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성씨를 사용해 온 민족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학(譜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인간산맥(人間山脈)의 큰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혈통인가? 이곳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각 성씨의 원조(原組)의 뿌리를 정확하게 캐낸 인맥(人脈)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자료를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제가 이 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賈(가)氏

이 성씨는 소주(蘇州) 가씨 단본으로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그 시원(始原)은 요제(堯帝)가 작은아들 公明을 가(賈)에 봉함으로써 賈로 성씨를 삼게되어, 주나라 혜왕때 가화(賈華)란 사람이 있었고, 한나라 고려 후기에 가수(賈壽)는 랑중령(郞中令)이 되었으며, 진(晋)나라 때 가효(賈孝)는 나라에 공을 세워 가(賈)성을 하사 받았다. 우리 나라의 가(賈)씨는 선조 때에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賈維鍮가 시초라 함.

簡(간)氏

이 성씨는 가평(加平) 외에도 남양(南陽), 서산(瑞山), 영광(靈光), 경주(慶州), 인동(仁同), 배양(裵陽), 해주(海州)등 여러 본이 전하고 있지만 "가평"이 주된 본관이다. 원래는 중국의 성씨로써 간백(簡伯)의 후예로 전하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문헌에 나타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가평간씨의 시조 간유(簡有)는 고려 25대 충렬왕 때 사람으로 중랑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의 후손 간홍(簡弘)이 역시 장군으로 가평간씨의 일파를 이루었고, 또, 간세진(簡世縝)을 파조로 하는 또 다른 일파가 있다.

葛(갈)氏

이 성씨는 제갈씨에서 갈린 성씨라는 설이 유력하다. 신라 덕흥왕 때 귀화한 성인데 고종 때 제갈홍(諸葛泓)의 형제가 복성을 각각 1자씩 나눠 쓰기로 하여, 형은 제(諸)씨로 동생은 갈(葛)씨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역사상 드러난 인물은 별로 없다. 고구려 장수왕 때의 장군으로 갈노(葛盧)란 사람이 있다.

甘(감)氏

감씨는 본관이 합포(合浦)감씨 단본이다. 또는 창원(昌源)감씨로 부르기도 한다. 감씨는 중국의 성씨로써 은나라때 감반(甘盤)이란 사람이 있고 후한(後漢)의 감영(甘英)은 경략가(經略家)로 유명한 반초(班超)의 부장(部將)으로써 안식국(지금의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로마제국으로 진격하려다가 지세가 불리하여 회군하고 말았지만 중군인이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넓히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감씨가 우리 나라에 어느 때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합포 감씨의 시조는 고려말 우왕 때 사람인 감위조(甘威朝)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감상중(甘尙中)이 문과에 올라 군위현감 (軍威縣監) 시강원전적(侍講院典籍)등을 역임했다.

姜(강)氏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백여 본이 나타나 있으나, 오늘날까지 분명히 전해오는 진주(晋州), 금천(衿川), 안동(安東), 백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봉일(鳳壹), 법전(法田)등 9본뿐인데, 그것도 모두가 대종(大宗)인 진주에서 갈려진 것으로, 다만, 강씨가 모여사는 지방 이름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모든 강씨의 첫 시조가 된다. 시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수(隨)나라 사람으로 수양제(隨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정동대원수(征東大元帥)로 출정했다가 고구려에 귀화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고구려 사람으로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출정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진주강씨의 80%는 강창서(姜彰瑞)의 후손으로 그 가운데서는 강사첨(姜師瞻)의 자손이 가장 많다.

대종파(大宗派)는 시조에서부터 강창서(姜彰瑞)에 이르기까지 계보(系譜)를 달고 있지만 분명치 않고, 은열공파(殷烈公派)의 본을 따르고 있다. 금천강씨파(衿川姜氏派)는 시조에서 강한찬(姜邯贊)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각각 따르고 있으나 모두가 확실하지 않다. 은열공파의 중시조(中始祖)인 강민첩과 금천강씨파의 강감찬은 다같이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병장들이다.

고려 초엽인 성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약 80년 사이에 세 차례나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제 3차 침입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때 소배압(簫排押) 이끄는 거란 대군을 귀주(龜州) 싸움에서 상원수(上元帥) 강민첩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각각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역사상 유례 없는 대첩을 장식하였다.

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5명, 대제학(大提學) 1명, 청백리 7명을 냈다.

통정공파(通亭公派)

통정공파(通亭公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를 꼽는다. 조부인 강준백(姜准伯)은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역임하였다. 강희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 되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뒤에 호조참의(號曹參議)를 지냈다. 강희맹은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화가였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직제학 병조정랑을 거쳐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찬케 했다. 강희맹은 강희안의 조카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수양대군의 등극을 도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좌참찬, 우의정,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귀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다.

통계공파

통계공파의 姜동은 세종때 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의 아들로, 성종 때 지평(持平)을 거쳐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화를 입었으나, 그의 세 아들 호(滸), 택(澤), 온(溫)은 모두 영달하였다. 온(溫)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맏이인 강사상(姜士尙)은 명종 때 대제학(大提學),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등을 지냈고, 선조 때에는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네 아우 가운데 사안(士安)은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고, 사필(士弼)은 관찰사를 지냈다. 강사안(姜士安)의 아들 강신(姜神)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강인(姜絪)은 임진왜란 때 왕을 잘 호위하여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적진을 왕래하며 외교로써 공을 세웠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에서는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가 유명하다. 강백년(姜栢年)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효종 때 충청,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로 뽑혔다. 그의 아들 강현도 형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강세황(姜世晃)은 강삼(姜三)의 아들로써 육조의 참판을 고루 지냈으며, 특히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강노(姜 )는 강세황(姜世晃)의 증손인데, 철종 때는 대사간을 지냈고, 뒤에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인헌공파(仁憲公派)의 강석기(姜碩期)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 명신(名臣)으로는 광해군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사필(士弼)의 아들 정, 명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강현(姜顯) 등을 들 수 있고, 학자로는 강항(姜沆)이 이름났다.

그 밖에 청련하고 강직하여 강경파로 일컬어진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 활약항 인물로는 특히 강석보(姜碩寶), 강복(姜樸), 강필신(姜必愼), 강필경(姜必慶) 등을 꼽을 수 있다. 강석보(姜碩寶)는 현종 때 문과에 올라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강복(姜樸)은 영조 때 부교리(副校理)를 지냈으며, 강필신(姜必愼)은 지평(持平)을, 강필경(姜必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구한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발행인의 한사람인 강위(姜瑋)는 시인으로도 유명했다. 근세에 와서는 독립투사였던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꼽을 수 있다.

康(강)氏

강(康)씨의 본광은 십여본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이 대본으로 오늘날엔 이 세본 이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강씨의 도시조는 기자조선 시대 기자(箕子)의 막료였던 강숙(康叔)이고, 시조는 전설상의 인물인 호경(虎景)으로 전한다. 그는 신라 말엽의 사람으로 성골장군이라 일컬으며, 백두산으로 부터 각지로 유랑하다가 송도(개성)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뒤에 강충(康忠)이란 아들을 낳고 충(忠)은 또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보육이 곧 고려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 되는 사람으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원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 하지만, 강씨의 중시조이며 실질적인 시조는 충렬공 강지연(康之淵)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몽고 침입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신성부원군(新城은 신川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신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강씨는 이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이다.

강득용(康得龍)은 조선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친 오라버니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조에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관악산에 들어가 연주암에 살면서 매일같이 연주대에 올라 송경(松景,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연주암 연주대의 명칭은 이 때 생겼다. 조선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정안공(靖安公)이란 호를 내렸고, 후손은 재령(載寧)에 관적했다.

강씨는 고려조에 강조(康兆, 목종 때 무신, 도총관)을 비롯 강증(康拯, 예종시 평장사), 강호문(康好文, 공밍왕조 판전교사사), 강순룡(康舜龍, 공민왕와조 찬성사) 등을 배출하여 명문에 속했지만 이조에 와서는 왕후를 냈으면서도 왕자의 난으로 인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조선시대 때 문과 급제자는 36명인데 신천(新川)이 20명, 곡산(谷山)이 7명, 재령(載寧)이 2명, 본관을 알 수 없는 사람이 7명이다.

强(강)氏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진(晋)나라의 대부 강채(强釵)의 후손으로 전하는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江(강)氏

중국 제양(濟陽)에서 남 백익(伯益)의 후예, 강국(江國)이 있어 씨로 정함

甄(견)氏

주요본관은 황?(黃?)이며, 시조는 견훤(甄萱)으로 되어있다. 앞서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 원래 본성이 李씨로써 농사를 짓다가 신라 말기에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 되어 고을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라 말기에 세력을 떨친셈이다.

그의 아들 견훤은 유명한 후백제의 왕이다.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신라 진흥왕의 후손이 되는데, 견훤이 아직 젖먹이 였을 때 밭에서 일을 하면서 그를 수풀 밑에 두었더니 난데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자라면서 몸집이 크고 생김생김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일 때, 여기 저기서 군도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게 되자, 이 틈을 탄 견훤(眞聖女王 6년)은 무리를 모아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끝에 8년 뒤인 효공왕 4년에는 지금의 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그 뒤 후고구려의 궁예와 자주 충돌하고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왕건(王建)의 고려와도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한편,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한 때 군사적으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堅(견)氏

본관은 천령(川寧, 여주지방)과 사양(沙梁, 수원지방),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이 있으며,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견권(堅權)이다.

景(경)氏

이 성씨의 시조는 경차(景磋)다. 그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그의 후손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요직에 있었다. 아들 설정(洩淨)은 보문각대재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설정(洩淨)의 아들 상조(祥組)는 직제학 대사공(大司空)을, 상록(祥祿)은 좌복야를 지냈다. 그의 후손들 중 경기도병마절도사(京畿道兵馬節度使)를 한 경세정(景世貞), 세정의 아들 일창(日昌)은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역임했다. 8세손 세양(世楊)은 조선태조 때 무과에 올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慶(경)氏

이 성씨는 청주 경씨 단본으로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경진(慶珍)이다. 그의 아들 경대승(慶大升)은 의협심이 강하여, 후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른 경복흥(慶復興)이 있다. 그의 두 아들이 조선 개국 후에 각각 벼슬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 인물로는 경세창(慶世昌), 경세인(慶世仁) 등이 있다. 경세창(慶世昌)은 선조 때 문과에 올라 부제학(副提學), 황해도관찰사,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지냈다. 그리고, 경혼(慶渾)은 명종 때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부제학 호조참판을 지낸 경섬(慶暹)이 있다.

桂(계)氏

이 성씨는 수안(遂安)계씨 단본으로 명대(明代)의 귀화 성씨로 알려졌다. 시조는 명나라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계석손(桂碩遜)이다. 역사상 대표 인물로는 계덕해(桂德海)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 때의 학자로써 별식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 찰방(察訪) 등을 역임했으며, 문집 계찰방집(桂察訪集)을 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화(桂和)가 있다.

高(고)氏

고(高씨)는 양(梁)씨, 부(夫)씨와 함께 탐라(耽羅, 제주도의 옛 이름)의 지배 씨족으로 이들 3성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성혈(三姓穴)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과 만물이 없었을 때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신이 솟아났다.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가 그들이다. 그들은 수렵을 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와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융성해졌다는 전설이 있다. 결국 삼신 중의 고을나(高乙那)가 고씨의 시조라는 것이다.

앞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씨의 본관은 제주를 대종으로 하고, 장흥(長興),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선령(宣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횡성(橫城), 금화(金化), 토산(兎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0여본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두 제주에서 떨어져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

제주고씨 세보(濟州高氏 世譜)에 따르면 탐라의 군주는 고을나(高乙那)로 부터 45세(世)까지 高씨가 세습해 내려오다가 46세(世) 고말로(高末老)가 고려 신하가 되니 이가 곧 고씨의 중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 무렵부터 고씨는 속속 육지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고(高)씨중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총 77명인데 본관별로 나눠보면 아래와 같다.

장흥(長興) 29명, 제주(濟州) 28명, 개성(開城) 8명, 안동(安東) 2명, 횡성(橫城) 2명, 강화(江華)·장진(長津) 각 1명, 나머지 6명은 본관이 미상이다.

제주고씨(濟州高氏)

대표적인 인물은 고득종(高得宗)이다. 그는 조선태종 때 효행이 두터워서 벼슬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사판관(禮賓寺判官) 등 벼슬을 지내고 세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두 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로 일본에 가 천황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장흥고씨(長興高氏)

고경명(高敬命)으로 이름이 났다. 그는 중종 때 문신이자 화가로 조광조(趙光組) 등과 친교를 맺었다가 을묘사화에 연루된 고운(高雲)의 손자요. 명종 때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그는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교리, 옥당(玉堂) 등 벼슬을 지낸 유학자였다. 선조 때 동래부사로 있다가 벼슬을 떠났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에서 6천여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군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개성고씨(開城高氏)

광해군 때 우산판관을 지내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작자로 전하는 고상안(高尙顔) 등 문신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영조때 창령현감(昌寧縣監)으로 어진 정사를 베풀어 고창령(高昌寧)이란 별명을 듣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고유(高裕), 조선 중엽의 대표적 시인으로 세조에서 영조 대의 서민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를 엮어낸 고득언(高得彦)이 빼어났다.

 曲(곡)氏

곡(曲)씨의 본은 용궁(龍宮), 면천(沔川)이며, 고려 태조 때에 평찰(評察) 벼슬을 한 곡근회(曲矜會)가 있다.

骨(골)氏

계출이 불명하나 수양제(隋楊帝) 때의 골의(骨儀), 본래 천축(天竺) 사람으로 장안(長安)에 살며 군승(郡承)

貢(공)氏

중국 광평(廣平)에서 남. 아들을 공후(貢後)자(字)로써 씨를 정함.

孔(공)氏

공(孔)씨는 곡위(曲韋) 공(孔)씨 단본이다. 시조는 공자(孔子). 그의 53대손 공소(孔紹)가 고려 충정왕 때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여 와서 평장사의 벼슬을 받고 고려에 귀화했다. 조선정조 때에 공자의 고향인 곡위(曲韋)를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공소(孔紹)의 아들 노(努)는 고려조에 집현전태학사, 평장사 등을 지냈다. 노(努)의 큰 아들 공부(孔府)는 우왕 때 문과에 올라 집현전태학사를 지내고 조선시대에 검교한성부윤과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둘째 아들 공은(孔隱)은 우왕 때 문과에 올라 평장사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한 뒤 은퇴했다. 태종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서?(孔瑞?)은 중종 때의 강직한 신하로 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8명이다.

公(공)氏

본관은 김포(金浦) 공(公)씨 하나뿐이며, 시조는 고려 대 장군 공순영(公純永)으로 전한다. 그의 선대는 중국 노(魯)나라 왕족의 후손으로써 공윤보(公允輔)가 18학사의 한 사람으로 난을 피해 신라 경덕왕 14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경기도 김포에 살았다고 한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조선중종 때 사람 공규(公珪)가 있다. 그는 중종 17년에 문과에 합격되여 서작(薯作), 정언(正言)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이르렀는데, 시문(詩文)에 능했다고 한다.

 

郭(곽)氏

곽(郭)씨는 문헌에 6본으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엔 현풍(玄風)과 청주(淸州) 2본 뿐이다.

현풍(玄風) 곽(郭)씨의 시조 곽경(郭鏡)은 원래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 귀화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른 사람이다.

청주(淸州) 곽(郭)씨는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풍(玄風) 곽(郭)씨

조선시대 때 이름난 도덕 가문으로 정려(충신이나 열녀가 난 고장에 나라에서 세워 표창하던 문)가 12개나 되었다. 때문에 12정려하면 으레 현풍(玄風) 곽(郭)씨의 애기가 따른다. 현풍(玄風) 곽(郭)씨중에서도 청백리 곽안방(郭安邦, 세조 때 익산군수)의 자손이 그러했다. 그의 현손에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곽월(郭越, 선조 때 부사), 곽준(선조 때 안음현감), 곽율(선조 때 초계군수) 3형제가 특히 빼어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기 때문에 당시 현풍 8주의 호칭으로 영남 일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중 곽준의 집안은 1문3강(一門三綱)의 집으로 유명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으로써 호남의 황석산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 때 그의 두 아들 곽리상(郭履常), 곽리후(郭履厚)도 뒤따라 전사했다. 그리고 그의 딸과 며느리도 남편이 전사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뒤따라 죽었다. 이리하여 한 집안에 삼강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나라에서는 정려를 세워 길이 표방했음은 물론이다.

곽재우(郭再祐)는 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조식의 문인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붉은 구름무늬 비단갑옷을 입고, 투구에 백금 날개를 달고, 단숨에 천리를 달리는 백마를 타고 나타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곳곳에서 무찔렀다. 의령, 삼가, 초계, 창령 등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게릴라식 전투로 크게 기세를 올렸다. 종내 영남의 모든 고을이 함락되었지만 그는 끝까지 의령을 지켯다. 그 뒤 진주목사겸 경상우도조방장이 되었지만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을 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사직했다.

조정에서 여러차례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의 벼슬을 주었지만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한 때 자기의 경륜을 펴보기 위해 부총관(副摠官), 한성부좌윤, 함경도좌윤으로 나갔으나 조야가 어지러움을 탄하여 다시 은둔 생활을 했다.

조선시대 때 곽씨의 문과 급제자 수는 57명이며 본관별로는 현풍(玄風)이 30명, 청주(淸州) 14명, 해미(海美) 4명, 선산(善山)과 풍산(風山)이 각 3명이고, 본관 미상이 3명이다.

具(구)氏

구(具씨)는 세조에서 11대 영조까지 약 3백년간 많은 장수와 공신을 배출하여 무관집안으로 손꼽힌다. 구(具씨)는 문헌상으로나 현존하는 실제로나 능성(綾城) 단본으로 알려져 왔으나 창원(昌原)에 관적한 또 다른 구씨가 있다. 창원(昌原) 구(具)씨는 원래 구(仇)씨였는데 이조 중엽에 공훈을 세워 구성(具姓)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의 시조는 고려 벽상공신, 검교상장군인 구재유(具在裕)다. 그는 송나라 한림학사 주잠(朱潛)의 사위인데 주잠이 우리 나라에 귀화할 때 사위인 그도 따라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6대손 대에서 아홉파로 갈라진다. 그 중 도원수파·판안동파·좌정승파 등 3파가 이조에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들은 크게 번창하여 오늘날 구씨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이들 대에 와서 비로소 빛을 내기 시작하여 세조 때에 구치관(具致寬)이 영의정을 지내면서 정치의 중추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정승 2명을 비롯하여 공신 9명과 부마 3명을 배출했다. 공신 9명은 씨족수에 비하여 굉장히 많은 슷자이다. 더구나 중종반정 공신 구현휘(具賢暉), 구서영(具書永), 인조반정 공신 구굉(具宏), 구인후(具仁 ), 구인즐(具仁 )등 5명이 반정 공신이고, 나머지도 왕위 옹립과 관련이 있는 공신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조선시대에 총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냈는데, 그 중 진사가 144명, 문과가 55명, 무과가 363명으로 무과가 단연 우세하다. 그 중에서도 영조 때까지 장신(將臣)급이 9명이나 나왔는데 그 숫자는 그 때까지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한다. 이들 명단을 보면 구사직(具思稷, 광해조, 병사, 수사), 구굉(具宏, 인조조, 훈련대장, 어영대장), 구인후(具仁 , 인조조, 어영대장), 구인기(현종조, 총술사), 구문치(具文治, 현종조, 훈련대장, 어영대장),구감(具鑑, 숙종조, 총술사), 구성임(具聖任, 영조조, 금위대장,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 영조조,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으로 이들 장신은 대부분 한양의 경비 혹은 군사의 훈련을 맡은 사람들이라 자연히 왕권의 향방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구치관(具致寬)은 구씨 중 첫 번째 공신인데 예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에 오르고 세조의 심복이 되어 나중에 영의정에 까지 이르렀다. 뒤에 세조의 손자 성종이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어린 임금의 지위를 빼앗았던 세조의 선례가 되풀이 될까 두려워 가장 위협적 존재인 구성군 이준(세조의 손자로 28세에 영의정)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 때 그와 6촌간인 구문신(具文信)도 가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다.

구인후(具仁 )는 원래 김장생의 문인이었는 데 선조 때 국난을 당하자 문과를 뜻했던 그의 생각을 버리고 무과를 택해 인조반정 후 각기 무반의 요직을 두루 지냈고, 효종 때 병조판서에서 좌의정에 이르렀다. 구굉(具宏)은 형조·공조·이조판서 등을 전 후 아홉번이나 역임한 인물이다.

이와 같은 능성(綾城) 구(具)씨의 정치적 위세는 중종에서 인조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정조초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의 역모와 사도세자 사건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좌정승과 시조인 구?이 있다. 그는 고려 우왕 때 좌시중(左侍中, 좌의정급)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숨어 조선태조가 좌정승을 주어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다.

丘(구)氏

이 성씨는 편해구씨 단본으로 시조는 구대림(丘大林)이다. 그는 중국 한나라 사람으로 일본을 가다 풍랑을 만나 편해에 표착하여 그곳에서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가 6명이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은 성종 때 좌찬성에 이른 구종직(丘從直)이다. 그는 문장과 경학·역학의 대가였으며, 그의 아들 구달손(丘達孫)은 문과에 올라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숙손(夙孫)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邱(구)氏

고대 중국의 구(丘)씨 가운데는 공자의 휘(諱, 이름)가 丘인 것을 피해 구(邱)씨로 개성(改姓)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고 전한다.

菊(국)氏

본관이나 시조 등 자세한 것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현존하고는 있다.

鞠(국)氏

본관이 담양 국씨 단본으로 시조는 송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와 살게된 국양(鞠樑)이다. 그의 아들 대애(代崖) 국유(鞠 )가 공민왕때 부통사가 되어 도통사 최영과 함께 탐라(제주도)를 토격하고 병부상서겸 판의금부사에 올랐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자손에 학자로 강직한 국경례(鞠經禮)가 있으며, 그의 후손에 벼슬한 사람이 많아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번창했다.

國(국)氏

본관은 담양(潭陽), 풍천(豊川), 현풍(玄風), 영양(英陽), 금성(金城), 대명(大明) 등이 있다. 국씨는 원래 옛 백제의 대성(大姓)으로써 번성하였으나 고려 이 후 소멸하고, 현재는 통털어 2백 여명이 생존할 뿐이다.

역사적 인물로는 백제 무왕(武王) 때 벼슬한 국지모(國智牟)와 고려 태조(太祖) 때 원외랑(員外郞) 벼슬을 한 국현(國鉉)이란 사람이 있다.

君(군)氏

군(君)씨는 국세조사당시(1960년)에 나타난 성시이다.

弓(궁)氏

본관은 토산(兎山) 하나뿐이며, 시조는 고려 숙종 때의 우문감(右門監)을 지낸 궁제(弓濟)이다. 그의 후손 궁원일(弓元一)이 조선시대 고종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궁달초(弓澾楚), 궁억노(弓億魯), 궁현섭(弓顯燮), 궁인성(弓寅聖) 등이 있는데, 그 중 궁인성(弓寅聖, 평함, 순천출신)은 독립단의 평남 단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5년간의 옥살이를 겪고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權(권)氏

권(權씨)는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대성으로 꼽히면서도 안동(安東) 권씨와 예천(醴泉) 권씨 단 두 본 뿐이다. 그 두 본이 모두 고려조에 내려진 것이 특색이다.

안동(安東) 권씨의 시조는 권행(權幸)으로 원래는 신라 종성(宗姓)인 김씨였다. 고창군(現 安東) 별장인 그는 신라 말엽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데 격분하여 견훤과 싸우는 한편 고려 창업에 한창이던 태조 왕건에게 넘어갔다. 태조는 김행(金幸)과 함께 고려 신하가 되기를 자청한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에게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란 벼슬을 내리고 특히 큰 공을 세운 김행(金幸)에게 권(權)씨 성을 하사했다.

예천(醴泉) 권씨의 시조 권섬(權暹)은 원래 성이 흔(昕)씨 였다.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휘(諱)가 역시 같은 흔(昕)이어서 나라에서 그의 외가의 성인 권씨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동 권씨의 일부가 한 때, 왕(王) 씨가  되었던 일이 있어 재미있다. 권행(權幸)의 12대손인 권담(權潭)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넷째인 재(載)가 충선왕의 귀여움을 받아 그의 양자가 되었다. 왕은 그에게 왕?이란 이름을 내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바뀌자 다시 권씨로 돌아왔다. 오늘날 안동 권씨들이 왕?의 자손을 가리켜 왕권(王權)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것이다.

능동실기(陵洞實記)에 따르면 권씨도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가 무려 390명이나 되는데 그 중 359명이 안동이고, 12명이 예천이다. 단위 씨족별로 이만큼 화려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안동(安東) 권(權)씨

안동 권씨는 고려 말엽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그들은 10세를 전후하여 크게 14파로 갈라졌는데 그 중에서는 추밀원 부사공파(樞密院 副使公派)와 복야공파(僕射公派), 그리고 인가파(仁可派)에서 인물이 낳이 났다.

부사공파(副使公派)의 권담(權潭)은 그 자신은 물론 다섯 아들과 세명의 사위 등 아홉명이 모두 군(君)으로 봉해져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대 9명이 봉군된 일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는 게 안동 권씨들의 자랑이다.

권근(權近)은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이면서 그들 두사람에 버금가는 고려말의 대 학자다. 그는 고려조에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선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예문관대재학(藝文館大提學), 대사성(大司成),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등을 지내고 왕의 명령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했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에 뛰어났고, 양촌집(陽村集),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입학도서(入學圖書) 등 저서를 남겼다.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된 후 광주 목사가 되어 왜병을 무찌르고 전라도 순찰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행주산성에서 2청8백의 적은 병력으로 왜장 소조천(小早川)의 3만의 대군을 맞아 유명한 행주대첩(幸州大捷0을 올렸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예천(醴泉) 권(權)씨

시조 권섬(權暹)의 증손 맹손(孟孫)은 조선문종(文宗) 때 이조판서와 중추부원사를 지냈고, 맹손(孟孫)의 손자 오복(五福)은 호당(湖堂)에 뽑히고, 연산군 때 교리로써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 하여 극형을 받았다. 그는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斤(근)氏

본관은 청주 하나 뿐이고 역사에 자세히 나타난 것은 아직 없다.

琴(금)氏

이 성씨의 본관은 봉화(奉化), 계양(桂陽), 강화(江華), 안동(安東) 등이 문헌에 전하나 지급은 봉화금(奉化琴)씨로 일원화되었다. 시조는 금용식(琴容式)이며, 중시조 금의(琴儀)를 1세로 하고 있으며, 그는 고려 명종 때 사람으로 문장에 뛰어나 지공거시관(知貢擧試官)을 맡아보며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琴학사(學士)라고 불리었다.

조선시대에서는 금난수(琴蘭秀)와 금응협(琴應夾)을 들 수 있는데, 금난수(琴蘭秀)는 명종 때 장노원사평을 지냈다. 그 외에 많은 학자들이 있고,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奇(기)氏

행주로써 단본이다. 이 성씨는 고려조의 번창한 씨족으로 고종 때 기윤위(奇允偉), 기윤?(奇允?)이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1명의 영상(領相)과 22명의 문과 급제자와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단종 대 대사헌(大司憲)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맑고 깨끗한 관리였다. 그의 증손 기준(奇遵)은 을묘팔현(乙卯八賢)의 한 사람으로써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을묘사화로 여러 선비들과 화를 당해 유배되었다. 그의 아들 대항(大恒)은 부제학 및 대사헌등 여러 직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했다.

학문으로 유명한 기고봉(奇高峰)이 있다. 기자훈(奇自獻)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항일운동을 한 기정진(奇正鎭)은 구한말 사람으로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六大家)의 한 분이다.

箕(기)氏

본관은 행주(幸州) 하나뿐이며, 시조는 옛 기씨(箕氏)조선의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일컬고 있다. 그런데, 옛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전해오는 행주기(幸州箕)씨가 따로 있는데, 기씨(箕氏)는 이미 기(奇)씨의 동원(同源)인 것으로 짐작된다.

 吉(길)氏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단본이다. 이 성씨가 오늘날 명문이라 일컬어짐은 고려말 3은(三隱)의 한 사람인 길재(吉再, 야은(冶隱))의 음덕이 두고두고 빛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경상도 선산부 해평에서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지낸 길원진(吉元進)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들한테 성리학을 배웠으며,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와 문하주서(門下注書) 등을 지내다가 고향에 와서 효도를 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유도(儒道)의 참다운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의로웠으며, 효행(孝行)은 극진하였다. 吉?는 선조 때 문과에 올라 시평,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시대 때의 문과 급제자는 7명이다. 근대 인물로는 길선주(吉善宙)가 있다.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기독교 목사가 되었으며, 육영사업에도 노력했고, 3·1운동 때에는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로 강대보감(講臺寶鑑)과 말세론(末世論) 등이 있다.

金(김)氏

김씨의 본관은 무려 600여 본이 나와 있으나 시조가 뚜렷이 밝혀져 있는 것은 약 1백여 본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여러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金海) 김씨 계(系)와 신라의 알지(閼知)를 시조로 하는 경주(慶州) 김씨 계(系)두 갈래로 크게 나뉘어지며, 지금 사용되고 있는 김씨는 거의 모두가 수로와 알지계에서 갈리어 나간 것이라고 한다.

수로왕(首露王)

삼국유사의 가락국 기록에 의하면 가락에는 본디 9명의 촌장(村長)이 있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이들 9명은 어느 해 (後漢 建武 18년) 구지봉(龜旨峰)이란 산에 올라 신탁(神託, 신의 뜻에 맡김)에 의해 가락국을 다스릴 군장(軍長)을 얻고자 의식을 거행했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6개의 해만한 황금알을 담은 금상자가 내려왔다. 이튿날 이 여섯알이 동자(童子)로 변하여 그 중 먼저 나온 수로(首露)를 가락의 임금으로 삼았고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각각 5가야(伽倻)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김알지(金閼知)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라 제 4대 탈해왕(脫解王) 9년 봄, 어느날 새벽 경주 계림(鷄林)에서 이상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곳에 가 보았더니, 울창한 소나무 숲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수탉이 울고 있었다. 그 궤를 가져와 열어 보니 뜻밖이도 용모가 비범한 사내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하늘이 내려주신 아들"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이 아이가 곧 알지(閼知)다.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金이라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경주 김씨의 원조(元祖)인 김알지는 신라 왕실의 박(朴), 석(昔), 김(金) 세성중의 하나인 바로 그 김씨 이다.

간성김씨

시조 김생명(金生溟)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금강위(金剛尉)를 지냈다.
간성군(杆城君) 길(吉)을 시조로 전해지는 문헌도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간성으로 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이 함남 안변군 문산면 일원에 45호, 함남 안변군 신모면 용포리에 54호가 살고 있었다.

감천 김씨

시조 김만추(金萬秋)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문과 급제자로 전하며 후손들이 본관을 감천이라 했다.

강릉김씨

강릉 김씨의 시조 주원(周元)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이다. 그는 신라 혜공왕 13년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고, 신라 선덕왕 6년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으로는 시조 주원의 8세손 상기(上琦 )가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을 거쳐 개성부사가 된 후에 상서예부원외랑, 기거사인, 기거랑 등을 역임하고, 1102년(숙종 7) 이부낭중 겸 시강학사로 승진하고, 중서사인이 되었다. 1105년 숙종이 죽자, 고부사로 요나라에 다녀와서 예부시랑 간의대부에 올랐다.  예종 때 한림 학상승지, 병부, 예부, 호부의 상서, 정당문학,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주국에 올랐다. 인종 때 판비서성사 감수국사의 한직에 있다가 뒤에 익성동덕공신이 되었고, 삼증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문하시중에 이어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가 되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학자로서 중요한 국사마다 반드시 왕의 자문을 받았다으며,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고(金沽)도 평장사를 지냈다.

한편 인존의 아들 3명도 모두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조선 때 와서 가문에 우뚝선 인물은 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시습(時習)을 들수 있다.

5세에서 13세까지 성균관 대상성 김반(金泮)의 문하에서 [공자] [맹자] [시경] [서경] [춘추]를, 사범지종으로 일컬어진 윤상(尹祥)에게서 [예서]와 [제자백가]를 배웠다. 세조 1년 나이 21살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세조 4년 [탕유관서록후지]를, 세조 6년에는 [탕유관동록후지]를 썼으며, 세조 9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를 저작했다. 세조 4년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세조 11 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여 <산거백영>을 썼다. 성종 12년에 47세에 환속, 성종 16년에 [독산원기]를 썼다. 그후 수차에 걸쳐 <금오신화>와 <매월당집>< 십현요해>등의 명작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으며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ㆍ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정조 6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월의 육신사에 재향되었다. 시호는 청간이다.

예조 판서를 역임한 첨경(添慶)의 현손 시혁(始奕)은 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 및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시환의 아들 상성(尙星)은 호조 및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시영의 아들 상집(尙集)은 영조 3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을 거쳐 영조 37년 정언이 되어 이듬해 경현당의 문신 제술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날렸다. 시혁의 아들 상철(尙喆)은 영조 1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지평ㆍ교리에 이어 영조 29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 한성부 판윤, 이조,병조,형조의 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영조 42년 우의정에 오르고 영조 48년에 좌의정 영조 51년(177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 때 우리나라 문물과 제도를 부분별로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 찬칩청을 두어 1770년 (영조 46) <동국문헌비고>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왔다. 1781년 (정조 5) 기로소에 들어간 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외 계락(啓洛)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우참찬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사백가에 통달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철명(哲命)의 아들 기종(起宗)이 광해군 10년 문과에 장원하고 이괄(李适)의 난 때 무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에 올라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조선의 문신 행(行)은 국평(國平)의 아들로 명종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8년 무장현감이 되어 안평대군의 중도가를 간각하여 간행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강서김씨

시조 김반은 자가 사원(詞源), 호는 송정(松亭)이다. 그는 1399년(정종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05년(태종5)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선사(繕寫)하여 성균관 주부가 된 후 성균관에 40여년간 재직했다. 세종때 여러차례 대사성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김구(金鉤), 김말(金末)과 함께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었으며, 만년을 강서(江西)에서 보냈다. 그의 선계와 관향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본관이 강릉으로, 거주지는 강서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강릉김씨에서 분적, 그가 살던 강서를 본관으로 한 것 같다. 강서의 학동서원(鶴洞書院)에 제향, 경북 영주군 풍기읍 창낙2동 915번지에 후손 김윤식이 살고 있다.

강양김씨

시조 김제(金濟)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지중추를 지냈다고 전할 뿐 연대와 사적은 상고할 수 없다. 한편 경주 김씨 계림군(鷄林君) 파조 균의 후손이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선계를 설정하여 거주지인 강양(江陽:합천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하고 제를 시조로 한 것으로 짐작된다.

강음김씨

시조 김처곤(金處坤)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김양묵(金養默)의 아들로 1768년(영조44) 정시문과에 병과로, 1800년(정조24)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음(江陰:金泉)으로 한 연유와 전후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 후손 김근오(金根五)가 조선 철종조에 진사, 김응룡(金應龍)이 서화에 능했다. 그 외에 찰방 정윤(正允)의 후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강화김씨

강화김씨(江華金氏)는 같은 신라계 김씨이면서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는 개성파(開城派), 김송학(金松鶴)을 시조로 하는 용천파(龍川派), 그리고 김광(金光)을 시조로 하는 숙천파(肅川派)등 세 파가 있는데 그 중 용천파와 숙천파는 같은 혈족이면서도 그 상계의 휘자(諱字)에 차이가 있어 일원화하지 못하고 족보를 따로 하고 있다.

개성파(開城派)

개성파 시조 김성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은열의 8세손 세응(世應)의 둘째아들로 1144년(고종24)에 출생하여 고려 명종조에 참지저사(參知政事)를 지내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하음은 강화(江華)의 옛이름이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고 한다.

용천파(龍川派)

용천파 시조 김송학(자:千生)은 1497년(연산군3)에 출생,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내다가 1542년에 의주(義州)로 들어왔다. 그의 조부 태후(泰厚)는 김임경의 8세손으로 장연(長淵)에서 출생,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은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강화로 몸을 피했지만 류자광(柳子光)의 탄핵으로 용천(龍川)에 유배당했다. 이듬해 사면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용천에서 세거하면서 분관을 강화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숙천파의 족보에 의하면 용천파 시조 송학의 조부 태후의 휘가 옥점(玉點)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유래는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계통이 아닌가 싶다.

숙천파(肅川派)

숙천파는 개성파와는 달리 명종(鳴鍾)계의 분적종이다. 숙천파 족보에 의하면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의 후손인 정숙공(貞肅公) 김인경이 고려 고종 초에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조충(趙沖)과 함께 이를 토평한 공으로 장연군(長淵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장연으로 삼았으나 1232년(고종19) 몽고군의 난을 피해 왕이 강화로 몽진할 때 인경의 아들 궤(軌)가 상서(尙書)로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간 후에 그 자손이 그곳에 남아 살면서부터 본관을 강화로 고쳤다.

그 후 궤의 6세손 영직(永直)이 강화에 경성으로 이사해 살다가 그의 아들 도정공(都正公) 옥점(玉點)이 다시 용천으로 이거하여 용천파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궤의 현손 윤의 둘째아들 참판공 광(光:永直과 형제간)이 숙천으로 유배당해 숙천파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개령김씨

시조 김현선(金玄繕)은 고려조에 장군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혹은 경주인으로 전할 뿐 세계를 알 수 없다.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에는 그가 개성김씨로 시조로 기록되어 있고,<개성김씨세보(開城金氏世譜)>에 고려조의 인물로 현기(玄器), 현덕(玄德)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 김현선은 그들과 형제간으로 개성김씨에서 분적,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본관을 개령(開寧)으로 한 것 같다.

개성김씨

개성 김씨 시조 용주(龍株)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으로 책록되었고 개성부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한 후 개성군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은 의성 김씨에서 분적하여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손자 준(畯)은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하였으며 준의 세 아들중 차남 지경(之慶)이 상서를 지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滉)이 조선 명조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거쳐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아우 유(濡), 지(漬)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삭녕에 주둔하여 학행으로 유명했으며 조헌(趙憲)등 우수한 제자를 배출, 세상 사람들이 어촌선생이라 불렀다.

조선의 이름난 화가로 상의원 별제에 이른 응환(應煥)은 정종 12년 왕명으로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일본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다 부산에서 죽었다. 이때 김홍도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여 장사를 치른 후 혼자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외 화가로 이름난 득신(得臣)은 인물화를 잘 그려 심사정(沈師 正)ㆍ정선(鄭敾)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로 불리웠고 그의 동생 석신(碩臣)은 풍속화로 유명했다.

결성김씨

결성김씨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이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녕김씨 시조 김시홍의 10세손 김연의 둘째아들 김예철의 후손으로 전하는 상주파 외에 <김씨분종보>에 의하면 이조판서를 지낸 김달손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결성으로했다. 평북 위원군 화창면 문명리에 살던 위원파는 6·25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유실하여 중간 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

경산김씨

시조 김인궤(金仁軌)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8자 일선군(一善君) 추(錘:善山金氏 시조)의 아들 위옹(渭翁:三陟金氏 시조)의 9세손 윤성(允成)의 맏아들로서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전법총랑(典法摠郞), 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좌복야, 상장군등을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육화(育和)를 1세조로, 본관을 경산(慶山)으로 하여 삼척김씨(三陟金氏)에서 분적했다.

고려 말의 김룡(金龍)은 이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로 1세조 육화의 7세손이며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 태자태사(太子太師)등을 지낸 영수(英秀)의 증손이다. 그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녘으로 몽진할 때 중랑장으로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고,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해적의 노략질을 금하도록 교섭했다. 또 정료위(定遼衛)에 사신으로 가서 고가노(高家奴)와 수교를 맺는 등 외교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전고대방(典故大方)>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조에 찬성사를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김이(金怡)를 시조로 하는 춘양김씨(春陽金氏)가 있는데, 김이의 상계가 경산김씨의 시조 인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혈족이면서도 이의 출생지가 복주(福州)의 속현 촌양이기 때문에 사적(賜籍)지는 경산이나 출생지인 춘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춘양김씨가 경산김씨의 분적종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한 김한(金翰)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경산김씨가 문헌에 보인다.

경주(慶州) 김(金)씨

김알지계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인 경주김씨는 파계가 복잡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서로 계통을 알지 못하는 분파를 포함하여 대충 8∼9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파로는 은설공(殷設公)파, 태사공(太師公)파,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영분공(永芬公)파, 호장공(戶長公)파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역사상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설공파와 태사공파가 으뜸이며, 경주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재상과 3명의 왕비가 모두 이 두파에서 나왔다.

은설공(殷設公)파

은설(大安君)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로 전한다. 이 은설공파는 고려 때의 장군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피가 대표적이다.

김순웅의 12대손에 김균이란 이가 있다. 그는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 등에 올라 좌찬성을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세 사람의 상신(相臣 : 재상급 신하)과 숱한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김종순(金從舜)은 김균의 손자로써 세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 : 결백한 관리)에도 뽑혀져 있는데, 그 자손에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신하가 잇달아 나왔다. 그의 아들 치운(致運)은 이조참판, 치운의 아들 천령(千齡)은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천령의 아들 만균(萬鈞)은 중종 대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판서,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명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명원(命元)이 선조 때의 좌의정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이퇴계의 문인(門人)으로 명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란공신(平亂功臣)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호조·예조·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그는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겸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공을 세우고 우의정이 되었다가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유학에도 깊었으며, 특히, 병서(兵書)와 궁마(弓馬)에 능했다. 그의 아들이 수렴(守廉)이며, 손자가 남중(南重)이다.

김수겸은 인조 때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남중은 광해군 때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효종 때 공조·예조·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김주신(金柱臣)은 만중의 손자다. 숙종 때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내면서 어진 관리라고 칭찬을 받았다. 그의 딸이 숙종의 비(妃 : 仁元王后)가 되자 국부로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총관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또 문장에도 뛰어났다. 김주신의 손자로 정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효대(孝大)의 아들이 사목(思穆)이다.

김사목(金思穆)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부승지, 호조참판을 거쳐, 정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황해도·경기도·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김?집(金?集)은 사목의 손자다. 그는 헌종 때 좌참찬(左參贊),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을 역임했으며, 역사학에 밝았다. 김창희(金는昌熙)는 정집의 아들로써, 고종 때 벼슬에 올라 호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임오군란때는 청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는 영접관이 되고, 뒤에 공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다. 김영작(金永爵)은 김사목(金思穆)의 조카로써 철종 때 대사헌·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시와 글에 능하며 소정집(邵亭集)이 전한다. 김홍집(金弘集)은 바로 영락의 아들이다. 그는 개화파(開化派)의 거두(巨頭)로써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면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뒤 사임했다. 그 뒤 동학혁명의 혼란을 틈타서 침투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1∼2차 친일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써 갑오경장의 혁신정책을 수행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정책을 폄으로써 국민대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은 국민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갖가지 사회제도의 개혁과 양력 사용, 종두법 및 우편제도의 실시 등은 우리 나라 근대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사공(大師公)파

고려말의 절개가 굳은 신하로 유명한 김자수(金自粹)는 태사공의 8대 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상시(左常侍 : 정 3품)에 이르렀다가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에 은거했다. 뒤에 조선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나라(고려)망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영유(金永濡)는 자수의 손자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지내고 황해도·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성종 때 두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개유 등을 지냈다. 김임(金任)은 김자수의 증손으로 사사를 지냈고, 세필(世弼)은 自의 현손으로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사화(士禍)때 마다 임금의 잘못을 규탄하다가 유배 되었다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홍랑(金弘郞)은 자수의 8세손이다. 그는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그의 자손에서만 3명의 재상과 왕비 한사람이 나와 은설공파의 좌의정 김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김흥경(金興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승지·대사간 등을 거쳐 경종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되었으나,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이듬해 우참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영조의 탄평책(蕩平策)에 반대 했다가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한개(金漢 )은 흥경의 아들로써 영조의 딸과 화순숨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 제조(提調) 등을 지냈는데, 글씨에 뛰어나 八법을 다 잘써 애익주문(哀謚州文)을 자주 썼다. 김석주(金碩柱)는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김한개(金漢 )의 아들이요. 김석주(金碩柱)의 아들이 노경이다. 김노경(金魯敬)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 육(六)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순조 말엽에 권력을 전횡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헌종 때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숨졌으며, 철종 때에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글씨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이 김정희다.

김정희(金正喜)는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設書), 검열(檢閱), 암행어사(暗行御史) 등을 거쳐 헌종 때 대사성·이조참판에 이르렀는데,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3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는 등 정치적으로 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는 스물네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당세의 거유(巨儒)들과 사귀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했고, 서예(書藝)에 있어서는 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어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림에 있어서는 난초와 대, 그리고 산수가 뛰어났고, 사실(寫實)보다는 품격(品格)을 위주로 남종화(南宗畵)의 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북한산비(北漢山碑)가 종래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것이라는 설을 부인하고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밝혀냈다. 그는 아호가 추사(秋史), 완당(玩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 백여개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순조 때 형조·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시와 글에도 뛰어났던 김어응(金魚應)은 노경과 4촌간이며, 그의 아들 김도희(金道喜)는 헌종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김한구(金漢耉)는 영조의 국부(그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貞純王后)로써 어영대장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순조 때 우의정에 오른 김귀주(金龜柱), 영조 때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김유경(金有慶) 등이 있다.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중종 때의 학자인 김정(金淨)은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로써 대표 인물인데, 그는 중종 2년에 문과에 급제, 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했다. 조광조(趙光組)와 더불어 미신의 타파, 향약(鄕約)의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와 글에도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호장공(戶長公)파

고려 인종 때의 명신(名臣)이요 사학자로 유명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이 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때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있으면서 국부 이자겸(李資謙)이 군신(君臣)의 예의를 지키지 않으므로 이를 충고 했고,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했으며,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로써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난을 평정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오르고 뒤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을 마쳤다. 그는 문장으로도 이름을 떨쳐 당시의 송나라에까지도 크게 알려졌음은 물론 음악에도 퍽 능했다고 한다. 태위(太尉)의 벼슬을 지낸 부?은 그의 형이고 사공(司空)을 지낸 부의(富儀)는 그의 아우이다. 삼형제가 모두 당대의 손꼽힌 학자이고 명신으로써 함께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계림김씨

시조 김구사(金九思)는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鐘)의 17세손이다. 그는 숙천부사를 지내고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김종(金琮)의 손자로 벼슬은 승정에 이르렀다.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그가 계림김씨 시조로 되어있다. 1805년(순조5) 대전두후평복(大殿痘後平復)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경리(金璟履)의 본관이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계림(鷄林)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경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계림으로 한 것 같다.

고령김씨

시조 남득(南得)은 고려때 전리좌랑을 지낸 선(宣)의 아들로 고려 충해왕 1년에 진사가 되어 감찰집의를 거쳐 공민왕때 양광도 안렴사를 역임하고 판개성 부사문하평리에 올랐다. 그후 원나라에 가서 예부상서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에 책록하고 고양부원군으로 봉하여 득어영남지의라고 사명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득의 아들 무(畝)가 대사간을 지냈으며 그의 4명의 아들도 모두 벼슬에 올라 나라에 충성했다.
장남 사행(士行)은 세종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거쳐 사복시정, 둘째 사문(士文)은 사헌부의 집의를 역임했으며 사충(士忠)과 사신(士信)도 승지와 군수를 지냈다. 사행의 맏아들 자숙(子肅)은 세종 11년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추천되어 형조참의에 이르렀고, 자숙의 아들 형생(型生), 장생(莊生), 양생(楊生) 3형제도 모두 벼슬을 역임했다. 장생의 아들 수는 중종 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군수를 지내고 진주목사를 거쳐 순천부사를 지낸 후 절충장군등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남득(南得)의 6세손 수문(秀文)은 중종 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후 종성에 침입한 야인들이 사람을 납치해 가자 영달만호로서 역전하여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왔다. 명종 10년 을묘왜변때는 제주목사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에 특진하였고 명종 1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걸쳐 호인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수문의 조카 면(沔)은 조선의 이름난 의병장으로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이며, 경원부사를 역 임한 세문(世文)의 아들이다. 정구와 가까이 지내며 이황문하에서 성리학을 연마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사퇴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 곽준, 문위(文緯)등과 거창,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금산, 개령간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에서 대치, 공격해 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 또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고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 전라도의 의병과 함께 금산, 개령에 진주, 선산이 적을 칠 준비를 마치고 돌연 병사했다. 후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외 군자감정을 지낸 연과 판결사 양이 있고 무과에 급제하여 지훈련원사를 역임한 결(潔)이 유명하다. 자는 영조 18년 무과에 급제하고 하동군수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후 어영별장에 이르렀다.

고산김씨

시조 김환(金紈)은 윤옥(潤屋)의 아들로서 1510년(중종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문적(文蹟)이 없어서 연원과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의하면 이 씨족이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일곡리에 29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고산김씨(高山金氏)는 황간김씨(黃澗金氏)와 동원이거나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고산김씨 시조도 김환이라 되어 있고 또 황간김씨 시조 역시 김환이라 되어 있으며,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김환의 본관이 황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에는 황간이었는데 중간에 고산으로 개관을 하였거나 아니면 고산·황간을 병용하였던 것 같다.

고성김씨

시조 김말로왕은 김수로왕의 막내동생으로 설화에 의하면 구지봉에 다섯 형들과 함께 탄강하여 소가야국을 창건하고 도읍을 고성으로 정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가문을 이어온 대표적 인물은 김말로왕의 34세손으로 조선의 태조때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삼도수군 도절제사에 오른 빈길이 유명하다. 그는 태조 7년 멸악산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병조 판서,정헌대부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되어 낙안의 삼충사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희량은 조선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 부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희량의 동생 문량은 음보로 사직이 되어 태조 6년 문관에 급제하여 부사,도사를 지내고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니면서 외교적 공을 세워 예문관 교관을 지낸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후손 경현은 이만주의 난에 어유소를 도와 공을 세우고 함길도 순문중군을 역임한 후 가선대부가 되었다.
세웅은 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난에 북청하여 공을 세워 노성 현감을 지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선조때 왜적을 격퇴하여 수문장에 오른 사홍과 순천부사를 지낸 우추가 유명하다.

그외 효자로 이름난 복광은 향당에서 효행비를 세울 정도로 효행이 뛰어나, 성리학에서 평생을 바친 학자 민환과 함께 고성 김씨를 빛나게 하였다.

고양김씨

시조 김용한(金龍翰)은 경순왕의 후손이라 전한다. 그는 김진찬의 아들로 1755년(영조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직강·정랑을 지냈다.

문헌이 없어 전후 세계를 알 수 없고, 또 본관을 고양(高揚)으로 하게 된 연유도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이 평남 평원군 동암면 용삼리에 21호가 살고 있었다.

공주김씨

시조 김의손(金義孫)은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金之岱)의 9세손이다.

<공주김씨세보(公州金氏世譜)> 에 의하면 경순왕의 제4자 은열(殷說)의 8세손 지대가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로 오산군(鰲山君:오산은 청도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청도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지대의 8세손 호강공(胡剛公) 김점(金漸)의 둘째아들 의손은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을 지내고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 의손에게는 여의(麗儀), 일동(逸東), 응동(應東),용(龍), 구(龜), 타, 봉(鳳), 기(麒)등 아들 8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용, 구, 타는 아버지의 작위를 따라 공주김씨로 분적하였고, 그 나머지는 청도김씨를 계승했다고 한다.

공주김씨는 의손을 시조로 하고, 용을 공주파(公州派), 구를 평양파(平壤派), 타를 곽산파(郭山派)의 1세조로 하고 있다. 용은 후손이 공주에 살았기 때문에 공주파, 구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공주의 부전촌(浮田村)에서 평양성 밖의 인현리(仁賢里)로 이거하였기 때문에 평양파, 타는 예조정랑을 지내고 청주로부터 곽산으로 이주하여 곽산파라 하였다.

공주김씨는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과 급제자 10명, 공신 1명을 배출하여 관서지방의 저족(著族)으로 꼽힌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해군 때 부차(富車)의 전투와 인조 때 정묘호란 당시 순절, 오열사(五烈祠)에 제향된 김룡(金龍), 김무의(金務義), 김천경(金天慶), 김응철(金應哲), 김응삼(金應參)등을 들 수 있다. 김룡과 그의 종질 김무의는 1618년(광해군10) 명군(明軍)과 연합하여 건주위(建州衛)을 치기 위해 명나라에 원병을 파병할 때 김응하(金應河)의 막료로 참전, 심하(深河)에서 전사했다. 김천경과 그의 재종제 응철·응삼 등은 인조조 정묘호란 때 능한산성(凌漢山城)을 지키다가 동시에 순절했다.

광산(光山) 김(金)씨

광산(光山) 김(金)씨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가문중의 하나이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대제학 7명을 낳았는데 그들 모두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한 사람의 자손이다.대제학 7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씨 말고도 전주(全州) 이(李)씨와 연안(延安) 이(李)시가 있으나, 한 사람의 자손에서만 7명이 나온 예는 광산김시 뿐이다.

또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 아들 신독제(愼獨齊) 김집(金集)이 다같이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로써 이조 중기 이후 손꼽히는 석학중에는 이들의 제자가 많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본관별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남양홍시, 안동김씨, 청주한씨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또 그의 후손에서 조선시대에서만 상신·대제학·청백리·왕비 등이 나왔다.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세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 에는 신라 49 대 헌강왕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선계는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시조 김흥광은 당시 신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광주 서일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평장사를 8명이나 역임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평장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손에서는 시조 흥광의 아들 식(拭)이 신라에서 각간을 지냈고, 손자 길(佶)은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준(埈)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에 이르렀으며, 책(策)의 아들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 전중시어사를 거쳐 1043년(정종 9) 재사시랑 평장사, 동년 11 월에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양감(良鑑)은 정준의 아들로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ㆍ좌간의대부에 이어 서북로 병마사를 지내고, 1074 년(문종 28) 태복경으로 사은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082 년(문종 36) 좌복야에 올라 중서시랑 및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1087 년(선종 4) 판상서 호부사를 거쳐 수태위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약온(若溫)도 고려의 명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하시중까지 역임하였다.

의원(義元)은 양감의 아들이며 약온의 동생으로 일찍이 문과에 올라 23세에 조호부 도감판관을 거쳐 감찰어사로 연천에서 여진족을 물리쳐 공을 세워 1122 년(예종 17) 병부시랑이 되고,이어 호부상서, 지추밀원사, 문하평장사에 이르러 치사하였고 그의 아 들 광중(光中)은 간의대부와 비서감을 역임하였다.

주정(周鼎)은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권지병마녹사에 오르고 1264 년(원종 5)에 문과에 장원하여 이부시랑 등을 거쳐 1278 년(충렬왕 4) 행종도감사가 되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좌부승지가 되었다. 대린(大鱗)의 아들 연(璉)은 충렬왕 초에 경상도 도지휘사로 동정하려 할 때 출정을 앞둔 어느 날 밤 차고 있던 금어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하기를 "내 몸에 계급이 떨어졌으니 패전의 징후다" 하고 출정장군을 사퇴한 명신으로 그후 첨의시랑ㆍ찬성사를 역임하였다.
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를 거쳐 영암부사를 지내고 1271 년(원종 12) 진도에서 패한 삼별초가 제주로 몰려들자 안찰사 권단의 명으로 2백 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 태현(台鉉)은 1275년(충렬왕 원년) 15세로 감시에 수석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 판도총랑, 우승지를 거쳐 1302년 밀직부사가 되었다. 1302년(충열왕 28) 성절사로 원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황제의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중서성의 허락으로 행재소에 가게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는 그 충성을 크게 치하하였으며, 뒤에 원나라로부터 정동행 중서성 낭중을 임명 받았으며, 지밀직사사, 판삼사사를 거쳐 충숙왕 때 중찬에 이르렀다. 저서에 <동국문감>이 있다. 사원(士元)은 찬성사를 역임한 연의 아들로 고려 충선왕 때는 첨의찬성사를 역임하였다.

문정공 태현(台鉉)의 아들 광재(光載)는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사복시승을 거쳐 도관정랑에 올랐다가 1344 년(충혜왕 복위 5) 충목왕이 즉위하자 판도판서ㆍ밀직부사 등을 역임하고 충정왕 때 참의평리ㆍ전리판 서 등을 지냈다. 공민왕 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을 짓고 거상하여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로 정표를 세우려 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를 역임한 회조(懷祖)의 아들로 1376 년 (우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응교를 지냈으며 음률에 밝아 아악을 교정하고 의례에도 정통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황주에 은거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킨 약시는 두문동 칠십 이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 순조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국광(國光)은 감찰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어 감찰ㆍ지평 등을 역임하고 1467 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병조판서로서 평정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좌찬성에 이르러 광산군에 봉해졌다. 세조가 죽자 신숙주 등과 워상이 되어 서정을 맡았고 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1471 년(성종 2) 좌리공신 1 등이 되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경국대전>을 편찬하였다. 그의 동생 겸광(鎌光)은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세조 때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군기감정 및 우부승지를 거쳐 1471 년(성종 2) 좌리공신이 되어 광성군 에 봉해졌다.

예몽(禮蒙)은 1432 년(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중시와 발영시에 등제하고 이조 및 공조판서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대대로 석학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한 기호학파의 대가 장생(長生) 은 광산 김씨의 우뚝선 인물이다.

조선의 학자이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1548 년(명종 3) 대사헌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을 전수 받고,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 예학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 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 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창릉 참봉ㆍ순릉 참봉 등을 거쳐 동몽 교관ㆍ정산 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군사감 첨정, 1597년 남야 부사 등을 역임. 이듬해 안성 군수로 있다가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 전부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청백리에 녹선, 3년 후 익산군수를 지내고, 1609 년(광해군 1) 회양(淮陽) 철원(鐵原)의 부사를 역임, 1613년 계축옥사에 심문 받았으나 무혐의로 누명을 벗은 뒤 관직을 사퇴, 연산에 은퇴하여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보직, 사업ㆍ상의원정 등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냈다. 그후 다시 사퇴, 낙향했다가 특명으로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 고 다음해 행호군에 보직,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했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하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유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고 안성의 도기서원, 연산의 돈암서원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은 18세에 진사가 되고 참보에 이르러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으로 등용되어 지평ㆍ집의를 거쳐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공서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 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 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장생의 아들 반(槃)은 집의 동생으로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여섯 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 때 대사성을 지내고 효종 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에 추봉되어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 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를 거쳐 형조참의ㆍ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에 올랐다. 1674(현종 15) 예조참판때 죽은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을 주장했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이 채택되자 양성에 유배되었다.

조선의 이름 난 소설가 만중(萬重) 은 익겸의 유복자로 자는 중숙(重叔)이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자원,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삼남의 진정을 조사했다. 이듬해 겸문학ㆍ헌납을 역임, 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 참의, 1683년 공조 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 사실까지 겹쳐 처벌됨을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에 유배, 1688년 방환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에 유배, 여기서 <구운몽>을 집필한 후 병사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구운몽>도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 이라는 문학관을 피력했다. 1706년(숙중 32)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다.

조선 초기 한호(韓濩)ㆍ양사언(楊士彦)ㆍ안평대군과 함께 4대 서가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을 역임한 계문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를 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에서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로 불렀다.

그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만수(萬壽)는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덕령 은 붕섭의 아들이며, 조선의 병장이며, 자는 경수(景樹), 붕섭(鵬燮)의 아들이다. 광주 출신. 성혼(成渾)의 제자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의 명령을 받았으며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호익장군의 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 선전관에 임명된 후 권율의 휘하에 들어거 일본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ㆍ고성지방을 방어했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수차에 결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을 장살하여 한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이던 신경행(新景行)의 무고로 피체,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사실을 부인, 대신들 간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옥사했다. 1661년(현종 2)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 참의에 추증, 1678년(숙종 4) 벽진서원애 제향되었다. 1681년 병조 판서에 가증, 영조 때 의열사에 재향되었으며, , 177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고종때 대제학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를 역임한 영덕(永德)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등은 가문의 기백을 지킨 인물들이다.

광주김씨

시조 김녹광(金祿光)은 신라 제 56대 경순왕의 제5자 김석(金錫:義城金氏의 시조)의 6세손 언미(彦美)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236년(고종23) 상장군으로서 몽고군을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의성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였다.

광주김씨는 고려 말에 성세를 누리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겨우 문과 급제자 4명밖에 내지 못했는데 이는 서북 지방민의 관계 진출의 억제 정책을 써온 조선시대의 정책적인 영향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광주김씨들은 서북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계 진출이 어려웠던 것이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시조의 아들 김굉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고, 굉의 아들 김훤(金暄)은 원종·충렬왕 양조에 걸친 명신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예서(隸書)에 능한 그의 자찬묘지(自撰墓誌)가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남물(金南物)은 훤의 아들로서 20세에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거쳐 안동부사를 지내고 만년에 안동으로 낙향했다. 그의 아우 김개물(金開物)은 과거에는 누차 낙방했으나 세자(世子)때부터 그를 총애하던 충선왕이 즉위하자 감찰사(監察使)에 기용되어 충숙왕 때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으며 시·서·화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를 들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때 울산 군수로서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도총관(都摠官), 호위대장(扈衛大將)등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김수겸(金守謙)은 안동영장(安東營將)을 지내고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공신이 되었다.

김기(金埼)는 임진왜란때 판관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절했다. 어모장군·훈련원정에 추증되었으며,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수인은 태허의 조카로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는 폐륜을 범하자 낙향하여 선비의 기개를 보였다.

교하김씨

시조 김맹정(金孟貞)은 신라 제 56대 경순왕의 제 2자 굉의 14세손이며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7세손이다. 그는 1136년(인종14)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서경(西京:현 平壤)에서 반란을 일으킨 요승 묘청(妙淸)과 그 잔당 조광(趙匡)등을 토평한 공으로 교하군(交河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교하(交河)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현손 김득성(金得成)이 있다. 그는 1319년(충숙왕 복위 8) 산원(散員)이 되고, 그 후 사헌부의 감찰(監察)·규정(糾正)·장령(掌令)등을 거쳐 전객령(典客令)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김전(金田)은 충목왕 때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김관(金琯)은 전의 손자로 우왕 때 직장(直長)으로 등용되어 조선 세종 때 곡산부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모두 3명으로, 김정석(金廷碩)이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김성구(金成九)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김희신(金喜臣)이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금릉김씨

일세조 김중구(金仲龜)는 가락국 제 15대 무위왕(武威王:武得)의 후손이다.

무위왕은 양왕(讓王)의 제 3자로서 562년 솔지왕(率支王:率友)이 왕위에 오른 즉시 왕좌를 버리고 방장산(方丈山)의 태조묘(太祖廟)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가락의 구신(舊臣)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해 가락국이 신라와 병합되고, 진흥왕이 가락국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 무위왕에게 시랑 겸 대총관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했는데 그의 아들 창현(昌玄)이 관적을 금릉이라 하고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이 확실하지 못하므로 후손 중구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김중구는 고려 고종조에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문하시랑 평장사·서경유수 등을 역임하면서 충절과 청검으로 명성이 높았고, 태자태사에 올라 금릉군(金陵君)으로 봉해졌다.

금산(金山)김씨 1

시조 김문부(金文富)는 경순왕의 제 5자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후손 용주(龍珠)의 7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원외랑(員外郞)을 역임, 후손들이 본관을 금산이라 했다.

후손 김시창(金始昌)은 자가 정양(廷楊), 호는 남정(嵐亭)으로 조선 명종 때 효자로 부모상에 여막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맹호가 보호했다. 1519년(중종14) 제현(諸賢)의 추천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후 누차에 걸쳐 추천하였으나 끝내 불응, 명종 때 정려가 명해졌다.

금산(金山)김씨 2

시조 김신(金侁)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 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인 김정보(金正寶)의 13세손으로 고려 원종때 원나라에 들어가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이 되어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조정에서 그의 출신지인 부리현(富利縣)을 금주(錦州)로 승격시켜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금주가 금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금산(錦山)으로 하였다.

금산 김씨는 농암(籠巖) 김지(金摯) 대에 이르러 번영하였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금주의 진락산(進樂山)으로 은거,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의 손자 김효공(金孝恭)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광주판관(廣州判官)·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청파(淸坡) 김희옹(金希雍)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고 경기감사·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석곡(石谷) 김감(金鑑)은 광해군 때 이조정랑으로 사신 이상길(李尙吉)의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후 정치가 문란함을 개탄하고 사임했다가 인조반정 후에 다시 기용되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금성김씨

시조 김대경(金臺卿)의 자는 중시(仲始), 호는 월당(月塘)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나주김씨의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15세손으로 1326년(충숙왕13)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후손들이 금성(錦城)에 살면서 나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금성으로 했다. 무안의 우산사(牛山祠)에 제향, 후손이 현재 금성시에 살고 있다.

김녕 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경순왕의 네째 아들인 은열의 8세손 이며 동정공 봉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인조 때 평장사를 역임하고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명종때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여 일천호의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에 봉해졌다. 그후 금주에 김녕대도호부가 설치되므로 자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여 세계(世係)를 이어오다가 고려 말 지명이 김해로 바뀌면서 관향을 김해로 하였다. 그러나 수로계의 김해 김씨와 혼동되어 선김ㆍ후김으로 칭하다가 조선 고종 2년에 왕명으로 본관을 김녕으로 다시 환원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흥의 아들 상이 고려 인종 때 병부 상서를 지내고 평장사에 올랐으며 그의 동생 수는 사헌부 지평을 거쳐 찬성사에 추증되었다. 상의 증손 귀갑(貴甲)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를 거쳐 밀직사사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순절하였다.

공민왕때 병부 상서를 역임한 정병은 상의 5대손으로 1361년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분성군에 봉해졌으며 광저(光儲)는 현의 아들로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이렇게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명문 김녕 김씨는 조선조에 와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시켜 가문을 빛나게 하였는데 그 중에 백촌 문기(文起)가 대표적이다.

그의 자는 여공(汝)恭)이며, 호는 백촌(白村), 김시홍의 9세손이고 호조판서 순의 손자이며, 1399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백지리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 1426년 생원시 및 문과의 대제과에 합격, 예문관 검열을 시작하여 태종실록을 편찬하고 주요관직을 두루걸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함경감사때는 학문을 널리 장려하였으므로 유림에서 생사를 세웠으며, 단종때 형조참판을 거쳐 함길도관찰사와 도절제사 때는 둔전법을 실시하여, 공적이 컸다. 또한 한어ㆍ외어와 외교에 능숙하여 문무겸전한 실력을 높이 인정받아 공조판서겸삼구노진무직에 이르렀으며, 1456년에 내외종간인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城源) ㆍ이개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주동하다가 김질의 밀고와 동지들의 자백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끝내는 아들인 현석과 함께 순절하였다.

영조 7년에 그의 9대손 정구의 송원으로 27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온갖 수난을 겪다가 1731년에 복관작되고, 정조2년에는 시호를 받고 승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고 1791년에 불천위의 부조묘에 재향하라는 왕명과 또 정려의 왕명이 내렸다. 사육신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보다 신원이 약 40여년간 늦었으며, 또한 남효온이 쓴 육신전의 오기로 사육신의 주동자이면서도 사중신으로 전해져 오다가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원래의 사육신으로 가결되어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가묘를 봉안하고 매년 10월 9일에 재향을 지내고 있다.

응수(應壽)는 판서를 역임한 복용의 아들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형제가 함께 창의하여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에 올라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그의 노모를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을 세운 충효공 유부(有富)와 그의 아들 기남, 난생 형제는 병자호란때 순절하여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담양부사 언공은 정묘호란때 호남에서 의병을 인솔하여 진주성을 방어하고 섬진강의 적을 막아 방어사가 되어 노량대첩때는 충무공 진중에서 공을 세웠다.

이 밖에도 세조 때 병조 참판 구룡(九龍)과 중종 때 형조 판서를 지낸 경의(敬義)ㆍ선조때의 공신 준영(俊榮)등이 있다.

금천김씨 1

시조 김학경(金學敬)은 경순왕의 후예로 남평김씨와 동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경주김씨세보)》에 충선공(忠宣公) 김혼(金琿)의 10세손 우연(遇然)의 배위가 금천(衿川)김씨 거의 딸이며, 묘가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합지자전우 건좌에 있는 것으로 보아 금천김씨는 같은 군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 김한흥(金漢興)의 아들 진사 김상렬(金商烈)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있다.

금천김씨 2

시조 김적(金適)의 자는 희정(希正), 호는 취암(鷲巖)으로 금성김씨 시조 대경(臺卿)의 9세손이요, 현령 우운(祐雲)의 증손이다. 그는 1537년(중종3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55년(명종10) 호남지방에 왜적이 침입하자 김제군수로서 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증군이 되어 전라도 좌방어사 남치근(南致勤)등과 함께 영암·남평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고 광주목사에 승진되었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 충수(忠秀)·덕수(德秀)와 함께 왕의 서행을 호종하다가 의주에서 순절하였다. 그래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나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후손들이 금성김씨에서 분관한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연원을 상고할 문헌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소목이 확실지 않은 효진(孝鎭)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해지고 있다.

김제김씨

시조 김천서(金天瑞)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본관은 그의 7세손 정걸(正傑)이 조선 태종 때 김제군(金堤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金堤)로 하였다.

김제김씨를 중흥시킨 가헌(可軒) 김정걸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401년(태종1) 태종이 공신 류습(柳濕)등과 함께 동갑계를 조직할 때 그는 한 살 아래여서 참여하지 못하자 태종이 이를 아쉬워하며〈재주는 문무를 겸했고 , 품행은 충효를 겸전했는 데 포상이 없어서야 되겠느냐?〉하고 김제군(金堤君)에 봉했다. 그의 묘소는 김제 옥녀산(玉女山)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김제군 김제읍 요촌리에 단을 모아 매년 9월 15일에 제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지명재(知命齎) 김극혜가 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오성(五聖)의 위판(位板)을 봉안하여 남한산성에 대피시킨 공으로 원종공신(原綜功臣)에 올랐다. 뒤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주부(主簿), 호조좌랑(戶曹佐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등을 거쳐 안음(安陰)·군위(軍威)의 현령을 지냈다.

김정은 중종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공주로 낙향하여 그 지역의 입향조가 되고, 그의 아들 철견(鐵堅)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김영립(金永立)은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1678년(숙종4) 공주목(公州牧)에서 발급한 그의 호적부터 그의 8세손 김응록(金應祿)까지의 호적이 전해오고 있다.

김천 김씨

시조 김화는 경순왕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참봉을 지냈으며, 뒤에 남원의 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그 외에 사정을 지낸 김사찬(金沙餐)의 후손 또는 부령김씨와 동원이라는 문헌도 전한다. 후손들이 본관을 김천으로 하였다.

김포 김씨

시조 김규(金珪)는 경순왕 제4자 대안군 은열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김포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김포로 했다.
평북 연변에 후손이 30호가 살았는데 6 25 동란으로 족보가 유실되어 중간 계대를 알 수 없다. 후손들이 목포, 양주, 인천, 서울 등지에 살고 있다.

김해(金海) 김(金)씨

이 성씨는 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김유신(金庾信)장군(수로왕 12대 손)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조와 고려조를 통해 많은 어진 신하와 훌륭한 장수를 배출했다. 고려조에서만은 정승(門下侍中)급 14명을 비롯하여 이름 높은 신하, 공이 큰 신하 10여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 학자) 1명 등 숱한 인물을 내어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렇듯 번창했던 김해 김씨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자못 쇠퇴한 느낌을 준다. 그러기에 연산군때의 학자인 성현(成俔)은 옛날에는 흥성했다가 지금은 쇠퇴한 씨족을 열거하는 가운데 김해 김씨를 그 중의 하나로 들고 있다.

이 성씨의 후손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있다. 그는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仇衡)의 손자이다. 그가 소년시절에 화랑이 되고 뒷날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을 통합하여 벼슬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은 신라 최고의 벼슬)에 이르고, 죽은 뒤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극일(金克一)은 고려 때의 이름난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효자로도 이름이 났다. 그 둘째 아들 김맹(金孟)은 조선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그의 세 아들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이 모두 문장은 물론, 과거에 올라, 김씨 3주(三珠)라는 칭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김일손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써 문과에 급제, 예문관의 호당에 뽑혔다. 뒤에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그릇된 것을 역사에 기록함으로써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 때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앞서 그가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 옛날 항우가 초나라 회왕을 죽인 중국의 일화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글)을 역사에 넣은 것이 이극돈의 눈에 띄었다.

이극돈은 일손에게 원한을 풀고자 당대의 권신(權臣)인 유자광(柳子光)등과 그 것을 꼬투리 삼아 일대 옥사(獄事)를 일으켜 김종직 문하의 학자들은 전부 잡아들이니 이 사건이 곧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그는 이 사화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당했는데,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준손(駿孫)의 아들 김대유(金大有)는 아버지와 함께 귀양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그를 가리켜 기개가 세상을 덮을 만한 인물이라 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김현성(金玄成)은 김극일의 5세손으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 등 벼슬살이를 했는데, 당대의 명필이요(詩文家), 그의 "이충무공 수군대첩비"는 특히 유명하다.

김요(金?)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수찬을 거쳐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해시계, 물시계 등을 장영실(蔣英實)등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문학으로도 그 재질을 발휘, 세종대왕의 아낌을 받았다.

김우항(金宇杭)은 조선시대에 김해 김씨가 낳은 오직 하나뿐인 정승이다. 그는 숙종 때에 문과에 올라 부사,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호조, 병조, 형조등 다섯 판서를 고루 지내고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고, 그가 사망했을 때 왕은 관을 하사하여 장례했다. 김홍복(金洪福)은 김우항의 숙부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는데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름난 장군으로는 김경서(金景瑞)와 김완(金完)을 들 수 있다. 김경서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터지자 평양 방어전에서 크게 활약하여 평안도 방어사(防御使)가 되었고, 이듬해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했다. 그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와 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김완은 광해군 때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선봉대장으로 길마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삼등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지고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한편 학자로는 김자정(金自貞)과 김덕승(金德承)을 꼽을 수 있다. 김자정(金自貞)은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성종 때 노사신(盧思愼과), 노희맹(盧希孟)등과 신찬여지승람(新撰與地勝覽)을 편찬했다. 김덕승(金德承)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목사(牧使)에 이르렀는데, 경사(經史) 등 모든 학문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조선시대 화가 중의 제일인으로 꼽히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있다. 그는 정조 때 현간(縣監)등 벼슬살이를 했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 : 인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가 되어 정조의 진영(眞影)을 그렸다. 그는 화단(畵壇)에 고착된 무력한 북화(北畵) 양식을 탈피하고 남화(南畵) 양식을 받아들여 신선한 조형미(造形美)를 완성하여 개성이 강한 독특한 경지를 이룩했으며, 한국적인 풍토감각을 다분히 표현했다. 특히 풍속화에 있어서는 해학(諧謔)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를 닦았다. 특히 투견도(鬪犬圖)는 찬탄을 받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아버지의 재질을 이어받아 산과 물, 집과 나무를 잘 그렸다.

김화김씨

시조 김경언(金景言)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 은열(殷說)의 증손인 김해군(金海君) 염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고려조에 시중(侍中)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등을 지내고 김화군(金化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김화(金化)로 하였다.

김화김씨는 시조 경언의 15세손 김로(金輅)가 고려조에 태자태부에 태사(太師)를 지내고 김화의 비룡동(飛龍洞)에 세거하다가 그 후대에 평산(平山)으로 이주하였고, 21세손 김유기(金有器)가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상소한 것이 왕의 뜻을 거슬러 가산(嘉山)으로 유배당했다가 유배지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세거하였다. 또한 김로의 동생 하가 호조참판을 지내고 숙천(肅川)으로 낙향했으며, 셋째 명(銘)이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1394년(태조3)참소를 입어 평양으로 유배당한 후 숙천으로 은거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평양, 순안, 숙천, 안주, 영변, 선천, 의주등 관서지방에 본거를 두고 살아오다가 남북이 분단되자 그 일부가 월남하여 종친회를 구성하고 피난 족보를 간행, 족의(族誼)를 다지고 있다.

나주 김씨

나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운발(雲發)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라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으로 귀의하였는데 그가 입산전 두 아들을 고려조에서 예우하여 장자 운발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나주군으로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삼았다.

나주 김씨의 후손은 대대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며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월당 대경(坮卿)을 들수 있다. 그는 1326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당세에 이름을 날렸으며 한때 목운 이색(李穡)과 함께 나주 안로현에서 유배 생활을 겪기도 했다.

조선때 와서는 일경의 손자 정준(廷儁)이 정종때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부총제를 지냈으며 정준의 둘째 아들은 김종서의 사위가 되었다. 정준의 현손 경석(景錫)은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방어사로 종질(從姪) 적(滴)과 함께 영암포에서 무찔렀으며, 적의 아들 충수(忠秀)는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호조참판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는 부인과 함께 순사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 공주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덕수(德秀), 공조좌랑 복남(福南)을 비롯하여 부호군 세빈(世彬)이 유명하다.

낙안김씨

시조 김수징(金粹澄)은 신라 제26대 경순왕의 제 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11세손인 영고(永固)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명종조에 감무(監務)로 있으면서 국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에 오르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낙안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고창군 성내면 부덕리 엄동에 낙흥단(樂興壇)을 모아 매년 음2월 13일에 향사하고 있다.

낙안김씨는 조선 초엽 지금의 승주군 낙안을 중심으로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훈을 세운 양혜공(襄惠公) 김빈길장군을 증조로 섬기고 있다. 그는 1394년(태조3) 전라 수군첨절제사로서 왜선 3척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풀리고, 1401년(태종즉위) 3도 수군절제사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부사 가 되고, 1405년 김해에서 싸우다가 순사했다. 진안의 화천사(華川祠)에 제향되었다.

무열공(武烈公) 김광습(金光襲)은 고려 명종·신종 양조에 걸쳐 벼슬이 금오위대장 검상사인 검교대장 좌승상에 올랐고, 김윤견(金允堅)은 문과에 올라 조정대부 사재경 이부상서를 지내고 상장군에 올랐다.

김지겸(金之謙)은 충선왕 때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경화공주(慶華公主)의 명으로 정동성(征東省) 사무를 맡아 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김효자(金孝慈)는 광록대부 판각문하평리를 지냈고, 김남정(金南正)은 병부상서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규(金糾)는 판각참찬 예문관 제학(提學)에 올랐고, 김수(金隋)는 충정왕 때 강릉존무사를 지내고 낙천군(樂川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충민(忠愍)으로 내려졌다. 그는 예문(藝文)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들 양평공(良平公) 김미(金彌)도 출중한 인물이다. 우왕 3년에 진사에 합격, 전객시승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낸 뒤 공안부윤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공간공(恭簡公) 김주(金湊)는 문과에 급제, 성균직강으로 정추(鄭樞)등이 신돈(辛旽)을 탄핵하다 투옥된 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비서감승을 거쳐 우왕 때 사헌집의, 지신사, 밀직제학을 역임하고, 공양왕 초에 문하평리 겸 대사 헌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예문춘추관 태학사, 좌복야를 겨쳐 신도궁궐조성도감 도청으로서 종묘·궁궐 신축에 공이컸다. 1397년 문하시랑 찬성사·서북면 도찰리사로 왜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공민왕 때 영남루를 창건하였다.

김함(金涵)은 우왕 2년에 문과에 올라 대호 부사와 평리를 지냈고 왜구와 싸우다 순절하였다.

양혜공(襄惠公) 김빈길은 낙안김씨 인물 중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다. 1394년(태조3) 왜구를 섬멸하고 전라도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 도내 각 요충지에 만호(萬戶)를 두어 병선을 정박시키면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대의 식량이 충족되도록 하였다. 1405년 김해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낙안은 현재 민속 마을로 지정되어 있으며, 승주(昇州)의 낙안성은 김빈길이 축조한 것이란 설이 있다. 김가외(金可畏)는 봉열대부 첨지통례문사(僉知通禮門事)를 지냈고, 특히 세종과는 내외종 6촌간으로 6촌계를 만들어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정익은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때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충직과 청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남양김씨

시조 김적의 선계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 의종때의 인물로 국난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경기도 남양의 산중으로 은거했다고 하나 그의 선계와 그 후 250여 년 동안의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그의 후손 김약해(金躍海)가 조선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우고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남양(南陽)으로 하였고 약해의 아들 계(桂)는 1437년(세종19)에 출생, 김종직(金宗直)과 동문학으로 성종때 진사가 되었으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정주(定州)로 유배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에게 죄가 가중되어 전 가족이 평북 정주군 마산면 원동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입북한 김계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평북 박천군 용계면 은봉동 은봉산에 있다.

김계의 5세손 김장유(金長孺)는 1561년(명종16) 임거정(林巨正)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을 이끌고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당안공파(棠岸公派) 파조 김언량(金彦良)은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계해두(桂海杜) 등과 창의하여 역전 끝에 순절했다. 송암공파(松菴公派) 파조 김경록(金景祿)은 1619년(광해군11)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명(明)나라의 원군으로 의주까지 갔다가 모친상을 당해 돌아왔다. 그 후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 심양(瀋陽)까지 갔다왔다.

순절공파(殉節公派) 파조 김응록(金應祿) 또한 병자호란 때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아들 여상(汝商)과 함께 능한산성(凌漢山城) 싸움에서 순절했다.

남원김씨

시조 김사지(金四知)는 경순왕 부(傅)의 제 8자 추(錘:一善君)의 8세손 중(仲)의 셋째 아들이다. 본관을 남원(南原)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이조 때 조방장을 지낸 김경로(金敬老),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한 김기욱(金基郁)으로 이어져 왔다. 후손들이 평안북도 초산군 송면 및 함경남도 고원군 등지에 세거하다가 6·25동란 때 월남하면서 보첩과 가장(家狀)등 모든 문헌을 봉지하지 못하여 중간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자료에 의하면 평북 초산군 송면 송정동에 18호, 함남 고원군 상산면 주당리에 27호가 분포 거주하였는데, 동란 때 남하하여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포김씨

남포김씨(藍浦金氏)는 주로 평북 철산 등지에서 집단을 이루고 살다가 6·25 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봉지하지 못해 그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신라김씨2000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시조 김전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지만 연대와 행적 및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김시중(金始重)의 아들 성일(聲一)이 1729년(영조5)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김성일을 시조로 하고 있다. 또 성일의 고조인 김충길(金忠吉)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김여용(金礪用)의 아들 봉서(鳳瑞)는 1741년(영조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평북 철산군 철산면 영산동에 65가구, 철산군 서림면 연산동에 48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평김씨

시조 김창협(金昌協)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인 양주김씨(楊州金氏) 시조 김원보(金元寶)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남평군(南平君) 김기홍(金器弘)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괴전리에 35호가 살고 있었다. 후손 김규진(金圭鎭)은 조선 말기의 서화가로 이름이 높다.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으로 대수는 알 수 없으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기범(起範)의 아들이다. 8세에 장인 이소남(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서화의 명적을 연구, 10여년 만에 귀국했다. 글씨는 전서·예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하여 묘경을 이루었으며, 그림은 산수·화조를 잘 그렸고, 특히 난죽이 절묘했다. 그는 왕세자의 사부가 되어 세자에게 서법을 가르쳤고, 서화연구회를 창설, 서화연구에 공헌했다. 후에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 심사위원을 지내며 때때로 경향 각지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여 예술 발전에 공이 컸으며, 벼슬은 시종관을 지냈다. 김규진의 작품으로 저서 난죽보, 서법진결, 육체필론과 글씨에는 미륵불, 천하기절, 법기보살, 금수강산, 대웅전, 백마장강, 촉석루, 가야산해인사, 보신각, 희정당대조전, 태극전이 있으며, 그림으로는 외금강만물상도, 해금강총석정도, 소상대죽도, 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

남해김씨

남해김씨(南海金氏)의 시조는 김태진(金泰辰)이다.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掌隷院直長)을 지냈다. 그가 남해에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남해로 하였다. 김태진은 본디 광산김씨의 후예다. 그의 증조인 김극신(金克愼)은 조선 연산군 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관계에 나아갔으나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시조인 김태진으로부터 4세손까지는 남해에 복고했고, 5세손인 김의경(金義慶)부터 9세손 김낙운(金洛雲)대까지는 김포군 하성면에 세거하였다.

능주 김씨

능주(綾州)는 지금의 전남 화순군 속면이다.

시조 김계원(金繼元)은 안주(安州)에서 살았다. 그의 큰아들 명하(鳴夏)의 자는 성숙(成叔)이고, 1657년(효종8)생으로, 1695년(숙종21) 평안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통례(通禮)에 이르렀다. 작은아들 명은(鳴殷)의 자는 용녀고, 1660년(현종1)생으로, 1687년(숙종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동지중추에 이르렀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함북 길주군 웅평면 용남동에 23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길주로 입북했는지, 또 본관을 능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달성김씨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달성김씨(達城金氏)의 시조 김담(金淡)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진사를 지냈다고만 되어 있어 여타 사적이나 연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 또 전후 세계와 본관을 달성으로 하게된 연유도 밝힐 수 없으며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나타나지 않아 후손들의 집성촌도 알 수 없다.

해남, 당악 김씨

시조 김인(金忍)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3자 명종(鳴鍾)의 19세손이다. 그는 오위도총부(五衛都憁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내고 태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리고 전라도의 수영(水營)이 무안현 대굴포(務安縣大掘浦: 현 함평군 학고면 대곡리)에 있을 때 좌막(佐幕)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20리쯤 올라온 나주군 마산면 귀업리(현 나주군 왕곡면 송죽리 귀업부락)에 터를 잡아 세거지를 마련했다 한다.

본관은 그의 증조 김남보(金南寶)가 고려 말에 병부상서를 지내고 조선개국 후 해남(海南)으로 은거하였기 때문에 해남 또는 당시의 지명인 당악(棠岳)을 따서 당악김씨(棠岳金氏)라고도 한다. 시조의 묘소는 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 있으며, 음력 3월 3일에 향사한다.

당악김씨는 수군계(水軍系) 집안으로 큰 인물은 내지 못했다. 외손인 박순(朴淳)이 정승 자리에 14년간 있으면서 전남 선비들의 정계 진출에 크게 공헌했는데도 당악김씨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시조 인의 손자 종(琮)이 정언(正言)을 지냈는데, 이 분이 전남의 조선조 인맥에서 중조(中祖)라고 할 수 있는 사암(思菴) 박순의 외조부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당악김씨의 세거지인 귀업(龜業)은 쑥밭이 되고 많은 인명 피해를 당했으며 원경(元慶)의 아들 준(浚)은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23년만에 돌아와서 다섯 아들을 두어 이 집안의 중심을 이루었다. 원록(元祿)의 손자 만영(萬英)은 학문이 높아 남평(南平)의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죽은 후에 풍산사(楓山祠)에 제향되었다.

당진, 통진 김씨

당진김씨(唐津金氏)의 시조 김자진(金子盡)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 희조(希祖)의 7세손이라 한다.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확실한 세계는 알 수 없으나 그는 1382년(우왕8) 문과에 급제하여 선공서령 보문각 대제학(繕工署令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도강군(道康君)에 봉해졌다.

한편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의하면 대안군 은열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상장군을 지낸 익지(益之)를 시조로 하고, 그의 손자 안경(安敬)과 자익(子益)을 파조로 하는 통진(通津)김씨가 있는데 당진김씨와 동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관을 당진으로 하게 된 유래는 확실한 설명이 없다.

담양김씨

시조 김삼준(金三俊)은 경순왕의 일곱째아들인 언양김씨(彦陽金氏) 시조인 김선(金鐥)의 후손으로 1486년(성종1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장령·김제 군수 등을 지냈다.

언양김씨에서 분적한 연원과 본관을 담양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언양으로 되어 있고, 또 족보 세계에 그의 아들 난무(蘭茂)·송무(松茂) 형제 중 난무는 달성계이고, 송무는 언양계로 되어 있어 난무의 후대에서 개성으로 입북하여 조상의 선향인 담양을 본관으로 한 것으로 짐작케 한다.

당악김씨

시조 김락(金樂)은 신라 신무왕의 5세손 무력(武力)의 아들로서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통합삼한공신1등으로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지고 식읍 3천호를 받았으며, 대아찬에서 원보(元甫)겸 대장군으로 승진되었다. 927년(태조10) 7월에 대량성(大良城)을 쳐서 강주(康州)등 제성(諸城)을 획득했다. 그 해 10월, 공산(公山)의 동수(桐藪) 전투에서 견훤군에게 포위당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태조를 덤불에 숨기고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왕의 수레를 대신 타고 격전하다 전사했다. 익대효절광위갈충위사전망공신 1등에 추봉,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940년(태조23) 공신당(功臣堂)을 설치, 벽상에 도형하였고,994년(성종13)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022년(현종13) 대구의 사우가 표충사(表忠祠)로 사액되고, 1052년(문종2) 삼중대광 당악현 개국공(唐岳縣開國公)에 추봉되었으며, 1120년(예종15) 예종이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여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그리하여 후손이 태조가 사적한 당악(唐岳)을 본관으로 했다. 시조의 묘소는 평안남도 중화의 도로동( 老洞)에 있다고 하나 남북이 가로막혀 향화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

대구김씨

시조 김달(金達)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 중시조인 김방경(金方慶)의 제4자 론의 증손이다. 그는 원래 경북 대구 도화촌(道化村)에 거주하던 무과(武科) 출신으로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난 때 함경도 길주로 유배당하자 자손들이 배소로 따라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조상들의 세거지였던 대구(大邱)를 본관으로 삼았다.

대구김씨는 원래 무관 가문으로 조선조 5백년을 통해 시조의 아들 여연(麗淵)·부형(富亨) 형제의 후손들이 함경도와 평안도에 분거하면서 국경 수비에 기여하였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해 있을때에 전 가문이 충성을 다바쳐 숙종조에 충의 가문으로 포상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대구김씨는 우리나라 동·서북 지방에서 벌족을 이루고 살다가 해방 후에 4백여 가구가 월남, 종친회를 구성하여 친목을 다지고 있다.

덕산김씨

시조 김량(金亮)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진사에 합격, 후손들이 본관을 덕산(德山)으로 했다. 그 외에 김충한(金沖漢), 김준신(金浚臣)의 후손, 또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의 분파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덕수김씨

덕수김씨(德水金氏)는 해풍김씨(海豊金氏)와 동원이면서 해풍김씨가 족보를 창간할 때 덕수 지방에 거주하던 지파가 참여하지 못했다가 후일에 자기들끼리 족보를 간행하면서 중간세계를 밝히지 못한채 본관을 거주지인 덕수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덕수김씨세보(德水金氏世譜)>에는 해풍 부원군 김숭선을 시조로 하고 중간셰계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김수연을 1세조로 하였다. 한편 <해풍김씨세보>에는 김수연을 시조 숭선의 8세손으로 정리하고 있어 이 두 집안의 족보는 본관만 다를 뿐 시조와 연원이 동일하다. 이에 대해 해풍김씨측에서는 고려 말의 사회적 혼란과 조선 개국 당시의 변혁, 그리고 해풍현과 덕수현(지금의 개성, 풍덕)의 지역적 혼란, 그 후에 닥쳐온 임진왜란 등 여러 난리를 겪는 동안 모든 문헌이 소실되고 혈족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각기 가승만 만들어 가지고 내려오던 중 1764년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후손들의 가승과 세단(世單)등을 수집하여 1791년 제1차 세보(世譜)를 창간할 때 참여하지 못한 혈손들이 후일에 족보를 간행하면서 상계를 밝히지 못한 채 거주지를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강김씨

시조 희조(希調)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와 병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을 지내고 도강백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도강으로 하였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대를 상고할 수 없어 원경,을경,일,을상등 동본 4파로 분류하여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의 개국공신 회련(檜鍊)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서설(瑞設)은 절도사를 거쳐 강계부윤 등을 지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 약묵(若默)은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52년 한산군수로 제임하면서 선정으로 표창을 받고 뒤에 집의,목사,내자시정등을 역임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후진(後進)은 일찌기 이항의 문하에서 경서와 역서를 연구하고 임진왜란때 이귀(李貴)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많은 군량을 바쳤다. 도언(道彦)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과 병조좌랑등을 지내고 1624년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의금부 도사로 평정하여 분무공신일등에 녹훈되었다.

한말의 우국지사 영상(永相)은 학자로도 명망이 높았으며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이 주는 노인 은사금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천술(天述)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여 우물에 투신자살한 애국지사이다.

동래김씨

시조 김흥도(金興濤)는 신라 김씨의 분적종으로 경순왕 부(傅)의 후손이라고만 전해질 뿐 혈연 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조에 이조참의를 거쳐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나갔다가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안변(安邊)으로 유배된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눌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마지막 임지였던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파계는 5세 덕붕(德鵬)·덕린(德麟) 형제 대에서 두 파로 분류되지만 덕붕은 후사가 없어 덕린의 아들 수(洙)가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오늘의 동래김씨들은 모두 김덕린의 혈손인 셈이다.

시조의 4세손 선략장군(宣略將軍) 응현(應鉉)의 아들 덕린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덕린의 아들 김렴(金濂)과 김세진(金世珍)은 숙질간으로 각각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참봉 김여집(金汝鏶)의 아들 수함(守咸)은 김렴의 증손으로 이 집안 유일의 문과 급제자이다. 그는 1755년(영조31) 함경도과(咸鏡道科)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찰방(察訪)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등주김씨

등주김씨(登州金氏)는 본관을 같이 쓰는 중국계 귀화족과 신라계 분적종으로 구분된다. 중국계 귀화족의 시조 김장생(金長生)은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등주(登州:지금의 安邊)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다른 한 계통의 시조 김식(金軾)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장군공파(將軍公派) 김순웅의 13세 손인 계림군 김균의 장자인 맹성(孟誠)의 증손자로 전해지고 있으나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김중정(金重貞)의 아들로 무과 출신이며 판관(判官)을 지냈다고 하지만 연대와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만경김씨

시조 김희제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만경의 군산도(群山島)에서 살았으나 선조가 상선(商船)을 따라 개성으로 가서 살면서 관적을 개성으로 했다. 그는 충청도 안찰사를 거쳐 장군이 되고, 1221년(고종8) 의주분도 장군(義州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금나라의 우가하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했다. 1226년 서북면 병마부사로 있을 때 의주·정주지방에 쳐들어온 우가하의 군대를 물리치고 압록강을 건너 석성(石城)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이듬해 전라도 순문사로 있을 때 최우(崔瑀)가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무고를 믿고 사람을 나주에 보내어 체포하려 하자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후손들이 선대의 세거지였던 만경(萬頃:現 金城의 속면)을 본관으로 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병공리에 40호가 살고 있었다.

무장김씨 1

무장김씨(茂長金氏)는 전북 옥구와 황해도 장연에 각각 분산 거주해 왔으나 그 선계에 대해서는 신라계 혹은 가락계로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1925년에 옥구(沃溝)에서 발행한 <무장김씨세보(茂長金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충절공(忠節公) 김선(金璇)은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장사가 무장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의 아들 충(庶)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자진(自珍)은 대사헌을 지내고 옥구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그 후손이 옥구에 세거하게 되었고, 둘째 자무(自武)는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 부제학을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사육신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해주의 어차리(馭車里)에 은거, 종적을 감추게 되자 그 후손들이 장연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같은 혈족이면서 옥구와 장연으로 분산되어 4백여년이 지나도록 왕래가 막혀 전연 모르고 지내오다가 1841년 장연파 문중에서 옥구로 찾아가 같은 혈손임을 확인하고 1925년 비로소 통합된 족보를 발간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연에서 살다가 6·25동란 후 월남한 무장김씨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조 김자무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선대의 사적이 유실되어 상계를 밝히지 못한다고 한다. 김자무는 박팽년의 사위로 관직은 제주목사였으며, 장인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장연에 은거하면서 무장으로 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족보를 편찬하지 못하다가 1924년에 옥구의 무장김씨와 합보하면서 선계를 김수로왕에게 잇대어 시조를 김선으로 하였지만 이를 고증하기 위해 <신라세보(新羅世譜)>등 여러 문헌을 찾아보았으나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고 기타 <김씨본원세보(金氏本源世譜)>등 여러 문헌에 김알지의 후손으로 밝혀져 있다고 한다.

무장김씨 2

시조 김자무(金自茂)는 원래 무주(茂朱)사람이며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그는 단종조에 제주목사를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장인이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가 성삼문(成三問)등 6신과 함께 처형되고 그도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자 황해도 장연으로 도피하여 신분을 감추고 관향도 무장(茂長)으로 바꾸고 은거했다. 그 뒤 숙종 때 사육신이 신원될 때까지 그 후손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겨우 혈맥을 이어 오다가 가야계 무장김씨 선(璇)계에 편입하여 족보를 간행하고 가야계로 행세해 왔다. 그러다가 해방 후 월남하여 여러 문헌을 상고한 바 가야계가 아님이 뚜렷하고 특히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에 의하면 「그는 제주목사로 본래 무주인이었는데 박팽년의 사위로 장인이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자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 본관을 무장으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가야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무 이상의 세계를 가리지 못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래서 이족의 동성동본이 생기게 되었다.

무장김씨는 4세 김유광(金有光)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연군 11개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고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는 장연군 대동면 강화군 양사면 등지에 집성촌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주김씨

무주김씨(茂朱金氏)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 국자감 좨주를 지내고 조선 태종 때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러 무주백(茂州伯)에 봉해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무주김씨족보(茂州金氏族譜)》에 의하면 신무왕의 계통이라 하였고, 시조 성은 고려조에 문하찬성사를 지낸 충정공(忠貞公) 김의원(金義元)의 13세손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인 김길(金佶) 이상의 세계는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간 세대가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어 문적이 유실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편《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 의하면 무주김씨의 시조는 신무왕의 16대손이고, 길의 13대손이며 의원의 8대손인 남우(南雨)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우가 의원의 8대손(신라김씨연원도)이고, 성은 의원의 12대손(무주김씨족보)이라 하였으니 남우와 성과의 사이 3대가 실전되었는지 아니면 남우와 성과는 전혀 다른 계통인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무주김씨는 수원 등 경기지방에서 살다가 5세 김일(金逸)의 대를 전후해서 충남 홍성의 광천 등지로 옮겨 그 일대를 세거지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2세 김석여(金錫汝)이후 석성·임천 등 부여로 옮겼고, 11세 김사(金獅)는 충남 예산으로 가서 터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6세 김우정(金禹禎)의 후손은 서산의 해미·성연 등지에, 10세 김승서(金承緖)의 후손은 아산의 온양·배방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7세 김숙(金淑)의 대를 전후해서 보령의 청소 등지에 일부가 살게 되었고, 4세 김자무(金自茂)의 후손은 황해도 장연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의 인물로는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 검교평리로 의금부 판결사·부제학을 겸직한 김생려(金生麗)와 그의 아들로 세종조에 홍문관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지낸 김규(金葵)가 있다.

이밖에 문종조에 집현전 교리를 지내고 뒤에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동생 한지(漢之)·아들 유인(有仁)과 함께 화를 입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된 김선지(金善之)가 있다.

문소김씨

시조 김식(金湜)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고 시호가 충간(忠簡)으로만 전한다. 판관을 지낸 김천극(金天克)의 후손, 옥천김씨(沃川金氏)와 동원으로 전하나 미상이며, 본관을 문소로 하게 된 유래도 알 수 없다.

후손 김진화(金鎭華)는 자가 성관(聖觀), 호는 탄와(坦窩)이다. 1793년(정조17) 창릉참봉으로서 누진되어 한성판윤, 아산, 진산, 무장, 능주 목사를 역임했다. 김응택(金應澤)은 자가 취용(就用)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전사했다. 벼슬은 훈련원정을 지냈다.

문화김씨

시조 김검달(金檢達)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실전 되어 그의 세계와 사적 및 연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그의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에 정착, 세거하면서 조상의 발원지인 문화(文化)를 본관으로 하였는데 문화의 옛이름이 유주(儒州)인 까닭으로 유주김씨(儒州金氏)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느 조상이 언제부터 평안도 지방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후손 김호익(金虎翼)이 1643년(인조21) 평안도과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밀양김씨

시조 김승조(金承祖)는 신라 제 56대 경순왕 부(傅)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2세손이다. 그는 1271년(원종12) 사직(司直)으로 있을 때 김방경(金方慶) 휘하의 장군으로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금릉군 증산면 은상동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조선조에서는 영조조에 김봉욱(金鳳郁)이, 정조조에 김성진(金成珍)이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종환(金宗煥)이 헌종 때 문과에 급제,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을 지냈다.

이밖의 인물로는 김견(金堅)이 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김경발(金景發)은 사복시 내승을 거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으며, 인조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급거 상경하여 왕을 호종하다가 순절,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진무공신(振武功臣)의 녹권이 내려졌다.

송정(松亭) 김중명(金重鳴)은 현종 때 무과에 급제, 운봉현감(雲峰縣監)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숙종 때 허견(許堅)등의 모반사건을 염탐, 미연에 방지한 공으로 병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백천김씨

시조 김선(金善)은 신라 제56대 경순왕 (傅)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25세손이다. 그는 조선 성종 때 전라도 좌수사(左水使)로 있으면서 화를 입어 1476년(성종7) 의주(義州)로 유배갔다가 그곳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고향인 백천(白川)을 본관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응상(金應祥)과 김득경(金得景)이 있다. 김응상은 임진왜란때 조방장(助防將)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고 의주의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으며, 김득경 역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고 구암사에 제향되었다.

김계립(金繼立)은 병자호란 때 많은 전과를 거두고 삼학사(三學士)가 후금(後金)으로 끌려갈 때 의주로 돌아와 임경업(林慶業)과 함께 철수하는 적군을 기습, 포로로 잡혀가던 수백명을 구해냈다.

근세의 인물로는 김승학(金承學), 김경하(金景河), 김시형(金時馨) 등이 있다. 이들은 일제 때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김승학은 196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김경하와 김시형은 1963년에 건국공로 대통령포상을 받았다.

보령김씨

시조 김억적(金億積)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라고 전해질 뿐 그 선계는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관직이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인물로 추정되나 확실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본관을 보령(保寧)으로 하게 된 연원도 확실하지 않다. 그 후손 김효순(金孝舜)이 임진왜란 때 역관으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왜적이 연안(延安)을 공격하려 하자 그가 〈적병은 보잘 것 없다. 명(明)나라 군사가 와서 곧 격퇴할 것이니 역전하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화살에 꽂아 성 안으로 쏘았다. 부사 이정암이 이 글을 보고 사병을 격려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가 탈출하여 행재소(行在所)로 갔을 때 이정암이 이 사실을 알고 상소하여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고, 그 후 누진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보은김씨

시조 김징(金徵)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다.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天年史)》에 의하면 그는 학행으로 강원도 찰방이 되었다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당한 김태암(金泰巖)의 후손으로 대사간을 지냈다 한다. 그러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김태암의 본관이 보은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징 이전부터 보은에 관적한 것으로 보이나 문적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봉산김씨

시조 김명진(金明晋)은 경순왕의 23세손으로 전하나 문헌이 없으므로 세계를 알 수 없다. 김이상(金履祥)의 후손이라 하고 상산김씨(商山金氏)와 동원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본관을 봉산으로 삼게 된 유래와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羅(나)氏

나(羅)씨는 본관이 7본으로 문헌에 전하고 있지만 금성(錦城) 나(羅)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주(羅州) 나(羅)씨에서 갈려져 나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나주(羅州) 나(羅)씨로 통합하고 있다.

금성 나씨

시조 나총례(羅聰禮)는 고려 초에 삼한공신으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선계는 당나라 태종 때 상서좌복야였던 나지강(羅至强)으로 그는 고구려를 정복하자는 조정의 의견에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발라현(發羅縣:나주의 옛 이름)에 정착, 신라조에 벼슬하여 좌승상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나씨가 나주에 살게 되었으며, 신라 효공왕 때 그의 원손 나경이 나주사찬에 봉해져서 본관을 나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와 세계가 확실치 않고 또 나주는 당나라 태종 때는 발라로 백제 땅이었고, 신라 효공왕 때는 금산(錦山)혹은 금성(錦城)이라 하여 후백제 견훤(甄萱)의 치하에 있었다가 903년 고려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비로소 나주로 개칭하게 된 점으로 보아 나지강이 신라에서 벼슬하였다는 사실과 나경이 나주사찬에 봉해졌다 함은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부족하므로 연대와 세계가 확실한 나총례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주에는 이 계통 외에 나부(羅富)를 시조로 하는 나주나씨가 있어서 동본이족(同本異族)이 같은 나주를 발원지로 삼게 되었다.

나부를 시조로 하는 나씨는 원래 여황나씨였으나 고려성종 때 여황현이 나주에 귀속되면서 나주로 개관하여 이족이면서도 본관을 같이 하여 수백 년을 살아오다가 나총례를 시조로 하는 시조로 하는 나주나씨는 영조때 무신란(戊申亂)의 화를 면하기 위해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음을연유하여 금성으로 이관하였다.

금성나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10세손 나유(羅裕)가 있다. 그는 지밀직사사 득황(得璜)의 아들로, 원종 때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삼별초를 진압했다. 그 후 충렬왕 때 합단(哈丹)이 동북 변경을침범하였을 때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에 승진하고, 전조사로 원나라에 가서 회원대장군의 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양절공(良節公) 나익희(羅益禧)는 충렬왕 말기에 신호위 호군이 되었으나 충선왕의신법(新法) 제정에 반대하다가 면직되었다. 10년 뒤에 상의평리에오르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며, 충목왕이 즉위하자 첨의참리가 되었다. 말년에 거평(居平:지금의 나주군 문평면)으로 돌아와정착함으로 해서 그 후손이 문평(文平)과 영광(靈光)에서 거평파(居平派)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아들 나영걸(羅英傑)은 공민왕 때판밀직사사를 지냈고, 영걸의 아들 나문규(羅文奎)는 서해도 안렴사를 지냈다. 죽헌(竹軒) 나계종(羅繼從)은 직(織)의 아들로 공민왕 때 문과에급제, 춘추관 검열ㆍ수찬 등을 지내고, 공양왕 때 예문관 제학에 올랐으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나주로돌아와서 은거, 나주파(羅州派)의 연원을 이루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뚜렷한 인물을 내지 못하다가 희민공(僖敏公) 나세찬(羅世纘)이 호당(湖堂)출신으로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여 봉교가 되었다. 그러나 중시에 응할 때 대책문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통박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성(固城)에 안치당했다. 그후 김안로가 사사되자 복직되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 한성부 우윤, 전주 부윤 등을 지냈다.
구화(九華) 나무춘(羅茂春)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 학정에 올랐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엄성(嚴惺)과 함께 유생들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를 하다가 파직되었다.

나주 나씨

시조 나부(羅富)는 원래 중국 예장(豫章)사람으로 송(宋)나라가 남쪽으로 쫓겨갈 무렵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주(羅州)에 정착, 고려조에 벼슬하여 감문위상장군을 지냈다. 그러나 시조 나부가 동래한 연대와 정착한 지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다. 1982년에 간행한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의하면 옛 가승 및 고려 말의 공조전서 진(璡)의 묘비문에 <당(唐)나라 태종 때 한림수찬관이 해외로 귀양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발라(發羅:나주의 옛이름)에 표착하여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고 씌어 있고, 용강(龍岡), 강화(江華), 수원(水原)에 있는 옛 문적에는 <시조 부(富)가 봉명(奉命)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체류중 송(宋)나라가 망하자 여황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라고 씌어 있어 시조의 동래 연대와 정착지점이 각 지역 또는 각 파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975년에 주한중화민국 대사 나영덕(羅英德)이 제시한 <예장나씨광동파보(豫章羅氏廣東派譜)>에 의하면 나영덕 대사의 25대조인 금상(錦裳)에게 두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부(富)는 이름자만 씌어 있었고, 차자 귀(貴)는 송나라 소흥(紹興:1131~1162)연간에 황비의 난을 피해 남웅(南雄)으로 옮겨와 광동파 파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시조 부가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 라가 망하자 돌아가지 못했다는 연대(1127년)와 귀가 남쪽으로 옮겼다는 소흥 연간이 비슷한 연대이고 또 양측의 정황이나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광동파보에 나오는 부와 나주나씨 시조부가 동일인이라는 의론이 일고 있다. 그러나 나부 이하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가능한 나득규를 제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나득규는 고려조에 영동정을 지냈다. 시조의 묘소와 유허지, 그리고 1세조부터 4세까지의 묘소가 모두 실전되어 직장공파조 나원(羅源)의 묘 옆에 시조의 제단을 설단하였고, 1세조부터 4세까지의 제단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 설단, 매년 제향을 드리고 있다.

나주나씨는 5세를 전후해서 고려 후기에 많은 인물을 냈는데, 그 대표적인 전서 위(位)의 아들로 목사(牧使)를 지낸 나동길, 금양군(錦陽君) 석(碩)의 아들로 지제고를 지낸 나중우(羅仲佑), 직장공(直長公)의 원(源)의 아들인 전서 나진(羅璡)과 손자인 전농시정 나공언(羅公彦)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조에서는 2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며 특히 3세8효(三世八孝)의 정려와 4세8족(四世八旌閭)가 나와 호남의 명문, 나주의 토반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나안세(羅安世)는 금양군(錦陽君) 석(碩)의 6세손으로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 교리를 지냈으며 효행이 뛰어나서 정려가 내려졌다. 그의 동생 안인(安仁) 안의(安義), 아들 응허(應虛), 응삼(應參), 손자 의, 표(表), 계가 효행으로 정려를 받아 나씨 <3세8효>로 이름났고, 김제읍 용동리에 팔효사(八孝사)가 세워졌다. 나사침은 직장(直長) 원(源)의 9세손으로 선조조에 도백(道伯) 송찬(宋贊)의 천거로 이성현감을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고, 아들 6형제 중 넷째 덕현(德顯)과 손자 후소(後素), 득소(得素), 증손 호(祜)는 효자 정려, 덕명(德明) 덕윤(德潤), 덕신(德愼)ㆍ덕헌(德憲)등 아들 사형제와 손자 계소(繼素), 위소(緯素), 증손 도 등이 충신 정려, 자부 정씨(鄭氏:德顯의 처), 딸(尹沆의 처), 손녀 모두 열녀로 정려를 받아 <4세5효7충4열> 의 삼강문(三綱門)이 세워졌다. 그러나 나사침의 둘째아들 덕준(德峻)의 6세손 나숭대(羅崇大) 가 영조조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되어 화를 입기도 했다.

나덕헌(羅德憲)은 조선 통어사(統禦使)를 지냈으며,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엄(莊嚴)이다. 1603년(선조36) 무과에 급제, 2년 후 선전관이 되고,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보좌, 안현 싸움에서 공을세웠다. 그후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의 심양에 다녀왔고, 1628년봉산군수, 1631년 길주목사로 있다가 덕천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635년 창성부사 의주부윤을 지내고, 다음해 춘신사로 다시심양에 가 있을 때 마침 후금 태종이 황제를 칭하고 즉위식을거행하자 그에 대한 하례를 거부했다가 구타를 당한 후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받아 가지고 귀국했다. 그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있어 황제참칭의 글을 받아왔다고 조정의 척화론자들로부터 논핵을 받았으나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앞서 심양에서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용서를 받고 삼도 통어사에 특진, 1639년에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갔다.

南(남)氏

남(南)씨의 본관은 영양(英陽), 선령(宣寧), 고성(固城), 남원(南原)이 있지만 모두 한 시조의 자손이다.

남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문헌에는 57본이 전해지고 있으나,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세히 알수 없다. 이들 세 본관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분파한 혈족으로 영의공 남민(南敏)을 유일조로 삼고 있다.

시조 남민은 원래 중국 봉양부 여남(汝南:지금의 하남성 여남현(河南省 汝南縣))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었다. 그는 775년(경덕왕 14) 당나라 현종 때 이부상서로 안렴사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 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신라 유린지(有隣地: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표착, 신라에 영주할 뜻을 밝히자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하여 성은 <남(南)>, 이름은 <민(敏)>으로 사성명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며, 사후에 시호를 영의(英毅)로 내렸다. 그러나 시조 이하 누대가 실전되어 세계를 잇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남민의 후손 3형제가 있어 맏이 홍보(洪輔:관직 삼중대광 도검의찬성사)는 영양남씨, 둘째 군보(君甫: 호 백천(栢川), 관직 밀직부사)는 의령남씨, 막내 광보(匡甫: 고성군(固城君))는 고성남씨의 1세조가 되어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그 중 둘째 집인 의령남씨가 가장 번성하고 인물도 많이 나와 중추를 이루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영양현북도항동대항구(英陽縣北道項洞大項邱 : 지금의 영양군 영양읍 동부동)에 있었다고 전하나 실전되고, 1675년 그 산서편에 제단을 모아 매년 10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남씨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척연을 맺거나 당쟁에 깊숙히 관여하였고, 또 대대로 현신과 석학을 배출하여 명문의 열좌에 올랐다.

남씨는 조선조에서 상신 6명, 대제학 6명 호당 3명, 청백리 1명, 공신 7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상신 6명은 본관별 서열로는 20위에 지나지 않지만 씨족 규모에 비해서 대단한 숫자요,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 연안이씨 광산김씨의 각 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그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과 조선조에서 충무(忠武)로 시호를 받은 인물 9명 중 한 사람인 남이(南怡)를 내어 더욱 빛난다.

남효온(南孝溫)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와 친교가 있었다. 1478년(성종9) 앞서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단종모)가 나타나 아들의 살해를 책했다고 하여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소릉의 복위를 상소했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遜)의 저지로 실패하자 이로부터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복위를 상소했다고 하여 부관 참시되었다. 1513년(중종8) 소릉이 추복되면서 신원되고, 좌승지에 추증, 장흥의 예양서원, 의령의 의양서원, 고양의 문봉서원, 오현사 등에 제향, 1782년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에 제향되었다. 남이(南怡)는 시호(諡號)가 충무(忠武)이고, 1457년(세조 3)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서북변의 건주위를 정벌하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지얼마 안 되어 대궐에서 숙직하던 어느날 밤,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생길 징조라고 말했다. 이에 평소 그의승진을 질투하고 있던 류자광(柳子光)이 이것을 엿듣고 역모를 꾸민다고 모한, 강순(康純)과 함께 처형되었다

문과 급제자는 모두 180명으로, 이를 본관별로 분류하면 의령남씨가 139명, 영양남씨가 28명, 고성남씨가 8명, 본관미상이 5명이다.

의령남씨의 1세조 남군보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중 을진은 고려 말기의 명신으로 국운이 기울자 사천(沙川: 양주(楊州)의 속령)에 은거, 조선 개국 후 태조가 불렀지만 불응했다. 그의 충절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했으나 이를 오히려 수치로 알고 감악산(紺嶽山) 깊숙한 석굴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을번은 고려 말에 밀직 부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이 된 아들 재(在) 은(誾)의 공으로 검교시중이 되었다.

남재, 남은 형제는 같은 개국공신이면서도 태조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남은은 방원(芳遠:태종) 정도전(鄭道傳)등과 함께 조선 개국의 중추 세력이었다. 남은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삼척에 들어온 왜구를 격퇴하고, 사복시정이 되었다. 1388년(우왕14)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동조했고, 응양군 상호군 겸 군부판서를 거쳐 밀직부사에 올랐다.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이성계 일파와 활약하던 중 정몽주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동지밀직사사가 되었다. 이어 정도전, 조준, 윤소종, 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개국을 추진하고, 판중추원사가 되어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원사, 우군절제사에 이르렀다.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방원에게 처형되었다.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남재는 조선 영의정을 지냈다. 초명은 겸(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범정(範亭). 시호는 충경(忠景).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진사시에 합격, 좌부대언을 지내고 아우 은과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1392년(태조 1) 포상을 피하여 은거하였으나 태조에게 처소가 알려져 「재(在)」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개국공신 1등으로 중추원학사 겸 대사헌이 되었으며, 의령부원군에 봉해지고 여러 관직을 거쳐 1396연도 병마사로서 대마도 정벌했다. 1398년(태조7) 제1차 왕자의 난 때 아우 은이 살해됨과 함께 일시 유배되었다가 태종 즉위 후 세자사부가 되고, 수문전 대제학을 지냈으며, 1416년(태종16)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남씨의 첫 정승이 되었다. 경제에 밝고, 문장이뛰어났으며 산수에도 능하였다. 그의 손자 남지(南智)는 좌의정, 남간(南簡)은 예문관 직제학, 남휘(南暉)는 태종의 사위가 되었다. 남이 장군은 남휘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자, 좌의정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그는 세조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적개공신에 올랐으며, 북변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무훈을 쌓아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평소에 그를 시기하는 류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예종 즉위년에 죽임을 당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남간의 증손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시습(金時習)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의 복위를 상소했다가 묵살당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 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만녕에 저술한 <육신전(六臣傳)>은 빛을 못보다가 숙종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지족당(知足堂) 남곤(南滾)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중종 때 훈구파(勳舊派) 대신으로 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를 숙청한 후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남씨는 이렇듯 부분적으로 화를 입기도 했으나 그 세력은 꾸준히 확장되어 성종 때는 남지의 증손 치원(致元) 섭원(燮元)이 부마가 되어 왕실과 척연을 굳게 했고, 선조조 이후는 사색당쟁과 밀접히 연관되면서 숙종조에 이르러서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일가이면서도 정치적 이해로 당파를 달리하기도 했다.

남씨 중에서도, 특히 좌의정 남지의 후손들이 북인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었다. <소북>의 영수였던 남이공(南以恭)은 남지의 6대손으로 본래 북인의 강자였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북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자 류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소북을 영도했다. 그러나 선조 말년에 이르러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소북과 대북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대북이 추대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소북은 쇠운을 맞았다.

한편 서인의 분파인 <소론>의 영수였던 문충공(文忠公) 남구만(南九萬)은 남지의 셋째아들 남구의 7대손이며, 자는 운로(雲路).호는 약천(藥泉).시호는 문충(文忠). 송준길의 문인이다.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1679년 한성부 좌윤으로서 윤휴,허견(許堅)등 남인을 탄핵하다가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대제학 대사간을 역임, 이때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 영수가 되고, 1684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사사를 결정하자 낙향했다. 그 후 부처 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서용, 1707년(숙종 33) 치사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문사와 서화에 뛰어났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무산의 향사 등에 제향되었다.

문헌공(文獻公) 남공철(南公轍)은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의 아들로 순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학자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갈을 썼다.

철종 때 대제학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남병철(南秉哲)은 남유용의 형 남유상(南有常)의 5대손이다. 문정공 남이웅(南以雄)은 남공의 사촌으로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에 오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은 부총관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이괄의 난을 평정, 진무공신에 올랐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안주성(安州城)을 사수하다가 끝내 순절했다.

한편 고성파(固城派)로 집현전 출신 학자 남수문(南秀文)이 <고려사절요(高麗使節要)>의 초고를 썼으며 벼슬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남주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일파로 몰려 남곤에 의해 추방당한 후 시문에 전심했다.

영양파(英陽派)로는 남사고(南師古)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역학(易學)풍수(風水) 천문(天文) 복서(卜筮) 상법(相法) 등에 도통하였고, 특히 풍수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주유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밖에 남치리(南致利) 남해준(南海準) 남용만(南龍萬) 등이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浪(낭)氏

낭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양주(楊州) 단본이다. 낭씨의 시조는 낭충정공(浪忠正公)이라고 전해질 뿐, 그 휘자와 연대 및 사적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며, 오직 한 벌밖에 없던 족보가 없어져 세계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낭씨가 중국 강소성(江蘇省) 양주(楊州)에서 나왔다고 하며, 지금으로 부터 300여년 전인 명나라 숭정(崇禎)연간, 즉 1628~1644(인조 22)사이에 명나라의 병부시랑 낭초(浪礎)가 아우와 함께 우리나라에 귀화 했다고 실려 있다. 또 <앙엽기(像葉記)>에도 낭씨는 야인으로 투화(投化)한 사람의 후예라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乃(내)氏

내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이며, 본관은 개성이라고 전한다. 내씨는 조선 개국 초에 고려를 재건하려는 세력과 왕씨 일족을 숙청할 때 귀한 신분에 있는 왕씨 한 사람이 화를 면하기 위해 내씨로 변성하고 왕씨의 본관인 개성을 본관으로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신라 때 내숙(乃宿)이 이벌찬으로 소지왕(炤知王)의 국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고려사(高麗史)>에 충혜왕의 사부가 내원(乃圓)이었음을 미루어 보아 이조 개국 이전부터 있었던 씨족이었으나 병란 등으로 가첩 및 문헌이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이조 현종때 첨지중추 부사를 지낸 득균(得均: 일명 득선)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일세조의 묘소는 파주군 교하면 상지석리 오미산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하고 있다.

奈(내)氏

내씨는 옛 문헌에도 보이지 않던 성씨로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충북 서천군에 2가구, 황해도 수안군에 2가구 등으로 총4가구가 나타났다. 그 중 수안군 율계면 지석리에 살던 내재원(奈在元)에 의하면, 그때로부터 약 50년 전에 그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또 그들은 본관을 나주(羅州)로 쓰고 있었다. 1985년도 조사자료에 의하면 전체 인구수가 68명으로 나타났다.

盧(노)氏

노(盧)씨의 도시조는 노수(盧穗)라고 한다. 그는 당나라 한림학사로 있다가 아들 아홉을 데리고 뱃길로 신라에 왔다고 한다. 그의 아들 9형제가 모두 신라에 벼슬을 하여 이들이 곧 9관(九貫) 노(盧)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씨는 고려말 이후부터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조에서는 정승 3명, 대제학 1명, 청백리 2명이 나왔다. 고려 때 가장 이름이 높았던 사람은 장연(長淵) 노씨의 중시조인 노단(盧旦)이다. 그는 문종, 선조 때의 학자로 벼슬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두 차례나 과거의 고시관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고, 스스로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광주(광산) 노씨

광산노씨는 도시조 수의 맏아들 해(垓)가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세우고 광산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공을 세우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진 만(蔓)을 1세조로 하는 계통과,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검교 우의정을 지낸 경평공(敬平公) 숭(嵩)의 묘지를근거로 하여 고려조에 감문위 대호군을 지낸 서(恕)를 1세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는데 모두 상계가 실전되어 일조지손이면서도 계촌이불가능하다.

광주노씨는 9관 노씨 중에서도 가장 번성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낳아 더욱 유명하다. 그는 별제 홍(鴻)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장원, 호당에 들고 문형을 맡았으며, 선조조에 영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외에 이황의 문인 노수(盧遂), 조식(曺植)의 문인 노흠(盧欽) 등도 유명하다

곡산 노씨

곡산노씨의 시조는 도시조 수의 아홉째아들 노원(盧垣)이다. 그는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곡산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곡산으로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숙왕 때 영동정 판도판서를 지내고 문경으로 증시된 노조(盧兆)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곡산노씨는 관적지인 곡산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세거해 왔다. 8세 문정공(文靖公) 노경린(盧慶麟)은 이이(李珥)의 장인으로,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서원을 세워 유학을 정리하였고, 숙천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가자까지 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해주에 터를 굳혔고, 동생 노경룡(盧慶龍)의 후손들은 용진에서 살았다.  그 밖에 평산ㆍ김포 등지에도 일부 후손들이 살았다.

교하 노씨

교하노씨는 도시조 수의 둘째아들 오가 신라조에서 교하백에 봉해 졌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교하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초에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를 지내고 선성부원군에 봉해진 노강필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 노강필(盧康弼)은 본래 기계(杞溪) 사람으로 본관이 장산(章山:경산의 옛이름)이었는데 선성부원군에 봉해진 뒤에 교하로 이적하였다.

교하노씨는 10세 책의 아들대에서 4파로 갈리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다. 큰아들 제가 시중을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져서 서원군파로, 둘째 진이 공민왕조에 창성군파로, 셋째 균(鈞)이 경원군에 봉해져서 경원군파로, 넷째 영(渶)이 신양군에 봉해져서 신양군파로 갈린다. 그중 창성군파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한은 진의 손자이고 연산군조에 영의정으로 무오사화 때 많은 사림을 구출한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은 한의 손자이다.

만경 노씨

만경노씨는 시조 수의 여덟째아들 판(坂)이 신라조에 요동양척(遼東攘斥)의 공이 있어 평양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평양으로 하였는데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명종 때 평장사를 지내고 만경군(萬頃君)에 봉해진 노극청(盧克淸)을 1세조로 하고 본관도 1세조의 사적지인 만경으로 개관하였다.

그런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 문헌에는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홍주목사를 지낸 노혁이 시조로 되어 있으나 노혁(盧革)은 극청의 6대손이고, 또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본관이 만경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노혁이 최초의문과 급제자로 만경노씨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그가 시조라고 잘못 기재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집안은 임진왜란(壬辰倭亂)등 국난 때 의사들이 많이 나와 조국에 공헌하였다. 수암(守庵) 노응환(盧應晥)은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스승을 따라 창의, 금산 싸움에서 스승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아우 응탁(應晫)ㆍ응호(應晧) 역시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응완의 아들 관류당(觀流堂) 숙은 이괄(李适)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몽진할 때 많은 군량을 제공하여 공을 세웠다.

신창 노씨

신창노씨(新昌盧氏)는 교하노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1세조 노지유(盧智儒)는 교하노씨 1세조 노강필(盧康弼)의 손자 영순(永醇)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검교장군으로 훈공이 있어 판도판서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분적,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신창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후(老後)와 노순(盧錞)이 있다.

장연 노씨

장연노씨(長淵盧氏)의 시조 노구(盧坵)는 도시조 수(穗)의 아들이다. 수는 원래 당나라 한림학사로 자국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하였는데, 아들 9형제가 양척(攘斥)의 공이 있어 국가에서 봉지(封地)할 때, 구(坵)는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였고, 본관은 노안필(盧安弼)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으로 거란족을 물리치고 연강군(淵康君)에 봉해짐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이때부터 장연에 관적하였다고 한다.

안강(경주) 노씨

안강노씨(安康盧氏)는 도시조 수(穗)의 여섯째아들 노곤(盧坤)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안강백(安康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강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곤의 후손 광한(光漢)의 아들로 첨정을 지낸 노종선(盧從善)을 첨정공파 1세조로, 목사를 지낸 노희선(盧禧善)을 목사공파 1세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주요 분파로는 첨정공파에서 역정공<경필>파, 역락재공<경륜>파, 경암공<경임>파, 동래공<상건>파로 갈리어 경북 선산과 상주 등지에 분포되어 있고, 목사공파는 사간공(司諫公)파 단일파로 경북 군위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암공 노경임(盧景任)을 들 수 있다.

안동 노씨

안동노씨(安東盧氏)의시조는 도시조 수(穗)의 다섯째아들 노만이다. 그는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안동백(安東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평장사를 지내고 안동에 세거의 터를 마련한 노우를 1세조로 하였고, 손자 노영길(盧永吉)이 고려조에서 안동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안동으로 확정하였다.

안동노씨는 관적지는 안동이지만 안동부원군 노영길이 세거지를 떠나 전북 옥구로 옮긴 이후부터 후손들이 옥구와 완주 등지에 세거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7세 노중리(盧重理)의 후손이 완주로 옮겨가 그곳에 터를 닦았고, 6세 노결(盧潔)과 노침의 후손들이 김제와 익산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안동노씨가 전북 옥구군 성산면과 임피면, 완주군 봉동읍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길의 아들 숭(崇)이 있다. 그는 한림학사 지냈고, 아들 4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연일 노씨

연일노씨(延日盧氏)는 도시조 수(穗)의 일곱째 아들 노증(盧增)이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연일백(延日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연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후손 노경령(盧慶齡)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첩을 상고하지 못하여 노경령이 어느 시대 인물인지 또는 그의 행적과 그 이하의 세계를 알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는 조사 착오였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풍천 노씨

풍천노씨(豊川盧氏)의 시조 노지(盧址)는 도시조 수(穗)의 셋째아들로서 9형제가 모두 국가에 공을 세우고 분봉될 때 그는 풍천백(豊川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풍천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국자진사를 지낸 노유(盧裕)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풍천노씨는 관적지인 풍천을 떠나 주로 경남과 전북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 까닭은 5세 서린(瑞麟)의 대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처음 경북 청도로 남하 하였고, 아들 천주(天柱)가 다시 경남 창녕으로 옮겨 그곳에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며, 그 후대에서 일부가 전북 장수와 진안 등지로 이주 하였다. 그래서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전북 임실군 삼계면, 남원군 주천면, 순창군 쌍치면과 경남 진양군 문안면, 하동군 악양면, 함양군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해주 노씨

해주노씨(海州盧氏)는 광주노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시조 노시헌(盧始憲)은 광주노씨 1세조 서(恕)의 후손 덕기(德基)의 6대손으로 조선 태종 때 해주(海州)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광주노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노씨보>에는 노덕기는 1389년(공양왕 1) 생으로 조선 세종조에 사헌부 장령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상 차이가 있는데 확실한 사실은 알기가 어렵다.

한편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등 문헌에는 시조가 노세걸(盧世傑)이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현감을 지낸 노열지(盧說之)의 후손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감을 지낸 노열지, 예조정랑을 지낸 노광협(盧光協), 예조좌랑을 지낸 노수(弩手),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노계종(盧繼宗), 부사를 지낸 노성지(盧性之) 등을 꼽을 수 있다.

 

魯(노)氏

주요 본관은 함평(咸平), 강화(江華)이며, 시조 노계(魯啓)가 고려말 공민왕 때 정윤 벼슬을 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에도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노(魯)씨는 조선시대에 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역사상으로는 함평노씨의 노인(魯認)과 강화노씨의 노춘근(魯이春根)이 두드러진다.

강화 노씨

시조 노용신(魯龍臣: 일명 休臣, 시호 忠襄)은 진(秦)나라에 의해 주(周)나라가 망할 때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애왕(哀王)을 섬겨 기자의 8조와 정제를 다시 일으키고 갑비군(甲比君:갑비는 지금의 江華)에 봉해진 노중련(魯仲連)의 손자 노계(魯啓)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 신종 때 문과에 급제, 명종 때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고, 1232년(고종 19) 강화현령으로 몽고군의 침입 때 강화 수비에 공을 세워 강화군(江華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노신손(魯伸遜)과 그의 아들 노춘근(魯春根) 부자를 들 수 있다. 노춘근은 무과에 급제, 수문장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당포(唐浦)해전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다시 고하도(高下島)싸움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고향에 정문이 세워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광주 노씨

광주노씨(廣州魯氏)는 강화노씨와 동원(同源)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를 가리지 못해 계대가 가능한 노필상(魯弼商)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그는 광주(光州)에 토착한 사족(士族)의 후예로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고 한다. 본관을 광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선대부터 광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조상의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본다.

밀양 노씨

시조 노형권(魯衡權)은 강화노씨의 원조(遠祖) 노계(魯啓)의 원손(遠孫)이다. 그는 1359년 (공민왕 8) 문과에 급제,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로 파천할 때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홍건적을 대파했다. 난이 평정된 후 밀산군(密山君:밀산은 지금의 密陽)에 봉해지고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으며, 조선 개국 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형권의 아들 노서(魯恕)는 조선조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증손 노복(魯馥)은 군수를 지냈다. 복의 아들 노요좌(魯堯佐)는 참의를 지냈고, 요좌의 아들 노식(魯植)이 참판을 지냈다.
숙의 아들 노세보(魯世輔)는 참의를 지냈고, 그의 아들 노열(魯說)은 참판을 지냈다.

함평 노씨

시조 노목(魯穆)은 강화노씨의 원조(遠祖) 노계(魯啓)의 원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함풍군(咸豊君:함풍은 지금의 咸平)에 봉해졌으며 또 7세손 노신(魯愼)이 공민왕조에 함풍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咸平)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함평노씨는 시조가 함평으로 관직을 받았다고 하지만 시조의 아랫대에서 함평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함평노씨 족보(咸平魯氏族譜)>에 의하면 시조 노목의 묘소가 합천군 봉산면 대평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또 4세 노관도(魯貫道)의 아들 노창문(魯彰文)의 부인이 나주의 손씨(孫氏)이며, 손녀가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에게 출가했다는 사실로 보아 노관도의 대에 함평에 연고를 맺은 듯 싶다. 함평노씨의 중흥조인 무열공(武烈公) 노신(魯愼)은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침입 때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등과 함께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에 녹훈, 함풍군에 봉해지고, 상호군(上護軍), 정윤(正尹)들을 지냈다. 그는 역전의 용장으로 이성계(李成桂)와는 막역한 사이이면서도 이성계가 고려를 멸할 기미를 보이자 이성계 반대파에 속했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그의 묘소는 실전되어 1960년에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설단,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종주(魯宗周), 노인, 노홍(魯鴻) 등을 들 수 있다. 노종주는 단종조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 나주옥에 갇혔으나 탈옥하여 영암 서호(西湖)의 은적산에 은거했다. 금계(錦溪) 노인은 1597년(선조 30)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년만에 탈출, 명(明)나라로 건너가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그의 유고집 <금계일기(錦溪日記)> 는 보물 제 311호로 지정받았다. 관암(冠巖) 노홍(魯鴻)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진영장(鎭營將)으로 전공을 세우고 원종2등 공신(原從二等功臣)이 되었다. 이 외에 노극명(魯克明), 노연령(魯延齡), 노성택(魯聖澤)등이 각각 문과에 급제한 인물들이다.

路(노)氏

개성노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황제의 후손이 노(路)에 봉해져서 생긴 성이라고 한다.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학사로서 1351(충정왕 3)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 개성에 정착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다. 노씨는 문헌에 개성노씨 외에 태원(太原)ㆍ북청(北靑)ㆍ대원(大元) 등 3본이 전해지나 1930년도 국세조사에 개성노씨 외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늘날은 개성노씨만 실존한 것으로 생각된다.

雷(뇌)氏

뇌씨는 교동(喬桐)단본으로 시조는 미고이다. 교동(喬桐)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의 유배지 이기도 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40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34가구가 수안(遂安) 황주(黃州) 서흥(瑞興) 등 황해도 일대에 살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뇌씨의 선조는 본래 교동에서 살다 가 그 곳과 지호지간에 있는 황해도로 이주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옛날 육지에서 귀양갔던 선비의 후예 인 듯 싶다.

賴(뇌)氏

옛 문헌에는 나오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시로서 시조와 본관은 상고할수 없다.
당시 경기도에 1명, 충북에 1가구 4명, 도합 5명이 살고 있었다.

段(단)氏

주요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시조는 이조 때 현감(縣監)을 지낸 단유인(段由仁)이다. 고사(古史)에 나타나는 단씨로는 백제의 학자인 단양우(段楊雨, 五經博士) 가 있는데, 양쪽의 관련은 참고할 길이 없다.

강음 단씨

시조 단희상(段希詳)은 본래 중국 강음현(江陰縣) 사람이다. 그는 1598년(선조31)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세우고 귀화했다고만 되어 있을 뿐 그의 선계와 관직 및 정착지점은 상고할 수 없다. 후손들이 맨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온 그를 동래시조로 삼고,본관은 시조의 본향이 강음이기 때문에 강음으로 하였다고 한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에는 경기도에 11세대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안 단씨

시조 단유인(段由仁)은 조선조에 현감을 지냈다는 사실 외에 그의 선계 또는 본관을 연안(延安)으로 하게 된 연유와 어느 시대 인물인지는 상고할 수 없다. 그 후손으로 계양상사(啓洋商事) 사장·한국제강(韓國製鋼) 회장·해성(海成) 그룹회장으로 있는 단사천이 있다.

단(單)씨

연안 단(單)씨는 우리나라 성씨의 298성이 실려 잇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이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 옛 문헌은 물론 중국에도 없던 성으로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경기도 부천군 영흥면 내리에 살던 단명선(單明先) 1가구가 나타났다. 그의 아버지 단명선(單明善)이 어려서 고양·수원 등지를 전전하다가 그곳으로 왔다고 한다. 본관이 연안이란 것으로 보아 문헌에 나오는 연안탄씨나 연안단씨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端(단)氏

한산 단(端)씨의 본관은 한산 단본으로 옛 문헌에도 나오는 성씨아나 시조는 상고 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경남 동래군 사하면 암남리에 단명복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唐(당)氏

밀양 당씨 시조 당성은 본래 중국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사람으로, 송나라 휘종 때의 승상 당각의 6세손이다. 그는 원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하여 정동행성의 연리를 거쳐 사평순위부 평사에 올랐다. 그는 문장에 능하여 당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맡아 보았고, 조선 개국 후에는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전서를 거쳐 공안부윤에 이르고, 많은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의 녹권을 하사받았다.

본관은 태종이 밀양(密陽)으로 사관했기 때문에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 당씨의 인물로는 당윤문(唐允文)이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성균관 사성, 사복시정 등을 지냈다. 또한 선조조 임진왜란 때 수문장으로 선무 원종공신에 오른 당언량(唐彦良)과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된 병마절도사 당부흥(唐復興), 인조 때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오른 부흥의 아우 대호군 당득흥(唐得興), 개령현감으로 선조 때 호성 원종공신에 오른 당계흥(唐繼興),이괄의 난 때 의병장으로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진무원종공신에 오른 당의남(唐義男)이 시조 당성과 함께 <당씨6공신(唐氏六功臣)>으로 유명하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월봉리에 25세대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大(대)氏

대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개 성씨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에 비로소 나타난 성씨로 본관은 밀양과 대산 2본이다.

대산 대씨

대씨는 본래 발해국(渤海國)의 시조왕 대조영(大祚榮)의 성이다. 발해는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말갈족과 더불어 송화강(松花江)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확보, 해동의 성국을 이룩하여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에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하자 대조영의 후손 광현(光顯)이 926년에 고려 태조에게 투화하여 왕씨를 사성받았다는 것은 알려지고 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대산대씨와 발해대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 국세 조사 때 밝혀진 것을 보면 전남 영광에 10여가구 등 12가구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밀양 대씨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원래 당나라 무장으로 말갈(靺鞨)을 통관 하였고, 당제로부터 진국공에 봉해졌다. 그의 초명은 걸걸중상이었는데, 걸걸은 우리말로 <걸지다, 걸걸하다>는 뜻으로 이를 한자로 <대(大)> 자로 풀어대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은 699년 고구려가 신라에게 망하자 그 유민들과 말갈족을 이끌고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여 발해국을 세우고 왕이 되니 이 분이 바로 고왕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물려받고 당나라 관제와 문화의 영향을 입어 해동의 성국으로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인 926년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했다. 그러자 그의 후손인 대탁(大鐸)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망명, 지금의 경남 밀양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밀양대씨는 주로 전남 영광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영남에서 호남 으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都(도)氏

시조는 도진(都陣)이고, 본관은 성주(星州) 단본이다. 성주도씨의 근원은, 한나라 무제 때(B. C112년) 남월의 재상 여가(呂嘉)가 왕 건덕(建德)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계가 복파장군이 되어 여가를 사로잡아 그 공으로 임채후에 봉해지고 도씨로 수성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의 후손 도조(都祖)는 한나라 성제(成帝) 대에 중국 장안으로부터 고구려에 들어와서 동명왕이 죽고 유리(琉璃)가 이복동생 비류(沸流), 온조(溫祚)등과 왕권 쟁탈전을 벌일 때 유리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고,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다스리는 대 공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 나라 도씨의 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어 백제 개루왕 때의 재상 도미(都彌), 신라 진흥왕 때의 도도(都刀), 진평왕 때 도비(都非)와 그의 아들 눌최(訥催), 통일신라 시대에 도유(都儒)등으로 이어져 오다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도진(都陣)이 성산부원군에 봉해짐 으로써 비로소 성주도씨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문헌이 실전 되어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 중기에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도홍정(都洪正)·도응(都膺)을 들 수 있다. 도홍정은 공민왕 때 삼한 공신으로 시중에 오르면서부터 정계의 중추에 진출하였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공민왕조의 실권자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자 동향인으로 벼슬이 찬성사에 올라 세력을 떨치다가 우왕조에 이인임의 실각과 함께 몰락하였다.

청송당 도응은 태조 이성계와 가까운 친구로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옛 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상장군에 임명하고 경창의 쌀 7백석을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홍주의 노은동에 은거, 다섯 차례나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감복한 태조가 청송당이란 호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

도씨는 조선시대에 1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취애(翠厓) 도응유(都應兪)는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인으로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고, 인조조의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의병장으로, 정묘호란 때는 정경세(鄭經世)에 의해 소모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배척하자 그 잘못됨을 지적했고, 박이립(朴而立)이 정구를 모함하자 항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씻었다.

양직 도성유(都聖兪) 역시 정구, 서사원 문하의 성리학자로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다.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 역시 정구, 서사원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당세에 문명을 떨친 학자로 인조조 이괄의 난 때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대 공이 컸으며 병자호란 후에는 산림에 묻혀 후진양성에 힘썼다. 여유의 맏아들 도신수(都愼修)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함흥부사등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만년에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으며, 둘째 아들 도신징(都愼徵)은 성리학에 뛰어나 영남의 유림에서 이름높은 학자였다. 그는 1674년(현종15)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의 비)가 죽고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 대공설(大功說)로 예론이 기울어지자 상소하여 이를 맹렬히 반대,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마침내 이를 따르게 했다. 숙종 초에 남인의 천거로 강릉참봉, 주부를 거쳐 용궁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통훈대부에 승진했다. 이 밖에도 도씨 문중의 인물로 도형(圖形), 도경유(都慶兪) 등을 꼽을 수 있다.


道(도)氏

고성 도씨의 본관은 고성 단본이다. 도씨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도곡총설(陶谷叢說)>, <전고대방(典故大方)>등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 국세조사 때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옹포리에서 도응선 (道應善) 단 1가구가 신고됨으로써 처음으로 나타난 성이다.

1930년도에 1가구가 오늘날의 숫자만큼 번창한 것인지. 당시 조사가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역사에 나오는 도선(道詵), 도안(圖案), 도윤(道允), 도의(道義), 도증(道證), 도침(道琛), 도현(道顯) 등은 모두 승적에 있었던 사람들로서 법명이지 성씨는 아니다.

陶(도)氏

도씨는 풍양, 순천 두 본 외에도 남양, 청주, 유곡, 별양, 죽청, 경주, 병양, 밀양, 순천 등의 본관이 <조선씨족통보>에 나타나 있다. 현재 도씨 인구의 80%가 경기도 김포군에 살고 있다.

순천 도씨

순천도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시조 도구원(陶球元)은 원나라의 진사이다. 그는 1296년(충렬왕22)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가 고려에 들어올 때 부마도위로 공주를 배종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와 고려조에서 벼슬하다가 만년에 순천으로 퇴거했다. 후손들이 도씨의 선계는 당나라 때 대장군을 지낸 도간(陶侃), 간의증손 도연명(陶淵明) 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문적이 없어 구원 이상의 세계를 알 수가 없으므로 구원을 동래시조로 하고 순천에 퇴거 정착하였기 때문에 순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가 순천에서 살다가 다시 경기도 풍덕(지금의 개성)으로 옮겼고 그 후대에 김포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통진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관적지는 단순 연고지에 불과하고 본거지는 통진이라 할 수 있다.

시조의 묘소는 개성군 진봉면 북대족리 도궁곡에 있다. 순천도씨는 시조가 동래한후 현재까지 20여 대가 지났지만 후손이 영락하고 또 이렇다 할 인물을 내지 못해 씨족 전체의 족보를 만들지 못하여 같은 씨족이면서도 서로 모르고 지낸 것을 안타까워하는 구절이 족보 서문에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여태까지 족보를 만들지 못하다가 근세에 와서 창보한 것으로 짐작된다. 순천도씨는 고려조에서 2세 도정흠(陶正欽)이 문하시랑을 지내고 개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광세(匡世)가 소부소감을 지냈고,4세 도동명(陶東明)이 고려 말에 어사를 지내다가 조선조에서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도제만(陶濟萬)이 성균관 진사였고, 11세 도진민(陶晉民)이 가선대부,그의 아들 도계동(陶啓東)이 무과에 올랐을 뿐 특별한 인물을 내지 못했다.

풍양 도씨

도(陶)씨는 중국의 사서에 한나라의 제상으로 도청이 있었고, 도겸, 도곡등의 이름이 기억되어 있으며 <조선씨족통보>에서도 나타나 있는 것으로 미루어 중국계의 귀화 성씨인 듯하다.

풍양도씨는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나타나 있고, 충렬왕 때의 인몰로는 도성기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짐작되나 시조와 본관을 풍양으로 하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頓(돈)氏

돈씨의 본관은 목천(木川) 단본이고, 시조는 미고이며, 8·15광복 이전에는 남한에는 없던 성씨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고분고분하게 순응하지 않고 자주 소란을 피웠으므로 미워하여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 상, 우, 장등 짐승의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는데, 이들이 후에 돈(豚), 상(象), 우(牛), 장(獐)씨로 개성 했다고 한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36가구가 있었는데 그중 31 가구가 평안남도에 있었고 나머지는 황해도와 평안북도에 있었다.
敦(돈)氏

돈씨의 본관은 청주(淸州) 단본으로 시조와 본관을 청주로 하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옛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1930년도 국세 조사 때는 보이지 않다가 60년도 국세조사 때 비로소 나타났다.

董(동)氏

시조 동승선(董承宣)은 한무제 때의 대유로 광천백에 봉해진 동중서(董仲舒)의 원손이다. 그는 고려 말엽에 명나라의 접위사(接慰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영주(營州)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5대손 대에서 함남 북청과 단천, 함북명천 등 세 고을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광천동씨에는 동승선의 후선 외에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도진사로 명나라의 원병을 이끌고 우리 나라에 온 명장 동일원(董一元)의 후손이 있다. 동일원은 명국이 철수할 때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를 따라 종군했던 아들 대순(大順)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후금(後金)의 난>이 일어 나자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동일원은 동승선의 친제인 동인선(董印宣)의 7대손으로 성종 때 명나라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간 동월(董越)의
현손이다. 그러니까 동일원은 동승선의 종7대손이 되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은 다같이 한집안이 되는 셈이다.

동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태종 때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동덕현(董德賢)과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우봉현령·갑산부사 등을 지낸 동응란(董膺蘭), 일원의 손자로 인조 때 감역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분개,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거한 동한필(董漢弼) 등을 들 수 있다.

杜(두)氏

두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본관은 두릉 단본이다. 두릉은 중국의 지명으로 본국에서의 관향을 우리나라에 와서도 그대로 쓰고 있는 성씨인데, 같은 두릉 사람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의 후예로 지칭하면서도 동래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그 하나는 고려 목종(穆宗), 즉 송나라 진종 때 귀화한 두경녕(杜慶寧)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정착한 두사충(杜師忠)의 아버지 두교림(杜喬林)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경녕계> 시조 두경령은 중국 두릉 사람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의 후예이다. 그는 송나라 태종 때의 병부상서로 왕위 계승의 논의가 있을 때 진종의 옹립을 반대하다가 소주자사로 좌천되어 아들 중서사인 지건과 좌습유 지방을 데리고 해로로 부임하던 중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7)우리나라 궁지현(宮池縣: 지금의 김제군 만경)에 표착, 귀화했다. 고려조에서는 송조 특청에 따라 궁지현을 식읍으로 내리고 두릉군에 봉했다. 그래서 본관을 두릉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전북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에 있고, 매년 음력10월 초3일에 향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두경승(杜景升)과 조선조의 두정란(杜廷蘭)을 들 수 있다. 두경승은 고려 명종 때 무신으로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용명을 떨쳤고,뒤에 삼한후벽상공신에 이르렀다. 그는 1197년(명종27) 최충헌이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세우려 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자연도(紫燕島: 지금의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조선시대에는 두정란이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선조 때 마도만호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과 함께 역전하다가 금산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우 두정래(杜廷萊)도 훈련원 봉사로 형과 함께 옥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선전하다가 금산에서 순절했다.

두기문(杜起文)은 벽동군수를 지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모두 전공이 있어 행주산성에 현공비가 세워졌다. 두만형(杜萬馨)은 정조때 문필이 탁월하여 왕으로부터 <초당>이라는 호가 하사되고 고향인 금구에 어필각이 세워졌다. <교림계> 시조 두교림(杜喬林)은 중국 두릉 사람으로, 진나라 무제 때의 명장 두예(杜預)의 26세손이며 당나라 시인 두보의 14세손이다. 벼슬은 명조에 기주자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두사충(杜思忠)은 명나라 신종 때 상서복야 겸 태사를 지내다가 1592년(선조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으로 매부인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함께 두 차례나 와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고, 회군할 때 압록강에서 진린을 보내면서 <내 차라리 예의지국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머지 않아 오랑캐 땅이 될 나라로 돌아갈 수는 없다>하고 귀국을 단념, 달구현(達句縣: 지금의 대구)에 정착하여 호를 모명(慕明)이라 하였으며,동네 이름도 <대명(大明)>으로 고쳤다. 그리고 동구 밖에 단을 모아 초하루, 보름으로 관복을 입고 북녘을 향해 절하고 울면서 망향의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묘소는 대구시 만촌동에 있다.

馬(마)氏

본관은 목천(木川), 장흥(長興) 두 본이 있으나 장흥은 본래 목천에서 갈려진 같은 본의 분파인 것이다. 마씨는 본래 영성으로 백익(伯益)의 후손이었는데, 조나라 종실 사가 장수가 되어 말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마복군에 봉해진 후 마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마씨의 시원에 대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공략할 때 까지 저항했던 목천지방 사람들을 미워하여 우(友) 마(馬) 상(象) 등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마씨는 이미 삼한시대부터 마씨성을 쓴 사람이 사기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타당성이 없는 이야기로 이는 후세에 잘못 전해진 말이라 생각된다.

<마씨세보>에 의하면 마한 때 마겸(馬謙)이란 사람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으며, 시조인 마여(馬黎)도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시조 마여는 동명왕의 셋째아들 온조(溫祚)가 따로 나라를 세우려고 남하할 때 좌보(左輔)로서 시종하여 백제 창업에
공을 세운 십제공신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6백여 년 동안 대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한 후 십제국 재건을 기도하고 목지국의 대목악군에 웅거, 최후까지 항쟁했던 백제의 유신 마육침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본관은 중시조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의 아들 현(鉉)과 혁인(赫仁) 형제 대에서 목천과 장흥으로 갈라졌다. 종파는 중시조의 9세손 순흥이 고려 정종 때 문하시중 평장사로 목천군에 봉해졌고, 또 그의 아들 점중이 문종 때 이부상서로 목천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지파는 조상이 세거한 마사량현이 고려 때 회령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회령을 본관으로 삼았다가 혁인의 11세손 마천목(馬天牧)이 조선 초에 장흥부원군에 봉해졌고, 또 회령이 장흥도호부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장흥으로 개관하였다 한다.

마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는 공신 1명,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했는데, 목천파가 5명, 장흥파가 2명이다. 마씨의 대표적인 인물을 파별로 살펴보면 목천파의 의상(衣裳) 의경(義警) 형제가 효렴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마상원(馬尙遠)은 의상의 손자로 문장이 뛰어나서 차천로 형제와 어깨를 겨루었으며, 세상에서이르기를 <양차일마>라고 하였다. 마사종(馬嗣宗)은 의경의 손자로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오륜통의> <사례비요> 등예법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마맹하(馬孟河)는 영조 때 문과에 급제, 학유를 지냈고, 그의 아들 지휘(之徽) 역시 영조조에 문과에 급제, 직강을 지냈다. 마유(馬遊)는 조유선(趙有善) 김이안(金履安)의 문인으로 정조 때 진사시에 합격, 분교관을 거쳐 중부령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노곡에 은거, 후진을 가르쳤다.

남이형(南履炯)이 개성유수로있으면서 그의 기개와 의리를 존중, 깊이 사귀면서 학문과 정치를 논했다. 장흥파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의 무신 충정공(忠靖公) 마천목(馬天牧)이 유명하다. 그는 고려 말에 대장군이 되고, 조선 초에 상장군이 되었다. 태종 즉위를 도와 좌명공신 3등으로 장흥군에 봉해지고, 동지총제가 되었다. 그 후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판나주 목사 도총제 판우군부사 등을 지내고, 장흥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주촌(舟村) 마하수(馬河秀)는 임진왜란 때 선공감 주부로서 창의, 배 10여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포위되자 적진에 돌입, 분전하다 전사했다.

마계변(馬繼卞)은 인조조에 문과에 급제, 전적을 지냈고, 미산(眉山) 마성린(馬聖麟)은 해서와 초서에 능한 명필로 목판에 새긴 작품이 지금도 전한다.

麻(마)氏

마씨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 나타난 고구려 대무신왕 때의 마로(麻盧), <고려사(高麗史)>,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나타난 고려 태조 때의 개국공신 2 등에 오른 마난 등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연조가 깊은 성씨로 보이나 연원은 상고할 수 없다.

본관은 영평(永平), 열산(烈山) 두 본이 문헌에 전하지만 영평마씨는 마난의 후예로 알려져 있고, 열산 마씨는 미고이다. 그 외에 정유재란 때 명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던 마귀 제독의 후예인 상곡마씨가 있다. 마귀는 회회국왕 마립(麻立)의 원손으로 포정사(布政使) 마록(麻祿)의 아들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대장군, 병부상서 등을 지내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제독으로 용장 36명, 철기 1천명, 기병 1만6천 명을 거느리고 손자 마암(麻巖)과 함께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와서 왜군을 무찌르고 1599년(선조 32) 3월에 귀국했다. 그 뒤 청나라가 일어나고 명나라가 망하게 되자 마암은 청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쟁했기때문에 마씨일가는 큰 수난을 겪어 암의 아들이자 귀의 증손인 마순상(麻舜裳)이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마순상이 남경통판 호부낭중 겸 조병독량사로 산동성 등주 및 묘도의 군량미를 배로 수송하다가 폭풍을 만나 1627년(인조 5) 9월에 황해도 풍천에 표착,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회회국왕 마립을 원조로, 마귀를중시조로 하고 중국의 관향인 상곡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있다. 마순상이 처음 황해도 풍천에 표착하여 살다가 뒤에 홍주(지금의 홍성)를 거쳐 전남 광주군 외차면 용산리에 옮겨 살았고, 그의 6대손 마하백(麻夏帛)이 경남 합천군 봉산면 거안리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철종 연대에 봉산면 송림리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상곡마씨의 대종가가 현재까지 봉산면 송림리에 살게 되었다.

萬(만)氏

만씨의 본관은 개성, 강화를 비롯하여 진강, 광주, 홍주, 강릉, 익곡, 영풍 등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나타나 있으나 시조와 연원은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신라 진평왕 때 대내마를 지낸 만세(萬世), 경덕왕 때 상대등 만종(萬宗), 고려 태조 때 전공을 세우고 대광 벼슬에 오른 만세(萬歲), 신종 때 최충헌(崔忠獻)의 사노로 노예해방을 부르짖던 만적(萬積) 등의 이름이 보이나 오늘날의 만씨와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현존하는 만씨는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던 명나라의 경리사(經理使) 만세덕(萬世德)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만씨의 인구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39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35가구가 북한 지역이고, 남한에는 경기도와 충남에 각각 2가구씩 있었다.

梅(매)氏

매씨의 본관은 충주(忠州)단본으로 시조와 연원은 상고할 수 없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의하면 <황간(黃澗) 사람으로서 매한손(梅漢孫)이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국에 타서 먹이고 병을 낫게 하여 1519년(중종 14) 정문이 세워졌다.

매씨의 선계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남부(濟南府)에서 나왔다고 한다>라고 하였을 뿐 어느 때 누가 우리나라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총 16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10가구가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부천 안성 시흥 등지에 살았으며, 전북 김제와 황해도 서홍에 각각 2가구, 충남 논산과 함북 청진에 각각 1가구씩 살고 있었다.

孟(맹)氏

맹씨의 본관은 신창(新昌) 단본이다. 맹씨는 중국의 성씨로서 문헌에는 <노환공(魯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후예이다. 경부를 맹손(孟孫)이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맹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나라 맹씨는 중국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였을 뿐 우리 나라에 들어온 내력과 연대 및 인물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 않다.

맹씨는 고려조에 내시령동정, 예조의랑, 이부전서 등을 지낸 맹의를 시조로 하고 있다. <맹씨세보>에 의하면 "맹씨는 중국으로부터 나와서 신창으로 관적을 했는데 전서공(全書公) 의(儀) 이전의 계보는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시조 이전에 신창에뿌리를 내린 성씨라 생각된다.

맹씨는 충청도에서 손꼽히는 명문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상이요,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을낳아 더욱 유명하다. 맹씨는 조선조에서 상신 1명, 청백리 1명, 공신 1명, 문과 급제자13명을 배출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말 공양왕조에 수문전 제학을 지내다가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온양으로 은거한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가 있다. 효성이 지극한 그가 부모상을 당해시묘할 때 흰제비가 여막에 집을 짓는 기적이 있어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문정공(文貞公) 맹사성은 희도의 아들이자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고려 말 우왕조에 문과에 급제, 기거사인, 우헌납 등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수원판관ㆍ내사사인 등을 거쳐 태종 때 대사헌에 이르렀을 때 태종의 사위 조대림(趙大臨)이 사치하고 방자하므로 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잡아다 신문한 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곧 풀려났다. 세종 초에 이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그 후 우의정에 승진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 창달에 기여했으며,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집에 비가 샜다는 이야기는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스스로 악기도 제작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그 외의 인물로는 세조 때 적개공신 2등으로 신창군에 봉해진 맹석흠(孟碩欽), 인조조에 문과에 급제, 안동부사 등을 역임하고 시정을 여섯 차례나 지낸 맹세형(孟世衡),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안동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푼 공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특진관이 된 세형의 아들 맹주서(孟胄瑞), 서화로 유명하고, 특히 소를 잘 그린 맹만시(孟萬始),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현종의 딸 명선공주와 정혼했다가 공주가 죽자 신안위에 봉해지고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글씨를 잘 써서 안진경(顔眞卿), 류공권(柳公權)의 체를 터득한 맹만택(孟萬澤) 등이 유명하다.

明(명)氏

시조 명옥진(明玉珍)은 1362년(공민왕 11) 촉에 본거를 두고 운남을 공격, 함락시키고 자칭 농촉왕이라 일컫다가 이듬해 성도(成都)에서 스스로 칭제, 국호를 대하라 하여 선정을 베풀다가 4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 명승이 뒤를 이었는데 그도 역시 현군으로서 덕망이 높았다. 그 무렵 세력을 떨치던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도처에서 군웅이 할거, 중국 천하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명옥진보다 2년 앞서 무창의 진우량(陳友諒)이 스스로 칭제하고 국호를 한이라 했으며 1364년(공민왕 13)에는 홍건적에 속해 있던 주원장(朱元璋)도 오왕이라, 일컬으며 세력을 넓히더니 한의 진우량을 멸하고 그의 아들 진리의 항복을 받은 후 1368년 명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1371년 명승(明昇)은 명나라 태조에게 잠시 항복, 귀의후에 봉해졌다가 다음해에 진리와 함께 남녀 27명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화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관리로 삼지 않고, 백성으로도 삼지 않는다> 하여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후에 명승은 총랑(摠郞) 윤희종(尹熙宗)의 딸과 결혼하여 개성에서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우리나라 명씨의 시초이다.

본관은 시조가 자립했던 서촉으로 하였는데, 후대에 내려와서 우리나라에서의 연고지인 연안을 본관으로 쓰는 파도 있으나 모두 같은 핏줄이다. 명승은 이성계의 잠저에 자주 드나들며 바둑을 즐겼고, 그의 어머니 팽씨는 태조 이성계가 즉위할 때 용포곤의를 지어 올려 태조가 감읍 했다고 한다. 태종 때 명승은 화촉군에 봉함을 받고, 충훈세록을 하사 받았다. 명씨는 연조가 별로 오래지 않아 조선조에서 겨우 5명의 문과 급제 자를 냈을 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명광계(明光啓)가 있다. 그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평택현령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휘하의 정예병을 인솔, 조헌(趙憲)의 의병과 합세, 금산에서 격전하다 절사했다.

명정구(明廷耉)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 찰방, 보령현감 등을 역임했다. 명완벽(明完璧)은 철종 때 장악원 전악에 임명되어 악사, 국악사, 아악사 등을 거쳐 아악사장이 되었다.

이외에 근세 인물로 3ㆍ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뒤에 오성학교, 협성실업학교, 광신상업학교, 영변여중 등을 설립한
명이항, 일제 때 만주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이고 광복 후 초대 심계원장을 지낸 명제세(明濟世) 등이 유명하다.

毛(모)氏

모씨(毛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에 중국의 광주, 공산이에 서산, 김해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모두 시조와 본관의 유래는 상고할 문헌이 없다. 다만 중국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모씨는 평북 정주군 해산면 납천리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는 것을로 보아 정주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모씨는 광주모씨이고, 그 외는 모두 광주모씨의 분파로 생각하면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는 백제의 장군으로 신라의 대아성을 함락시킨 모척(毛尺),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한 묵호자를 숨겨준 모례(毛禮), 원성왕 때의 집사리 모초(毛肖), 궁예(弓裔)의 휘하에서 활약한 모흔(毛昕)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의 모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 사기에 모수 등 모씨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중국의 모씨가 한국에 귀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牟(모)氏

모씨는 중국의 성씨로서 축융(祝融)의 후손이 모자(牟子)가 되어 읍명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모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본관은 함평(咸平) 단본이다.

문헌에는 함평 외에 진주모씨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함평에서 진주로 이거한 같은 혈손이다. 시조 모경(牟慶)은 원래 중국의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이다.

<모씨세보>에 의하면 그는 송나라 흠종 때의 대장군으로 1126년(고려 인종 4) 금나라 사람이 흠종을 데리고 북으로 가던 날 송나라 고종의 명을 받아 형부상서 양응성(楊應誠)과 함께 사신으로 고려에 입국하였다.

당시 송나라는 이미 남쪽으로 밀려나고 북쪽은 금나라가 건국 되어 있어 고려조에서는 금나라를 두려워하고 칙서를
받지 않아 양응성은 그냥 돌아갔으나 그는 고려에 머물러 있었다. 때마침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나 인종이 연경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자 그가 정지상(鄭知常)과 함께 난을 토평, 왕을 환궁케 하였다. 그 공으로 벽상일등훈에 오르고 공주에게 장가들어 모평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관을 모평(牟平)으로 하다가 1409년 함풍현(咸豊縣)과 모평현(牟平縣)이 합해져서 함평현이 된 까닭으로 함평으로 개관했다.

모씨는 조선시대에 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모순(牟恂)이 있다.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 좌사간 의정부 사인 등을 지냈다. 그는 뛰어난 효자로 절강선생이라 불렀고, 나라에서는 정려를 내렸다. 모세번(牟世蕃) 모세무(牟世茂) 형제는 각각 현종조와 순종조에 문과에 급제, 다같이 현감을 지냈고 모경관(牟景觀)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좌랑 판관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모달겸(牟達謙)은 정조 때 문과에 급제,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바른말을 잘하고 당시의 권신 간배들을 가차없이 탄핵, <모 장령의 직언>이라 하였다. 그리고 기초 모수명(牟受明)은 이삼만(李三晩)에게서 글씨를 배워 해서와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모체>라 일컬었다.

睦(목)氏

시조 목효기(睦孝基)는 고려 때 낭장 동정을 지냈다. 목씨의 본관은 사천(泗川)단본이나 성씨와 본관의 연원은 밝혀지지 않고, 다만 상고 시대에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매우 화목하게 지내어 <목>으로 사성했다는 전설만이 전하나 확실한 문헌이 없어서 상고할 수 없다.

목씨는 고려 말에 무반으로 기반을 굳히고 조선 중종 때 학자인 목세칭(睦世秤)과 그 자손들이 중흥시켰다. 특히 조선 중엽에 이르러서는 상신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문과급제자 33명을 내어 비록 수는 많지 않으나 대성들과 어깨를 겨루었던 성씨로 다른 희성들보다는 특징이 있는 성씨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충(睦忠) 목인길(睦仁吉) 목자안(睦子安) 등의 이름이 <고려사>에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무신으로서 정삼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다. 목충은 공민왕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조에 조전병마사, 밀직부사가 되어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동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충의 종제 목인길은 공민왕 때 기철(奇轍)의 일당을 멸하여 1등공신이 되고, 홍건적의 난 때는 병부상서로 왕의 남행에 호종, 홍건적을 물리쳐 다시 공신이 되어 지밀직사사에 올랐으며, 우왕조에 문하찬성사로 전라도에 침범하는 왜구를 무찔렀다. 목자안 역시 우왕조에 밀직부사로 전라도 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막았고, 다시 강릉킿도체찰사가 되어 평해부에 침범한 왜구를 격퇴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세칭 목첨(睦詹) 부자와 첨의 아들인 목서흠(睦 欽)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삼형제가 있다. 목세칭은 조선 중종때 의 학자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뒤에 선조 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다. 첨의 아들 3형제 중 맏이인 매계(梅溪) 목서흠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초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은 형보다 앞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좌부승지. 청풍군수등을 지낸 후 사직했다가 인조반정 후 재기용되어 호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광주 목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 강릉부사 등을 지냈다.

이 밖의 인물로는 목씨의 유일한 상신인 목내선(睦來善)이 있다. 그는 서흠의 아들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많은 파란을 겪었으며 현종 때 이른바 <제2차 예송>이후 서인이 실세한 데 이어 숙종 초 남인이 득세하면서 형조 호조 예조의 각 판서를 역임하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삭직되었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에 기용,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차 집권하면서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 5년 뒤에 일어난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실각당하면서 유배되었다.

목장흠의 아들로 숙부 대흠에게 입양한 목행선(睦行善)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목창명(睦昌明)은 숙종 때 남인으로서 병조판사를 지내고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삭주(朔州)에 귀양가서 죽었다.

목씨는 갑술옥사를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꼐 세력을 잃었다. 다른 파계의 목호룡(睦虎龍)이 신임사화(辛任士禍)의 고변자가 됨으로써 목씨의 명예가 다소 손상되었다. 순조 초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뒤에 판서를 지낸 목만중(睦萬中)도 이 문중의 인물이다.

墨(묵)氏

묵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광녕(廣寧) 단본이며, 시조는 명나라의 병부상서를 지낸 묵사(墨泗)이다. 묵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성 중에는 보이지 않고,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비로소 등장했던 성씨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성씨로 여겨진다. 6 25동란 때 묵희열(墨熙烈)이 가지고 월남했다는 가승에 의하면, 시조 묵사의 아들 만근(萬根)이 명나라 말기에 요동(遼洞)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금화(金貨)에서 14세를 세거하였고, 경기도 수원 서울 충북 진천 제천 청원 경남 고성 등지에 거주한 묵씨도 모두 광녕 묵씨라고 되어 있다.

한편 문헌에는 묵씨의 본관이 요동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들과 관련이 있는 지는 상고할 수 없고, 다만 광녕묵씨가 요동으로부터 동래했다는 설에 비추어 볼 때 광녕묵씨를 지칭한 것으로 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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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문)氏

문(文씨)의 본관은 문헌에 132본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감천(甘泉)과 정선(旌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대중인 남평(南平) 문씨에서 갈리어 나갔으며, 오늘날에는 남평 단본으로 통일되어 있다. 감천(甘泉) 문씨와 정선(旌善) 문씨는 본래가 타성으로 성만 같을 뿐 본관은 다르고 조상도 다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수는 총 54명이다. 그중 40명이 남평문씨이고, 그 밖에 감천 문씨 5명, 개령(開寧) 문시 4명, 영산(靈山) 문씨 3명, 안동(安東) 문씨 1명, 본관 미상이 1명이다.

감천 문씨

감천문씨는 남평문씨의 지파로 조선 초에 좌의정을 지내고 감천군에 봉해진 문구(文龜)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감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문구는 남평문씨 1세조 경절공(敬節公) 익(翼)의 12세손이요, 고려조에 집현전 태학사에 이어 평장사를 지낸 양간공(襄簡公) 문득걸(文得傑)의 현손으로 밝혀졌고, 남평문씨와 동원임이 확인되어 남평문씨의 <임술대동보> 간행 때 남평으로 환본. 남평문씨 감천군파로 합보하였다. 그래서 사실상으로는 감천문씨는 없어진 셈인데 관례에 따라 아직도 흔히 감천문씨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는 달리 문세광(文世光)을 1세조로 하고 문구를 4세로 하여, 계대한 또 한 계통의 감천문씨가 있었으나 이 역시 남평으로 환본하였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 김고벽이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문씨로 사성되었고, 그의 아들 문원길(文原吉)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낭장을 지내고 감천문씨의 시조가 되었다고한다. 그리고 문세광을 시조로 하는 또 한 파가 있다고 하였다.

또 그의 후손에서 문근(文瑾)이 문과에 급제, 참찬을 지냈고 아우 문관(文瓘) 역시 문과에 급제, 장령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만성보>에도 역시 시조는 문세광이라 하였고 그뒤의 세계가 실전되어 문원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국조방목(國朝榜目)>, <조선과환록(朝鮮科宦錄)>, <한국과거사(韓國科擧史)> 등 여러 문헌에 문근 형제가 모두 남평문씨편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김씨가 문씨로 사성된 감천문씨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짐작된다.

매계(梅溪) 문근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춘추관 기사관으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중종 때 대사간, 도승지 등을 지냈다. 특히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삭직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아우 죽계(竹溪) 문관 역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안음현감으로 나가 전임자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어 전정후문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남평문씨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으로서 그의 탄생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전남 나주군 남평면 동쪽에 장자지라는 큰못이 있고, 그 못가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 군주가 그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서 오색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이상히 여긴 군주가 바위 위에 올라가 보았더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속에는 피부가 옥설 같이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기가 들어 있었다. 군주가 아이를 데려다 기르매 나이 5세에 문사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총기가 있었다. 그래서 <문(文)>을 성으로 삼고 이름을 다성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나주군남평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서너 마장쯤 가면 장자지라는 큰 못이있고, 그 곁에 우뚝 솟은바위가 있어 남평문씨 시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바위 위에는 후손들이 <문암(文巖)>이라는 비석을 세워 놓아 문씨 시조의 탄강지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 못가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조의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본관은 시조 문다성이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 삼한벽상공신에오르고 남평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남평으로 관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대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문공원(文公元)·문공유(文公裕) 형제의 묘지명에 의해 고려 숙종 때 우산기상시를 지낸 문익(文翼)을 중조 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문씨는 고려조에서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세족의 영예를 누렸으나 조선조에서는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이 절의를 지키고은거불사한 영향을 받아 벼슬 열력이 고려조에 비해 적은 편이다.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61명, 공신 3명을 배출했다. 경절공(敬節公) 문익은 남평문씨를 명문으로 끌어올린 중흥조이다. 그는 고려 숙종조에 우산기상시로 정계의 중추에 자리를 굳혔고, 그의 큰 아들 충의공(忠毅公) 문공인(文公仁)은 고려 인종 때 중서시랑평장사, 감수국사 등을 지냈다. 둘째 아들 정경공(貞敬公) 문공원은의종 때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의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셋째 아들 문가관(文可觀)은 조계종 대선사가 되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은 고려조의 명필로 유명한 경정공(敬靖公) 문공유로 벼슬은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작품으로 묘향산 보현사의 창사비 비명 및 음기가 전한다.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은 공유의 아들로 문무를 겸전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근검 충직한 현상으로 유명하다. 1170년(의종24)정중부의 난 때에는 많은 문신들이 피살되었으나 그는 앞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 의종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벼슬은 권판상서이부사에 이르렀으며,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두 아들 문후식(文候軾)은 동북면 병마사를, 문유필(文惟弼)은 판예부사를 지냈다.

남평문씨는 문후식의 8대손 문익점의 집안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문유필 집안의 문달한(文達漢)이 고려 말에 왜구를 무찌르는데 공을 세워 순평군이 되었으며, 문근(文瑾)이판도판서에 올랐다.

남평문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들여와 의류혁명을 이룩한 충선공(忠宣公) 문익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공민왕 때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당시 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들여와 우리 나라 목화재배의 시초가 되게 했다. 벼슬은 공민왕 때 우문관 제학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였고, 조선 개국 후 이성계(李成桂)가 친히 불렀으나 끝내 거절, 절의를 지켰다. 목화를 전파한 공으로 조선 태종 때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으며, 세종 때 부민후에 추봉, 세조 때 사당이 세워졌다. 그의 손자 정혜공 문래(文萊)는 조부가 거둔 목화를 베로 만들기 위해 <물레>를 고안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작방차(作紡車)라 부르다가 뒤에 그의 이름을 따서 <물레>라 불러오고 있다. 그는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 지리, 산수, 율려에 정통한 학자이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문익점의 손자 평익공(平翼公) 문빈(文彬)이 태종때 좌명공신 4등으로 월천군에 봉해졌고, 문달한의 아들 문효종(文孝宗)이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치사했다.

경숙공(敬肅公) 문상행(文尙行)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용담현령을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으며, 문민(文敏)은 중종 때 정국공신 4등으로 문원군에 봉해졌다.

창계(滄溪)문경동(文敬仝)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춘추관 편수관, 사성이 되었다. 문근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중종 때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남곤, 심정등의 무고로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삭직된 기묘명현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동생 문관(文瓘)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장령을 지냈다.

모계(茅溪) 문위(文緯)는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김면이 병사하자 뒷일을맡아 처리했으며 김옹,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감찰을 거쳐현감이 되었다.

풍암(楓庵) 문위세(文緯世)는 류희춘(柳希春),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 적의 퇴로를차단하여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목사가 되었다.

경암(敬庵)문홍헌(文弘獻)은 임진왜란 때 진사로서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를 좇아 진주성에서 분전,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와 함께 투신 자살했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인물로는 형조좌랑 문덕교(文德敎)와 수문장 문기방(文紀房)등이 있다. 문희는 인조 때 진무공신 3등으로 오천군에 봉해졌고, 문재도(文載道)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근세 인물로는 호남 의병장으로 항일전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대구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이 된 문태수(文泰洙), 최익현(崔益鉉)의문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관군, 일군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체포되어 12의사의 한 사람으로 불리운 문달환(文達煥), 상해 임시정부수립 당시 국민의회 대표로 참여,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문창범(文昌範), 재미동포 항일 단체인 대동보국회 회장을 지낸 문양목(文讓穆),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문일평(文一平), 우리 나라 최초의 사전인 <새국어사전>을 펴낸 문세영(文世榮)등이 있다.

정선 문씨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 문헌에 의하면 시조 문임간(文林幹)은 원래 전씨였는데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황제로 부터로 <문씨(文氏)>로 사성받았다 하며, 귀국하여 고려조에서 문하시랑 평장사, 태자소부를 지냈다고한다.

그러나 본관을 정선으로 하게 된 유래가 확실치 않은 점으로 보아 원래 정선전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아들 문관은 고려조의 <명장록(名將錄)>에 기록된 인물로, 벼슬은 참지정사에 이르고, 장경(章敬)이라는 시호가 내려 후손들이 중조로 삼고 있다.

門(문)氏

<중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문씨(門氏) 본관이 인천, 송림, 남포, 죽산, 인동, 함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1930도 1960년도, 1970년도 국세조사 때는 나타나지 않는 성씨이다.

인천문씨의 시조는 고려 때 감문위 낭장을 지낸 문필대(門必大)이다. 그리고 고려 때 시어사 중승을 지낸 문사명(門思明)을 시조로 하는 파도 있다.

米(미)氏

미씨의 본관은 문헌에 재령(載寧), 송림(松林), 유성(儒城), 방산(方山)등 4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재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시조와 본관의 유래를 상고할 수 없다. 재령미씨의 시조는 미영성(米榮盛)으로 백호장을 지내고, 함북 종성군 행영의 도통사로 있으면서 국경 경비에 참여하였다. 후에 경성(鏡城)에서 세거했다고 하나 연대는 알 수 없고, 본관을 재령으로 하게 된 연원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조선시대 명의(名醫) 미병제(米秉濟)부터 세수를 헤아리고 있다.


閔(민)氏

민씨는 선대에 중국으로부터 나왔다고도 하고, 또는 여주(驪州)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분명치 않다. 본관은 여흥(驪興) 단본이다.

문헌에는 여흥 외에도 황려(黃驪), 영주(榮州)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황려는 여흥의 옛이름이고, 영주민씨는 여흥 민씨의 지파로서 근세에 와서 여흥으로 통합되었다.

시조는 고려 때 상의봉어를 지낸 민칭도(閔稱道)인데 그의 상계는 전해지지 않고, 또 본관을 여흥으로 하게 된 연유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씨는 한말의 세도 가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역사상 3차에 걸쳐 크게 위세를 떨쳤다.

첫 번째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기간, 두 번째는 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세 번째는 한말 고종 때이다. 민씨는 조선조에서 왕비 4명, 상신 12명, 대제학 3명, 호당 6명,청백리 3명, 공신 7명, 장신 8명, 문과 급제자 249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왕비 4명은 청주 한씨 6명의 다음이고, 상신 12명은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 청송심씨 13명의 다음으로 제 5위이다. 그리고 문과 급제자는 제 6위이다. 민씨는 시조의 증손 민영모(閔令謨)가 중앙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 첫 번째 융성기를 맞는다. 그는 명종조에 판이부사, 태자태사 들을 지냈고, 그의 아들 민식(閔湜)은 신종조에 형부상서, 민공규(閔公珪) 역시 진종조에 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지냈다. 식의 증손 민지(閔漬)는 충숙왕조에 수정승으로 여흥군에 봉해졌고, 지의 아들 민상정(閔祥正)은 찬성사를 지냈다. 민종유(閔宗儒)는 공규의 증손으로 찬성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민적은 충혜왕조에 진현관대제학을 지냈다. 적의 아들 민사평(閔思平)은 공민왕 때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등을 지냈고, 아우 민유(閔愉)는 공민왕조에 제학을 지냈다. 이상이 민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 놓은 인물들로서 모두 10촌 안팎의 친족들이다.

조선이 개국되면서 민상정의 손자 민여익(閔汝翼)이 개국공신이 되고, 태종비 문경왕후(文敬王候)의 아버지 민제(民霽)가 좌의정, 그의 아우 민개(閔開)가 대사헌이 되었으며, 개의 아들 민불탐(閔不貪)은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민씨 일문은 이때부터 탄탄대로로 내닫는가 했었으나 태종조에 이르러 민무구의 옥사가 일어나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민무구, 민무질(閔無疾) 형제는 민제의 아들로서 제 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에까지 올랐으나 태종 때 종실의 이간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민무구의 옥사 이후 숙종조에 이르기까지는 별반 두드러진 열력이 없었다. 그 동안 문인공파에서 상정의 5세손 민효증(閔孝曾)이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그의 증손 민몽룡(閔夢龍)이 광해군 때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인조반정 후에 추탈당했다. 문손공파에서 민기(閔箕)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냈고, 그의 9촌숙인 민순(閔純)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업, 학자로 유명하다.

문순공파의 주축인 입암파의 파조 민제인(閔齊仁)은 예종 때 이른바 <민수사옥(閔粹史獄)>의 장본인인 민수(閔粹)의 손자로 명종 때 소윤일파들이 안명세(安明世)가 기록한 <시정기(市政記)>를 고치려는 것을 제지하다가 공주로 유배되어 죽었다.

숙종조 이후, 두 번째 융성기를 연 삼방파의 파조인 민광훈(閔光勳)은 민수의 6대손이자 민제인의 현손이다. 삼방파는 민광훈의 아들 3형제 시중(蓍重), 정중(鼎重), 유중(維重)의 후손 일문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삼방파는 이름난 노론집으로 숙종조 이후 1대에 걸쳐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인재파의 민시중은 현종조에 문과에 장원하여 숙종 때 대사헌을 지냈고, 그의 아우인 노봉파의 민정중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하여 숙종 때 좌의정에 올랐으며, 또 그의 아우인 여양파의 민유중은 송준길(宋浚吉)의 사위로 그의 딸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이다. 그 중 정중의 아들 민진장(閔鎭長)도 문과에 장원하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내어 부자 정승이 나왔다. 정중의 아버지 민광훈(閔光勳)도 인조 때 문과에 장원하여 세칭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

민유중은 노론의 중진으로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고, 그의 둘째 아들 민진원(閔鎭遠)은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한말의 민씨 세도는 삼방파 중에서도 여양파를 주축으로 이루어 졌다.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는 남인과 서인 사이의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때 폐위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같은 여흥민씨에서도 삼방파의 민시중, 민정중, 민유중, 민진원은 노론의 영수, 숙종조 좌의정을 지낸 전서공파의 민희(閔熙), 우의정을 지낸 민암은 남인의 영수로서 싸움을 벌였다. 따라서 노론에 속한 삼방파에서만 숙종조 이후 상신이 7명, 묘정 배향 6명, 판서급 32명을 포함해서 정삼품 당상관 이상을 50여 명이나 배출하였다.

여흥민씨의 세 번째 융성기인 한말 세도 정치는 민유중의 5세손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고종비, 즉 명성황후(明成皇候)가 되고, 10년간 집정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하여 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시작되었고, 고종 32년 민비가 시해됨으로써 막을 내렸지만, 민씨 세도는 삼방파의 치(致), 호(鎬), 영(泳), 식(植)자 돌림의 4대를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은 고종의 외조부인 민치구(閔致久)의 손자이고 , 병조·이조 판서를 지낸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민씨의 요인들은 대개가 민비의 책립을 전후하여 문과에 급제, 불과 10년 미만의 단기간에 병조, 이조 판서 등의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여흥민씨의 세도는 을미사변(乙未事變),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등 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타격을 받기도 했으나 세도정치의 가장 완벽한 전형을 보여 주었다.


朴(박)氏

박(朴)씨는 시조(중조)가 분명히 밝혀진 것은 대략 70본 안팎이다. 그리고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하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재미있는 전설이 보인다.

신라이전 원시 부족사회인 기로육촌(欺盧六村)의 촌장들이 하루는 알(연)천(閼川) 언덕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차 양산(陽山) 아래 멀리 나정(蘿井) 수풀사이에 무지개 같은 서기가 뻗히고 용마 한 필이 끓어 절하는 것을 보고, 그 곳에 가보니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한 포(胞)가 있어 기이하게 여겨 헤쳐보니 그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때가 서력 기원전 69년의 일이요. 뒷날 그를 왕으로 삼아 신라를 세우니 그가 곧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이야기다.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이 되고 일성왕(逸聖王)의 대에서 크게 갈리는데 그 각파의 분적종을 보면 밀성대군파(密城大君)파, 고양대군(高陽大君)파, 속함대군(速咸大君)파, 죽성대군(竹城大君)파, 사벌대군(沙伐大君)파, 완산대군(完山大君)파, 강남대군(江南大君)파, 월성대군(月城大君)파, 국상공(國相公)파등 이렇게 아홉으로 나뉜다.

강릉 박씨

중시조 박순(朴純)은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31세손이요,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4세손이다. 그는 고려 명종조에 문과에 급제, 보문각 시어가 되고 좌승선, 남경유수 등을 거쳐 병부상서가 되었다가 1187년(명종17) 조원정(曺元正), 석린(石麟) 등이 모반하여 난을 일으 키자 대장군이 되어 이를 평정하고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정당문학, 중서시랑 평장사에 오르고 계림군에 봉해졌다. 만년에 강릉으로 낙향해서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고려조에서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순의 현손박지계(朴之桂)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부시랑, 서운관 부정을 거쳐 예문관 저핵과 참지정사를 지냈다.

공민왕이 최만생(崔萬生), 홍륜(洪倫) 등에게 살해당한 후 9년간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정몽주(鄭夢周)의 천거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은거했다. 조선 정조조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충경군에 봉해졌다.

강릉박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했다. 그 중 박중신(朴中信)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강릉부사를 지냈으며 박시형(朴始亨)과 박시문(朴始文)은 중신의 아들로 각각 세조와 성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시형은 1459년(세조5) 발영시에 급제,사헌부 장령,호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박사, 교리, 동부승지, 안동부사등을 지내고 예문관 직제학에 올라 호조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시문은 강릉도호부사를 지냈다.

박공달(朴公達)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고, 그의 종질 박수량(朴遂良)은 단상법이 엄하던 연산군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효자 정문이 세워지고 유일로 천거되어 용궁현감, 사섬시 주부 등을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경주 박씨

경주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영해(寧海), 면천(沔川), 강릉(江陵)등 박씨와 함께 상고세계에서 분적한 파사왕 계통이다. 따라서 경명왕의 여덟째 왕자인 언의(彦儀)가 월성대군에 봉해져서 월성으로 관적한 월성박씨와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다.

경주박씨는 파사왕의 25대손이요. 영해박씨의 시조 박제상(朴堤上)의 21대손인 박도덕(朴度德)을 중조로 하고 있다. 그는 1033년(덕종 2) 문과에 급제, 합문지후가 되고 1036년(정종2) 한림학사, 정당문학·검교태부 등을 역임했다. 1044년(정종 10) 이부상서, 문하시중, 참지정사가 되고 1054년(문종 8) 금자광록대부에 올랐다. 그는 나라에 이바지한 충성과 공훈도 컸으려니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그가 죽으매 왕이 조제를 내리고 정문을 세우게 했으며 특히 문효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경주박씨는 고려조의 명문으로서 관적지는 경주이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옮겨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내면서 영화와 번영을 누려오다가 중조 도덕의 11대손 앙(1451년, 문종2 문과에 급제)이 단종조에 홍문관 저작으로 있을 때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김시습(金時習) 등과 함께 수양산에 은둔하였다. 만년에 함안군 서부 광평리 백이산에 은거하면서 「동로( 김시습)와 함께 어느 해에 수양산에 있었던고? 꿋꿋한 충성,곧은 절개는 가을 서리보다 늠름했도다. 백이산 무성한 고사리 지금 누가 같이 캘꼬? 고마정 아래 시내에서 나 혼자 슬퍼하노라」라고 시를 지었다. 그는 복지한 후 유덕자와 학자들이 대를 이어 군내의 파벌이 되었으므로 그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명동 풍계산에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조 도덕의 증손 황(璜)과 소부자를 들 수 있다. 자는 한향(漢鄕).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열공 황은 1126년(인종 4) 문과에 등과하여 이부시랑, 간의 대부,중서시랑 등을 역임했다. 1135년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들어 갔는데 금나라 임금이 「너의 임금이 주색에 빠져 인도를 돌보지 않으므로 짐이 폐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하고 묻자 그는 「임금 과 신하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이니 신은 비록 죽을지언정 따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금나라 임금이 크게 화를 내어 「네가 속국의 신하로서 천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리라」하고 형벌을 가했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금나라도 그의 충성에 감동하여 시신을 고국으로 보냈는데 왕이 분개하고 추모 하면서「 박황은 살아서는 된서리를 맞아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졌고 죽어서는 해를 꿰뚫는 충신이 되었으니 이는 그 선조 박제상이 남긴 가르침과 절개가 백대에 흘러 내려온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비단 일백 단과 쌀 이천 섬을 부조하였으며, 예관 김부식(金富軾)에게 명하여 왕례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또 정려를 세우게 했으며 개부의 동삼사사 문하시중에 추증하고 문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소는 1341년(인종 19)등과하여 예문관 수찬이 되고 감찰어사에 옮긴 후 한림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를 지낸 후 이부시랑에 승진되었다. 의종 때 대장군 박지순(朴之順), 병마사 김영석(金永錫) 등과 함께 강서의 도적을 토벌하고 돌아와서 정당문학 겸 간관이 되었다. 그 때 지주사 정습명(鄭襲明)이 무고에 의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자 성재대관 14인과 함께 조서를 받들지 않고 북을 울린 후 물러났다. 문하평장사에 추증되고 월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절효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세조 앙의 5대손 제현(齊賢), 제인(齊仁) 형제가 빛난다. 송암 박제현은 재주가 뛰어나서 책을 읽으면 곧 외웠고 문자도 잘 지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20일동안이나 회생을 시켰다.
일찍이 자오시를 지어 어버이 모실날이 부족하다는 뜻을 나타냈고,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비바람 속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성묘함을 거르지  않았다. 상을 마친 후 아우 제인과 함께 조식(曺植)에게서 글을 배우면서 동문들과 더불어 강론 연마하여 견해가 정밀해지고 조예가 독실해지자 스승이 감탄하여 「함안의 고사는 난형난제다」라고 하였다. 안자(顔子)의 사물잠(四物箴)과 주자(朱者)의 십훈(十訓)을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면서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고, 효경론(孝經論)을 지어 자여질을 가르쳤다. 49세 때 추천을 받아 선공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덕을 감추고 나아가지 않았다.

황암 박제인 역시 조식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학문과 덕을 닦는데 힘을 쓰자 정탁(鄭琢)이 「박제인은 남에게 알려 지지 않은 덕행을 지닌 군자다」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태릉참봉, 왕자사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 송라도 찰방이 되고 1601년 사임했다. 이듬해 시직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해 왕자사부로 부름을 받아 왕이 「왕자를 가르치는 데는 무슨 책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라고 묻자 「먼저 대학을 가르쳐야 하는데 소주까지 겸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왕은 왕자를 돌아보고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힘써 배우라」고 하였다. 1605년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이어 군위현감으로 나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제용감 판관에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1세조 앙의 아우 근무 역시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형과 함께 남하하여 진도로 들어가 그 후손이 진도에서 대성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대동보를 수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고령 박씨

중시조 박언성(朴彦成)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9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둘째 아들로 고양대군에 봉해졌다.
고양(高陽)은 본래 대가야국으로 562년(진흥왕23) 신라에 합병된 후 경덕왕 때 고양 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다시 고령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고령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사인공파 파조 박섬(朴暹), 부창정공파 파조 박환(朴還), 주부공파 파조 박련(朴連) 등 3파로 나뉘어 세계를 잇고 있다.

고령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56명, 상신 1명, 청백리 4명, 호당 1명, 공신 1명을 배출하여 벼슬 열력으로는 밀양박씨, 반남박씨, 죽산박씨에 버금간다. 3파 중에서도 사인공파와 부창정공파가 인물을 많이 냈는데, 부창정공파는 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성세를 보인 반면 사인공파는 조선 후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사인공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은(朴誾), 박장원(朴長遠), 박양한(朴亮漢), 박문수(朴文秀) 등을 들 수 있다. 읍취헌(相翠軒) 박은(자는 중설(仲說), 호는 읍취헌(相翠軒))은 박담손(朴聃孫)의 아들로 한시로 조선 5백년에 걸쳐 으뜸가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5세에 이미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연산군 1년(14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 18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98년 사가독서를 했다. 승문원에 발탁되어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고, 호당을 거쳐 경연관으로 5년간 있으면서 바른말을 잘하여 연산군이나 대신들로부터 경원되었다. 당시의 권신인 류자광(柳子光), 이극균(李克均) 등을 규탄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파직당했다. 이 때부터 산수를 주유하면서 문주로써 소일, 독서에 열중하여 많은 책을 일었고, 1504년 지제교에 임명되었으나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동래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당했다. 1506년 신원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읍취헌유고(相翠軒遺稿)>가 있다.

문효공(文孝公) 박장원은 현종 때 서인의 중진으로서 이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인 매옹(梅翁)박양한은 숙종~영조대의 학자로 고산현감을 지냈다. 그의 저서 <매옹한록(梅翁閑錄)>은 인조대부터 숙종대까지의 시사를 엮은 것으로 귀중한 사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충헌공(忠憲公) 박문수(자는 성보(成甫), 시호는 충헌(忠憲))는 문효공 박장원의 증손이며, 박긍한의 아들이다. 그는 1723년(경종 3년)때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1724년(영조 1)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직되었다. 뒤에 소론이 집권하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를 뿌리뽑아 명성을 떨쳤다. 그 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착되고,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에 이어호서어사로서 기민을 구제, 1734년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1737년 병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 경상도 곡식 1만 석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다음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 지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손사부 등을 역임,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약방제조의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됐으나 다음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으며, 암행어사 시절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고령박씨가 낸 유일한 상신인 문익공(文翼公) 박영원(朴永元)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 철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도 사인공파에 속한다.

부창정공파의 박광순(朴光純)은 고려 말엽에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박광우(朴光佑)는 문하시중을 지냈다. 박우생(朴雨生) 역시 문하시중을 지냈고, 박임종(朴林宗)은 우왕조에 여러 차례 왜구를 방어하고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서는 박임종의 아들 무숙공(武肅公) 박만(朴蔓)이 건국 초 야인의 침입이 잦자 도원수로 출정, 이를 격퇴시켰으며 정종조 제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예조판서로 이에 동조하지 않은 탓으로 유배되었다.

박처륜(朴處綸)은 성종 때 등과,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대사간·부제학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박영준(朴永俊) 역시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충숙공(忠肅公) 박난영(朴蘭英)은 선조 때 면천군수와 중군 등을 거쳐 1619년(광해군11) 강홍립을 따라 후금국 정벌에 나가 포로가 되었다가 8년만인 1627년(인조5)에 풀려나 귀국하여, 조선을 괴롭히는 후금에 회답관, 선유사, 선위사, 추신사, 춘신사 등으로 수차 왕래하면서 회유에 힘썼다. 그 후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장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등과 청영에서 청군이 화친 조건으로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자 왕족인 능봉군을 왕자로, 형조판서 심집을 대신으로 가장시킨 것이 탄로되어 청나라 장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학암(鶴巖) 박정번은 선조대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대의 유현들과 깊이 사귀었다. 삼오당(三吾堂) 박만중(朴萬重)은 인조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숙종조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폐위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성리학을 연구하여 제식을 작정했다.

근대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있다. 한국의 5대 대통령으로 박숙동의 후손이며, 박성빈의 아들로 1961년 육군소장으로 5·16군사 혁명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1962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다. 해 10월 5대 대통령 당선을 시작으로 그 후 6, 7, 8, 9대까지 역임했다. 재임중 2, 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과 조국 근대화에 몰두 하였으며,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여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중화학공업 육성, 자주국방등을 주창하는 등 우리나라 조국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장기집권 및 군사독재자라는 말도 듣고 있다. 74년 8월15일 광복절에 육영수여사를 문세광의 총탄에 잃고, 그도 79년 10월 26일 그렇게 믿었던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지도자도(指導者道)>  <민족 중흥의 길> 등이 있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고성(철성) 박씨

중조 박서(朴犀)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0세손으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제 4자인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조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구주(龜州)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구주에 모여 성을 사수, 한 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몽고군은 구주를 버리고 개경을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구주를 공격하자 이를 다시 대파하여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뒤에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고 철성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죽산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그 후 6백여 년을 고성에 관적해 오다가 1839년(현종5)예조의 승인을 얻어 죽산(竹山)으로 복관, 현재는 죽산박씨의 한 분파를 이루고 있다.

경렬공(敬烈公) 박보로는 1375년 고려 우왕 1년에 밀직부사로 서해도 부원수겸 도체찰사가 되어 여러 번 왜구를 무찔러 공을 세우고, 서북면 원수 겸 도순문사로 승진했다. 뒤에 상원수가 되어 풍주(豊州)에 침입한 왜구와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그 후 서해도 조전원수가 되고, 1378년(우왕 4) 문하평리로서 안주 상운수 겸 서북변 도체찰사가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세조 때 박식(朴埴)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 2등으로 철성군에 봉해졌다.
박애상(朴愛祥)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각 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고성의 귤도(橘島) 앞바다에서 순절했다. 박내경(朴來慶)은 현종조에 문과에 급제, 현감을 지냈고, 박사혁(朴師赫)은 영조조에, 박정검(朴廷儉)은 정조조에 각각 문과에 급제했다.

광주 박씨

중조 박명훈(朴明勳)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고 전할 뿐 상계가 실전되어 분파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조에 전서를 지냈다고 한다.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게 된 유래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상들이 광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광주를 본관으로 삼은 듯 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후손이 경기도 옹진군 흥미면 식여리에 47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광주에서 언제 옹진(甕津)으로 옮겼는지도 알 수 없다.

구산 박씨

중조 박천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9세손인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 언침(彦沈) 의 15세손이다. 그는 우왕조에 형 박위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워 구산군에 봉해지고 의흥현(義興縣)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구산(龜山)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의 흥면 수북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산 아래 중조가 살던터에 무검단을 모으고 무검재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단과 재실의 명칭을 무검이라 하게 된 연유는 원래 그곳의 지명이 무검동 이었으나 중조가 생전에 검소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았고, 또 그곳 사람들이 중조의 위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무검의 두 글자를 인용해서 무검동으로 고쳐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조참의를 지낸 겸산재(兼山齋) 박간(朴艮), 공조판서를 지낸 박진(朴震)등이 있다. 또 선조 때 한성부 판관을 지낸 회보(晦甫) 박경장(朴景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화왕산성 수비에 공을 세웠다.

군위 박씨

중조 박헌(朴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2세손인 하신(河信)의 아들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속함대군 언신(彦信)의 15세손이다. 그는 고려 우왕조에 문과에 급제, 도사를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공조전서에 올랐다.

본관은 원래 함양(咸陽)이었으나 그의 원종공신 녹권에 본관이 군위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후손들이 함양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군위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699년(숙종2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낸 박희안과 1719년(숙종45) 별시문과에 병과롤 급제하여 정랑을 지낸 희안의 아들 태휘(泰彙), 그리고 희안의 손자로 1783년(정조7) 식년 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을 지낸 현보(顯輔) 등이 있다.

나주 박씨

중조 박병묵(朴炳默)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상계가 실전되어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나주(羅州)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 이 본관을 나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범박씨세보(汎朴氏世譜)>에 의하면 조선조에 나주목사를 지내고 좌정승에 추증된 박취생(朴就生)을 중조로 하는 다른 계통의 나주박씨가 있다고 하였으나 그 역시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이 집안의 중요 인물로는 중조 병묵의 아들로 고려말에 호군을 지낸 박덕영(朴德瑛)과 덕영의 아들로 조선조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박도가 있다. 또 호조정랑을 지낸 박선문(朴瑄文)과 사복정(司僕正)을 지낸 선문의 아들 제창(齊唱)도 이 집안을 빛낸 인물이다.

노성 박씨

중조 박연(朴延)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실전되어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 개국 초에 사헌부감찰을 지냈다고 한다.

노성(魯城)은 지금의 논산군의 일부로 이를 본관으로 하게된 연유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중조 이후 노성에서 세거했기 때문에 이를 본관으로 삼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충남(朴忠男)과 경남(慶南)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선조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평안남도 성천군 능중면 덕연리와 삼덕면 삼덕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면천 박씨

중조 박득의(朴得宜)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4세손으로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21세손이다. 그는 고려 태조 때 대승을 지내고 혜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혜성이 뒤에 면천(沔川)으로 개칭되고, 또 그 의 아들 박술희(朴述熙)가 면천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면천으로 하였다. 그러나 술희의 아들 정원(精元)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신기도령을 지낸 주를 1세조로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엄의공(嚴毅公) 박술희는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었다가 후 에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전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광에 올랐다. 936년(태조19) 후백제를 칠 때 보기1만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며,왕의 임종시에 군국대사를 부탁받고,훈요 10조를 전수받았다. 혜종을 태자로 봉하는 데 공이 컸고, 뒤에 혜종이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왕규(王規)가 역모를 품자 신변 보호를 위해 백여 명의 호위병을 거느 리고 다니다가 새로 즉위한 정종으로부터 다른 뜻을 품었다는 의심을 받아 강화도로 유배된 후 왕명을 사칭한 왕규에 의해 살해 당한다. 태사삼중대광에 추증되었으며, 묘정에 배향되었다.

해은(海隱) 박심(朴諶)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고려 말 공조전서 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배를 타고 해주의 입암촌으로 들어가 불사 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황해도 일대에 분포하여 살게 되었다.

박삼길(朴三吉)은 박효순의 아들로 학문에 열중, 제자백가에 통달했고, 1474년(성종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정언 등을 거쳐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다. 연산군 때 병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으나 연산군조에 난정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력, 기로개 선생이라 일컫어졌다.

문온공(文溫公) 박여룡(朴汝龍)은 부호군 김수의(金守義)의 아들로서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율곡의 유집을 간행했다. 1573년(선조6) 중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81년(선조14) 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사옹원 직장에서 평양현감, 호조좌랑, 평시서령을 거쳐 공조정랑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1830년(순조30) 이조참판 겸 좨주찬선에, 1835년(헌종 즉위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해주의 방현서원에 제향되었다.

무안 박씨

중조 박진승(朴進昇)은 시조왕 혁거세의 38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언화(彦華)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벼슬이 국자좨주에 이르고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주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무안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어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에 경기묘를 세워 중조 이하 15위의 제향을 드리고 있다.

무안박씨는 고려 초 무안 지방의 토호로서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21명, 공신 1명을 배출했는데, 문과 급제자 21명은 박씨 중에서 본관별로 일곱 번째 가는 숫자이다.

고려조에서는 중조의 아들 박섬(朴暹)이 현종 때 상서우복야를 지내고 문종 때 명신으로 각상에 도형 되었다. 또 그의 증손 박승중(朴昇中)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상안부 녹사를 거쳐 중서주서가 되었다. 예종 때 한림시독학사를 지내고, 이재(李載), 박경작(朴景綽) 등과 함께 예식을 정하고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찬진했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사에 오르고 참지정사를 거쳐 수태위, 증서시랑 평장사에 올랐으나 이자겸(李資謙)이 죽자 그 일파로 몰려 곧 유배당했다.

조선조에서는 풍정(楓亭) 박의룡(朴義龍)이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을 도와 개국원훈으로 호조, 병조, 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의암(義庵) 박익경은 성삼문(成三問)의 사위로 장인인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등과 도의로 사귀다가 1456년 그들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자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 묻어 주고 무안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세조가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병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효행이 출증하고 경학에 뛰어나 단종조에 효행으로 정릉 참봉을 제수받았다.그의 아들 박호(朴壕)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호조판서를 지냈다.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은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경주 탈환전에서 화차와 비격진천뢰를 사용, 적을 대파한 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승진되었다. 그의 동생 박홍장(朴弘長)은 임진왜란 때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순천부사에 올랐다. 박대근(朴大根)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정을 정찰한 공으로 서부 참봉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특진되었고, 능을 범한적을 색출했으며, 사신을 따라 여러 차례 대마도를 왕래했으며,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박상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으로 무령군에 봉해지고 6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조선중기의 시인 여락당(余樂堂) 박창하(朴昌夏)는 고율시 5,6백 편을 남겼고, 그의 아들 박징(朴澄)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구한말 의병장 박윤식(朴潤植)은 궁내부 팔궁관으로 재직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을 총대장에 추대하고, 그는 총지휘 겸 운영대장이 되어 활약중 홍천 전투에서 적에게 피체, 경성 평리원에 수감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암살단과 결사대를 조직,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맹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는 박두성(朴斗星)은 서울맹아학교의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취임한 이래 한평생 맹아 교육에 헌신하였다. 1920년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6년 만에 완성, 점자로 번역한 도서가 성경을 비롯하여 76종에 이른다.

문의 박씨

중조 박의중(朴宜中)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6세손이요,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16 세손인 인기(仁杞)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사예를 지내고 우왕 때 대사성, 밀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1388년(우왕14) 사신 으로 명나라에 가서 철령위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창왕 때 공신에 오르고 문의군에 봉해졌다.  또 공양왕 때 서운관에서 한양 천도를 상소하자 음양설의 허황함을 역설하여 이를 반대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 뒤에 검교참찬 의정부사가 되었다. 그의 맏아들 박연(朴衍)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제학을 지내고 정사공신으로문의군에 봉해졌으며, 둘째 아들 박행(朴行) 역시 문의백에 봉해져서 문의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박씨에서 분적, 박의중(朴宜中)을 중조로 하고 본관을 문의로 하였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녕(朴寧)을 들 수 있다. 그는 고려 말에 공조전서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72현의 한 사람이 되어 충절을 지켰다.

조선조에서는 박윤성(朴允成)이 조선 초에 평리전서를 지냈고, 박문덕(朴文德)이 홍문관 대 제학을, 박귀덕(朴貴德)이 부제학을 지냈다. 박윤경(朴潤卿)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조광조(趙光祖)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1513년(중종8) 식년문과에 을 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고,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을 지낸 뒤 낙향하여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박성순(朴性淳)은 174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이외에 임진왜란 때 해서(海西)에서 창의하여 절묘한 지략으로 왜적 6백여명을 수양산지성산성으로 유인, 지성 폭포에 모두 추락케 하여 수장시킨 박현민(朴顯民), 선조조에 훈련원 판관 겸 주부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박린(朴璘), 임진왜란 때 낙안 군수로 조령(鳥嶺)에서 전사한 박인정(朴仁定), 그리고 많은 적함을 불질러 침몰시키고 녹도 앞바다에서 순절한 박란(朴蘭) 등이 유명하다.

근세 인물로는 1907년 정미7조약(丁米七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해주 신천 등지에서 여러차례 왜병을 격파하는 등 많은 활약 을 하다가 문화의 구월산에서 전사한 박기로(朴基魯), 3 1운동 때 해주에서 독립 만세를 주도하고, 독립군에게 많은 군자금을 제공한 박기주(朴基周) 등이 있다.

문주 박씨

중조 박한보(朴閑甫)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전하 나 문헌이 실전되어 전후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일설에는 인제대군의 후예라 하고, 또 그의 아들 박광(朴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度祖)의 장인으로 안변부원군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문주는 문천 (文川)의 별호인데 어째서 본관을 문주로 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도 상고할 수 없다.

밀양 박씨

중시조 박언침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로 경명왕이 여덟 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밀성대군 (密城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성(密城) 이 뒤에 밀양(密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 밀성박씨라고도 한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져 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 하고 있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중시조 박언침의 8세에서 6파로, 그 아래에서 다시 6파로 나뉘어 크게 12파로 분파되어 파마다 중조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각기 또 여러 소파로 분파되어 내려오고 있다. 12파로는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언부(彦孚)파,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 언상(彦祥)파, 좌복야공(左僕射公) 언인(彦仁)파,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양언(良彦)파, 판도판각공(版圖板刻公) 천익(天翊)파, 삼사좌윤공 (三司左尹公) 을재(乙材)파, 규정공(糾正公) 현(鉉)파,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원(元)파, 밀성군(密城君) 척(陟)파,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中美)파, 영동정공(令同正公) 원광(元光)파, 정국공 (靖國公) 위파 등으로  나뉜다.

그 중 규정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 밀양박씨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 또한 규정공파, 밀성군파, 좌복야공파, 사문진사공파 등에서 많이 배출했다.

밀양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61명, 상신 1명, 문형 1명, 청백리 2명, 공신 6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특히 문과 급제자 261명은 우리나라 전체 씨족중에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청주한씨, 광산김씨에 다음가는 숫자인데 비해 상신과 문형이 적었다는 것은 밀양박씨가 조선조의 정치 권력 구조에 깊이 찹여하지 못했음을 뜻하며, 그 원인은 밀양박씨와 왕실 권려고가의 상관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규정공파의 중추적인 인물로는 나산경수 박강생(朴剛生)과 그의 아들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을 들 수 있다. 박강생은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현손으로 고려 말에 집현전 제학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태종∼세종대에 수원부사, 안변부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충정공(忠貞公) 박심문은 박강생의 아들로 절신으로 유명하다. 1436년(세종18) 친시문과에 급제, 기주관, 평안도 판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1453년(단종1)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가 살해되자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중 1456년(세조2) 질정광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성삼문 등이 참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끝에 음독 자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은 심문의 중형 절문의 아들로 계유정난에 가담, 정난공신 2등으로 밀산군에 봉해지고 세조 때 공조,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또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니 공간공(恭簡公) 박건(朴楗)은 중손의 아들로 단종 때 문과에 급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내고 중종 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3 등 으로 밀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은 박조의 아들로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 교리, 영월군수 등을 지내고, 1546년(명종 1) 성천부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 후 사가독서를 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성, 우부승지를 역임한 후 명종 때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선조조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 후 동부승지, 대사성, 양관대제학,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문장공(文莊公) 박계현(朴啓賢)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냈다.

충정공(忠靖公) 박숭원(朴崇元)은 충원의 종제로 도승지,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죽은 뒤 호성공신에 추록되고 밀천군에 봉해졌다. 밀양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 숙민공(肅愍公) 박승종(朴承宗)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무렵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를 시해하려고 흉모를 꾸미자 그는 이를 적극 말리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등 폭정에는 휘말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는 아들 자흥(自興)의 딸이 광해군의 며느리로 세자빈이 되어 그 일족이 권세를 누렸음을 자책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다. 이 외에도 중종대의 무신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제자를 길러낸 문목공(文穆公) 박영(朴英),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돈령록(敦寧錄)>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문헌공(文憲公) 박성원(朴聖源) 등이 유명하다.

사문진사공파에서는 정재(貞齋) 박의중(朴宜中)이 고려 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 검교 참찬이 되었다. 그는 성리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다.

의중의 손자 평간공(平簡公) 박거겸(朴居謙)은 무신으로 당대의 손꼽히는 명궁이었다. 그는 도총관,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성종 때 좌리공신으로 밀산군에 봉해졌다.

이정공(夷靖公) 박열(朴說)은 중종 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박종남(朴宗南)은 무신으로 선조 때 호적(胡賊)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야인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李舜臣)의 주사 조방장이 되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 충장공(忠壯公) 박영신(朴榮臣)은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막다가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던 중 포로가 되어 참살을 당한 절신이다.

좌복야공파의 인물로는 문헌공(文獻公) 박연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박천석의 아들로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 집현전 교리, 지평, 문학 등을 역임하고,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당시 조율이 불완전한 악기 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주장,편경 12매를 제작하는 등 궁전 음악의 미비점을 대폭 변경,수정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 중추원 부사 등을 역임,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명음악가로서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으로 불리운다. 영동의 초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악기를 개량하는 등 민족 음악 발전에 큰 업적을남겼다. 그의 사촌 박흥생(朴興生)은 세종 때 13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7세에 생원이 되었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밀성군파에서는 파조 박척(朴陟)이 충선왕 때 흥위위의 무장으로 공이 있어 밀성군에 봉해 졌다. 그의 7세손 박척(朴瘠)은 정종의 부마가 되어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청숙공(淸肅公) 박신규(朴信圭)는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충간공(忠簡公) 박이서는 척의 11세손으로 선조 말에 이이첨(李爾瞻)을 논핵하다 파직되고 광해군 때 폐모론이 나오자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삭직당한 후 복직되어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해상에서 풍랑으로 행방불명 되었다. 그의 7세손인 효정공(孝靖公) 박장복(朴長復)은 순조 때 판서를 지냈고, 문정공(文貞公) 박승휘(朴承輝)는 척의 11세손으로 순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삼조보감(三朝寶鑑)> 편찬에 참여했다.

위에서 열거한 각 파의 주요 인물도 인물이지만 밀양박씨는 영조∼정조대에 실학의 대가 박제가(朴齊家)를 배출하여 더욱 유명하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으며,이덕무(李德懋), 류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시문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2)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이조원(李調元)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했고,다음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1794년 춘당대 무과에 장원하고 오위장을 거쳐 그 후 영평현감을 지냈다.

반남 박씨

반남박씨의 세계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潘南縣) 호장을 지낸 박응주 (朴應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이지만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계보와 분적의 연원을 밝히지 못한 다. 그래서 반남박씨는 그를 시조라 하지 않고 선조로, 박혁거세를 도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선조의 발상지와 세거지가 반남이므로 이를 본관으로 하였다.

선조 박응주의 묘소는 나주군 반남면 흥덕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반남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15명, 왕비 2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호당 5명, 청백리 1명, 공신 6명, 장신 3명에 문묘에 배향된 분도 1명이 있어 모든 박씨 중에서 벼슬 열력이 가장 화려하다. 반남박씨가 이토록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이 고려 말에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고, 그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박은이 조선조에 들어와서 반남박씨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문정공 박상충(자는 성부(誠夫), 시호는 문정(文正))은 공문왕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되었다. 당시 예의사에서 관장하는 향사의 의식이 일정하지 못하므로 그가 고서를 참고, 사전(祀典)을 작성했다. 우왕 초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했는데 김의의 종자가 돌아오자 이인임(李仁任), 안사기(安師琦) 등친원파가 대우를 극진히 하므로 그가 「김의가 명사를 죽인 죄는마땅히 다스려야 할 것인데 재상이 그 종자를 후대한 것은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한 것이 분명하오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에 화가 미칠 것이다」고 상소하여 안사기를 처형케 했다. 이인임등이 백관과 연서하여 북원의 중서성에 글을 보내려 하자 그는 선왕이 이미 명을 섬기기로 하였는데 다시 북원을 섬길 수 없다하여 서명을 거절했다. 판전교시사로 있을 때 북원의 사신이 오자 또 상소, 원을 섬김이 불가하다하여 사신을 돌려보내게 했다.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친원파의 죄를 다스리라고 상소하다 도리어 연루, 장류 도중죽었다. 경사와 역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예도에 밝았다. 그의 아들인 평도공 박은은 고려 말에 개성부 소윤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두차례의 왕자 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오르고 태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박규(朴葵), 박강(朴薑), 박훤(朴萱)은 박은의 아들 로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박규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규는 세종 때 예조와 형조의 참판,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다가 훈구파에 의해 파직되었다. 소의 아들 응천(應川), 응순(應順), 응남(應男), 응복(應福), 응인(應寅) 5형제도 모두 현달했으니. 박응천은 중종조에 한성부서윤을 지냈고, 정의공 박응순은 딸이 선조비가 되어 반성부원군에 오르고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문정공(文貞公) 박응남은 명종조에 참의를 지냈으며 박응인은 도정을 지냈다. 이들 5형제 중에서도 맏이 응천, 넷째 응복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은 응천의 아들로 선조조에 보덕을 지냈고, 동생 정헌공(貞憲公) 박동선(朴東善) 은 인조조에 좌참찬을 지냈다.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은 동선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에 오르고 금주군에 봉해졌다.
숙종 조에 좌승지를 지낸 박세견(朴世堅)은 정의 아들이고, 소론의 중진으로 숙종조에 좌참찬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박태상(朴泰尙)은 세견의 아들 이다. 철종조에 좌의정에 오른 숙헌공(肅憲公) 박회수(朴晦壽)는 태상 의 5대손이다. 또 문정공(文貞公) 박세당(朴世堂)은 세견의 동생으로 숙종 때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다가 파직 되었다. 그는 부제학 박정의 아들로 1660년(현종 1) 증광문관에 장원하고 부수찬, 황해도 암행어사를 거쳐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낸 뒤 숙조 때 공조와 이조 및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소론에 속한 실학파 학자로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저술하고 농촌 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의 학풍을 이룩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이증환, 안정복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 알려졌다. 저서로는 <사변록(思辨錄)>  <산림경제(山林經濟)> 등이 있다.

박태보(朴泰輔)는 세당의 아들로 백부 세후에게 입양 됐다. 그는 숙종 때 호당을 거쳐 암행어사 등을 지내고 기사환국(己巳 換局)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 도중 죽었다.

문정공(文 貞公) 박종훈(朴宗薰)은 태보의 5대손으로 헌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나 순조의 행장을 지었다. 한말에 개화파 인사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핵심이었던 문익공(文翼公) 박정양(朴定陽)도 응천의 후손이다. 그는 한말 총리대신으로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 판관 박제근의 아들로 1866년(고종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참파 등 을 걸쳐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도일,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돌아 와 이용사 당상 경리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참판, 협판교섭통상사무, 도승지, 협판내무부사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887년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도미, 미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 했다. 1889년 귀국한 후 호조판서, 교정청 당상, 한성부 판윤등을 거쳐 갑오경장 후 제1차 김홍집 내가그이 학부대신이 되고, 이어 내각 총리 대신이 되었다. 1896년(건양1)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이 살해되고, 내각이 의정부로 개혁되면서 참정대신이 되었다. 한편 박응복의 가계에서는 그의 아들 박동열(朴東說)이 1608년(광해군1) 충주목사, 대사성에 이어 예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부당하다고 상소하자 이에 격분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을 깎아 버렸다. 그러자 이에 대로한 광해군이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 실패, 조정에 있기를 꺼려 나주목사로 나갔다.

충익공(忠翼公) 박동량(朴東亮)은 그는 대사헌 박응복의 아들이자 동열의 아우로 1590년(선조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검염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에 호종하고,승지에 승진하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이어 동지증추부사·도승지를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금계군에 봉해지고 형조판서를 지낸 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문정공(文貞公) 박미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와 결혼하여 금양군에 봉해졌고, 미의 동생 박의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사위로 인조조에 호당에 뽑히고 홍문관의 수찬, 교리, 장령 등을 지냈다. 당대의 유종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는 박의의 아들로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으며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어 좌의정에 올랐다.

충희공(忠僖公) 박명원(朴明源)은 박미의 5대손으로 영조의 딸 화평옹주와 결혼, 금성위가 되었다. 글씨를 곱게 써서 나라의 애경사 때 여러번 금옥보책명정서관에 임명되었고, 죽은 뒤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신도비를 세웠다.

실학파 학자로 유명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실학자이며,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지돈령부사 박필균의 손자이며 박사유의 아들이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고, 1780년(정조4)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인들의 이용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뜻을 두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을 거쳐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내고, 양양부사에 승진했다가 1801년 (순조1)사직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당시 홍대용.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그가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정치,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실학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고루한 양반을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정경대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연암집(燕巖集)>  <허생전(許生傳)>  <과농소초(課農小抄)>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그의 아들 문익공(文翼公) 박규수(朴珪壽)는 박지원의 손자이며, 박종채의 아들로서 1848년(현종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병조좌랑 등을 거쳐 1864년(고종 1) 병조참판, 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873년 우의정에 올라 사임, 다음해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이에 호응,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으며,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헌공(忠憲公) 박종악(朴宗岳)은 박미 의 6대손으로 정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한말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 이자 철종의 부마인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영효(朴泳孝)도 미의 후손 이다. 그는 한말 궁내부대신을 지냈으며,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1882년 수신사로 도일,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했다. 일본의 조야를 시찰하고 돌아와 정치적 개혁을 기도했으나 수구파들의 정권장악으로 실패, 이어 한성부 판윤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3일만에 실패하여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일본으로 망명, 1894년 갑오경장으로 귀국하여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그 후 반역음모 사건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대신에 임명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후작이 되었으며, 뒤에 중추원 고문을 거쳐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세양공(世襄公) 박강(朴薑)은 세조조에 좌익공신 3등으로 금천군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박용(朴墉)은 딸이 세자빈 (인종의 비인 인현왕후)에 책봉됨으로 해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의 아들 공순공(恭順公) 박숭질(朴崇質)은 연산군 때 좌의정에 올랐 으나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100여 일 동안 등청하지 않아 면직되었다.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으로 인해 후일 중종반정 때 일문이 무사하게 되 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안 박씨

중조 박우(朴瑀)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9세손인 박제상 (朴堤上)의 동생 지상(地上)의 25세손이며, 고려조에 상서를 지낸 영주 (英柱)의 증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벽상공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병산군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병산사에 제향되었다. 본관은 병산이 비안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비안으로 하였다.

비안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7명을 배출했다. 중조 박우의 9대 손 박서생(朴瑞生)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판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수차의 사용을 건의하여 관개에 혁신을 가져와 농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서생의 손자 박효원(朴孝 元)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사간을 지냈다.

박대인(朴大仁)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박준(朴峻)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선조조에 참봉, 현감 등을 지냈고, 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징빈(朴徵賓)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령을 지냈고, 그의 아들 박수유(朴垂裕)는 영조 때 문과에 급제, 현감을 지냈다. 또 박징좌(朴徵佐)도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을 지냈다.

사천 박씨

중조 박자문(朴自文)은 신라 제2대 남해왕의 둘째아들로 사수군주에 봉해진 환(桓)의 46세손이며, 고려 충렬왕조에 공부상서, 첨의평리 등 을 지내고 사주군에 봉해진 인겸(仁謙)의 손자이다. 그도 역시 고려 공민왕조에 공부상서를 지내고 사주군에 봉해졌다. 본관은 사주(泗州) 가 뒤에 사천(泗川)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사천으로 관적하였다.

사천 박씨는 관적지를 떠나 주로 함경남도 일대에서 살아왔는데 그 까닭은 중조 박자문이 고려 말에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함경남도 안변에 은거 했다가 뒤에 영흥으로 들어가 살았고 또 그의 10세손 용계(龍桂)가 함흥으로 가서 세거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인 박창조(朴昌朝)는 1783년(정조7) 식년 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 직강, 사예 등을 거쳐 연서도 찰방을 지냈다.

삼척 박씨

중조 박원경(朴元鏡)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9세손인 박제상(朴堤上)의 동생 지상(池上)의 3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상서좌복야에 오르고 삼척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삼척(三陟)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신단비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삼척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박여량 (朴汝樑)은 1600년(선조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 사간 등을 지냈고 박홍규(朴鴻逵)는 1733년(영조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상산 박씨

중조 박언창(朴彦昌)은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자 신라 제54 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917년(경명왕1) 사벌대군에 봉함을 받아 사벌방어장으로 외적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려와 후백제 의 침략을 받아 영토가 낙동강 동쪽으로 축소됨에 따라 사벌주가 고립 되자 그는 사벌주를 사벌국이라 하고 왕으로 자립, 통치하다가 11년 만에 후백제에게 패해 망했다. 이 사실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이언적 (李彦迪)이 사벌국사를 저술, 비장했던 것을 후손 박세준(朴世俊)이 발췌, 유전함으로써 밝혀졌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덕천창 부사를 지낸 견을 1세조로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사벌국이 고려 초에 상산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상산이라 하였다. 상산박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2명, 호당 1명, 공신 2명을 배출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臣)이 있다. 그는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408년(태종8) 사간원 좌정언이 되고,1424년(세종6) 회례사가 되어 불경을 가지고 일본에 다년온 뒤,우사간에 이어 병조, 예조, 형조, 공조, 이조참판, 대사헌,황해도를 비롯해 각 도의 관찰사,형조판서, 우참찬, 공조판서 등을 지냈고 치사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조 이조판서에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했다.

그의아들 박이창(朴以昌)은 문종조에 참판, 관찰사 등을 지내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갈 때 원로에 대비, 양미를 많이 가지고 간 것이 죄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자 국법을 어기어 면목 이 없다 하고 자결했다.

문강공(文剛公) 박세희(朴世熹)는 중종 때 문과에 장원, 호당에 뽑히고 기묘사화 때 좌승지로 있다가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강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아우 박세후(朴世煦) 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박충간(朴忠侃)은 세후의 아들로 음보로 여러 청환직을 거쳐 1589년(선조22) 재령군수로 재직중 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알려 평난공신 1등으로 상산군에 봉해졌다. 뒤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선곡(選曲) 박건중(朴建中) 은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경전의 주소와 제가의 예설을 증보하여 <상례비요보(喪禮備要補)>를 편찬하였다.

선산 박씨

중조 박선민(朴善敏)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21세손 이다. 그는 목사를 지내고 관적을 선산으로 받았기 때문에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하였다.

선산박씨는 주로 함경남, 북도에 본거를 두고 있는 성씨인데, 그 까닭은 중조 선민의 증손 박숭이 조선 초에 부원군의 신분으로 함경 북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당했고, 그의 아들 박임창(朴林昌)이 수군 절도사를 지내고 함경북도 길주로 들어가 세거했으며 임창의 아들 박장(朴章), 박원후(朴元厚), 박근손(朴根孫) 3형제 중 원후의 아들 박술량(朴述良)이 그의 숙부인 우후 박근손과 함께 함경남도 단천(端 川)으로 이사하여 세거하였기 때문이다.

순창 박씨

순창박씨는 전주박씨에서 분적한 씨족이라 하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혈연 계통을 상고할 수 없다. 중조는 훈련원첨정을 지낸 박두간(朴斗 幹)으로 그의 선대 중 박제세(朴濟世)가 고려조에서 순창군에 봉해 졌기 때문에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세 와 두간 사이의 세계가 실전되어 세계를 헤아리지 못하고 계대가 가능 한 박두간을 중조로 하게 된 것이다. 중조의 묘소는 개성(開城)의 용흥동(龍興洞) 부소산(扶蘇山)에 있다고 한다.

주요 인물로는 거제 부사를 지낸 박창식(朴昌植)과 군수를 지낸 박우현(朴宇鉉)이 있다. 유일한 문과 급제자 박문규(朴文逵)는 1887년(철종24)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순천 박씨

순천박씨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 의 일곱째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아들 영규(英規)를 중조로 하고 있다. 그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 훤장군이 되었 는데 935년 견훤이 왕위 승계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하자 그도 이듬 해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귀부(歸附)할 뜻을 비치고 태조가 신검을 칠 때 내응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공으로 좌승(左丞)에 임명 되고 승주군에 봉해졌으며 전답과 말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혜왕 때 보문각 대제학, 관동존무사를 지낸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로 하였다.

중조와 1세조 사이에 고려조에서 평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죽어서 순천 인제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박난봉 (朴蘭鳳)을 득관조로 하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난봉이 영규의 증손이요, 숙정의 6대조다>하였으나 <순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본관은 중조 영규의 아버지인 언지가 봉군된 강남(江南)이 순천의 형승(形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중조의 발상지인 순천이 신라 때 승평(昇平), 고려조에 승주(昇州) 등 으로 불려지다가 충선왕 때 순천을 개칭되었기 때문에 순천으로 하였다.

순천박씨는 고려 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명문의 기반을 굳혔고,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35명, 상신 1명, 호당 2명, 청백리 1명, 공신 8명을 배출했다.

1세조 숙정의 손자 박천상(朴天祥)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평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박가흥(朴可興)은 고려말에 좌정승을 지내고 가흥의 동생 박가실(朴可實)은 판계림부윤, 박가권(朴 可權)은 판개성부윤를 지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석명(朴錫命), 박중림(朴仲林), 박팽년(朴彭年), 박중선(朴仲善), 박원종(朴元宗)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숙공 (文肅公) 박석명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공양왕 때 우부대언, 병조판서를 역임하고,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때 은거했다가 1399년(정종1) 좌산기상시에 등용된 뒤 안주목사, 도승지를 거쳐 1401년 태종을 옹립한 공으로 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에 봉해지고 뒤에 지신사를 거쳐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은 이조판서 박중림의 아들이며, 시호는 충정(忠正), 사육신중 한사람이다. 1434년(세종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를 거쳐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세종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고, 1456년(세조2) 형조참판으로 성삼문, 하위지, 이기, 류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사형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과천의 민절서원, 흥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박중선(朴仲善)은 조선 판돈영부사. 자는 자숙(子淑). 시호는 양소(襄昭). 지돈령 박거소의 아들이다. 음보로 선전관 등을 거쳐 1460년(세조6) 무과에 장원하고, 훈련원 부사가 되었다. 이어 지훈련관사, 판군기감사, 지병조사, 병조참판 등을 지내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평로장군으로서 난을 진압, 적개공신 1등으로 평양군에 봉해진뒤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이 되고, 숭정대부에 승진했으며 1471년(성종2) 좌리공신 3등이 되었다. 그 후 경기도 곤찰사를 거쳐 판돈령 부사에 이르렀다.

박원종(朴元宗)은 시호가 무열(武烈)이며, 박중선의 아들이다. 음보로 기용된 뒤 선전관으로서 무과 급제한 후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 공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연산군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정국공신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고, 그 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에 올랐으며, 평성부원군에 개봉되었다. 중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박성명의 손자인 양소공(襄昭公) 박중선은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 적개공신에 오르고 예종조에 남이(南怡) 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성종조에 좌리공신이 되고 판돈령 부사를 지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은 목사 안생의 아들이며 팽년의 아버지이다. 그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뽑히고 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아들 팽년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러댜 사형 당했다. 문하에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배출되었다.

충정공(忠正公) 박팽년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고 호당에 뽑혔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 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여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 등 일문이 참화를 입었다. 이 때 같이 화를 당한 사육신은 모두 멸문 의 화를 입어 정통 후손이 없게 되었으나 그의 둘째며느리(순(珣)의 부인)가 아들을 낳아 같은 무렵에 낳은 여종의 딸과 서로 바꾸어 키워서 생명을 보전, 오직 그만이 정통 후손을 이어왔다.

무열공(武烈 公) 박원종은 성종조에 무과에 급제, 중종반정에 주동적 역할을하여 정국공신 1 등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을 거쳐 이과(李顆)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 등에 오르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기는 신경진과 함께 역사상 단 두 사람뿐이다. 같은 무렵에 박이검(朴而儉), 박이온(朴而溫) 역시 정국공신에 녹훈되고, 각기 순성군과 승평군에 봉해졌다. 이 외에 의민공(毅愍公) 박이현(朴而絢)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성주(星州)의 가천(伽川)에서 순절했고. 민양공(愍襄公) 박춘무(朴春茂)는 창의사가 되어 호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 춘무의 아들 충경공(忠景公) 박동명(朴東命)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고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던 중 무계(茂溪)에서 적을 만나 분전하다 전사했다.

숙종 때의 학자 문숙공(文肅公) 박광일(朴光一)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으로 왕자사부, 시강원 자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 했다.

박기정(朴基正)은 팽년의 후손으로 정조조에 승지·참판 등을 지내고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했다.

안동 박씨

시조 박명달(朴命達)은 방적도위를 지낸 인물이라고 전해오지만 문헌 이 없어 그 세계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安東) 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안동박씨에서는 우리나라 국문학사상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노계(盧 溪) 박인로(朴仁老)를 낳았다. 그는 승의부위를 지낸 석(碩)의 아들로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난 인물로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시명을 떨친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의 막하로 종군, 공을 세우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하자 군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태평사>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수문장 선전관을 지낸 후 조라포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비를 확충 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고, 1630년(인조 8) 노인직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도학과 조국애, 그리고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 전쟁중에도 서정과 조국애가 넘치 는 작품을 썼으며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가사문학을 발전시켰고, 시조 60여 수가 전한다. 영천의 도계향사에 제향되었다.

여주 박씨

중조 박지석(朴之碩)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0세손이요, 밀양박씨 시조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20세손으로 고려조에 중훈대부 사재감 부정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환(奐)이 고려조에서 중랑장을 지낸 후 여주(驪州)에서 함흥(咸興)으로 이주하였고, 또 환의 종손 서창(徐昌)이 함길도 관찰사를 지낸 뒤 함경북도에 정착 했으며 지석의 아들 성장(聖章)은 조선 초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이원(利原)에 유배되어 3년만에 풀려나 경성(鏡城)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경북도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게 되었으며 본관은 조상의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여주로 하였다.

이 밖에 같은 계통이면서 상계를 가리지 못해 사헌부 지평 공조정랑 등을 지내고 1451년(문종 1) 호조참의에 오른 박윤검(朴潤儉)을 1세조로 하는 파도 있다.

영암 박씨

중조 박항(朴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9세손이요, 신라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10세손이다. 그는 고려 인종 때 좌정승을 지내고 영암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박통(博通) 역시 고려 명종조에 공이 있어 영암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암(靈巖)으로 하게 되었다.

영암박씨는 고려조에서 대대로 영화를 누렸으나 고려 말에 박성좌(朴成佐)가 절의를 지키고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체 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조에서는 통의 아들 박광(朴光)이 시중을 지냈고, 광의 손자 박기 (朴璣)가 충숙왕 때 이부상서를 지냈다. 기의 증손 박성좌는 이색(李穡)의 생질로 외숙에게서 수업하고 고려 말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와 죽마고우로 고려조에서 같이 국사를 논의하던 처지 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종적을 감추고 태조가 승상의 자리 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끝내 거절했다.

박세보(朴世甫)는 성좌의 증손 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제조에 이르렀으나 연산군 때 정치 가 문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경원(朴慶元)은 1624년(인조 2)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영해 박씨

중조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파사왕의 현손 물품의 맏아들이다. 본관은 그의 26세손 박명천(朴命天)이 고려조에 전법판서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지고 예원이 영해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영해(寧 海)로 하였다.

박제상은 내물왕 때 삽량주의 태수로 있었다. 내물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실성왕은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일본 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수교를 하였다. 그 후 내물왕의 제일 왕자 눌지(訥祗)가 실성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볼모로 이국에 가 있는 왕제들을 그리워하며 근심하자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을 쩜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 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자 그는 바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 으니 그 노래가 유명한 <우식곡(憂息曲)>이다. 한편 미사흔을 떠나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왕제는 몸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오>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나는 계림의 신하다> 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이 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 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후 세 사람들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충렬묘와 치산서원, 양산에 효충사, 춘추원, 공주에 동계사, 영덕에 운계서원 등을 세워 제향 하였다.

또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 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 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 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기(阿奇) 아경(阿慶)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 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 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가 보게 하였던 바 치술암 기슭 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러한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 은 <신라 천년에 으뜸하는 충신이다>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하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 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운봉 박씨

중조 박중화(朴仲華)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상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조에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운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 을 운봉(雲峰)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김포군 하성면 가금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조의 증손 박신(朴信)과 그의 아들 박종우(朴從 愚)를 들 수 있다.

혜숙공(惠肅公) 박신은 박지의의 아들이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85년(우왕 11년)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규정을 거쳐 예조 형조의 좌랑을 역임 했다. 조선 초에 봉상시 소경을 거쳐 대사성이 되고, 정종조에 형조 전서가 되었다. 태종 때 개성유후 한성부윤 등을 지내고 대사헌이 되어 언사로써 왕의 비위에 거슬려 귀양갔었으나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후 지의금부사 찬성사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세종조에 선공감 제조로 있을 때 부하 직원이 저지른 부정 사건에 관련되어 통진현에 유배되었다가 13년 만에 풀려났다.

성렬공 (成烈公) 박종우는 태종의 사위로 운성군에 봉해지고, 명나라에 사신 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후 경상좌도 도병마절제사, 삼군장수 등 을 거쳐 호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세종조에 함길도 도 체찰사 등을 지내고 단종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을 도와 정난공신 1등으로 운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울산 박씨

중조 박윤웅(朴允雄)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6세손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와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숙종 때 동여진의 침범을 막았고, 다시 예종 때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과 함께 동여진을 격퇴하고 돌아와서 대장군이 되고 흥려백(興麗伯)에 봉해졌다. 본관은 흥려가 울산 (蔚山)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울산으로 하였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박추(朴諏), 박유(朴愈), 조선 조의 박홍(朴泓), 박율, 박응한(朴應漢) 등을 들 수 있으며, 조선조에서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11명이다.

여은(汝隱) 박추는 고려 말에 지한주사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유은(柳隱) 박유 역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한림원에서 벼슬하고 남평감무로 나갔다 가 고려가 망하자 대흥(大興)으로 은퇴하여 절의를 지켰다. 박홍은 1556년(명종11) 무과에 급제,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적의 선봉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평양으로 피난가는 선조를 호종했우며, 성천(成川)에서 우위대장이 되었으나 다음해 전사했다. 오리(梧里) 박율은 효종 때 문과에 급제, 현종 조에 은산현감을 지내고 숙종 때 장령에 이르렀다. 저서에 <주학본원 (籌學本原)>이 전한다. 그의 아들 박두세(朴斗世)는 1682년(숙종8)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목사,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당시 국가사회의 정책, 제도를 문답식으로 풍자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가 전하며, 《삼운통고보유》를 편찬했다.

김재현(金在顯),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박응한(朴應漢)은 음보 로 경릉령이 되었으며, 학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월성(경주) 박씨

중조 박언의(朴彦儀)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 54대 경명왕의 여덟째 아들이다. 그는 경명왕이 여덟 왕자에게 각기 분봉할 때 월성대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월성으로 하였으며, 월성이 경주로 개칭된 연유로 경주박씨라고 한다.

월성 박씨는 고려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크게 성장하였다. 중조 언의의 13세손 박구(朴龜)는 고려말에 중군사정 부령 등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인천의 장아산에 은거,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 위에 망경대를 세워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다.

그의 아들 박간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세종조에 청양현감, 단종조에 성균관 대사성 경주부윤, 성종조에 이조참판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간의 아들 박휘지(朴徽之)는 장례원 판결사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신겸(信謙) 호겸(好謙) 종겸(宗謙) 아들 3형제 를 두었는데, 둘째 호겸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관포(灌圃) 박홍미(朴泓美)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인조조에 창원 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의복을 하사받았으며 지방관 중에서 치적 이 제일이라 하여 경주부윤에 올랐다. 그의 아들 박대익(朴大益)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전적을 지냈다. 흥미의 종제 박홍중(朴弘中)은 음보로 세마를 거쳐 장령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을 공박하고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자 몰래 야식을 바치다가 탄로되어 원도(遠島)로 유배당했다. 문장으로 당시의 명인 석학들과 교유했다.

황암 박제인(朴齊仁)은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선조조에 태릉 참봉 왕자사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최영경(崔永慶) 하항(河沆) 김면(金沔) 등과 서로 격려하며 면학했다. 뒤에 왕자사부 형조좌랑 군위현감 제용감 판관 등을 지냈다.

은풍 박씨

중조 박치온(朴致溫)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이라고 전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혈연 계보와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 개국 초에 군수를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사적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본관을 은풍(殷豊)으로 하게 된 연유도 알 수 없다.

음성 박씨

중조 박서(朴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아들 죽성대군(竹城大 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그는 죽산박씨의 지손으로 고려 고종조 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구주(龜州)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朔州 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 장군 김경손 등과 함께 구주에 모여 성을 사수, 누차 대포차 운제 등 온갖 무기로 공격해 오는 몽고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이를 격퇴했다. 구주를 버리고 개성을 먼저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군세를 정비하여 돌아가는 길 에 다시 구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또다시 대파,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때 그에게 지병마사(智兵馬使) 최임수(崔林壽), 감찰 어사 민희(閔曦)가 와서 왕명이라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어기지 못해 항복했다. 뒤에 문하 평장사에 오르고 음성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죽산 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음성(陰城) 으로 하였다.

음성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순(朴淳) 박광옥(朴光玉) 등을 들 수 있다. 충민공(忠愍公) 박순은 박문길(朴文吉)의 아들로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의 휘하 장수로 요동정벌에 참가,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해 우왕 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이 되었다. 그 후 여러 왕자를 죽이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상왕과 친분이 두터운 그가 사신되기를 자원하여 1402년(태종 2) 함흥에 내려가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귀로에 올랐다. 한편 그를 쫓아가 죽이자는 측근의 간청에 못 이긴 태조는 그가 용흥강을 건널 무렵을 어림하여 신하 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며 쫓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급병으로 지체하다가 간신히 배를 탔는데 결국 뒤쫓아 온 사람들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태종은 그의 공을 녹하고 관직과 토지를 내리는 한편 자손을 등용할 것을 명했고,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에게 모지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 열녀의 두 정문을 세우게 했다. 송시열(宋時烈), 민정중(閔鼎重), 홍석주(洪奭周), 김재찬(金載瓚) 등이 지은 묘표 시작 상량문 제문 등 그를 추모한 많은 글이 전한다. 판승추부사에 추증, 용강서원에 제향되었다.

경원공(景瑗公) 박광옥(朴光玉)은 사예 박곤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 문과에 급제, 봉상시정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학행으로 피천, 내시교관 종부시 주부를 지냈다. 157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춘추관 기사관, 전라 충청도의 도사, 지평, 예조정랑 등을 지내고 봉상시정 때 신병으로 사직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는 한편, 군량을 수집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권율(權慄)을 도왔다. 1593년 나주목사에 임명받아 병을 무릅쓰고 민심을 수습하며 흩어진 병사를 규합하던 중 죽었다. 광주의 의열사, 운봉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의흥 박씨

의흥박씨의 선계는 고려 왕족인 왕씨였는데, 고려말에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 때 왕씨 일족에 대한 탄압을 모면하기 위해 박씨로 변성하였다고 한다.

시조 박을규(朴乙規)는 형 갑규(甲規)와 함께 고려 말에 병부상서와 이부상서를 각각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씨 일족에 대한 학살정책을 자행하므로 이들은 화를 피해 형은 중국으로 도피하였고, 아우인 을규는 지금의 충북 단양의 영춘에 숨어 살면서 성을 박씨로 고쳐 목숨을 보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의흥박씨세보>에도 나타나 있고 또 시조의 제단 비문에 <을규공은 신변과 후손 보전을 위해 영춘의 차의동으로 낙향, 성을 의흥박씨로 개성하였다>고 적혀있다 이래서 의흥박씨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본관을 의흥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다.

<세보>의 서문에 의하면 시조 박을규가 처음에 지금의 단양 차의동에 은거하였고, 4세 박근(朴瑾)의 대 이후부터 지금의 제원군 금성 청풍 학송 등지로 옮겨 많은 후손들이 살면서 세천지로 지켜왔고, 11세 이후 일부 자손들이 강원도 영월 등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경북의 의흥과는 하 등의 연고가 없는데 어째서 의흥으로 관적하였는지 알수 없고 도 후손들이 의흥으로 옮긴 사실도 <세보>에 나타나 있지 않는데 1930년도 국세조사에 충북 제원군 금성면에 40호, 경북 군위군 부계면 의흥면 등지에 170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것으로 보아 시조가 왕씨 성을 감추기 위해 외가의 성인 박씨를 따랐다는 족보 서문에 미루어 외가의 성이 의흥 박씨였고 따라서 군위에서 산 의흥박씨는 을규 외가의 후손으로 을규의 계통과는 다른 박씨로 짐작된다.

시조와 2, 3세까지의 묘소가 실전되어 1973년에 제천시 장락동 4세 박근(朴瑾)의 묘역 왼쪽 에 제단비를 세워 매년 향사하고 있다. 이러한 곡절을 지닌 의흥박씨가 관로를 트기 시작한 것은 3세 박득서(朴得瑞)부터이다. 그의 아들 박근은 관계에서 크게 활약하여 의흥박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흥박씨의 시조가 박득서로 되어 있고 또 <의흥박씨세보>에 박근을 <기복종덕지조(基福種德之祖)>라 하여 받들고 있다. 박득서는 운산유학교도를 지냈고, 아들 근은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 세조의 등극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충주목의 판관을 거쳐 성종 때 교하현감 나주목사 영암군수 소격서령 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했다.

박수검(朴守儉)은 의흥박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현종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진주목사 경상병사 예빈시정 등을 지내면서 김수항(金壽恒) 김만중(金萬重) 등과 보사공신 1 등에 책록되었다.

박양한(朴良漢)은 수검의 아들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장으로 안무사를 제수받아 공을 세우고 정려가 명해졌다. 한창 번성해 오던 의흥박씨가 영조조를 고비로 인물을 내지 못해 오늘날 희성의 반열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인제 박씨

중조 박률(朴律)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 君) 언침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인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양박씨에서 분적, 본관을 인제(麟蹄)로 하였다. 그의 손자 박통(朴通)은 고려조에서 영암군에 봉함을 받고 후 에 함경남도 문천으로 들어갔으며, 통의 아들 박광(朴光)은 천호 벼슬 을 지냈다. 그리고 광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조부 춘(椿)에게 출가 한 후 조선이 개국되자 춘은 도조로 추존되고 부인 박씨는 경순왕비로 추존되었다. 그리고 광은 문하시중에 추증, 안변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주 박씨

중조 박언화(朴彦華)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이다. 경명왕이 8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그는 완산대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은 완산(完山)이 전주(全州)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전주로 하였다.

우리 나라 박씨는 모두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주로 경명왕의 아들 8대군 아랫대에 분적되었는데, 이 전주박씨에서도 무안(無顔) 우주(紆州) 순창(淳昌) 평택(平澤) 안남(安南) 등의 박씨가 분적되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주로 함경남북도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입북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조 언화 의 아들 박웅(朴雄)이 고려 개국공신에 올랐고, 증손 박보진(朴輔辰)은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7세손 박혁(朴奕)은 평장사를 지냈다.

정선 박씨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시조가 박지화(朴枝華)라고 되어 있으나 <세보>를 상고하지 못해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박지화 (1513~1592)의 호는 수암(守菴)이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현감을 지냈다. 시문이 고절하고 예서에 박통하여 <수암유고(守菴遺稿)>가 전하며 청안의 구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죽산 박씨

죽산박씨의 시조 박기오(朴奇悟)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으로 계림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죽주백에 개봉되고,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게 되었다.

죽산박씨의 세계는 박기오의 후손에서 철성백<서>파 찬성공<훤>파 태복경<의지>파 문광공<전지>파의 4파로 크게 갈린다.

철성백파의 파조 박서는 고려 고종 때 서북면 병마절도사로 몽고군이 대거 침입할 때 구주성(龜州城)을 사수하고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의 후손에게 음성(陰城)과 고성(固城)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에서 음성박씨와 고성박씨가 분적하게 되었다.

문광공파의 파조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는 문과에 급제, 사국 한림원의 벼슬을 역임.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고려의 양반 자제들을 뽑아 입시시킬 때 선발되어 정동성 도사 가 되었다. 귀국 후 안동부사를 거쳐 전중윤 지제교를 지내고,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삼사 좌사 한림 학사승지 밀직부사 개성부윤 등 을 역임하고 연흥군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 정승에 이르렀다. 충숙왕 때 수첨의찬성사 정당문학을 지내고 경원에 봉해진 문강공(文康公) 박원(朴遠)은 그의 아들이고, 죽산군 문보 문충공 덕룡 판서 수룡 제학 문화 충현공 문수는 모두 박원의 아들이다.

조선조에서는 55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상신, 그리고 호당 1명, 공신 3명을 배출했는데, 문과 급제자의 수는 박씨의 여러 본관 가운데 서 밀양(密陽) 반남(潘南) 함양(咸陽) 고령(高靈) 박씨의 다음가는 숫자이며, 상신 2명은 반남박씨의 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문헌공(文憲公) 만절당(晩節堂) 박원형(朴元亨)은 연흥군 박고의 아들로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직장 의금부 도사 등을 역임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좌승지 겸 지형조사를 거쳐 다음해 사가독서를 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좌익공신 3등이 되고, 여러 판서직을 거쳐 좌의정 에 오르고, 145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으로, 호조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내고, 1466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익대공신 2등으로 연성부원군에 진봉되고, 이어 영의정에도 올랐다. 그는 세종∼예종조에 걸친 충신으로 정승에까지 올랐으며 극히 청렴하고 검소했다. 어느 해 그의 생일날에 아들 정안공(靖 安公) 안성(安城)이 술상을 차려 올리자 그는 기쁘게 마시고 나서 <오늘밤 등불 앞에 몇 순배 술을 드니 너의 나이 서른 둘이라. 우리 집 가보로는 오직 청백뿐이니 부디 잘 전해다오>라는 시를 읊어 후손 을 경계했다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호(梨湖) 박홍구(朴弘耉)는 원형의 5대손으로 광해군 말년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 반정으로 삭직되고 이괄(李 适)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음모했다는 조카 박윤장(朴允章)의 사건 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했으나 숙종 때 신원 복관되었다.

박명현(朴名賢)은 영의정 박원형의 후손으로 선조조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 목사 홍가신(洪可臣)의 휘하에서 반란군을 청양(靑陽)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고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 방어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 면서 전공을 세워 1604년 청난공신 2등이 되고 연창군에 봉해졌다.

충민공(忠愍 公) 박명룡(朴命龍)은 인조조 이괄의 난 때 형 성룡(成龍)과 함께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난이 평정된 뒤 고부 군수 병마우후 등을 지내고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의 방위전에서 전사했다.

이 밖의 인물로는 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죽성군에 봉해졌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갖고 방간(芳幹)측에 가담, 방원(芳遠)과 충돌했다가 참살당한 박포(朴苞), 임진왜란 때 청도 조전장으로 참전하고 뒤에 경상도와 공홍도의 관찰사를 지낸 한천(寒 泉) 박경신(朴慶新), 영조 때의 학자로 경전과 백가에 통달하고 시 서 화에도 능한 만봉(晩峰) 박종유(朴宗儒) 등을 들 수 있다.

진원 박씨

중조 박진문(朴進文)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인 신라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으로 고려조 에 대장군을 지냈다.

본관은 중조 이하 대대로 진원에서 세거하였고, 또 가문을 중흥시킨 박희중이 진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진원(珍原) 으로 하였다.

진원박씨는 고려조에서 특별한 인물을 내지 못하다가 고려가 망할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토반으로 등장했고, 특히 조선 중기의 석학 박광전(朴光前)을 낳아 전남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진원박씨가 고려조에서 세력을 펴지 못했던 원인은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울 때 진원의 관할지인 대전면에서 기병하였고, 또 견훤의 아들 신검(神 劒)의 전설이 아직도 남면(南面)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 지방 토호들이 왕건에 대항한 세력의 중추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고려가 건국된 후 왕건의 미움을 산 이 지방 사람들이 중앙에 진출을 못하게 된 것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중조 진문의 현손 박첨(朴瞻)을 들 수 있다. 그는 고려조에 공을 세워 순충론도 동덕좌명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 우문관 대제학 등을 지내고 익양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박홍서(朴洪瑞)는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홍서의 아들 박온(朴溫)은 구례감무를 지냈다.

진원박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이다. 그의 초명은 희종이었으나 태종이 그의 기국을 중히 여겨 희중으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전라도 경차관이 되어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축조에 크게 기여하여 주민들이 제방 위에 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다. 또 통사가 되어 일본에 가서 국위를 선양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벼슬은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집권자의 권리 남용을 시정,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집권자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강공(文康公) 박광전(朴光前)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왕자사부, 감찰, 현감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에 추대되어 왜적과 맞서 싸웠다. 그의 아들 박근효(朴根孝)는 동생 박근제와 함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합세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인 아버지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근세 인물로는 항일 운동가요, <향교의 제주>사건으로 유명한 양정 (陽亭) 박남현(朴南鉉)을 들 수 있다. 그는 한말 규장각제조를 지냈으며,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후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유림을 탄압할 계략으로 향교의 제주를 밀주라고 취체 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 초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유림계를 탄압하기 위하여 1차로 유림의 집결체인 향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향교제향에 절대 필요한 제주를 밀주라 하여 취체한 일본인 사와다를 그가 선동하여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형형식을 취하세 하고 항일하였다. 이에 분격한 일제는 그를 처형코자 하였으나 그 방대한 유림세력의 위세에 눌려 일보후퇴정책으로 이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방안 으로 일체는 전국 각 향교의 제주를 직접 제조케 허가하였다. 이는 항일운동사상 쾌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애국애족의 정신 이 투철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이며 의병의 자금 조달에 헌신 노력 하였고, 일생 동안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창원 박씨

중조 박령(朴齡)은 시조왕 혁거세의 46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 언침의 17세손이다. 그가 고려 공민왕때 창원도호부사를 지내고 창원군에 봉해진 까닭으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남 마산시 남산에 있다.

창원박씨는 관적지인 창원보다 전라남도 고흥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다. 그 까닭은 증조의 손자인 진사 박동지(朴東智)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세 아들과 함께 지금의 고흥의 속면인 흥양으로 낙향하여 세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흥 일대의 창원박씨 후손들은 그를 입향 중조로 삼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지의 맏아들 박유원(朴由元)을 둘 수 있다. 그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헌납, 예조참의 등을 지내고, 세종 때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당시의 집권자들과 뜻이 맛지 않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를 방유정이라하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박경은 1470년(성종 2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 집의, 군수 등을 지냈다. 박사문은 1702(영조 38) 식년 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지냈다.

춘천 박씨

중조 박항(朴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0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한림원에 보직되고, 충주 목사, 우정언 등을 거쳐 충렬왕 때 승선이 되어 전주를 주관했다. 동지밀직 사사로 왕을 수행, 원나라에 다녀와서 좌명공신으로 춘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참문학사, 찬성사 등을 역임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군기, 군량, 군비를 징발할 때 원나라 원수 흔도와 우승 홍다구 등이 이를 감독하면서 행패를 부리자 왕에게 건의, 원나라 세조에게 글을 올려 왕을 좌승상행중서성사에, 김방경(金方慶)을 정동 도원수에 임명케 하여 흔도와 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게 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일처리가 공명정대했다. 본관은 중조가 봉군된 춘성이 뒤 에 춘천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춘천으로 하였다. 중종의 묘소는 강원도 춘성군 발산리에 있다.

춘천박씨는 고려조에서 성세를 누렸으나 조선조에서는 특출한 인물을 내지 못했고, 문과 급제자도 겨우 3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중조 항의 맏아들 박원굉(朴元宏)이 평장사, 둘째아들 박원비(朴元庇)는판사를 지냈고, 원굉의 아들 박안구(朴安具)는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박광선(朴光先)의 아들 박려(朴旅)가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직강을 지냈고, 박성근(朴聖根)이 1883년 (고종20) 식년문과에 을과로, 박상범(朴尙範)이 1890년(고종27) 경과에 병과로 각각 급제하였다.

충주 박씨

중조 박영(朴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1세손이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대군(沙伐大君) 언창(彦昌)의 12세손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 벼슬은 부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충주가 고구려 때는 국원성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이를 취하여 진흥왕 때 소경을 두어 그 지방의 지배세력이었던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선대부터 토착한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충주박씨는 조선조에서 20명의 문과급제자와 1명의 상신 및 대제학, 그리고 청백리 1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상(朴祥)과 박순 (朴淳)을 들 수 있다.

문간공(文簡公) 박상은 조선 목사를 지냇으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다. 1501년(연산군7) 진사로 문과에 급제, 전라도사 재임시 연산군의 폐희 (嬖姬)의 아버지 우부리를 장살, 대죄했으나 중종반정으로 무사했다. 사간원 헌납 재임시 종친의월자승당을 반대하여 한산군수로 좌천 되었다가 그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호당에 뽑혔다. 응교를 거쳐 담양 부사 재임시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중종반정 후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반정훈신의 추죄를 상소, 권신의 격렬한 반발로 남평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여러 고을의 목사를 지내고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 나주목사로 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평생을 직절강명으로 일관, 귄귀의 배척을 받았으나 기묘사화 때에는 복상중이라서 참화를 면하고 피화자들을 구휼했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성현 (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한문4가>로 일컬어진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충공(文忠公) 박순은 상의 조카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을 거쳐 이조참의, 대제학,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고, 선조 초에 영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직했다. 시, 문, 서에 두루 뛰어났고, 특히 시는 당시의 풍을 따랐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 상의 아우 인 박우는 한성부좌윤을 지냈으며,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이다. 1510년(중종5) 진사로 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역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전횡을 일삼자 자청하여 남원부사로 나갔고, 뒤에 도승지로 있다가 허항(許沆) 등의 모함으로 공주목사로 좌천, 이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병조, 이조참의, 개성유수, 한성좌우윤을 지냈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을 감수, 만년에 전주부윤을 역임했다. 뒤에 도승지, 참의, 동지춘추관사 등을 거쳐 명종 때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고, 성품이 강직하여 권귀의 근질긴 모함을 받았다. 청백리에 녹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희수(朴希壽)는 명종조의 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로 선조조에 음보로 참봉에 등용되어 형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호남에서 박광옥(朴光玉)·고경명(高敬命) 등과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근세 인물로는 <떠나가는 배>의 작가 박용철(朴龍喆)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 외국 문학 소개에 공헌하였고, 이듬해 <신문학지>를 창간 주재했다. 애수, 회의, 상징이 주조를 이룬 섬세한 감각의 시를 썼다. 경향파에 대항, 순수시를 옹호하는 평론을 썼고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신극운동에도 참여했다.

태안 박씨

중조 박원의(朴元義)는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 大君) 언침의 8세손인 삼사좌윤 을재(乙材)의 현손이다. 원의는 고려조에 문과에 장원, 벼슬이 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오르고 태안부 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양박씨에서 분적, 본관을 태안(泰安)으로 하였다. 그 후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 하여 번영을 누려 오다가 8세손 박비가 고흥감무 겸 근농병마 단련판관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송경에서 청산현 동면 대동리로 낙향했다. 그 후 비의 아들 박상덕(朴尙德)이 진주(晉州)로 이거하면서, 둘째아들 자주(自胄)에게 「너는 청산으로 가서 선영을 받들라」하여 자주는 청산에 남게 되었다. 이 때부터 후손이 진주와 청산에 분거 하여진주파·청산파로 갈라졌고, 자주의 둘째아들 일종(一宗)이 정읍 (井邑)으로 이거하여 다시 정읍파를 이루어 3파로 나뉘어졌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안도(朴安道)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으로 맞서 싸우다가 진주에서 전사했다. 호조좌랑에 증직되고, 진주의 충민사에 제향되었다.

박민(朴敏)은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장과 행의가 뛰어난 인물로 정묘호란 때 창의했다. 진주의 정강서원에 제향 되었다.

태인 박씨

중조 박언상(朴彦祥)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 城大君) 언침의 8세손으로 밀양박씨 12파 중 도평의사공파의 파조이다. 그의 8세손 박거인(朴居仁)이 고려 말에 인의(仁義:지금의 태인)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자 그의 증손 박언생이 태인으로 본관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밀양박씨와 통합 하여 도평의사공파 안에 문정공파라 일컫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혜공(貞惠公) 박수량(朴遂良)이 있다. 그는 김개(金漑)의 문인으로 1514년(중종9) 별시문과에 급제, 지평, 승문원 정자 등을 거쳐 장령을 지냈다. 함경도 경차관이 되어 지방 관아를 순시할 때 안원보 권관 김주남(金周男)이 야인들에게 임의로 우마를 주어 불법을 행한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고,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주세붕(周世鵬)과 깊이 교유하여 유림간에 학자로 존경을 받았고, 30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집 한 칸을 장만하지 못할 만큼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박영건(朴永健)은 1514년(중종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정을 지냈다.

평산 박씨

중조 박지윤(朴智胤)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제4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후손으로 전해지지만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벼슬은 삼중대광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한다. 본관을 평산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 수경(守卿)의 딸이 고려 태조의 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지방 토착한 호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조상의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수경(朴守卿), 박인량(朴寅亮), 박경인(朴景仁)을 들 수 있다. 박수경은 중조지윤의 아들로 고려 초 태조를 도와 원윤이 되고 후백제가 자주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진압, 견훤(甄萱)과 조물군(曹物郡)에서 사워 이긴 공으로 원보가 되었으며 발성 싸움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태조를 구출했다. 정종 초에 내란을 평정할 때도 공을 세웠으나 광종 때 아들 3형제가 무고로 체포되자 걱정이 되어 병사했다. 딸은 태조의 비 몽량원부인이 되었다.

문열공(文烈公)박인량은 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요나라가 압록강 동족을 국경으로 삼으려 하자 진정표를 지어 압록강을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 요나라 황제가 그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그 후 예부시랑이 되어 류홍(柳泓), 김근(金覲) 등과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시문으로 크게 격찬을 받아 뒤에 김근의 글을 곁들인 <소화집(少華集)>이 중국인에 의해 발간되기까지 했다. 귀국 후 참지정사로 재임중 죽었다. 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문서를 전담했으며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했다. 또 신라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의 저서로도 알려져 있다.

장간공(章簡公) 박경인(朴景仁)은 예종 때 병마부사가 되어 윤관(尹瓘)의 여진정벌에 참여하였다가 부상당하여 정주(定州)에서 요향중 윤관이 9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그 방비의 불가능함을 들어 극력 반대했다. 전중감직문하로 있을 대 송나라와 의 사신 교환을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국자쇄주를 거쳐 판삼사사에 이르렀다.

평주 박씨

평주박씨는 평산박씨와 동원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혈연 관계를 따지지 못해 평산·평주로 갈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까닭 으로 평주박씨의 중조 박수경(朴守卿)이 평산박씨의 중조 박지윤(朴智 胤)의 아들이고, 또 평주는 평산의 고호로서 관적지가 같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주박씨족보>에 의하면 <중조 박수경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윤이 되고,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태조가 그에게 이를 평정하도록 명했다. 조물성(曹物城)과 발성(勃城)의 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밭 2백 결을 하사받고 광종 때 삼중대광이 되었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그 이상의 세계와 그 이하 박광렴(朴光廉)에 이르기까지의 세계를 상고할 수가 없어서 그를 중조로, 박광렴을 1세조로 하였다.>고 한다.

평택 박씨

중조 박지영(朴之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으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다섯째아들인 사벌대군(沙伐大君) 언창(彦昌)의 후손 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박지영은 조선 태조 때 평택현사를 지내고 그곳에 정착하여 평택으로 관적했다. 그의 아들 박산(朴山)은 조선 초에 이조정랑을 거쳐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1456년(세조2) 함경북도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경원으로 이배당한 후 풀려나지 못해서 자손들이 그곳에 눌러 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후손들이 함경북도 무산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주요 인물로는 사과를 지낸 박준검(朴俊儉), 온성진관 황척파 권관을 지낸 박인규(朴寅奎) 등이 있다. 박규능(朴圭能)은 유일한 문과 급제자 로 1886년(고종2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함양 박씨

함양박씨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 의 셋째아들인 속함대군(速咸大君) 언신(彦信)의 정통 후손이다. 경명왕이 여덟 왕자에게 각기 분봉할 때 셋째 언신이 속함대군에 봉해 졌기 때문에 그를 중조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朴善)을 1세조를 하고, 본관은 속함(速咸) 이 함양(咸陽)의 고호이므로 함양으로 하였다. 1세조의 묘소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사금동에 있다.

함양박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세조 선의 현손 박신유는 고려 고종조에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호남에서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응천군에 봉해졌다. 그에게 여섯 아들이 있어 6파로 갈리는데 첫째 박지문(朴之文)은 검교 군기소감을, 둘째 문원공(文元公) 박지빈(朴之彬)은 위위윤을 지냈다. 셋째 박지량(朴之亮)은 충렬왕조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연합군 의 고려군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휘하 중군병마사로 대마도(對馬島) 를 무찌르고 일기도(壹岐島)를 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의 벼슬을 받았고, 뒤에 판삼사사에 이르렀다. 넷째 박지수(朴之秀)는 밀직부사를, 다섯째 박지온(朴之溫)은 감찰어사를, 여섯째 박지영(朴之 穎)은 금오위 중랑장을 지냈다. 이들 6형제의 6개 파에서 둘째 문원공 파의 수가 제일 많고, 넷째 밀직공파와 함께 인물도 많이 났다.

박장(朴莊)은 문원공 지빈의 아들로 군부총랑을 지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 그의 아우 문양공 박리(朴理)는 충렬왕 때 국자좨주에 이르렀다.

문제공(文齊公) 박충좌(朴忠佐)는 박장의 아들로 충목왕 때 찬성사, 판삼사사를 지냈고 공신으로 함양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청백해서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집과 의복은 선비로 있을 때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박초(朴礎)는 박리의 손자로 고려 말에 척불소를 올려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으며 조선조에 들어 와서 태종 때 이조판서, 대제학에 오른 인물로 세종 때 여진의 침범을 피해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기려는 것을 적극 반대, 국토의 위축을 막았다. 박우는 지수의 아들로 공민왕 때 판삼사사를 지내쏙, 그의 아들 박인계(朴仁桂)는 호부상서를 거쳐 양광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우왕 때 왜구를 무찌르다 전사,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인계의 아들 박원렴(朴 元廉)도 호부상서를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문과 급제자 69명, 호당 2명, 청백리1명, 공신 2명, 장신 1명을 배출했는데 급제자 수는 밀양박씨와 반남박씨에 다음가는 숫자이다.

박습(朴習)은 원렴(元廉)의 손자로 태종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김제의 벽골제를 쌓아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세종 즉위년 병조판서로 <강상인(姜尙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고, 그의 아들 박의손(朴義孫)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함양박씨는 한동안 쇠운 을 맞이한 듯하다가 조선조 중기에 <향오린(鄕五鱗), 경팔립(京八立)>이 나와 활기를 되찾는다. <향오린>이란 함양군(咸陽君) 박전(朴琠)의 6대손 눌(訥)의 다섯 아들인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종린(從鱗)을 말하고, <경팔립>은 박세영(朴世榮)의 세아들 대립(對立), 사립(私立), 희립(希立)과 박세무(朴世茂)의 세 아들 소립(素立), 응립(應立), 성립(成立), 그리고 박세옹의 두 아들 정립(定立), 명립(名立)의 8종항간을 말한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각각 현직에 있으면서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 중 박대립은 의손(義孫)의 현손으로 선조조에 부제학, 대사헌, 형조, 호조, 이조의 판서를 거쳐 좌찬성을 지냈다. 그리고 대립의 아버지 박세영은 중종 때 돈령부 도정으로 글씨를 잘썼고, 세영의 아우 박세무는 군자감정을 지냈으며 초학자가 읽는 <동몽선습(童夢先習)>을 편찬했다.

박세옹 역시 세영의 아우로 한성 좌윤, 참의 등을 지냈으며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했다. 세무의 아들 박소립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박응립은 수안군수를 지냈으며, 응립의 아들 문목공(文穆公) 박지계(朴智誡)는 벼슬이 동부 승지에 그쳤으나 도덕과 학문이 높았다. 박영문(朴英文), 박영창(朴永昌)은 충좌의 5대손으로 종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오르고 함양부원군과 천령군에 각각 봉해졌다.
영창 의 손자 박민헌(朴民獻)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대사헌 , 강원도 관찰사등을 역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중종 때 문과 에 급제, 호당을 거쳐 대사헌을 지낸 박홍린(朴洪鱗), 영조 때 무장 으로 총융사, 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분무공신 박찬신 등도 유명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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