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태종(太宗) 18년 1418 - 세조(世祖) 2년 1456년)

자(字)는 근보(槿甫) 눌옹(訥翁) 호(號)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本貫)은 창녕(昌寧) 부(父)는 도총관(都摠管) 승(勝)이고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세종(世宗)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세종(世宗) 29년 문과중시(文科中試)에 장원(壯元)했다.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에서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을 거쳐 왕명(王命)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編纂) 하였다.
경정관(逕庭官)이 되어 항상 세종(世宗)을 가까이에서 모셔 총애(寵愛)를 받았다.
세종 24년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석정(李石亭) 등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管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고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등과 함께 한글의 창제(創製)를 앞두고 당시(當時) 요동(遼東)에 유배(流配) 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十三番)이나 래주(來注)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明)나라에 여러번 건너가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制度)를 연구(硏究) 그 정확(正確)을 기(期)한 끝에 세종(世宗) 28년(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케 했다.
세종(世宗)이 만년(晩年)에 숙환으로 온천(溫泉)에 갈때도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이개(李塏) 등과 함께 항상(恒常) 배종 했다.
단종(端宗) 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집현전(集賢殿)신하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리자 모두들 순번(順番)으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었으나 이를 수치(羞恥)로 여겨 혼자 열지 않았다.
단종(端宗) 3년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세조(世祖)가 단종(斷種)을 내쫓고 왕위(王位)에 오르자 국새(國璽)를 않고 통곡 했으며 다음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서 아버지 승(勝) 박팽년(朴彭年)등과 같이 단종(斷種)의 복위(復位)를 협의(協議) 4월 명나라 사신(使臣) 송별연회석상(送別宴會席上)에서 운검(雲劒)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兪應孚)가 세조(世祖)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정인지(鄭麟趾)등 일파(一派)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當日) 운검(雲劒)을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후일(後日)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에 같은 모의(謀議)에 가담했던 김질(金瓆)이 성사(成事)가 안될 것을 우려하여 밀고(密告)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체포 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居烈)의 극형(極刑)을 받았다.
이에 부(父)인 승(勝)도 주모자(主謀者)로 극형(極刑)을 받았고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의 세 동생(同生)과 맹담(孟澹), 맹년(孟年), 맹종(孟終)과 갓난아기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殺害) 되었다. 숙종 2년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옆에 세워진 녹운서원(綠雲書院) 숙종 7년 육신(六臣) 묘(墓)가 있는 노량진(露梁津)에 세워진 민절서원(愍節書院)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성(義城)의 학산(鶴山) 충열사(忠烈祠) 창영(昌寧)의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 등에 육신(六臣)이 함께 제향(祭享)한다. 영조(英祖) 34년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다. 능서(能書 글씨를 잘 썼다)
선생(先生)의 시(時)는 많이 전(傳)하나 병자(丙子)년 6월 8일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끌려 갈 때 대여섯 살 밖에 안된 그의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그는 뒤돌아 보며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하고는 목에 매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수레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충절(忠節)을 다음과 같이 시(詩)로 나타냈다.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소지평생막유위 素志平生莫有違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依依


(역 譯)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현릉(문종의 능) 푸른 송백꿈 속에서도 못잊져라

성삼문(成三門 : 1418, 태종18∼1456, 세조2)은 15세기의 조선초의 뛰어난 유학자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으로 일컬어진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은 집현전의 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공을 세웠는데, 음운 연구를 위해 요동 땅을 오고 간 것이 무려 13차례나 되었다.

또한 그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으려 하자 이를 불의로 규정하고 목숨을 바쳐 항거하였다. 부친 성승(成勝), 동지 박팽년(朴彭年), 이개(李愷), 하위지(河緯 池), 유성원(柳誠源), 유응부(柳應孚)등과 함께 모진 고문과 참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이에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고 그들의 충절을 높여 기르고 있다. 이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가 목숨을 걸고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이후 가장 대표적인 충절의 실 천이었다. 유학은 본래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으뜸으로 여기는데, 성삼문의 정의로운 삶과 죽음은 이러한 유학의 충효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뿐인 귀중한 생명을 나라와 정의를 위해 바쳤다. 오늘날 세속적인 이해관계로 다투는 현실에서 그가 정의를 위해, 나라를 위해 곧게 살고 떳떳하게 죽어간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훈을 준다.


성삼문은 서기 1418년(태종 18년, 무술戊戌) 충청도 홍주 적동리 노은동(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고려말의 명장으로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려다 희생된 최영(崔瑩) 장군이 낳아서 자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려의 충성스런 장군 최영과 조선의 충성스런 학자 성삼문은 함께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참으로 깊은 인연이라 할 것이다.

그의 부친은 성삼문과 함께 단종의 왕위를 회복하려다 함께 희생된 도충관 성승이며, 모친은 현감 박첨의 딸인 죽산 박씨(竹山 朴氏)이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무인의 집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조부 성달생(成達生 : 1376∼1444)은 경기, 황해, 충청, 수군도처치사(水軍都處置使)로 임명되어 왜군 격퇴에 공을 세웠고,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되어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무장이었으며, 그의 부친 성승 또한 당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장군으로서 도총관을 지냈다.

그의 부친 성승은 1433년(세종 15년)10월 2일 세종의 사냥행차에 겸사복(兼司僕)의 직분으로 수행한 적이 있었다. 세종은 왕세자, 종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철원평야로 사냥을 떠났는데, 10월 4일 매를 놓아 고니를 잡다가 왕세자의 말이 진흙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때 성승은 용감히 진흙탕 속으로 뛰어 들어가 왕세자와 말을 구출하였다. 이에 왕세자는 성승에게 한 벌의 활을 상을 주었다. 이 사냥이 끝난 후 11월 10일 세종은 성승의 당숙이자 성녕대군의 장인인 성억(成抑)을 하성절사(賀聖節使)의 정사(正使)로 삼아 명나라로 보냈다. 이는 명나라의 친왕비가 되어 있는 당질녀 성씨 즉 성삼문의 막내 고모를 만나게 해 주려는 세종의 특별한 배려였던 것이다. 이어 12월 9일에는 좌승지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내려보내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있는 성달생과 함께 여진족을 본격적으로 정벌하여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런데 성삼문이 세상에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다고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근보(謹甫), 눌옹(訥翁)이었으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운옥(大東韻玉)>에는 '독서암(讀書菴)'이라는 호도 보이지만, 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불렸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의 어린 시절과 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성삼문은 18살 때(1435년, 을묘乙卯)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21살 때 (1438년, 무오戊午) 하위지와 함께 삭년 정과(式年 丁科)에 합격하여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25살 때(1442년, 임술壬戌) 박팽년, 신숙주(申叔舟), 이개, 하위지, 이석형(李石亨) 등과 함께 세종의 명으로 독서휴가를 받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다.

이들은 공부하면서 틈을 내어 삼각산을 시제(詩題)로 하여 서로 시를 주고받은 연구(聯句)형식의 창수시(唱酬詩)를 짓곤 했는데, 이것이 그의 문집에 잘 전해지고 있다.

성삼문의 나이 27살 때인 1444년(세종 27년) 1월 7일 성삼문은 왕명에 의해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함께 요동으로 가서 마침 그곳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학사 황찬(黃瓚)에r 음운학을 질문하며 배웠다. 이 때 서울의 여러 학문하는 벗들이 송별연을 베풀고 송별 시를 써주며 작별하였는데, 이에 성삼문도 그 전별시의 운을 빌려 신숙주의 시에 화답하였으니, 이것이 <요동을 향하면서 서울 여러 친구들이 송별하는 시의 운을 가지고 범옹(泛翁)에게 화답한다>는 사이다.

이로부터 성삼문은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을 무려 13번이나 왕래하였다 하니,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세종의 의지와 성삼문 등의 숨은 노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1446년(세종 28년)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되었다.

그는 30살 때 (1447년, 丁卯정묘) 세종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중시 을과(重試 乙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 20인에게 책문(策文)을 지어 올리게 하여 8인을 우등으로 뽑고, 다시 그들 8인에게 팔준도(八駿圖)를 제목으로 문장형식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글을 지으라 하였는데, 성삼문은 <팔준도전(八駿圖篆)>을 지어서 장원을 하였다.

한편 그해 9월 2일 부친 성승이 하성절사(賀聖節使)의 정사(正使)가 되어 북경으로 가게 되었는데, 성삼문도 자제군관(子弟軍官)이 되어 수행하게 되었다. 음운학을 배워와서 <훈민정음(訓民正音)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을 보완하려는 세종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해 12월 28일 성삼문 부자는 일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였는데, 이 때 중국으로 표류해 갔던 김원(金元) 등 13인이 송환되었다. 그는 이 여행길에서 의미 있는 두 시를 남겼는데 그 일화를 보기로 하자. 하나는 수묵(水墨)으로 그린 <백로도(白鷺圖)에 제함>이라는 제화시(題畵詩)인데 이런 사연이 전해진다. 성삼문이 연경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백로도에 제화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그는 당연히 채색화인줄 알고 다음과 같이 시를 써내려 갔다.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을 만들었다.
갈대밭 물고길 엿보았나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런데 갑자기 주인이 난색을 표하며 그림을 펴 보이는데 이는 수묵화였다. 이에 성삼문은 곧 이어 뒤 두 구절을 다음과 같이 써서 시를 완성하였다.

우연히 날아서 산음현(山陰縣)을 지나다가,
잘못해 왕희지의 세현지(洗硏池)에 떨어졌구나.


이를 본 중국사람들이 그의 글 솜씨에 모두 감탄하였다 한다.
또한 그는 중국 은(殷)나라에 절의를 지킨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사당인 이제묘(夷齊廟)를 지나다가 그들의 절의가 온전치 못함을 비판하는 시를 썼으니 이것이 바로 그 시이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리어 죽을 진정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샛 것인들 귀 뉘 땅에 났더니.


이때 성삼문이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 6권을 편찬하여 세종께 바쳤다. 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고, 경연관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 이듬해 1448년(세종 30년, 戊辰)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등과 함께 <비해당 48영(匪懈堂 四十八詠)>과 그 서문을 지었는데, 이는 안평대군의 사저인 비해당의 정원에 있는 진기한 화초와 비해당의 진풍경을 48수의 시로 읊은 내용과 그 서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에 그는 연꽃을 보고 <연송(蓮頌)>이라는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군자의 기상을 읊기도 했다.

연아, 연아, 고운 연아,
마음 비우고 곧기까지 하구나.
이 세상에 군자가 있지 않다면,
어찌 그 덕을 견줄 수 있겠느냐.
진흙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을 타지 않고,
물 속에 있으면서도 젖지를 않는구나.
군자가 거처하니,
어찌 비루 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연아, 연아, 고운 연아.
그대 이름을 정우(渟友)라 부르고 싶다.


또한 <송죽설월송(松竹雪月頌)>도 지어 소나무, 대나무, 눈, 달의 지조와 깨끗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곧고 또 굳세니,
굳세고 곧은 것은 군자가 존경하는 바며,
달과 눈은 밝고 또 깨끗하니
밝고 깨끗한 것은 군자가 기뻐하는 바라.
조래산( 徠山)에는 소나무가 없고,
기수(淇水)에는 대나무가 없겠네.
군자가 옮겨와서 지척에 두었으니,
여름에는 눈이 내리지 않고,
낮에는 달이 뜨지 않건마는,
군자가 소유하고 있음에,
계절이 따라 없도다.


1450년(세종 32년) 윤 1월 1일 명나라에서 정사로 한림학사 예겸(倪謙)과 부사로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 경종(景宗)의 즉위를 알리고자 우리 나라에 왔다. 예겸은 시에 매우 능하여 사신 접대역인 정인지(鄭麟趾)조차도 대적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성삼문의 처숙부인 김하(金何)와 공조판서 윤형(尹炯)을 사신 접대역으로 삼고,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성삼문과 신숙주를 발탁하여 이들과 학문적인 교유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성삼문과 신숙주를 발탁하여 이들 두 사신과 매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주고 받았다. 불과 20여 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소에서 예겸은 성삼문의 박학과 준수한 용모, 충직하고 정의로운 성품, 호방한 기게에 끌려 그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이에 압록강까지 따라와 전별하는 성삼문에게 다음과 같은 송별시를 남겼던 것이다.

바다에서 서로 만난 후로 오랜 친구가 되었다.
한가한 담소로 매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음이 같아서 금란(金蘭)의 우의를 서로 맺었고,
함께 마시니 옥수(玉樹) 같은 자질 몹시 이여쁘더라.
감히 양웅(楊雄)만이 글자를 많이 안다 이를까?
자우(子羽)가 수사(修辭)를 잘하는 것은 본디 알았네.
강가에서 하는 이별 견딜 수 없어.
동풍에 말 세우고 이별을 한하노라.


성삼문은 다시 1450년 10월 22일 정조사(正朝使) 조석강(趙石岡), 부사성승을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그 이듬해 2월 29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1452년(단종 원년, 계유 癸酉) 4월 10일 성삼문은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하였고, 이로부터 시독관, 시강관을 겸하여 국정에 깊숙히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1452년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10월 10일 김종서를 안평대군과 음모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죄로 죽이고, 10월 18일에는 안평대군이 모반하려 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사사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에 성삼문은 다른 공신들이 교대로 연회를 베풀어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그 홀로 연회를 베풀지 아니 하였다.

1454년(단종 2년) 1월 22일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고, 김사우(金師禹)와 권완(權完)의 두 딸을 각각 숙의(淑儀)로 책봉하여 납비(納妃)할 날씨가 결정되자, 성삼문은 마침내 목숨을 걸고 어린 단종에게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부왕(父王)의 상중(喪中)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은 예법에 크게 어긋나 만대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탈상 뒤로 해야 한다고 강력히 설득하였다. 이에 당황한 수양대군은 성삼문을 의금부에 가두고 단종에게 말하기를 "일개 성삼문의 말로 갑자기 대사를 그만둔다고 하니 되겠습니까? 무릇 조정의 일은 모두 옛날 제도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수릉관(守陵官)이 전하를 대시하여 3년 동안 최질( : 거친 상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청컨대 임시제도를 따라 왕비를 맞아들이고 길복(吉服)을 입으십시오"라고 강권하였다. 이에 어린 단종은 1월 24일 하는 수 없이 납비례(納妃禮)의 대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성삼문의 직언이 너무나도 타당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그를 석방시키고, 1월 28일 좌사간 직책을 빼앗고 좌천시켰던 것이다. 아울러 저들은 이 사건을 <단종실록>에 그 내용조차 싣지 않고 있으며, 다만 성삼문의 말로 왕이 납비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하여 수양이 위협해 성사시켰다는 내용과 성삼문을 의정부에 하옥시켰다는 내용만 기재도어 있는 것이다.

그후 성삼문은 6월 27일 집현전 부제학으로 승진하고, 8월 5일에는 예조참의로 자리를 옮기지만, 수양일파의 왕위찬탈을 위한 고도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455년(단종 3년, 을해 乙亥) 마침내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예방승지였던 그는 옥새(玉璽)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이 때 친우 박팽년이 단종의 복위를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고자 하였다. 이에 성삼문이 말리며 말하기를, "이제 왕위가 옮겨졌다 하더라도 오히려 상왕이 살아 있는데,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일을 기약할 것이오, 도모하다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오늘의 죽음은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박팽년이 그의 말을 듣고 죽지 않았던 것이다.

1456년(세조 2년, 병자 丙子) 성삼문은 우부승지로서 부친 성승,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김문기, 김질 등과 함께 단종의 왕위 회복을 도모하고자 명나라 사신을 창덕구으로 초대하여 광연전(廣延殿)에서 연회를 베푸는 기회에 거사하기로 하고 집현전에 모여 의논하였다. 이 때 성삼문은 말하기를 "신숙주는 나와 친하다. 그러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아니 할 수가 없다"고 하니, 모두가 좋다고 응락하였다. 무사로 하여금 각각 죽일 자를 맡도록 하였는데, 형조정랑 윤영손이 신숙주를 맡기로 했다. 마침 그날 운검(雲劒)을 그만두기로 하여 중지하기로 했는데, 운영손이 이를 알지 못하고 신숙주가 머리를 감는데 칼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자 성삼문이 눈짓을 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성삼문 등은 계획대로 6월 1일 명나라 사신 초대연에서 세조 부자와 그 측근인 한명회, 정인지, 권람 등을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날 세조의 심복인 한명회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창덕궁 광연전이 비좁고 날이 더우니 세자와 운검의 배치는 중지할 것을 요청하여 세조가 이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 날 운검으로 근무할 예정이던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격분하여 한명회를 한칼에 쳐서 죽이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응부가 명을 어기고 대전 안으로 들어가려 하므로 성삼문과 박팽년이 이를 굳게 막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으니, 만일 우리가 거사한 후에 세자가 군사라도 일으킨다면 성패를 알 수 없으니, 뒤에 만전을 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설득하였다. 이 때 모의에 참가하였던 김질이 일이 여의치 못함을 보고,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급히 알려 6월 2일 세조에게 보고되었다. 이리하여 거사계획은 발각되고 혹독한 고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삼문에게 형틀을 씌워 뜰 안으로 끌고 들어가 세조가 묻기를 "너희들의 이번 일은 무슨 일인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성삼문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는 것이오, 천하가 어찌 자기 임금과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내 임금은 나라가 다 아는데 나으리는 무엇이 이상하여 묻는 거요?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소. 삼문이 남의 신하가 되어 군주가 폐위 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오. 나으리가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자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 라고 하였다. 이어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왕위를 물려받던 처음에 왜 막지 않고, 나에게 의지했더니 이제 와서 배반하는가?" 하였다. 이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형세가 어찌 할 수 없었소. 나는 짐짓 나아가도 말리지 못할 것이오 물러서면 한번 죽음이 있음을 알았던 것이오. 한갓 죽는다는 것은 유익함이 없으며, 참고 여기에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고자 함이었소"하였다. 이에 세조가 이르기를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성삼문은 말하기를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합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겟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가산을 몰수하여 조사해 보니 1455년 세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받은 녹봉은 별도로 한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독'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실에는 오직 이부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세조는 몹시 화가 나서 무사에게 명령하여 쇠를 달구어 그 다리를 뚫고 그 팔을 끊어도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하며.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처참하다"고 하였다. 그때 신숙주가 세조 앞에 서 있었다. 이에 성삼문이 꾸짖기를 "내가 너의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께서 왕손을 안으시고 산보하시며 모든 유신(儒臣)들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죽은 뒤에 경 등은 이 아이를 보호하라' 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너는 잊었는가? 너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참으로 몰랐다"고 하였다.

또한 세조는 강희안(姜希顔)을 심문하면서 "강희안도 모의에 참여했는가?"라고 묻자 성삼문은 "참으로 알지 못하오. 나으리가 이름난 선비를 모두 죽이려 하나, 마땅히 이 사람은 남겨두었다가 쓰도록 하시오"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강희안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한다.

성삼문은 수레에 실려 문을 나서면서도 얼굴빛이 여전하며,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해서 태평을 이루시오. 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뵐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는 1456년 6월 8일 이개, 하위지, 유응부, 김문기, 성승, 박중림, 박쟁, 송석동, 윤영손 등과 함께 군기감 앞길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잔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 지었다 하는 절명시(絶命詩)가 다음과 같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임금님 녹을 먹고 임금님 옷을 입었으니,
평소에 먹은 마음 어김없기를 바라노라.
한 목수 바치는데 충의(忠義)가 있음을 알았으니,
현릉(顯陵)의 송백(松栢)이 꿈속에 아련하네.


또한 형장에서 남겼다는 다음과 같은 시조도 전해오고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이로 인해 부친 성승도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의 세 동생과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헌(憲), 택(澤) 그리고 갓난아이 등 여섯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성삼문의 묘는 서울 노량진에 이른바 육신의 묘로 만들어 지고 있으나, 또 일설에는 충청남도 논산군 은지에도 그의 묘가 있다 하여 받들어 지고 있다. 또한 그의 죽음 후 가산은 여지없이 몰수되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관비로 보내졌으니, 그의 충절의 대가는 너무나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성삼문은 우리 나라의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로서 많은 글이 있었지만, 그의 글은 대부분 없어져 온전하게 전해지지 못하고, 나머지 글들을 모아 <성근보집(成謹甫集)>으로 엮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또한 그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문헌을 편집하여 이름을 <동인문보(東人文寶)>라 하였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김계온(金季 )이 이어서 완성하고 이름을 <동문수(동문수)>라고 하였다.

1675년(숙종 원년) 사림들이 대구에 모여 사우(祠宇)를 짓고 성삼문을 비롯한 여섯 선생을 함께 제사지내게 되니, 1694년 낙빈서원(洛濱書院)의 사액을 내려졌다. 또한 1676년(숙종 2년) 충청도 홍주 노은동에 있는 그의 옛집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이 세워졌고. 1681년(숙종 7년)에는 육신묘가 있는 노량진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졌고, 그밖에 영월에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에 충렬사(忠烈祠: 1729년, 영조5년)창녕 물계에 세덕사(世德祠), 연산에 충곡서원(忠谷書院), 달전에 문절사(文節祠), 해남에 금성사(琴城祠), 동학사에 숙모전(肅募殿) 등이 세워져 육신과 함께 제향(祭享)되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삼문의 39년의 짧은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이를 통해 그의 사람됨과 그에 얽힌 일화를 소개해 보기로 하자.

그는 사람됨이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말이 맺힌데가 없어서 남과 얘기하고 농담하기를 즐겨하였다. 또 앉고 눕는 데에 절도가 없어 겉으로는 절제가 없는 듯 하였지만, 안으로는 자기 절제가 굳고 확실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렇게 겉으로는 자유분방하고 말을 잘해 자기수양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적인 자기절제와 굳건한 신념을 소유한 강인한 선비였던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세종을 모실 기회가 많았다. 임금을 계도하고 보필하는 데에 옛사람의 기풍과 도량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다. 임금이 만년에 질환이 있어 여러 차례 온천에 가곤 했는데, 항상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등으로 하여금 편복(便服) 차림으로 임금의 앞에 있으면서 질문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이것만 보더라도 성삼문이 얼마나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고, 또 세종의 훌륭한 정치가 바로 임금과 신하의 상호 믿음과 존경 그리고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문종이 오랫동안 세자로 있었는데, 나이가 점점 들어도 학문에 전념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달이 밝고 사람들이 잠들고 나면 간혹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의 숙직하는 집으로 걸어가서 함께 선비들과 토론을 하곤 하였다. 당시 성삼문 등이 집현전에 숙직하였는데, 밤이면 감히 관대를 벗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어 세자의 행차가 없을 줄로 여기고 웃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면서 성삼문을 부르며 문종이 오니 매우 놀라서 황급히 엎드려 절을 하였다. 문종은 성학(聖學)의 근면함과 선비의 독실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진실로 천고에 드문 분이었다. 여기에서도 세자와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과의 학문적 동지애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다. 세자의 학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학자들의 세자에 대한 존경이야말로 유교사회의 자랑으로 오늘의 정치현실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수개월 전에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서 밤이 깊도록 국사를 의논하다가 무릎 앞에 있는 세자(단종)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내 이 아이를 경들에게 맡기노라" 하였다. 그리고 술을 내다가 임금의 자리에서 내려와 여러 학사들에게 일일이 술잔을 친히 권하니, 모두 몹시 취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문종이 환관들에게 명하여, 문짝을 떼어 담가로 만들어 그들을 얹어 가지고 집현전 입직청으로 옮기게 하고, 모두 담비가죽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 날 밤에는 눈이 유달리도 많이 내렸는데, 밤이 지낸 후 술이 깨어 보니 방안에는 향내가 가득히 풍기고, 몸에는 담비가죽 이불이 덮여 있었는데, 이것이 임금이 친히 덮어 준 것임을 알고 모두 감격해 울면서 충성을 함께 맹세하였다 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문종의 신하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과 성삼문을 비롯한 신하들의 임금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읽을 수 있다. 성삼문은 이러한 문종의 유언 아닌 유언을 받들고 임금의 따뜻한 사랑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수양의 왕위찬탈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 급사(給事) 장녕(張寧)은 예겸(倪謙)에게서 배웠다. 예겸이 다녀간 뒤 10년만에 중국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 당시 그의 나이가 24세였는데, 성삼문 등이 살아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나의 스승 예시강(倪侍講)께서 동국(東國)에는 재사(才士)가 많다고 하셨는데, 어찌 눈에 차는 사람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하고, 이런 이유로 수창(酬唱)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성삼문의 학문과 인품은 널리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삼문은 세종이나 문종이 얼마나 사랑한 신하요 학자였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충직한 인격과 해박한 학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람됨은 우리 나라 조정에서 뿐만 아니라 널리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몇 가지 일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성삼문은 39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이제 그가 남긴 발자취와 업적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는 충절과 의리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준 점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성삼문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불의로 규정하고 단종의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마침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충절과 의리를 끝까지 주장하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그의 가족은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니, 의리를 지킨 대가는 너무나 컸다.

조선조 성종때 점필재( 畢齎) 김종직(金宗直)이 임금에게 "성삼문은 충신입니다"라고 말하였더니, 임금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그러자 김종직이 "행여라도 변고가 발생한다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될 것입니다."라고 천천히 말하였더니, 임금의 안색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김종직의 말대로 성삼문은 충신이었던 것이며, 그는 성삼문의 충절을 계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특정 개인을 위한 충성이 아닌 것이다. 정의라는 가치. 의리라는 가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충성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종직은 성종 때 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도학정신을 부식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組)로 이어지는 도학시대를 활짝 열고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또한 1657년(丁酉 정유, 효종 8년) 10월 25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俊吉)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이 삼가 명나라 조정의 방효유(方孝孺)를 보건대, 이 사람은 진실로 한 시대의 죄인이었지만, 만세의 충신입니다. 그의 종당(宗黨)이 비참하게 형육(刑戮)을 당한 일은 진실로 역사 이래로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몇 십 년이 못되어 그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허락하였고, 또 사당을 따로 짓도록 허락하였으니, 큰 조정의 규모와 기상이 관대하고 심원(深遠)하여 진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후인에게 교훈을 주는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의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시로 방효유와 짝할 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방효유는 명나라 혜제(惠帝)때 시강학사(侍講學士)로 있었는데, 연왕(燕王)이었던 성조(成祖)가 혜제를 태워 죽이고 방효유를 불러 조서를 짓게 하자. 붓을 땅에 던지면서 "죽으라고 하면 바로 죽을지언정 조서를 지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절의를 굽히지 않다가 결국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춘당은 성삼문, 박팽년을 명나라의 충신인 방효유와 비교하고, 사우(祠宇)에 함께 종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권력도, 명예도, 돈도, 지위도 생명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기 때문이요 인생은 두 번 살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은 인간의 가장 엄숙한 선택이다. 맹자는 일찍이 "사는 것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요 올바름 또한 대가 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올바름을 취하겠다"고 하였다. 유학에 있어서의 이상은 물질적 부를 누리면서도 올바른 도덕적 삶을 사는데 있다. 즉 경제적인 삶과 도덕의 삶을 아울러 충족함이 유학의 이상이다. 그러나 만약 부득이하여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면 '사생취의(舍生取義)' 즉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고 하였다. 이는 공자의 '살신성인(殺身成仁)'과 같은 말이다. 의리라고 도덕적 가치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다. 의리라는 도덕적 가치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다. 성삼문은 도덕적 가치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다. 성삼문은 바로 이 공자의 '살신성인'과 맹자의 '사생취의'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우리는 말과 글로서 정의를 말하고 의리와 절개를 주장하기는 쉽다. 그러나 정의와 의리를 몸소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반드시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다. 온갖 위협과 고통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성삼문도 수양대군에게 협력을 했더라면 부귀영화가 보장되고 자신의 인생도 순탄대로의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성삼문은 수양대군의 행위를 정권의 도둑질로 보고 이에 협력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올바름이라는 가치, 정의라는 가치를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친 것이다.

이는 1392년 이성계의 혁명에 반대하다 선죽교에서 피살된 포은 정몽주의 충절과 살아서 충절을 지킨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의리정신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정몽주나 길재도 이성계나 이방원에게 협력했더라면 부귀영화가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성계의 행위를 불의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이에 결연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64년 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충절로 이어졌고, 또 16세기 기묘사화에서 도덕정치의 구현과 정의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다 38세의 나이로 아깝게 희생한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의정신은 대외적으로는 자주독립의 정신으로 나타나 중봉(重峰) 조헌(趙憲)을 비롯한 임진왜란의 의벼으로 나타났고, 또 병자호란을 맞아서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삼학사(三學士)의 의리로 나타났다. 그리고 19세기 서양열강의 위협속에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비롯한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등의 위정척사로 계승되었으며, 일제의 침략 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는 독립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충절의리(忠節義理)는 여말 포은의 충절의리를 계승한 것이면서, 15세기의 도학적(道學的) 의리, 임진왜란 때의 의병정신, 병자호란 때의 대청의리(對淸義理), 한말의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절의를 숭상하고 기리는 정신은 이미 그의 글속에 많이 나타나 잇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연의 미덕을 노래한 <연송(連頌)>에서 연을 군자의 덕에 비유하고, 마음을 곧으며 진흙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더럽지 아니하고, 물속에 있으면서도 젖지 않음을 예찬하였다. 또<매죽헌부(梅竹軒賦)>에서는 매화와 대나무의 지조와 절개를 노래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매죽헌(梅竹軒)'이듯이, 매화의 깨끗함과 대나무의 푸름을 예찬하였다. 매화는 눈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청아한 지조를 지키며, 대나무는 만고풍상에도 굳센 절의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그대로 읊은 것과 같고, 실제로 그는 매화와 대나무와 같은 지조와 절의를 지키며 짧은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또한 <송죽설월송(松竹雪月頌)>에서도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고 굳셈과 달과 눈의 밝고 깨끗함을 노래하였다. 그는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고 굳셈, 즉 어떠한 고난에도 변함없는 지조와 절개를 칭송하고 있으며, 달과 눈의 밝고 깨끗함 즉 공명정대하고 청렴결백함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덕이야말로 군자의 조건으로서의 성삼문 그 자신이 추구해 온 이상적 가치였다. 이상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우리의 그의 충절의리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평소 그의 삶 속에서 축적되어 드러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충절의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시적인 충동이나 감정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온 생애를 통해 다듬어진 이성적 실천이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진다. 이런 점에서 그의 충절의리는 더욱 높게 평가된다 하겠다.

오늘의 현대사회는 경제적 가치와 실용주의가 중시되고 있다. 모든 것이 경제적 잣대로 평가되고 실용적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는데 익숙해 있다. 이로 인해 정신적 가치, 도덕적 가치는 경시되고 전반적인 윤리적 위기를 맞고 있다. 정의를 위해 죽기보다 돈을 벌기 위해 죽는 현실이 자연스런 세태이다. 성삼문의 삶이야말로 바보 같은 삶으로 생각될 수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금 성삼문의 삶과 죽음을 재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영원히 살기 위하여 죽은 것이다. 정의라는 가치. 의리라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그는 죽었지만 죽은 것은 아니라 수많은 정의의 싹을 부리고 산 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충절의리의 삶은 외형적인 업적보다도 더욱 빛나는 교훈을 후세에 남겨주었다고 볼 수 있다.

1418년(무술 戊戌,태종 太宗 18년) :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 적동리(赤洞里) 노은동(魯恩洞)(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부친 도총관 성승(成勝)과 모친 죽산 박씨(竹山 朴氏)의 사이에서 태어 났다. 자(字)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호(號)는 매죽헌(梅竹軒)이다.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운옥(大東韻玉)>에는 '독서암(讀書菴)'이라는 호가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조부는 성달생(成達生)으로 경기, 황해, 충청 수군도처치사(水軍都處置使)로 왜군 격퇴에 공을 세웠고,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또 고조부는 이헌 성여완(怡軒 成汝完)으로 창녕 성씨가 중앙으로 진출한 것이 바로 이로부터라고 볼 수 있다. 1709년(숙종 35년)에 편찬한 <창녕성씨족보>에 의하면 성여완의 고조부인 성인보(成仁輔)가 창녕 성씨의 시조로 되어 있다.

선생이 낳으려 할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으므로 '삼문(三問)'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선생 18세(1435년, 을묘乙卯, 世宗 17년) :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선생 21세(1438년, 무오戊午, 世宗 24년) : 박팽년(朴澎年),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이석형(李石亨) 등과 함께 왕명으로 독서휴가를 받고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다. 이때 공부하면서 틈틈히 삼각산을 시제(詩題)로 하여 서로 시를 주고받는 연구(聯句)형식의 창수시(唱酬詩)를 지었다.

선생 27세(1444년, 갑자 甲子 世宗 26년) : 세종과 왕비 청송 심씨가 청주 초수리로 눈병치료 차 여행을 떠났는데, 판중추원사로 어가를 수행 주이던 조부 성달생(成達生)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조부 상을 당하였다.

선생 28세(1445년, 을축 乙丑, 世宗 27년) : 왕명에 의해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요동으로 가서 마침 그곳에 와 있던 명나라 학사 황찬(黃瓚)에게 음운학(音韻學)을 배웠다. 이로부터 13번이나 요동을 왕래하면서 훈민정은 창제의 기초적인 연구를 수행하였다.

선생 29세(1446년, 기사 己巳, 世宗 29년) :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澎年), 신숙주(申叔舟),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등과 함께 한글창제에 진력한 결과, 이해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게 되었다.

선생 30세(1467년, 정묘 丁卯, 世宗 29년) : 세종이 직접 참석한 자리에서 중시 을과(重試 乙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 20인에게 책문(策文)을 지어 올리게 하여 8인을 우등으로 뽑고, 다시 그들 8인들에게 '팔준도(八駿圖)'를 제목으로 글을 지으라 하여 선생은 <팔준도전(八駿圖篆)>으로 장원을 하였다. 9월 2일 부친 성승(成勝)이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북경에 가게 되자, 선생도 자제군관(子弟軍官)이 되어 수행하였다. 12월 28일 일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 하였는데, 이때 중국으로 표류해 갔던 김원(金元)등 13인이 송환되었다.
또한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박팽년(朴澎年),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 6권을 편찬하였고,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선생 31세(1448년, 무진 戊辰, 世宗 30년) :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과 함께 <비해당 48영(匪懈堂 四十八詠)>과 그 서문을 지었는데, 이는 안평대군의 서저인 비해당(匪懈堂)의 정원에 있는 진기한 화초와 비해당(匪懈堂)의 진풍경을 48수의 시로 ?은 것이다. 또 이 시기에 <연송(蓮頌)>과 <송죽설월송(松竹雪月頌)>을 지어 자신의 깨끗한 지조를 노래하였다.

선생 32세(1449년, 기사 己巳, 世宗 31년) : 왕명에 의하여 신숙주와 함께 태평관을 왕래하며 운서(韻書)를 질정(質正)하였다.

선생 33세(1450년, 경오 庚午, 世宗 32년) : 윤 1월 1일 명나라에서 정사(正使)로 한림학사 예겸(倪謙)과 부사로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 경종(景宗)의 즉위를 알리고자 우리 나라에 왔다. 예겸은 시에 매우 능하여 관반(館伴)인 정인지(鄭麟趾)조차도 대적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선생의 처숙부인 김하(金河)와 공조판서 윤형(尹炯)을 관반으로 삼고,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선생과 신숙주를 발탁하여 이들과 학문적 교유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선생과 신숙주는 이들 두 사신과 매일 어울리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詩文)을 주고 받았다. 불과 20여 일의 ?은 만남이었지만 이 속에서 예겸은 선생의 박학함과 준수한 용모, 충직하고 정의로운 성품, 호방한 기개에 이끌려 선생을 친구로 삼았다.
10월 22일 정조사(正朝使) 조석강(趙石岡), 부사(腐史) 부친 성승(成勝)을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그 이듬해 2월 29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 36세(1453년, 계유 癸酉, 端宗 원년) : 4월 10일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하였고, 이로부터 시독관, 시강관을 겸하여 국정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10월10일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10월 18일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마저도 죽였다. 그리고 집현전의 신하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자 선생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여러 공신들이 보답하는 뜻으로 교대로 연회를 베풀었지만, 홀로 연회를 베풀지 아니하였다.

선생 37세(1454년, 갑술 甲戌, 端宗 2년) : 1월 22일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고, 김사우(金師禹)와 권완(權完)의 두 딸을 각각 숙의(淑儀)로 책봉하여 납비(納妃)할 날씨가 결정되자, 선생은 마침내 목숨을 걸고 어린 단종에게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부왕(父王)의 상중(喪中)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은 예법에 크게 어긋나 만대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탈상 뒤로 해야 한다고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당황한 수양대군은 선생을 의금부에 가두고 어린 임금에게 강권하여 납비례(納妃禮)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직원이 너무나 타당했기 때문에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1월 28일 좌사간(左司諫) 직책을 빼앗기고 좌천되었다. 그후 6월 27일 집현전 부제학으로 승진되고, 8월 5일에는 예조참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선생 38세(1455년, 을해 乙亥, 端宗 3년) :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때, 예방승지(禮房承旨)였던 선생은 옥새(玉璽)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친우 박팽년이 단종의 복위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은 "이제 왕위가 옮겨졌다 하더라도 오히려 상왕이 살아 있는데,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일을 도모할 것이오, 도모하다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오늘의 죽음은 나라에 보탬이 돼지 않는다"고 만류하였는데 백팽년이 선생의 말을 듣고 죽지 않았다.

선생 39세(1456년, 병자 丙子, 世祖 2년) : 선생은 우부승지로 부친 성승(成勝),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문기(金文起), 김질(金 )등과 함께 6월 1일 계획대로 명나라 사신을 위한 광연전(廣延殿) 연회에서 세조 부자와 그 측근인 한명회(韓明會), 정인지(鄭麟趾), 권람(權擥) 등을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날 세조의 심복인 한명회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창덕궁 광연전이 좁고 날씨가 더우니 세자와 운검(雲劒)의 배치는 중지할 것을 요청하여 세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날 운검으로 예정된 성승은 격분하여 한명회를 한칼에 쳐죽이려 하자, "세자가 오지 아니하니 비록 한명회를 죽이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유응부가 명을 어기고 대전 안으로 들어가려 하므로 선생과 박팽년이 이를 굳게 막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으니, 만일 우리가 거사한 후에 세자가 군사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성패를 알 수 없으니, 뒤에 만전을 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설득하였다. 이때 모의에 함께 참여하였던 김질이 일이 여의치 못함을 보고,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급히 알려 6월 2일 세조에게 보고되어 거사계획은 발각되고 혹독한 고문이 이루어졌다.
선생에게 형틀을 씌워 뜰 안으로 끌고 들어와 세조가 묻기를 "너희들의 이번 일은 무슨 일인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선생은 크게 소리지르며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는 것이오, 천하에 어찌 자기 임금과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내 임금은 나라가 다 아는데, 나으리는 무엇이 이상하여 묻는 거요?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소. 삼문이 남의 신하가 되어 군주가 폐위 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오. 나으리가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자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 라고 하였다. 이어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왕위를 물려받던 처음에 왜 막지 않고, 나에게 의지했더니 이제 와서 배반하는가?"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형세가 어찌 할 수 없었소. 나는 짐짓 나아가도 말리지 못할 것이오 물러서면 한번 죽음이 있음을 알았던 것이오. 한갓 죽는다는 것은 유익함이 없으며, 참고 여기에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고자 함이었소"하였다. 이에 세조가 이르기를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성삼문은 말하기를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합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가산을 몰수하여 조사해 보니 1455년 세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받은 녹봉은 별도로 한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독'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실에는 오직 이부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세조는 몹시 화가 나서 무사에게 명령하여 쇠를 달구어 그 다리를 뚫고 그 팔을 끊어도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하며.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처참하다"고 하였다. 그때 신숙주가 세조 앞에 서 있었다. 이에 성삼문이 꾸짖기를 "내가 너의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께서 왕손을 안으시고 산보하시며 모든 유신(儒臣)들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죽은 뒤에 경 등은 이 아이를 보호하라" 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너는 잊었는가? 너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참으로 몰랐다"고 하였다.
선생은 수레에 실려 문을 나서면서도 얼굴빛이 여전하며,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해서 태평을 이루시오. 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뵐 것이오"라고 하였다.

선생는 1456년 6월 8일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문기(金文起), 박중림(朴仲林), 박쟁(朴觴), 송석동(宋石同), 윤영손(尹令孫), 허조(許 ), 이휘(李徽) 등과 함께 군기감 앞길에서 39세의 일기로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이어 부친 성승도 극형에 처해졌고, 동생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의 세 동생과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헌(憲), 택(澤) 그리고 갓난아이 등 여섯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9년(기미 己未, 숙종 肅宗 5년): 9월 11일 왕명에 의해 선생을 비롯한 육신(六臣)의 무덤이 봉축되었다.

1679년(신유 辛酉, 숙종 肅宗 7년): 9월 경외(京外)의 사림이 과천 노량강 남쪽 언덕에 사우(祠宇)를 짓고, 선생을 비롯한 여섯 선생을 받들어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1758년(신미 辛未, 영조 英祖 34년): 이조판서에 추증(追增)되고, '충문(忠文)'의 시호(詩號)가 주어졌다.



박팽년
1417(태종17)∼1456(세조2)조선 초기의 학자·충신

자는 인수(仁 ),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본관 순천(順天)·한석당(閑碩堂) 중림(中林)의 아들. 1434년(세종 16)문과에 급제,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되어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의 유명을 받아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문종을 보필,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돌아갈 때 역시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 수양대군(世祖)이 황보인·김종서와 안평대군(세종의 삼남)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 박팽년은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나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잡혀 죽었다. 이때에 함께 화를 입은 성삼문·하위지(河 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와 더불어 사육신(死六臣)이라 한다. 숙종 때 누명을 벗기고, 관작(官爵)을 복구, 시호를 내리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은 시문(詩文)에 능(能)하고 글씨도 잘써 청백리에 뽑혔다.

장계문(狀啓文)에도 신(臣)자를 쓰지 않았으며 세조(世祖)가 준 녹(綠)도 먹지 아니하였다. 한때는 광주(廣州)에 전답(田畓)이 조금 있었는데 친구가 이르기를 나라에 녹을 먹는 사람이 전답이 왜 필요 하나고 힐난 하자 곧 팔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종이 선위 했을때도 그 비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경희루에 몸을 던져 죽으려 했으나 성삼문(成三問)이 보고 급히 말리며 『지금은 우리가 살아서 상왕의 왕위(王位)을 복위(復位)토록 도모해야 하는데 공(公)이 죽으면 누가 한단 말이오 만일 일이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으리라』하여 진정 시켰다 한다. 이때 박팽년은 생각을 고쳐 뒷 일을 생각해서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취임했다. 단종의 복위 운동 실패로 끝나 죽음을 당했고 시신마저 참혹하게 갈기 갈기 찢기어 팽개쳐졌으나 선생의 충절(忠節)과 한글 창조에 이바지한 선생의 공적은 천추만대에 길이 길이 빛날 것이다.

어느날 선조(宣祖)는 조정 대신들을 모아 놓고 『옛날 박팽년(朴彭年)은 그가 천거하여 벼슬을 시켜준 친구들이 감사의 뜻으로 보내준 물건도 일체 받지 않았다 하니 그처럼 청렴 결백한 감람도 드물 것이요』라고 말했다.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王位)를 빼앗으려 함에 의분을 느껴 다음과 같은 시(詩)을 지었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인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님마다 쫓으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송죽(松竹) 같은 절개를 나타냈다.
세조(世祖)가 영상(領相)을 위한 부중(府中)의 잔치에서 박팽년(朴彭年)이 시를 지어 말하였다.(원문은 사료(使料) 참조)

조정(朝廷)의 깊은 곳에서 슬픈 음악 소리가 들리고
만사를 모두 이제와서 모르는 것 같내
버들가지는 동풍(東風)이 불어 살살거리고
꽃이 만발한 봄날은 정이 더디기만 하네
선왕의 대업을 금궤어서 빼내어
성주(聖主)의 큰 은혜는 옥배를 넘어 뜨렸네
즐겁지 않으니 무엇이 길이 즐겁지 않게 하는가
합창 소리에 취하고 포식하니 태평세월인가


박팽년(朴彭年)이 옥중에 있을때의 일이다.
김질(金瓆)이 세조(世祖)의 명(命)을 받고 술을 가지고 가서 태종(太宗)의 하여가(何如歌)로 넌지시 마음을 떠 보려 하니 그 대답으로 그의 굽힘이 없는 지조(志操)를 시(詩)로서 나타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그칠 줄이 아시랴 하였다.


이 울면서 아버지 중림(仲林)게 말하기를
『왕(王)에 충성(忠誠) 하려니 효(孝)에 어긋 난다고 말하니 중림(仲林)은 웃으며 말하기를 충성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출: 장능지」
박팽년(朴彭年)이 죽음에 이르러 임사시(臨死詩)가 있다.

격고 최인명 擊鼓 催人命
서산 일욕사 西山 日浴斜
황천 지불원 黃泉 知不遠
금야 숙수가 今夜 宿誰家


(역(譯))
뜻을 헤아려 보면
북을 치며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산에 해는 기울어 지내
황천 가는길 멀지는 않은줄 알지만
오늘밤은 누구의 집에서 잠을 자리오.
공위 육신 지수(公爲 六臣 之首)
공은 사육신의 으뜸이다.

※ 순천박씨(順天朴氏) 선조(先朝)는 자손이 저지른 잘못이 조상에서 욕이 되는 것이니 경박한 행동을 조심하며 『나』라는 존재를 조상과 연결시켜 「나」의 행동이 『나』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가문에 영광이 되기도 하고 혹은 욕 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훈(家訓)을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이라 명(命)했다.
선대(先代)부터 내려온 것이고 명(命)년대는 기록이 없다.

저서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


하위지
(고려 우왕 13년 1387 - 세조 2년 1456)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단계(丹溪) 연풍(延風) 본관(本貫)은 진주(晉州)이며 부(父)는 담(澹)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세종(世宗) 17년 생원(生員)이 되고 세종(世宗) 3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壯元) 이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世宗) 36년 집현전 교리(集賢殿 校里)가 되어 「오예의주」(五禮儀註) 상정(詳定)에 참여했다.
세종(世宗) 38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인 형(兄) 강지(綱地)의 탐간죄(貪姦罪)로 사직(辭職)했고 문종원년(文宗元年) 직(直) 집현전(集賢殿)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보좌(補座)에 앞서 신정(新定)한 「진설」(陳設)의 교정(校正)과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端宗) 2년 부제학(副制學) 예조참의(禮曹參議)등을 역임(歷任)하고 세조원년(世祖元年)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침착(沈着) 과묵(寡默)한 성격(性格)으로 집현전(集賢殿)에 있으면서 왕의 측근(側近)에서 시정(施政)을 보필(輔弼) 했으며 세조(世祖)의 간청(懇請)으로 부득이(不得已) 벼슬 하는 동안 받은 녹(祿)을 먹지 않고 別室(別室)에 저장(貯藏)해 두었다.
다음해 박팽년(朴彭年)등과 단종 복위(端宗 復位)를 꾀하다가 거사(擧事)가 실패(失敗)하자 체포(逮捕) 되어 거열형(車裂刑)에 처(處)해지고 형제제자(兄弟諸子)도 함께 죽었다.
숙종 신미(辛未)에 복관(復官)되고 영조(英祖) 무인(戊寅)에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사시(賜諡) 정유(丁酉)에 명(命) 정여(旌閭) 선산(善山)에 월암서원, 대구 낙빈서원,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 등에 제향(祭享) 능문(能文 글씨를 잘썼다)
시호(諡號)는 충열(忠烈)이다.
전(傳)하는 선생(先生)의 시(詩)가 있다.

사인증사의(謝人贈蓑衣)

남아득실고유금 男兒得失古猶今
두상분명백일임 頭上分明白日臨
지증사의응유의 持贈蓑衣鷹有意
강호연우호상심 江湖烟雨好相尋


(역(譯))
도통이를 보낸 준 것에 감사함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룰게 없고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도통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몰겠는가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는 그 참뜻을


이개
(태종(太宗) 17년 1417 - 세조(世祖) 2년 1456)

자(字)는 청보(淸甫) 백고(佰高) 호(號)는 백옥헌(白鈺軒)이며 본관(本貫)은 한산(韓山) 이며 이색(李穡)의 증손(曾孫)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세종(世宗) 18년 문과(文科)에 급제 세종 23년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차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制)에도 참여했다.
세종 29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세조 2년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이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發覺)되어 혹독(酷毒)한 고문(拷問) 끝에 죽었다.
본래(本來)에는 세조(世祖)와도 친교(親交)가 있어 진상(眞相)을 밝히도록 강요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처형(處刑) 당했다. 시문(詩文)이 청색하고 하고 글씨를 잘 썼다.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연산의 둔암서원(遯巖書院),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동학사(東鶴寺) 숙모전 영조(英祖) 34년 이조판서(吏曹判署)에 추증(追增) 시호(諡號)는 의열(義烈) 이었으나 뒤에 충각(忠簡)으로 개시(改諡)하다.

선생(先生)의 시(詩)가 전(傳)한다.

제 야(除夜)

세율영수진 歲律令垂盡
단좌부학사 端坐赴壑蛇
호아수갱루 呼兒數更漏
환부낙등화 喚婦落燈花
영야운음적 永夜雲陰積
엄풍설세사 嚴風雪勢斜
청담잉촉주 淸談仍促酒
불필아융가 不必阿戎家

- 이 개 (李 塏)


(역(譯)) 이 해도 이제는 마지막인가
세월에 쫓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네
아이를 불러 시간을 불러볼까
아내를 불러 등불을 마지막 껐네
기나긴 이밤은 왜 구름에 쌓였는가
바람결에 눈발이 날리고 있네
술잔으로 정담을 나눠 볼까
아우의 집에 갈 일이 또 없어졌네



유응부
(? - 세조 2년 1456)

자(字)는 신지(信之), 선장(善長) 호(號)는 벽량(碧梁) 본관(本貫)은 기계(杞溪)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의 한사람이다.
키가 크고 용모(容貌)가 엄정(嚴正)하며 무과(武科)에 급제 세종(世宗) 문종(文宗)의 총애(寵愛)를 받았음며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평안도 절제사(平安道 節制使)를 거쳐 세조(世祖) 원년(元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해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꾀하여 명(明)나라 대신(使臣) 초대연(招待宴)에서 별운검(別雲劍)이 되어 세조(世祖)의 살해(殺害)를 책임(責任) 졌었으나 당일(當日) 운검(雲劒)을 폐(廢)하게 되어 후일(後日)로 미루다가 김질의 배신(背信)으로 탄로(綻露)되어 잡혀서 백면선생(白面先生)들과 동모(同謀) 실패(失敗)한 것을 분(憤)히 여기면서 고문(拷問) 끝에 죽었다.
유학(儒學)에 깊었으며 궁술(弓術)에도 뛰어 났다.
숙종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대구 낙빈서원,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강령(康翎)의 충열사우(忠烈祠宇), 동학사(東鶴寺), 숭모전 등에 제향(祭享)
시호(諡號)는 충목(忠穆)이다.
시조(時調) 삼수(三首)가 전(傳)한다. 공(公)을 대표(代表)하는 일수(一首)는

위함길도 절제사(爲咸吉道 節制使)

장군지절 진벌변 將軍持節 鎭伐邊
사색진청 사졸면 沙塞塵晴 士卒眠
준마오천 시유하 駿馬五千 嘶柳下
호응삼백 좌루전 豪鷹三百 佐樓前


(역(譯))
장군의 지휘로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고
세상이 조용하니 병졸들도 잠이 들었네
준마 오천필이 버들 아래서 울고
사냥매 삼백은 루 앞에 앉아 있네



 

유성원
(? - 세조 2년 1456)

자(字)는 태초(太初) 호(號)는 낭간(琅) 본관(本貫)은 문화(文化)이며 부(父)는 사인(舍人) 사근(士根)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 세종(世宗) 16년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 다음해 저작낭(著作郞)으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 세종(世宗) 29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했다.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세종(世宗)의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세종(世宗) 32년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자 사경(司經) 수찬(修撰) 시교(詩敎)를 역임 문종원년(文宗元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단종(端宗) 9년 김종서(金宗瑞)등을 살해(殺害)하고 정권(正權)을 잡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협박(脅迫)에 못이겨 청난공신(淸難功臣)을 록훈(錄勳)하는 교서(敎書)를 썼으나 그 후(後)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세조 2년 일이 탄로(綻露)가 되자 자결(自決) 했는데 곧 책형( 刑)을 당(堂)하고 아들 귀연(貴連) 송연(松連)도 연좌(連坐) 됐다.
숙종 신미(辛未)에 복관(復官) 영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홍천(洪川)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대구 낙빈서원,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동학사(東鶴寺) 숭모전에 제향(祭享)
시호(諡號)는 절의(節義)였으나 후(後)에 충경(忠景)으로 개시(改諡)하다.
「가곡원유」(歌曲源流)에 전(傳)하는 시조일수(時調一首)가 있으니

백산공해 마천령 白山拱海 摩天嶺
흑수횡곤 두만강 黑水橫坤 豆滿江
차지이후 비기처 此地李侯 飛騎處
잉간호로 자래강 剩看胡盧 自來降


(역(驛))
바다를 끌어들인 마천령 산맥에
땅을 가로지른 두만강 물줄기어라
이곳에서 이후는 힘찬 말 달려 놓고
오랑케 항복 받던 그 모습 눈에 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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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이시간에 자판을 두드리고 계시는 아재,할배께서 바로 "작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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