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高麗時代)

김녹광(金祿光) : 광주 김씨로 분적
    김   석(金   錫: 義城金氏의 시조)의 6세손 언미(彦美)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236년(고종23) 상장군으로서 몽고군을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의성김씨 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였다.
그는 1236년(고려 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시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가 봉군(封君)된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문호(門戶)를 열었으며, 녹광(祿光)의 아들 굉이 감찰 어사(監察御使)를 지내고, 손자 훤(호는 둔촌, 감찰 어사 굉의 아들)은 당대의 명신(名臣)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다.
 

김용비(金龍庇)
    고려개국(高麗開國)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 김씨는 8세손 공우(公遇)의 아들대(代)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다.  장자(長子)인
김용비(金龍庇)  : 태자 첨사(太子諂事 :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 고려조 용비(龍庇)(구세손(九世孫))는 김자광록대부태자(金紫光祿大夫太子) 첨사(詹事)인데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高麗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   습봉의성군(襲封義城君)하여 의성읍인(義城邑人)이 대공덕(大功德)을 찬양(讚揚)하여 진민사(鎭民詞)를 세워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봉행(奉行)하였다가 그 후(後) 본손(本孫)이 인수(引受)하여 오토산(五土山) 묘하(墓下)에 묘우(廟宇)와 재사(齋舍)를 건립(建立)하여 봉행(奉行)하고 있다. 차자(次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셋째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김용필(金龍弼) 수사공(守司空)

 김용주(金龍珠) :
개성 김씨로 분적
     석(錫)의 8세손 공우(云瑀)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054년(문종8) 문과에 급제, 문종· 선종· 헌종· 숙종 등 4조에 걸쳐 벼슬하면서 여진(女眞)의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추충공신(推忠功臣)이 되고 평장사에 올랐으며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의성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 1세로 하고 본관을 개성(開城)으로 하였다.  묘소는 개성 용수산(龍峀山) 중봉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김    의(金   宜)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낸 9세손 용비(龍庇)의 첫째 아들로 고려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했다

김  영(金 英)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낸 9세손 용비(龍庇)의 셋째 아들로 고려조에 문하찬성사직제학(門下贊成事直提學 : 正 4品)을 지냈다
     奉翊大夫 判典容事寺 謙 集賢殿 太學士 三重大匡 門下侍郞 贊成事 一構文下平章事

김지예(金之銳)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낸 9세손 용비(龍庇)의 孫子이며,  英(영) 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초계군수(草溪郡守)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문량(文良)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병부상서 밀직부사(兵部尙書 密直副使)에 증직 되었다.


김   춘(金    椿) : 예안김씨로 분적후 환본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10世孫 김  의(金 宜)의 셋째 아들로
謚號(시호)는 文貞(문정), 고려 때 匡靖大夫(광정대부)·樞密副使同正(추밀원부사동정)을 지내고 銀靑光祿大夫(은청광록대부)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를 역임.  의성김씨에서 分派(분파)하여 禮安 金氏(예안김씨) 始祖(시조)가 되었다가 조선말기에 禮曹(예조)의 (령)을 받아 義城(의성)으로 還本(환본)하였다

김기지(金麒芝) : 고령 김씨로 분적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10世孫 김  의(金 宜)의 넷째 아들로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사헌부 소속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공양왕 때 서해도관찰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평리()에 이르러, 밀직제학 이지()와 함께 정조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王)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392년 개성부판사로 있을 때 정몽주()가 제거되자, 그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상주목사로 있을 때 정자를 지었는데,  이색()이 풍영루()라 이름 짓고 이숭인()이 시를 남겨, 명승지가 되었다.   
선생의 휘는 남득(南得)이요 초휘는 기지(麒芝) 이고 자는 중서 (重瑞)이며 시호는 충익 (忠翊)이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제4자인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11세손이며 후의성군(後義城君) 김 용비(金 龍庇)의 장손이며 김 의 (金 宜)의 큰아들이다.  
선생은 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년)에 진사 (進士)가 되어 감찰집의(監寮執義)가 되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안렴사 (楊廣道接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 문하평리 (判開城府事門下評理)가 되었다. 1364년 (고려 공민왕 13년)에 원제(元帝)가 최 유(崔 濡)의 농간에 속아 왕을 폐하고자 어사 유 린 (御皮 유潾)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할 때 선생이 접반시랑 (接伴侍郎 )이 되어 무고임을 역설하였던 바 원제 (元帝)가 크게 감회하여 계속 재위케 했다. 
선생이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가 금자광록대부 예부상서 (金紫光祿大未 禮部尙書)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 고양 부원군(翊戴功臣 高陽府院君 )에 봉하고 남득(南得)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남득(南得)의 뜻은 영남 (嶺南)에서 왕의 뜻에 맞은 인재를 얻었다는 것이다. 시호는 충익(忠翊)으로 내리고 후손들은 선생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본관은 고령으로 하였는데 고양(高陽)은 고령(高靈)의 고호이다. (참고문헌 :인명대사전, 한국인의 족보)


김지선(金之宣) : 설성 김씨로 분적
    
설성 김씨(雪城金氏)의 시조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錫)의 후손이며, 개성 김씨(開城 金氏)로 분적한 김용주(金龍珠)의 증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2품 벼슬)을 지내고 설성(雪城)에 세거하면서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개성김씨에서 분적하고 지선 (之宣)을 일세조(一世祖)로 삼아 관향을 설성(雪城)으로 하였다.

 김광부(金光富) 
    고려[ ?~1379 (?~우왕 5) ]때의 무신, 호 남파(南坡),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격퇴의 공으로 1363년 2등공신이 되었고,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가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물리쳤으며, 그 뒤 계림윤(鷄林尹)을 거쳐 1379년(우왕 5)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가 되어 단계(丹溪)· 거창(居昌)·야로(冶爐)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에 칩입한 외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

김   로(金    路)
    남파(南坡) 광부(光富)의 아들
    호는 석포(石圃) 고려의 문신. 문과에 급제하여 사농경(司農卿)의 벼슬을 지냈고 조선조의 개국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 되었으나 불응하였고, 후에 호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김 훤(金  玗)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본관 : 의성,  별칭 : 자 용회(用晦), 활동분야 : 행정, 서예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1269년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우자, 원나라 왕이 원나라에 있는 세자 심(諶:忠烈王)을 동안공(東安公)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 임연 일당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왕에게, 만일 세자가 공(公)으로 책봉되면 국내 민심이 임연에게 기울어진다고 주장, 그 계획을 중지시켰다. 1270년 금주방어사로 있을 때, 밀성(密城) 사람 방보(方甫)가 난을 일으켜 진도의 삼별초와 호응하려 하였다. 경주판관 엄수안(嚴守安), 안렴사(按廉使) 이숙진(李淑眞)과 함께 이를 토벌하니, 적의 무리는 방보의 목을 베고 항복, 난이 평정되었다.
 또, 삼별초의 잔적이 경상도에 침입하는 것을 막았고, 그 공으로 예부낭중(禮部郞中), 뒤에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다. 275년(충렬왕 1) 총랑(總郞)에서 전라도부 부사(夫使)가 되어 부임하던 중, 전라도안찰사 노경륜(盧景綸)이 청호역(菁好驛)에서 서울에 보내는 많은 내선(內膳)이 사선(私膳)인 것을 보고 몰수하여 국고에 바쳤다. 밀직학사(密直學士) 등 요직을 거친 뒤 충선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시종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무고를 당하자, 자청하여 귀국 ·사직하였다가 뒤에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김개물(金開物)
    1273(원종 14)∼1327(충숙왕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초명은 서정(瑞廷), 자는 원구(元龜).
    아버지는 정당문학 훤(#훤06)이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세자 때부터 친분이 있던 충선왕이 즉위하자  감찰사로 발탁되었으며, 전부시승(典符寺丞)으로 전임하였다.  이때 내부령 강융(姜融)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였다가 그의 참소로 송가도(松加島)에 유배되었다.   석방된 뒤 지합주사(知陜州事)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다시 자연도(紫燕島)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뒤 15년 동안 한거하면서 시(詩)짓기를 일삼다가, 1325년 사헌지평(司憲持平)에 이르러 사임하였다.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였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남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지켰으며, 대간을 지낼 때는 쟁신(錚臣)의 기풍이 있었다


김거두(金居斗)
   高麗朝(고려조)에 工曹 典書(공조전서)를 지냈으며, 「三國史記(삼국사기)」 후기 跋文(발문)을 썼다.


김거익(金居翼)
   김거익의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강직함이 남달라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태조와 절친한 사이였으나 고려 왕조가 망하자 부여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우의정(右議政)으로 초빙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다.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에 있는데 고려말의 문신 김거익(金居翼)의 무덤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정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112호  지정연도 : 1984년 5월 17일  소장 : 의성김씨 종중/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 76

김      연(金   衍)
    
시호는 文忠(문충). 고려 때 판문하시중 군국평장사를 역임했다

김    옥( )
    
고려 시대에 左司議(좌사의)를 지냈으며 正議大夫(정의대부)에 이르렀다.

김현주(金玄柱)
   
옥(玉)의아들, 시호는 文肅(문숙). 贊成司(찬성사)·藝文館 大提學(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三重大匡(삼중대광)·匡靖大夫(광정 대부)에 이르렀다.

남보(金南寶)
    
(호)는 月村(월촌), 諡號(시호)는 文敏(문민), 高麗朝(고려조) 때 版圖判書(판도판서)를 거쳐 朝鮮朝(조선조)에 吏曹 判書(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었다.

김을방(金乙邦)
     
(호)는 草堂(초당), 諡號(시호)는 靖節(정절), 고려 생원문과에 급제하여 奉順大夫(봉순대부)·右衛保勝郞將校贊(우위보승랑장찬)을 지냈다.  朝鮮朝(조선조)에서 吏曹 判書(이조판서)를 除授(제수)하였으나, 忠臣不事二君(충신불사이군)이란 일념으로 不取(불취)하였다.

김문부(金文富)
    경순왕의 제5자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후손 용주(龍珠)의 7세손이다.  금산(金山) 김씨의 시조. 그는 고려조에 원외랑(員外郞)을 역임, 후손들이 본관을 금산(金山)이라 했다.

김     말(金末)
    1383(우왕 9)∼1464(세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간지(幹之) 1415년(태종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1427년(세종 9)에 백언(白彦)의 청에 의해 백춘(白春)·박진(朴眞)과 함께 부사정(副司正)으로 승급했다. 1449년 사성이 되었는데, 대사성 김반(金泮), 겸사성 윤상(尹祥)과 경서(經書)의 이동(異同)에 대해 논쟁하다가 김반은 파직되고, 그는 종학으로 옮겨졌다. 1451년(문종 1)에 첨지중추원사에 제수되고, 1453년(단종 1)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었다가, 1456년(세조 2) 예문제학으로 옮겼다.  1457년에는 중추원부사로 승진하고, 1462년에는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경사에 박통하고, 또한 성리학에도 정통하였다. 당시 후진의 교육과 경학의 발전에 공로가 컸으므로 김구(金鉤)·김반과 더불어 ‘삼김(三金)’ 또는 ‘경학삼김(經學三金)’ 혹은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 일컬었다. 성질이 굳고 정확하며 몸가짐이 방정하였다. 당시 조정의 많은 儒士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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