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학봉 김성일할배께서 안경을 썼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인가요?3.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할배는 어디 파인가요?4. 의성김가의 족보위조가 조선후기 많이 있었나요?마지막 민감한 질문 드립니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선조가 김성일할배를 일본에 보내 시찰하고 오라고 했는데, 당시 할배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쥐상이라 하고 조선을 침략할 위인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성일할배가 단지 같이 시찰하러간 서인이 침략할 것 같다고 말한 거에 대해서 동인이고 남인이니깐 반대로 말한 것에 불과한가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요?할배는 대궐의 호랑이? 바른말을 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주성 2차전투에서 몸바쳐 싸운 것은 정말 멋있는 것 같습니다.
답 : 청계 김진(전서공파 청계공)의 2子 김수일(귀봉공)의 후손입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 고(故) 김동삼 선생, 7년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시기 전 남긴 유언
4. 의성김가의 족보위조가 조선후기 많이 있었나요?
답 : 족보위조라는 단어는 민감하기에 사용하지 않는게 옳습니다. 어떠한 경우를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으나, 다만 어느 성씨, 문중이나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욕심으로 관직의 표현이 다소 과장이 되었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배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분의 경우는 과장 할수가 없겠지요. 과거 족보를 만들시기에는 현재와 같이 통신이나 교통이 원할하지 못하였기에 잘못 기술된것이 있다해도 곧바로 고쳐지지 못하였기에 기인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간혹, 생직(살아있을때의 관직)과 증직(돌아가신 후의 증직된 관직)의 경우로 혼돈하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기록이 있으면 둘 다 사용하게 됩니다.
마지막 민감한 질문 드립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선조가 김성일할배를 일본에 보내 시찰하고 오라고 했는데, 당시 할배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쥐상이라 하고 조선을 침략할 위인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성일할배가 단지 같이 시찰하러간 서인이 침략할 것 같다고 말한 거에 대해서 동인이고 남인이니깐 반대로 말한 것에 불과한가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요?
할배는 대궐의 호랑이? 바른말을 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답 : 이 내용은 짧은 말로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만, 당파와 관련되는 몇가지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정치가, 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유를 논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았다" 라는 이론을 성립하고자 한 부분에서 파생되었으며, 일제식민사관(일제강점기와 그 후)에 젖은 역사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그 논거라고 할수 있는데, 실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패망할때 까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학봉선생에 대한 복명 부분을 당파에 근거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1960~70년대 역사 교과서 중 당파와 관련되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그 후 당파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은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국서내용 중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주어야 한다"는 내용과 "조선에서 왜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 등의 잘못된 국서를 바로잡기 위해 학봉선생이 홀로남아 버티고 있는 사이, 정사 황윤길(서인)이 먼저 부산에 도착 후 "일본이 내 발뒤꿈치를 쫒아 침략할 것"이라고 하여 경상좌도를 비롯하여 미리 피난을 하는 등의 민심이 극히 혼란하였기에 선조임금 앞에서 복명시 "나는 왜가 침범하려는 정황을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그 후 서애 유성룡과 율곡 이이(서인) 역시 학봉선생과의 대화록에서 "난들 왜적이 침략하지 않는다고 확신할수 있겠는가? 다만 민심이 흉흉해지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될수 있으므로 그것이 오히려 더 걱정이네" 라는 학봉선생이 소회한 대화록이 서애의 징비록과 율곡의 상소문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이후 왜란발발 후 학봉선생이 초유사(긴급한 사태 발생시 현장에서 그 사태를 관리, 감독, 실행하는)의 직책으로 경상도 관찰사 등으로 각지의 의병 등을 진두지휘 할 때 다른 파‘당의 의병장들이 학봉선생에게 적극 가담, 지휘를 받은 것도 학봉선생은 당색에서 상당부분 벗어나 있음을 알수가 있으며 실제 왜란 전에 반대당파의 신원회복 등을 주창하고 이를 관철시킬 정도로 당파에 기울어져 있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의 사학자들은 학봉선생이야 말로 시대의 애국자라는 평가를 하고 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것을 단순히 왜국의 침략으로 볼게 아니라 왜국의 국내정세와 조선의 국내정세 등을 통한 다양한 각도로 해석을 하는것이 올바른 판단에 주안점입니다.
논개에 대하여논개는 성은 주씨(朱氏)이며 본관은 신안(新安 : 중국지명)으로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 났다.
열네살 때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 건달인 작은 아버지가 그 지방의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사실을 안 논개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는데, 논개 모녀로 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자기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부인이 남편인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159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왜군에게 패하자 남강에 투신하였다. 왜군들이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잔치를 열때 논개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기(관청에 소속된 기생)로 위장하여 참석 왜군장수 게야무라 로구스게(毛谷村六助 모곡촌육조)를 손이 빠지지 않도록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진주시민사회단체에서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쌍가락지의 의미가 담긴 매년 8월8일을 “논개가락지의날"로 지정, 금년도가 14회째 이다.
뿌리를 찾는 분들이 미리 꼭 알아야 할 것은 본인이 의성김씨 "몇대" 손이며 어느 "파"의 자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조차 알수 없다면?..
선대 (부, 조부, 증조부 등)의 諱字(이름)과 살았던 곳(고향)을 알기 위해서는 질문자의 읍.면 동사무소에 가서 제적부를 발급 받아 보시면
국가에서 호적을 만든 이후의 해당 조상분들의 "인적사항과 출생지" 등을 쉽게 확인 하실수 있습니다.(세거지,항렬자,가계도를 찾기 위함)
그러면 이를 단서로 "의성김씨 대동보"를 보고 이름과 대조하여 일일이 찾아야 하며 제적부 상의 이름이 족보의 항렬자로 되어있지 않거나 몇 대손, 어느 파인지 모른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문의 하실 때에 쓰신 실낱같은 자료도 많은 힘이 됩니다)
질문을 하실 때에는 가능한대로 많은 내용을 알려 주셔야 찾을 범위가 줄어 들기에 신속히 찾을수 있으며 정확성을 기대 할수 있습니다. 뿌리를 찾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이럴 것이다?"라는 대답은 자칫 엄청난 오류를 드리게 되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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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봉 김성일할배의 부인이 논개인가요?
답 : 학봉선생의 배위는 안동권씨입니다.
논개는 주씨이며 학봉선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주논개)
2. 학봉 김성일할배께서 안경을 썼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인가요?
답 :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이 맞으며 현재 학봉종가 유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3.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할배는 어디 파인가요?
답 : 청계 김진(전서공파 청계공)의 2子 김수일(귀봉공)의 후손입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 고(故) 김동삼 선생, 7년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시기 전 남긴 유언
4. 의성김가의 족보위조가 조선후기 많이 있었나요?
답 : 족보위조라는 단어는 민감하기에 사용하지 않는게 옳습니다.
어떠한 경우를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으나, 다만 어느 성씨, 문중이나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욕심으로 관직의 표현이 다소 과장이 되었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배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분의 경우는 과장 할수가 없겠지요. 과거 족보를 만들시기에는 현재와 같이 통신이나 교통이 원할하지 못하였기에 잘못 기술된것이 있다해도 곧바로 고쳐지지 못하였기에 기인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간혹, 생직(살아있을때의 관직)과 증직(돌아가신 후의 증직된 관직)의 경우로 혼돈하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기록이 있으면 둘 다 사용하게 됩니다.
마지막 민감한 질문 드립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선조가 김성일할배를 일본에 보내 시찰하고 오라고 했는데, 당시 할배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쥐상이라 하고 조선을 침략할 위인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성일할배가 단지 같이 시찰하러간 서인이 침략할 것 같다고 말한 거에 대해서 동인이고 남인이니깐 반대로 말한 것에 불과한가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요?
할배는 대궐의 호랑이? 바른말을 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답 : 이 내용은 짧은 말로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만, 당파와 관련되는 몇가지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정치가, 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유를 논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았다" 라는 이론을 성립하고자 한 부분에서 파생되었으며, 일제식민사관(일제강점기와 그 후)에 젖은 역사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그 논거라고 할수 있는데, 실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패망할때 까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학봉선생에 대한 복명 부분을 당파에 근거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1960~70년대 역사 교과서 중 당파와 관련되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그 후 당파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은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국서내용 중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주어야 한다"는 내용과 "조선에서 왜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 등의 잘못된 국서를 바로잡기 위해 학봉선생이 홀로남아 버티고 있는 사이, 정사 황윤길(서인)이 먼저 부산에 도착 후 "일본이 내 발뒤꿈치를 쫒아 침략할 것"이라고 하여 경상좌도를 비롯하여 미리 피난을 하는 등의 민심이 극히 혼란하였기에 선조임금 앞에서 복명시 "나는 왜가 침범하려는 정황을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그 후 서애 유성룡과 율곡 이이(서인) 역시 학봉선생과의 대화록에서 "난들 왜적이 침략하지 않는다고 확신할수 있겠는가? 다만 민심이 흉흉해지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될수 있으므로 그것이 오히려 더 걱정이네" 라는 학봉선생이 소회한 대화록이 서애의 징비록과 율곡의 상소문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이후 왜란발발 후 학봉선생이 초유사(긴급한 사태 발생시 현장에서 그 사태를 관리, 감독, 실행하는)의 직책으로 경상도 관찰사 등으로 각지의 의병 등을 진두지휘 할 때 다른 파‘당의 의병장들이 학봉선생에게 적극 가담, 지휘를 받은 것도 학봉선생은 당색에서 상당부분 벗어나 있음을 알수가 있으며 실제 왜란 전에 반대당파의 신원회복 등을 주창하고 이를 관철시킬 정도로 당파에 기울어져 있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의 사학자들은 학봉선생이야 말로 시대의 애국자라는 평가를 하고 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것을 단순히 왜국의 침략으로 볼게 아니라 왜국의 국내정세와 조선의 국내정세 등을 통한 다양한 각도로 해석을 하는것이 올바른 판단에 주안점입니다.
아래의 주소를 찾아 들어가면 학봉선생에 대한 학술발표자료 등을 보실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01098605333
아래 일송 김동삼선생에 대한 가계도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