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부(金光富) 고려[ ?~1379 (?~우왕 5) ]때의 무신, 호 남파(南坡),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격퇴의 공으로 1363년 2등공신이 되었고,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가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물리쳤으며, 그 뒤 계림윤(鷄林尹)을 거쳐 1379년(우왕 5)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가 되어 단계(丹溪)· 거창(居昌)·야로(冶爐)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에 칩입한 외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
김 로(金 路) 남파(南坡) 광부(光富)의 아들 호는 석포(石圃) 고려의 문신. 문과에 급제하여 사농경(司農卿)의 벼슬을 지냈고 조선조의 개국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 되었으나 불응하였고, 후에 호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김 훤(金 玗)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본관 : 의성, 별칭 : 자 용회(用晦), 활동분야 : 행정, 서예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1269년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우자, 원나라 왕이 원나라에 있는 세자 심(諶:忠烈王)을 동안공(東安公)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 임연 일당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왕에게, 만일 세자가 공(公)으로 책봉되면 국내 민심이 임연에게 기울어진다고 주장, 그 계획을 중지시켰다. 1270년 금주방어사로 있을 때, 밀성(密城) 사람 방보(方甫)가 난을 일으켜 진도의 삼별초와 호응하려 하였다. 경주판관 엄수안(嚴守安), 안렴사(按廉使) 이숙진(李淑眞)과 함께 이를 토벌하니, 적의 무리는 방보의 목을 베고 항복, 난이 평정되었다. 또, 삼별초의 잔적이 경상도에 침입하는 것을 막았고, 그 공으로 예부낭중(禮部郞中), 뒤에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다. 275년(충렬왕 1) 총랑(總郞)에서 전라도부 부사(夫使)가 되어 부임하던 중, 전라도안찰사 노경륜(盧景綸)이 청호역(菁好驛)에서 서울에 보내는 많은 내선(內膳)이 사선(私膳)인 것을 보고 몰수하여 국고에 바쳤다. 밀직학사(密直學士) 등 요직을 거친 뒤 충선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시종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무고를 당하자, 자청하여 귀국 ·사직하였다가 뒤에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김개물(金開物) 1273(원종 14)∼1327(충숙왕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초명은 서정(瑞廷), 자는 원구(元龜). 아버지는 정당문학 훤(#훤06)이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세자 때부터 친분이 있던 충선왕이 즉위하자 감찰사로 발탁되었으며, 전부시승(典符寺丞)으로 전임하였다. 이때 내부령 강융(姜融)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였다가 그의 참소로 송가도(松加島)에 유배되었다. 석방된 뒤 지합주사(知陜州事)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다시 자연도(紫燕島)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뒤 15년 동안 한거하면서 시(詩)짓기를 일삼다가, 1325년 사헌지평(司憲持平)에 이르러 사임하였다.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였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남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지켰으며, 대간을 지낼 때는 쟁신(錚臣)의 기풍이 있었다
김거두(金居斗) 高麗朝(고려조)에 工曹 典書(공조전서)를 지냈으며, 「三國史記(삼국사기)」 후기 跋文(발문)을 썼다.
김거익(金居翼) 김거익의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강직함이 남달라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태조와 절친한 사이였으나 고려 왕조가 망하자 부여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우의정(右議政)으로 초빙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다.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에 있는데 고려말의 문신 김거익(金居翼)의 무덤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정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112호 지정연도 : 1984년 5월 17일 소장 : 의성김씨 종중/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 76
김 연(金 衍) 시호는 文忠(문충). 고려 때 판문하시중 군국평장사를 역임했다
김 옥(金 玉) 고려 시대에 左司議(좌사의)를 지냈으며 正議大夫(정의대부)에 이르렀다.
김현주(金玄柱) 옥(玉)의아들, 시호는 文肅(문숙). 贊成司(찬성사)·藝文館 大提學(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三重大匡(삼중대광)·匡靖大夫(광정 대부)에 이르렀다.
김남보(金南寶) 號(호)는 月村(월촌), 諡號(시호)는 文敏(문민), 高麗朝(고려조) 때 版圖判書(판도판서)를 거쳐 朝鮮朝(조선조)에 吏曹 判書(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었다.
김을방(金乙邦) 號(호)는 草堂(초당), 諡號(시호)는 靖節(정절), 고려 생원문과에 급제하여 奉順大夫(봉순대부)·右衛保勝郞將校贊(우위보승랑장찬)을 지냈다. 朝鮮朝(조선조)에서 吏曹 判書(이조판서)를 除授(제수)하였으나, 忠臣不事二君(충신불사이군)이란 일념으로 不取(불취)하였다.
김문부(金文富) 경순왕의 제5자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후손 용주(龍珠)의 7세손이다. 금산(金山) 김씨의 시조. 그는 고려조에 원외랑(員外郞)을 역임, 후손들이 본관을 금산(金山)이라 했다.
김 말(金末) 1383(우왕 9)∼1464(세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간지(幹之) 1415년(태종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1427년(세종 9)에 백언(白彦)의 청에 의해 백춘(白春)·박진(朴眞)과 함께 부사정(副司正)으로 승급했다. 1449년 사성이 되었는데, 대사성 김반(金泮), 겸사성 윤상(尹祥)과 경서(經書)의 이동(異同)에 대해 논쟁하다가 김반은 파직되고, 그는 종학으로 옮겨졌다. 1451년(문종 1)에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고, 1453년(단종 1)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었다가, 1456년(세조 2) 예문제학으로 옮겼다. 1457년에는 중추원부사로 승진하고, 1462년에는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경사에 박통하고, 또한 성리학에도 정통하였다. 당시 후진의 교육과 경학의 발전에 공로가 컸으므로 김구(金鉤)·김반과 더불어 ‘삼김(三金)’ 또는 ‘경학삼김(經學三金)’ 혹은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 일컬었다. 성질이 굳고 정확하며 몸가짐이 방정하였다. 당시 조정의 많은 儒士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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