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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안동 鶴峯 金誠一 종택

退溪학풍 이어온 항일독립운동 명문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학봉 김성일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그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최근 미국의 어느 동양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시아의 유교문화권 국가들 중에서 유교문화적 요소를 아직까지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 다음으로 일본이고 그 뒤를 중국이 따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인가? 충청이나 호남보다는 상대적으로 영남지방을 꼽을 수 있고, 더 범위를 좁히자면 안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수많은 고택과 종택들의 존재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안동 일대에 이처럼 유교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퇴계 선생의 영향이 크다. 주자성리학을 한국에 토착화시킨 인물로 볼 수 있는 퇴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속의 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

 

퇴계의 양대 제자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이 꼽힌다. 안동 일대의 명문가는 퇴계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지만, 퇴계 다음으로는 거의가 서애·학봉과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

 

 양대 제자는 개성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서애가 복잡한 현실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데 주력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면, 학봉은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가 바로 경세와 의리인데, 서애와 학봉이 각각 이를 담당했던 셈이다.  

 

또 학봉집안과 서애집안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택으로도 유명하다. 학봉집안의 고택으로는 학봉의 아버지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川前)의 대종택과 학봉 자신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한집안에 명성을 떨치는 종택이 두 채나 있는 셈이다. 

 

서애집안도 그렇다.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양진당(養眞堂)과 서애 본인의 집이었던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충효당이 있는 하회마을은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전국적으로 더 알려졌다.

 물론 한집안에 종택이 여러 개가 있는 예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 살았던 대종택이 있고, 여기서 다시 갈라져 나간 파종택(派宗宅, 소종택)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종택과 파종택 모두가 세간에 회자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학봉과 서애집안은 대종택과 파종택이 동등한 비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안동 금계마을에 자리잡은 파종택인 학봉종택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나 그리고 종택이 지닌 품격으로나 안동을 대표하는 고택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선비다. 임금 앞에서도 할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과, 임란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의 자존심과 격조 있는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중앙선 철로가 바뀐 사연  

학봉에 대한 영남 선비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중앙선 철도 노선을 우회하게 만든 사건이 그것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 노선을 처음 설계할 때, 철로가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이런 계획을 알게 된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나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설계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 ‘아라키(荒木)’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선비임을 알고 기꺼이 철도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봉 묘소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하도록 설계변경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 5개를 새로 뚫어야 했다.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난히 터널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학봉의 명성 때문이다.  

 

아무튼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만들던 1970년대도 아니고,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의 철도 노선을 바꿨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학봉 집안이 지닌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은 일제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또 학봉은 호남지역 선비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이는 호남과 인연이 별로 없었던 다른 영남출신 선비들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매우 이채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먼저 광주 무등산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 집안과의 인연을 꼽을 수 있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내앞종택’에서 잠시 소개한 바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 노인 고경명은 아들 셋 가운데 두 아들을 전쟁터로 데려가서 삼부자(三父子)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고, 셋째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안동의 학봉집안으로 보내 대를 잇도록 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경명과 학봉은 인간적인 신뢰가 깊었던 모양이다. 

 

이때 고경명의 셋째아들을 비롯한 고씨 가족 50여 명을 받아들여 수년간 보살펴준 사람이 학봉의 부인과 아들들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절박한 시기에 학봉의 가족들과 제봉의 가족들은 동고동락한 것이다.

  

학봉은 또 3년간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냄으로써 전라도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학봉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는 나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가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나주 금성산의 대곡동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景賢書院으로 개명)을 세웠다.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전까지 나주에는 서원이 없었다. 나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는 서원보다는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일대에 분포해 있는 수백여 개 누정이 말해 주는 것처럼 호남에서는 서원보다 누정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영남지역에는 서원이 발달해 있었다.

  

영남학풍의 교두보 대곡서원  

서원과 누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원에서 토론했던 주제가 주로 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누정의 주제는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이는 두 지역의 환경과도 연관이 있을 성싶다. 산이 많아 농토가 적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사색의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많고 물산(物産)이 풍부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풍요로움과 함수관계가 있는 문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아무튼 학봉이 대곡서원을 세움으로써 영남의 철학, 즉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호남의 가사문학과 영남의 퇴계철학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 바로 대곡서원이었다.

  

대곡서원에 처음 배향(配享)된 5명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의 거유들로 이른바 ‘동방오현’으로 꼽힌다. 그 얼마후 유일하게 호남출신인 기대승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또 그 100여 년 후인 1693년에는 학봉 자신이 배향 인물에 추가됨으로써 대곡서원은 영남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경상도 출신인 학봉이 객지인 전라도에서 영남학풍의 근거지인 대곡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주나씨 집안 사람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나씨들이 나주의 밑바닥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서원이 설립·운영될 수 있었던 것. 오늘날에도 학봉집안과 나주나씨 집안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16세기 후반 대곡서원 설립 당시에는 대단히 보기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퇴계학통의 正脈  

학봉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퇴계학통의 정맥(正脈)을 학봉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봉이 한 번 받았고, 그 다음으로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년)이 다시 이어받았다. 퇴계학통을 한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은 영남사회에서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동양의 정신사에서 정맥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동양의 유·불·선 삼교에서는 공통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법(傳法)을 매우 중요시한다. 법을 전한다는 것은 생명을 전하는 것이요, 죽음을 극복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스승은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므로, 자기의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전수할 수 없다. 비기자 부전(非器者 不傳;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이라고 해서, 만약에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 법을 전할 경우 여러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결국 하늘로부터 견책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제자도 스승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보면 스승이 제자를 찾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훨씬 더 크다. 스승은 제자를 알아볼 수 있지만, 제자는 스승을 알아볼 수 없다.

  

여기서 전법제자, 즉 정맥을 받은 적전제자(嫡傳弟子)가 지니는 의미가 있다. 동양의 종교와 학문은 문자나 책을 통해 전달되는 부분 외에도 스승과 제자간의 내밀한 구전심수(口傳心授;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침)를 통하여 전달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구전심수는 오직 적전제자에게만 전해지므로 그 내용은 적전제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불가에서는 적전제자에게 전법의 징표로 스승이 사용하던 의발(衣鉢)을 전수하였고, 도가에서는 문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보검(寶劍)을 전해주었다. 유가에서는 스승이 보던 책이나 서첩을 전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인 징표보다 심법(心法)을 전수받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퇴계학통의 정맥을 학봉 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은 퇴계의 정신이 학봉집안에 살아 있다는 말과도 같다.

  

퇴계의 학통이 전수된 과정을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퇴계는 학봉의 나이 29세 때인 1566년에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주자에 이르는 심학(心學)의 요체를 정리한 ‘병명(屛銘)’을 손수 써 학봉에게 주었다. 그래서 ‘병명’은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일종의 의발로 간주된다.

  

퇴계의 정맥은 학봉에게서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裁)-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유치명(柳致明)으로 전해지고, 유치명으로부터 다시 학봉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에게로 전해진다.

 

 김흥락이 퇴계학통의 정맥을 받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는 집안의 영광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임이 훨씬 무거운 자리이기도 했다. 퇴계의 적전제자이자 동시에 학봉집안의 종손이라는 영광 뒤에는 그에 필적하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위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책임 없는 권위는 성립될 수 없다.  

 

왜경에게 무릎꿇린 치욕  

1800년대 후반 김흥락이 안동 일대에서 지녔던 권위는 대단했다. 그 상징적인 예를 보자. 1890년 안동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읍민들을 착취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김흥락의 중재였다. 김흥락은 유림사회와 민중들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락이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한마디 하니, 운집해 있던 읍민들이 “그 나으리께서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만 집으로 가세나!”하고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김흥락이 지닌 이러한 권위는 구한말 일제가 들어오면서 참담한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 굴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사들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인구비율로 볼 때 전국에서 항일지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1896년 7월22일 학봉집안과 김흥락이 겪었던 굴욕의 한 대목은 이렇다.  

 

“김회락 의병포대장이 지휘하는 100여 명의 의병이 안동시 북후면 옹천에서 일본군에 패전하였다. 김회락 대장은 간신히 도망하여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학봉종택 안방 다락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결박되었다. 이에 화가 난 왜경은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홍락, 김익모 등 평소에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어른 10명을 포박하여 종가 큰마당에 꿇어앉히고, 살림을 전부 마당에 꺼내어 금비녀 등 쓸만한 물건은 전부 가져가고 큰살림은 못쓰게 부수는 등 종가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한참 동안 분탕질을 한 후 다른 분은 풀어놓고 김회락 대장과 같이 활동한 김진의 두 분을 안동경찰서(안동관찰부兵隊)로 압송하였다. 김진의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김회락 대장은 왜경의 총살 위협에도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報:원수를 갚다)를 가르쳐라!’고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소리치며 당당하게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어 의병대장의 처절한 일생을 마감하였다.”(‘西山 金興洛의 독립운동과 그 餘脈’)  

 

의병대장 김회락은 김흥락과 사촌간이다. 왜병을 피해 사촌형님집이자 종가인 학봉종택에 은신해 있다가 벌어진 일이다. 안동의 어른이던 김흥락은 왜경에게 포박당해 자기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수모를 겪었고 사촌동생인 김회락은 총에 맞아 죽어야만 했다. 이는 개인과 집안으로 볼 때는 수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존망을 염려했던 영남의 명문선비 집안에서 치러야만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즉 사회적 책임으로 볼 수도 있다.

 

안동 일대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김흥락이 왜경에게 포박당해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사건은 안동의 유림들과 학봉집안을 포함한 의성김씨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그 치욕은 안동유림들과 학봉 후손들을 독립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흥락의 제자들 명단을 기록해 놓은 ‘보인계첩((輔仁帖)’이라는 문건을 보면, 서산의 제자는 모두 707명이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만 해도 60명에 이른다. 훈장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산의 제자 가운데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석주 이상룡(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일송 김동삼(국민대표회의 의장), 기암 이중업(파리장서 주도), 성재 권상익(유림단 독립청원서 사건), 공산 송준필(파리장서 주도), 대개 이승희(만주 독립군), 백하 김대락(만주 독립군), 소창 김원식(만주 정의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안동일대에 거주하는 의성김씨들 중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은 27명인데, 이중 학봉의 후손이 11명이나 된다. 학봉집안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로 보면 안동이 양반동네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에 합당하는 사회적 책임,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치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락호로 위장해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1세 때에 이강계(李康秊) 의병진(義兵陳)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등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이다.

 

 김용환의 항일운동 방법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재산인 전답 700두락 18만평(현재 시가로 180억원)을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이 났었다. 명문가 종손이 되어 가지고 집안 살림을 망해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학봉 종손 김용환’의 이름 석자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는 김용환의 철저한 위장했다.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하였던 것인데, 얼마나 완벽했던지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손이 진짜 노름꾼인 줄 알고 원망이 자자했다. 오죽했으면 ‘양반동네 소동기’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학봉 종손인 김용환을 꼽았을까.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야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냈던 그의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 의하여 드러났다. 그는 1946년 임종에 이르러서도 끝내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죽었지만, 근래에 독립운동을 했던 자료와 증거들이 발견됨으로써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받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한 많은 소회(所懷)를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학봉 종손이 파락호로 위장하면서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외동딸 시집갈 때 필요한 장롱 살 돈마저 써버려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는 읽은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 돈이 노름해서 탕진한 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보니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던 딸의 입장에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던 김용환의 그 결의와 각오가 놀라울 뿐이다.  

 

짐작하건대 그 결심은 그가 10세 때 하늘같이 여겼던 조부가 왜경에게 수모를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千年不敗之地의 땅 검재  

이제 학봉고택의 지세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다보면 서안동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거기서 안동 시내쪽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의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계(金溪)마을이 나온다. 금계의 순수 우리말 표현은 ‘검재’다. 학봉종택은 이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의 기록인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검재는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1000년 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로 소개되어 있다. 풍수가에서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 180년 동안 패하지 않는 땅)’라는 표현은 가끔 쓰지만, 천년불패지지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을 만큼 엄청난 말이다.

  

그러니 학봉종택이 천년불패지지인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일단 주목해야 한다. 불패(不敗)란 전쟁, 기근, 전염병과 같은 삼재(三災; 3가지 재난)가 별로 없다는 말과도 같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살기 좋은 동네다. 검재의 풍수가 어떠하길래 고인들은 이처럼 찬탄을 금치 못했을까.

  

검재 지역 산세의 특징은 한마디로 부드러움이다. 동양의 현자들은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동(動)보다는 정(靜)을 중시했다. 부드러움과 정이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늘상 사는 사람들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겠지만, 외부인이 처음 검재마을에 들어서면 100m 내외의 야트막한 동산들이 주조를 이루는 산세에서 편안함과 부드러움을 인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인 학가산(鶴駕山), 천등산(天燈山), 조골산(鳥骨山)의 줄기들이 내려와 기세가 순해지면서 상산(商山), 주봉산(住鳳山)을 형성하고 다시 이 산세가 들판쪽으로 내려오면서 더욱 순해져서 야트막한 동산들을 형성해 놓은 것이다.

  

나는 이곳 검재의 산세를 보면서 몇 년 전 답사한 중국의 장시성(江西省) 산세를 연상했다. 장시성은 중국 풍수의 양대 파벌인 형기파(形氣派)와 이기파(理氣派) 가운데 형기파의 본향이다.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듯이 산의 관상을 중시하는 입장이 형기파라면, 산의 사주(四柱)를 중시하는 입장이 이기파다.  

 

형기파가 산의 관상을 볼 때 포인트로 삼는 부분은 전체적인 형태다. 즉 산세가 원만하고 부드러운가를 먼저 본다는 말이다. 산이 높지 않고 둥글둥글하고 바위산이 없을 때 부드럽다고 한다. 필자는 당시 장시성의 산세 대부분이 바위 절벽이 없이 둥글둥글한 금체(金體) 형세를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과연 형기파가 태동할 만한 산세구나! 하고 말이다.  

 

안동의 검재 산세가 이와 흡사하다. 오히려 장시성 산세보다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장시성보다 산들이 더 낮고 완만해서 산을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준다. 살기(殺氣)도 보이지 않는다. 살기가 없는 땅에서는 살생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적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검재는 문사(文士)가 살기에는 최적의 산세가 아닌가 싶다. 문사는 거친 부분을 다듬어 부드러움으로 바꾸어주는 사람이다. 거침에서 부드러움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바로 문명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거친 사람이 다듬어져서 부드러워질 때 그 강함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선비는 외유내강을 전범으로 삼은 것 아닌가.

  

그러니 검재는 외유내강의 문사를 길러내는 데 있어서 최적의 산세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평소에는 지극히 예(禮)를 중시하는 선비면서도, 굴욕에는 참지 못하고 독립운동으로 나갔던 검재사람들의 기질은 이런 산세와 무관하지 않다.

 

검재 산세의 장점 중 다른 하나는 물이 완만하게 흐른다는 점이다. 냇물의 물살이 급하게 흐르면 우선 물속의 산소 함유량이 적어서 생태학적으로 좋지 않고, 급류가 흐르면서 그 물살을 따라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기운이 모이지 않고 흩어진다. 그래서 한일(一)자나 직선으로 흐르는 물길보다는 에스자나 갈지자로 흐르는 물을 풍수가에서 선호하는 것이다. 검재를 흐르는 개천들의 물길은 에스자 형태로 완만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검재의 지형이 경사가 적은 평지고 개천이 동네마다 흘러 수량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안동대 이효걸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검재의 냇물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가뭄 피해를 비교적 덜 받으므로 검재마을에는 저수지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낙동강 본류와 개활지(開豁地; 앞이 탁 트인 너른 땅)를 끼고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수해의 피해도 크지 않다고 한다. 필요한 양의 물을 주산인 주봉산과 상산에서 일정하게 공급받으면서, 물을 빨리 지나가게 하지도 않고 머무르게 하지도 않는 것이 검재마을의 수세(水勢)라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가 중요하고 농사에서는 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이 적당한 동네인 검재는 농사짓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셈이다.  

 

조선후기의 상류층 주택  

학봉종택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모습이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을 모두 합쳐 90여 칸, 2000평 대지의 규모다.

 

 운장각에는 총 1만500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503점은 문화재로 지정됐다. 민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규모로는 국내 최대다. 여기서 필자의 주의를 끈 유물은 학봉이 사용하던 안경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이라고 하는데, 학봉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안경테는 거북껍질(龜甲)로 되어 있다.

 

현재 건물의 좌향은 서남향의 간좌(艮坐)다. 영남지역의 명문부가(名門富家)에선 흥미롭게도 간좌 집이 많이 발견된다. 학봉 생존 당시에는 간좌인 이 터에 집을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고 습기가 많아서 1762년에 지금 위치에서 100m 가량 떨어진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해좌(亥坐)의 종택을 지어 1960년대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4년에 원래의 간좌 자리로 다시 건물을 뜯어 이사온 것이다.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집 터를 2m 정도 흙으로 돋운 다음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집 뒤의 내룡은 산이 아니라 작은 동산에 가까울 정도로 아담하고 부드럽다. 태조산인 천등산에서 20리를 굽이쳐 내려온 맥이라고 한다. 또 집앞의 안산도 둥글둥글한 금체 형태의 작은 동산들로 형성되어 있다. 이 봉우리들은 노적봉으로서 쌀과 재산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소계서당이 있는 해좌의 구종택과 간좌의 현종택은 풍수상에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해좌 터는 멀리 조산에 뚜렷한 모습의 문필봉이 좋게 보인다. 문필봉은 학자가 살기 좋은 집터다. 반면에 수구가 벌어져 있고 물이 집터를 감아 돌지 않고 쭉 뻗어나가는 형세다. 즉 해좌 터는 문필봉이 장점인 반면 수구와 물의 흐름이 약점이다. 현재 종택인 간좌는 문필봉이 없는 대신 물의 흐름이 집을 감싸고 흘러서 좋고, 안대도 노적봉이라 재물이 모이는 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각기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것이다. 어느 터를 택할 것인가는 종택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학봉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대에 이르러 독립운동 군자금을 대느라고 이 집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다 딸만 하나 있었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 돈도 떨어진 데다 아들도 없다는 것은 수백년간 명맥을 이어온 학봉종가 역사에서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학봉종가를 보종(保宗)할 것인가? 먼저 대를 잇기 위해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시급했다. 학봉집안은 워낙 손이 귀해서 김용환도 양자로 들어온 종손이다. 전체 문중회의를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검재에서 100리 정도 떨어진 지례(知禮)라는 곳에 살고 있는 김시인(金時寅)이 종손으로서의 여러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양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물론 양자 결정에는 종손인 김용환의 생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문제는 김시인의 생가에서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다. 살림도 완전히 거덜난 상태에서 종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가쪽에서는 완강하게 양자를 거절했던 것이다.

 

 

양자로 종손 잇기 작전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전체 문중사람들이 100리나 떨어진 지례의 생가에 가서 간청하였다. 아예 생가 인근마을에 집을 한 채 얻어 10명씩 조를 짜 생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과 간청을 반복했다. 마치 사극에서 나오는 석고대죄(席藁待罪)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7개월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끈질긴 설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문중사람들은 보종을 위해서는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들어온 종손이 14대 김시인이다. 대개 양자로 들이는 나이는 10세 전후 또는 총각 때가 상례인데 김시인의 경우는 29세의 적잖은 나이에 양자가 됐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김시인은 이미 결혼해서 아들을 2명이나 둔 상태였다. 이처럼 처자식까지 데리고 온 양자를 일컬어 안동지역에서는 ‘둥지리’ 양자라고 부른다. 둥지를 통째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현 종손인 김시인의 나이가 올해 85세고 그가 학봉종택에 양자로 들어온 해는 1946년이다. 이때 양자로 와보니까 집에는 숟가락 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정도로 살림이 궁색했다고 한다.

  

그렇게 퇴색한 종가를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모여드는 문중의 중심지로 다시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 바로 김시인이다. 80대 중반의 고령인데도 꼿꼿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 쏘아보는 듯한 안광이 상대를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像)의 기풍을 지닌 인물이다.

 

 종가를 다시 일으키는 과정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14대 종부인 조필남(趙畢男) 할머니다. 타협을 모르는 칼 같은 남인(南人)이라고 해서 ‘검남(劍南)’으로 알려진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집안이 친정이다. 명문가의 딸로서 가사 외우기를 즐겨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모모한 집안에 보내는 사돈지를 써달라는 부탁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국량이 크고 성품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지혜가 뛰어난 종부의 전형이다.

  

14대 종부는 종가살림이 어려웠어도 찾아오는 문중 사람들 누구에게나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려고 애썼다.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줄 게 없으면 하다못해 호박 한 덩어리라도 손에 쥐어 보내곤 했다. 종부를 접해본 지손(支孫)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종부의 따듯한 인간미에 감동해서 종가를 보존하는 보종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조씨 할머니가 작고한 지난 1993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대구 시내의 꽃가게에 꽃이 모두 동났다. 인구 300만 명이 사는 대도시에서 꽃가게가 한두 군데도 아닐 테고, 더군다나 그때가 특별한 기념일도 아닌데 꽃이 다 팔린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구 지역신문의 기자가 그 원인을 조사했다. 그 결과 안동의 어느 댁 종부의 부음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 더 깊이 추적해 보니 학봉종가댁이라는 게 밝혀졌다. 조씨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까운 안동은 물론이고 멀리 대구의 꽃가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던 셈이다. 학봉가의 종부인 조씨 할머니의 덕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대구 매일신문 기자는 신문에 ‘종부(宗婦) 시리즈’를 기획 연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종가 하면 으레 남자들인 종손에게만 초점을 두었는데, 그 배후에서 묵묵히 종가를 지탱하는 종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존중받는 종부의 권위

 실제로 학봉종가에서 종부의 권위는 존중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종가 사당에 설차례를 지낸 후 이루어지는 신년 세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배는 종가 안채의 마루에서 이루어진다. 학봉의 후손들 가운데 나이든 연장자 100여 명이 종가에 찾아와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대개 60, 70대의 갓 쓴 노인들이, 그중에는 종부보다 20년 연상인 노인들도 나이에 상관없이 정초에는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물론 종부도 같이 절을 하는 맞세배 형식이지만, 100여 명의 갓을 쓴 노인들이 대청마루에 줄 맞추어 앉아서 종부 한 사람만을 상대로 큰절을 하는 풍습이 학봉종택에서는 대대로 내려온다.  

 

문중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도 종부인 조씨 할머니의 영향력도 컸다. 문중 남자들이 모여 문회(門會)를 할 때,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바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종부가 몇몇 사람을 불러내어 이런 식으로 하였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개진한다. 종부의 의견이 논의과정에 전달되면 종부의 의견대로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는 것이 조씨 할머니의 3남인 김종성(金鍾聲·50)씨의 전언이다.  

 

14대 종손 김시인과 조씨 부인은 3남3녀를 두었다. 차종손인 장남은 김종길(金鍾吉·60)씨로 삼보컴퓨터 사장, 나래이동통신 사장, 인터넷 기업인 두루넷 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삼보컴퓨터 부회장으로 있다. 차남 김종필(金鍾弼·58)씨는 감사원 부이사관으로 근무하고 있고, 삼남인 김종성씨는 LG전자 상무로 근무하고 있다. 또 큰딸은 대구 장씨집안으로 출가했고, 둘째딸은 원주 변씨종가로 출가하여 교편생활을 하고 있고, 셋째딸은 영양남씨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종택 사랑채에서 차종손인 김종길씨를 만나보았다. 그는 TV 프로인 ‘성공시대’에 몇 달전 출연한 바 있고, 동탑산업훈장과 올해의 정보통신인상 등을 수상해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된 ‘유명한’ 인물이다. 주변의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업 CEO 중에서 최고의 CEO로 선정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만큼 친화력과 리더십을 갖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학봉종가의 차종손으로서 첨단 인터넷사업을 주로 해왔는데, 전통과 첨단과의 만남에서 오는 갈등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성공시대 프로에서 저의 캐릭터를 ‘갓을 쓴 인터넷 사업가’라고 표현하더군요. 갓과 인터넷이 만나다 보니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장점은 직원들과 무난한 인간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입니다. 저는 종손으로 성장하다보니 항상 집안의 여러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종손으로서 굉장한 우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학봉집안이라는 공동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의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장생활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갈등이 된 점은 인터넷이 외래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우리 전통을 확고히 알고 주체의식을 가지고서 외래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전혀 걸러지지 않은 서양문화를 젊은 사람들이 무조건 추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서 내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학봉후손들의 종손 키우기  

―집안사람들 이야기로는 보종계(保宗契)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보종계가 어떤 계입니까?  

 

“제가 고려대학교에 입학할 즈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학봉후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종손을 대학에 가게끔 도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계를 조직하여 십시일반으로 돈을 조금씩 걷어서 제 등록금과 학비를 대줬습니다. 대략 300∼400가구에서 돈을 거두었습니다. 그걸 ‘보종계’라고 부릅니다.

 

 저희 집안은 보종의식이 강해서 지손들이 종가 농사도 대신 지어주고, 겨울철엔 땔감도 해다 줍니다. 명절 제사 때는 종가집 마당의 잔디도 깎아주고, 김장 때는 채소까지 그냥 갖다줍니다. 이렇게 종가에 대한 보호의식이 특별합니다.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일제 때 조부(13대 김용환)께서 종가를 세 번이나 다른 사람에게 팔았는데, 그때마다 지손들이 돈을 걷어 다시 구입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혹시 문중사람들이 종가에 잠깐 들를 때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아무리 바빠도 제가 직접 커피를 탑니다. 천분의 일이라도 갚아야죠.”

  

―부인인 이점숙 여사는 혹시 종부 역할을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습니까?

  

“집사람은 퇴계종가의 종녀입니다. 처녀 때부터 종가 분위기에서 자라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셈입니다. 저희 부부가 서울에 살고 있지만 한달에 보름은 안동에 내려옵니다. 손님들 오면 밥상 차리고 접대해야 합니다. 집사람은 서울에 있을 때는 사장 부인이지만, 안동에 내려오면 손님들 밥상 들고 직접 날라야 합니다. 하루 평균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대략 50명은 될 겁니다. 밥상을 다 못차려 드릴 때는 차라도 한 잔 대접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퇴계의 종녀인 이점숙 여사는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병명’에 3년 동안 한땀 한땀 수를 놓아 12폭 병풍으로 만들어놓았다. 학봉종택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이 병풍을 사용한다고 한다.  

 

차종손인 김종길씨는 딸만 넷이고 아들이 없다. 그래서 삼남 김종성씨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장남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일 때는 보통 차남의 아들을 들이는 것이 관례다. 이 관례대로라면 차남인 김종필씨의 아들이 양자로 가야 하고, 김종필씨가 아들을 하나밖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삼남인 김종성씨의 아들이 김종필씨의 양자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절차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두 아들을 둔 김종성씨의 장남이 곧바로 종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종성씨의 아들이 양자로 가게 된 다른 이유도 있다. 14대 종손(김시인)이 양자로 오기 전에 장남 김종길과 차남 김종필은 이미 지례에서 출생했고 검재종택 양자로 들어온 후에 출산한 아들이 김종성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삼남은 순수 검재종택 산(産)이므로, 그 김종성의 아들이 양자로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문중어른들의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1000명 이상 참여하는 집안 행사  

5세 때 양자로 들어간 김종성의 장남은 김형호(金亨淏·21)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서울의 생부 집에서 살면서 양부(김종길)집을 왔다갔다 했지만, 대학만큼은 안동에 내려와 안동대학 국학부에 재학하고 있다. 일종의 종손수업을 위해서 서울이 아닌 안동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종가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임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삼남 김종성씨는 집안의 역사와 문중의 대소사에 관한 일들을 빠짐없이 꿰뚫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척척박사다. 집안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다는 증거다. 관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진지하고 신중한 학자풍이다. 그를 인터뷰했다 

 

―큰아들을 양자로 보냈는데 혹시 섭섭한 마음은 없습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의 친척들은 저를 보고 ‘대원군’이라고 농담도 합니다. 저는 검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종가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집에 찾아오는 빈객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영남 일대 종가에서 저희집같이 손님을 많이 치르는 집도 드물 겁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00년 전 11대 종손인 서산선생의 장례식 때 각지에서 모여든 조문객이 40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4000명을 저희 집을 비롯해 검재의 학봉후손들 집에 분산시켜 전부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때 조문객이 가지고 온 대구포가 얼마나 많은지 고방(庫房)에 한가득 찼다고 합니다.

  

1987년 운장각 준공식 때, 그리고 1995년 서산선생과 조부(김용환)의 독립훈장 추서를 사당에 고유(告由)할 때도 손님이 1000명 정도 왔습니다. 1999년 11월 서산선생 서거 100주기 추모회와 2000년 11월 추모강연회 때도 1000여 명이 모이셨습니다. 저희 집에서 행사를 할 때는 보통 평균 1000명 이상 참석합니다.  

 

지난 퇴계 탄신 500주년 학술회의에 참석한 외국 손님들 몇 분은 호텔에 가지 않고 저희 집에서 숙식을 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다닐 때인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채엔 항상 10∼15명의 과객들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무전취식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접할 수 없었죠.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면서 과객들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도로가 많이 생기면서 전통문화가 바뀐 것이죠.”

 

 현재의 학봉집안 후손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호면(金鎬冕·전 국영유리부회장·川上文化保存會 대표), 김원환(金元煥·초대 경찰청장), 김식현(金植鉉·전 서울대 경영대학장), 김대환(金大煥·서울고등법원장), 김명준(金明俊·장기신용카드 사장), 김시학(金時學·전 청구그룹 부회장), 김도현(金道鉉·전 문화체육부 차관), 김근환(金根煥·안동시의회 의장)씨 등이 명망인사로 꼽힌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부분은 이 집안에서는 유난히 초·중·고 교장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배출된 교장만 무려 30여 명에 달한다.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선비집안 후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직업이 학교 선생님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학봉종가는 과거 완료형의 종가가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역사가 진행되는 현재진행형의 종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접빈객이 가능한 명문가로 400년 동안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명가는 인물을 낳고 인물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 보다.

출처 : [기타]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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