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이씨(加里李氏)

가리는 성주의 속현이다. 가리이씨 시조는 고려 충렬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승휴(李承休)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66가구 1,95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가평이씨(加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신라(新羅)때 완산 호장(完山戶長)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8세손 기문(起文)이 조종(朝宗 : 가평의 옛 지명)에 이거(移居)하여 본관을 조종(朝宗)으로 삼았다.

  그후 29세손인 춘계(椿桂)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그의 증손 형손(亨孫)이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功)으로 가평군(嘉平郡)에 봉해 졌으며 지명의 변천으로 조종(朝宗)이 가평(加平)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本貫)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형손(亨孫)의 8대조(八代祖)로 호장(戶長)을 지낸 진수(珍守)를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춘계(椿桂)의 손자 다림(多林)과 증손인 윤손(允孫)․형손(亨孫) 형제가 유명했다. 다림(多林)은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부총관(副摠管)에 이르렀으며, 윤손(允孫)은 정종(定宗) 때 등과하여 문종조(文宗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형손(亨孫)은 1447년(세종 2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전라도 부절제사(全羅道副節制使) 겸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고 1492년(성종 23) 우림위장(羽林衛將)에 이어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했다.

  그외 병조 참판(兵曹參判) 장생(長生)과 현감(縣監)을 지낸 장경(長卿), 임진왜란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명백(命百)과 경종(景宗)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제태(齊台)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066가구, 18,6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릉이씨(江陵李氏)

강릉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35가구 4,1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양이씨(江陽李氏)

강양은 합천의 별칭이다. 강양이씨 시조는 사재감영(司宰監令) 이초(李超)이다. 합천이씨 시조 이개의 후손으로서 합천이씨와 같은 근원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82가구 1,90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진이씨(康津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강진 이씨(康津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남해왕(南海王) 때의 사람인 이 완(李 完)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며,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에 오른 진(珍)을 일세조(一世祖), 강진(康津)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진(珍)의 아들 석(碩)이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산원 동정(散員同正)을 지냈고, 손자 영기(英奇)는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은거(隱居)하여 조선조(朝鮮朝)에서 수차 벼슬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功)을 세운 터(攄)는 진(珍)의 증손(曾孫)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목사(牧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인문(人文)은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부제학(副提學) 만균(萬鈞)은 중종(中宗) 대 문과에 올라 경연관 참찬관(經筵官參贊官)을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지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그외 학자(學者)로 이름난 사경(思敬)과 효자(孝子) 상기(象璣)가 있었고, 근대에 와서는 봉수(鳳洙)가 독립운동가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진 이씨(康津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488가구, 69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화이씨(康華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강화 이씨(江華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태자태보(太子太保)를 역임한 이대평(李大平)이다. 그가 삼한벽상공신(三韓璧上功臣)으로 하음(河陰 : 강화의 고호)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화(江華)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대평의 아들 개(玠)가 군기소감(軍器少監)을 거쳐 호부시랑(戶部侍郞)을 역임했으며, 손자 백원(白元)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또한 백원의 아들 돈인(敦仁)이 소감(少監)을 지냈으며, 돈인의 손자 당문(唐文)이 첨사(詹事)를 지내 가문을 중흥심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 이씨(江華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74가구, 3,7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령이씨(開寧李氏)

개령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88가구 1,9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개성이씨(開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개성 이씨(開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차감(李次瑊)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녹사(綠事)․영동정(令同正) 등을 역임하고, 개성부윤(開城府尹)을 지냈으며 누대(累代)에 걸쳐 개서(開城)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왔다.

  그후 덕시(德時)가 고려에서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고, 조선(朝鮮) 개구에 공(功)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덕시(德時)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청주 이씨(淸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덕시(德時)의 아들 등(登)이 계천위(啓川尉)에 봉해졌고 1422년(세종 4) 개성군(開城郡)에 개봉(改封)되었다.

  또한 세종(世宗) 때 과거에 오른 선(宣)은 덕시의 손자로 판서(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광세(匡世)는 세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외 화가로 이름난 명기(命基)는 사과(司果)를 역임한 종수(宗秀)의 아들로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1796년(정조 20) 왕의 초상화를 그려 더욱 유명해졌으며, 환후(瓛垕)는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이씨(開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530가구, 7,2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이씨(開城李氏)

개성이씨 시조는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 이개(李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인물로 아들 이등(李簦)은 태조의 부마로 계천위(啓川尉)에 봉해졌다.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683가구 5,4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거창이씨(居昌李氏)

거창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78가구 1,90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기이씨(京畿李氏)

경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782가구 5,32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남이씨(慶南李氏)

경남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1가구 1,20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북이씨(慶北李氏)

경북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77가구 2,06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산이씨(京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경산 이씨(京山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정종(定宗) 때 악거 부정(樂居副正)을 지낸 이덕부(李德富)이다.

  그가 계림(鷄林)에서 경산(京山)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경산(京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덕부(德富)의 5세손 호(祜)가 고려에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祜)의 손자(孫子) 합(珨)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유(成裕)의 아들 감(瑊)과 미(瑂)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는데 장남 감(瑊)은 부윤(府尹)을 지냈다.

  흥문(興門)은 조선조(朝鮮朝)에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엽(曄)은 중랑장(中郞將)을, 형천(亨天)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이 외에도 이조 좌랑(吏曹佐郞) 병흠(秉欽)을 비롯하여 학자(學者)로 이름난 현창(鉉昌)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산 이씨(京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875가구, 7,9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성이씨(鏡城李氏)

경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2가구 1,0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의 6부(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다스렸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신라 말에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우리 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 이씨는 대체로 고려 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學者)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소판공 거명의 9세손 총섬(寵暹)이 고려 성종(成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오인유(吳仁裕)․남궁 원청(南宮元淸)․이윤관(李允貫) 등과 더불어 오묘(五廟 : 제후의 묘)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으며, 국자감(國子監)에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설립함으로써 면학의 기풍을 고취 시켰다.

  한편 총섬의 7세손인 핵(翮 : 문하평리를 지내고 상서좌복야에 추증)의 아들 인정(仁挺)․진(瑱)․세기(世基) 3형제와 손자(孫子) 5형제가 모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壯元及第)하고 서사(書史)와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쳐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으며, 특히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으로 임해군

(臨海君)에 봉해진 진(瑱)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문(詩文)에 뛰어나 아들 3형제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당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후의 석학(碩學)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익재(益齋) 제현(薺賢)은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議贊化功臣)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일곱 왕조(王朝)에 네 번이나 상부(相府)에 올라 정사(政事)를 돌보며 당대의 명 문장가(名文章가)로 외교문서에 통달했었다.

  특히 익재는 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元)나라 조맹부(趙孟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이를 널리 유행시켰고, 그의 저서(著書) 「익재난고(益齋亂藁)」의 소악부(小樂部)에 칠언절구 한시(漢詩)로 번역하여 실은 17수(首)의 민간가요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다정한 문우(文友)였던 지대(之帶 : 한성판윤을 지냄)와 세조(世祖) 때 좌리3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철견(鐵堅),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경산(慶山)과 초계 현령(草溪縣令)을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을규(乙奎)가 뛰어났고,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임해군(臨海君)에 추봉되었던 달존(達尊 : 익재 제현의 아들)의 6세손 공린(公麟 : 평안 감사 윤인의 아들)은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의 사위가 되었는데, 슬하에 아들 8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공린의 장가 들던 날 집안이 청빈(淸貧)하여 폐백을 대 광주리(竹筐)에 담아 가지고 갔는데, 장모 이씨(李氏)가 예절을 모른다고 나무라자 박팽년은 “내가 이 사람을 고른 것이 이 까닭이오”라고 하였다.

  장가 든 첫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명이 절하면서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져 죽게 되었는데, 만약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읍니다.”하며 애원하였다. 공린은 잠에서 깨어나 신부에게 물으니 자라 여덟 마리를 사다 부엌에 두었다고 말했다.

  당시 첫날 밤을 지낸 신랑에게 저역을 보강하는 뜻에서 자라를 고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놀란 공린이 자라를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게 하였으나 자라 한 마리가 빠져 달아나니, 종이 삽을 가지고 잡으려다가 잘못하여 그 목을 끊어 죽였다. 그날 밤에 또 꿈을 꾸니 7명의 첨지가 와서 감사하다고 절을 하였다.

  그 후에 공린은 아들 8형제를 낳아 이름을 오(鼇)․구(龜)․원(黿)․타(鼉)․별(鼈)․벽(鼊)․경(鯨)․곤(鯤)으로 지었는데, 모두가 재주와 명성이 뛰어났고 문장과 행의(行義)로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셋째 원(黿)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니 세상 사람들은 앞서 삽 끝에 목이 잘려 죽은 한 마리 자라의 옛일과 맞아 떨어졌다고 했다.

  특히 원은 문행(文行)이 뛰어나 순숙(筍淑)의 아들 8형제를 비유한 <순씨팔룡(筍氏八龍)>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명(慈明)과 같다는 칭찬을 받았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시호(諡號)를 주는 관청의 태상(太常)에 있으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하자고 의논하였다는 죄목으로 나주(羅州)에 유배되었다. 갑자사화 때 죄가 가증되자 종이 원을 업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는 “임금의 명(命)은 피할 수 없다.”하며 끝내 형벌에 다달아 굽히지 않으니 연산군(燕山君)이 더욱 노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별(鼈)은 형인 원과 함께 울면서 작별하고 과거의 뜻을 단념한 채 평산(平山)으로 내려가 그가 사는 집을 <장육당(藏六堂)>이라 하며 호(號)를 삼았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그는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다니면서 고을의 노인들과 더불어 낚시질과 사냥을 하였으며, 또한 시(詩)를 읊고 술을 따르면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고 술에 취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한편 검교정승(檢校政丞) 세기(世基 : 문희공)의 후손(後孫)에서는 그의 손자(孫子) 경중(敬中)․달충(達衷)․성중(誠中) 3형제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고려조에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경중(敬中)의 손자 정보(廷俌)가 고려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정보의 후손에서는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정암(廷馣)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한 정형(廷馨)․정혐(廷嫌) 3형제가 현달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적병이 해서(海西)에 몰려들었을 때, 정암은 원근(遠近)에 격문을 띄워 의병(義兵)을 모아 김덕함(金德諴)․조정견(趙廷堅) 등 의병장의 호응을 받아 연안성(延安城)을 사수하기로 하고, 대장기(大將旗)와 <분충토적(奮忠討賊)>이라고 쓴 기를 세우과 왜적과 대치한 후 사기가 침체되어 응전할 용기를 상실한 의병들에게 유명한 <독전연설(督戰演說)>을 하고 더 저항 할 수 없는 사람은 떠나가라고 하면서 성문(城門)을 열어주었다.

  천 여명이 넘던 의병 중에 생명을 정암에게 맡기겠다는 나머지 2백 여명과 5일 동안에 주야로 접전한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그의 아우 정형은 좌승지(左承旨)로서 선조의 피난을 수행하다가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에서 적의 북진을 저지함으로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남도와 행재소(行在所)간의 연락 및 교통을 보장했다.

  특히 정형은 사문(史文) 학자로서도 재질이 뛰어나「동각잡기(東閣雜記)․「황토기사(黃兎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겨 명망이 높았다.

  계림군(鷄林君) 달충(達衷)의 후손에서는 세조(世祖) 때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판서(判書)에 오른 승상(升商)과 흥상(興商)이 유명했으며, 후손 개립(介立)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훈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육전의 충무공>으로 명성을 떨쳤던 수일(守一 : 성중의 7세손)은 장군이면서도 사병과 함께 먹고 자서 사병들에게 정신적인 숭앙을 받았고, 전투를 하기 전에 정보와 첩보를 선행시켜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 때는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겸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현(鞍峴 : 길마재) 결전에서 이 괄의 군대를 격파하여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낸 후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40여 년 간 무신으로 대공(大功)을 세웠으면서도 그가 입은 옷 가운데서 깁지 않은 옷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효종(孝宗) 때의 명장 매죽허(梅竹軒) 완(浣)인데, 1602년(선조 35)에 출생하여 1624년(인조 2) 23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지방의 수령을 역임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승진, 병자호란 때 김자점(金自點)의 휘하에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에서 전공을 세우고, 포도대장(捕盜大將)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기로 이름났던 완(浣)이 수어사(守禦使)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관리 하나가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는데, 그 죄인의 누이가 인선대비전(仁宣大妃殿)의 시녀(侍女)였으므로 대비가 불쌍히 여겨 숙경공주(淑敬公主 : 효종의 여섯째 딸)를 시켜 죄를 가볍게 다스려 달라는 사청(私請)을 하자 “관리가 죄가 중해서 가히 용서할 수 없으니, 대비의 명령을 받아도 그 뜻에 맞추어 법을 굽힐 수 없는데, 하물며 샛길로 전해온 말임으로 더욱 받아 들일 수 없으니 공주는 다시 이같은 청을 하지 마시오”하니 대비가 듣고 부끄러워하고, 헌종은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그의 집이 동소문 옆 낙봉(駱峰) 아래에 있어서 인평대군(麟坪大君 : 인조의 셋째아들)의 집과 같은 마을이었는데,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임명되자 급히 안국방(安國坊)으로 옮기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맡은 신하로서 하루라도 왕자(王子)와 서로 이웃에서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진천(鎭川)의 수령으로 나갔던 몽량(夢亮)은 아전과 결탁하여 상전을 모략했던 종의 횡포를 엄하게 다스려 당시 잦은 사화(士禍)로 몰락한 선비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었고, 그의 아들 백사(白沙) 항복(恒福)이 경주 이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556년(명종 11) 참찬(參贊) 몽량(夢亮)의 아들로 태어난 항복(恒福)으 처음 출생해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았고 사흘 동안 울지 않아 집안 사람이 걱정하여 장님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니 “근심 할 것 없습니다. 마땅히 극귀(極貴)할 것입니다.”라고 축하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총명하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칼과 거문고로 글귀를 지으라고 하니 즉시 <칼은 장부의 기상을 가졌고(劍有丈夫氣), 거문고는 천고의 음성을 간직했다.(琴藏千古音)>고 응대하여 사람들이 그가 장래에 큰 그릇을 이룰 것으로 알았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 항복은 임진왜란 때 다서 차례나 병조 판서(兵曹判書)로서 병권(兵權)을 장악 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곧고 맑은 성품과 풍부한 기지로 <오성과 한음>의 일화(逸話)를 남겼으며, 이덕형(李德馨)․이정립(李庭立)과 더불어 과거의 동방으로 <삼리(三李)>로 일컬어졌고, 또한 이덕형․이원익(李元翼)과 함께 <혼조삼리(昏朝三李)>로 불리워졌다.

  전후(戰後)에 정승에 올라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진력했던 항복은 조선조(朝鮮朝)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우러름을 받았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63세로 생을 마쳤다.

  광해군 때 일이다. 탄핵을 당하고 동대문 밖 노원(蘆原) 마을에 살다가 한 번은 평민 옷을 입고 지팡이 하나로 청평산(淸平山)에 유람갈 때에 소양강(昭陽江)에 이르니, 한베에 탄 젊은이들이 정승인 줄 모르고 버릇없이 굴면서 거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항복이 말하기를 “이곳이 산수(山水)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살아볼까 하고 왔소”하니 젊은이들은 더욱 방자하여 등 너머로 한 산을 가리키며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저 산이 떠서 들어왔기 때문에 이사 와서 사는 사람들이 치부(致富)한다고 하는데 당신도 와서 살면 좋을 것이오”하고는 귀에다 대고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의 관자놀이에 옥관자가 둥그니 필시 납속당상(納粟堂上 : 벼슬할 자격도 없는 자가 조정에 곡식을 바치고 당상관의 벼슬을 얻은 사람)인 모양이다”하고는 가 버렸다.

  항복은 모욕을 당한 젊은 그들을 생각하고는 아래와 같응 시(詩)를 지었다.

    만년에 소양강 아래서(晩計昭陽下)

    그대들과 함께 낚시대로 늙으리(同君老一竽)

    생계가 박할까 근심하지 말게나(莫憂生事薄)

    부래산이 저기 있잖은가(自有浮來山)

  소양강 건너 부래산(浮來山)은 옛날에 둥둥 떠서 들어온 산이라, 이 지방에는 외래의 사람이 들어오면 잘 산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항복의 증손(曾孫) 세필(世弼)은 이조 참판 시술(時術)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워 특히 예학(禮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홍주 목사(洪州牧使) 세구(世龜)의 아들 광좌(光佐)는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대에 걸쳐 명상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른 광자는 실록청 총재관으로 숙종(肅宗)과 경종실록(景宗實錄)의 보유편(補遺篇) 편찬을 담당했고, 영조(英祖)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의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소론의 연립 정권을 수립, 당쟁 완화에 노력했다.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던 태좌(台佐)의 아들 종성(宗城)은 영조(英祖) 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이조 판서 계조(啓朝)의 아들 유원(裕元)은 고종(高宗) 때 영상(領相)으로 유명했다. 저동(苧洞)에 살았던 그는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를 반대하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나 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여 대원군과의 반목으로 맞섰다.

  유원이 남산 동쪽 기슭에 정각(亭閣)을 하나 새로 짓고 많은 조신(朝臣)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던 날 은퇴 중인 대원군도 초대되어 한자리에 있었다.

  유원은 대원군에게 이 정각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자 대원군은 마침 이 정각의 정원에 두 그루의 회(檜)나무가 있었기로 쌍회정(雙檜亭)이라 하고 손수 붓을 들어 현판을 써주었다.

  그러나 후일에 대원군이 말하길 송(宋)나라의 진회(秦檜)는 한 그루의 회(檜)로서 나라를 망쳤는데 두 그루 회나무의 쌍회정은 보다 심할 것이라고 한 말이 유원의 귀에 들어왔다. 유원은 즉시 현판을 두들겨 부수고 회나무 두 그루를 베어 버린 후 대원군을 배척하는데 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경주 이씨의 또 다른 인맥(人脈)으로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12세손 신우(申佑 :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원주백에 봉해짐)의 10세손인 규(揆)는 고려 때 찬성(贊成)을 역임한 후 충혜왕(忠惠王)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규의 현손(玄孫)으로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한 종준(宗準)은 호당(湖堂)에 뽑혔고, 문장(文章)과 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다. 그가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역관(驛官)에 있는 병풍의 그림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로 칠해 버렸다. 역관이 통역을 불러 힐문(詰問)하자, 통역은 “서장관이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므로 반드시 그 뜻에 만족하지 못하여 그렇게 한 듯합니다”하자 역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준이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곳에 이르니 새 병풍을 두 벌 펼쳐 놓았으므로 종준이 한편에서는 글시를 쓰고 한편에서는 그림을 그리니 모두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러 보는 사람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종준의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 때 북계(北界 : 함경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고산역(高山驛)을 찌나가다가 옛적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을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할 때 지었던 글을 비율하여 <외로운 충성을 다른 이는 따르지 못하리라 자신하다(孤忠自計衆不興)>는 율시(律詩) 한 수를 벽 위에 써 놓고 갔다. 후에 감사(監司)가 이것을 임금에게 올리니 연산군을 원망하는 뜻이 담겼다고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고 죽였다고 한다.

  구한 말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낸 현직(顯稷)과 평안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내고 교정청(校正廳) 당상(堂上)에 올랐던 유승(裕承)이 유명했으며, 희수(喜秀)는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군수(郡守) 유헌(裕憲)의 아들 주영(冑榮)이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과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하영(夏榮)은 중추원고문(中樞院顧問)을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승(裕承)의 아들 시영(始榮)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단선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부통령을 사퇴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의 폐기를 상소하고 자결을 시도했던 상설(相卨)은 1910년 류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전국에 발송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었으나 이듬해 석방, 이동녕(李東寧)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권업보(勸業報)」를 발행하여 교포의 계몽과 산업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순국한 시영(始榮)과 해방 후에 상해(上海)에서 교포의 보호에 진력했던 상정(相定)이 용맹을 떨쳤으며, 신한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역임한 규채(圭彩)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회영(會榮)․상용(相龍)과 함께 명문의 전통 가문인 경주 이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 와서는 삼성 기업군의 총수 호암(湖岩) 병철(秉喆)이 한국경제발전의 기수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3남 건희(健熙)가 유업을 계승하여 한국경제(韓國經濟)의 지반(地盤)을 다지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며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91,120가구, 1,217,2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준이씨

경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81가구 3,2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령이씨(高靈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고령 이씨(高靈李氏)의 시조(始祖) 이 헌(李 憲)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헌(憲)의 아들 언(彦)이 고려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를 지냈으며, 효자(孝子)로 이름난 천을(天乙)과 학자(學者) 계문(啓文)이 유명했다.

  그외 덕명(德明)과 운태(運泰)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재윤(載胤)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동양(東陽)은 참의(參議)를, 봉조(鳳朝)는 군수(郡守)를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령 이씨(高靈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8가구, 5,0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부이씨(古阜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시조(始祖) 이경조(李敬祖)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최 충(崔 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의 효시인 구재학당(九齋學堂) 출신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그는 1071년(문종 25) 김 제(金 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宋)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종(文宗)에서 숙종조(肅宗朝)에 이르기까지 5대(代)를 섬긴 공(功)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경조(敬祖)의 손자(孫子) 양빈(陽賓)이 서북 병마사(西北兵馬使)로서 예종(睿宗) 때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討伐)했으며, 그의 동생 양승(陽升)은 고려 명종(明宗) 때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연주(延州)에 침입(侵入)한 거란병(거丹兵)을 격파하고 위주성(渭州城)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대장군(大將軍) 의(儀)는 경조(敬祖)의 5세손이며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시경(時卿)의 아들로 고려 강종(康宗) 때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지냈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그밖에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겸한 연종(衍宗)은 공민왕(恭愍王) 때 직간(直諫)으로 왕의 위신(威信)을 바로 잡았으며 학자(學者) 원곤(源坤)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병구원을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부 이씨(古阜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474가구, 18,623명이 살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성이씨(固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사람인 이 반(李 槃)의 24세손 이 황(李 璜)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려 덕종(德宗 : 제9대 왕, 재위기간 : 1031~1034) 초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1033년(덕종 2) 거란(거丹)이 침입했을 때 공(功)을 세워 문종(文宗) 때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올라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고성(固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7세손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존비(尊庇)와 그의 아들 우(瑀)가 유명했다. 충숙왕(忠肅王) 때 전주(全州)와 진주(晋州)의 목사(牧使)를 지냈고,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아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었던 그는 뒤에 벼슬이 상서병부(尙書兵部)의 판사(判事)와 경령전(景靈殿)의 서장관사(書掌觀事)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우(瑀)의 아들 암(嵒)과 교(嶠)가 뛰어났다.

  1313년(충선왕 5) 문과(文科)에 급제한 암(嵒)은 충정왕(忠定王) 때 우정승(右政承)을 지냈고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리웠으며 <대갑편(大甲篇)>을 옮겨써서 왕에게 바쳤다. 그의 동생 교(嶠)는 공민왕 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전선(銓選 : 재능, 기량 따위를 전형하여 인재를 뽑음)을 관장했다.

  고려시대에 명문(名門)으로 세력(勢力)을 떨친 고성 이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도 대(代)를 이어 유명한 문신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성세(盛勢)를 보였다.

  행촌(杏村) 암(嵒)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인(寅)은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졌으며, 차남 숭(崇)은 공민왕(恭愍王) 때 궁술(弓術)로 무명(武名)을 떨치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태조(太祖) 때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서예(書藝)로 필명을 떨쳤던 아우 강(岡 : 암의 막내아들)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강(岡)의 아들 원(原)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

문(學問)을 연마하고 고려 말에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후 태종(太宗)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외교적으로도 수완이 뛰어나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 : 제3대 왕, 재위기간 : 1403~1424)에게는 <누른 수염의 재상>으로 충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자가 많아 태종조(太宗朝) 후에는 항상 적을 안고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태종은 적으로부터 그를 보호에 주었으나 세종(世宗)은 기강을 위해 그를 유배시키고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철성군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라고 자주 아쉬워했다고 한다.

  원은 슬하에 대(臺)․곡(谷)․질(垤)․비(埤)․장(場)․증(增)․지(墀)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문에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했다.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칙(則)은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하고 덕망(德望)과 직간(直諫)으로 당대에 명망(名望)을 떨쳤다.

  칙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다가 외직인 충청감사(忠淸監司)로 나가게 되자 유생(儒生) 2백 여 명이 모여<이 칙은 유림(儒林)의 모범이요 도학(道學)의 종사(宗師)이니, 지금 외직으로 나가면 한 지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받지만 이 나라의 선비들은 어디 가서 덕(德)을 배우겠습니까>라는 유임소(留任疏)를 올렸다.

  성종(成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육(陸)은「청파극담(靑坡劇談)」의 저자(著者)로도 유명했다. 그가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지(墀)가 괴산 군수(槐山郡守)로 있어서, 임금이 난처하게 생각하여 전지(傳旨)를 내려 그의 아버지를 내직(內職)으로 전임시켜 주었다. 육의 아우 백(陌)은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연산군(燕山君)의 총녀(寵女) 장숙용(張淑容)의 사제(私第)가 외람되게 화려하다고 간(諫)했다가 유배당했다.

  좌의정(左議政) 원(原)의 증손(曾孫) 주(冑 : 현감 평의 아들)는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정언(正言)을 지내고 성당(盛唐 : 당시가 가장 성행하던 시기)의 품격을 갖춘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라 하여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피살되었고, 그의 아우 여(膂)는 임금이나 조정에서 크게 촉망받다가 안질로 29세에 요절했다.

  그외 명종(明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명규(名珪)가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러, 필명을 떨쳤던 택(澤 : 참판 육의 손자)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기(沂)가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 :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의 암살을 결행하다가 실패하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으며,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덕수(德秀)는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평북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어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상의(象義)․상룡(相龍)과 함께 의절(義節)의 전통 가문인 고성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7,571가구, 71,9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흥이씨(高興李氏)

고흥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64가구 2,0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공산이씨(公山李氏)

공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98가구 3,2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공주이씨(公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공주 이씨(公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때 사람인 이천일(李天一)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3년(신라 박혁거세 5)에 문명(文名)이 뛰어나 중국(中國) 한(漢)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흉노적(凶奴賊) 정벌(征伐)에 공(功)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에 봉군되어 신라(新羅)로 돌아와 공산(公山 : 공주)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공주(公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천일(天一)의 36세손 우(堣 : 양호공)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하여 우(堣)의 아들 저(苧)가 고려(高麗)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사손(思孫)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공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사손(思孫)의 두 아들 엽(曄)과 서(曙)의 대(代)에서 7파로 갈리어, 전공 판서(典工判書) 엽의 여섯 아들은 경력공파(經歷公派 : 명선)․어사공파(御史公派 : 명성)․공숙공파(恭肅公派 : 명덕)․지평공파(持平公派 : 명보)․참의공파(參議公派 : 명윤)․현감공파(縣監公派 : 명의)로, 참지의정부사 서(曙)의 아들은 강양공파(剛襄公派)로 분파(分派) 하였는데 그 중 경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후손도 가장 많다.

  명선의 현손 겸(謙)이 연산군(燕山君) 때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그곳에서 정착하였으므로, 경성을 중심으로 한 관북지방에 후손들이 집중 세거(世居)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력공파(經歷公派) 명선(明善)의 10세손 기수(麒壽)․붕수(鵬壽) 형제가 임진왜

란 때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玉塔平) 싸움에서 순절하여 형은 부제학(副提學), 아우는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원배(元培)는 명선(明善)의 18세손인데, 경서(經書)와 학행(學行)으로 이름나 정조(正祖) 임금 앞에서 구경(九經)에 대한 질문 62조를 적절하게 답변하여 많은 포상을 받고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공숙공파(恭肅公派)의 파조(派祖)인 명덕(明德)은 태조(太祖) 때 등과하여 세종(世宗)때 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또한 그의 8세손 정견(廷堅)․정헌(庭憲) 형제가 선조(宣祖) 때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무공을 세워 명성을 날렸다.

  강양공파 부(敷)는 조선개국 삼등공신(朝鮮開國三等功臣)으로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11세손 도(棹)가 숙종(肅宗)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그외 3․1 운동 민족대표인 필주(弼柱)와 지평공파 명보(明保)의 후손으로 정조 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응거(應擧)가 이름났고, 현감공파 명의(明義)의 후손인 병덕(秉德)은 순조(純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809가구, 28,6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산이씨(光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신라(新羅)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의 후예로, 송악(松嶽)에서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궁예(弓裔)의 6세손 이종금(李宗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종금(宗金)은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契丹)의 40만 대군이 내침하여 송도(松都)와 주읍(州邑)이 허물어지고 왕(王)이 남천(南遷)하는 혼란속에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대소전투(大小戰鬪)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1018년(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精銳軍)을 맞아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財貨)를 보전(保全)시킨 공적으로 1032년(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군(光山君)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시조 종금의 8세손 각(慤)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슬하에 아들 순백(珣白)․숙백(叔白)․승백(升白)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광산 이씨(光山李氏)의 3대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맏아들 순백(珣白)은 1320년(충숙왕 7) 원(元)나라 환관(宦官) 빠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가는 충선왕(忠宣王)을 박인간(朴仁幹) 등과 함께 호종(扈從)하였다가 3년만에 돌아와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충장(忠莊)으로 추시(追諡)되었으며, 그의 아우 숙백(叔白)은 1328년(충숙왕 1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 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올랐고, 막내 승백(升白)도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이들 3형제를 중시조(中始祖)로 봉안(奉安)하고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광산 이씨의 3대 인맥을 계통별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순백의 아들 기(奇)가 고려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증손 일영(일영: 병조 참판을 역임)의 둘째 아들 선제(先齊)가 조선조(朝鮮祖)에 와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어려서 양촌(陽村) 권 근(權 近)과 매헌(梅軒) 권 우(權 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선제는, 1419년(세종 1) 20세의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태종실록(太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형․호․예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고려사(考慮史)」개찬(改撰)을 관장했다.

  특히 선제는 당시에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어나 조선 초기의 찬란한 문화발전의 개화기(開化期)를 연 주역(主役)의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광주현(光州縣)을 목(牧)으로 승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슬하에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했다.

  선제의 장자(長子) 시원(始元)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차자(次子) 조원(調元)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지재(棟梁之才)를 배출시켰으며, 3자(三子) 한원(翰元)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4자 찬원(贊元)은 홍문관의 수찬(修撰)을 역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일본 통신사가 되었던 막내 형원(亨元)과 함께 이름을 떨쳐, 이들 5형제가〈광산이씨5원화족(光山李氏五元華族)〉으로 일컬어졌다.

  그후 양심당(瀁心堂) 시원(始元)의 아들 복선(復善)이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성심당(惺心堂) 형원(亨元)의 아들 달선(達善)은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해박한 경연(經筵)으로 왕(王)으로 부터 사유(師儒)라는 칭호를 받았다.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지낸 공인(公仁 : 달선의 맏아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는 애석(哀惜)함이 있었으나 그의 아들 백호(伯虎)․중호(仲虎 : 전라감사)․숙호(叔虎)의 후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여 가문의 융성을 누렸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중호(仲虎)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급(汲)은 사마시(司馬試)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校理)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을 지냈으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 사건에 연루되어 아우 발(潑)․길(洁)과 함께 화(禍)를 당했다.

  일찍이 척암(惕菴)은 김근공(金謹恭)과 습정(習靜) 민 순(閔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발(潑)은, 1573년(선조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창(提唱)하고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항상 왕도(王道)를 진달(陳達)했으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고 사정(邪正)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겨 조금도 구차하게 야합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우계(牛溪) 성 혼(成 渾)․송강(松江) 정 철(鄭 徹) 등 서인(西人)들의 미움을 사게 되자 시사(時事)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을 알고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갓다.

  발의 아우 길(洁)도 선조 때 등과(登科)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한 후 응교(應敎)로 있다가 낙향했는데 불행히도 역변이 일어나 형과 함께 국문(鞠問) 도중에 절명했다.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의하면 발(潑)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평소에 병이 많았으며 그는 옷과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을 달이는 것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인맥을 소급하여 한림공(翰林公) 숙백(淑白)의 계통에서는 그의 아들 순(順)이 1374년(공민 왕23) 문과에 그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풍해 안렴사(豊海按廉使)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초(椒)는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대사성(大司成)을, 차남 매(枚)는 영광 교도(靈光敎導)를 거쳐 참판(參判)으르 역임했다.

  회령 판관(會寧判官)을 지낸 림(林)의 아들 형제 중 차남 근생(根生)은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등극하자 이를 개탄하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곡동(慶北高靈郡星山面高谷洞)으로 은거(隱居)하여 학문에 진력하다가 생(生)을 마치니 그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근생의 손자 수(樹)의 아들 홍기(弘器)․홍량(弘量)․홍우(弘宇)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영남삼객(嶺南三客)〉으로 불리웠으며, 뒤에 영남 유리(嶺南儒林)의 총의(總意)로 3형제의 고결한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향현사(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 구(鄭 逑)는〈부귀한 집에 사위되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이씨(李氏) 문중에 장가들기를 원한다(不願富貴壻願入李氏門〉고 하여 광산 이씨 집안에 장가들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김 면(金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우고 진천 현감(鎭川縣監)을 지낸 후 형 홍량(弘量)과 함께〈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앙(崇仰)을 받았던 홍우(弘宇)의 아들 서(서)는,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특출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스승의 명을 받아「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편찬하였고, 1605년(선조 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스승을 따라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후 거처(居處)를 승호(承湖 : 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스로 호(號)를 야로(野老)라 칭하고 후학으르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며, 1650년(효종 원년)에 생(生)을 마치니 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시(私諡)를 짓고, 선조(先祖)가 모셔진 회연서원 향현사에 배향하였다.

  그외 숙종(肅宗) 때 부령 부사(副寧府使)와 증산 현령(甑山縣令)을 거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한 두망(斗望)과 서산 현감(瑞山縣監) 태창(泰昌), 영해 부사(寧海府使) 징하(徵夏), 예조 좌랑(禮曹佐郞) 중빈(重彬) 등이 유명했고, 규일(奎一)은 철종(哲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이원 현감(利原縣監) 겸 북청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역임하여, 고종(高宗)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된 필현(弼鉉)과 함께 명문(名門) 광산 이씨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113가구, 31,1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양이씨(光陽李氏)

광양이씨 시조는 이무방(李茂芳)이다. 광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간공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54가구 1,45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광주 이씨(廣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광주 이씨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懸祖)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수보(收譜)를 하게 되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빼어난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율정공파(栗亭公派)의 중시조(中始祖) 관의(寬義)는 청백리(淸白吏) 지공(知公)의 맏아들로 세종(世宗) 때 누차에 걸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合格)하지 못하여 자신의 불운함을 느끼고 황야에 은거(隱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다가 후에 다시 송정(松亭) 김 반(金 泮)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修學)하여 학문에 정통했고, 덕행이 뛰어나 정여창(鄭汝昌)․손순효(孫舜孝)․남효온(南孝溫) 등과 같은 훌륭한 석학(碩學)을 배출시켰다.

  성종(成宗) 때 와서 찬성(贊成) 손순효의 천거로 경연(經筵)에 나가 성리(性理)의 근원(根源)과 성진(星辰)의 도수(度數)를 강론(講論)하자 성종이 감탄하여 율정(栗亭)이라고 친서(親書)로 사호(賜號)하고 율봉 찰방(栗峰察訪)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노구를 핑계 삼아 사양함으로 왕이 가상히 여겨 지방 수령에게 명(命)하여 여생

(餘生)을 보살피도록 하고 쌀과 비단을 내렸다.

  율정공 관의(寬義)의 맏아들 점(坫)은 성종(成宗) 초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77년(성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집의(執義)․사성(司成)을 역임한 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 1503년(연산군 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겼다가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전북부안(全北扶安)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복관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한성판윤(漢城判尹)․중추부사(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생원공(生員公) 당(唐)의 후손에서는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광주 이씨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 둔촌(遁村) 집(集)의 인맥(人脈)이 가장 화려하다.

  초명(初名)이 원령(元齡)인 집(集)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해박(該博)한 학문과 고상(高尙)한 지절(志節)로 명망을 떨쳤으며, 여말(麗末) 삼은(三隱 : 포은 정몽주, 목은 이 색, 야은 길 재)과 같은 명현(名賢)들과 더불어 문교(文交)를 나누며 존경을 받았다.

  1368년(공민왕 17) 당시 요승(妖僧) 신 돈 (辛 旽)이 득세(得勢)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웃에 살고 있는 채판서(蔡判書)란 자에게 신 돈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화(禍)를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둔촌(遁村)은 노구인 아버지 당(唐)을 등에 업고 개경(開京)을 빠져나와 과거 동기(科擧同期)인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살고 있는 경북 영천(慶北永川)으로 은거하였다.

  둔촌 부자(父子)를 반갑게 맞이한 천곡 최원도는 다락방에 이들을 숨기고 4년 동안 피화생활(避禍生活)을 돌봐주며, 가족에게 까지 비밀로 하고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큰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 때 천곡(泉谷)의 집에는 열 아홉 살인 제비(燕娥)라는 여종이 있어, 한 끼에 밥을 세그릇씩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상전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친 행세를 하는 상전의 소행을 수상쩍게 여긴 주인마님은 이 제비라는 여종으로 하여금 염탐을 시켰다. 제비는 밥 세 그릇을 상전이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벽장 속에 두 사람을 숨겨두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약에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진 둔촌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양가(兩家) 모두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질린 여종 제비는 마님의 걱정을 덜고 또 상전의 신의와 상전 친구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하여 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듬해 둔촌의 아버지 당(唐)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천곡은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놓은 영천군 나현(羅峴 : 광릉골) 모부인(母夫人) 묘 아래에사 예장을 치루었다.

  1371년(공민왕 20) 신 돈(辛 旽)이 역모로 주살된 후에야 비로소 둔촌은 자유의 몸이 되어 송경(松京)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있는 현화리(玄化里) 옛 집으로 돌아와 초명인 원령(元齡)을 집(集)으로 고쳐 살면서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포은(圃隱) 정뭉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맏아들 지직(之直)은 1380년(우왕 6) 문과(文科)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교리(敎理)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정종(定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풍애(楓厓)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로 세조(世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인손(仁孫)의 다석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명문(名門)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成宗) 때 좌리 3등공신(左理三等功臣)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겨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특히 그는 항상 자기 가문의 세력이 너무 성함을 두려워하여 집안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허>를 설득하였고 가문이 너무 성해지면 망하는 이치를 강조하였으며,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과 공(恭)이라 지으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도리는 이 두 글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경계하였다.

  세조(世祖) 때 좌익 3등공신(左翼三等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았던 극감(克堪)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했으며「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여 필명을 떨쳤다.

  우정승 인손의 셋째 아들 극증(克增)은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익대 2등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성종(成宗) 때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국가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하고, 동지설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올라서는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한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좌의정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횡포를 바로 잡으려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지인 인동(仁同)에서 사사(賜死)당한 극균(克均)은 사약을 받고서 유실(幽室)에 들어갔다가 분통함을 참을 길 없어 다시 나와서 형관(刑官)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白病)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죽은 넋이 너를 따라다니며 평생 괴롭힐 것이다.”하고 들어가 약사발을 들이켰다. 형관이 돌아가 연산군에게 그 말을 전하하니 더욱 노하여 극균의 뼈를 부수도록 하명하였다.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성종(成宗)이 연산군의 어머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던 날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그의 아들 수형(守亨 : 사인)․수의(守義 : 한림)․수정(守貞 : 수찬) 3형제가 이조(吏曹)와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류자광(柳子光)이 크게 시기하여 밤낮으로 연산군을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어느날 임금과 신하들이 같이 즐기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들이 잇달아 술 두 잔을 올리면 연산군도 또한 끝의 술잔으로서 재상에게 돌려 주었다. 다른 재상들은 받아서 마셨는데, 세좌는 끝의 술잔을 받아서 마시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튿날 연산군은 신하가 임금이 주는 술을 받아서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고, 또 남은 술방울을 임금의 옷자락에 흘린 것은 불경죄(不敬罪)이니 세좌를 옥에 가두라고 하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손자들과 설날 그의 집에 세배갔던 이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세좌의 손자 연경(延慶 : 수원의 아들)은 세좌가 북방변지로 귀양갔을 때 모시고 다니며 모든 험난한 일을 다겪었다. 그 후 조부와 숙부가 모두 화를 입었고, 연경도 연좌되어 귀양을 갔는데 단정하고 깨끗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죽을 때에 갈팡질팡하여 정당한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얼굴빛이 평화롭고 말씨가 따뜻하며 흉금(胸襟)이 쇄락(灑落)하였고, 학문은 세속의 누습을 벗어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엎지러지는 물결 같은 세상에서도 능히 우뚝 서서 시종 불변하였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3년이 지나도록 치르지 못한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모친을 모시고 충주 북촌(忠州北村)에 살다가 안 당(安 唐)이 설치한 현량과(賢良科)에 특채되어 유학(儒學)을 바탕으로 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혁신 그룹에 서서 중견 구실을 하였다.

  1519년(중종 14) 홍경주(洪景舟)․남 곤(南 袞) 등의 반동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혁신정치를 추구하는 신진파를 제거할 때 그 숙청자 명단의 우두머리에 연경의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중종(中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연경은 어필로 이름이 지워져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량과가 파과(罷科)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공주(公州)에 물러가 살았다.

  수정(守貞 : 세좌의 넷째 아들)은 연산군 때 아버지 세좌와 함께 사화에 연좌되어 피살되었고, 당시 일곱 살인 맏아들 윤경(潤慶)과 여섯 살인 차남 준경(浚慶)의 형제는 귀양을 갔다.

  어린 나이로 가난한 귀양살이에 옷이 해지고 이와 서캐가 많아서 아우인 준경이 긁으며 울자, 윤경은 웃으며 “새옷이 입고 싶지”라고 말하니, 준경은 “어디서 새옷을 얻겠나”하였다. 윤경은 준경을 시켜 불을 피우라고 시킨 다음 형제가 입었던 옷을 벗어 모두 불에 태우고 알몸으로 앉아있었다. 때마침 초하룻 날이라 귀양살이의 순찰 점고(點考)를 하는데, 지키는 사람이 발가벗은 어린 형제의 사정을 관에 보고하자 원은 놀라서 새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온 준경(浚慶)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했고, 여러 관청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558년(명종 13)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윤경의 아들 중열(中悅)은 중종(中宗) 때 등과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학문이 뛰어나 장래를 촉망받았으나 명종(明宗) 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친구 이 휘(李 輝)를 변호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의하면 중열은 다정한 친구인 이 휘로부터 시국에 걸리는 중대한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열은 이 휘의 일당으로 몰려 처형되느냐 아니면 이 휘의 말을 고발하여 자신은 모면하느냐 하는 위태로운 경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윤경에게 찾아가 상의했더니 윤경은 “자신이 죽는 것도 애석한 일이지만 친구를 어떻게 배반한단 말이나”하였다.

  중열은 다시 숙부인 준경에게 물었더니 “우리 선대에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피해를 당하여 언제나 원통하고 한스러운 터인데, 오늘날 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위에 계신 부형(父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가문을 보존할 생각으로 글월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라고 하였다.

  이때 중열의 아버지인 윤경이 승정원에서 편지를 보내어 아들을 책망하기를 <내가 항상 이 휘는 일을 저지를 사람이니 사귀지 말라고 주의시켰는데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지금 화가 눈앞에 닥쳤다고 해서 어찌 친구를 팔아서 살기를 도모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열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1547년(명종 2) 3월 11일 밤 부엉이가 동북쪽 모퉁이에 모여들어 울어대니 예로부터 불길의 전조라,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가 부엉이가 운지 9일만에 사약을 받게 외었다고 한다.

  광주 이씨의 화려한 인맥(人脈)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목(巨木)인 한음(漢蔭) 덕형(德馨)은 좌의정 극균(克均)의 현손(玄孫)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른 민성(民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양사언(楊士彦)은 덕형이 14세 때 지은 시(詩)을 보고 <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덕형은 조정에서 베풀어진 각종 정시(庭試)마다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으므로 다른 선비가 이 정시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나 일부러 병을 핑계로 시험을 치지 않았다.

  31세 때 학자 관직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제학(大提學)에 초탁(超擢)되었다. 조정에서 대제학을 회천(會薦)할 때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장만 끼고 양보하였다. 한데 한 점의 반대표가 있어 모두를 의아해하는데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며 <노부(老夫)의 소위>라고 자칭하고 서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은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좀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성숙함을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덕형은 큰 절로 노대신의 충고를 흔연히 감사하니 선비들 공론이 양쪽을 모두 아름답게 일컬었다.

  중국의 조사(詔使)로 조선에 건너온 왕경민(王敬民)이 덕형의 명성을 듣고 한 절귀의 시(詩)를 써 주기를 “군의 풍토와 기상이 멀리 범류에 뛰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만나보지 못하여 이것을 써 주어 신교(神交 : 얼굴은 보지 못하고 정신으로 교분이 깊다는 말)를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53세로 생을 마쳤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혼조삼리(昏朝三利)>라 하여 이항복․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짓밟힌 사직을 지탱한 명신이었다.

  광주 이씨의 또 다른 인맥으로 지군사공(知郡事公) 희령(希齡)의 아들 지강(之剛)이 태종(太宗) 때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겸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지유(之柔)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역임했다.

  한편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를 역임아며 강직(剛直)한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은 1392년(태조 1)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南漢山)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자 몸소 양중을 찾아와 농주(農酒)로서 옛정을 나누며 시(詩)를 짓기를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홍제(光武皇帝)와 엄자룡의 우의를 보나 한(漢)나라 왕(王)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하니, 양중이 답(答)하기를 “옛날의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對酌)이 있으리요”하니 왕도 그의 굳은 지조를 알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고, 양중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를 제수했다.

  고려 말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형(兄)인 석탄공 양중과 함께 충절을 지켰던 암탄공(巖灘公) 양몽(養蒙)은 자손(子孫)들에게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기를 유언했고, 지금의 서울시 고덕동(高德洞)은 양중과 양몽이 정의를 지켰던 고덕(高德)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으로 이름 높았던 필성(必成 : 중열의 아들)과 조선조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휴징(休徵)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저통했던 극기(克基 : 예손의 아들)의 아들 은(誾)은 학자(學者)로 영광(靈光)의 보촌우에 배향되었다.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인(文人)으로 임진왜란 후 조정의 해잉한 기강을 바로 잡는데 공헌했던 윤우(潤雨)는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었고, 청명고절(淸明高節)로 명망이 높았던 아들 도장(道長)을 비롯하여 숙종(肅宗) 때 영남(嶺南)의 대기근을 구제하여 전설에 오르기까지 한 담명(聃命)과 함께 명문(名門) 광주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평․성산이씨(廣平․星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광평 이씨(廣平李氏)의 시조(始祖)는 성산(星山 : 성주의 고호)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한 사족(士族)으로 고려 말에 사재 동정(司宰同正)을 지낸 이무재(李茂材)이며, 그의 증손(曾孫) 능(能)이 나라에 공(功)을 세워 광평(廣平 : 성주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광평(廣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지금은 성산(星山)으로 쓰고 있다.

  본래 성주(星州)에는 여섯 가문의 이씨(李氏)가 세거(世居) 하면서 조선(朝鮮) 정조(正祖) 이전까지는 다같이 본관을 성주(星州)로 사용했으나, 그 후 각각 성주(星州)․광평(廣平)․성산(星山)․경산(京山)․벽진(碧珍)․가리(加利)로 본관(本貫)을 달리 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호성(好誠)이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옥포 만호(玉浦萬戶)를 지낸 희조(希祖)는 호성의 손자로 부모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양했으며 조부(祖父 : 호성)를 위해 동산정(東山亭)을 세웠다.

  순조(順祖)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성종조(成宗祖)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했다.

  그외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장에서 순절한 령(伶)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명신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와 이  괄(李 适)의 난 때 공훈이 있어 훈권(勳券)을 두 차례나 받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평․성

산 이씨(廣平․星山 李氏) 는 남한(南韓)에 총 16,812가구, 67,5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위이씨(軍威李氏)

군위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80가구 1,4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해이씨(金海李氏)

김해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12가구 3,11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주이씨(羅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나주 이씨(羅州李氏)의 시조(始祖) 이철우(李哲祐)는 누대(累代)에 걸쳐 나주(羅州)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世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평남(平南) 개천군(价川郡) 마장(馬場)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철우(哲祐)의 증손(曾孫) 의성(義聖)이 중종(中宗)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의성의 막내 아들 지만(枝蔓)이 용양위 첨지중추부사(龍驤衛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그외 인물로는 지영(枝榮)의 아들 4 형제 중 맏아들인 기정(起正)이 1507년(중종 2) 초시(初試)에 올라 1546년(명종 1)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한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이씨(羅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886가구, 9,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원이씨(南原李氏)

남원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84가구 2,56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남평이씨(南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남평 이씨(南平李氏)의 시조(始祖)는 이동말(李東秣)이다. 그는 조선조(朝鮮朝)에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보조공신(補助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동말(東秣)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남평(南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동말의 손자(孫子) 문장(雯章)이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문장(雯章)의 맏아들 은흥(銀興)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어모장군(禦侮將軍)을 거쳐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역임하였다.

  그외 이괄(李适)의 난(亂) 때 순절(殉節)한 충원(忠元)과 현종(顯宗)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략장군(宣略將軍)․절충장군(折衝將軍)․군수(郡守)를 지낸 관(灌)이 대표적이고, 유룡(裕龍)과 정용(禎龍)은 다같이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평 이씨(南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9가구, 1,3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서이씨

농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5가구 1,04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농성이씨

농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8가구 1,4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성이씨(丹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단성 이씨(丹城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이 현(李 峴)이며 그의 선계(仙界)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후 후손 원발(元發)이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원발(元發)의 7세손 영보(永寶)가 조선(朝鮮)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문공서원(文公書院)의 원장(院長)으로 단성(丹城)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부터 후손들이 원발(元發)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관향(貫鄕)을 단성(丹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에서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원발의 아들 유거(惟擧)와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낸 그의 아들 숭간(崇幹)이 유명하였으며, 우부승선(右副承宣) 종(棕)은 동정(同正)을 역임한 계인(桂仁)의 아들로 그의 아들 승민(承敏 : 직제학을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밖에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작(綽 : 예조 참판을 역임)․윤(稐 : 감찰을 역임)․체(棣 : 동부승지를 역임)․매(枚 : 공조 참판을 역임) 등이 뛰어났고, 현감(縣監) 백형(伯亨)과 공조 참의(工曹參義)에 오른 철주(鐵柱)가 선조(先祖)들의 뒤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성 이씨(丹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61가구, 2,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양이씨(丹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단양 이씨(丹陽李氏) 시조 이배환(李盃換)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는데 공(功)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에서 내시진전직(內寺眞殿直)을 지낸 그의 10세손 이방규(李方揆)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계대(繼代)해 오고 있다.

  배환의 14손인 판서(判書) 거경(居敬)의 아들 무(茂)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올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조선(朝鮮) 개국 후 1398년(태조 7)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왕자의 난(亂) 때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겸(謙)과 지시(之詩)․입(立) 등이 뛰어났다.

  겸(謙)은 집의(執義)를 역임한 맹지(孟智)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올라 장령(掌令)․사성(司成) 등을 지내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으나 영조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지시(之詩)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서 장원하고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인(龍仁)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의병장(義兵將) 입(立)은 임진왜란 때 소사싸움에서 공(功)을 세워 훈련판관(訓鍊判官)이 되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정묘호란 때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오랑캐를 무찔러 공(功)을 세움으로써 명나라로부터 상을 하사받았다. 죽은 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이씨(丹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537가구, 14,343명이 살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담양이씨(潭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담양 이씨(潭陽李氏)의 시조(始祖) 이덕명(李德明)은 백제(百濟) 때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지낸 인수(仁壽)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 할 수 없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신평(新平)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담양(潭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덕명(德明)의 아들 춘(椿)이 고려에서 추밀부사(樞密府使)를 지냈고, 손자 화(和)가 상서(尙書)를 역임했다.

  그외 상장군(上將軍) 승소(承召)와 산원(散員)을 역임한 예(藝)가 이름났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장령(掌令)을 역임한 견의(堅義)와 현령(縣令)을 지낸 탐룡(耽龍)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담양 이씨(潭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63가구, 1,6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흥이씨(大興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전주 이씨(全州李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알려진 대흥 이씨(大興李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오른 이연계(李連桂)를 시조(始祖)로 한다.

  연계는 태조(太祖)가 용흥(龍興)으로 가려는 것을 만류하다, 양양(襄陽)으로 유배(流配)되었는데 1403년(태종 3) 태종(太宗)이 이를 특별히 사면하고 대흥군(大興君)에 봉했으며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환원하라는 전교(傳敎)를 내렸으나 본관(本貫)을 대흥(大興)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연계(連繫)의 아들 3형제 중에 맏아들 손귀(孫貴)가 용주부사(龍州府使)를 지냈으며, 막내 손현(孫賢)은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대사성(大司成) 맹선(猛船)은 연계(連繫)의 증손(曾孫)이며 종수(縱囚)의 아들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흥춘(興春)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석화(碩華), 참판(參判)을 역임한 규영(圭永), 전서(典書)를 지낸 세정(世情) 등과 함께 고려에서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다.

  조선(朝鮮)에 와서는 인로(引路)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그의 동생 인종(仁宗)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후손 기(榿)는 판서(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흥 이씨(大興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50가구, 3,0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덕산이씨(德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덕산 이씨(德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존술(李存述)은 고려 명종(明宗) 때 덕풍(德豊 : 충남 예산군 덕산) 호장(戶長)을 지내고, 그의 아들 언후(彦厚)와 손자(孫子) 극보(克甫), 그리고 증손 핵(翮)이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내며 명문의 기틀을 다졌으므로 후손들이 덕산(德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5세손 유실(瑜實)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그의 아들 겸(謙)이 비서교서랑(祕書校書郞)을 역임하고 겸의 아들 사목(思牧)은 집현전의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영(英)은 존술(存述)의 8세손으로 그의 아들 3형제 중에 장자 유(愉)가 조선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차남 조(造)는 관직에 재직 중 대간의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유배를 당한 후 풀려 나와 이조의랑(吏曹議郞)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사맹(師孟)은 유(愉)의 아들로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거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한편 순(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봉상시정(奉常侍正)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고 규문(奎文)은 참판(參判)을 지냈다.

  그외 근대에 와서 가문을 빛낸 상만(尙萬)의 아들 종원(宗原)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산 이씨(德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732가구, 7,3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덕수이씨(德水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는 고려(高麗) 때 신호위 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양준(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 보승장군(興威衛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 되었다.

  그후 양준의 아들 소(劭)가 고려 고종(高宗) 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하였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군장산(開豊郡中面德水里軍壯山) 아래에 있는 그의 묘(墓)는 공자(孔子)를 낳게 한 이산(尼山)을 닮았다는 여니산(如尼山)을 주산(主山)으로, 동쪽에 군자암(君子岩), 북쪽에 성인암(聖人岩), 서쪽에 대장암(大將岩), 남쪽에 성현암(聖賢岩)을 거느린 야자형(也字形)의 명당(名堂)으로 소문이 난 명묘(名墓)이다.

  소의 아들 형제 중 장자(長子)인 윤온(允蒕)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 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받들고 누대로 세거(世居)해 온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명현(名賢)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말에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에 올라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던 천선(千善 : 윤온의 아들)이 뛰어났고, 도사(都事) 윤번(允蕃)의 증손(曾孫) 변(邊 : 수사재시사 공진의 아들)이 유명했다.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했던 변은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변은 “내 평생 남을 속인 일이 없다.” 고 떳떳하게 자부했다. 그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서 매양 인재를 뽑는데 판서(判書)를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받지 않았으나 판서는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듣고 퇴청하였다. 마침 그 날 판서가 그 고기로써 맛있는 성찬을 차려 변을 대접하자 그는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얼얼의 고기입니까”하며 힐책하자 판서가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고 한다.

  제국(齊國)의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였는데, 그의 형은 재상이었다. 중자가 어머니를 뵈러 형의 집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거위를 선사했는데 형이 받았다. 중자가 형에게 “얼얼(거위 우는 소리)하는 것을 왜 받으시오”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의 어머니가 그 거위로 국을 끓였다. 중자는 그것을 모르고 먹는데 형이 들어오더니 “이것은 <얼얼>의 고기로구나”하니 중자는 씹던 고기를 토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변은 이 고사를 인용하여 판서를 비꼬았던 것이다.

  변의 손자 거(琚)는 1480년(선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과천(果川) 등지에서 탐관오리를 다스렸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내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 부정이 있으면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掌令)으로 속칭되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인범(仁範)의 후대에서는 그의 현손(玄孫)인 홍산 현감(鴻山縣監) 의석(宜碩)의 증손 율곡(栗谷) 이(珥)가 빼어났다.

  1536년(중종 31) 아버지인 찰방(察訪) 원수(元秀)와 어머니 신부인(申夫人 : 기묘명현 신명화의 딸)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어머니 신씨가 꿈을 꾸었는데, 흑룡(黑龍)이 바다로부터 솟아 올라와 침실로 날아 들어왔었기 때문에 어릴 대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다. 율곡(栗谷)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하며, 겨우 세살 때 외조모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 같으냐”하니, “붉은 가죽 주머니 속에 부서진 구슬을 넣었도다”라고 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주야로 울부짖던 율곡은 어느 날 우연히 불가(佛家)의 글을 보고 그 사생설(死生設)에 깊이 느낀 바 있었고, 또 그 학문의 간편청정(簡便淸淨)함을 기뻐하여 세상 일을 버릴 생각을 하였다. 열아홉 살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여러 벗들에게 글을 보내어 고별하고, 이내 절(寺)에 살면서 계(戒 : 5계와 250계가 있는데 이를 지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함)와 정(定 : 마음에 동요됨이 없고 안정된 것)을 굳게 하여 침식까지도 잊어 버렸다.

  그후 얼마 안되어 불교가 이치에 가까운 듯 하면서 진(眞)을 혼란하게 한 곳이 있음을 엿보고, 드디어 그 학문을 모두 버리고 유학(儒學)에 전심했다.

  22세 때 성주 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이듬해 처가에 갔다오는 길에 도산(陶山)에 있는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을 찾아 갔다와서 그 해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천도책(天道策)>이란 유명한 논문으로 장원하고 초시(初試)․복시(覆試)에 아울러 아홉차례나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웠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초임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副校理)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며 「명종실록(明宗實錄)」에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율곡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 분당의 조정을 위하여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선(朝鮮)의 유학계(儒學界)의 거봉(巨峰) 퇴계 이 황(李 滉)과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자로, 장구(章句)의 분석적인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통찰함을 학문 연구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 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해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근본 사상으로 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여, 이 시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또한 율곡은 학문을 민생 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모두 능했다.

  율곡의 아우 옥산(玉山) 우(瑀)도 어머니 신씨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詩)․서(書)․화(畵)․금(琴)에 모두 능하여 <사절(四節)>로 불리웠다.

  지돈령 부사(知敦寧府事) 명신(明晨)의 손자 의무(宜茂)는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으로「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녹피(鹿皮)를 하사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명성을 떨쳤는데, 맏아들 권(卷)은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했고, 둘째 기(芑)는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셋째 행(荇)은 좌의정을, 넷째 령(笭)은 군수(郡守)를, 막내 미(薇)는 대사헌을 지냈다.

  키가 10척이나 되고, 얼굴이 모나고 수염이 많았던 행(荇)은, 1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문형(文衡)에 올라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평생에 다섯 번을 귀양갔다가 유배지인 함종(咸從)에서 죽은 기구한 일생이었다.

  그가 생전에 남산(南山) 아래에 있는 청학동(靑鶴洞)에 서당을 지었는데, 명(明)나라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 등이 모두 시(詩)를 지어 보냈고, 스스로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고 호(號)를 지었다. 길을 끼고 좌우에 소나무와 전나무․복숭아․버드나무를 심었고, 공무에서 나오면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를 한가하게 하여 마치 야인과 같았다.

  어느 날 해가 저물었는데 녹사가 보고할 일이 있어 찾아가 보니, 한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떨어진 옷을 입고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동구 문을 나오는 지라, 녹사가 말을 타고 지나 가다가 “정승 계시오”하고 물었다. 이에 행(荇)이 천천히 돌아다 보면서 “무슨 일이냐, 내 여기 와 있다”하니 녹사가 깜짝 놀라 말 위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행의 증손 안인(安仁)은 임진왜란 후 면천(沔川)에 초당을 짓고 끝내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행의 현손(玄孫) 식(植 : 안성의 아들)은 광해군(光海君)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조좌랑(吏曹佐郞)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돌아와 대사헌(大司憲)과 형․이․예조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특히 그는 당대의 이름 난 학자로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으며, 한문학(漢文學)에 정통하여 <한문사대가(寒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또 다른 인맥으로는 가문에 쟁쟁한 무맥(武脈)을 형성한 충무공(忠武公) 순신(舜臣)을 들 수 있다.

  1545년(인종 1) 한양(漢陽)에서 정(貞)의 셋째 아들로 출생한 순신(舜臣)은 1579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이르렀고,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특히 순신은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勇壯)으로서 임진왜란 때 싸움마다 승리를 했으며, 적병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全羅道)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무인(武人)으로서 글씨에도 능했던 그는 후손들에게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게 되면 국가에 죽음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 것도 족하다. 만약 권귀에 아첨하여 한 때의 영화를 도적질 한다면 나는 심히 유감스러울 것이다.(大丈夫生用則效死 不用則耕於野足矣 若取楣權貴以竊)>라는 유훈(遺訓)을 남겨 대대로 지키도록 당부했다.

  충무공 순시의 조카 완(莞)은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아군의 사기를 위하여 시체를 배 안에 숨겨두고 독전(督戰)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올라 이 괄(李 适)의 난군을 토평하여 의주부윤(儀註府尹)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의주(義州)에 쳐들어온 청병(淸兵)과 접전하다가 손가락에 적의 화살을 맞아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하며 개탄하고는 탄약을 쌓은 위에 종제인 신(藎)과 함께 누워 불을 질러 폭사했다.

  순신의 5대손으로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했던 봉상(鳳祥)은 형조 참판(刑曹參判)․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다가 권신(權臣) 이광좌(李光左)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좌천되어 영조(英祖) 때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난군에게 피살되었다.

  장신에는 길고 장엄한 수염과 호탕한 음성으로 주위를 압도하였던 그의 죽음에 어머니 정씨(鄭氏)는 “내 아들이 선조의 유훈에 어김없이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통곡할 필요가 없다”하고는 울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외 한성판윤(漢城判尹) 광하(光夏)의 아들 집이 영조(英祖) 때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佐議政)이 되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경종실록(景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군수(郡守) 선연(善淵)의 아들로 선원(善源)에게 입양했던 덕흠(德欽)은 윤 증(尹 拯)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만년에 성력(星歷)․상수(象數)․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명망을 떨쳤다.

  1772년(영조 48)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佐議政)에 올랐던 은(병조 판서 주진의 아들)은 왕명(王命)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가서「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5천 여 권을 구득하고 돌아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연(演)의 아들 병모(秉模)는 순조(純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춘영(春英)이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안승우(安承禹)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단양(丹陽)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했고, 류인석(柳仁錫)의 막하에서 중군(中軍)이 되어 조령(凋零)․달천(撻川)․안보(安保) 등지에서 일본 연합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의 아들 세영(世榮)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했으며, 민화(敏華)와 일영(鎰永)도 항일투쟁과 방공전(防共戰)에 혁혁한 훈공을 세워 명문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0,580가구, 43,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덕순이씨(德順李氏)

덕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24가구 2,63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덕은이씨(德恩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덕은(德恩)은 충청남도 노산군 은진면(恩津面)의 일부를 이루는 지역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에는 덕근군(德近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덕은군(德恩郡)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고려 초에는 덕은(德恩)으로 고쳤다가 1017년(현종 9) 공주에 속하였고, 1406년(태종 6)에 시진현(市津縣)과 합하여 감무를 두었으며 1419년(세종 1) 은진(恩津)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덕은 이씨(德恩李氏)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한 자영(自英 : 진위 이씨 시조)의 5세손 이 전(李 荃)을 시조(始祖)로 한다. 전(荃)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덕은(德恩 : 은진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덕은(德恩)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진위 이시(振威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은 운생(芸生)이 전(荃)의 아들로 조선(朝鮮) 개국(開國)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으며, 덕진군(德津君)에 봉해졌다.

  한편 선조(宣祖) 때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한 기수(麒壽)는 형손(亨孫)의 아들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그의 형 인수(麟壽)는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 훈련원 참봉(訓鍊院參奉)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진해 현감(鎭海縣監) 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은 이씨(德恩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12가구, 2,321명이 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東城․泗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동성(東城)은 사천(泗川)의 옛 지명으로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신라의 사물현(史物縣) 이었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사수(泗水)로 고쳐 고성군(固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시대에 사주(泗州), 조선 태종 때 사천(泗川)으로 고쳤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동성 이씨(東城李氏)의 선대(先代)는 중국 농서(隴西)의 분파로 사천(泗川)에 세거(世居) 하였다.

  시조(始祖) 이 식(李 軾)은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국자진사(國子進士)로 송악 군수(松岳郡守)를 역임했으며, 그의 6세손 자가 담양교도(潭陽敎導)를 지낼 때까지 모두 6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지냈고, 후손들이 사천(泗川)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사족(士族)으로 토착 세거(土着世居) 하며 동성(東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후손 정(楨)이 일찍이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의 대가 송인수(宋麟壽)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하여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그후 선조대(宣祖代)에 이르기까지 4조(朝)에 걸쳐 나라에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아 퇴계(退溪) 이 황(李 滉)과 친교가 있었으며 「성리유편(性理遺篇)」을 저술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성․사천 이씨(東城․泗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701가구, 7,0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이씨(密陽李氏)

밀양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49가구 4,4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배천이씨(白川李氏)

배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24가구 1,82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벽산이씨(碧山李氏)

벽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71가구 1,95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벽진이씨(碧珍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시조(始組)는 이총언(李棇言)은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군(碧珍郡) 태수(太守)를 지내고 왕 건(王 建)을 도와 고려 창업(高麗創業)에 훈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건匡)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총언(李棇言)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벽진(碧珍)으로 삼게 되었다.

  벽진장군 통언의 아들 영(永)도 18세로 왕 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그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긴 왕 건이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하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했다. 그 후 영(永)은 대제학(大提學)과 지경산부사(知京山府使)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방회(芳淮)는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 총언의 10세손으로 공부사(工部事)를 지낸 옹(雍)의 맏아들 견간(堅幹)이 고려 충렬왕(忠烈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1317년(충숙왕 4) 사신(使臣)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산꽃의 말(山花之語)〉이란 시(詩)로 이름을 떨쳐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불리웠다.

  한편 병조 판서(兵曹判書) 심지(審之 : 견간의 증손)의 아들 맹전(盟專)은 1427년(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丞文院正字)와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거쳐 거창 현감(巨創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으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 갈정리(善山綱正里)로 돌아가 은거(隱居)한 후 청맹(靑盲)으로 행세하면서 대궐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손님을 거절하고 두문불출하기를 30 년이나 계속했다.

  청맹으로 행세하다 보니 자연히 집안이 궁색하고 아이들이 많아 밥을 먹을 때 수저가 모자라 차례를 기다려야 했으며, 앉을 자리 하나 없어도 그의 장님 행세는 계속

되었다.

  강호산인(江湖山人) 김숙자(金叔滋)와는 일찍부터 도의(道義)로 시귄 친구였으나 청맹으로 집안에 묻힌 만년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질 않았다. 오직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과는 비밀이 없을 만큼 친숙하여 찾아와 뵈오면 문을 닫고 마음 속으 말을 하였고, 혹은 시(詩)를 지어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일선지(一善志)」에 의하면 한 집안에 살고 있는 처자들까지도 그의 거짓 청맹을 알지 못하였다가 그가 죽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맹전의 아우 계전(季專)은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항 성종(成宗) 때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참판(參判) 신지(愼之)의 손자 승언(承彦)은 성종 때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현령(縣令) 덕손(德孫)의 아들로 문종(文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했던 약동(約東)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지평(持平)․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등을 지내고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 관아 이속들의 부정을 단속하고 민폐를 근절시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제주 목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 재임시 사용하던 채찍마저도 공용물이라 하여 관아의 벽에 걸어놓고 왔다. 그의 청백한 정치는 그 곳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었기로, 그들은 이 채찍을 청백의 상징으로 삼게 되어 새로운 목사가 올 때마다 그 내력을 말하고 채찍을 바치곤 하는 것이 관속(官俗)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제주를 떠나오는 뱃속에서 뱃사람들이 금(金)으로 만든 갑옷을 그에게 바쳤다. 맑은 덕(德)을 감사한 섬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만든 것으로 배를 타기 전에는 받지 않을 것 같아 뱃사람에게 맡겨 전해주도록 한 것이었다. 약동은 그 금갑옷을 받아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 금갑옷이 던져진 바다 여울목을 투갑연(投甲淵)이라 하며 지금도 그 곳 섬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기묘 8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장곤(長坤)은 참군(參軍) 승언(承彦)의 아들로,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502년(연산군 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교리(校理)에 올랐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젊어서부터 용모(容貌)가 기걸스러워 장수(將帥)감이라고 일컬어졌던 장곤은 절의와 지조(志操)가 있어 연산군은 그가 항상 반정(反正)할 뜻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였고, 장곤도 또한 죄를 더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변장을 하고 함흥(咸興)으로 피신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다시 기용되어 사기독서(賜暇讀書)를 하고 교리(校理)․장령(掌令)․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 장곤은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으로 죄인들을 가볍게 다루었다고 하여 파직당한 후 여강(驪江)에 살면서 호(號)를 우만(祐灣)이라 하였으나, 모재(募齋) 김안국(金安國)이 강호(江湖)에 사는 선비의 고아한 칭호가 못된다고 우(祐)를 우(雨)로 바꿔 우만(雨灣)이라 고쳐주자, 비(雨)는 싸늘하고 차가와서 병골(病骨)인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하여 김안국이 다시 외로울 우(踽)로 고치니 그건 조롱한 것이라고 거절하자 다시 우(寓)로 고쳐 장곤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부자(夫子)가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경(厚慶 : 호조 참판 엄의 아들)은 학행(學行)이 뛰어난 영남(嶺南)에서 이름난 유학자(儒學者)로 추앙을 받았으며, 희선(喜善)의 아들 상길(尙吉)은 절행(節行)으로 유명했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했던 상길은 광부 목사(光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회양 부사(淮陽府使)와 안주 목사I安住牧使)를 니냈고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기로서(耆老所)에 들어갔다. 1636년(인종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갔던 상길은 청병(淸兵)이 강화를 육박해오자 종묘와 사직에 통곡해 재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길의 아우 상급(尙伋)은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다가 적과 대전 끝에 장살되었으며, 그의 손자 지걸(志傑)은 숙종(肅宗)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거쳐 영덕 현감(盈德縣監)으로 나가 토호(土豪)세력과 관권의 치열한 싸움 끝에 토호 세 사람을 죽임으로써 남형(濫刑)이라 하여 유배당하기도 했다. 뒤에 풀려나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어, 영조(英祖) 때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아들 세근(世瑾)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구한말에 척화양이지론(斥和攘夷之論)의 국수적 이론으로 가장 의로운 인맥을 형성한 화서(華西) 항로(恒老)가 유명했다.

  3세에「천자문(千字文)」,6세에「십구사략(十九史略」, 12세에「상서(尙書)」를 읽었다는 거학(巨學) 항로(恒老)는 1808년(순조 8) 17세 때 부모의 명(命)을 받들어 반시(半試)를 보로 갔다가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 곳은 선비가 머물 곳이 아니라며 되돌아왔고 다음 해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 연구에만 진력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장원시 별제(掌苑署別提)에 천거되었던 화서는 전라 도사(全羅都事)와 지평(地坪)․장령(掌令) 등을 역임했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나, 사직상소(辭職上疏)에서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의 중지와 취렴(聚斂)의 시정을 촉구하는 등 대원군(大院君)의 실정을 반대하여 노여움을 샀다.

  그후 다섯 차례나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는 사직상소에서 시폐의 시정을 강력하게 촉구했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학자(學者)로서 조선 말기 성리학(性理學)의 결론을 맺었다.

  특히 화서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교육자(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등에게 역설하여 민족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켜 나라에 공헌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강력하게 상소했던 우면(愚冕)과,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때 유림(儒林)에서 궐기하여 파리장서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덕후(德厚)는 「정학통록(正學通錄」과「오도가(五道歌)」의 저자 태일(泰一), 대구 고등검사장(大邱高等劍事長)으로 검찰행정의 기초 확립에 이바지했던 우익(右翼), 대구대학장을 지낸 우창(遇昶), 자모(慈母)의 병환을 단지주혈(斷指注血)로 간병했던 종기(宗基) 등과 더불어 의절(儀節)과 학맥(學脈)의 전통 가문인 벽진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9,809가구, 80,6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성이씨(保城李氏)

보성은 상고할 수 없다. 보성이씨 시조는 낭장(郎將) 이윤창(李胤昌)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4가구 1,06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보은이씨(報恩李氏)

보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31가구 1,35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봉산이씨(鳳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봉산 이씨(鳳山李氏)의 시조(始祖) 이 수(李 隨)는 태조(太祖) 때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태종(太宗)이 인재를 구할 때 성균관의 천거로 뽑혔으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사퇴하였고, 이듬해 충녕대군(忠寧大君 : 세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특히 그는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았고, 봉산(鳳山)의 토지(土地)를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봉산(鳳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수(隨)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귀종(龜從)이 세종(世宗) 때 태학(太學)에 천거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고 차남 서종(筮從)은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삼남 복종(福從)은 평산 부사(平山府使)를, 막내인 길종(吉從)은 참봉(參奉)을 역임하여 대(代)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그 밖에 조선조(朝鮮朝)에 현령(縣令)을 지낸 즙(楫), 병마사(兵馬使)를 역임한 팽구(彭丘)와 경차관(敬差官)을 지낸 영(坽)은 봉산 이씨(鳳山李氏)를 문(文)의 가문(家門)으로 기틀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 이씨(鳳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3가구, 6,5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안이씨(扶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부안 이씨(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지발(李之發)은 1471년(성종 2) 장사랑(將仕郞)에 올랐고, 평북(平北) 용천(龍川)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며, 그의 후손 봉정(奉禎)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보안(保安 : 부안의 별호) 군(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부안(扶安)으로 삼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지발(之發)의 아들 계란(季蘭)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무(茂)는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정추(廷樞)․윤섭(允燮)․명근(命根) 등은 학문으로 덕망이 높았으며 응규(應奎)는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방혁(邦赫)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여 문명(文名)있는 가문(家門)임을 널리 알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안 이씨(扶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39가구, 1,0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평이씨(富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부평 이씨(富平李氏)의 시조(始祖) 이희목(李希穆)은 고려에서 삼중대광 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올랐고, 그의 증손(曾孫) 정공(靖恭)이 1062년(문종 16) 시예부외랑(侍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삼례도(三禮圖」․「손경자서(孫卿子書)」를 신조(新彫)하여 나라에서 포상을 받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치사(致仕)하여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부평(富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정공(靖恭)의 아들 3형제는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맏아들 도(璹)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차남 위(瑋)는 고려 선종(宣宗) 때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부사(判上書部事)에 오르고 계양군(桂陽郡)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뒤에 광국공신(光國功臣)․진정공신(鎭定功臣)의 호를 받아 계양공(桂陽公)에 봉해졌으며, 정공(靖恭)의 셋째 아들인 순(珣)은 고려 때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라, 뒤에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냈다.

  정공(靖恭)의 16세손인 세화(世華)는 조선(朝鮮) 때 문과에 올라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겸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공조․형조․병조․이조 등의 판서(判書)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부평 이씨(富平李氏)의 가문을 빛내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좌승지(左承旨) 세유(世維)의 아들인 정제(廷濟)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사간(司諫)으로 이 유(李 濡)․김창집(金昌集) 등 중신(重臣)들을 탄핵하다

가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로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평 이씨(富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8가구, 5,090며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산이씨(商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상산 이씨(商山李氏)의 원조(遠祖) 이 환(李 煥)은 원래 중국(中國) 하간부(河間府) 출신으로 고려 말에 동래(東來)하여 공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고 상천(常川 : 상산의 별칭)으로 사적(賜籍)했다고 전하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이지환(李之煥)의 아들 민도(敏道)가 조선(朝鮮)에서 좌명개국이등공신(佐命開國二等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상산(商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민도(敏道)의 아들 진(蓁)이 순화군(順化君)에 봉해졌으며, 진(蓁)의 아들 창윤(昌胤), 손자 공무(恭茂)는 다같이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져서 명망을 떨쳤고, 현감(縣監)을 재냈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된 신무(信茂)(상상군 창윤의 둘째 아들)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후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에 봉해진 아들 귀년(龜年)은 군수(郡守)를 지낸 인홍(仁弘)과 함께 상산 이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상산 이씨(商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11가구, 1,3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주이씨(尙州李氏)

상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045가구 6,22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림이씨(西林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서림 이씨(西林李氏)는 문충공(文忠公) 이익존(李益存)을 원조(元祖)로 하고, 서림군(西林君)에 봉해진 효사공(孝思公) 세공(世公)의 손자이며 악존의 18세손인 언충(彦忠)을 일세조로 하고 있다.

  언충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좌우정승(左右政丞)을 역임하고, 공신(功臣)으로 서주(西州 : 서천의 별호) 군(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서림(西林)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는 당림(唐林)과 호정(戶靖)․강(剛)․자춘(子春)을 들 수 있다. 당림(唐林)은 언충(彦忠)의 아들이며 추충여절이익위공신(推忠勵節翊衛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봉익대부(奉翊大夫)․지밀직사(知密直事) 겸 대장군(大將軍)을 지냈고, 언충의 손자인 호정(戶靖:일명 인정)은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자춘(子春)은 언충(彦忠)의 증손(曾孫)으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자춘의 아들 강(剛)은 봉정대부(奉正大夫)와 예빈첨정(禮賓僉正)을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내 가문(家門)을 빛낸 세헌(世憲)은 언충(彦忠)의 10세손이며, 후손 봉명(鳳鳴)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여, 학자(學者)로 이름난 우규(禹奎)․석진(錫晉)․석태(錫泰)와 함께 서림 이씨(西林李氏)를 덕망 높은 가문으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림 이씨(西林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77가구, 1,5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산이씨(瑞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서산 이씨(瑞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영모(李永謨)는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그의 선계(先系)와 득관유래(得貫由來)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덕원(德源)이 고려(高麗)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냈고, 손자 공환(公環)과 증손(曾孫) 규서(圭瑞), 규서의 손자 맹상(盟祥)이 모두 상서(尙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한 맹(盟)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戰死)하였으며, 응운(應運)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아들과 함께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밖에 항일운동의 선봉자로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진룡(鎭龍)이 서산 이씨(瑞山李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의하면 서산 이씨(瑞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25가구, 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이씨

서울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36가구 2,1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천이씨(舒川李氏)

서천이씨 시조는 호부상서 이익존(李益存)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02가구 1,9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선성이씨

선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58가구 1,83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성산이씨(星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성산 이씨(星山李氏)의 시조(始祖)는 이능일(李能一)로 선조(先朝)는 누대(累代)에 걸쳐 경산(京山 : 성주의 고호) 지방(地方)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해 온 사족(士族)이었고, 능일(能一)은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을 할 때 공(功)을 세워 태조(太祖)로부터 삼한통일(三韓統一)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처음의 이름 능(能)자에 일(一)자를 더해 능일(能一)로 사명(賜名)받았으며,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壁上佐命功臣)에 녹훈되어 대광사공(大匡司功)에 봉해졌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대경(大卿)을 지낸 능일의 5세손 견수(堅守)와 정당문학을 지낸 우당(宇唐), 판서(判書)를 역임한 영(英), 강원도 안렴사(江原道按廉使)를 지낸 여량(汝良) 등이 고려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우(友)가 세종(世宗) 때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지냈고, 세인(世人)은 중종(中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한편 여량(汝良)은 증손 항(沆)은 연산군 때 등과하여 중종(中宗) 때 호당(湖當)에 뽑혔고, 이조(吏曹)․예조(禮曹)․병조 판서(兵曹 判書)를 지낸 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그의 현손(玄孫) 복(馥)은 효종(孝宗)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그외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 중에 석구(碩九)와 석문(碩文)이 유명했다. 석구(碩九)는 군자감정(軍資監正)과 집의(執義)를 지냈고, 석문(碩文)은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변을 당할 때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세자를 업고 극간(極諫)한 충신(忠臣)으로 훌륭한 성산 이씨(星山李氏) 가

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6,094 가구, 65,7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시조(始組)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 제 56대 왕 재위기간 924~927)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돈유(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高麗)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마의 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千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救國)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극신(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 지금의 성주면 경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고는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그 지방에 살며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었고, 순유의 12세손 장경(長庚)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1214~1260) � 그의 어머니가 꿈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낳았는데, 장경은 장성함에 따라 도량과 재주가 뛰어났다.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夜夜相思到夜深), 기우는 달만 님과 나를 비추이네(洞來殘月兩鄕心), 이 원한을 풀어 줄 사람 없어(比時寬俍無人解), 외로이 산정에 기대어 눈물 흘리네>

  그후 단종이 영월(寧越)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일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통곡을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성주 이씨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인맥을 형성한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은 충혜왕(忠惠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포(鮑)는 광정대부(匡正大夫)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역임했다.

  1326년 (충숙왕 13) 19세로 문과에 급제했던 인복(人復)은 어려서부터 백이정(白이正)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주자학(朱子學)에 밝았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문장이 탁월하여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와서「고금록(古今錄)」을 편수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목은 이 색(李 穡)과 함께「금경록(金鏡錄)」을 증수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朝鮮創業)에 공을 세웠던 직(稷 : 평리 인민의 아들)은 개국 3등공신(開國三等功臣)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고,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태종)을 도와 좌명 4등공신(左命四等功臣)이 되었으며,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을 받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뛰어난 문장으로 시명(詩名)을 떨쳤던 그는 1411년(태종 11)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진봉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종(世宗) 초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순충좌명개국일등공신(純忠佐命開國一等功臣)으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던 제(濟 : 성산군 인립의 아들)는 이성계의 셋째 딸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혼인했고, 왕자(王子)의 난 때 태조비 신덕왕후의 구명 소청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다. 남편이 죽자 경순공주는 아버지인 태조 앞에서 울면서 삭발하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절로 들어갔다.

  세종 때 병조 판서(兵曹 判書)를 역임했던 발(潑 : 성산군 인립의 아들, 제의 아우)의 현손(玄孫) 항(恒)은 일찍부터 무사(武士)가 되는 것일 꿈이어서 무예(武藝)를 익히다가, 백부(伯父)의 꾸지람을 들은 것을 계기로 각성하고 30세에 이르러 박 영(朴 英)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아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호남오현(湖南五賢)>의 으뜸으로 추앙받았다.

  어느날 말 위에서 책을 들고 생각에 잠기다가 관원 행차의 벽제(辟除 : 존귀한 사람의 행차 때 여러 사람의 통행을 금하는 것)를 범하여 종은 붙들기고 말만 가는데도 그는 깨닫지 못할 정도로 독실하게 글을 읽었다고 한다.

  1566년(명종 2) 조정에서 학행이 뛰어난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천거되어 의영고령(義盈庫令)을 거쳐 임천 군수(林泉郡守)로 나갔으나 잘못 다스린다는 비방이 있자 곧 사직하고 어머니와 함께 태인(泰仁)에 은거(隱居)했는데, 전라도(全羅道)로 감사(監司) 나간 사람은 으레가 그를 찾아보는 것이 예의가 되었을 만큼 학덕(學德)과 인망이 높았다.

  태종(太宗)은 딸 숙혜옹주(淑惠翁主)와 혼인하여 성원위(星原尉)에 봉해졌던 정녕(正寧 : 영의정 직의 손자)의 아들 집(諿)은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와 이조 참의(吏曹 參議)ㆍ부제학(副題學)ㆍ대사간(大司諫)ㆍ이조 판서(吏曹 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나치게 청렴하고 사청(私請)을 거절하여 송(宋)나라 포증(包拯)이 법관으로서 사정(私情)이 없었기에 지옥의 염라대왕에 비유하여 붙여졌던 별칭인 <포염라(包閻羅>로 불리었다.

  대사헌(大司憲) 언충(彦忠)의 증손(曾孫) 광적(光迪)은 삼조(三朝 : 효종ㆍ현종ㆍ숙종)에 걸쳐 60년 간이나 입사했던 명신(名臣)으로 90세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며, 영의정직(稷)의 현손(玄孫) 충건(忠楗)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15년 (중종 10) 문과에 급제, 이조 정랑(吏曹 正郞)을 지냈고 호당(湖當)에 뽑혀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의 아우 문건(文建)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중형(仲兄)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문하고 통고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일파로 지목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 특히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청백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었고,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 滉)ㆍ조 식(曺 植)ㆍ이 이(李 珥) 등과 응답(應答)한 내용을 엮은「묵휴창수(黙休唱酬)」가 전해진다.

  그 밖의 인물로 연산군(燕山君)이 그의 가기(歌妓 : 노래 잘하는기생)를 위해 가시(歌詩)를 지어 바치라고 했을 때 최초로 거절하고 성덕(聖德)을 우려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자건(自建)은, 이것이 탈이 되어 곤장을 맞고 선산(善山)으로 유배당했다. 그 죄상으로 보아 복직이 가망없다고 생각한 선산의 수령은 군졸을 데리고 가서 자건의 우소(寓所)를 포회하고는 그를 묶어서 끓어 앉히곤 직접 매질까지 하였다.

  그후 자건이 황해 감사(黃海 監司)가 되었을 때 이 선산의 수령은 안악 군수(安岳 郡守)로 있다가 그 저보(邸報)를 보고 수령직을 사임하려 하자 자건은 안악으로 찾아가 잘 달래어 머물러 있게 했고, 치산(治山)에 소홀하여 무척 가난하게 살면서 녹미(祿米)를 아껴 조금씩 술을 빚어먹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구한말에 와서는 조선 이학(理學)의 6대가(六大家)로 불리웠던 한주(寒州) 진상(震相)이 3ㆍ1운동 때 만국평화회의에 연판장을 찍어 그의 문인(文人)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해외에 부치게 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대구 형무소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정에서 “구형(求刑)은 너희들(日本)이 할 것이니 내가 알 바가 아니나 나에게는 공소할 곳이 없구나”라고 발언하였다고 한다.

  제국신문사 사자을 지낸 종일(種一)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손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고 옥고를 치루었고,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한 공으로 대한 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아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이니 성주 이씨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회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7,251가구, 153, 1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준이씨

성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24가구 2,1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안이씨(遂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수안 이씨(遂安李氏)의 시조(始祖) 이견웅(李堅雄)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후손 연송(連松)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며, 수안(遂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견웅(堅雄)의 손자(孫子) 빈(彬)이 사공(司空)을 지냈고, 충렬왕 때 판례빈시사(判禮賓寺事)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한 연송(連松)은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 평장사(三重大匡太師平章事)에 이르렀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수산(壽山)의 아들인 염(恬)은 고려에서도 벼슬을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에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특히 정한(廷翰)의 아들 시항(時恒)은 성품(性品)이 고결(高潔)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화은집(和隱集)」을 저술하여 명성을 날렸고,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한 준식(俊植)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수안 이씨(遂安李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안 이씨(遂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541가구, 14,0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원이씨(水原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시조(始祖) 이자송(李子松)은 문무공(文武公) 천일(天一 : 공주 이씨의 시조)의 34세손으로 전한다.

  그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도찰리사(道察理使)를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단성보조공신(端誠輔祚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그후 우왕(禑王) 때 개경 유수(開京留守)로 왕의 방탕함을 간(諫)하다가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사망 후 수성(隨城 : 수원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자송(子松)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수원(水原)으로 삼아 수원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송(子松)의 아들 장길(長吉)이 조선(朝鮮)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손자 인기(仁奇)가 판밀직사(判密直事)를, 증손(曾孫) 인수(仁壽)는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그외 호조 참판(戶曹參判) 효신(孝信)과 공조 참의(工曹參議) 령(嶺)이 유명하였고, 원휘(元輝)는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또한 영석(永碩)과 징명(徵明)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휘백(輝白)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원 이씨(水原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424가구, 6,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순천이씨(順天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순천 이씨(順天李氏)의 시조(始祖) 이사고(李師古)는 고려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평백(昇平伯)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들이 순천(順天)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되면서 본관(本貫)을 순천(順天)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사고(師古)의 아들 양소(陽昭)가 일찍이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글을 배워 문과에 급제, 사예(司藝)를 거쳐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특히 그는 이방원(李芳遠)과 곡산(谷山) 청룡사(靑龍寺)에서 함께 학문을 닦아 교분이 두터웠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태조(太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했다.

  태종(太宗)은 옛 벗인 그의 의절(義節)을 가상히 여겨 그가 은거(隱居)해 있는 산을 청화산(淸華山)이라 부르고 저택을 하사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장지(葬地)까지 지정해 주었다고 한다.

  양소(陽昭)의 아들 두 형제도 모두 벼슬에 나갔는데, 맏아들 극문(克文)은 부사(府使)를, 차남 극충(克忠)은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손자 눌(訥)과 성(誠)도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후손 정조(鼎祚)․영복(永福)․영기(永祺)가 현감(縣監)을 역임했고, 덕구(德耈)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태진(泰鎭)은 참판(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 이씨(順天 李氏)는 남한(南韓)이 총 1,064가구, 4,6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평이씨(新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신평 이씨(新平李氏)는 백제(百濟) 때 신평 호장(新平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의 후손으로 고려(高麗)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덕명(德明)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신평(新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덕명(德明)의 아들 환(桓)이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했으며, 그의 맏아들 임(稔)은 시중(侍中)을, 차남 비(秘)는 시랑(侍郞)을 지냈다. 덕명(德明)의 7세손인 첨(詹)은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올라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문장에 능하여「저생전(楮生傳)」과「삼국사략(三國史略)」을 저술하였다.

  부제학(副提學)에 오른 가종(可種)과 효자(孝子)로 이름난 상(祥)은 거(蘧)와 함께 신평 이씨(新平李氏) 가문을 빛냈다. 중국어에 정통했던 거(蘧)는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로 있을 때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형조 참의(刑曹參議)․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걸쳐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또한 원로(元老)는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으로 신양군(新陽君)에 봉해져 녹권(錄券)을 받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어 명망(名望) 높은 가문으로 널리 알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평 이씨(新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983가구, 29,2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산이씨(牙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아산 이씨(牙山李氏)의 시조(始祖) 주좌(周佐)는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 : 경주 이씨의 시조)의 5세손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승훈(承訓)의 둘째 아들이다.

  주좌(周佐)는 고려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지냈고 사공(司空)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후손 서(舒)가 원종(元宗) 때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벽상공신삼중대광(壁上功臣三重大匡)으로 아주백(牙州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아산(牙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옹(邕)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옹의 맏아들 천계(天桂)가 감찰(監察)을, 차남 천기(天杞)가 감정(監正)을 역임하였다.

  또한 천계(天桂)의 아들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원생(原生)과 정언을 역임한 원명(原明)․원항(原恒) 3형제가 유명했고, 손자 종신(宗信)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용(聳)의 맏아들 효반(孝盤)은 벼슬이 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차남 시반(時盤)은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다.

  그밖의 후손중에서는 석번(碩蕃)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홍(泓)과 대춘(大春)은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아산 이씨(牙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0가구, 10,4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이씨(安東李氏)

안동이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영조조에 이두화(李斗華)의 자(子) 이경수(李景洙)는 문과에 급제했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195가구 3,88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산이씨(安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안산 이씨(安山李氏)의 시조(始祖)는 1231년(고종 18) 몽고(蒙古) 원수 살리타이(撒禮塔)가 군사를 거느리고 함신진(咸新鎭)을 거쳐 철주성(鐵州城)을 침략할 때, 판관(判官)으로 성(城)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한 용장(勇壯) 이희적(李希勣)으로 그 후손들이 누대(累代)에 걸쳐 안산(安山)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안산(安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희적(希勣)의 7세손 보림(寶林)이 지제고(知制誥)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익룡(翼龍)은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여, 정언(正言)을 지낸 경흠(敬欽)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으로 이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외 판관(判官)을 지낸 후적(厚績)과 부정(副正)을 역임한 인석(仁碩), 참판(參判)을 지낸 난중(蘭仲)은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고, 화가로 이름난 의양(義養)은 특히 산수화(山水畵)에 능하여「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와「강남우후도(江南雨後圖)」를 남겼다.

  군수(郡守)를 지낸 한철(漢喆)은 아버지 의양(義養)의 대를 이어 산수(山水)․화조(花鳥)․인물(人物) 등 그림에 능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산 이씨(安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4가구, 4,9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성이씨(安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안성 이씨(安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중선(李仲宣)은 고려에서 경군호장(京軍戶長)을 지냈고 장민(長民)의 공(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백하(白夏 : 안성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다.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안성(安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중선(仲宣)의 아들 영(永)은 아버지가 죽자 영업전(營業田)을 이어받고자 하여 서리(胥吏)가 되었는데, 문서를 정조(正曹)의 주사(主事)에게 줄 때 절을 하지 않아 주사가 성을 내며 꾸짖었다.

  그는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리며 말하기를 “내가 과거를 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할 수 있는데 어찌 너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랴”하고 학문에 힘써 과거에 올라 사관(史館)의 대간(臺諫)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1122년(예종 17)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을 죽일 때 영(永)이 매부였던 관계로 연좌(緣坐)되어 진도(珍島)로 귀양갔다가, 어머니와 자식들이 노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술을 한 말이나 마셔 분사(憤死)했다고 하며, 이자겸이 쫓겨난 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추증되었다.

  희(禧)는 공민왕때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며 양광도 안무사(楊廣道按撫使)로 왜구방어에 큰 공을 세웠고 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며, 우왕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평왜 대장군(平倭大將軍)이 된 경(埛)은 왜병(倭兵)을 격파한 공으로 추충정난 보조공신(推忠靖難補祚功臣)에 오르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로써 명망있는 안성 이씨(安城李氏)가문은 더욱 빛났다.

  그외 인물(人物)로 좌사낭중(左司郎中) 극엄(克儼), 병부상서(兵部尙書) 유(裕),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惟仁)과 함께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숙번(叔蕃)이 당대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숙번(叔蕃)은 경(埛)의 아들로 1393년(태조 2)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正社功臣)에 올랐고, 뒤에 안성 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항혁(恒赫)은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전(㙉)과 더불어 충절(忠節)의 안성 이씨(安城李氏) 가문(家門)을 더욱 유명하게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성 이씨(安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258가구, 17,5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악이씨(安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안악 이씨(安岳 李氏)의 시조(始祖) 이 진(李 震)은 중국(中國) 농서(隴西) 사람으로 기원전 108년(한무제 원봉 3)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이 한(漢)에 불공(不貢)하여 무제(武帝)가 무장(武裝)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왕검성(王儉城)을 토평(討平)할 때 부장(部將)으로 출전하여 공(功)을 세워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낙랑후(樂浪候)에 봉해지고 낙랑태수(樂浪太守)로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대명(大命)을 완수했다.

  그후 그의 증손(曾孫) 천보(天寶)는 한(漢)나라 선기사 대장군(善騎射大將軍)으로 흉노토벌(匈奴討伐)에 공(功)을 세워 양산후(楊山候)로 봉해져서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지냈으므로 양산 이씨(楊山 李氏)로 칭관(稱貫)하였다.

  그뒤 낙랑(樂浪)이 망하자 후손들은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 등지로 이거(移居)하며 대(代)를 이어오다가 후손 극규(極奎 : 중시조)가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양산백(楊山伯)에 봉해지고 안악(安岳)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곳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안악(安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규(極奎)의 10세손 위(魏)가 고려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양산백(楊山伯)에 봉해졌고, 후손 견(堅)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신 부(辛 富)와 함께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관(灌)의 아들 계을(桂乙)이 고려 말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역임한 후 고려가 망하자 울분을 참지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의 아들 신(晨 : 해명 양소)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한편 세종(世宗) 때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낸 구관(九寬)은 뒤에 벼슬이 예조 참판(禮曺參判)에 이르렀고 만년에 충북 괴산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功臣)에 오

른 심(심)이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졌고, 희순(希舜)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한 수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호당(湖堂)에 들어가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禍)를 입었다.

  임진왜란 때 옥천(沃川)에서 왜적을 격파했던 잠(潛)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다가 혈전(血戰) 끝에 장렬하게 순절했으며, 응순(應順)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올라 익흥군(益興君)에 봉해져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른 정립(挺立)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악 이씨(安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980가구, 7,9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양이씨(安養李氏)

안양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7가구 1,05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평이씨(安平李氏)

안평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7가구 1,24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동이씨(陽東李氏)

양동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36가구 2,05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산 이씨(梁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양산 이씨(梁山李氏)의 시조(始祖) 이만영(李萬英)은 고려말(高麗末) 에 문과에 등제했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인천백(仁川伯)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전생(全生)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양산(梁山)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했으며, 손자(孫子) 징석(澄石)․징옥(澄玉)․징규(澄圭) 3형제 중 징석(澄石)이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도와 좌익 3등공신(左翼三等功臣)에 올라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양산(梁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징석(澄石)의 동생 징규(澄圭)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징석의 아들 팔동(八仝)은 현령(縣令)을 역임했다.

  그외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한 윤조(胤祖)와 금산 군사(金山郡事)를 지낸 윤환(胤環)이 뛰어났고,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종(種)과 효자(孝子)로 이름난 우춘(遇春)이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성춘(聖春)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산 이씨(梁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0가구, 4,5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성이씨(陽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양성 이씨(陽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수광(李秀匡)은 송(宋)나라에서 금오위대장군 상주국(今吾衛大將軍上柱國)에 특진되고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으로 양성군(陽城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양성(陽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人材)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의 아들 신정(臣靖)이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상書)를 역임했고, 손자(孫子) 원의(元義)는 승지동정(承旨同正)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밀직사사에 올라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던 영주(英柱 : 시조의 증손)의 아들 천(梴)은 충숙왕(忠肅王)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과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개성윤(開城尹)에 올라 양성군(陽城郡)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5형제가 현달(顯達)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양성군(陽城郡) 천(梴)의 맏아들 수방(守邦)은 도첨의 평리(都僉議評理)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내고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양성군(陽城郡)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 수인(守仁)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절의를 지키다가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한편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낸 한(澣)의 아들 맹상(孟常)은 태종(太宗) 때 강릉 판관(江陵判官)을 거쳐 세종조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벼슬이 누진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이 이르렀으며, 슬하에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오자등과(五子登科)〉의 영예를 누렸다.

  한편 해주 목사(海州牧使) 사근(思謹)의 아들 온(蒕)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며 충절을 지키니 세인들이 화산처사(花山處士)〉로 일컬었고, 그후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적성군(赤城君)에 추봉되었다.

  1435년(세종 7) 문과(文科)에 급제한 휘(徽 : 양성부원군 사검의 아들)는 단종(端宗) 때, 이조 좌랑(吏曹左郞)을 지내고 좌익3등공신(左翼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다가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피화되어 순절하였고, 진사(進士) 백근(百根)의 아들 정영(廷英)은 음죽 현감(陰竹縣監)을 역임한 후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고 문행(文行)으로 가문을 빛냈다.

  세종(世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았던 예(芮)가 뛰어났는데, 세조(世祖)가 발영시(拔英試)를 보인 뒤에 사은(謝恩)하던 날 사정전(思政殿)에서 잔치를 벌이고 어제시(御題詩) 한 수를 써서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이때 예(芮 : 전지의 아들)가 시를 짓기를〈성덕을 읊으려고 일어서 춤추려니(歌詠聖德起舞), 하늘바람 소매에 불어 춤바람을 돕는 듯이(天風吹神助回旋)〉이라 하였더니 세조가 웃으면서 “내 일찍이 이 예를 오괴(迂怪)한 선비라 하였더니 이제 이 시를 보건대 호기가 만만하구나.”하고는 곧 나인으로 하여금 비파를 타서 그의 시를 노래하고 그에게 일어나 춤추게 했다고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전한다.

  성종(成宗) 때 박식(博識)하여 천재라고 일컬어졌던 승소(承召 : 적성건 온의 아들)는 세조 때 왕명으로「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옮겼고, 예학(禮學)․병학(兵學)․음양(陰陽)․율력(律曆)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어 당대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너그러운 인간관계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가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있을 때 한 낭관(郎官)이 날마다 술만 마시고 공무를 게을리 하였으므로 동료들이 그를 내쫓고자 판서인 승소에게 품위를 올렸다.  이에 승소는 크게 웃으며, 허 승(許 承)이 오랜 시일 동안 귀가 먹어 잘 듣지를 못했으나 장관은 차마 그를 내쫓지 않았다는 한(漢)나라 고사(故事)를 예로 들고, “지금 그 낭관이 항상 술에 취해 있으나 깨어 있을 때도 많으니 어찌 탓하랴.”라고 하였다.

  증이조 참판 옥번(沃蕃)의 아들 세영(世英)은 평생에 한마디도 청탁을 한 일이 없는 유일한 도승지(都承旨)로,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과 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지내고 춘추관의 편수관이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 했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와 한성우윤(漢城右尹)․공조 참판(工曹參判)․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한 후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이르렀다.

  나라법에 도승지(都承旨)는 정비(政批 : 벼슬을 임명할 때 임금의 결재를 받는것)에 참례하는 까닭에 청탁하는 일이 많은데, 세영이 너무도 청탁이 없으니 이조 당상(吏曹堂上)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미안하여 “공은 어찌 한 마디 청탁의 말도 하지 않느냐”고 하며 청탁을 권유하기 까지 했다고 한다.

  부사직(副司直) 사종(嗣宗)의 아들 영남(英男)은 가문에 의맥(義脈)을 살린 인물로, 1584년(선조 1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과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역임했고, 태안 군수(泰安郡守)를 거쳐 강계부 판관(江界府判官)에 전임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전공을 세운 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절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순신의 휘하에서 나대용(羅大用)과 함께 거북선 제작에 참여하고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설(渫 : 언간의 아들)과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으로 활약했던 광익(光翼)․광주(光宙)가 유명했고, 판관(判官) 하(夏)의 아들 문령(文齡)은 율곡(栗谷) 이 이(李 珥)와 수계강론(修契講論)을 하여〈석촌존사(石村尊師)〉로 일컬어졌으며, 장사랑(將士郞) 대명(大鳴)의 아들 몽길(夢吉)은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文章)에 뛰어나 이월사(李月沙)․류필선(柳弼善) 등과 더불어〈낙중팔현(洛中八賢)〉으로 불리웠다.

  구한말에 와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순교한 희영(喜英)과 송산정사(松山精舍)에서 후진을 양성하고「겸산집(謙山集)」과「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을 저술했던 병수(炳壽 : 홍구의 아들)가 이 준(李 儁)열사를 호송했던 능권(能權 : 정환의 아들)과 함께 의절(義節)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인 양성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9,245가구, 38,3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강이씨(驪江李氏)

여강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509가구 9,50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주 이씨(驪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고려(高麗)에서 인용교위(仁勇校尉)를 지낸 이인덕(李仁德)을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와 낭중(郎中) 이윤수(李允수)를 시조로 하는 파, 진사(進士)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는 파 등 3파가 있으며, 이들은 여주(驪州)에 세거(世居)하는 사족(士族)으로 여주를 관향(貫鄕)으로 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고려 시대의 문인 백운거사(白雲居士) 규보(奎報)를 비롯하여 조선 초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언적(彦迪), 실학(實學)의 중조격인 학자 익(瀷), 종교운동에 헌신하다가 신유박해(辛酉迫海) 때 순교한 가환(家煥), 지리학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 일명「팔역지(八域志)」를 저술한 중환(重煥) 등이 있다.

  이밖에도 공양왕(恭讓王)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행(行), 세조(世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낸 몽가(蒙哥), 선조 때 형조․예조 판서․대사간

(大司諫)․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우직(友直)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88가구, 61,9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흥이씨(驪興李氏)

여흥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04가구 3,38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산이씨(連山李氏)

연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9가구 1,05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무(李 茂)는 본래 당(唐)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 당나라 제 3대 왕, 재위기간 : 650~683)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百濟)를 펑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원주(元柱), 통례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漬),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핵(核),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분양(汾陽),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방(昉),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득량(得良),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백연(伯衍),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계연(季衍)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의 현손(玄孫)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던 정공(靖恭)의 아들 원발(元發)이 고려 말(高麗末)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여 이태조(李太祖)가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상신(相臣)으로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으 충절을 지켰으며, 그의 아들 귀령(貴齡)과 귀산(貴山)이 세종(世宗) 때 좌의정(左議政)과 관찰사(觀察使)를 각각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춘천 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를 지낸 속(續 : 관찰사 귀산의 아들)은 조선 초에 맹인(盲人)들의 궁중나들이를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맹인의 원한을 샀다. 그후 태종(太宗)이 속(續)의 네째 아들 근수(根粹)를 부마(駙馬)로 삼기위해 맹인 지화(池和)를 중매인으로 보냈는데, 그 원한으로써 무고로 모함을 하여

근수는 죄를 입고 창원(昌原)으로 귀양을 갔었다.

  직제학(直提學) 말(土末 : 귀산의 현손, 인문의 아들)의 손자 주(澍)는 명종(明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계비, 명종의 어머니)가 증(亻曾) 보우(普雨)를 총애하고 불교(佛敎)를 재흥시키자 여러 유생과 함께 보우의 처벌을 상소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으며,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지냈다.

  주의 아들 광정(光庭)은 선조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가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특히 그는 선조(宣組) 때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그 곳 천주교 선교사가 만든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구해 가지고 들어와 한국사에 있어서 지리관(地理觀)의 대혁명을 일으켰다.

  광정의 아들 현(示玄)은 한국 재정사(財政史)에 있어서 정치능력을 가장 높이 평가받은 임물이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사위로 광해군(光海君) 때 삭직당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전적(典籍)에 등용되어 전조(銓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으 병참(兵站)과 속환된 피로인(被虜人)들의 구호정책을 비롯하여 관향사(管餉使)로 나갔던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그의 수완을 크게 평가받았었다.

  그의 아우 분(示分)도 병자호란 때 병참에 유공하였고, 주(禂)는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척화소(斥和疏)를 올려 이름을 덜쳤다. 인조(仁祖) 때 <구휼칠조(救恤七條)>를 상소하고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완(示完)의 아들 봉징(鳳徵)은 숙종(肅宗)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비(廢妃)를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박태보(朴泰輔) 등과 더불어 <삼간신(三諫臣)>으로 불리웠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청백리(淸白吏) 인충(人忠)의 현손(玄孫) 지남(至男)은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다. 연안(延安)의 읍호(邑號)인 <영응선생(永膺先生)>으로 불리웠던 그는 그의 아버지 언침(彦忱)이 장령(掌令)에 있으면서 조정에 거슬린 바른 말을 하다가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좌천되자 따라가서 그 고을에 있던 하서(何西)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옛날에는 위독한 사람의 똥맛이 쓰면 살수 있고, 달면 죽는다고 하여 효자들은 똥을 핥아 맛을 보는 풍습이 있었다.「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지남의 어머니 안씨(安氏 : 홍문관 박사 안한영의 딸)가 이질을 앓아 위독하게 되자 지남이 그 똥을 맛본즉 달고 매끄러우므로 목욕을 하고 하늘에 호소하기를, 자기 몸으로 모친의 죽음을 대신할 것을 빌었다.

  안씨의 꿈에 신인(神人)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말하기를 “네 아들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미 그로서 죽음을 대신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어머니 병간호에 몸이 몹시 상했던 지남은 마침내 피를 토하다가 나이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남의 아들 기직(基稷)이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산중에 물과 미음을 입에 대지 못하다가 머리털이 희어지고 눈물에 젖어 눈언저리가 썩기까지 하였다. 다음해 봄에 곡(哭)을 하던 중 숨이 막혀 스러져서 아우 기설(基卨)에게 “나의 불효로 친상을 마치지 못하니 부업(父業)을 계승해 달라”고 유언하고「중용(中庸)」에 있는 선(善)을 택한다(擇善)는 귀절의 뜻으로써 간곡히 부탁하고 죽었다.

  기직의 아우 기설도 부친상에 7일 동안 단식을 하였고, 눈물이 다하자 불그스레한 혈루(血淚)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발인(發引)하여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화적(火賊) 떼가 왔다가 영구(靈柩)를 지키고 울부짓는 기설의 모습을 보고 그 효성에 감격하여 돌아갔으며, 적성(積城)에서 상여에 불이 나자 몸으로 관을 가려 머리털이 모두 그슬렸으나 다행이 죽음을 면했다.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와 돈서(惇敍)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저과 대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했다. 이로써 지남과 그의 처 정씨(鄭氏), 지남으 아들 기직과 기설의 형제, 딸 이씨, 지남의 손자 돈오와 돈서, 돈서의 처 김씨 등 8개의 정문(旌門)이 내려져서 <연안 이씨 8홍문>의 영예를 얻었으며, 기설의 손자 후정(後定)은 숙종(肅宗)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격분하여 죽었다.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충신(忠臣) 정려가 내려져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연안 이씨 또 다른 인맥인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의 후손에서는 9세손 석형(石亨)이 뛰어났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회림(懷林)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삼각산(三角山) 신령에게 빌어서 잉태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마침 금성(禁省)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에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더니 흰 용(龍)이 바위를 조개고 나왔었다. 꿈에서 깨어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아들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하였다고 한다.

  나이 26세에 생원․진사와 문과 초시(初試)에 모두 장원하였고, 다음해 잇달아 삼장(三場)에 장원하여 정언(正言)을 지내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漢城府尹)․호조 참판(戶曹參判)․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지낸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월사(月沙) 정귀(廷龜)는 6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고, 윤근수(尹根壽)으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仁祖) 초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외교에도 재치와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使臣)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명(明)나라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 여 장(章)의 기행문을 모은「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글씨에도 뛰어나 신 흠(申 欽)․장 유(張 維)․이 식(李 植) 등과 함께 조선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졌고, 그의 아들 명한(明漢 :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냄)과 소한(昭漢 : 이조 참판을 지냄) 현제가 유명했다.

  특히 그는 효행(孝行)도 뛰어났다. 병자호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들어간 지 수일만에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여, 호군을 피해다니다가 길 곁에 흙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그 속에 모시고 자신은 문 앞에 누워서 몸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청나라 군사가 활줄을 당겨 한참 보더니 흙집 안에 노모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효행에 감동하여 그냥 돌아갔다.

  명한(明漢)의 아들 단상(端相)은 인조(仁祖)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효종조(孝宗朝)에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간(臺諫)을 거쳐 청풍 부사(淸風府使)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고, 학문이 뛰어나 「대학집람(大學集覽)」․「사례비요(四禮備要)」․「성현통기(聖賢通紀)」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한국유학사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단상의 아우 가상(嘉相)도 효행이 뛰어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적진 속을 헤매다가 여섯 번이나 적에게 잡혀 끝내 살해당했으며, 조부(祖父) 월사(月沙), 아버지 명한(明漢)과 더불어 <삼대 대제학(三代大提學)>의 전통을 세웠던 일상(一相)은 청(淸)나라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효종)의 북벌계획 수립에 도움을 주었고「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삼도 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류성룡(柳成龍)을 도왔던 귀(貴)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공을 세워 정사1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올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 괄(李 适)의 난과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난세에 살면서 훈공을 세웠던 충신으로 유명했다.

  귀의 아들(時白)은 효종(孝宗) 때 좌의정으로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진봉되고 영의정(寧議政)에 올라 명망을 떨쳐 연안 이씨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의 아버지 귀의 충정에 보답하는 뜻에서 임금이 내린 집에서 살았던 시백은 마당에 전부터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어느날 시백이 하직(下職)에 있을 때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일꾼을 데리고 와서 왕명이라 하면서 그 꽃나무를 캐어가려 했다. 시백은 아무말 없이 꽃나무 곁으로 달려가 뿌리까지 뽑아 버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 저녘으로 험악해져 가는데 임끔께서 어진 인재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 하시려는 건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기개에 느낀 바 있었던 임금은 시백을 중용(重用)하였다고 한다.

  시백이 병자호란 직후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는데 평양 대동문을 들어서니 화려한 기생의 무리가 접대를 하였다. 병란 후에 서도(西道)에 탕진이 흑심한데 이 화려한 접대에 놀라 그 사유를 평양 서윤(平壤庶尹)에게 물었다. 그 서윤은 사신행차에 항상 체통을 못이루고 있어 각 고을의 관비(官婢) 중 자색있는 자를 선발하여 모이게 하고, 그 복색과 비용은 그들 친족으로 하여금 부담케 함으로써 관비의 손실을 절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시백은 성내어 “서윤을 설치한 건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하며 호통을 치고는 감사를 불러 시정을 명하고 떠났다.

  어느날 시백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무명방석 하나를 만든 일이 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시백은 퇴청 후 뜰 아래 부들자리(망席)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우리 선조가 옛날부터 깔던 자리는 바로 이 부들자리요, 내가 풍운을 만나 외람되게 공경(公卿)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겨지며 실폐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서 망하기를 재촉하단 말이오”하자 부인은 당장에 그 비단실을 뜯어버렸다는 기록이「공사견문(公私見聞)」에 전한다.

  만년에 효종(孝宗)이 왕세자와 시백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이를 보기를 너의 팔다리(股肱)처럼 여기고 위하기를 나같이 하라”고 유언하였다. 일찍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시백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를 알면 그를 믿지 않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묘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시백의 아우 시방(時昉)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아버지와 함께 공(功)을 세워 정사2등공신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고,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후손 시직(時稷)은 병자 호란 때 강화도에서 국운을 통탄하고 유서를 남긴 후 종으로 하여금 목을 조르게 하여 자결했다.

  통레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漬)의 후손에서는 그의 현손(玄孫) 보정(補丁 : 예조 참판을 역임)과 말정(末丁 : 예빈지 소윤을 역임) 형제가 뛰어났고, 말정의 아들 숙기(淑琦 : 이조판서)와 숙함(淑瑊) 형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유공했다.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던 후백(後白 : 숙함의 증손, 국형의 아들)은 옳은 일과 결백함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의 중손 호민(好閔)은 선조(宣祖)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니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고,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특히 그는 검소하기로 유명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비단옷 한 번 입지 않았다. 선조가 어의(御衣)를 하사(下賜)할 때도 호민에게만은 무명옷을 내렸다고 한다.

  전란이 끝날 때마다 서로 녹훈(錄勳)을 하려고 위증을 해가며 법석대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후에도 웬일인지 녹권을 받은 자가 조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에 무관심한 호민에게 이덕형(李德馨)이 희롱하며 “공은 어디 갔다가 정승이 되지 못했소”하였더니, 호민은 “공은 어디 갔다가 공신이 되지 못했소”하였다. 그후 이 아름다운 대화는 전후 때마다 일어나는 시대의 풍조를 익살하는 명귀로 곧잘 인용되었다고 한다.

  정조(正朝)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정운(鼎運)의 아들 명적(明迪)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으며, 김해 부사(金海府使) 중길(中吉)의 손자 술원(述源)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정희량(鄭希亮)에게 죽음을 당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술원은 거창읍의 좌수(座首)로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역장(逆將) 정희량 앞에 나아가 “너의 조상은 그토록 나라에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무엇이 모자라 이런 수작이냐. 너의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호통치다가 무참하게 난도(亂刀)질 당했다.

  술원은 아들 우방(遇芳)이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우두령(牛頭嶺)에 올라가 적 틈에 잡혀 있는 거창 시민에게 포고를 하였다. “거창군민은 나의 말을 들어라. 역적 희량에게 붙어 있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 요, 희량을 잡아 오진(五陳)에 데려오면 조정에 품하여 녹훈을 할 것이다.” 군민들이 밤중에 정희량의 거소를 습격하여 희량을 묶어 우방의 진용에 데려오자 난이 평정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시원(始源)의 아들 봉수(鳳秀)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정조(正祖)로부터「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고 권학(勸學)의 격려를 받았으며, 참봉 명원(命源)의 아들 지수(趾秀)는 순조(純祖) 때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世子)에게 학문을 진강했다. 또한「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지내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약우(若愚), 석농체(石農體)의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던 종우(鐘愚),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자결한 현섭(鉉燮),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약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던 도재(道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던 설(偰) 등이 명문(名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동녕(東寧)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페기운동을 전개했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가 되어 국무총장을 겸한후 대통령 대리가 되어 의절(義節)의 전통가문인 연안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0,274가구, 126,5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천이씨(漣川李氏)

연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906가구 6,22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영주이씨(榮州李氏)

영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68가구 3,11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동향의 영천이씨(榮川李氏)와의 관계도 상고할 수 없다.

 

 

 

영천이씨(寧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영천 이씨(寧川李氏)의 시조(始祖) 이능간(李凌幹)은 고려의 이름난 명신(名臣)으로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귀양 가자 역졸을 시켜 금(金)을 바쳐 왕과 소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했으며, 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두려고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원제(元帝)에게 주청(奏請)하여 이를 중지시켜「토좌당(兎左堂)」이라는 사림(士林)의 액호(額號)를 받았고, 충혜황(忠惠王) 때 조 적(曺 頔)의 난이 일어나자 문하시중(文下侍中)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영천(寧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상서(尙書)를 지낸 명(銘)과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일생(一生)을 마친 능간(凌幹)의 손자 상휴(湯休), 그의 아들로 조선조(朝鮮朝)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관직에 나가지 않고 현금(玄琴)을 즐겼던 분(芬)이 유명했다.

  그밖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중엽(重燁)․부춘(富春)․재성(在誠) 등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덕근(德根)․복겸(福謙)이 영천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천 이씨(寧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3,290가구, 95,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남동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대(古代) 골벌국(骨伐國)이었건 것을 신라 초기에 영천군 일원은 절야화군(切也火郡), 신녕(新寧)지방은 사정화군(史丁火郡)이라고 하였다. 경덕왕 이후에는 임고군(臨皐郡)․고울부(高鬱府)․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면백현(面白縣)․이지현(梨旨縣)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귀었다.

  고려 초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성종(成宗) 때에는 자사(刺史)를 두었다. 현종(顯宗) 때에는 신녕현이 경주(慶州)로 편입되고 명종(明宗)때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그 뒤 지주사(知州使) 소재지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고 1497년(연산군 3) 신녕현이 폐현(廢縣)되면서 영천군(永川郡)에 귀속되었다. 그후 1937년 영천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81년에는 영천읍(永川邑)이 시(市)로 분리 승격하였다.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이문한(李文漢)이며, 그의 후손으로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진 대영(大榮 : 시호는 문정), 울산 군사(蔚山郡事) 중영(仲榮), 영동정(令同正) 전(磚)을 각각 파조로 하는 3계통이 있다.

  역사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 때 인(仁)과 당(璫)이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을, 국보(國寶)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종검(宗儉)․보흠(甫欽)․현보(賢輔) 등이 유명하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종검(宗儉)은 한림․직제학․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보흠(甫欽)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지내고 단종 손위 후에는 순흥 부사(順興府使)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 당했다. 현보(賢輔)는 연산군 때 문과(文科)에 급제, 교서관(校書館)의 벼슬을 지냈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134가구, 8,6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寧海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영해 이씨(寧海李氏)의 시조(始祖) 이연동(李延東)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낸 전주 이씨(全州李氏) 한(翰)의 후손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으며, 공(功)이 있어 영해군(寧海君)에 봉해졌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을년(乙年)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내부령(中顯內府令)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성무(成茂)가 이름을 떨쳤고, 언량(彦良)은 임진왜란 때 무장(武將)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해 이씨(寧海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92가구, 2,0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안이씨(禮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태사공(太師公) 이 도(李 棹)를 시조(始祖)로 삼고 도(棹)의 7세손인 천(仟)의 아들 3형제 중 둘찌인 혼(混)이 고려 원종(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내고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있다. 그후 혼의 혼자 익(翊)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으로 예안군(禮安君)에 봉해졌으므로, 예안(禮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때 무관(武官)이며 과학자였던 천(蕆)이 화포(火砲)와 자격루(自擊漏) 등을 제작하였고, 개량활자를 만들어 우리나라 인쇄술으 발달에 공헌을 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명(蓂)은 판서(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이 밖에도 무관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공(功)을 세운 경룡(慶龍)과 이 괄(李 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된 경정(慶禎)이 유명했고, 간(柬)은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으 한 사람으로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을 학문으 근본으로 하였다.

  하늘에서 내린 효자로 이름난 천본(天本)은「천심효자(天心孝子)」라 칭했고, 식(埴)은 영조(英祖) 때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준영(準永)은 3.1운동 때 왜적과 싸워 예안 이씨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724가구, 11,28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현이씨(오현李氏)

오현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8가구 1,63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옥천이씨(沃川李氏)

옥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0가구 1,09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온양이씨(溫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온양 이씨(溫陽李氏)의 시조(始祖)는 조선 선조(宣祖) 때 옥천 군수(沃川君守)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항전(抗戰)하다가 순국(殉國)한 이흥서(李興瑞)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며, 손자 만립(萬立)이 난중향기(亂中響記)에서 조부의 행적(行蹟)을 알았으나 역시 선대(先代)를 알 수 없어 흥서(興瑞)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온양(溫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온양 이씨(溫陽李氏)는 효자(孝子)의 집안으로 이름났는데 조선 숙종(肅宗) 때 태귀(泰貴)와 헌종(憲宗) 때 흥엽(興爗)은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려(旌閭)와 삼효문(三孝門)이 세워졌고 의친왕(의친왕: 고정의 셋째아들)의 친필(親筆)로「온양이씨 삼효문(溫陽李氏三孝門)」이라 쓴 비(碑)가 세워졌다.

  이외에도 항일(抗日)․구국(救國)운동에 앞장선 응선(應善)과 경선(景善)이 온양 이씨의 자랑스런운 인물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온양 이씨(溫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25가구, 2,4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완산이씨(完山李氏)

완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939가구 9,6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향(同鄕)인 전주이씨와의 관계는 상고할 수 없다.

 

 

 

용인이씨(龍仁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로 구성백(駒城伯)에 봉해진 이길권(李吉卷)이다.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인물을 보면 세백(世白)이 숙종(肅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이르렀으며, 숙종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 영조(英祖) 때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의현(宜顯)은 세백의 아들인데, 이들은 부자 정승(政丞)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주요인물로는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평하고 뒤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보혁(菩赫), 정조 때 좌의정(左議政)과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재협(在協), 영조 때 대사성(大司成)․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의철(宜哲), 정조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재학(在學), 철종 때 예조 판서에 이른 삼현(參鉉), 고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원명(源命) 등이 유명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572가구, 27,2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계이씨(羽溪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우계 이씨(羽溪李氏)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고려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를 지낸 이양식(李陽植)이다. 그의 아들 순우(純祐)는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 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경주(慶州)에서 우계(羽溪)로 이거(移居)하였다.

  그후 양식(陽植)의 5세손으로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구(球)에 이르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구(球)의 현손인 광식(光軾)이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광식(光軾)의 아들 감(戡)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 가문을 중흥시켰다. 전의 손자 복남(福男)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나주 판관(羅州判官)․남원 부사(南原府事) 등을 지내고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러 정유재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戰死)  하였다.

  또한 감(戡)의 손자 명남(命男)은 참판(參判)을 역임하였으며, 경항(慶恒)의 아들 서우(瑞雨)는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명필(名筆)로 이름이 높았다. 이외에도 상우(商雨)가 찰방(察訪)을, 경제(慶薺)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계 이씨(羽溪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390가구, 14,0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봉이씨(牛峰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사람인 이공정(李公靖)이다. 공정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우봉(牛峰)․잠성(岑城) 등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 곳에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우봉(牛峰)으로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성리학의 대가 재(縡)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英祖) 때 노론(老論)의 한 사람으로 대제학(大提學)․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냈으며, 그의 저서「사례편람(四禮便覽)」은 근세의 대표적인 명저로서 오늘날에도 상사(喪事)나 제례(祭禮)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재(縡)의 손자 채(采)는 순조(純祖)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있을 때 그 고장에 처음으로 둑을 쌓아 농사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 둑을 가리켜「이공제(李公堤)」라 불렀다 한다. 이외  휘정(輝正)이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광문(光文)이  형조․공조․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봉 이씨(牛峰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278 가구, 17,5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이씨(蔚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울산 이씨(蔚山李氏)의 시조(始祖) 이 철(李 哲)은 고려 고종(高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판전리 사사(判典理司事)에 올랐으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울산(蔚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高麗)때 사재주부(司宰主簿)를 지낸 순광(淳匡)과 형부 전서(形部典書)를 지내고 도첨의 평리(都僉議平理)에 추증된 운림(雲林)이 있으며, 조선에 와서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과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의(誼), 그리고 군수(郡守)를 지낸 희신(希信)과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현감(縣監)을 지낸 장은(長誾) 등이 대표적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산 이씨(蔚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128가구, 4,4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주이씨2(原州李氏2)

원주이씨2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61가구 3,53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령이씨(宜寧李氏)

의령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8가구 1,3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성이씨(義城李氏)

의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49가구 2,91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천이씨1)

이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260가구 4,26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익산이씨(益山李氏)

익산이씨 시조는 고려 인종조 상서성 우복사(右僕射) 이주연(李周衍)이다. 인물로 5세손 이행검(李行儉)은 제주(祭酒)였다. 이행검의 손자(孫子) 이공수(李公遂)는 문과출신으로 시중(侍中)이었으며 익산부원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종직(李宗直)은 사직(司直)으로 한파를 이룬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92가구 2,2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장흥이씨(長興李氏)

장흥이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성종조에 이원성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25가구 2,12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원이씨

전원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95가구 3,3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은이씨

전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81가구 3,81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 한(李 翰)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 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인 대성(大姓)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그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 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였다.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德源)에 정착하였다가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 리에 있었다) 땅으로 이주(移住)하여 원주민 5천 호(五千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때가 고려 고종(高宗 : 제 23 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조(朝)였고,「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좇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목조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공손히 뵈오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는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익조가 보인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출생했던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疆)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우와(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소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환조의 둘째 아들 화(和)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 졌으며, 두차례 왕자의 난을 �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1392년(태조 1) 7월 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王)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 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환조(丸彫)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사공(司空) 이 한(李 翰)의 22세손이다.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鄰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건국(建國) 이념으로 내세워 왕권 중심의 권력구주를 확립하여 한국(韓國) 최대의 벌족(閥族)으로 발전해온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대소 120 여 파(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이를 시대(時代)에 따라 세 갈래로 구분하면, 첫째 이태조의 고조부(高祖父)임 목조(穆祖) 안사(安社)의 상대(上代)에서 갈려진 파로는 시조 한(翰)의 14세손 궁진(宮進)의 둘째 아들 단신(端信)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시중공파(侍中公派)와 15 세손 용부(勇夫)의 둘째 아들 거(琚)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세손 양무(陽茂)의 셋째 아들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가 있으며, 둘째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서 갈려진 파로는 안사의 아들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대군(安興大君) 파와 익조(翼祖) 행리(行里)의 아들 함녕(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대군(咸城大君) 등 12파가 있으며 탁조(度祖) 춘(椿)의 아들 완풍대군(完豊大君)과 의안대군(義安大君) 등을 포함하여 총 18개 파가 있다.

  셋째 태조의 후대에서 갈려진 파로는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를 포함하여 99개파(대군 : 25, 군 : 74)로 알려졌으나, 미취졸(未娶卒 : 결혼전에 죽음)이거나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大君)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전주 이씨의 인맥(人脈)으로는 세종(世宗)의 아들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계통에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여 주목을 끌었고, 정종(定宗)의 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계통에서는 영의정(領議政) 1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시켜, 정승 3명을 배출시킨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 세종의 아들 여), 정승 2명의 선성군파(宣城君派 : 정종의 아들 무생),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文武官)을 배출해 낸 효령대군파(孝令大君派 : 태종의 둘째아들 보)와 함께 화려한 명맥(名脈)을 이루었으며 정종의 막내아들인 무림군(武林君) 선생(善生)과 중종(中宗)의 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의 계통은 무관(武官)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태조(太祖)가〈우리 가문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 칭했던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가 고려 말 우왕(禑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명(明)나라에 그 정변을 설명하러 갔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였다.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의 후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가 양자(養子)로 들어가 후계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溥)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종실(宗實)의 현자(賢者)〉로 불리웠고, 20세에 요절했으나 그 이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계감(戒鑑)을 편수했으며, 효경(孝經)․소학(小學)․사서삼경(四書三經)․음율(音律)․산수(算數) 등에 모두 뛰어났었다.

  부(溥)의 증손으로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역임했던 수한(守漢)의 아들 의건(義健)은 명종(明宗) 때 당시의 명현(名賢)들과 교유하며 시명(詩名)을 떨쳤고, 절(節)과 학(學)으로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군수(郡守) 욱(郁)의 아들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원(厚源)은 평생을 외롭게 생활하여 인간저울이란 뜻인〈의형(義衡)〉으로 불리웠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강화(講和)가 진행되고 세자(世子)의 인질문제로 침통해 있는 인조(仁祖) 임금에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은 오직 나라를 위해 죽고,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담한 발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악신 김자점(金自點)의 축출을 강력하게 주장�던 후원은 만년에 광주(廣州) 선형곁에 집을 짓고 그 집이름을〈오재(五齋)〉라 했다.    정종(定宗)의 인맥으로는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의 후손들이 명맥(命脈)을 끈다.

  선성군 무생의 증손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은 명종(明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정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광국 3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박학하였으며, 당쟁이나 흑백의 논쟁에 편당되지 않았다.

  어느날 야대(夜對)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술을 건하고〈아로가(雅鷺歌)〉를 지어 양원에게 화답(和答)을 청했다.

  〈까마귀야 검지 말라, 백노야 희지 말라.(鴉兮 莫黑 鷺兮 莫白)

  흑백이 어지럽다. 수리야 너는 어찌 홀로 검지도 희지도 않느냐(黑白之紛如兮 鵰獨胡爲平 不黔不白)〉하니 양원이 화답하기를,

  〈주(朱)라 해도 내 아니요, 녹(綠)이라 하여도 내 아니라(謂朱非我兮 謂綠非我)

  주록(朱綠)이 현란함도 내 고움이 아니어늘(朱綠之眩晃兮 又非我之娜也)

  님은 어찌하여 날 몰라 보시고 물들었다 하시오(君胡爲平不我知 謂我兮染夏)〉하니 임금이 좌요에 편당됨이 없음을 알고 더욱 어질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한강(漢江)을 지키다가 해유치에서 적군을 크게 대파한 후 영의정에 올랐던 양언은 의주(義州)에 피란 중이던 선조 임금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식을 듣고 “국사를 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다”하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절곡(絶穀)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시경(蓍慶)은 임진왜란에 순절한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고 있는 동안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수르 갚는다고 아버지 영전에 맹세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전투에 참천하여 육신으로 적을 격살하고 물에 빠져 죽으니 시체도 못거두고 의관(衣冠)으로 장사를 지냈다.

  군수(郡守) 극인(克仁)의 아들 홍주(弘冑)는 40년간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 초막뿐이었고 한 뙈기 공원에는 대(竹)와 화초가 조촐하게 피어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묘(文廟)의 중수비문을 남겼다.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의 후손에서는 수창부정(壽昌副正) 칭(稱)의 아들 헌국(憲國)의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선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천군(德泉君)후생(厚生)의 아들 효백(孝伯)은 이 복(李 復)․이 형(李 衡)과 더불어 당대에 활 잘 쏘는〈칠사종(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 뛰어난 지감(知鑑)으로도 유명했다.「원교집(圓嶠集)」에 의하면, 그의 무덤이 광주(廣州) 도논리(道論里)에 있는데 그 터는 효백이 평소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이다. 그는 항상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반드시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어느날 활줄이 갓끈에 퉁겨져서 갓끈에 달렸던 큰 구슬을 잃었는데 장사할 때 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는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으나 세종(世宗)의 현명함을 위해서〈창광자자(猖狂自恣)〉하여 세자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방랑하였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는 불교를 깊이 믿었다. 그의 형인 양녕대군이 사냥개를 끌고 어깨에는 사냥매를 얹고서 그가 있는 절에 와서 마당에 사냥한 짐승을 늘어 놓고 자주 놀다가 갔는데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효령대군이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니, “이승에서는 임금의 형이요, 저승에서는 보살의 형이니 지옥에 갈 리가 있겠는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현손 중호(仲虎)는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의 이름난 학자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대쪽으로 만든 계명(계명)에〈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며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는 등의 구사(九思)와〈머리 모양은 곧게 하고 손가짐은 온순하게 하라〉는 등의 구용(九容)을 빽빽하게 새겨서 허리띠에 차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함께 묻어 달라고 하였다.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직언(直彦 : 효령대군의 5대손, 형의 아들)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 양(樣)의 손자 명(溟)은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 후 고갈된 재정을 맡아 국고(國庫)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 재정(財政) 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활을 잘 쏘아 장거리 사수로 이름을 떨쳤던 성녕대군(誠寧大君) 종(種)의 후손에서는「지봉유설(芝峰類說)」․「찬록군서(纂錄群書)」 등 수십종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명망을 떨쳤던 수광(晬光)과 억울한 사람을 너무 많이 구해주어서 지옥에서도 계속 영의정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성구(聖求 : 지봉 수광의 아들)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특히 성구는 인조 때 기생(妓生) 제도를 폐하여 모두 고향에 돌려 보냈던 일로 이름을 떨쳤고, 이 계(李 烓)의 온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 양화강(楊花江)위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집에 불이 났었다. 그는 밭뚝에 나와 태연히 앉아 있다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도 않고 “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딸아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익녕군(益寧君) 치(移)의 후손에서는 정은(貞恩)의 증손 원익(元翼 : 합천 군수 억재의 아들)이 서민적(庶民的)인 인품으로서〈오리정승(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원익이 연로(年老)해서 퇴임을 청하니 인조(仁祖)는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였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하여 그의 검소한 덕을 표하며, “평생의 검소는 가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의 현황을 물었다.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은 “정슨 40 년에 초가 두어칸 뿐이더냐”하면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침(正寢)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세종(世宗)의 아들 18형제중 가장 명맥(命脈)을 이룬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5대손 수록(綏祿)은 광해군(光海君) 때 원익(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 물러가 살았으며, 그의 아들 경여(敬與)가 다난한 일생을 살면서 기국(器局)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경여의 손자 관명(觀命 : 대제학 민서의 아들)은 아우 건명(健命)의 죄목에 연좌, 덕천(德川)에 유배되어 관노(官奴)살이를 하면서 패랭이(平涼子)를 쓰고, 새벽 일찍 관가의 마당을 쓸어놓고 군수가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대령(待令)하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관명의 아우 건명은 경종(景宗)이 병석에 누워 후사(後嗣)를 정하는데, 아우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자 세자(世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무고를 받아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당했다.

  건명의 사촌이 속종조(肅宗朝)의 상신 이명(頤命)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으며, 특히 청(淸) 나라의 실학사조(實學思潮)에 관심이 깊었고,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하였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영조(英祖)의 대리청정을 실현케 했으나 소론(少論)의 반대로 결정이 철회되자 파직,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고 무고로 사사당했다.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의 아들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졌단 준(浚)은 문무 겸비의 명신(名臣)으로 이름났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1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병권(兵權)을 쥐자, 종실(宗室)에게 병권이 쥐이면 혁명이 있다는 한계희(韓繼禧)의 논척으로 파직당했다.

  중 보우(普雨)를 논척하다가 유배당했던 충작(忠綽)은 효행(孝行)이 뛰어났다. 부모의 복상(服喪) 중에 너무 울어 멀었는데도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먼거리의 묘소(墓所) 참배를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임금이 그의 효행을 높이 치하하여 승지(承旨)로 임명하자 조정에서는 장님승지는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신들은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사랑한다. 보고서 못된 일을 하는 눈보다 아예 못보는 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치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외 전주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완원군(完原君) 수(성종의 다섯째 아들)의 증손 몽설(夢說)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보령(保寧)에 은거하여 향풍(鄕風)을 세웠고, 그의 아들 성(城)과 원(琬)은 학명을 떨쳤다.

  진(瑱)의 아들 상질(尙質)은 학문이 현달하여〈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훤(藼)은 언간(言諫)으로 절의(節義)를 세워, 대제학(大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손자 조(肇)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순조(純祖) 때 우의정을 지내고 명문장가로 시명(詩名)이 높았던 서구(書九)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손꼽혔으며,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 상황(相璜)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러, 헌종(憲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순조실록(純祖實錄)」을 편찬했던 지연(止淵), 철종(哲宗) 때 좌의정을 지내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던 헌구(憲球),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철종 때 영의정 재원(載元),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大統領)을 지낸 승만(承晩)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남한에 총 558,019 가구 2,379,5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선이씨(旌善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정선 이씨(旌善李氏)의 시조(始祖) 이양혼(李陽焜)은 송(宋)나라 안남국(安南國) 남평왕(南平王) 건덕(乾德)의 세째 아들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시원(始原)은 그가 북송(北宋) 휘종(徽宗)때 국난(國亂)을 피하여 우리나라의 경주(慶州)에 정착(定着)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9세손 우원(遇元)이 국자생원(國子生員)으로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봉되어, 정선(旌善)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정선(旌善)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우원의 아들 형규(亨奎)가 18세에 등과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에 올랐으며, 후손 자생(自生)이 군기시윤(軍器시尹)을 지냈다.

  그외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희성(希聖)과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의(誼)가 뛰어났고, 득량(得良)은 부사(府使)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정선 이씨(旌善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809가구, 3,1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주이씨(貞州李氏)

정주는 풍덕의 별칭이다. 정주이씨 시조는 고려 고종조에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한 이세화(李世華)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10가구 3,3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주이씨(濟州李氏)

제주이씨 시조는 원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57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진성․진보이씨(眞城․眞寶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성 이씨(眞成李氏)의 시조(始祖) 이 석(李 碩)은 누대로 진보현(眞寶縣)에 토착(土着)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진보현의 아전(衙前)으로 있다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그의 맏아자수(子修)가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362년(공민왕 11)에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난(亂)때 전공(戰功)을 크게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귀(貴)로 인하여 시조 석(碩)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密直使)에 증직(贈職)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 석(李 碩)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선조(先祖)의 본향지(本鄕地)인 진성(眞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傳統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풍산현(豐山縣) 망천(輞川)에 터를 잡았던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의 아들 운구(云具)와 운후(云候) 대(代)에서 중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조선(朝鮮) 초기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던 운구(云具)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군수(郡守)를 역임했던 차남 양검(養儉)과 주부(主簿)를 지낸 막내 양호(養浩)가 유명했다.

  한편 송안군 자수의 둘째 아들로 부정(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된 운후(云候)의 아들 정(禎)은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슬하에 아들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이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노송정(老松亭) 계양(繼陽)의 둘째 아들 우(堣)는 연산

군(燕山君)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이조 및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한 후 승지(承旨)로 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1508년(중종 3)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았다.

  진사(進士) 식(埴)의 아들 6형제 중 넷째인 해(瀣)는 중종(中宗)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간(司諫)과 정언(正言)을 거쳐 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예조 참판(禮曹參判)등을 역임했고, 예서(隸書)에 뛰어나 필명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황(滉)이 가문을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특히 퇴계(退溪) 황(滉)은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 유학자(大儒學者)로 율곡(栗谷) 이 이(李 珥)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시문(詩文)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겸허(謙虛)한 성격의 대학자로 중종(中宗)․명종(明宗)․선조(宣祖)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명종(明宗) 때 대사성(大司成) 민 기(閔 箕)가 명(明)나라로 가게 되어 체임되자 당하관(堂下官)으로서 글에 능하고 재행(才行)이 있는 자를 선택할 때 부응교(副應敎)로 있던 퇴계가 천거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을 빙자하여 사직하고 돌아가니, 임금은 친필로 쓴 수찰(手札)을 내렸는데 그 내용에 <너는 탁월(卓越)하며 청간하고 세상에 드문 문장으로 공명을 탐하지 않고 촌(忖)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살고 있으니 염퇴(恬退)한 뜻은 가상하나 항상 서울로 돌아오는 날을 기다렸다. 내가 어진이를 구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어진이가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니, 내 마음이 결연(缺然)하여 마음속에 잊지 못하노라. 내 비록 주문왕(周文王)의 덕(德)은 없으나 네 어찌 부춘산(富春山 : 한나라 엄자릉이 벼슬을 마다하고 숨어 살던 산)에 은거하기를 좋아하느냐. 속히 올라와서 간절히 구하는 뜻에 응하여다오>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에 의하면 퇴계의 학문은 문장(文章)으로 말미암아 도학(道學)에 들어갔는데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주자(朱子)의 학설을 좇았으며, 여러 학자 학설의 동이(同異)점에도 통하였으되 옆으로 주자의 학설에 절충(折衷)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한가로이 혼자 거처하면서 전분(典墳)서적 이외에는 마음에 두는 것이 없었고, 때로는 수석(水石)을 찾아 소요하면서 시(詩)를 읊어 소산(蕭散)한 흥취를 붙이기도 하였다. 학자들의 물음이 있으면 언제나 자기의 얻은 바를 모두 기울여 수응할 뿐 학도를 모아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담박(淡泊)함을 좋아하여 부귀영화를 뜬 구름같이 보았고 의식(衣食)을 겨우 자급하면서도 그의 개결함은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한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 집 밤나무 두어 가지가 담너머로 뻗어 나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면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염려되어 담밖으로 던져 버렸다.

  선조가 처음 즉위하자 모든 조사(朝士)들의 공론이 “이 황이 아니면 임금의 덕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임금의 뜻도 황에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황은 자기의 재능과 지혜가 대사를 감당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또 말세(末世)가 되어 도학자(道學者)로서 정치를 할수 없고, 임금의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이 성실치 못하고, 대신들 또한 학식이 없어 하나도 믿을 수 없으므로 벼슬을 간절히 사양하고 기어코 물러났다.

  만년에 도산(陶山)에 집을 짓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진력하면서 아들 준(寯)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후 비(碑)를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 진성 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표시하라고 했으며, 병이 위독하게 되자 문인들을 불러 더불어 영결(永訣)하려 하므로 자제들이 권고하여 말리니, 황은 “죽어가는데 그들을 보지않을 수 없다”하고 명하여 옷을 몸에 걸치게 하고 여러 문생에게 이르기를 “평일에 나의 그릇된 견해로서 제국과 더불어 강론하였으니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임종하던 날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이르고, 저녁에 눕는 자리를 정제(整齊)하게 하고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생전에 자기의 묘명(墓銘)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나면서부터 치(癡)였고, 커서는 다병(多病)하였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으며, 늦게는 어찌하여 벼슬을 하였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도리어 얽혀왔다. 출세에는 서툴렀고 퇴장(退藏)할 뜻 굳혔다. 속 깊이 국은(國恩)에 부끄러워 했고, 진실로 성인의 말씀이 두려워 높고 높은 산이 있고 졸졸 흐르는 물 있는 데서 초복(初服:벼슬하기 전의 한가한 생활)으로 돌아가 한가히 즐겨 뭇 비방을 생각해 보니, 고인이 이미 내 마음을 먼저 얻었거니, 어찌 오는 세상에서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근심 속에도 낙(樂)이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다. 조화(造化)를 따라 사라짐(盡)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그의 아들 준(寯)은 아버지의 유언으 그가 한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 집 밤나무 두어 가지가 담너머로 뻗어 나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면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염려하여 담밖으로 던져 버로 예장(禮장)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1품(一品)의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퇴계 황의 손자 안도(安道:준의 맏아들)는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도(詠道)는 군기시 부정(軍器시副正)과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거쳐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역임한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했던 돈(潡 : 참봉 원회의 아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직강(直講)에 등용되어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자청하여 효행(孝行)을 떨쳤으며, 지형(之馨)의 아들 명익(溟翼)은 숙종(肅宗)때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가 세곡(稅穀)의 수송을 쉽게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구한말에 와서는 퇴계 황(滉)의 10대손 휘령(彙寧)이 철종(哲宗) 때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에 올랐으며, 가학(家學)을 계송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했고「십도고증(十圖考證)」과 국문 시가(詩歌)인 「방경무도사(邦慶舞蹈辭)」를 지어 학문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종(高宗)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했던 만도(晩도)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안동(安東)으로 내겨가 의병(義兵)을 모집하여(日本)의 침략에 항거했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다, 한일합방의 비분으로 자결하여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한일합방을 개탄하여 단식 끝에 순사한 중언(中彦)과 애국지사(愛國志士) 명우(命羽)가 유명했으며, 육사(陸史) 활(㓉)은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졸업하고 사회운동가로 활약하다가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崗)등과 함께 동인지인「자오선(子午線)」을 발행하면서 <청포도(靑葡萄)> <교목(喬木)>등 목가풍(牧歌風)의 시(詩)를 발표했다. 특히 그의 시(詩)는 당시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정치적 울분을 상징주의의 수법으로 나타내어 민족정신운동에 공헌했으며, 그의 작품이 담긴 「육사시집(陸史詩集)」을 발간하여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인 진성 이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회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성․진보 이씨(眞城․眞寶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4,428가구, 58,8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안이씨(鎭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안 이씨(鎭安李氏)의 시조(始組)는 이특룡(李特龍)으로 진안(鎭安)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진사(進士)에 올랐는데, 시정(時政)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차례 상소(上疏)를 하여 조정의 미움을 받아 안화(安化)로 유배(流配)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안화(安化)에 정착(定着)하여 문호를 열고, 선조(先祖)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진안(鎭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係)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특룡(特龍)의 손자 득림(得霖)이 조선(朝鮮)에서 직장(直長)을 역임했고, 득림(得霖)의 손자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승영(承榮), 참봉을 지낸 승복(承馥), 시정을 역임한 승빈(承彬)은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안 이씨(鎭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82가구, 2,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위이씨(振威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위 이씨(振威李氏)의 시조(始組)는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이 방(李 方)이다. 방(方)의 5세손 자영(自英)은 고려조(高麗組)에서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진위군(振威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진위(振威)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영(自英)의 아들 중육(仲育)이 고려에서 태사(太師)를 역임했고, 손자 옹(邕)이 밀직사(密直使)를 지냈다.

  조선조(朝鮮組)에 와서는 지(至)가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참군(參軍)을 지낸 종(鐘), 좌랑(佐郞)을 지낸 즙(檝) 등이 가문을 빛냈다.

  그밖에 조선(朝鮮) 때 유면했던 의원(醫員) 경화(景華)는 일찌기 송시열(宋時烈)의 문화에서 길을 배워 생원(生員)이 되었고, (經史百家)에 정통하여 진위 이씨(振威李氏)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위 이씨(振威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976가구, 4,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晋州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주 이씨(晋州李氏)의 시조(始組)는 조선 초(朝鮮初)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군자(李君梓)이다.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 : 경주 이씨의 시조)의 18세손인 군자(君梓)는 조선(朝鮮) 태조(太組)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왕(王)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성천(成川)으로 유배(流配)되어 그 곳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대제학(大提學)을 사임(辭任)하고 고향인 진주(晋州)로 내려가 있는 형 영자(永梓)를 생각하며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 삼았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후손으로는, 군자(君梓)의 아들 영실(英實)이 감찰(監察)을 역임했고, 증손(曾孫) 의동(儀東)은 통사랑(通仕郞)을 지냈다. 그 외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승부(承富)는 통사랑(通仕郞) 의동(儀東)의 아들이다.

  치언(致彦)은 영조(英祖) 때 과거에 올라 도사(都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이씨(晋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926가구, 13,5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성․기장이씨(車城․機張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차성(車城)은 기장(機張)의 옛 지명이다. 기장(機張)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군(梁山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는 신라 전기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기장현으로 개명하여 동래군(東萊郡)에 속하게 하였다. 후에 양주(梁州), 또는 울주(蔚州)에 예속되기도 하였는데, 1599년(선조 32)에 다시 동래군에 예속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되어 동래부(東萊府)에 속해 있다가 후에 동래부가 폐지되고 동래군이 될 때 기장현도 기장면(機張面)이 되어 동래군에 예속되었다. 8․15해방 이후 부산시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동래군의 대부분이 부산시에 편입되었으나 기장면(機張面)은 양산군(梁山郡)에 편입되었  다.

  차성․기장 이씨(車城․機張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신무조(新武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에 오른 문의공(文義公) 사언(嗣彦)의 차남인, 이 위(李 渭)이다.

  그는 신라 말에 공(功)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고 차성군(車城郡)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위(渭)를 시조(始祖)로 하고 차성(車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위(渭)의 후곤 원주(元周)가 1417년(태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이천 부사(利川府使)를 지냈으며, 원주의 아들 맹종(孟宗)은 단종(端宗) 때 통사랑(通仕郞)에 올랐다.

  그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희원(希元)과 병조 참판(兵曹參判) 형원(亨元)이 유명했으며, 응벽(應璧)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워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거쳐 선조(宣祖) 때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차성․기장이씨(車城․機張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25가구, 5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녕이씨(昌寧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창녕 이씨(昌寧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과거에 급제하고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낸 후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진 이정현(李正賢)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창녕(昌寧)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정현(正賢)으 아들 원간(元幹)이 교수(敎授)를 지냈고, 손자 구엽(九燁)은 우상시(右常侍)를 역임했다.

  정현(正賢)의 증손(曾孫)인 문화공(文華公) 한직(漢直)은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귀춘(貴春)은 현감(縣監)을, 손자 연무(衍茂)는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부정(副正)을 역임한 국추(國樞)의 아들인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대임(大任)이 유명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여러 곳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茂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학자(學者) 홍진(弘進)은 학문이 뛰어나, 향리(鄕里)에서 후진양성에 전념(專念)하여 문화에서 훌륭한 인재(人材)가 많이 배출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운기(運基)와 함께 명망있는 창녕 이씨(昌寧李氏)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녕 이씨(昌寧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965가구, 4,0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안이씨(天安李氏)

천안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09가구 2,2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철성이씨(鐵城李氏)

철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513가구 4,8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청안이씨(淸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청안 이씨(淸安李氏)의 시조(始祖)는 이학년(李鶴年)으로 고려 광종(光宗) 때 예부 상서(禮部常書)를 지냈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청안(淸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학년(鶴年)의 후손(後孫) 한번(漢藩)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홍건적(紅巾賊)을 대파하여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광경(光慶)은 조선(朝鮮)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후 호남파(湖南派)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항상(恒相)은 아들 양길(陽吉)은 상장군(上將軍)으로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며 영남파(嶺南派)의 중시조로 분파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안 이씨(淸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086가구, 12,8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이씨(淸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청주 이씨(淸州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를 지낸 이능희(李能希)이다

  능희(能希)의 10세손 계감(季瑊)은 낭성군(埌城君)에 봉해졌고, 13세손 애(薆)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堂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주(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능희(能希)의 아들 겸의(謙宜)도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에 올랐으며, 증손(曾孫) 중강(仲降)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한 중강(仲降)의 손자 공승(公升)이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刑部)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계장(桂長)도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망높은 청주 이씨(淸州李氏)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가문이 번성하여 거이(居易)가 태조(太祖)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태종(太宗) 때에는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서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외에도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서 공신(功臣)이 된 애(薆)와, 태종(太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봉해진 백강(伯剛),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하성(夏成), 참판(參判)을 지낸 현송(顯孫)과 세양(世陽) 등은 청주 이씨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이씨(淸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973가구, 28,9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해이씨(靑海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청해(靑海)는 중국 북서부에 있는 지명으로 북서쪽은 신강(新疆), 북쪽과 동쪽은 감숙(甘肅), 남동쪽은 사천(四川), 남서쪽은 티벳을 접하고 있다. 험준한 대고원 지대로, 황하․양자강 등에 발원을 이룬다.

  청해 이씨(靑海李氏)의 시조(始祖)는 조선 객구에 공(功)을 세운 공신(功臣) 이지란(李之蘭)이다. 지란의 본 성명은 퉁두란(퉁豆蘭)으로서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는 여진(女眞)의 금패천호(金牌千戶)였다.

  아버지에 이어 천호가 되었다가 원(元)나라 말기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많은 부하를 이끄로 귀하,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들어가 이씨(李氏) 성을 하사 받았으며, 이어 조선 개국공신 일등에 올라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지란(之蘭)의 아들 화영(和英)은 세종 초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이르렀고, 6대손 인기(麟奇)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밖에 인기(麟奇)의 아들 중로(重老),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핵(翮)의 아들 유민(裕民),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수민(壽民)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해 이씨(靑海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84가구, 10,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이씨(忠州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충주 이씨(忠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이 관(李 土寬)으로,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은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석로(碩老)와 석구(碩耈), 부사(府使)를 지낸 석질(碩耋), 무과(武科)에 급제한 석기(碩耆)가 한 형제로서 모두 현달(顯達)하여 당대에 뛰어났다.

  또한 무관(武官)으로서 용맹을 떨친 성태(成泰)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행로(行老)가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 이씨(忠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62가구, 3,2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칠성이씨(漆城李氏)

칠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3가구 1,20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태안이씨(泰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태안 이씨(泰安李氏)의 시조(始祖)는 중국 송(宋)나라 사람인 이 욱(李 煜)으로 925년(태조 8) 고려(高麗) 들어와 농서공(瀧西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7세손인 기(奇)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 태안(泰安)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욱(煜)의 후손 천(蕆)이 태안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고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태안(泰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한 회(薈)는 성품이 강직하여 사간(司諫)으로서 직언을 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검상(檢詳)으로 승려였던 청준(淸濬)이 그린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彊理圖)」를 증수(增修)하여 우리나라 지도에 혁신을 가져온「팔도도(八道圖)」를 그렸다.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낸 배일(培一)과 참판(參判)을 역임한 길장(吉長),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세익(世益) 등은 명문인 태안 이씨(泰安李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안 이씨(泰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859가구, 3,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산이씨(平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평산 이씨(平山李氏)의 원조(遠祖) 이부명(李敷明)은 중국 당(唐)나라 설인귀(薛仁貴)가 보낸 8세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산(平山)에 들어와 백성들에게 예법을 가르쳤고,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그러나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후손 자용(子庸)에 이르기까지 세계(世系)가 불분명하므로 부명을 원조로, 자용을 일세조로 삼고 선조(先祖)가 정착 세거(定着世居)한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자용(子庸)의 아들 빈(彬)은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고, 빈(彬)의 손자 천위(天緯)는 조선 때 우찬성(右贊成)을, 천경(天經)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또한 판서(判書)를 역임한 천위(天緯)의 아들 지하(支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석곤(錫坤)과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지낸 창식(昌植),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계남(繼男) 등이 평산이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산 이씨(平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04가구, 2,9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창이씨(平昌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평창 이씨(平昌李氏)의 시조(始祖) 이 광(李 匡)은 고려(高麗) 명종(明宗 : 제19대 왕, 재위기간 : 1170~1197) 때 태사(太師)를 역임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올라 백오군(白烏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천기(天驥)가 고려 말에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태조(太祖:이성계)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 광(李 匡)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평창(平昌)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천기의 증손 영서(永瑞)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생원(生員)으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역임했다. 특히 영서는 글씨에 뛰어나서 강희안(姜希顔) 등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불경(佛經)을 쓰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아들 계남(季男)은 성종(成宗) 때 풍덕 군수(豊德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을 떨쳤고, 그후 연산군(燕山君) 때 호․이조 판서(戶․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2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레 일으켰다.

  세칭 <국조명장(國朝名將)>으로 불리웠던 계동(季仝 : 계남의 아우)은 연산군 때 고부사(告訃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와 왕명(王命)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와「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광(光)은 1495년(연산

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 르렀고 학문(學問)과 글씨에 뛰어나서 <관동천재(關東天才)>로 일컬어졌으나 23세로 요절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정조(正祖)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했던 동욱(東郁)의 아들 승훈(承薰)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어 교세(敎勢) 확장에 공헌했고, 정규(正奎)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스승 류인석(柳麟錫)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일본군(日本軍)과 항쟁하고 항일운동 기록인 「종의록(從義錄)」과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하여, 독립운동에 신명(身命)을 바쳤던 병식(炳植)․현근(炫瑾) 등과 함께 평창 이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창 이씨(平昌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3,531가구, 55,4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택이씨(平澤李氏)

평택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5가구 1,0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동이씨(河東李氏)

하동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3가구 1,05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빈이씨(河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하빈 이씨(河濱李氏)의 시조(始祖) 이 거(李 琚)는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하빈(河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거(琚)의 아들 정 견(挺 堅)이 상서(尙書)를 지냈으며, 거 의 손자 경(瓊)은 고려 때 좌정언(左正言)을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벼승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으로 당대에 뛰어났다.

  그후 경(瓊)의 5세손인 예(芮)가 판서(判書)를 역임하면서부터 다시 관직에 오르기 시작 했고, 침(沉)이 판관(判官)을 역임하여 훌륭한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그밖에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현계(賢啓)가 이름을 날렸고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한 상룡(相龍)과 문명(文名)으로 이름을 날린 조헌(祖憲)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빈 이씨(河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125가구, 12,6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성이씨(鶴城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학성 이씨(鶴城李氏)는 조선(朝鮮) 때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功)을 세워 절충장군용기위사상호군(折衝將軍龍騎衛司上護軍)에 올랐고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역임한 이 예(李 藝)를 시조(始祖)로 한다. 후손들은 시조(始祖)의 발상지(發祥地)인 학성(鶴城)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예(藝)의 손자 직겸(直謙)은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를, 직유(直柔)는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을, 직강(直剛)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여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겸수(謙受)는 나라에 공(功)이 있어 원종훈삼등공신(原從勳三等功臣)에 책록(冊錄)되었으며 남강사(南岡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현 담(玄聃)은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으로 당대에 뛰어났으며, 양오(養吾)는 학자(學者)로 명성을 날리고 반계집(磻溪集)을 남겨 학성 이씨(鶴城李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성 이씨(鶴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625가구, 18,8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산이씨(韓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윤경(李允卿)은 한산(韓山) 지방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代)에 걸쳐 호장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芝峴里) 건지산(乾至山) 밑에 있는 시조 윤경(允卿)의 묘(墓)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으로 알려졌으며, 본래 한산군의 동헌(東軒)이 있던 곳이었는데 관가의 현감이 앉는 널판지가 지기(地氣) 때문에 자꾸 썩어가는 것을 눈여겨 보고 지혈(地穴)이 바로 그 자리임을 익혀 두었다가 묘를 썼다고 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의 6세손 곡(穀)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문장(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스승인 이세현(李齊賢)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 했으며,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 3대왕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백이정(白頤正)․우 탁(禹 倬) 등과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大家)로 손꼽혔다.

  곡의 아들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더불어 여말(麗末)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던 목은(牧隱) 색(穡)은 익재(益齋 : 이제현)의 고제로 14세때 성균시 십운과(成均試十韻科)에 합격하고 1351년(공민왕 2) 등과(登科)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공양왕(恭讓王) 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는 격동기에 풍운이 격심한 일생을 살면서 다섯 차례나 유배(流配)를 당했던 목은은 뛰어난 학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명망을 떨쳤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목은을 불렀더니 목은은 태조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옛날처럼 서로 읍만 하였고, 태조는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써 대접하였다. 잠시 후 시강관(侍講官)이 열지어 들어오므로 태조가 왕좌에 올라앉자 목은은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고 하자 태조가 “원컨대, 가르침을 받들겠으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하였다. 목은은 “망국의 대부(大夫)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다 죽게 된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색(穡)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종덕(種德)과 차남 종학(種學)도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벼슬을 마다하고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모두 매를 맞아 죽었다. 두 아들을 잃은 목은이 여주(驪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하루는 그의 옛 제자가 찾아와 뵙자고 하자 아무말도 않고 앞장서서 깊은 골짜기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큰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가슴이 시원하다”고 했다.

  목은은 이태조(李太祖)와 태종(太宗)과의 친분이 있어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초대되어 궁안에 드나들었으나, 고려의 충신으로 대절(大節)을 이루었다.

  인정이 어찌 물(物)의 무정함과 같으랴(人情那似物無情),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 차니(偶向東籬滿面),

  꽃은 진국화(眞菊花)요 사람은 거짓 도연명(陶淵明)이다(眞黃花對僞淵明).

하는 그의 시(詩)에는 슬픈 마음이 담겨 있다.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의하면 고려 말에 길 재(吉 再)가 목은에게 거취(去就)를 물었을 때 대꾸하기를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더불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만 하다”고 말하고, 길 재가 돌아갈 때 인사하러 들르자,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飛鴻一箇在冥冥)>는 시(詩)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종덕(種德)의 아들 맹균(孟畇)은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세업(世業)을 이어받아 글씨와 시문(詩文)으로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운데다 아들이 없어 가화(家禍)로 불우했다.

  그가 아들이 없음을 슬퍼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사람이 생긴 때로부터 아비 자식대를 전해와 이 몸까지 이르렀네(自從人道起於寅父子祖傳到此身), 내 무슨 죄로 하늘이 돕지 않아 아비 소리 못들은 채 귀 밑에 흰털만 새로워라(我罪伊何天不吊未爲人父鬢絲新)>

  색(穡)의 증손이며 계주(季疇)의 아들이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개(塏)이다.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했던 개(塏)는 시문(詩文)이 절묘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저작랑(箸作郞)으로「명황계감(明皇戒鑑)」편찬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도 참여했으나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직제학(直提學)으로 성상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일찍이 단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로 매서운 절개를 나타내었던 개는 몸이 여위고 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 엄한 형벌에도 얼굴 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고「추강집(秋江集)」에 전한다.

  목은의 현손(玄孫)으로 홍귀달(洪貴達)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고 대담한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했던 예견(禮堅)은 만년에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문학과 절행(節行)으로 당세에 소문났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자(耔:예견의 아들)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천추사(天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이조 좌랑(吏曹左郞)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희대의 간신 김안로(金安老)는 동서지간이면서도 항상 자(耔)를 해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함창(咸昌)에 성묘하러 왔다가 용궁(龍宮)에 있는 자(耔)의 집에 일부러 들러 친선을 빙자하여 염탐을 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자(耔)는 괴화탕(槐花湯 : 홰나무의 꽃을 다린 물)으로 얼굴을 씻어 늙어 보이게 하고 이불을 둘러 쓴 채 김안로를 맞았다. 안로는 손을 잡고 은근히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나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음애(蔭崖 : 자의 아호)는 이제 고만이다. 염려할 게 없다”고 하였다.

  그후 자(字)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벼슬에 올라 교리(校理)와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우봉 현령(牛峰縣令)을 거쳐 수원통판(水原通判)을 지냈던 치(穉)의 아들 지함(之函)은 흙벽돌을 찍어 축대를 쌓았고 그 위에 정자(亭子)를 짓고 살았으므로 토정선생(土亭先生)으로 더욱 유명했다. 복서(卜筮)․지리(地理)․음양(陰陽)에 능통했던 토정(土亭)은 선조(先祖) 때 탁행(卓行)으로 포천 현감(抱川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직,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밤에 책 읽을 때 켤 등기름 살 돈이 없어 처자들이 낮에 산에 가서 관솔을 떠어 올 지경으로 청빈하게 살았다.

  그밖에 한산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 : 지함의 형)의 아들로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던 산해(山海)와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된 산보(山甫 : 지무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산회의 아들 경전(慶全)은 광해군(光海君) 때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후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어 인조(仁祖) 때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던 현영(顯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한편 <고집통 긴수염의 재상>으로 불리웠던 기조(基祚:현영의 아들)는 효종(孝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랐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광주 쌍령(雙嶺)에서 선두에 나가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의배(義培)는 영의정(嶺議政) 추증되었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취병(聚兵)하여 전장에 나가면서 집사람으로 하여금 백주(白紬)로 형전과 청금(靑錦)띠를 만들게 하여 두르고 떠났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전장에 죽어 씩은 시체더미 속에서 식별하기 좋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결심하고 전쟁에 임했다.

  한말에 와서는 일본(日本)의 침략정책에 항거하다가 아들과 함께 살해당한 남규(南珪)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민비(閔妃)와 함께 살해된 경직(耕稙)이 유명했고, 근대한국의 정신적인 지주로 일컬어진 월남(月南) 상재(商在)는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자주독립 위한 구국운동에 신명(身命)을 바쳐 학문과 충절(忠節)으 전통가문인 한산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8,471가구, 119,1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성이씨(漢城李氏)

한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0가구 1,34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양이씨(漢陽李氏)

한양은 양주의 속현이다. 한양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7가구 1,09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함안이씨(咸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함안 이씨(咸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상(李 尙)은 위위시주부동정(衛위寺主簿同正)을 지낸 원조(遠祖) 원서(元敍)의 후손으로 고려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파산군(巴山君)에 봉해졌다.

  그후 문헌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으므로 후손들은 선조(先祖)들의 세거지(世居地)인 함안(咸安)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상(尙)의 아들 청(淸)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원(源)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이 두 형제파가 함안 이씨(咸安李氏)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고려 구국의 명장(名將) 방실(芳實)은 당시 국가를 혼란시킨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가 되었으며, 하안 이씨를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놓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 미(美)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관(名官)으로 이름이 났고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5부자 6급제(五父子六及第)」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큰아들인 인형(仁亨)은 당대의 석학 김종직(金宗直)과는 사돈지간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에 항거하였으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신(功臣)이 되었던 세응(世應)은 사간(司諫)이 되어, 당시 권세를 부리던 류자광(柳子光)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낼 정도로 기개가 당당하였으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영(翎)은 인형(仁亨)의 셋째 아들로 스승 조광조(趙光組)를 구하려다 화(禍)를 당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세응(世應)의 아들 임(霖)과 임진왜란(壬辰倭亂문)때 의병장으로 공(功)을 세운 달(達)․응성(應星)․왕(旺)이 대표적이며, 굉(翃)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려 명문인 함안 이씨를 더욱 빛낸 인물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안 이씨(咸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792가구, 31,9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양이씨(咸陽李氏)

함양이씨 시조는 호군(護軍) 이홍(李洪)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37가구 1,85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함평이씨(咸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고려 광종(光宗) 때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진 이 언(李 彦)을 시조(始祖)로 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언(彦)의 10대손인 종생(從生 : 극명의 아들)이 세조(世祖) 대의 무장으로서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功)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오르고 각 도(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는데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뛰어난 인물은 대부분 그의 후손이다.

  문신(文臣)으로는 우윤(右尹) 관(瓘)의 아들로 선조(宣祖)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효원(效元), 동지(冬至) 겸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해(澥),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낸 춘원(春元),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예조 판서를 지낸 지익(之翼), 인조 때 황해도 관찰사 배원(培元) 등이 명망높은 충절(忠節)의 가문을 빛냈다.

  무장(武將)으로는 통제사(統制使)를 지낸 원(沅), 영조 때 훈련대장(訓鍊大將)․병조 판서․분무공신(奮武功臣)을 역임한 삼(森), 정조 때 어영대장(御營大將)․도총관을 지낸 창운(昌運) 등이 훌륭한 함평 이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76가구, 103,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풍이씨(咸豊李氏)

함풍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025가구 6,41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합천이씨(陜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조(始祖) 이 개(李 開)는 서라벌(徐羅伐) 6부 촌장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개국 초에 가수 호장(嘉樹戶長)을 지냈고 강양(江陽 : 지금의 합천)으로 이거(移居)하여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세계(世系)를 계승해 오면서 가세가 번창하여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병사공파(兵使公派) 등 크게 11파(派)로 갈라져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윤검(允儉)의 아들로 이조 정랑(吏曹政郞)을 지낸 희민(希閔)․검열(檢閱)과 대교(待敎)를 거쳐 수찬(修撰)을 역임한 희중(希曾)․학문(學問)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희안(希顔)의 3형제를 들 수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3,951가구, 98,5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주이씨(海州李氏)

해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06가구 2,06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홍성이씨(洪城李氏)

홍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6가구 1,16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홍주이씨(咸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홍주 이씨(洪州李氏)의 시조(始祖) 이유성(李維城)은 고려(高麗)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한(翰)의 아들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9세손인 기종(起宗)이 내시연경궁제학(內侍延慶宮提學)을 지내고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홍주(洪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유성(維城)의 아들 천소(倩笑)가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손자 권(鬈)도 평장사(平章事)를, 증손(曾孫) 응송(應松)은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역임하는 등 3대(代)에 걸쳐 벼슬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연수(延壽)는 응송(應松)의 아들로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수태보주국(守太保柱國)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연수의 아들 지청(之靑)도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조선(朝鮮)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서(舒)는 공민왕(恭愍王) 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헌납(右獻納)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취임하지 않고, 뒤에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옹립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안평군(安平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명망높은 홍주 이씨(洪州李氏) 가문을 빛냈다.

  무관(武官)으로서 명성을 떨친 희건(希建)은 이괄(李适)의 난 때 공(功)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홍양군(洪陽君)에 봉해 졌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용골산성(龍骨山城) 전투에서 분전 끝에 전사하였으며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어 명문인 홍주 이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주 이씨

(洪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866가구, 11,4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산이씨(花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화산 이씨(花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용상(李龍祥)은 안남왕국(安南王國) 교지군왕(交趾郡王) 이공온(李公蘊)의 7세손이며, 안남왕(安南王) 이천조(李天祚)의 둘째 아들로 전한다.「화산이씨 정사세보(花山李氏丁巳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이용상(李龍祥)은 1226년(송나라 보경 2, 고려 고종 13) 변란을 피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함해도 옹진(甕津) 화산(花山)에 정착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고려(高麗) 고종(高宗)은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그 지역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옹진에 정착한 용상은 북면 봉소리(北面鳳所里) 동쪽 원추형 산위에 쌓은 화산성(花山城)에 올라가 <망국단(望國壇)>을 만들고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용상(龍祥)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화산(花山)으로 삼게 되었으며, 용상의 아들 형제 중 맏아들 간(幹)이 고려조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承)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했고, 차남 일청(一淸)은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안동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그 곳에 많이 살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용상의 6세손 맹운(孟芸)이 공민왕(恭愍王) 때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해주(海州) 원통리(圓通里)에 은거(隱居)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이태조(李太祖)가 세 차례에 걸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한편 효행(孝行)으로도 명망을 떨쳤던 맹운은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장남인 덕종(德從)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재령 군수(載寧郡守)를 역임했고, 차남 대종(大從)은 송화 현감(松禾縣監)과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낸 후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에 이르렀다.

  그외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수복(壽福 : 승지 즙의 아들)이 호조 좌랑(戶曹佐郞)과 황해 도사(黃海都事)를 지내고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과감하게 탄핵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인(嶙)이 평난원종공신(平難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운(運),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회백(懷白)․창룡(昌龍) 등과 함게 화산 이씨(花山李氏)의 명맥(命脈)을 이루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화산 이씨(花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58가구, 1,1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평이씨(和平李氏)

화평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3가구 1,49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흥양이씨(興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시조(始祖)는 국자생원(國子生員) 이언림(李彦林)이다. 그는 고려 의종(毅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와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후, 흥양(興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흥양(興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언림(彦林)의 증손 원방(元邦)이 동정(同正)을 역임했고, 7세손 길(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奉常大夫)를 거쳐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에 이르러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다.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서원(舒原)은 언림의 8세손이며, 서원의 아들 균(均)이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그외 전(㙉)이 주자학(朱子學)에 능통하여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준(峻)은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수차 의병(義兵)을 일으켜 나라에 공(功)을 세웠다.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낸 원경(元卿)은 첨정(僉正) 대록(大祿)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양 이씨(興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450가구, 13,8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화인씨(江華印氏)

강화인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6가구 1,2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교동인씨(喬桐印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교동 인씨(喬桐印氏)는 중국 계통(中國系統)으로「좌씨전(左氏傳)」과「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中國) 정(鄭)나라 목(穆)의 증손 7명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란 사람이 조부(祖父)의 이름인「자인(子印)」의「인(印)」자(字)를 따서 성(姓)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한다.

  단(壇)의 후손 인 서(印 瑞)가 진(晋)나라 풍익(馮翊)의 대부(大夫)로서 297년(신라 유례왕 14)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定着)한 것이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후 33세손 빈(邠)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교수(喬樹)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교동(喬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인씨(印氏)의 본관(本貫)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고려 충렬왕의 비를 배종(陪從)하고 들어와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원(元)나라 사람 후(侯)를 시조(始祖)로하는 「연안 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씨(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빈(邠)의 아들 완(完)이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올라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손자 규(珪)가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를, 증손(曾孫) 현원(玄元)이 응양위대장군(鷹揚衛大將軍)을 거쳐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그리고 현손(玄孫) 정(貞)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빈(邠)의 9세손 당(璫)은 공민왕(恭愍王) 때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압록강(鴨綠江) 서쪽의 파사부(婆娑府) 등 병참기지(兵站基地)를 격퇴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으며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그의 아들 안(安)이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해

(海)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고, 손자 원보(原寶)가 서북면 체찰사(西北面體察使), 중보(重寶)가 상장군(上將軍)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저(著)와 절충장군(折衝將軍) 철관(鐵寬),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임진왜란 때 정난원종이등공신(靖難原從二等功臣)에 오른 발(潑),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이헌(以憲), 그리고 참판(參判)을 역임한 명조(明朝)․근영(瑾永)․석신(錫信)․상혁(相赫) 등이 가문을 빛냈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동 인씨(喬桐印氏)는 남한(南韓)에 총 4,139가구, 17,5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慶州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경주 임씨(慶州林氏)는 고려(高麗) 때 평찰품사(評察品事)를 지낸 임몽주(林夢周 : 시호는 충선공)의 17세손 임계정(林繼貞)을 일세조(一世組)로 하고 있다.

  「경주임씨세보(慶州林氏世譜)」에 의하면 관조(貫組)인 계정(繼貞)은 1505년(연산군 11)에 생원(生員) 곤(崐)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성균관(成均館)의 진사(進士)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지냈으므로 후손들이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인물을 보면 조선(朝鮮) 때 희지(熙之)가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임씨(慶州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613가구, 2,7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안임씨(高安林氏)

고안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68가구 1,98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공주임씨(公州林氏)

공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3가구 1,0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광주임씨

광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0가구 1,24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임씨(羅州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시조(始祖) 임 비(林 庇)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을 지내고,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다녀올 때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보좌2등공신(輔佐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뒤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그후 시조의 9세손 탁(卓 : 호군 선의 아들)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海南監務)을 역힘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 임씨의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탁의 7세손 붕(鵬 : 중참판 평의 맏아들)이 중종(中宗) 때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승문원 주서(承文院主書)를 거쳐 예조 및 병조 좌랑(兵曹佐郞)과 이조(吏曹)를 제외한 5조(五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광주 목사(光州牧師)로 나갔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특히 그는 문과에 오르기 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유생(儒生) 20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논하다가 화(禍)를 입을 뻔 했고, 또 과거를 볼 때 시관(試官)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간사한 무리로 지칭하자 붓을 그 시관의 얼굴에 던지고 과장(科場)을 뛰쳐나왔다.

  붕의 아들 복(復)은 명종(明宗) 즉위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삭주

(朔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무고(誣告)를 입고 향리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며, 그의 아우 진(晋)은 무신(武臣)으로 제주 목사(濟州牧師)와 5도 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다.

  복(復)의 아들로 선조(宣祖)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던 서(㥠)는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가 되어 적폐(積弊 : 오랫 동안 뿌리 박힌 폐단의 시정과 농사의 장려, 군사의 조련(調練)을 많이 남겨 이념이 있는 정치가로 칭송을 받았으며, 절도사 진(晋)의 맏아들 제(悌)는 당대의 명류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던 백호(白湖) 제(悌)는 지제교(知製敎)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으나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국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문필(文筆)로 여생을 보냈다. 호쾌(豪快)하고 의협(義俠)한 시풍(詩風)으로 호남파(湖南派) 시인 가운데 백미(白眉)로 손꼽혔으며,「화사(花史)」와「수성지(愁城志)」를 비롯한「백호집(白湖集)」․「계벽류상영록(溪碧樓觴詠錄)」등의 문집을 저술하여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고, 그의 아들 탄(坦)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詩名)이 높았다.

  제의 아우로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역임했던 환(懽)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는 사재(私財)를 털어 이순신(李舜臣)의 병량을 조달했고, <진사군(進士軍)>이란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대소 전투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인조(仁祖) 때의 명 외교관 담(土覃 : 서의 아들)은 기재(奇才)가 있는 정치가로도 이름났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총융종사관(摠戎從事官)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남격대(南格臺) 수비에 공을 세웠다.

  특히 담은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으나, 청탁을 배제하고 청빈하여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다. 어느날 그의 형 연(堜 : 우승지)이 담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도 몸 둘 곳이 없구나”하면서 성(城)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사서 주었다. 그러나 집이 좁고 누추하여 손님이 오면 먼저 온 사람이 물러가야만 뒤에 온 사람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한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牧師)와 부사(府使)를 지낸 후 시명(詩名)을 떨쳤던 타와 이 괄(李 适)의 난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게(게), 안산 군수(安山郡守)와 장성 부사(長城府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던 세량(世良). 박세채(朴世采)의 고제로「창계집(滄溪集)」을 저술했던 영(泳 : 첨지중추부사 일유의 아들),「동사회강(東史會綱)」과「노촌집(老村集)」의 저자(著者) 상덕(象德) 등이 유명했으며, 한수(翰洙)는 철종(哲宗) 때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구한말에 와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영준(英儁)의 아들 창택(昌澤)이 백운동(白雲洞)에 은퇴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며「숭악집(崧岳集)」을 저술했고, 용상(龍相)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광복운동(光復運動)에 헌신하여 독립운동가로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을 지낸 병직(炳稷)과 함께 나주 임씨의 전통(傳統)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임씨(羅州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62,205가구, 262,8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안임씨(務安林氏)

무안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7가구 1,23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밀양임씨(密陽林氏)

밀양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65가구 2,86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보성임씨(寶城林氏)

보성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65가구 1,9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부안 임씨(扶安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부안 임씨(扶安林氏)는 고려(高麗) 초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진 임계미(林季美)의 9세손 임 숙(林 淑)이 고려(高麗) 때 공(功)을 세워 순성보절좌리공신(純誠輔節佐理功臣)에 녹훈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보안백(保安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부안(扶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高麗) 때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를 역임한 희재(熙載)는 숙의 아들이고, 대선(大先)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손자 창무(昌茂)가 상서(尙書)를, 득귀(得貴)가 판서(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다졌다.

  이외에도 효생(孝生)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으며,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오른 유(宥),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한 난수(蘭秀) 등과 함께 덕망 높은 학자(學者)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암 임씨(扶安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43 가구, 48,0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산임씨(常山林氏)

상산은 진천의 별칭이다. 상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42가구 3,49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선산 임씨(善山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선산 임씨(善山林氏)는 신라 말기(新羅末期)의 인물인 태사공(太師公) 임양저(林良貯)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후손 만(蔓)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명성을 떨친 억령(億齡)과 백령(百齡) 형제는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형(遇亨)의 아들인 억령(億齡)은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금산 군수(錦山郡守)로서 아우 백경(百齡)이 소윤(少尹)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大尹)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에서 사퇴하였다가, 1552년(명종 7)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 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 이등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백령(百齡)은 억령(億齡)의 아우로 1519년(중종 14) 문과(文科)에 올라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주동 인물로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숭선부원군(崇善府院君)으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산 임씨(善山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714가구, 7,0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산임씨(星山林氏)

성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3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순풍임씨(淳風林氏)

순풍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4가구 1,00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안동임씨(安東林氏)

안동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084가구 6,4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안의 임씨(安義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안의 임씨(安義林氏)는 부안 임씨(扶安林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전서공(典書公) 임난수(林蘭秀)의 6세손 임대량(林大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안의(安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안의 임씨의 대표적 인물인 온(馧)은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대직(大樴)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수안(遂安)․포천(抱川)․송화(松禾)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밖에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해(嶰), 그리고, 영조(英祖)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요(燿) 등은 안의 임씨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의 임씨(安義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264가구, 1,0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천 임씨(醴泉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始祖) 임 춘(林 椿)은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임계미(林季美)의 후손으로 고려 의종(毅宗) 때 진사(進士)를 지내다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亂)이 일어나자 예천읍(醴泉邑) 천서리(川西里)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관향(貫鄕)을 예천(醴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 걸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보면 천봉(天鳳)이 고려(高麗)에서 진사(進士)․판윤(判尹) 등을 역임했으며, 순련(舜連)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는 자번(自蕃)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으며 문근(文根)이 이조 참판(李曹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천 임씨(醴泉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4,321가구, 59,7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야임씨(沃野林氏)

옥야는 전주의 속현이다. 옥야임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숙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역임한 임우진(林遇秦)의 아들 임여순(林汝恂)이 있었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22가구 1,2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울진 임씨(蔚珍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울진 임씨(蔚珍林氏)는 고려(高麗)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라 중부상서(中部尙書)를 지냈고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울릉군(蔚陵君)에 봉해진 임 우(林 祐)를 시조(始祖)로 하고 평택 임씨(平澤林氏)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울진(蔚珍)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朝鮮)에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낸 욱경(旭卿), 기골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에 뛰어난 역사(力士)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 중량(仲樑), 그리고 전적(典籍)․예조 좌랑(禮曹佐郞)등을 지냈으며 「대학(大學)」,「근사록(近思錄)」등에 정통한 익빈(益彬)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진 임씨(蔚珍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2,639가구, 10,5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진 임씨(恩津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은진 임씨(恩津林氏)는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청랑(朝請郞)․태상 박사(太常博士)를 역임한 임성근(林成槿)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은진(恩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후 그의 아들 정(挺)이 봉선대부(奉善大夫)로 낙안 군사(樂安郡事)를 역임하였고, 손자식(湜)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증손 천년(千年)이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한 훈(薰)과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지낸 훈의 동생 운(芸)이 이름났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진 임씨(恩津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643가구, 6,8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益山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익산 임씨(益山林氏)는 당(唐) 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신라(新羅)에 들어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한 후 평택(平澤) 용포리(龍浦里)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한 임팔급(林八及)의 후손 임  완(林  完)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송(宋)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여 1114년(예종 9)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으며, 인종(仁宗) 때 수창궁(壽昌宮) 옆에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자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으며, 이어 국자사업(國子司業)․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그후 후손들이 익산(益山)에 살면서 평택에서 분적(分籍)하여 익산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근세(近世)가 조선에서 한림원 제학(翰林院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을재(乙材)가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철(之哲)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익산 임씨(益山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214가구, 9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천임씨(林川林氏)

임천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3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장흥 임씨(長興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진 임 분(林 蕡 : 세은의 아들)을 시조(始祖)로 하고 장흥(長興)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분의 아들 이(頤)가 조선 태조(太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손자 득이(得荑)가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증손 우소(曾孫雨所)가 상주 판관(尙州判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통덕랑(通德郞)에 이른 언경(彦京)과 수미(秀美), 부호군(副護軍) 중경(重敬), 그리고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성밀(成密)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남한(南韓)에 총 1,549가구, 6,5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임씨(全州林氏)

전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28가구 4,2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兆陽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언수(彦脩)의 네째 아들인 임세미(林世味)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세미(世味)는 고려말(高麗末)에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대광찬성좌복야(大匡贊成左僕射)를 지내고 조양군(兆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평택 임씨(平澤林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조양(兆陽)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 옥산(玉山)은 세미(世味)의 8세손으로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일찌기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5,546가구, 23,6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임씨(晉州林氏)

진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73가구 1,79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진천 임씨(鎭川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진천 임씨(鎭川林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혜종(惠宗)의 비(妃)인 의화왕후(義化王后)의 아버지로서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진 임 희(林 曦)이다

  그후 고종(高宗)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임 연(林 衍)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진천(鎭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연(衍)의 손자 간(侃)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며, 증손 희정(希正)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우찬성(右贊成)에 올랐고, 현손 지(智)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추충보절동덕찬화보리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輔理功臣)에 녹훈되고 후에 상산군(常山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빛냈다.

  이 외에도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을 지낸 구(球),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수성(秀成),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낸 각(珏)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천 임씨(鎭川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485가구, 1,8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임씨(忠州林氏)

충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51가구 2,0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평택 임씨(平澤林氏)

 


시조 빛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은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였는데 간신(奸臣)들의 참소가 있자 동래 8학사(東來八學士) 중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팽성(彭城)의 용주방(龍珠坊)에 정착(定着)하였다.

  그후 문헌(文獻)의 실정(失傳)으로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고려 말(高麗末)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 겸 연희궁 부사(衍禧宮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한 평택(平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세춘(世春)의 아들 재(梓)가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증손 정(整)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라 성종(成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현손(玄孫) 명산(命山)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평택 임씨(平澤林氏)의 대표적인 인물 조선의 명장(名將) 경업(慶業)은 세춘(世春)의 12세손이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황(篁)의 네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뛰어났던 그는 무과에 급제,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첨지중추 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이 괄(李 适)의 난 때에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이 되었으며 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도처에서 적군(敵軍)을 무찔러 영웅적(英雄的)이고 전설적(傳說的)인 용명(勇名)을 떨쳤으며 그의 무용담(武勇談)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임경업전(林慶業傳)」이 있다.

  경업의 형(兄) 형업(亨業)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모친상(母親喪)을 당한 관계로 피난을 못 가 청군(淸軍)에게 붙잡혔으나. 청군(淸軍)이 「효자는 해칠 수 없다(孝

人不可害)」라고 찬탄할 정도로 효성이 뛰어나 효자(孝子)․충신(忠臣)의 정문(旌門)이 고향에 세워졌으며, 숙종(肅宗) 때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어 명망높은 평택 임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46,670가구, 194,5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주임씨(海州林氏)

해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3가구 1,2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해진임씨(海津林氏)

해진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98가구 1,77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희진임씨

희진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05가구 1,6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곡성임씨(谷城任氏)

곡성임씨 시조는 희능직(禧陵直) 임영진(任英進)이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771가구 5,6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관산임씨(冠山任氏)

관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4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광산임씨(光山任氏)

광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1가구 1,42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안동임씨(安東任氏)

안동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9가구 1,4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장흥임씨(長興任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흥 임씨(長興任氏)의 시조(始祖) 임 호(任 顥)는 본래 중국(中國) 소흥부(紹興府) 출신으로 중국 헌원계임씨(軒轅系任氏)의 109세손이자 소흥 임씨(紹興林氏 : 소흥계 임씨에서 분적)의 시조인 임 약(任 鑰)의 손자이다.

  「승석가부해동설(乘石舸浮海東說)」에 의하면 송(宋)나라에서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과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던 임 호(林 顥)가 고려(高麗) 정종(靖宗 : 제10대 왕, 재위기간 : 1034~1046)년간에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귀화한 것으로 전하며, 남해안(南海岸)에 있는 정안현(定安縣 : 현 전남 장흥군 관산읍)의 임자도(任子島)에 처음 기착(寄着)하여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으로 알려진 천관산(天冠山) 밑의 당동(堂洞)에 터를 잡고 장흥 임씨(長興任氏)의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아들 의(懿)가 선종(宣宗) 때 우승선(右承宣)으로 등용되어 숙종조(肅宗朝)에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손자(孫子) 원후(元厚)가 인종(仁宗)의 국구(國舅)로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서 임 호(林 顥)를 시조로 받들고 의(懿)를 일세조(一世祖)하여 정안 임씨(定安任氏)로 칭관(稱貫)하다가 정안현(定安縣)이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로 승격됨에 따라 장흥 임씨(長興任氏)로 개칭하게 되었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원후(元厚)는 그릇이 넓고 깊으며 풍채가 엄하고 중후했다고 하며,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여 재상에 올랐어도 근검하고 청백하기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특히 원후는, 다른 재상들이 모두 반적 묘청(妙淸)을 흠앙하고 믿었으나 홀로 쫓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밝은

지감에 탄복하였으며, 판이부(判吏部)에 임명되어서는 인사행정이 매우 공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옛날의 산도(山濤 : 진나라 사람으로 이부 상서가 되어 훌륭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다.)〉라고 칭했다.

  특히 고려조(高麗朝)에서 화려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던 장흥 임씨는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 원후(元厚)의 아들 유(濡)가 5대(代)의 임금을 섬기면서 주요 관직을 역임했고, 성품이 염담(恬淡)하고 인자하여 권세와 지위로써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으며, 비록 노비(奴婢)와, 천예(賤隸)일지라도 욕하고 꾸짖지 않았다.

  학문(學文)에 조예가 깊었던 유(濡)는 만년(晩年)에 불교(佛敎)를 독실하게 믿었으며,「대장경(大藏經)을 금서(金書)했고, 희종(熙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한편 기억력이 좋기로 이름났던 익(翊 : 유의 손자, 추밀원사 경겸의 아들)은 비록 지나간 옛일이라도 명칭과 숫자에 대하여 의심나는 것을 그에게 물으면 정확하게 응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일찍이 충렬왕(忠烈王)의 명을 받아「선원록(璿源錄)」을 지었고, 동수국사(同修國史)가 되어 수찬관(修撰官) 김 병(金 賆)과 함께 원(元)나라 세조(世祖)의 사적(事蹟)을 찬(撰)하여 박학(博學)하기로 유명했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개국초기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던 서종(瑞宗)과 대사헌에 올랐던 헌(獻)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웠던 호남의병장(湖南義兵將) 계영(啓英)과 호성공신(扈聖功臣) 발영(發英), 문장(文章)과 병략(兵略)에 뛰어났던 백영(百英), 해남 의병장 희진(希璡) 등이 장흥 임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적군의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의병장 조 헌(趙 憲)과 고경명(高敬命)이 패하고 없었던 때라 호남을 지켜야 하는 중책을 느꼈던 계영(啓英)은 전현감(前縣監) 박광전(朴光前) 등과 고향인 보성(寶城)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1천 여 명의 군사를 모아 남원에 이르러 최경회(崔慶會)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장수(長水)․거창(居昌)․합천(陜川)․성주(星州)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임란2등공신(壬亂二等功臣)에 책록되었던 발영(發英)은 선조(宣祖) 임금이 어선에다〈천생임발영위아사직신(天生任發英爲我社稷臣)〉이란 글을 써서 하사(下賜)하며 예양군(汭陽君)에 봉하고, 그의 조부(祖父) 광세(光世)는 관산군(冠産君)에, 아버지인 희성(希聖)은 관흥군(冠興君)에 추봉하는 은전(恩典)을 내렸다.

  그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순천(順天)과 나주(羅州)의 영장(營將)을 거쳐 광양중군(光陽中軍)과 숙천 부사(肅川府使)를 역임했던 만기(萬紀)와 영조(英祖) 때 등과(登科)하여 만경 현령(萬頃縣令)․양산 군수(梁山郡守) 등을 지냈던 제원(濟遠)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삼절(三絶)〉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던 병관(炳琯)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자 국권(國權) 회복에 의거(義擧)했던 병국(炳國)이 장흥 임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남한(南韓)에 총 7,777가구, 34,1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임씨(晉州任氏)

진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93가구 1,57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풍천임씨(豊川任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풍천 임씨(豊川任氏)의 시조(始祖)는 본래 중국(中國)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으로 고려(高麗) 때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오른 임 온(任 溫)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溫)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풍천(豊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온(溫)의 6세손(世孫)인 주(澍)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역임하였는데, 풍천 임씨는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백파(伯派 : 자송)와 중파(仲派 : 자손)로 크게 나뉘며 두 파(派)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자송(子松)은 백이정(白頤正)의 문인(門人)으로 조 적(趙 頔)의 난(亂)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올라 서하부원군(西下府院君)에 봉해졌고, 자순(子順)은 통헌대부(通憲大夫)로서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내고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자송(子松)의 6세손인 원준(元濬)은 당대의 명관(名官)으로 경사(經史)에 밝고 시(詩)와 문장(文章)이 뛰어나 명성을 얻었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진 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사홍(士洪)은 한어(漢語)에 정통하고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두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조선(朝鮮)에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또한 열(說)은 자송(子松)의 8세손으로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에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자손(子順)의 7세손인 유겸(由謙)은 중종(中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공조 판서(刑曹․工曹判書)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

물(人物)들이 배출되어 풍천 임씨(豊川任氏)의 2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유겸(由謙)의 아들 추(樞)․권(權)․병(柄) 삼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맏아들 추(樞)는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고, 권(權)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관찰사(觀察使) 및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뒤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막내인 병(柄)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및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으며 글씨에 탁월한 재질(才質)을 보였다.

  추(樞)의 아들로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호신(虎臣)과,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른 보신(輔臣), 현감(縣監) 주(柱)의 아들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낸 내신(乃臣), 몽신(夢臣)의 아들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탁(鐸)과 현(鉉) 등이 대(代)를 이어 훌륭한 풍천 임씨(豊川任氏) 가문(家門)을 빛냈다.

  또한 풍천 임씨(豊川任氏)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승려의 몸으로 국가(國家)가 위기에 봉착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승(義僧)을 이끌고 왜병(倭兵)에 대항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인데, 그는 자순(子順)의 6세손으로 본명(本名)은 응규(應奎), 법명(法名)은 유정(惟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수성(守成)의 둘째 아들이다.

  이외에도 재사9才士)로 이름난 광(絖)은 감찰(監察) 익신(翊臣)의 아들이며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와 형조 참판(刑曹參判)․관찰사(觀察使)를 거쳐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고, 「목동가(牧童歌)」를 지은 유후(有後)도 예조 참판(禮曹參判)․관찰사(觀察使)․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문에 뛰어난 8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소현세자(소현세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배종(陪從)한 뒤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효종실록(孝宗實錄)」편찬에 참여한 한백(翰伯), 문장과 글씨가 탁월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명성을 얻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홍망(弘望)과 대사성(大司成)․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방(埅) 등은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근세(近世)의 명필(名筆)로 형조 참판(刑曹參判)․도승지(都承旨)를 지낸 수적(守迪),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고금의 시가9詩歌)에 통달하였고 글씨에도 능하였던 그의 아들 정(珽), 그리고 조선조(朝鮮朝)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大家)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성주(聖周)와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하고 기를 일원적(一元的) 관념(觀念)으로 통일하여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한 정주(靖周)는 형제(兄弟)학자로서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 까지 이름을 떨쳐 명문인 풍천 임씨를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남한(南韓)에 총 24,682가구, 103,1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길공구(gil09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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