全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전주 오씨(全州吳氏)의 시조(始祖) 오준민(吳俊玟)은 현필(賢弼 : 보성 오씨 시조)의 10세손으로 고려(高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완산(完山 : 전주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준민의 손자 현복(玄福)이 고려(高麗)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으며, 증손 순일(筍逸)이 평리사사(評理司事)․상서령(尙書令)을, 5세손 흠순(欽淳)이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순무사(巡撫使)를 지냈다.

  또한 흠순의 손자 긍은(肯殷)이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능성백(綾城伯)에 봉해졌으며, 긍은의 아들 무광(武礦)이 상장군(上將軍)을, 무광의 아들 희현(希鉉)이 고려(高麗) 말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조선조(朝鮮朝)에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과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홍균(弘鈞),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오른 홍엽(弘燁),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른 윤수(胤秀)와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홍철(弘鐵) 그리고 효자(孝子)로서 이름난 태은(泰殷)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오씨(全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402가구, 1,99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오씨(濟州吳氏)

제주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6가구 1,13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평해오씨(平海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평해(平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울진군(蔚珍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인데 고려(高麗) 초에 평해(平海)로 고쳤고, 현종조(顯宗朝)에 예주(禮州 : 영해)에 속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때 평해군(平海郡)으로 삼았으며 1913년 울진군에 병합하여 지금은 울진군에 속한 평해면(平海面)으로 남아있다.

  「평해오씨세보(平海吳氏世譜)」에 의하면 평해 오씨(平海吳氏)는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추증(追贈)되었던 오극중(吳克中)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후 후손들은 선조(先祖)들의 세거지(世居地)인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훌륭한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극중(克中)의 아들 종인(宗仁)은 고려(高麗)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으며, 손자 경(璥)은 조선조(朝鮮朝)에서 상호군(上護軍)․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고, 5세손 시의(時義)는 단종(端宗) 때 자선대부(資善大夫)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 가문의 번영을 누렸다.

  이외에도 문서(文瑞)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고, 문경(門慶)이 부호군(副護軍)을 득령(得齡)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오른 언록(彦祿)과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른 이화(以華), 그리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희팔(希八)과 더불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해 오씨(平海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302가구, 1,2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양오씨(咸陽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양 오씨(咸陽吳氏)의 시조(始祖) 오광휘(吳光輝)는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명종조(明宗朝)에 흥위위 상장군(興威衛上將軍)으로 명주(溟州)에 출몰한 외적(外敵)을 격퇴시킨 공(功)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에 책록(策錄) 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함양(咸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홍예(洪芮)가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라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며, 손자 유(裕)가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증손 세룡(世龍)이 조선(朝鮮) 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또한 세룡(世龍)의 아들 중원(仲元)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손자 엄(儼)이 대사헌(大司憲)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에종(睿宗)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치인(致仁)의 아들 응(凝)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한 세기(世紀)의 아들 건(健),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으로 활약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사운(思雲)의 아들 빈(玭)과 전한(典翰) 건(健)의 아들 장(長)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 오씨(咸陽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5,354가구, 22,1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평오씨(咸平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평 오씨(咸平吳氏)의 시조(始祖) 오 잠(吳 岑)은 현보(賢輔)의 넷째 아들로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으며, 삼중대광․검교․태자 태사(三重大匡․檢校․太子太師)를 역임하였고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함평(咸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잠(岑)의 아들 진후(進厚)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손자 사총(思摠)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였고 사총의 아들 공요(公孝)는 군기감 직장(軍器監直長)을 역임하여 훌륭한 가문(家門)을 빛냈다.

  이외에도 주부(主簿)를 지낸 손계(孫啓)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瑞), 그리고 효행(孝行)이 뛰어났던 영(齡)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평 오씨(咸平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747가구, 3,2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명오씨(海暝吳氏)

해명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0가구 1,18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주오씨(海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시조(始祖)로 오인유(吳仁裕)는 본래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大學士)로, 984년(성종 3) 고려(高麗)에 들어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海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조(高麗朝)의 인물(人物)로는 1107년(예종 2)에 윤 관(尹 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여 용맹을 떨쳤던 명장(名將) 연총(延寵)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이른 한경(漢卿), 그리고 광정(光庭)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朝鮮)에 와서도 가문을 빛낸 많은 인물들이 있었는데 인유의 14세손이며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의 아들인 윤겸(允謙)은 선조(宣祖) 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찰사(觀察使)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노서(老西)의 영수(領袖)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뒤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그의 조카 달제(達濟)는 병자첨화삼학사(丙子斥和三學士)의 한사람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瀋陽)으로 이송되어 윤 집(尹 集)․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뛰어났던 윤겸(尹謙)의 손자(孫子) 도일(道一)은 숙종(肅宗) 때 도승지(都承旨)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오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현손 명항(命恒)

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분무일등공신(奮武一等功臣)에 올라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또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숙종(肅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두인(斗寅)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의 아들 태주(太周)가 현종(顯宗)의 부마(駙馬)로서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자 원(瑗)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특히 영조에게 학문(學問)과 덕(德)을 닦는 요령을 진언하였고 옳다고 믿는 일은 직언(直言)을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원(瑗)의 아들 재순(載純)도 학문으로 당대에 뛰어났고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하여 부자(父子) 대제학(大提學)으로 이름이 났다.

  근대 인물(近代人物)로는 조선말(朝鮮末) 개화(開化)의 선각자(先覺者)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의 소장 정치인들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고취시켰으며 유대치(劉大致)․박규수(朴珪壽)와 함께 교우(交友)하며 개국(開國)을 주장하였고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룬 경석(慶錫)과, 3․1운동(運動)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이었던 그의 아들 세창(世昌)이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하여 가문(家門)을 더욱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들이다.

  이외에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옥사(獄死)한 동진(東辰)과, 한국 의학(醫學)의 개척자요 사회사업에 진력하여 많은 공을 세운 긍선(兢善), 그리고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문단에 나와 초창기 시단(詩壇)의 선구자였던 공초 상순(相淳) 등이 명문(名門) 해주 오씨(海州吳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90,842가구, 377,0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혜조오씨(惠朝吳氏)

혜조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808가구 6,01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순오씨(和順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화순 오씨(和順吳氏)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 시조)의 셋째 아들 오 원(吳 元)을 시조(始祖)로 하여 화순(和順)에 세거(世居)하면서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화순(和順)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원(元)의 7세손 순공(順公)이 고려(高麗)에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동정(同正)을 지냈고, 조선(朝鮮)에서는 상린(尙麟)이 영조(英祖)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사충(思忠)이 1404년(태종 4) 삼맹훈신(三盟勳臣)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화순 오씨(和順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64가구, 2,8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흥양오씨(興陽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흥양 오씨(興陽吳氏)의 시조(始祖)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 시조)의 아들인 오광휘(吳光輝)이다. 광휘의 아들 완(完)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면서 공이 있어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흥양(興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영로(寧老)가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大司憲)․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으며 후에 두원군(荳原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영로(寧老)의 둘째 아들 백창(伯昌)은 추장문과(秋場文科)에 급제하고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세조(世祖)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이어 도총관(都摠管)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졌다.

  이외 순손(順孫)이 좌찬성(左贊成)에 오르고, 식(植)과 중헌(重憲)이 부호군(副護軍)을, 계립(繼立)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흥양 오씨(興陽吳氏)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양 오씨(興陽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416가구, 1,7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제옥씨(巨濟玉氏)

거제옥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5가구 1,08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령옥씨(宜寧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옥씨(玉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淵源)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唐)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新羅)에서 국학 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宜春 : 의령의 별칭)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후손들이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옥 여(玉 汝)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갈라져서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으로 전하나 이는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규(珪)가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학문이 깊고 청렴결백했던 고(沽)는 조선(朝鮮) 정종(定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정언(正言)․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옥씨(宜寧玉氏)는 남한(南韓)에 총 4,622가구, 18,9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구온씨(金溝溫氏)

금구온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45가구 2,14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봉성온씨(鳳城溫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온씨(溫氏)는 중국(中國)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아우로 당(唐)에 봉해진 숙우(叔虞)의 12세손 소후(昭候)가 그의 아우 사(師)를 온(溫)에 봉하고 평원(平原)에 도읍을 정하게 하니 온씨의 성(姓)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씨(溫氏)의 본관(本貫)은 서원(西原)․온양(溫陽)․전주(全州)․이성(伊城)․나주(羅州)․평호(平호)․금구(金溝)․거야(巨野)․경주(慶州)․진주(晋州) 등 11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일혈족(同一血族)이므로 봉성(鳳城)으로 단일화(單一化)하고 있다.

  봉성 온씨(鳳城溫氏)는 멀리 삼국시대(三國時代)에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구려(高句麗) 때 평강공주(平岡公主)와 혼인하여 평원왕(平原王)의 부마(駙馬)가 된 온 달(溫 達)로부터 온씨의 혈통(血統)이 시작되어,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온군해(溫君解),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지낸 온 수(溫 粹)로 이어져 왔다.

  수(粹)의 아들 형제 중 맏아들 선(善)은 예의판사(禮儀判事)를 지냈고, 둘째 신(信)은 우부시랑(右部侍郞)으로서 공민왕(恭愍王) 때 이존오(李存吾)․정  추(鄭  樞)와 함께 신 돈(辛 旽)의 전횡(專橫)을 탄핵하다가 왕(王)의 노여움을 사서 거야(巨野 : 금구의 옛 지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신(信)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관향(貫鄕)을 봉성(鳳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신(信)의 아들 임(琳)과 손자 윤(潤)이 좌랑(佐郞)을 지냈고, 윤의 아들 후(厚)는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훤(喧)․순흥(舜興), 공조 참의(工曹參議) 수점(壽點), 병조 참판(兵曹參判) 정화(鼎和) 등이 유명했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주택(鑄澤)과, 숭조애족(崇祖愛族)의 정신이 투철하여 사현서원(四賢書院)을 창건하고 또한

금구 저수지를 설치한 사회사업가 성사(聖河)가 봉성 온씨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성 온씨(鳳城溫氏)는 남한(南韓)에 총 1,045가구, 4,3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릉왕씨(江陵王氏)

강릉왕씨 시조는 원보(元甫) 왕유(王裕)이다. 고려 태조의 아들로 강릉으로 분적하였다. 인물로  손자 왕총지(王寵之)는 시중이었으며 시호는 경숙공(敬肅公)으로 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왕예(王乂)는 시중(侍中)으로 한 파를 이룬다. 본래 김씨였는데 고려 태조가 왕씨를 사성(賜姓)하였다. 아버지는 대광(大匡) 김선희(金善希)이다. 현손(玄孫) 왕국모(王國髦)는 좌복사이었고 시호는 경(景)렬(烈)공(公)이고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왕예의 13세손 왕탄지는 벼슬이 군사로 비로서 김성으로 복성(復姓)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49가구 1,52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개성왕씨(開城王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누대(累代)에 걸쳐 송악(松嶽)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高麗)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된 국조(國祖)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의 증손(曾孫)으로서 후삼국(後三國)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문호(門戶)를 연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資質)이 비범하였다. 그는 스무살 때 태봉국왕(泰封國王)인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정벌(征伐)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왕 건은 궁예(弓裔)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궁예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져 민심(民心)이 어지러워지자 918년(고려 태조 1) 신숭겸(申崇謙)․홍 유(洪 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 중신(重臣)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후 34대 왕조(王朝)에 걸쳐 4백 75년동안 왕씨(王氏)의 찬란한 문화는 꽃을 피웠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업(王業)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하여 전(全)․옥(玉)․금(琴)․전(田)씨 등으로 변성(變姓)하고 혈맥(血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正祖) 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還姓)하고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렇게 뼈져린 수난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왕씨(王氏)는 교서감(校書監)을 지낸 미(亹)를 시작으로 하여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흥(興)은 선비(善妃 : 우왕의 비)의 아버지로 우왕(禑王) 초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이르렀다.

  강원도 영월(江原道寧越)까지 호송하고 돌아왔으며, 인조(仁祖) 때 부제학(副提學)에 오른 희걸(希傑)은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의성(義成)은 선조(宣祖)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주(淸州)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그밖에 한말(韓末)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재일(在一)은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남한(南韓)에 총 4,456가구, 18,7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천 용씨(洪川龍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홍천 용씨(洪川龍氏)의 시조(始祖) 용득의(龍得義)는 고려(高麗) 때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1241년(고종 28)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만드는 불사(佛事)를 총 지휘 하였으며, 강원도(江原道) 홍천군(洪川郡) 북방면(北方面)에 용수사(龍遂寺)를 창건하여 불전(佛典) 전수와 불교(佛敎) 전파에 여생을 바쳤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홍천(洪川)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홍천(洪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용씨(龍氏)의 본관(本貫)은 홍천(洪川)․경주(慶州)․양근(楊根)․용인(龍仁) 등을 비롯하여 20여 본(本)이 있으나, 이는 모두가 홍천 용씨(洪川龍氏)의 분파세거지(分派世居地)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홍천(洪川) 단일본(單一本)으로 전한다.

  용씨(龍氏)의 득성유래(得姓由來)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상고(上古)시대의 부족사회가 동물의 이름을 따서 부족의 명칭으로 불렀다고 전해 내려온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득의(得義)의 6세손 희수(希壽)가 이태조(李太祖) 잠저시(潛邸時)에 오랫동안 시종한 공으로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고 공조(工曹)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천기(天奇) 역시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정종(定宗)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판서(判書)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또한 진충호종공신(盡忠扈從功臣)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서연(瑞衍)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낸 맹손(孟孫),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운 협(協),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책록된 운(雲)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천 용씨(洪川龍氏)는 남한(南韓)에 총 2,748가구, 11,7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천우씨(木川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우씨(于씨)는 중국(中國)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性)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 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高麗)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그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武臣)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매우 위태로웠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연척 관계로 무사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종(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 색으로 입게 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 하여 풍토(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 하여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우씨(木川于氏)는 남한(南韓)에 총 282가구, 1,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주(영천)우씨(剛州(永川)禹氏)

강주는 영천의 별칭이다. 강주(영천)우씨 시조는 예빈시 승(禮賓寺丞) 우윤성(禹允成)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21가구 2,24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경주우씨(慶州禹氏)

경주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94가구 3,1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양우씨(南陽禹氏)

남양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24가구 1,60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단양우씨(丹陽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우씨(禹氏)는 중국(中國) 계통(系統)으로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後裔)라 전한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우씨(禹氏)의 연원(淵原)은 우 현(禹 玄)이 고려(高麗) 초 중국(中國)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현(玄)은 정조 호장(正朝戶長)을 지냈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현(玄)의 10세손 현보(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현(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단양(丹陽) 외에도 예안(禮安)․영천(榮川)․강주(剛州) 등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며 현재는 단양 우씨(丹陽禹氏) 단일본으로 전해진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현(玄)의 6세손인 중대(仲大)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중대(仲大)의 맏아들 천규(天珪)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둘째 아들 천계(天啓)가 판서(判書), 셋째 천석(天錫)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 등 모두 현달하여 가문을 빛냈다.

  고려(高麗)말의 석학(碩學)이며 우리 나라 최초의 역학(易學)을 개척한 중대(仲大)의 손자 탁(倬)은 서릿발 같은 기개로 충선왕의 패륜(悖倫)을 극간하였던 당대의  명신이다.

  그의 호(號) 역동(易東)은「동방에 역학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라는 뜻으로 세인(世人)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탁(倬)의 손자 현보(玄寶)는 1355년(공민왕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단양 우씨(丹陽禹氏)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오른 맹선(孟善)과 선조(宣祖) 때 남인(南人)의 거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전공을 세워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성전(性傳),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창적(昌積) 등이 유명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관서(關西) 지방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의병장 동선(東鮮),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덕순(德淳),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만주(滿洲)에 군사학교(軍事學校)를 설립하여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재룡(在龍) 그리고 세계적인  육종학자(育種學者)로 이름을 날인 장 춘(長 春)은 단양 우씨(丹陽禹氏)를 빛낸 인물들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남한(南韓)에 총 36,704가구, 152,2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달성우씨(達城禹氏)

달성은 대구의 별칭이다. 달성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9가구 1,0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안동우씨(安東禹氏)

안동우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5가구 1,2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강원원씨(江原元氏)

강원원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77가구 2,68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경주원씨(慶州元氏)

경주원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08가구 2,25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원주 원씨(原州元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원씨(元氏)는 중국(中國) 하남(河南)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양왕(襄王:제18대 왕, 재위기간 : 기원전651~619)때 위대부(衛大夫)에 봉해진 원훤(元咺)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 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祖)는 643년(고구려 보장왕 2) 당(唐)나라 태종(太宗 : 제2대 왕, 재위기간 : 627~649)이 고구려(高句麗)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사람인 원 경(元 鏡)이다.

  원주(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원씨(元氏)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운곡공계(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원성백계(原成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시중공계(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원충갑(原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극유(克猷)의 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가 되었다.

  각 계통별(系統別)로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운곡공계(耘谷公系)에서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의 7세손 천석(天錫)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高麗) 말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득세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고향인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이 당세에 유명하여 방원(芳遠 :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신조(新朝)에 불사(不仕)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여러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이 그를 만나러 치악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악산 계곡으로 피신하여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았다.

  태종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下賜)하고 돌아와서 천식의 아들 형(泂)을 풍기 감무(豊基監務)로 삼았으며, 태종이 앉았던

바위는 <태종대(太宗臺)>로 불렀다고 한다.

  운곡(耘谷) 천석은 치악산에 묻혀 살며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회고하는 야사(野史) 6권과 시사(詩史) 2권을 저술하여 운명할 때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그리고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불에 태웠다고 한다.

  운곡(耘谷)의 증손 보륜(甫崙)은 세종(世宗) 때 지평(持平)과 교리(校理)를 역임했고, 6세손 황(鎤)은 선조(宣祖) 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진해(振海)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筆名)을 떨쳤다.

  고려 개국공신(考慮開國功臣)으로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던 극유(克猷)의 후손에서는 좌복야(左僕射) 진(瑨 : 극유의 9세손)의 아들 부(傅)가 고려 원종(元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長事)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는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고금록(古今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한편 첨의평리(沾衣評理) 선지(善之 : 부의 손자)의 아들 송수(松壽)는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王)을 호종하여 피난한 공(功)으로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그 울분으로 병사했다. 특히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송수의 아들 상(庠)은 고려말에 김 저(金 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색(李 穡)과 함께 혹형을 당한 끝에 정몽주(鄭夢周)의 구제소(救濟疏)로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隱居)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났었던 창명(昌命 : 상의 아들)은 세종(世宗) 때 조견례(朝견見禮)르 올리려 궁전에 들었을 때 난간에 중(憎) 옷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임금에게 배알하여 “상감께서는 신 돈(辛 旽)이 나라 망친 일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 금중(禁中)에 승니(僧尼)의  자취가 있으니 전철을 밟을까 저어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인맥(人脈)으로는 별장(別將) 헌(憲)의 아들 호(昊)가 유명했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王位) 찬탈 음모가 무르익어 가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원주(原州) 남송촌(南松村)에 은거(隱居)하였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내쫓기자 호(昊)는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조석(朝夕)으로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예(禮)를 다했으며, 단종이 사사(賜死)당하자 3년 상을 치르고 원주 옛 집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이 수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번 볼 수 없었을 만큼 폐문 불출하였다.

  세조(世祖)의 좌익 공신인 조카 효연(孝然 : 원산군 황의 아들)이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찾아와 문 앞에서 뵙자고 간청했으나 그는 방 안에서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세조가 호조 참의(戶曹參議)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죽거든, 업어다 앉히라”고 과격하게 불응했다.

  어느날 강원도 관찰사가 도사처럼 평복차림으로 호를 찾아 갔을 때 야인 인줄로만 알고 나가 맞았다가 보니 관찰사라 손을 내두르며 도망쳐 방안에 들어가서 고리를 잠그고 자기 마음에 때가 묻었다고 통곡해 울었다고 하며, 앉은나 누우나 반드시 장릉(莊陵 : 단종 묘)이 있는 동(東)쪽으로 머리를 향했고, 그가 사는 남송촌도 관부(官府)에 가까워  그 오예(汚穢)의 기운이 젖어 든다는 이유로 보다 골짜기가 진 주천현(酒泉縣) 산골로  들어가 평생을 마치었다.

  임진왜란 때 아들 유남(裕男)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호(豪)는 김덕수(金德壽)의 문인(門人)으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1567년(명종 22) 무과(武科)로 진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미포(龜尾浦)․마탄(馬灘)․운무(雲霧) 등지의 작전에서 전공을 올려 적진(敵陣)을 여주에서 완전히 봉쇄했던 지장(知將)이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북로(北路)의 왜군 토벌  임무를 맡고 김화(金化)로 진군 도중 적의 복병을 만나 포위되어 깊은 산 낭떠러지 끝으로 몰리게 되자 투신하여 살신(殺身)하였다. 적군은 호(豪)의 머리를 잘라 김화(金化) 고을 성문(城門)에 매어 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귀순했는데 원 호만이 우리에게 항거하였기로 이같이 벌을 준다>라는 글귀를 써붙여 놓았다.

  특히 호는 청백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은(銀)의 고장인 단천(端川)의 군수(郡守)로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은반지 하나를 사 낀 일이 있었다. 이를 본 호는 <은고지(銀庫地) 원으로서 은물건을 우리집에 두다니……>하며 아내와 물건을 사온 종을 매질하고는 은가락지를 빼앗아 버렸다.

  호의 아들 유남(裕男)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용력(勇力)으로 이름을 떨쳤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 3등공신(政社三等功臣)으로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유남과 함께 인조반정에 유공하여 정사 2등공신으로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던 두표(斗杓)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영부사(御營副使)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비했고, 효종(孝宗) 때 좌찬성(左讚成)․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목사(牧使) 명귀(命龜)의 아들 경하(景夏)가 영조(英祖) 때 이조 및 병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副事)로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문장(文章)과 검소한 생활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계손(繼孫)은 시(詩)․서(書)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져 학문(學問)과 충절(忠節)을 지켜 온 원주 원씨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남한(南韓)에 총 24,538가구, 102,7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원씨(全州元氏)

전주원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9가구 1,08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고흥위씨(高興魏氏)

고흥위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4가구 1.1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이다.

 

 

 

長興魏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晋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唐)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경(魏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경(鏡)의 동래설(東來設)은 또 다른 설(設)이 있는데, 신라(新羅) 왕(王)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고도 한다.

  경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候)․아찬(阿湌)․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懷州 : 장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장흥위씨(長興魏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晋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唐)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경(魏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경(鏡)의 동래설(東來設)은 또 다른 설(設)이 있는데, 신라(新羅) 왕(王)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고도 한다.

  경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候)․아찬(阿湌)․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懷州 : 장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인데 신라 때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해 있다가 고려 때 영암(靈岩)에 소속되고, 인종(仁宗)때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었다.1265년(인종 6)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장흥부가 되었다. 그 이후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에  장흥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면 폐합에 따라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 남상(南上)․남하(南下) 양면을 용산면(容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 1942년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고, 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신라말(新羅末)에 대각관 시중(大覺官侍中)을 역임한 위창주(魏菖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위씨(魏氏)의 본관(本貫)은 13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는 장흥(長興) 단본으로 전한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창주(菖珠)의 5세손 계정(繼廷)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원개(元凱)가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10세손 온(溫)이 문하시중과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에 와서도 위씨(魏氏)의 가문은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는데, 덕의(德義)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가 의

주(義州)로 몽진(蒙塵 :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감)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석 달을 걸어  의주(義州)까지 찾아가 왕(王)을 모시는 충성을 보여, 명(明)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으로부터 “동국(東國)의 산은 오직 천관(天冠 : 장흥에 있는 산)이요, 사람은 덕의(德義)가 있을 뿐이다.”는 극찬을 받았다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공을 세우고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된 대용(大用)과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조전장(助戰將)으로 율포(栗浦)․목포(木浦)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이른 대기(大器), 그리고 영조(英祖)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한 창조(昌祖) 등이 있다.

  이외에도 호남(湖南) 실학(實學)의 거목 백규(佰圭)는 시(詩)․서(書) ․화(畫)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린 조부(祖父) 세보(世寶)로부터 글을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천문(天文)․역학(易學)․지리(地理) 등을 모두 섭렵하여 당대의 석학(碩學)으로  이름났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세철학(經世哲學)을 체계화했으며 90여권의 책을 저술하여 백과전서격 학문을 집대성하고,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이나 앞서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그려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위씨(長興魏氏)는 남한(南韓)에 총  5,420가구, 22,7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산위씨

관산위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32가구 1.5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강화위씨(江華韋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위씨(韋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팽조(烹調)의 손자(孫子)가 위(韋)땅에 봉해졌음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 나라 위씨(韋氏)는 중원(中原) 출신인 위수여(韋壽餘)가 960년(고려 광종 11) 동래(東來)하여 사선관(司膳官)을 거쳐 목종(穆宗)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현종(顯宗) 초에 치사(致仕)를 상소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 받은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으로 강화백(江華伯)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은 강화(江華)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시조의 후손 근영(瑾英)이 고려 인종(仁宗)때 소감(少監)을 역임했으며, 원(元)은 몽고(蒙古)의 내침으로 강화(江華)에 천도하는 왕(王)을 호종하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의령 현감(宜寧縣監)과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事)를 역임한 조(組)가 간신(奸臣)들의 모략으로 평안도 영유(平安道永柔)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그 곳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자 그를 낙향시조(落鄕始祖)로 삼고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세조 조(組)의 9세손 관(觀)이 1689년(숙종 1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찰방(察訪)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후 홍성군수(洪城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상소문(辭退上疏文)을 올리자 왕명(王命)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이건창(李建昌)과 함께 고군도(古郡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풀려 나와 영유(永柔)에서 일생을 마치자  후손들은 위촌(韋村) 뒷산 주마현(走馬峴)에 솟대를 세우고 그의 영광(榮光)된 유업(遺業)을 영원히 기렸다.

  그외 인물로는 효행(孝行)이 뛰어난 정려(旌閭)가 내려졌던 응표(應豹)와「백석창화집(白石唱和集)」을 남겨 문명(文名)을 떨쳤던 관식(觀植)이 유명했으며, 병식(秉植)과 달식(達植)은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신명(身命)을 바쳐 강화 위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 위씨(江華韋氏)는 남한(南韓)에 총  351가구, 1,4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유씨(江原兪氏)

강원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501가구 4,8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康津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강진 유씨(康津兪氏)의 시조(始祖) 유 적(兪 迪)은 강진(康津)에 토착(土着)한 사족(士族)으로 고려(高麗)말에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조상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강진(康津)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적(迪)의 아들 신(信)은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고, 증손(曾孫) 의정(義貞)이 찰방(察訪)을, 7세손 성망(聖望)이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진 유씨(康津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3,540가구, 15,8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화유씨(江華兪氏)

강화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2가구 1,17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경주유씨(慶州兪氏)

경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905가구 9,50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고흥유씨(高興兪氏)

고흥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836가구 9,13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신라(新羅) 때 아찬(阿凔)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가 기계 호장(杞溪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후 기계 유시는 의신(義臣)의 종파인 동정공파(同正公派)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君) 승추(承樞)의 계통인 월성군파(月城君派)와 동정(同正) 진적(晋迪)의 계통인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등 크게 열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기계 유씨는,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 여해(汝諧)의 후손인 전서(典書) 현(顯)의 아들 효통(孝通)이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의약에 정통하여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藥用植物)을 정리한「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 문명(文名)을 떨쳤다.

  한편,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의 유명한 응부(應孚)는 기계 유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특히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壯)하고, 활쏘기를 잘하여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응부(應孚)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평안도 병마절제사(平安道兵馬節制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禍)를 입었다.

  친국(親鞠)을 받을 때 세조(世祖)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하니 응부가 말하기를 “잔치 날을 당하여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의 고발한 바 되었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하였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 다리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가죽과 살이 다 익었다. 응부는 얼굴빛이 변치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하며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는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렸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는 양식이 떨어졌다. 그의 죽음을 듣고 아내가 원통해 한 것은 그의 원통한 죽음이 아니라 살았을 때 한번 잘 먹고 잘 자보지 못했던 가난을 가엾이 여겨 울었다고 하며, 관에서 역적이라 하여 가산을 몰수하는데 갖고 나간 것이 짚자리 한 장  뿐이었다고「동각잡기(東閣雜記)」와 「추강집(秋江集)」에 적고 있다.

사재감 주부 여해(汝諧)의 7세 손 참판(參判) 해(解)의 아들인 기창(起昌)은 연산군 때 만포진 첨제절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직간(直諫)을 하다가 다른 동료 세 사람과 함께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이들은  날마다 산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죽음의 사자(使者)가 바다를 건너오는가를 기다리고 살았다.

  어느 날 기창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안 사람과 영결(永訣)한 후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그 도사가 가져온 전갈은 교사령(絞死令)이 아니라 중종반정의 소식과 그를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그의 아들 여림(汝霖)은 한림(翰林)으로 기용한다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갈을 보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마땅히 예전 임금을 위하여 울어야겠다.”하며 자리를 깔고 북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통곡하고는 한양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라고 하고, 자신은 고향인 비인(庇仁)으로 돌아가서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 신주(神主)에 옛 벼슬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만 쓰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 그 많은 국신(國臣) 가운데 연산군에게 학대받고 연산군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사람은 홍언충(洪彦忠)과 유기창(兪起昌) 두 사람 뿐이었다.

  기창의 아들 여림(汝霖)과 여주(汝舟)는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의 기묘현량(己卯賢良)으로, 형인 여림은 예조 판서를 지냈으나 아우 여주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書藝)로 일생을 마쳤으며 글씨에 뛰어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다.

  여림의 아들 강(絳)은 중종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병조 참판과 한성부 판윤, 공조․호조 판서를 지냈다.

  특히 그는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글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의 유생(儒生)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서 훌륭한 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謀叛事件)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삼등공신(平難三等功臣)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던 홍(泓)은, 여림의 손자이며 생원(生員) 관(綰)의 아들로 종계변무(宗系辨誣)에도 공을 세워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석학(碩學) 조 식(曺 植)에게 극찬을 받았다.

  대수(大修 : 진사 함의 아들)는 선조 때 주서(注書)와 전적(典籍)을 거쳐 형․호․예조의 좌랑(佐郞)을 지내고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등 10년 간 외직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대칭(大稱 : 강의 손자)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대일(大逸)의 아들 백증(伯曾)은 성품이 강직하여 권신에 아부하지 않기로 유명하여 말직에만 머물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때 공을 세워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고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탄핵하여 <충박신(忠朴臣)> 또는 <유충박(兪忠朴)>으로 불리웠다.

  그가 경상감사로 나가 윤선도(尹善道)의 실정(失政)을 녹박했고, 대사간으로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를 물러나게 했으며, 이조 참판으로서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 혹평하고 하옥(下獄)을 청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부총관(副摠管)으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하여 화의(和議)를 주장한 윤 방(尹 昉)과 김 유(金 瑬) 등의 처형을 상소하여 파직되는 등 강직한 척화파(斥和派)로서 누차 직언(直言)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탑(御榻)을 붙들고 떼를 쓰며 늘어지므로 인조도 백증(伯曾)의 고집 때문에 무척 골치를 앓았다고 하며 <유고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한다.

  효종조의 명신이며 학자로 유명한 계(棨 : 참봉 양증의 아들)는 윤리(倫理)와 예법(禮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항거했던 인물로, 사학(史學)에 밝았으며 숙종(肅宗) 때 간행된 그의 저서(著書)인「가례원류(家禮源流)」를 중심으로 노소론(老少論)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그외 숙종 때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글씨에 능했던 하익(夏益 : 수증의 손자)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내고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서인(西人)의 가장 과격한 문신(文臣)으로 남인 타도에 앞장섰던 명일(命一 : 선공감역 비의 아들),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한 소론 일당을 숙청했던 명웅(命雄), 영조 때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던 명홍(命弘) 등이 뛰어났으며, 목사(牧使) 명건(命健)의 아들 최기(最基)는 병조 참의를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시문(詩文)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언술(彦述)과 더불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밖의 인물로는 1787년(정조 11)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언호(彦鎬 : 우윤직기의 아들)가 좌의정을 거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렸고, 한전은 순조 때 백년(百年)이래의 대 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아 서예(書藝)에 능했던 한지(漢芝),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신환(莘煥),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판서에 오른 치선(致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한말(韓末)에 한성부민회장(漢城府民會長)을 지낸 길준(吉濬)은 새 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을 기초한 진오(鎭午)와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기계 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23,437가구, 97,3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안유씨(務安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무안 유씨(務安兪氏)의 시조(始祖) 유순직(兪舜稷)은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역임하고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장사(長沙)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그후 증손(曾孫) 천우(千遇)가 고종(高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원종조(元宗朝)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지낼 때 김인준(金仁俊) 등과 함께 최 의(崔 誼)를 주살(誅殺)하는데 공을 세웠다. 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충렬왕(忠烈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사후(死後)에 무안부원군(務安府院君)에 추봉(追封)됨으로서 후손들이 이적(移籍)하여 본관(本貫)을 무안(務安)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천우(千遇)의 아들 영원(永元)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올라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좌복야(左僕射)․전공시랑(典工侍郞)등을 지냈으며, 손자 윤수(允粹)도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천의 증손(曾孫)인 희익(希益)이 역학(易學)․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으며, 희익의 증손 세호(世豪)는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안 유씨(務安兪氏)는 남한(南韓)에 총2,879가구, 12,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동유씨(仁同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인동 유씨(仁同兪氏)의 시조(始祖) 유승단(兪升旦)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사부(師傅)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고 최우(崔瑀)와 함께 강화(江華)에서 송도(松都)로 환도(還都)하는데 공이 있어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졌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고려(高麗)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한 유승석(兪承碩)을 중조(中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인동(仁同)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인동(忍冬)은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수동현(壽同縣)이라 하다가 삼국통일 후에 인동현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약목현(若木縣) 등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선조 때 인동부(仁同府)로 승격되고 1895년 인동군이 되었으며, 1914년 군이 폐지되고 그 일부 지역은 인동면이 되었다.

  승석(承碩)의 아들 수기(守基)가 별장(別將)을 지냈고, 손자 서(瑞)가 승봉랑(承奉郞)과 중문지후(中門祗侯)를, 증손 요(堯)가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역임했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요(堯)의 아들 사철(師哲)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했고, 손자 헌(獻)이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그리고 헌(獻)의 4세손 진(鎭)이 세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ㆍ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을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官修撰官)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동 유씨(仁同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995가구, 4,0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유씨(晉州兪氏)

진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477가구 7,78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창원유씨(昌原兪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창원 유씨(昌原兪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한 유 섭(兪 涉)으로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상고할 수 없다.

  그후 후손들은 창원(昌原)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창원(昌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섭(涉)의 아들 경(冏)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증손 귀생(貴生)이 조선 초(朝鮮初)에 공부 전서(工部典書)를, 현손(玄孫) 상지(尙智)가 직제학(直提學)을, 그리고 상지의 아들 조(造)는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하여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명종(明宗) 때 효자(孝子)로 명성을 떨쳤던 언겸(彦謙)은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호조참판(戶曹參判)과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창(瑒)과 그의 아들 득일(得一)은 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며, 경종(景宗) 때, 형․공조판서(形․工曹判書)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집일(集一)등이 당대에 뛰어났다.

  이외에도 장령(掌令)을 거쳐 필선(弼善)을 지낸 신일(信一)과 영조(英祖) 때 사마양시(司馬兩詩)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오른 숭(崇)이 창원 유씨(昌原兪氏)의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2,361 가구, 9,971명이 살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평유씨(坡平兪氏)

 


파평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38가구 1,50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동향의 파주유씨(坡州兪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풍산유씨(豊山兪氏)

풍산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37가구 2,29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하회유씨(河回兪氏)

 


하회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07가구 1.12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무송유씨(茂松庾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유씨(庾氏)는 본래 중국(中國)계통으로 한(漢)나라 말기와 진(晋)나라 초기에 유순유(庾筍悠)가 우리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건너와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유씨(庾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후 후손(後孫) 유금필(庾黔弼)이 정서 대장군(征西大將軍)․도통 대장군(都統大將軍)을 역임하면서 고려 개국(高麗開國)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통합삼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으로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조상의 세거지(世居地)인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금필(黔弼)의 5세손 녹숭(祿崇)이 고려 숙종(肅宗) 때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 빈객(太子賓客)․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무송(茂松)에 세거(世居)하게 되자 무송(茂松)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대표적 인물(人物)로는 금필(黔弼)의 손자 방(方)이 고려 성종(成宗) 때 거란군(契丹軍)의 침입을 격퇴하여 전공을 세우고 현종(顯宗) 때 병부 상서(兵府尙書)겸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또한 예종(睿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른 녹숭(祿崇)의 아들 필(弼)이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고 손자 응규(應奎)가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공부 낭중(工部郎中)에 올랐으며 청렴하기로 이름 높아 「여옥군자(如玉君子)」라 불렀다.

  응규의 아들 자량(資諒)은 고종(高宗) 때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여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지낸 석(碩), 우승선(右承宣) 경현(敬玄) 등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을 지낸 귀산(龜山)과 태종(太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오산(鰲山),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득시(得時), 그리고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한 순도(順道) 등이 유명하였

다.

  이외에도 시인(詩人)이자 바둑 국수(國手)였던 찬홍(纘洪)과 독립운동가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도모한 광복투사 장순(昌淳)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송 유씨(茂松庾氏)는 남한(南韓)에 총 2,222가구, 9,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산유씨(平山庾氏)

평산유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411가구 4,2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의 조선조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강남유씨(江南劉氏)

강남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709가구 5,4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강릉 유씨(江陵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거창 유씨(居昌劉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도시조(都始組) 유 전(劉 荃)의  9세 손 유승비(劉承備)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벼슬이 누진하여 좌복야(左僕射)로 치사했고, 그의 증손(增損) 창(敞)이 조선 개국 2등공신(朝鮮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 말에 둔촌(遁村) 이 집(李 集 : 학자)이 목은(牧隱) 이 색(李 穡)에게 좋은 사위감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목은은  자기 문하(門下)에 재주꾼이 많지만 권 근(權 近)과 유 창(劉 敞)을 당해 낼 재주는 없다 하자 이  집(李  集)은 유  창을 사위로 맞이했다고 한다.

  특히, 창은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어 소요산(逍遙散)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 대제학(大提學)․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역임한 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창의 증손 한량(漢良 : 이조 좌랑 계주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진주성(晉州城) 방어에 참전,  왜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

자 죽창(竹槍)으로 대전했으나 성(城)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으며, 창의 현손(玄孫) 세분(世玢)은 진원 현령(珍原縣令)으로 나가 청백(淸白)한 정사(政事)로 소문났었다.

  참판(參判) 선보(善寶)의 아들 호인(好仁)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며, 학문(學文)에 열중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1574년(선조 7) 여름,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祈雨) 할 결심으로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정좌(正坐)하고 기원하면서 나무에 불을 지르니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왕(王)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하사했다.

  특히 호인(好仁)은 일생을 낙천적으로 살았는데, 자기가 사는 동명(洞名)을 자하동(紫霞洞), 자기 거처를 정정당(定靜堂), 바깥  사랑채를 불우당(不憂堂), 집앞에 있는 못을 완료호학지심지(琓妙好學之心池)라 이름하고 풍류와 환락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밖에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나갔던 덕문(德文)과 전주(全州)에서 <유효자(劉孝子)>로 유명했던 경달(景達)이 뛰어났으며, 그의 아들 기원(基源)은 가뭄 때 기민(飢民) 구휼에 훌륭한 업적을 남겨, 효(孝)와 충(忠)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동원(凍原 : 경달의 아들), <효도삼대(孝道三代)>의 정맥(旌脈)을 이은 병관(秉瓘 : 동원의 아들)과 함께 강릉 유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38,844가구, 161,6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유씨(江原劉氏)

강원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7가구 1,27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강화유씨(江華劉氏)

강화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28가구 1,32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개성유씨(開城劉氏)

개성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4가구 1,0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거창유씨(居昌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유씨(劉氏)는 중국에서 계출 된 성씨로 우리 나라 유씨(劉氏)의 연원(淵源)은 유 방(劉 邦)의 41세손으로 송나라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유 전(劉 筌)이 8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경북 영일군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후 전(筌)의 맏아들인 유견규(劉堅規)가 거타(居陀 : 거창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거창(居昌)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견규의 동생 견구(堅矩)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견구(堅矩)의 아들 웅열(雄悅)이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졌고, 견규(堅規)의 손자 성(成)이 추밀원 부사(樞密員副使)와 대장군(大將軍)을, 증손 찬(贊)이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한작(漢灼)과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한 해(海), 그리고 어모장군(御侮將軍)에 이른 귀손(貴孫)이 유명하였으며, 특히 한우(旱雨)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낼 때 중국(中國) 황제(皇帝)의 부름에 따라 기우제관(祈雨祭官)으로 판견되어 3일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니 한재(旱災)가 계속된 중국 대륙(中國大陸)에 비가 내렸다 한다. 이에 황제(皇帝)가 크게 기뻐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거창 유씨(居昌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7,667가구, 32,7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주유씨(公州劉氏)

공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5가구 1,33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광주유씨

광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9가구 1,21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배천유씨(白川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배천 유씨(白川劉氏)의 시조(始祖) 유국추(劉國樞)는 도시조(都始祖) 유 전(劉 筌)의 8세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되고 배천군(白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국추(國樞)를 시조로 받들고 거창 유씨(居昌劉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배천(白川)으로 하게 되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국추의 아들 승(升)이 고려 명종(明宗 : 제19대 왕, 재위 기간 : 1170~1197) 때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한 후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졌으며, 손자(孫子) 현(賢)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여 명망을 떨쳤다.

  한편 대제학 현(賢)의 맏아들 시준(時俊)은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한 후 부흥군(復興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보국(補國 : 통정대부)과 서(瑞 : 장군)의 형제가 뛰어났으며, 현(賢)의 막내아들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던 여준(汝俊)과 임진왜란 때 무명(武名)을 떨쳤던 후손 극량(克良)이 유명했다.

  선조(宣祖) 초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극량(克良)은 위장(衛將)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3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죽령(竹嶺)을 수비했으나 패전하고 수어사(守禦使) 신 할(申 硈)의 참모가 되어 임진강(臨津江) 방어 작전을 수행했다. 적의 파죽지세로 한강(漢江) 수비에 패하고 한양(漢陽)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선조(宣祖)가 북으로 피난 가는 와중에 임진강에서 적과 8, 9일간 대치하는데 무슨 수작인지 적은 그들의 병막(兵幕)을 모두 태우고 후퇴하였다.

  이에 수어사 신 할(申 硈)이 적이 쾌퇴한다 하여 진격을 하명하자 극량은 “적이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니 경솔하게 진격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장의

명령에 항명한다고 하여 참형(斬刑)하려 했으나 좌우가 말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우군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도강하여 진격하다가 적의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신 할(申 硈)도 죽고 극량도 군사들을 지휘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그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개성(開城)의 숭절사(崇節詞)에 배향되어 배천 유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이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배천 유씨(白川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2,123가구, 8,9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유씨(安東劉氏)

안동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7가구 1,00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진주유씨(晉州劉氏)

진주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937가구 9,44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충주유씨(忠州劉氏)

충주유씨 시조는 호장 유공저(劉公著)이다. 인물로 유긍달(劉兢達)이 태사(太師)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는데 고려 태조비 순성왕후(順成王后) 아버지로 한 파를 이룬다. 유총거(劉寵居)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한 파를 이룬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97가구 1,5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파평유씨(坡平劉氏)

파평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48가구 2,83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풍산유씨(豊山劉氏)

풍산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45가구 2,40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관성육씨(觀城陸氏)

관성육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4가구 1,32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강릉윤씨(江陵尹氏)

강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30가구 2,45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경주윤씨(慶州尹氏)

경주윤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한 윤통(尹統)이 호조참판을 지냈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43가구 1,68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은 미상이다.

 


남원윤씨(南原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남원 윤씨(南原尹氏)의 시조(始祖) 윤 위(尹 威)는 윤신달(尹莘達:파평 윤씨의 시조)의 8세손으로, 1176년(고려 명종 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를 거쳐 기거랑(起居郞)․이부 낭중(吏部郎中)․예빈소경(禮賓少卿) 등을 지냈고, 1200년(신종 3)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호남(湖南)에 갔을 때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수(郡守)가 제압치 못하고 안렴사인 위(威)에게 고(告)하자 단기(單騎)로 적도(賊徒)를 해산 시키고 난을 평정(平定)하여 그 공(功)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서 살면서 파평 윤씨(坡平尹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남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그러나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필명(筆名)이 높았던 이규보(李奎報)가 쓴 <국자사업윤공애사(國子司業尹公哀辭>에 의하면, 윤 위(尹 威)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윤 관(尹 瓘)의 후손으로 덕(德)과 인품(人品)과 문장(文章)을 갖추었으며, 술을 몇 말씩 먹는 호주가인데도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다가 죽었는데 남원 사람들이 그의 공을 생각하여 장례비를 모아 남원 땅에 묻히게 하여 후손들이 남원에 살면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공민왕 9) 부(府)로 승격, 1739(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 남원군이 되었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맥(人脈)으로는, 아성(牙城)의 전란에 순절한 극민(克敏 : 시조 위의 아들)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함안백(咸安伯)에 봉해진 돈(敦)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시조의 현손으로 평리(評理)를 지낸 수균(守均)의 아들 황(璜)은 고려 말에 전서(典書)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開國)에 두문불사(杜門不仕)하여 충절을 지켰다.

  현령(縣令) 신을(莘乙)의 현손(玄孫)인 효손(孝孫)은 어릴 때부터 효행(孝行)이 뛰어나 그의 할아버지가 효손(孝孫)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처관(處寬)이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가 되어 이른 새벽에 정승집의 문 앞에 가서 명함(名啣)을 드리니 문지기가 정

승이 주무신다는 핑계로 명함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날이 저물도록 기다렸다가 시장하고 피곤하여 할 수 없이 돌아와 아들 효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재주가 없는 탓으로 이런 욕을 당하니 너는 마땅히 학업에 근실하여 네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하였다.

  효손이 그 명함 끝에 글을 쓰기를 <정승이 해가 높도록 단잠 자는데, 대문 앞 명함 꼭지에는 털이 났도다. 꿈 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 보거든, 그때에 토악(吐握)하던 수고를 물어 보소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 명함 끝에 글을 쓴 것도 모르고 다시 찾아가 명함을 드렸다. 정승이 그 시를 보고는 즉시 불러 들여 묻기를 “이것은 네가 쓴 것이냐”하자 처관은 놀라고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글자의 획을 살펴보니 바로 그의 아들이 쓴 것임을 알고 마침내 사실대로 말하니 정승은 효손을 불렀다.

  효손을 본 정승은 총명하기가 보통 아이와 다르므로 매우 칭찬하였다. 이때 정승은 사위감을 고르고 있던 터라 들어가서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좋은 사윗감을 얻었소”하며 그 사실을 말하자, 부인은 “안됩니다. 우리 딸을 어찌 녹사(錄事)의 아들과 혼인시키겠습니까” 하였다.

  정승은 부인의 반대를 듣지 않고 마침내 효손을 사위로 삼았다.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박원형(朴元亨 : 영의정)이 효손의 명성을 듣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정승은 바로 박원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효손은 영의정의 사위로 문과중시(文科重試)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다. 특히 그는 당세에 뛰어난 효자(孝子)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아버지가 죽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시묘(侍墓) 하였고, 묘가 10여 리나 떨어져 있어도 매일 아침마다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는 반드시 걸어서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후에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 그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음식은 반드시 그의 정성을 드린다 하여 관아에 작은 부엌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손수 음식을 만들었다. 그는 몸소 사냥을 해서 손수 음식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리고 명절날이면 술상을 올리면서 스스로 아래와 같은 곡조(曲調)를 지어 불렀다.

  <북쪽에는 둔산령(屯山嶺)이 있고, 남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있으니, 이 두 산의 수(壽)를 빌려다가 만년토록 어머니를 받들리라> 하였다. 노래를 부르고는 일어나 춤을 추어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일이라면 아이같은 행동이라도 서슴치 않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영찬(英贊)의 8세손 결(潔 : 정랑 시걸의 아들)은 중종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주서(注書)가 되어「유구풍속기(瑜球風俗記)」를 저술했다. 뒤에 부수찬(副修撰)이 되어「시정기(時政記)」필화 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名世)를 위해 변명 하다가 진복창(陳復昌)의 무고로 죽음을 당했다.

  특히 그는 시문(詩文)에 능하여 유배지(流配地)에서 뿐만아니라 죽음에 임해서도 태연히 하고 싶은 말을 시(詩) 속에 담아 읊었다.

  임진왜란 때 상주성(尙州城)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섬(暹)은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으로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추봉 되었고, 그의 손자 계(棨)․집(集)․유(柔)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계(棨)는 인조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리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려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꿇어 않히려는 적 앞에 목이 끊겨도 되놈 앞에서 무릎을 못 꿇겠다고 버티다가 발이 잘리었다. 그는 발이 없는 것과 꿇는 것과는 다르다고 굴복하지 않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계(棨)의 아우 집(集)은 병자호란 때 화의를 극력 반대했다가 척화론자(斥和論者)로 몰려 청(淸)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심양(瀋陽)의 서문(西門) 밖에서 죽음을 당하여 척화 <삼학사(三學士)>로 불리웠으며, 그의 아우 유(柔)도 두 형의 죽음에 뜻을 세워 청나라 입김이 스며든 조정에 불사(不仕)하고 효도(孝道)와 문행(文行)으로 여생을 마쳐 가장 강력한 척화가문(斥和家門)으로 절의(節義)를 세웠다.

  그밖의 인물로는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숙종 때 사화(士禍)에 절의를 지켜 <금세지이련(今世之二連)>으로 송시열의 극찬을 받았던 이건(以健 : 유의 아들)과 이성(以性)이 유명했고, 기(祈)는 임진왜란 때 도망치는 감사(監司)를 욕하고 성(城)을 사수하여, 병자호란에 순절한 형지(衡之)와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척화로 절의(節義)를 세운 형준(衡俊)과 함께 남원 윤씨의 절맥(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8,767가구, 37,8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평윤씨(南平尹氏)

남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8가구 1,07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무송윤씨(茂松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무송 윤씨(茂松尹氏)의 선대는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다가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윤양비(尹良疪)가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역임하여 무장현호장(茂長縣戶長)의 택호를 받게 되자 양비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송(茂松)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양비(良疪)의 증손(曾孫)인 문정공(文貞公) 택(澤)이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택(澤)의 손자 소종(紹宗)은 이 색(李 穡)의 문인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장원(壯元)한 뒤 조선(朝鮮)에서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지낼 때「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회군삼등공신(回軍三等功臣)에 올랐고 수문전 학사(修文殿學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과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소종(紹宗)의 아들인 회(淮)는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종(世宗) 때 맹사성(孟思誠)․신장(申檣)과 함께「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하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주호(酒豪)로 이름이 났었다.

  회(淮)의 손자(孫子) 자운(子雲)은 병조와 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을 걸쳐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자운(子雲)의 5세곤 형(泂)은 선조(宣祖)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이외에도 근대(近代)에 와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선 세복(世福)․세주(世冑)․호(皓) 등이 무송 윤씨(茂松尹氏)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0가구, 10,3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윤씨(文化尹氏)

문화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1가구 1,19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밀양윤씨(密陽尹氏)

밀양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5가구 1,0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예천윤씨(醴泉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예천 윤씨(醴泉尹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에서 추밀부사(樞密府使)를 지내고 예빈시 소윤(禮賓寺小尹)에 추증(追贈)된 윤 충(尹 忠)이다. 그후 후손(後孫)들이 누대(累代)에 걸쳐 예천(禮泉)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예천(醴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충(忠)의 아들 신서(臣瑞)는 조선(朝鮮)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충의 손자 상(祥)이 태조(太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사예(司藝)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밖에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낸 창문(昌文),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이흥(以興)․참판(參判)을 역임하였던 계후(繼후)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천 윤씨(醴泉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443가구 1,9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윤씨(全州尹氏)

전주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7가구 1,04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칠원윤씨(漆原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 때 태자 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영(始榮)의 아들 황(璜)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高麗)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거부(鋸富)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17세손 길보(吉甫)가 삼중대광 첨의찬성사(三重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고 귀성군(龜城郡)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칠원(漆原)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였다. 정경공(貞景公) 저(抵)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으며 제 2차 왕자의 난(王子의 亂) 때 태종(太宗)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칠원군(漆原君)에 봉(封)해졌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한 석보(碩輔)는 호당(浩當)에 뽑혔고 관찰사(觀察使)․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현령(縣令) 이(伊)의 아들 탁연(卓然)은 명종(明宗) 때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형조․이조 판서(刑曹․吏曹判書)를 거쳐 종계변무(宗系辨誣)하여 광국삼등공신으로 칠원군(漆原君)에 봉해졌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이외에도 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과 함께 신임(辛任)이 삼포의(三布衣)로 이름난 지술(志述)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사국(師國),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은 형은(衡殷)․치민(致珉) 등은 칠원 윤씨(漆原尹氏)의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10,815가구 , 44,8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태평윤씨(太平尹氏)

태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647가구 5,0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은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기울고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창업에 훈고을 세운 명신(名臣)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용연보감(龍淵寶鑑) 」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고 발(足)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姓)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시조 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 2등공신(璧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그후 신달의 현손(玄孫) 관(瓘)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宣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내고, 1107년(예종 2)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등 9지구에 성(城)을 쌓아 참범하는 여진을 평정(平定)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번(璠) 세조(世祖)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

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번(璠)의 아들 삼형제(三兄第)중 맏아들 사분(士昐)이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영동령부사(領敦寧府事)에, 둘째 아들 사윤(士昀)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셋째 사흔(士昕)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름으로써 형제 정승(政丞)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사분(社昐)과 사흔(士昕)의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王妃)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政治的)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곤(坤)은 정종조(定宗朝)의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파령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1408년(태종 8)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온 후 세종(世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올랐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호(壕 : 곤의 손자)는 성종비(成宗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뒤 영돈령부사(寧敦寧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필상(弼商)은 세조(世祖) 때의 총신(寵臣)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낼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우참찬(右參贊)에 특진(特進)되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하여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공을 세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으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약(賜藥)을 받았다.     필상(弼商) 증손(曾孫) 현(鉉)은 1537녀(중종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종중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한 뒤 호조 판서(戶曹判書)․돈령부사(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난「국간집(菊磵集)」을 저술했다.

  목사(牧使) 은(垠)의 아들로 세종(世宗) 때 좌찬성(左贊成)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사로(師路)는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때 좌익공익(左翼功臣)에 책록되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택(澤)의 아들 헌주(憲注)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후,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파령 윤씨(坡平尹氏)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지내고 기로소(妓老所)에 들어간 강(絳)과 그의 다섯 아들 지미(趾美)․지선(趾善)․지완(趾完)․지경(趾慶)․지인(趾仁) 형제가 크게 현달(賢達 )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그 중에서 현종(顯宗) 때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병․이․공조 판서(兵․吏․工曹判書) 등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지선(趾善)과 숙종(肅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파령군(坡平  君) 에 봉해진 비경(飛卿)과 그의 손자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봉구(鳳九)는 학행(學行) 뛰어난〈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고, 봉오(鳳五)는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른 봉조와 함꼐 명성을 떨쳤다.

  당대의 덕망높은 학자였던 심형(心衡)은 비경(飛卿)의 증손으로 영조(英祖) 때 부제학(副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속종(肅宗) 때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증(拯)은 수차에 걸쳐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 등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당시 격렬한 사색 당쟁(四色黨爭)에 깊숙이 가담하여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송시열(宋時烈) 중심의 노론(老論)에 대항하며 이산(尼山)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종(仁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오른 인경(仁鏡)과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이른 동도(東度)가 뛰어났으며, 학자(學者)로 명망(名望) 높은 정(鼎)과 경남(景男). 낙(洛)등은 학문으로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이름난 준희(俊熙)와 창석(昌錫)․기섭(기燮)․해(海)․애경(愛卿)․석구(錫求)․현진(顯振) 등이 구국(救國)의 신념(信念)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으로 일본군(日本軍)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의사(義士) 봉길(奉吉)은 학문(學問)고 충절의 전통 가문인 파평 윤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평 윤씨(坡平尹氏) 남한(南韓)에 총 154,496 가구, 646,6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안윤씨(咸安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辛達)의 8세곤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진 윤 위(尹威)의 손자(孫子)인 윤희보(尹希輔)를 시조로 받든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대 흥위위주부(興威衛主簿)를 지내고 함안(咸安)에 정착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함안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희보의 아들 기(頎)가 의랑(議郞)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로 제학(提學)을 지낸 희(禧)와 상시(常侍)를 역임한 당(당) 형제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희(禧)의 증손(曾孫)인 기견(起견)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문종(文宗) 대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서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연산군 때 부원군(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각(慤)은 진사(進士) 익상(翊商)의 아들로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로서 청(淸)나라 사신(使臣)과 함께 백두산(白頭山)의 경계를 사정(査定)하고, 삼국 수군통제사(三軍水軍統制使)를 거쳐 총융사(摠戎使)를 지냈다. 그외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낸 의검(義儉)과 태연(泰淵) 등이 명망높은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1,388가구, 6,1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평윤씨(咸平尹氏)

함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69가구 4,49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동향인 다경윤씨(多慶尹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

 

 

 

해남윤씨(海南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해남 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고려(高麗) 중기 때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과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상고(祥考)할 수 없다.

  그후 7세손까지의 소목(昭穆)도 미상(未詳)하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직장(司醞直長)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단학(丹鶴) 형제를 데리고 해남(海南)으로 은둔(隱遁)하여 그 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 한 8세손 광전(光전)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자리를 잡고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온 해남 윤씨는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대(代)에 와서 크게 가세(家勢)가 융성하여 가문의 기반이 다져졌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던 구(衢 : 효정의 맏아들)는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호당(湖當)에 뽑히고 주서(注書)에 어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삭직당해 영암(靈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복관(復官)되었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윤선도(尹善道)․류희춘(柳希春)․최 부(崔溥)․임억령(林億齡) 등과 더불어 〈해남 오현(海南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의중(毅中)도 명종조(明宗朝)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직제학(直提學)과 예조 참의(禮曹參議)․승지(承旨)․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동지 춘추관사(冬至春秋館事)를 겸직했고,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572년(선조 5) 평안도 관찰사와 이듬해 병조 참판(兵曹參判)․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가 동인(東人)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삭출되었다.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로 관찰사 유기(惟機)에게 입양했던 고산(孤山) 선도(善道)는 혼조의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와 은거지에서 생활하며 시가(詩歌)의 미답지를 개척하고 우리말의 새로운 뜻을 창조

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었고 우리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616년(광해군 8) 서른 살 때 일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서 북인(北人)의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영의정(領議政) 박승종(朴承宗)의 전횡을 고발하는 항소(抗疏)를 올려 지루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는 시(詩)를 읊기를 좋아했으나 쓰기를 싫어했다고 하며 일생을 경륜(經倫)과 절의(節義)로 살았으며, 울분은 문학으로 발산했다. 문학과 함께 인품으로도 명망을 받았던 고산은 그를 못살게 하였던 정적(政敵) 원두표(元斗杓)가 앓아 누웠을 때 갖가지 비약(秘藥)을 써서 낫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효종(孝宗)의 스승이기에 임금은 항상 고산을 가까이 두고 싶었으나, 당시 성세(盛勢)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逡吉) 등 집권자들에 의하여 가혹한 정치적인 보복을 받았다.

  고산은 74세때 최악의 유배지라는 삼수(三水 : 함경남도 벽지)에 귀양갔다가 81세에 풀려나서 해남의 연동(蓮洞)에서 생을 마쳤다.

  효종(孝宗)이 세자(世子)였을 때 수원(水原)에 살면서 고산을 항상 곁에 두고 싶어 집을 지어 주었는데, 효종이 작고한 뒤에 그 집을 뜯어 배로 고향인 해남 연동에 옮겨 지금도 남아 있다.

  그밖에 해남 윤씨를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형인 륜(綸)을 비롯, 아들․조카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신(神)이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다시 전장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절하여 화암사(花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치경(致敬)과 동철(東喆)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함께 순절하였다.

  그외 많은 인물들이 국난극복에 신명을 바쳐 앞장섰으며, 고산의 증손(曾孫) 두서(斗緖)는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통하여 현 재(玄齋) 심사정(沈師正)․겸 재(謙 齋) 정 선(鄭 歚) 등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불리웠고, 그의 아들 덕희(德熙)도 맹영광(孟永光)의 영향을 받아 말(馬)과 신선(神仙)을 잘그려 아버지인 두서(斗緖)과 함께 <쌍절>로 일컬어졌다.

  구한말에 와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기(廷琦)가 경사(經史)와 문장에 정통했으며 송(宋)나라 미불(米芾)의 서체(書體)를 터득한 글씨를 필명을 떨쳤다.

  주찬(柱瓚)은 고종(高宗)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다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위해 결사대를 편성하는 등 항일투쟁에 공헌하여 의절(義節)과 학문(學問)의 전통가문인 해남 윤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18가구, 48,7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평윤씨(海平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해평 윤씨(海平尹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판공부사(判工部事) 등을 역임한 윤군정(尹君正)이다.

  군정(君正)의 아들 만비(萬庇)가 충렬왕(忠烈王) 때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후에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손자(孫子) 석(碩)은 충숙왕(忠肅王) 때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으로 우정승(右政丞)․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등을 지내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군되어 원(元)나라로부터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의 직위(職位)를 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해평(海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충혜왕(忠惠王) 때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석(碩)의 아들 지표(之彪)가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와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진(珍)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해평군(海平君)에 봉군되어 가문을 빛냈다.

대호군(大護軍) 보(寶)의 아들 가관(可觀)은 우왕(禑王) 때 경상도부원수(慶尙道부元帥)로 함양(咸陽)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낸 창(彰)과 함께 현달하여 이름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첨정(僉正)을 지낸 훤(萱)의 아들 은보(殷輔)가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교검(校檢)으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직,「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하고 중종(中宗) 때 좌찬성(左贊成)․우의정(右議政) 등을 거쳐 1537년(성종 32)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대사성(大司成) 은필(殷弼)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오른 두수(斗壽)는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宗系辯誣)의 공(功)으로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대사헌(大司憲)․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두수(斗壽)는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나 문징명

체(文徵明體)에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슬하의 다섯 아들이 모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아우 근수(根壽)와 함께 명성을 날려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그중에서도 맏아들 방(昉)이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부자영상(父子領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둘째 흔(昕)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셋째 휘(暉)가 우찬성(右贊成)과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고, 넷째 훤(暄)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막내인 우(旴)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러 훌륭한 가문임을 널리 알렸다.

  방(昉)의 아들 이지(履之)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역임하였고, 신지(新之)는 선조(宣祖)의 부마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소모대장(召募大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또한 순지(順之)는 훤(暄)의 아들로 예조판서(禮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曾孫)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유(游)와 이조 참판(吏曹參判) 및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고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오른 순(淳)이 당대의 명필(名筆)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급(汲)은 글씨가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란 독특한 서체(書體)를 이루었으며, 정조(正祖) 때 여러 판서(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른 기동(耆東)은 가문(家門)을 한층 빛낸 인물이다.

  명문(名文)과 명필(名筆)로 명성을 얻은 근수(根壽)는 성리학에 능하였고「사서토석(四書吐釋)」․「월정집(月汀集)」등의 저서(著書)를 남겼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내고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辯誣)를 하고 돌아와 대사헌(大司憲)․형조 판서(刑曹判書)․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등에 올랐다. 이 황(李 滉)․조 식(曹 植)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고, 성 혼(成渾)․이 이(李 珥)와도 친분을 두터이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그 밖에 은보(殷輔)는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승길(承吉)은 찬성(贊成)에 올라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으며, 승훈(承勳)은 승길(承吉)의 아우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덕망높은 가문을 유명하게 하였다.

  근대 인물(人物)로는 택영(澤榮)의 딸인 윤비(尹妃)가 방(昉)의 후손이고, 구한말(舊韓末)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에서 군부 대신(軍部大臣)을 지낸 웅렬(雄烈)과 그의 아들 치호(致昊)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평윤씨(海平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5,489가구, 22,75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부은씨(高阜殷氏)

고부은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34가구 1,7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동향의 우일은씨(雨日殷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달성은씨(達城殷氏)

달성은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4가구 1,11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동향(同鄕)의 대구은씨(大邱殷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행주은씨(幸州殷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행주 은씨(幸州殷氏)의 시조(始祖) 은홍열(殷洪悅)은 신라왕조에서 벼슬이 태자태사(太子太師)․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고 덕양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행주(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은씨의 본관(本貫)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태인(泰仁)․명곡(椧谷)․행주(幸州) 등 9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본관(本貫)은 행주 은씨(幸州殷氏) 단본(單本)으로 알려진다.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을 보면 정(鼎)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고 학문(學問)이 뛰어나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후진을 길러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한 장손(長孫)의 아들인 여림(汝霖)은 1396년(태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헌납(右獻納)․경력(經歷) 등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오른 현(顯)과 해주 판관을 지낸 보(輔) 형제가 가문을 중흥시켰고, 그외 현종(顯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화(鼎和)는 최서림(崔瑞琳)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아 일명「상계선생(相溪先生)」으로 불리워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행주 은씨(幸州殷氏)는 남한(南韓)에 총 2,975가구, 12,1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괴산음씨(槐山陰氏)

괴산음씨는 서리(胥吏)의 성이었으나 고려 문종조에 음정(陰鼎)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40가구 2,0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죽산음씨(竹山陰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음씨(陰氏)는 본래 중국(中國) 시평(始平)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음씨(陰氏)의 본관(本貫)은 죽산(竹山)․괴산(槐山)․경주(慶州)․여주(驪州)․충주(忠州)․음성(陰城) 등을 비롯하여 24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죽산 음씨(竹山陰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죽산 음씨(竹山陰氏)의 시조(始祖) 음 준(陰 俊)은 원(元)나라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陪從)하고 고려(高麗)에들어와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때부터 우리나라 음씨(陰氏)의 연원(淵源)을 이루었으며, 후손들이 죽산(竹山)에 세거(世居)하면서 관향(貫鄕)을 죽산(竹山)으로 삼게 되었다고 「죽산음씨족보(竹山陰氏族譜)」에 기록되어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인 준(俊)의 아들 철(澈)이 조선(朝鮮)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철(澈)의 아들로 소경(少卿)을 지낸 곤(崑)과 판사(判事)를 역임한 윤(崙)의 대(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외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기남(起南)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희철(希哲)이 유명했으며, 부호군(副護軍) 도광(道光)은 공조참의(工曹參議) 성석(聖惜), 참봉(參奉) 인수(仁洙)․인성(仁星)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죽산 음씨(竹山陰氏)는 남한(南韓)에 총 706가구, 2,9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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