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 中期



ball02a.gif김우옹 []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아들로   
본관 의성(). 자 숙부(). 호 동강() ·직봉포의(). 시호 문정(). 조식()의 문인.  1567년(명종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 정자()를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를 한 뒤  오랫동안 경연관()으로 있었다.
부수찬() ·전적() ·교리() ·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1583년
대사성()을 거쳐 안동부사(使)로 나갔다가, 1589년 기축옥사()의 적괴() 정여립()과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속강목()》 15권을 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행조()에 가서 부호군()이 되어 비어기무() 7조를 건의하고, 병조참판 한성부좌윤()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다시 한성부좌윤이 되어 모함에 빠진 유성룡()을 위하여 항소()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1602년 교정청당상() 및 동지경연사()가 되고 이어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회령의 향사(), 청주의 봉계서원(), 성주()의 청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 《동강문집()》《속자치통감강목()》 등과 편저에 《경연강의()》가 있다.

ball02a.gif김제민(齊閔
    1527(중종22)~1599(선조32), 조선의 문신. 자는 士孝(사효), 호는 鰲峰(오봉), (호)는 아들. 李恒(이항)의 문인. 1573년(선조 6)式年文科(식년문과)에 乙科(을과)로 급제하고 형조의 郞官(낭관)을 거쳐 和順 縣監(현감)·淳昌 郡守(순창군수), 1586년 全羅道都事(전라도도사)를 지낸 뒤에 병으로 사퇴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을 맞아 싸웠으며 난이 끝난 후 학문 연구에 전심, 특히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에 정통하고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전란으로 거의 타버렸다. 시호는 忠剛(충강).


ball02a.gif김우굉(宇宏)
    
본관 의성(). 자 경부(). 호 개암(). 경북 성주 출생. 이황()의 문인으로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6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 등 청환직()을 역임하고 병조참의를 거쳐 1582년(선조 15)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대사성 ·부제학 ·광주목사(使) 등을 지냈으며, 죽은 뒤 상주()의 속수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개암집》이 있다.
《개암집》: 조선 중기의 문신인 개암(
) 김우굉(:1524~1590)의 시문집. 목판본. 4권 2책. 간행년 미상.  김우굉은 이황()의 제자이며, 선조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가 죽은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의 유고(稿)가 산일()되어 조카 경렴()이 모아놓은 시문() 약간이 전하다가, 5세손 여용()이 여러 사람의 문집 ·가첩() 등에서  찾아 보태어 2권으로 엮었고, 그 후 다시 4권으로 증보 ·간행하였다.  권1은 시() ·부(), 권2는 소() ·차() ·계사() ·교서(), 권3은 서() ·잡저() ·발() ·제문() ·묘문()을, 권4에는 부록으로 행장() ·묘갈명() ·만사() ·제문() ·속수서원봉안문() ·부향문() ·남명 사우록() ·경산지()의 초문() 등을 수록하였다.  책머리에 이광정()의 서문과 개암선생 연보()가 있고, 책끝에 김여용의 지()가 있다.

ball02a.gif김제안(齊顔)
    조선 선조 때의 효자, 호는
竹軒(죽헌), 護軍(호군) (호)의 아들. 齊閔(제민)의 아우.  金麟厚(김인후)의 문인으로 독실한 학자였으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부모의 (상)으로 전후 6년간 廬幕(려막)에 살았다.  古阜(고부)의 道溪書院(도계서원)에 祭享(제향).

ball02a.gif김담수(金聃壽) 
    1535(중종 30)∼1603(선조 36). 조선 선조 때의 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태수(台#수04), 호는 서계(西溪). 경상도 성주출신.  아버지는 참봉 관석(關石)이며, 어머니는 순천박씨로 탄(坦)의 딸이다. 어려서는 조식을 사사하였고, 오건(吳健)에게서 《심경》 《근사록》을 배웠으며, 황준량(黃俊良)에게서 《중용》과 《대학》을 강의받았는데, 모두 지극한 칭찬을 받았다.  
김우옹(金宇#옹19)·정구(鄭逑)와 도의로 사귀었고, 벗을 사귐에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행을 즐겼으며, 모든 행실이 겸손 하였다. 특히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있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건강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두문불출, 경전공부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항상 가내법규를 엄중히 하여 친척간에 친애함과 불의를 행하지 말 것을 강조하여 우애가 돈독하였다. 
159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함께 가야산으로 피란하였다.  주로 도학을 닦고 후학의 진흥에 힘썼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과 상주의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계일고》 3권 1책이 규장각도서에 전한다.

ball02a.gif김 용(金 涌) 
    1557(명종 12)∼1620(광해군 12).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찰방 수일(守一)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 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교리에 재임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져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하여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 부사로 체직되었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경직과 외직을 전전하였는데, 일시 제용감정· 필선(弼善)·집의 등 경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 상주목사· 홍주목사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오직 보민(保民)과 흥학(興學)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나이 이미 60세였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므로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덕봉서원(德峯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ball02a.gif김 집(金 潗) 
    1558(명종13)~? 조선의 학자. 자는 活源(활원), 호는 愛景堂(애경당), 誠一(성일)의 아들. 李滉(이황)의 문인. 1597년(선조20) 翊衛司 洗馬(세익위사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27년(인조 5) 丁卯胡亂(정묘호란)에 고향에서 義兵將(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ball02a.gif김정룡(金廷龍)
    1561(명종 16)∼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시견(時見), 호는 월담(月潭). 선공감참봉 담수(聃壽)의 아들로서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1586년 예안현감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 수송에 공이 커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607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고, 그뒤 영월군수·풍기군수·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집안의 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소학 小學》에 정력을 기울였다. 상주의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ball02a.gif김장생(金長生)
    문인. 1613년(광해군 5) 廢母論(폐모론)이 일어나자 趙稷(조직)과 더불어 극력 抗疏(항소), 仁祖反正(인조반정:1623) 후 ?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李适(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켰고, 1636년 丙子胡亂(병자호란)에도 의병을 일으켜 斥和(척화)에 앞장섰다. 全州(전주)의 보광사(●光祠)에 祭享(제향).

ball02a.gif김득추(金得秋)
    1562(명종 17)∼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의성. 자는 운서(雲西), 호는 구재(懼齋). 경주출신. 아버지는 부사과 (副司果) 건(健)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수문(守文)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양(永陽)·창암(倉巖)·노항(魯巷) 등지에서 적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으로 훈련주부(訓鍊主簿)에 임명되었다. 1593년 무과 초시에 합격하여 1595년 훈련판관에 제수되고,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기록되었다. 1599년 무과에 급제, 1650년(효종 1) 용양위부사직(龍#양45衛副司直)에 오르고,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저서로는 《구재실기》 1책이 있다.

 


ball02a.gif김정견(金廷堅)
    1576(선조 9)∼1645(인조 23). 조선 광해군·인조 때의 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훈경(勳卿), 호는 국원(菊園). 정구(鄭逑)·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먼저 정구에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배웠고, 뒤에 상주의 정경세를 따라 도학을 닦았는데,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경의(經義)의 연마에 힘쓰고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  상주의 낙암사(洛巖祠)에 제향되었다.

ball02a.gif김지수(金地粹) 
    1585(선조18)~1636(인조14) 조선의 문신. 자는 去非(거비), 호는 苔川(태천)·天台山人(천태산인), 正郞(정랑) 齊閔(제민)의 손자.  1616년(광해군 8) 增廣文科(증광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校書館 校勘(교서관교감)이 되고, 1617년 廢母論(폐모론)에 반대하여 富寧(부령)에 유배되었다.
1623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병조의 郞官(낭관)을 지내고 1626년(인조 4) 書狀官(서장관)으로서 正使(정사) 金尙憲(김상헌)을 따라 청나라에 가는 도중 酬唱(수창)한 시를 엮어 《朝天錄(조천록)》을 내었다. 司憲府(사헌부)의 持平(지평)·掌令(장령)·侍講院(시강원)의 文學(문학)·弼善(필선)·輔德(보덕),  1628년 鍾城 府使(종성부사)를 지낸 뒤 사퇴하고 고향 古阜(고부)에 돌아갔다. 그림에도 능했다. 고부의 道溪書院(도계서원)에 祭享(제향), 이조 판서에 追贈(추증), 시호는 貞敏(정민).

ball02a.gif김준업(金峻業)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의성. 자는 여수(汝修), 호는 동계(東溪). 전주출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항소(抗疏)하여 그 그릇됨을 극언하고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24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고 난이 평정된 뒤에 남은 곡식을 모두 국가에 반납하였다.  
또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로 행재소(行在所)에 나갔고, 그뒤 1636년 병자호란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와 항쟁하였다. 최명룡(崔命龍)·김동준(金東準) 등과 강학하여 삼현(三賢)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전주 보광사(#보12光祠)에 향사되었다

ball02a.gif김휴(金烋)
    1597(선조 30)∼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자미(子美) 또는 겸가(謙可), 호는 경와(敬窩).  아버지는 시정(是楨)이며, 모계는 자세하지 않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5세 때 향리의 백일장 에서 장원한 일이 있었고, 성격이 대쪽 같아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폐모론을 주장하였던 정조(鄭造)가 경상도안찰사로 부임하여 예안(禮安)을 순시하던 길에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들러 자기 이름을 원록(院錄)에 기재하였는데, 그때 이를 보고 분개하여 유적(儒籍)을 더럽히는 자라며 그 이름을 지워 버렸다. 
1627년(인조 5)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의 연구에만 힘썼다.   그뒤 조경(趙絅)의 간곡한 권유와 천거로 강릉참봉에 임명되었으며, 1637년에 부모 유사(遺事)를 찬술하였다.  스승인 장현광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서책을 도시(圖示)하고 분류, 정리하는 등 우리나라 서지학(書誌學)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발달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저서로는 《경와집》·《해동문헌총록 海東文獻總錄》이 있다.

ball02a.gif김상환(金尙煥)
   적성(積城)김씨의 시조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인 의성군(義城君) 석(錫)의 후손으로 몽립(夢立)의 아들 김상환(金尙煥 : 자 文遠)은 《국조방목(國朝
    榜目)》에 의하면 그는 1636년(인조14)생으로 거주지는 평양이다. 1669년(현종10) 식년(式年)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적성(積城 : 連川郡의 속면)으로 한 연유는 상고할 수 없으나 급제 당시의 본관이 적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선대부터 적성에 살았기 때문에 세거지명을 본관으로 삼은 듯하다.


ball02a.gif김지남(金地南) 
    1600(선조 33)∼1650(효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대권(大眷), 호는 구봉(九峯). 고부(古阜)출신.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 관계 진출을 단념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몰려나자 뜻을 바꾸어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좌랑에 올랐다.   
1638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기사관·호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1641년 지평이 되어, 성격이 포악하고 권문(權門)에 아첨하는 등 상도(常道)에 벗어난 행동이 잦았던 이조판서 남이웅(南以雄)의  탄핵을 주장하다가 동료들과의 의견대립으로 사퇴하였다. 1646년 다시 직강(直講)이 되고, 그뒤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재임하다가, 1650년(효종 1) 병조정랑에 임명되어 부임도중 병사(病死)하였다.  
평소 마음이 활달하고 조그만 일에 구애받지 않아, 호조좌랑에 재직중 물화(物貨)의 출납에 세심하지 못하다 하여 상관으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시경》·《서경》 등 경서에 통달하였고, 특히 지평 정두경(鄭斗卿)과 절친하였다.

ball02a.gif김택용(金澤龍)
    字(자)는 施普(시보), 號(호)는 操省堂(조성당), 1678년(숙종 4) 寧越 郡守(영월군수)로 재직 때, 端宗墓(단종묘)를 陵(릉)으로 승격하여야 된다고 상서를 올려서 莊陵(장릉)으로 승격하고 禁夢庵(금몽암)이 소실되어 승려들을 모집하여 다시 창건하고 魯陵庵(노능암)으로 개칭하고 田土(전토)를 마련하였다.  吏曹正郞(이조정랑)과 獻納(헌납)으로 있으면서 항상 권력에 치중하는 자는 直言(직언)으로써 경계하였으며, 宣武 二等(선무 2등)·靖社一等功臣(정사1등공신)에 추증되였고, 禮安 寒泉祠(예안한천사)에 배향되었다.

ball02a.gif김시온(金是온)
     1598(선조 31)∼1669(현종 10). 조선 효종·현종 때의 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승(以承), 호는 도연(陶淵)·표은(瓢隱). 아버지는 진사 철(澈)이며, 어머니는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사성 극일(克一)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재행이 경상좌도에 이름났다. 일찍부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는데, 병자호란 이후에는 더욱 학문에만 힘썼다.  
문장보다 경학의 연마에 정진하였으며,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하여 예서의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인근 수령과 관찰사가 문학기덕(文學耆德)으로 조정에 천거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참봉직과 같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칭하였다. 1734년(영조 10) 증손 성탁(聖鐸)이 경연에 입시되면서, 절의가 알려져 3품직을 증직받았다.  문집으로 《표은집》이 전한다.

ball02a.gif김왕(金왕)
    1606(선조 39)∼1681(숙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여정(汝定), 호는 불구당(不求堂).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극계(克繼)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학유(學諭)와 전적을 거쳐 직강(直講)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김천· 무장· 연안· 양산과 충청도의 도사(都事)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뒤 함평현감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불구당집》이 있다.

ball02a.gif김방걸(金邦杰)
    본관 의성. 자 사흥(士興). 호 지촌(芝村).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623(인조 1)~1695(숙종21)  1689년(숙종 15) 사간이 되었으나, 이해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서 왕의 과오를 막지 못한 자책감에서 사직, 낙향하였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으며, 1692년 대사간, 이듬해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문집에 《지촌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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