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청백리 34인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시대에 사대부로서의 권위와 풍족함을 마다하고 국가의 녹봉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국민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대표적인 청백리 34인의 면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기서 소개드리고자 하는 인물들 중에서 몇 분은 상세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분들의 생애에 대해 자료를 발췌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알려진 분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소개드립니다.

 

황희

성현

조광조

맹사성

상진

박수량

유관

홍섬

유성룡

기건

노진

이원익

이약동

박순

심희수

양관

신공제

이광정

허종

임호신

이항복

허침

김취문

이덕형

노숙동

이준경

이시백

조언수

백인걸

김시양

조사수

이언적

이상진

 

 

홍명하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 34인 명단>


1. 황희(黃喜, 1363~1452)


황희는 공민왕 12년(1363년)에 개성에서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 때인 우왕 2년(1376년)에 음직으로 복안궁 녹사가 되었고, 스물한 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곧이어 진사시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다가, 창왕 원년(1389년)에 성균관 학관으로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점차 왕의 신뢰를 쌓아갔는데, 그는 중추원을 없애 병제를 일원화하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면서 태종의 신임을 받게되었다. 이후 태종은 모든 정사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 유배 생활

황희가 이조판서로 있던 태종 18년(14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지금의 파주인 교하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했다.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황희는 세종 4년에야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나서 의정부 참찬에 등용되는데, 이때 황희의 나이는 60세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었다. 그 후 황희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고 69세 되던 해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었다.


▶ 주요저서: 《방촌집(厖村集)》



2. 맹사성(孟思誠, 1360~1438)


맹사성(孟思誠.1360년(공민왕9년)~1438년(세종20 년))은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충청남도 아산의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명장인 최영(崔瑩)의 손녀 사위다. 온양 출신으로 1386년(우왕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된 데 이어 세종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 강호사시가가 있다 .


-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한다.

- 맹사성의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로 하였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 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3. 기건(奇虔, ?~1460)


본관 행주(幸州). 호 청파(靑坡). 시호 정무(貞武). 포의(布衣)에서 발탁되어 1442년(세종 24) 지평(持平)이 되고 병조 ·형조 ·이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1448년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겸직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1451년(문종 1)에는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이때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권력을 남용 ·농단하는 신하들이 있어 이들을 탄핵하였다.

1457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중추원판사(中樞院判事)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전남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되었다.


4. 이약동(李約東, 1416~1493)


본관 벽진(碧珍). 자 춘보(春甫). 호 노촌(老村). 시호 평정(平靖).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한 뒤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이 되었다가 사직,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발탁되어 관청이속들의 부정을 단속하여 민폐를 근절, 선정을 베풀었다.

1474년 경상도 수군절도사,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경주부윤·호조참판·전라도관찰사·이조참판·개성부유수 등을 거쳐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 이르러 치사하였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냈으나 청렴으로 일관하였다. 금산의 경렴서원, 제주도 귤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성종 때 좌리원종훈에 책록되었다. 저서에 《노촌실기》가 있다.


5. 허침(許琛, 1444~1505)


본관 양천(陽川). 자 헌지(獻之). 호 이헌(頤軒). 시호 문정(文貞). 1462년(세조 8) 진사가 되고, 1475년(성종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감찰 ·전적(典籍) ·예문관부수찬 ·부교리(副校理) 등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다. 1482년 진현시(進賢試)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이 되고, 보덕(輔德)이 되어 덕행과 학문으로 세자의 총애를 받았다.

1489년 《삼강행실도》를 산정(刪定)하였고, 그 뒤 직제학(直提學)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92년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494년 이조참판 때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을 지냈다. 1502년(연산군 8) 이조판서가 되고, 1503년 우참찬(右參贊), 1504년 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앞서 성종이 윤비(尹妃)를 폐하려 할 때 이를 반대했으므로 갑자사화에 화를 면했고, 말년에는 늘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6. 노숙동(盧叔仝, 1403~1463)


본관 풍천(豊川). 자 화중(和仲). 호 송재(松齋). 1427년(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박사(博士) ·교리(校理) ·감찰(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집현전의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는 동안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10여 년 동안 대사헌(大司憲), 3조(曹)의 참판을 지내고, 1448년에는 사간원지사(司諫院知事)에 승진하였다. 1462년(세조 8) 중추원동지사(中樞院同知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으며, 숙종 때에 경남 함양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배향되었다.


7. 조언수(趙彦秀, 1497~1574)


본관 양주(楊州). 자 백고(伯高). 호 신선당(信善堂). 시호 정간(貞簡).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3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檢閱)이 되고, 1539년 사서(司書)를 거쳐 1545년(인종 1) 사인(舍人)이 되고, 그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548년 대사헌이 되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9년 이후 함경도관찰사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강원도관찰사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우참찬(右參贊) 등을 지내고, 1566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역임하였다. 죽은 뒤에는 상을 치를 돈이 없이 부의로 겨우 엄습하였을 정도로 청백하였다고 한다.


8. 조사수(趙士秀, 1502~1558)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계임(季任), 호는 송강(松岡)이다. 조방좌(趙邦座)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중종 26년(15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후 정언, 교리, 보덕(輔德) 등을 지낸 뒤 1539년 경차관(敬差官)으로서 전소된 성주 사고(星州史庫)의 화재원인을 조사했다. 그 후 제주 목사, 이조 참판,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이조 · 호조 · 형조 · 공조 판서를 지낸 뒤 지중추부사, 좌참찬에 이르렀다. 명종 12년(1557)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청렴하고 근신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그가 죽자 명종은 교서를 내려 애도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재미있는 일화

조선조 중종 임금은 궁전 안뜰에 문을 세 개 만들어 세우고, 청문(淸門)  예문(例門) 탁문(濁門)이라고 써붙이도록 했습니다.


청문은 맑고 깨끗한 사람이 통과할 문.

예문은 예사(보통) 사람이 통과할 문.

탁문은 깨끗이 못한(탁한) 사람이 통과할 문입니다.


그리고 만조 백관들에게 자기가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문을 통과하게 했습니다.

고관 대작들이 모두 보통문(예문)으로 나가는데 조사수(趙士秀)대감만이 당당하게 맑고 깨끗한 문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고, 아무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울 것 이 없다는 것을 당당히 보였던 것입니다.


한 번은 임금 앞에서 경연(經筵)임금께 경서를 강론하는 것)을 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심연원(沈連原)대감을 아주 난처하게 한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집이 법에 맞지 않게 크거나 호화로운데, 영의정이 첩의 집을 사치롭게 지었으니

영의정이 법을 어긴 탓에 백성들도 어기는  것 입니다.

영의정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물러났는데, 그 후 첩의 집을 멀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연원 대감은 원한을 품지 않고 뒷날 이조판서 자리에 조사수를 천거했다고 합니다.


9. 유관(柳灌, 1484~1545)


본관 문화(文化). 자 관지(灌之). 호 송암(松庵). 시호 충숙(忠肅).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지평·장령·부승지·강원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병조와 형조 및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좌찬성에 이르렀다. 1543년 국경지대의 정지정책에 따라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남쪽 하삼도(下三道) 백성들을 평안도지방으로 이주시키는 일을 지휘하였다. 1545년(인종 1)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고, 인종이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총관하였으나, 정권을 장악한 소윤(小尹)일당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서천(舒川)으로 유배되어 가던 도중 과천(果川)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선조 때 복관되어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송암집》이 있다.


10. 성현(成俔, 1439~1504)


본관 창녕(昌寧). 자 경숙(磬叔). 호 용재(慵  齋)·허백당(虛白堂). 시호 문대(文戴).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1468년(예종 즉위) 예문관(藝文館) 수찬(修撰)을 지냈다.

형 임(任)을 따라 명(明)나라에 가는 도중 기행시를 지어 《관광록(觀光錄)》을 엮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14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때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488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했으며 관상감(觀象監) 등의 중요성을 역설, 격상시켰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왕명에 따라 유자광 등과 《쌍화점(雙花店)》 등 고려가사(高麗歌詞)를 바로잡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집 《용재총화(慵 齋叢話)》는 조선 전기의 정치 ·사회 ·제도 ·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허백당집(虛白堂集)》 《풍아록(風雅錄)》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주의패설(奏議稗說)》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서가 있다.


11. 상진(尙震, 1493~1564)


본관 목천(木川), 자 기부(起夫), 호 송현(松峴)·범허재(泛虛齋)·향일당(嚮日堂), 시호 성안(成安)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으며, 1526년 예조좌랑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8년 필선(弼善)이 된 뒤 집의(執義)·응교(應敎) 등을 거쳐 1533년 대사간에 올랐다. 1535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찬성(右贊成)·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가 되었으며, 1544년 중종이 죽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등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58년 영의정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불허되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임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년 동안 재상으로 왕을 보좌, 명상으로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다.


12. 홍섬(洪暹, 1504~1585)


본관 남양(南陽). 자 퇴지(退之). 호 인재(忍齋). 시호 경헌(景憲).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 1528년(중종 23)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正言)을 지냈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興陽)에 유배,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풀려나왔는데, 이때의 심경을 〈원분가(寃憤歌)〉에 담아 읊었다. 그 후 수찬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 1552년(명종 7) 청백리에 뽑히고, 1558년 좌찬성 겸 이조판서, 이듬해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이 과중하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양(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임, 1563년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로 복직되어 양관(兩館) 대제학을 지내고, 156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정무를 처결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1571년 좌의정이 되어 1573년 궤장(几仗)을 하사받고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 1579년 병으로 사임,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다. 경서(經書)에 밝은 문장가로, 문집에 《인재집》 《인재잡록(忍齋雜錄)》이 있다.


13. 노진(盧稹, 연대미상)


본관 교하(交河). 시호 제효(齊孝). 공양왕의 장인. 1372년(공민왕 21)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온 후 평리(評理)가 되었고, 1374년 폭우로 영전(影殿)에 빗물이 새게 된 책임을 지고, 찬성사(贊成事) 한방신(韓方信)과 함께 장형(杖刑)을 받았다. 1389년(공양왕 1) 딸이 순비(順妃)가 되자 창성군(昌成君)에 책봉되었다.


14. 박순(朴淳, 1523~1589)


본관 충주, 자 화숙(和叔), 호 사암(思菴), 시호 문충(文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수찬(修撰)·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1555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그 뒤 한산군수(韓山郡守)·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하였다. 극심한 동서당쟁(東西黨爭) 속에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편들다가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하였다.

시(詩)·문(文)·서(書)에 모두 뛰어났으며,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사암문집》이 있다.


15. 신공제(申公濟, 1469~1536)


본관 고령(高靈). 자 희인(希仁). 호 이계(伊溪). 시호 정민(貞敏). 1486년(성종 17) 진사를 거쳐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516년(중종 11) 창원(昌原)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으로 표창을 받았다. 1522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8년 좌참찬, 호조판서 겸 세자좌부빈객을 거쳐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다. 서예에 뛰어나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할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서족(書簇)과 성종의 어필(御筆) 병풍을 감정(鑑定)하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6. 임호신(任虎臣, 1506~1556)


본관 풍천(豊川). 자 무백(武伯). 시호 정간(貞簡). 1528년(중종 23) 사마시(司馬試), 1531년 식년문과에 각각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 1533년 동지사(冬至使)인 아버지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봉교(奉敎)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으로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전적(典籍)이 되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을 거쳐 1550년(명종 5) 중추부동지사 때 춘추관동지사를 겸임,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55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55년 형조판서 때 신병으로 사직,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의 벼슬을 받았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7. 김취문(金就文, 1509~1570)


본관 선산(善山). 자 문지(文之). 호 구암(久庵). 시호 문간(文簡). 어려서 박영(朴英)의 문인으로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1537년(중종 3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방 수령으로 전전하다가 사성(司成)이 되었다. 명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568년(선조 1)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뒤 대사간에 이르렀다. 문집으로서는 《구암집》이 전한다.


18. 이준경(李浚慶, 1499~1572)



본관 광주(廣州). 자 원길(原吉). 호 동고(東皐) ·남당(南堂) ·양와(養窩) ·홍련거사(紅蓮居士). 시호 충정(忠正). 1522년(중종 17)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533년 사경(司經) 때 김안로(金安老)와의 불화로 파직되고, 1537년 김안로가 처형된 후 재기용되었다. 이어 응교(應敎) ·보덕(輔德) ·승지(承旨)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543년 문신정시에 장원, 한성부우윤에 오르고 대사성을 지냈다.

1544년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이 되었고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1548년 병조판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1550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으로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으로 귀양갔으나 이듬해 풀려나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순변사, 1555년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침입한 왜적을 격퇴,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다.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을 예언한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려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동고유고(東皐遺稿)》 《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19. 백인걸(白仁傑, 1497~1579)


본관 수원(水原), 자 사위(士偉), 호 휴암(休庵), 시호 충숙(忠肅)·개시(改諡)·문경(文敬)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실의 끝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후 돌아와 15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검열·예조좌랑·남평(南平) 현감·호조정랑·지평·헌납을 역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에 풀려나와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蓬山)서원, 파주(坡州)의 파산(坡山)서원에 배향되었다.


20. 이언적(李彦迪, 1491~1553)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21.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22. 박수량(朴守良, 1491~1554)


본관 태인. 자 군수(君遂). 시호 정혜(貞惠). 장성(長城) 출생. 김개(金漑)의 문인.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고, 151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광주향교(廣州鄕校)의 훈도를 지냈다. 이듬해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전적 ·예조좌랑 ·충청도도사를 지내고, 1522년 사헌부지평(持平)이 되었다. 1525년 고부군수로 나갔으며, 그 뒤 헌납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1531년 보성군수를 거쳐 사예 ·군기시정 등에 임명되었다. 1534년 함경도 경차관(敬差官) 때 지방 관아를 순시 중, 불법사례를 적발하고도 보고하지 않아 투옥되었다.

1536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봉해지고, 의항(蟻項) 공사의 찰리사(察理使)로 파견되었다. 1537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진하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호조참판 ·공조참판 등에 이어,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 ·예조참판를 역임하고, 1546년(명종 1) 춘추관동지사(同知事)로서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곧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또 형조판서 ·우참찬을 지냈으며, 이듬해 좌참찬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로 전직, 노모를 봉양하였다. 1552년 우참찬에 재임명, 이듬해 한성부판윤(判尹) ·중추부지사(知事)에 이르렀다. 주세붕(周世鵬)과 깊이 교유하였고 유림(儒林) 사이에서 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23.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유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24.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본관 전주. 자 공려(公勵). 호 오리(梧里). 시호 문충(文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저작(著作)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등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성절사를 따라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좌랑(戶曹佐郞) ·정언(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582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587년(선조 20)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기용되어, 대사헌 ·호조 및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에 호종하고, 이듬해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95년 우의정에 올라 진주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98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유성룡(柳成龍)을 변호하다 사직, 은퇴하였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을 지내면서 수차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던 중,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는데, 1619년(광해군 9) 풀려나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80세의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돌아와,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마지막으로 퇴사, 낙향하였다.

그는 1608년(선조 41)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건의하여 이를 실시케 하였고, 불합리한 조세(租稅) 제도를 시정, 국민의 부담을 덜었으며, 안주목사로 있을 때는 군병방수제도(軍兵防水制度)를 개혁, 1년에 3개월의 복무를 2개월로 단축, 법제화시켰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인에 속했으나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 《속 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25. 심희수(沈喜壽, 1548~1622)


본관 청송(靑松). 자 백구(伯懼). 호 일송(一松) ·수뢰누인(水雷累人). 시호 문정(文貞). 1568년(선조 1)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 대표로 제사에 참여,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로 사직하였다. 호당(湖堂)을 거쳐 1591년 응교(應敎)로서 동래(東萊)에서 일본 사신을 맞았다.

한때 직언하다 선조의 미움을 샀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왕을 호종, 중국 사신을 만나 능통한 중국어로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을 맞았다. 1598년 정유재란 때는 예조판서로서 명나라 경리 양호와 만세덕의 접반사가 되었다. 1599년에 이조판서와 홍문관 예문관 양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1606년 좌의정, 1608년 광해군 때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정권에서 우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일송문집(一松文集)》이 있으며,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26. 이광정(李光庭, 1552~162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이다. 정언을 지낸 이주(李澍)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선조 23) 교관(敎官)으로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정자·사관·시강원설서를 역임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이후 정언(正言)·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좌승지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대사성이 되었다.

1597년에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의 접반사가 되어 일본과의 회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고, 1598년에는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내려가 왜군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듬해 호조판서·공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고, 1601년에는 지중추부사로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1602년 대사헌 때 인목대비의 책봉에 대한 고명을 받기 위해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고, 이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1626년(인조 4)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에 들어가 병사했다. 저서로 《눌옹문집》이 있다. 


27.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박사·정언(正言)·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28. 이덕형(李德馨, 1561~1613)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했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양근(楊根)에서 죽었다.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29. 이시백(李時白, 1581~1660)


본관 연안(延安). 자 돈시(敦時). 호 조암(釣巖). 시호 충익(忠翼). 우찬성까지 오른 귀(貴)의 아들이며, 판서를 지낸 시방(時昉)의 형이다.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3년 인조반정에 아버지와 함께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양주목사 ·경주부윤 등의 지방관, 수원방어사 ·총융사 등의 주요 부대 사령관, 형조 ·공조 ·병조의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효종대에는 이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자기를 크게 내세우지 않은 채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공을 세웠다.

1623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안현(鞍峴) 전투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격파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수원방어사로서 인조를 무사히 강화도로 대피시켰다.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때에도 주화론과 척화론의 갈등에 동요되지 않고 묵묵히 산성 방위의 책임을 다하여 인조의 신임을 받았다.


인조대에는 공신들과 일반 신하들(士類) 사이에 분란이 계속되었으나 공신의 중심 인물이면서도 사류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병자호란 후에 수어사(守禦使)를 맡아 반청(反淸) 정책의 상징인 남한산성 재건작업을 담당하고, 소현세자가 죽은 뒤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국왕 인조와 권신 김자점(金自點)에 반대하여 소현의 아들을 세자로 할 것을 사림들과 함께 주장한 것이 그 예들이다.

그리하여 가까운 사이인 반정공신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金自點)이 반역죄로 처형당할 때에 혐의를 피할 수 있었다.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 ·조익(趙翼)과 친하게 지냈으며,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상황을 수습하고 대동법 실시 등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효종대에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졌다.


30. 김시양(金時讓, 1581~1643)


본관 안동. 자 자중(子仲). 호 하담(荷潭). 초명 시언(時言). 시호 충익(忠翼).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사(司)·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벼슬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전라도도사(都事)가 되어 향시(鄕試)를 주관할 때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시제(詩題)를 출제하였다 하여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고,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 뒤 서북의 경비가 중요시되자, 평안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1631년(인조 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도원수(都元帥)·사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改修)할 때 중추부판사 겸 춘추관판사로서 참여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전적(典籍)·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涪溪記聞)》 등이 있다.


31. 이상진(李尙眞, 1614~1690)


본관 전의(全義). 자 천득(天得). 호 만암(晩庵). 시호 충정(忠正). 1645년(인조 2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현종 때 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이조판서에서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중추부판사로 옮긴 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종성(鐘城)에 유배된 뒤 북청(北靑)·철원(鐵原) 등지에 이배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 부여(扶餘)에서 죽었다.


1695년 청백리에 녹선되고 전주의 장보사원(章甫祠院), 북청(北靑)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만암유고(晩庵遺稿)》가 있다.


32. 홍명하(洪命夏, 1608~1668)


본관 남양(南陽). 자 대이(大而). 호 기천(沂川). 시호 문간(文簡). 1630년(인조 8) 생원이 되고,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정언 ·교리를 역임하였다. 1648년 부수찬 ·헌납을 지낸 뒤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척결(不正剔抉)로 이름을 떨쳤으며, 1650년 이조정랑을 거쳐 1652년 동부승지에 승진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이어 대사간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예조의 참판 ·부제학 ·대사헌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약방제조(藥房提調)로 1659년 효종이 죽자 삭직(削職)되었다. 이어 복직, 예조 ·병조의 판서를 거쳐 1663년(현종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6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고, 효종을 도와 북벌(北伐) 계획을 적극 추진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여주의 기천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 《기천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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