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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대구종친회(會長 金敬植)이사 및 회장단에서는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경기도 연천군 고량포리 휴전선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敬順王陵』을 찾아 헌배
(獻盃)하였으며
이날 대종회 김규철 사무총장님과 김진춘 국장님이 합류하시어 안내를 해주시고
함께 참배하였습니다.
1. 일 시 : 2008. 10. 11(日) 07:00 대구어린이회관 앞 출발
2. 장 소 : 京畿道 漣川郡 長南面 高浪浦里 山18∼1, 山18∼2
성거산(聖居山)아래 화장산(花藏山) 경순왕릉
3. 참 석 : 45명(의성김씨대구종친회 이사 및 회장단)
☞ 敬順大王 影幀
☞ 경순대왕은
신라대보공(大輔公)김알지(金閼智)29대손으로(誕生年 未祥) 휘(諱)는 부(傅),
호(號)는 경순(敬順 : 應天撫運之敬 應時率德之順)이고 父는 이손(伊飡)효종(孝宗)이며
母는 계아태후(桂娥太后)이시다.
서기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살해되자 31세의
보령(寶齡)으로 신라 제56대 왕위에 오르셨다.
나라 안으로는 영웅(英雄)들이 각 지방을 서로 차지하려고 세력을 확장하여 국력
이 쇠퇴해지고 북쪽으로는 고려가 크게 세력을 떨치고 남쪽으로는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약탈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백성들에게 더 이상의 害(肝腦塗地 : 간
과뇌가 진흙에 범벅이됨)가 되게는 할수 없다며 태자(麻衣太子)의 극구 반대에도 뜻을 굽히시지 아니하고 935.12월 재위 9년만에 고려에 손국(遜國)하시니 신라
천년사직(千年社稷)이 56왕 992년만에 종언(終焉)을 하였다.
978.4.4 開城 유화궁에서 승하하시니 향년 82세이시다. 비보(悲報)를 접한 신라
유민 수만명이 등에 침구와 양식을지고 경순왕의 상여를 모시고 경주로 가고자 도성을 떠나니 텅빈 도성을 본 고려 조정에서는 놀라 왕의 구(柩)를 도성백리지외불거(都城百里之外不居 : 왕의 시신은 도성 백리밖을 못간다 )라 하여 군사가 막아
고랑포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이곳 성거산(聖居山) 줄기의 화장룡(花藏龍) 계좌(癸坐)에 장사 하였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소원왕후(昭元王后) 朴氏로 계림군(鷄林君) 박광우(朴光雨)의 따님으로 太子 일(鎰),황(滉),명종(鳴鍾)등 3남1여를 낳으셨고 낙랑공주(樂浪公州) 王氏(왕건의 딸)는 은설(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등
5형제와 2여를 두셨으니 낙랑공주께서 금강산(金剛山)돈도암(頓道庵)으로 입산
다시 순흥안씨(順興安氏)를 맞아 9남 덕지(德摯)를 낳아서 9남3여 이시다.
☞ 경순왕릉
능호(陵號)는 단릉(湍陵)으로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대왕례(大王禮)로 인산(因山)
이곳에 릉(陵)을 조성 하였다.
임진왜란이후 실전(失傳) 되었던 것 을 朝鮮朝 1727년 (英祖 3년)에 후손 김굉(金宏:안동인)이 『경순대왕장지』(敬順大王藏地)가 각자(刻字)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1747년(영조 23)에 영역(瑩域)을 찾아 영조대왕께 수치소(修治疏)를
올려 대왕께서는 김성운(金聖運 : 江原.忠淸監司), 김응호(金應豪 : 僉正)에게 릉
을 봉축(奉築)케하고 장단부사(長湍府使) 심봉징(沈鳳徵)에게 치제(致祭)하게하여
매년 3.1과 10.1 춘추향사(春秋享祀)를 올리고 관군(官軍)이 릉을 수호(守護)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다시 릉을 실전(失傳)하여던 것 을 1973년도 육군 제25사단 소속 여길도 대위가 휴전선내 잡초 제거중 릉비(陵碑)를 발견하여 현재는 연천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세워진 경순왕릉 안내판
주차장에 세워진 경순대왕릉 안내판을 보고계시는 종친회 회원님들
경순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비각내 보존되여 있으며 10여字가 판독되고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함
연천군에서 파견된 문화해설사의 경순왕릉에 대한 설명
연천군에서 파견된 문화해설사의 경순왕릉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고 계시는 대구종친회원님들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이신 김시황교수님은 제일먼저 도포에 유건을 갖추어 참배준비중
대구종친회 김시철이사님은 신라문화보존회에서 발간한 경순왕릉 안내책자를 열심히 보고계시며
휴대폰으로 사진도 촬영하고 열심히 문화해설사의 해설도 경청하고
의성김씨 송호공파(金漢哲先祖 후손모임) 김영규회장님도 경청중 (우측에서 두번째)
문화해설사의 해설은 계속 진행되고
제단앞에 제수를 진설하고 참배 준비중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 각인된 비가 한국전쟁때 맞은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祭需 陳設中
담소중(오른쪽으로 부터 김시철, 김도구, 김해대)
2009.07.25 22:09:16
감악산(紺岳山)
멀리 보이는것이 감악산이다 (경기도 오악중 하나 : 개성의 송악, 안양의 관악, 포천의 운악, 가평의 화악, 파주의 감악)
감악산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소재한 산으로 높이가 675m이며
고려 충선왕 3년 4월에 지중문하사(知中門下事) 민 유(閔 儒) 와 前 소윤(少尹) 김서지(金瑞芝 : 의성김씨 11世)선조께서
감악산에 제사를 지내려가다가 장단진(長端津 : 頭只津) 나룻터에서 배가 파선되여 돌아가셨으며 시신을 찾지 못하여
초혼장으로 장례를 지냈다.
이 사건으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방우정(方于禎)이 제사를 지내지 말것을 임금에게 상소하여 일시 중단한바 있음.
김서지선조는 벼슬이 조헌대부 내영고 소윤이시며 부인은 장사유씨 이시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29년 1303(癸卯年) 에 흥안도호부사(興安都護副使)를 지내셨고 청렴하고 정직한것으로 유명하시다
충렬왕 29년 6월에
아전(邑吏) 배도(裵度)가 왕의 총희(寵姬 : 왕에게 특별히 사랑받는여자) 봉지련(鳳池蓮)과 짜고 왕에게 호소하여
김서지공을 모함하여 파직시키고 그 집을 적몰(籍沒) 하였으나
나중에 거짓이 발각되여 일당이 주살되였고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가 되셨다.
경순왕릉 참배를 마치고 귀향길에 두지진을 지나 멀리 감악산이 보여 선조 소윤공과 관련이 있으므로 버스안에서 한컷
찍어 사적과 함께 소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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