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삼(金道三)
      
金道三 先生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석(錫)의 29세 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오봉(鰲峰) 제민(齊閔)의 11세 손으로 초명은   진정(鎭正) 일명 도삼(道三)이요, 호는 도암(道庵), 자는 치대(致大)이다.     一八五六年(丙辰年) 四月 十八日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父 김창재(金昶載), 母 도강김씨(道康金氏)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어떤 서적이든 한 번만 보면 암송하고 젊은 시절에는 고부향교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으며 집필에도 능하여  박식(博識)이라 하였고 기골이 장대한 몸에 날쌘 동작으로 동학 농민군을 지휘 하니 축지법을 쓴다고 알려져 일본군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선생은 전봉준(全琫準), 정익서(鄭益西)등과 삼 장두(三 狀頭)로 1893년 11월 배들평야 농민들과 함께 갑오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보세 감면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진정 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의 주동자로 다스려 형벌에 처하고 3장두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갑오농민혁명 당시에는 정치와 기강이 해이되고, 서구세력의 거센 물결에 밀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혁명결의의 내용을 각리 집강에게 보내고자 사발통문을 직접 작성하여 혈서로써 맹세하니 서명자 20명 중의 한 사람이다.   각지에 격문을 부치고 농민을 소집한 바 선생의 인품과 뜻을 추앙하여 수천명이 모여들어  이평면 두지리에 소재한 말목장터 감나무 밑에서 고부관아를 습격키로 모의,죽창을 만들어 무장을 시키고 대오를 2 진으로 편성하여   1 진은 도사인 전봉준 장군이 인솔 정익서 등과 영원면 후지리를 경유하고 2 진은 부도사인 김도삼 선생이 인솔 산매리와


도계리를 거쳐 천치재를 넘어 고부에서 합세하여 고부관아를 기습하니 조병갑 군수는 이미 줄행랑을 쳤었다.   고부관아를 점령한후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풀어 주고 창고에 가득한 식량을 나누어 주니 그 은혜에 감격하였고,  농민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로 재 무장을 시키니 사기가 충천 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으로 다시 편성하여 선두에서 지휘,   삼례까지 승승장구 진격하였으나 공주(公州)우금치 전투에서 붙잡혀 1895년 1월 26일 전라 감영에서 40세의 나이로 천추(千秋)의 한을 품고 옥사하였으니 갑오농민 혁명의 주도적 역할을 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김도화(金道和)
   1825(순조 25)∼1912. 조선 말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의성.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 경상북도 안동출신. 아버지는 약수(若洙)이며, 어머니는 진양정씨(晉陽鄭氏)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12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군내 유림대표로 거의통문(擧義通文)을 발표하였다. 
1896년 안동에 입성한 의병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12월 3일에 안동의 의병 수백명이 모여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자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도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동의병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1897년 태봉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항의문과 규탄문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하락(金河洛)
    본관 의성(義城). 자 계삼(季三). 호 해운당(海雲堂). 1895년 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 등과 함께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고, 여주(驪州)의 심상희(沈相禧), 안성(安城)의 민승천(閔承天) 등의 부대와 합류, 북상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 서울 진격의 뜻이 분명했던 김하락은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항전을 계속하였는데, 의병대장 박준영(朴準永)과 좌익장(左翼將) 김귀성(金貴星)이 관군과 내통하고 문을 열어준 탓으로 부득이 항전을 포기, 안동(安東)으로 피신하였다.
 그 곳의 유시연(柳時淵)과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 등과 제휴하여 마지막 기세를 올렸는데, 이 무렵 전국 의병의 대부분이  조정(朝廷)의 선유(宣諭)를 받아 자진해산하였으나 그는 경상도 동해안에서 계속 항전하였다.   1896년 7월 영덕(盈德)의 강구(江口)에서 관군과 대치, 대접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중상한 몸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유고에 《김하락진중일기(金河洛陣中日記)》가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병종(金秉宗)
   1871(고종 8)∼193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한우(翰于), 호는 경암(警庵) 또는 수산(秀山). 안동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정락(程洛),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유진(有鎭)의 딸이다. 족숙인 시락(時洛)과 흥락(興洛)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03년 33세로 한성시에 응했으나 실패하여, 자신의 견문이 좁고 고루함을 내세워 사우들과 교유하는 데 더욱 성의를 기울여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시재가 있어 15세부터 시를 잘 지었다. 성리학은 대체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따라 자기 주장을 정립하려 하였다.  특히, 예설에 밝아 《가례》의 예에 따라 자기 가정을 기본으로 한 예를 만들었다. 산수에 취미가 있어 명승을 두루 탐승하였는데, 금강산을 유람하던 해에 죽었다.  저서로 《성학속도 聖學續圖》·《학림통록 學林通錄》·《문소가례 聞韶家禮》등이 있고,《수산문집》 9권 5책이 전한다.

김붕준(金鵬濬)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기원(起元), 호는 당헌(棠軒)이다.   1888년(고종 25)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났다. 1907년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한 뒤, 1909년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몸담아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한석진(韓錫晉) 등과 승동학교(勝洞學校)를 경영하는 한편,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울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의정원의원·국무원비서장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창설하였다.  1924년 상하이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1928년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 5대단장, 1930년 상하이 한인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을 거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3년 임시정부 주광둥단장[駐廣東團長], 중화민국 국민혁명군학교(國民革命軍學校) 참의(參議)로 활약하면서 한중합작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1940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194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하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환국하였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 발기위원 및 남조선과도   정부 입법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우파 대표를 거쳐 이 해에 신진당(新進黨)을 창당하였다.    이후 계속 정치 활동을 하다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7일 납북되었는데, 그 뒤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창숙(金昌淑)
    본관 의성(義城). 자 문좌(文佐). 호 심산(心山)·벽옹(翁). 경북 성주(星州) 출생이다.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융희 3)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 육영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孫文]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김성수(金性洙)·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여 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노환으로 죽은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동삼(金東三)
    호 일송(一松). 본명 긍식(肯植).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자로서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젊은 일꾼을 양성하였다. 1909년 서울의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와 독립운동의 방향을 협의하였으며, 국권피탈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교포의 안정책과 교육문제에 대하여 계획을 세웠다. 이때 세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는 뒤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1918년 지린성[吉林省] 왕청현(旺淸縣)에서 서일(徐一)·신팔균(申八均)·김좌진(金佐鎭) 등 38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그 후 군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휘하에 들어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되었는데 그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1923년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를 이끌었으며 독립운동단체를 일원화하는 데 힘썼다. 1925년 지린성 화전현에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였다.  1927년 김좌진·지청천(池靑天) 등과 조국광복운동의 총기관으로 민족유일당촉진회(民族唯一黨促進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만들어 재만동포들의 권익신장에 힘썼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혀 본국으로 강제송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   황(金   榥)
    본관 의성(義城). 자 이회(而晦). 호 중재(重齋). 일명 우림(佑林).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군 황매산(黃梅山) 만암(晩巖)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여 독서에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명을 떨쳐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였다가 김창숙(金昌淑)을 만났고,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그러나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떠난 후 일본경찰에게 발각,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동문들과 《면우집(宇集)》을 간행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적극적으로 모았다.    
그들이 김창숙에게 건네준 거액의 자금이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 등 독립운동에 사용된 것이 드러나 제2차 유림단사건으로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8년 산청군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는데 그 후 50년 동안 1,000명의 문도(門徒)를 배출하였다. 8·15광복 후에도 대학생·교수들이 몰려와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 유림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섭렵, 한주학파의 ‘심즉이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道學)을 정립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끝내 보발(保髮)하여 끝까지 도학의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모습을 보였다.  1978년 12월, 그가 죽자 조객이 운집하였고, 장례는 유월장(踰月葬)으로 지냈다.  저서로 《쇄기(鎖記)》 《사례수용(四禮受用)》 《동사략(東史略)》 《익붕당총초(益朋堂叢) 》 등이 있다.  

김덕목(金德穆)
    1913∼1977. 독립운동가. 본관은 의성. 평안남도 용강출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 및 상해 육   청중학(育靑中學)을 졸업하였다.   그뒤 흥사단 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애국비밀단체인 동방구락부 간부로 중국학생항일구국회에 참가하여 항일의식 고취 및 한중  우호증진을 위하여 활동하던 중,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1개월여에 걸쳐 갖은 악형을 당한 뒤 석방되었다. 
1933년 9월 중국 중산대학교(中山大學校) 법학원 경제과에 입학하였고, 1934년 2월에는 학생항일구국회 간부로 선출되어 항일   투쟁의 수단으로 대적선전 및 장병위문 등의 활동을 벌여왔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산대학교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여 항일의식 고취, 대적선전, 장병위문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1939년 3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40년에는 난닝회전(南寧會戰)에 참가하였고, 그해 5월에는 중국군사위원회군령부 첩보참모학교에 입학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참모로서 활약하는 한편,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파괴활동, 연합군의 중국해안 상륙을 위한 특수공작을 수행하는 등, 첩보활동을 통한 일본군 격멸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1945년 12월에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항전기념장을 수여받았으며, 1977년에는 건국포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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