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봉수라고 합니다.
고향이 충남 태안 원북 마산리 일대이며 의성김씨 집성촌 일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돌림자는 끝자리가 "래"자이며, 아이들은 가운데 "환"자를 씁니다.
아버님의 돌림자는 가운데 "낙"자를 쓰시고, 할아버님께서는 끝자를 "호"자 쓰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모재공파 18대손이라고 들은 거 같은데 찾아보니 없는 거 같아서요.
잘 못 알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확실히 알아야 될꺼 같아 글을 써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수고하세요.
김봉수 종친님!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의성김씨 항열자는 오행(金→水→木→火→土)을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조부님이 호(鎬)자 항열이면 (金)쇠금변으로 시조로 부터 35세이고
아버님이 락(洛)자 항열이면 (水)물수변으로 시조로 부터 36세이며
본인은 래(來)자 항열이면 (木)나무목변으로 시조로 부터 37세이며
아들은 환(煥)자 항열이면 (火) 불화변으로 시조로 부터 38세 입니다.
그리고 의성김씨 世系圖를 보면
시조 석(錫)→일(逸)→홍술(弘術)→국(國)→경진(景珍)→언미(彦美)→습광(襲光)→공우(公瑀)┌용비(龍庇)
├용필(龍弼)
└용주(龍珠)
삼형제분중 김봉수 종친은 차자인 용필선조의 후손이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선조는 용필선조로 부터
11세손 입니다. 김봉수 종친은 모재선조로 부터 18세이며 모재공파 보다는 김안국선조의 시호가 문경
(文敬)으로 홈페이지 계파도에서 문경공파를 찾으시면 됩니다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형제분은 조선의 대유학자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문하생으로
아래에 선생의 약력을 소개 합니다.
주요저서 《모재집》 《창진방》
본관 의성(義城). 자 국경(國卿). 호 모재(慕齋). 시호 문경(文敬).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사림파(士林派)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0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부수찬 ·부교리 등을 지내다가 150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장령(掌令)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거쳐, 15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성리학의 실천 ·보급에 주력하여 각 고을의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보급하고, 각종 농서와 의서(醫書)도 널리 간행하여 향촌민들을 교화시키는 데 힘을 썼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성리학의 실천적 입장을 중시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실각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37년 재등용되어 이후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천문과 병법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드는 방법도 연구하였다. 성리학을 이념으로서만이 아닌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중시한 학자였으나, 조광조와 같은 급격한 정치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인종(仁宗)의 묘정에 배향되고, 여주(驪州) 기천서원(沂川書院), 이천(利川) 설봉서원(雪峰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모재집》, 편서에 《창진방(瘡疹方)》 등이 있다.
김정국(1485-1541) 號 사재, 字 국필(國弼) 諡號 문목(文穆)
아버지는 팔여거사(八餘居士) 연(蓮)이시며 모재 김안국의 아우이시다 김굉필의 문하생으로 중종4년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이조정랑(吏曹正郞), 사간승지(司諫承旨), 1518년 황해도관찰사, 1519년 기묘사화로 삭직(削職)되고
고양(高陽)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
중종 32년 1537년 복관(復官) 1538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여 편민거폐(便民祛弊) 정책시행 1540년 병조참의, 공조참의 경상도관찰사
를 역임한후 신병으로 사직하고 그 후 예조참판을 거처 중종 38년 1538년 전라도관찰사 재직시에 향노(鄕老)들의 경험방을 수집하여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을 편찬 하므로서 궁항벽촌(窮巷僻村)의 향민들에게 질병구료에 심혈을 기울여 의약애민(醫藥愛民)의 선정을 베풀기도 함
장단(長湍)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고 있다.