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전


자는 백순(伯純)이요, 호는 경은(耕隱), 시호는 정간(靖簡)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니, 병조판서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대대로 성주(星州)에서 살았으며, 1427년(세종 9)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正言)·소격서령(昭格署令) 등을 역임한 후 거창현감(居昌縣監)에 이르렀다.

거창현감을 지낼 때 청백리로 소문이 났으나 수양대군이 1453년에 계유정난(癸庾政亂)을 일으켜서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눈이 멀고 궈가 먹었다고 핑계하며 고향에서 두문불출하고 여생을 마치었다. 1782년(정조 2)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려
(세종 2년 1420 ~ 성종 20년 1489)

자는 주옹(主翁)이요, 호는 어계(漁溪), 시호는 정절(貞節)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었다. 명망이 높았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고향의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은거(隱居)하고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내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백이산 아래에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배향(配享)되었다. 이 사당을 서산학원(西山學院)이라 사호(賜號)하였다.


원호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관란(觀瀾) 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며, 본관은 원주(原州), 별장 헌(憲)의 아들이다.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가 단종이 영월(寧越)에 쫓겨 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방속에 묻혀 살았으며, 1457(세조 3)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렀다.

그뒤 세조가 호조참의를 주겠다고 불렀으나 이를 거절 하였다. 숙종 때 그 절개를 찬양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1782(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시습
(세종 17년 1435 ~ 성종 24년 1493)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본관은 강릉이고, 고려의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며, 일성(日省)의 아들이다.

5세 때 이미 <중용 中庸><대학>에 통하여 신동(神童)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감탄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주었다.

1455년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문을 닫고 3일이나 통곡하였으며,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설잠(雪岑)이라 호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동봉(東峰)·췌세옹(贅世翁)이라고도 하였다. 양주(楊州)의 수락(水落)·수춘(壽春)의 사탄(史呑)·해상(海上)의 설악(雪岳)·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성종 때 머리를 길러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變節)하여 6신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안응세(安應世)·홍유손(洪裕孫)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율곡(李栗谷)을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伯夷)라 하였으며 집의(執義)의 벼슬을 추증, 뒤에 정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었다.


성담수
(? ~ 세조 2년 1456)

자는 미수, 호는 문두(文斗), 시호는 정숙(靖肅), 본관은 창녕, 문숙(文肅) 석용(石瑢)의 후손이고, 인재(仁齋) 용회(用晦)의 아들이며, 매죽헌(梅竹軒) 삼문(三問)의 6촌이다.

1356(세조 2)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 때 교리(校理)로 있던 아버지도 관련되어 심한 고문 끝에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후 풀려났으나 울화병으로 죽으매, 이를 본 담수는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 문두리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지낸 후 문두라 호하고, 서울에 발을 끊고 10여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그 곳에서 은거 하였다.

조카 몽정(夢井)이 경기도 안찰사가 되어 담수를 겨우 찾았을 때는 어찌나 가난한지 방안에 자리도 없었다.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으매 몽정이 돌아가서 깔 자리를 보내니 가난하고 천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죽은 뒤에 조어계(趙魚溪) 등과 같이 생육신으로 불리우고 시호를 받았다. 1782(정조 6)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남효온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며, 본관은 의령이니, 직제학 간의 증손으로 진사에 올랐다.

18세때에 소릉(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의 복구를 세조에게 상서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일찍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문인들이 큰 화가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저술을 하지 말라고 건의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며 대현의 자취를 없어지게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고, 또 야사를 지었다. 연산군때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나자, 소릉회복 상소문 때문에 남효온의 무덤을 파헤치는 화를 입었다. 정조때에 이조판서를 추중하고,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으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었다.
profile
작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이시간에 자판을 두드리고 계시는 아재,할배께서 바로 "작가"이십니다..
글들을 읽고나서 짤막한 댓글 하나씩 남겨주시면, 글쓰시는 다른 아재,할배께서도 기쁨을 느끼십니다.!

김이오.넷 (kim25.net) 홈페이지 운영자 : 시조에서 36代 , 학봉 16代   金在洙  010-9860-5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